욥기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하나님의 다스림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가

악인의 천막은 평안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길을 잃는다

욥기 12장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약탈자들의 천막은 평안하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이들에게는 안전이 있네.」 그리고 마지막에는 「땅의 백성 우두머리들에게서 분별력을 거두시고, 길 없는 황무지에서 그들을 헤매게 하시네」라고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가는데, 세상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은 길을 잃고 헤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질서와 어긋나는 모습입니다.

욥은 이 두 장면을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놓습니다. 그는 악인의 번영을 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신다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이 모든 생명을 붙들고 있으며, 하나님이 인간 사회의 가장 강력한 권력과 지혜까지 뒤집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면, 왜 세상은 우리의 도덕적 기대와 다르게 움직입니까?

앞 장에서 초파르는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고 말하면서, 욥이 회개하면 반드시 평안을 되찾으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욥은 그 지혜의 원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친구들의 확신에 도전합니다. 욥의 대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친구들보다 더 멀리까지 생각해 보라고 요구하는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 전체를 둘러보고, 자연 세계를 살피고, 마침내 세상의 모든 질서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시선이 넓어진다고 해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위에 계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12장 본문 읽기 →

지혜가 자네들과 함께 죽겠군

욥기 12:1–3 본문 →

욥은 대답의 첫머리부터 날카로운 반어를 사용합니다.

「참으로 사람이라곤 자네들뿐이로군. 지혜도 자네들과 함께 죽겠군.」욥기 12:2 · 본디새김

‘사람이라곤 자네들뿐’이라는 말은 친구들만이 참된 사람이라는 칭찬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마치 자기들만 지혜를 가진 사람인 양 말하고 있다는 풍자입니다. 이어지는 말은 더욱 신랄합니다. 지혜가 친구들과 함께 죽는다면, 그들이 죽고 난 뒤에는 세상에서 지혜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물론 욥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구들의 지혜가 그들만의 특별한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씁니다. 3절에서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나에게도 자네들처럼 분별력이 있네. 나도 자네들보다 못하지 않네. 이런 것들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인가?」욥기 12:3 · 본디새김

욥은 자신에게도 사물을 판단할 지성이 있으며, 친구들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원리를 거듭 설명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 원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혜로우시다는 사실, 악을 미워하신다는 사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욥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것으로 욥에게 일어난 재난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가르치는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로부터 친구들이 끌어내는 결론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자연 세계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욥이 짐승들에게 물어보라고 말하는 까닭은, 친구들이 특별한 지혜라고 제시하는 것 가운데 상당 부분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모두가 아는 일반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에서 ‘분별력’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레바브(⁨לֵבָב⁩), 곧 ‘마음’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음은 감정뿐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능력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욥이 자신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도 감정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웃음거리가 된 의로운 사람

욥기 12:4–6 본문 →

욥은 곧바로 자신이 겪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분의 응답을 받던 내가 친구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네. 의롭고 온전한 사람이 웃음거리라네.」욥기 12:4 · 본디새김

욥기 1장 1절은 욥을 온전하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1장 8절과 2장 3절에서는 하나님도 욥의 이러한 성품을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욥이 자신을 ‘의롭고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때, 독자는 그것이 단순한 자기변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욥의 표현을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주장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이 지금 설명하기 어려운 파멸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더욱 아픈 것은 그가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욥은 예전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응답을 경험했던 사람으로 자신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 호소해도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합니다. ‘웃음거리’라는 말이 한 절 안에 두 번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모욕을 강조합니다.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은 욥은 이제 자기 삶의 의미를 설명할 자격마저 의심받고 있습니다.

5절에서 욥은 그 경험을 일반적인 관찰로 넓힙니다.

「안락한 이의 생각에는 재앙을 당한 이를 향한 멸시가 있네. 발이 휘청이는 이들에게 그 멸시가 마련되어 있네.」욥기 12:5 · 본디새김

안락한 사람에게는 재앙이 자기 삶을 위협하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는 재앙을 겪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반면 발이 휘청이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멸시입니다.

안전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자신이 올바르다는 증거로 여겨질 때, 불안정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쉽게 잘못된 사람으로 판단됩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보고 그에게 어떤 죄가 있는지 찾으려 하지만, 욥에게 그들의 판단은 이미 휘청이는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멸시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뜻밖의 대조가 나타납니다.

「약탈자들의 천막은 평안하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이들에게는 안전이 있네. 자기 손에 신을 들고 오는 사람에게도 그러하네.」욥기 12:6 · 본디새김

친구들은 바르게 살아야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이 관찰하는 세상에는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천막도 평안합니다. 앞 장에서 초파르는 욥에게 자기 천막에서 불의를 없애라고 권면했습니다(11:14). 그렇게 하면 안전하게 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평안한 천막이 반드시 의로운 주인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절 마지막 표현에는 번역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처럼 자기 손에 신을 들고 오는 사람으로 읽으면, 자신이 의지하는 신을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 혹은 자기 손의 힘을 신처럼 여기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무엇인가를 넘겨주신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의 두 행은 분명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노하게 할 만한 행동을 하면서도 안정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악인이 반드시 행복하며 의인이 반드시 불행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친구들이 제시한 보응의 원리가 현실의 모든 경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현재의 형편만으로 한 사람의 의로움이나 죄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바로 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히브리어 첫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재앙’으로 읽는 표현을 ‘횃불’과 연결하는 독법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처럼 읽으면 안락한 사람과 발이 휘청이는 사람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6절의 문제는 뒤에 욥기 21장에서 더욱 길게 전개됩니다. 악인들이 오래 살고 세력을 얻으며 평안하게 죽는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지혜 전통은 일반적으로 지혜로운 삶이 좋은 열매를 맺고 악한 행동이 파멸을 가져온다고 가르칩니다. 잠언 10장과 11장에는 이러한 원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전도서 7장 15절에서는 의인이 의로움 가운데 멸망하고 악인이 악을 행하면서도 오래 사는 현실이 관찰됩니다. 시편 73편에서도 악인들이 평안하고 형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시인의 신앙에 깊은 질문을 일으킵니다(73:3–12). 이 본문들은 서로를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이 지혜로운 삶의 일반적인 원리를 가르친다면, 욥기와 전도서 및 여러 탄식시는 그 원리가 모든 개별 사건의 결과를 예측하는 법칙처럼 사용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짐승들에게 물어보게

욥기 12:7–10 본문 →

이제 욥은 친구들에게 뜻밖의 선생들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자네, 짐승들에게 한번 물어보게. 그것들이 자네를 가르칠 것이네. 하늘의 새들에게 물어보게. 그것들이 자네에게 알려 줄 것이네.」욥기 12:7 · 본디새김

이어서 「땅에 말을 걸어 보게」 「바다의 물고기들도 자네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네」라고 말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책이나 현자를 찾아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를 독점한 듯이 말하는 그들에게 가장 평범한 피조세계로 가 보라고 합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정도의 지식이라면 짐승과 새, 땅과 물고기에게 물어보아도 알 수 있다고 응수합니다. 자연 세계 자체가 인간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손이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누구겠나?」욥기 12:9 · 본디새김

이 자리에서 욥이 추상적인 자연의 힘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만물의 주권자로 말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여호와야훼의 손이 이 일을 하셨다’는 말에서 ‘이 일’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문맥에서는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더 넓게 읽으면 욥이 관찰하는 세상의 불균형과 자기 고난도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 있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에 모든 살아 있는 것의 목숨이 있고, 살을 지닌 모든 사람의 숨이 있네.」욥기 12:10 · 본디새김

9절과 10절은 ‘손’이라는 표현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손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손이며,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손입니다. ‘목숨’은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 자체를, ‘숨’은 바람이나 호흡, 생명의 기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 표현은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짐승의 생명도, 사람의 숨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지금 강조하는 뜻은 단순히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고백에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님의 손과 무관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긴장은 오히려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손이 모든 생명을 붙들고 있다면, 왜 어떤 사람은 평안하고 어떤 사람은 파멸합니까? 왜 약탈자는 안전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해 온 욥은 이런 고통을 겪습니까? 욥은 자연 세계를 통해 그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 위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고난의 원인을 단순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믿음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욥의 말을 친구들의 주장과 똑같은 것으로 읽게 됩니다. 둘 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만, 그 주권을 말하는 자리와 목적이 다릅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의 대화 부분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명칭이 사용되는데, 12장 9절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가 나타납니다. 욥기 서문의 서술에서도 사용된 이름입니다(1:6–12, 1:21). 이러한 이름의 사용만으로 특별한 신학적 의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0절의 ‘목숨’은 히브리어 네페쉬(⁨נֶפֶשׁ⁩), ‘숨’은 루아흐(⁨רוּחַ⁩)입니다. 이 절은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장면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생명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어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귀는 말을 가려내고 입천장은 음식을 맛본다

욥기 12:11–13 본문 →

욥은 자연 세계의 이야기에서 다시 인간의 판단 능력으로 돌아옵니다.

「귀가 말을 가려내고, 입천장이 제 먹을 것을 맛보지 않는가?」욥기 12:11 · 본디새김

입천장은 음식의 맛을 구별합니다. 어떤 음식이 달고 어떤 음식이 쓰며, 무엇을 먹을 만한지 판단합니다. 말이 귀에 들린다는 사실만으로 그 말이 참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는 들은 말을 가려내고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은 친구들의 주장을 듣는 욥 자신의 태도를 설명합니다. 그는 들은 말을 충분히 살펴보고,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과 맞는지 판단하고 있습니다.

입천장이 음식을 맛보듯, 인간의 지성도 말을 분별해야 합니다.

12절에서는 전통적인 지혜의 원리가 등장합니다.

「나이 든 이들에게 지혜가 있고, 긴 세월에 분별이 있네.」욥기 12:12 · 본디새김

나이와 경험이 지혜를 길러 준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 말을 곧바로 13절과 연결합니다.

「그분께 지혜와 힘이 있고, 그분께 계책과 분별이 있네.」욥기 12:13 · 본디새김

12절의 ‘나이 든 이들에게 지혜가 있다’는 문장과 13절의 ‘그분께 지혜가 있다’는 문장이 서로 마주 섭니다.

12절을 친구들이 내세우는 전통적인 생각의 인용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욥 자신도 오랜 경험에 지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지혜의 근원을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한쪽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절의 대조가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오랜 경험이 지혜를 제공할 수 있지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다스리는 지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경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행동을 모두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친구들은 자기들이 배운 지혜를 토대로 하나님의 행동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지혜가 있다는 고백은 인간이 가진 지혜가 언제나 하나님의 실제 행동을 정확히 설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차이는 다음 단락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나이와 지혜를 잇는 말은 욥기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엘리바스는 자기편에 나이 많은 현자들이 있다고 말하며(15:10), 뒤에 등장하는 엘리후는 자신이 젊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먼저 말하도록 기다렸다고 설명합니다(32:6–7). 욥기 28장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다룹니다. 사람은 땅속 깊은 곳에서 귀한 보석과 광물을 찾아낼 수 있지만,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는 쉽게 찾아내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지혜의 길을 아시며,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길이 제시됩니다(28:12–28).

하나님이 허무시면 다시 세울 수 없다

욥기 12:14–16 본문 →

「보게, 그분이 허무시면 다시 세워지지 않고, 사람을 가두시면 열리지 않네.」욥기 12:14 · 본디새김

이제 욥의 말에는 일련의 강력한 동사들이 등장합니다.

허무십니다. 가두십니다. 물을 막으십니다. 풀어 보내십니다.

이 동작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건축물이나 제도가 아무리 굳건해 보여도 하나님이 허무시면 인간은 그것을 제힘으로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가두시면 아무도 마음대로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안정적이라고 여기는 구조도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보게, 그분이 물을 막으시면 물이 마르고, 물을 풀어 보내시면 물이 땅을 뒤엎네.」욥기 12:15 · 본디새김

물이 부족하면 땅이 마르고 생명이 위협받습니다. 물이 지나치게 많으면 홍수가 일어나 삶의 터전을 삼킵니다. 이 두 상황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욥은 둘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습니다.

그런데 욥은 여기서 특별한 가뭄이나 홍수가 어떤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고 판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에게 이로운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강하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힘이 자신에게 어떤 이유로 고통을 가져왔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16절에서는 그 긴장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분께 능력과 참된 지혜가 있고, 잘못에 빠진 이와 잘못에 빠뜨리는 이가 모두 그분께 속하네.」욥기 12:16 · 본디새김

인간은 흔히 속임을 당한 사람과 속임을 행하는 사람을 서로 반대편에 놓습니다. 한쪽은 무지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거짓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은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하나님이 모든 거짓과 기만을 직접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인간의 거짓된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에 속는 사람도,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과 인간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의 선한 의도로 곧장 설명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욥은 악을 행하는 사람조차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악이 왜 허용되고 있는지를 자신이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욥의 주장은 거기까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강한 사람이 무너질 때

욥기 12:17–21 본문 →

욥은 이제 인간 사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불러냅니다.

「그분은 조언자들을 맨발로 끌고 가시고, 재판관들을 어리석게 만드시네.」욥기 12:17 · 본디새김

조언자는 지도자에게 판단과 계책을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재판관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결하는 사람입니다. 둘 다 다른 사람보다 판단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자리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존경과 권위를 누리던 이들이 이제 자신의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처지로 끌려갑니다.

「왕들이 매어 놓은 결박을 푸시고, 그들의 허리에 허리띠를 매시네.」욥기 12:18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세부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첫 행의 ‘결박’은 왕들이 다른 사람을 얽매는 권력을 나타낼 수 있고, 왕 자신을 매고 있는 결박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행의 허리띠 역시 그들이 입는 의복이나 속박의 상태와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맥과 함께 읽으면 하나님이 왕의 권위를 해체하시고 그의 처지를 바꾸신다는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제사장들을 맨발로 끌고 가시고, 굳건한 이들을 넘어뜨리시네.」욥기 12:19 · 본디새김
「신뢰받는 이들에게서 말을 거두시고, 노인들의 판단력을 빼앗으시네.」욥기 12:20 · 본디새김
「귀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고, 강한 이들의 허리띠를 느슨하게 푸시네.」욥기 12:21 · 본디새김

왕은 통치할 권력을 가지고, 제사장은 종교적 직무를 수행합니다. 재판관은 판결할 권위를 지니고, 조언자는 지혜로운 말로 인정받습니다. 노인은 경험에서 얻은 분별력을 가지고, 귀족과 강한 사람은 지위와 힘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욥의 묘사에서는 그들이 의지하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집니다.

말은 지혜로운 사람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초파르도 엘리바스도 빌닷도 말로써 욥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을 거두시면, 사람들에게 신뢰받던 이도 더 이상 적절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판단력과 설득력도 언제든 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21절의 ‘멸시’는 앞서 5절에서 등장한 표현과 연결됩니다. 5절에서는 안락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하나님이 귀족들에게 멸시를 쏟으십니다.

인간이 가진 안정과 지위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모든 권력자의 몰락이 반드시 그 사람의 구체적인 죄 때문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욥의 논점은 높은 지위와 뛰어난 지혜가 하나님의 통치를 제한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욥의 말은 다시 친구들을 향합니다. 그들은 오랜 경험과 전통적인 지혜를 가지고 욥의 삶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욥이 열거한 사람들처럼, 그들의 판단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한계를 지닙니다.

조금 더 깊이

‘맨발로 끌고 가시고’는 약탈당하거나 벗겨진 상태와 관계되는 말로, 수치스럽게 끌려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맨발의 모습에 초점을 둘 수도 있고, 옷이나 지위를 빼앗긴 상태에 무게를 둘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표현이 17절의 조언자와 19절의 제사장에게 반복됩니다.

어둠을 밝히시는 하나님, 어둠 속을 헤매는 지도자들

욥기 12:22–25 본문 →

22절에서는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어둠 속에서 깊은 것들을 드러내시고, 죽음의 그늘을 빛 가운데로 끌어내시네.」욥기 12:22 · 본디새김

어둠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공간입니다.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쉽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 경계가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욥기 11장에서 초파르는 하나님의 지혜에 숨겨진 것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11:6). 이제 욥은 그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욥이 하나님이 모든 비밀을 인간에게 알려 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아시며, 원하시면 감추어진 것까지 드러내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사정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고난을 이해할 만한 답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사실과 지금 욥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23절에서는 시선이 개인과 권력자를 넘어 민족들의 역사로 넓어집니다.

「민족들을 크게 하셨다가 멸하시고, 민족들을 널리 퍼뜨리셨다가 이끌어 가시네.」욥기 12:23 · 본디새김

욥의 관심은 어떤 특정한 민족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영속적이라고 생각하는 집단과 제도조차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나라가 강대해지면 사람들은 그 나라가 계속 강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세력을 얻은 나라는 쇠퇴할 수도 있고, 넓어진 영토는 다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관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땅의 백성 우두머리들에게서 분별력을 거두시고, 길 없는 황무지에서 그들을 헤매게 하시네.」욥기 12:24 · 본디새김
「그들은 빛도 없이 어둠을 더듬고, 그분은 그들을 술 취한 사람처럼 헤매게 하시네.」욥기 12:25 · 본디새김

본문 마지막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평범한 길손들이 아닙니다.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라면 다른 사람에게 길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위험한 곳을 지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22절에서 하나님은 어둠 속의 깊은 것을 드러내시고 죽음의 그늘을 빛 가운데로 끌어내십니다. 그런데 25절에서 지도자들은 빛도 없이 어둠을 더듬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실 수 있지만, 인간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자리에서도 어둠 속을 헤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지혜를 빛에 비유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욥이 묘사하는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도 길을 잃습니다. 권력자도 판단력을 잃고, 지도자도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립니다.

처음에 욥은 친구들이 자기들만 지혜롭다고 생각한다고 비꼬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장 지혜롭고 강한 사람들조차 길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지혜가 문제인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 마지막 ‘이끌어 가시네’는 방향을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앞 행과의 대조 때문에 흩으시거나 포로로 이끄시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지만, 동사 자체는 인도하고 이끌어 간다는 뜻을 지닙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이 그 방향을 열어 둔 것은 원문의 여지를 보존하는 번역입니다. 이 절은 다니엘서 2장 21절에서 하나님이 왕들을 폐하시고 세우신다고 고백하는 내용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24절의 장면은 시편 107편 40절과도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귀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고, 길 없는 황무지에서 그들을 헤매게 하십니다. 두 본문의 표현은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어느 본문이 다른 본문을 직접 인용했는지는 이 유사성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길을 잃은 사람들

욥기 12:1–25 본문 →

욥기 12장은 친구들에게서 시작하여 세상의 지도자들에게서 끝납니다. 그 사이에서 욥은 하나님에 관해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붙듭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과 세상의 질서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질서가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한다면 자신에게 일어난 재난을 그저 무의미한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모든 일이 인간에게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친구들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고 인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길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확정하여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발언에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두려움과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항의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재난이 닥쳤다고 해서 그가 특별히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평안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도 아닙니다. 욥은 아직 이해되지 않는 일을 이해되지 않는 상태로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이어지는 13장에서 그는 직접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아뢰려 합니다(13:3).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한 끝에 욥이 보여 주는 장면은 황무지입니다.

백성을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 길 없는 곳을 헤맵니다. 그들에게는 분별력이 없고, 주변에는 빛도 없습니다.

그들은 손을 내밀어 어둠을 더듬습니다. 한 걸음을 내디뎌도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릴 뿐입니다.

그 황무지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길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모르면서도 자신이 길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