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모든 것을 잃은 욥

고통 앞에서 무엇을 붙들 수 있는가

욥기 2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네 사람이 등장합니다. 온몸에 종기가 난 욥과 멀리서 찾아온 세 친구입니다. 그들은 땅바닥에 앉아 일곱 날과 일곱 밤을 보냅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침묵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앞에서 너무 많은 말이 오갔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는 고발자가 욥의 신앙을 의심했고, 땅에서는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말했습니다. 욥도 아내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도착하자 이야기는 길고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갑니다.

욥기 2장은 고난을 설명하는 말보다, 고난 앞에서 사람이 어떤 태도로 서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1장에서 고발자는 욥이 가진 모든 것을 잃으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고발자는 문제를 다시 제기합니다. 재산과 가족을 잃은 것과 자기 몸이 무너지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장에서 더 깊어지는 것은 욥의 고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이 아무 까닭 없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시고, 욥의 아내는 그에게 온전함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친구들은 그의 고통을 보고 어떤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야기는 점점 한 가지 질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고난을 이해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을 때, 인간은 무엇을 붙들 수 있는가요?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52장 본문 읽기 →

「아무 까닭 없이」 — 하나님의 뜻밖의 말씀

욥기 2:1–3 본문 →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2장은 1장의 하늘 장면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야훼 앞에 서고, 고발자가 등장하며, 여호와야훼는 그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십니다. 고발자의 대답도 같습니다. 땅을 두루 돌아다니다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가 욥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가 고발자에게 말했다.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땅에는 그 같은 사람이 없다. 그는 온전하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 사는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자기 온전함을 굳게 붙들고 있다. 네가 아무 까닭 없이 그를 삼키라고 나를 부추겼는데도 말이다.」욥기 2:3 · 본디새김

앞서 하나님은 욥이 온전하고 올곧은 사람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평가에 새로운 사실이 더해집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자신의 온전함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온전함’은 욥을 묘사한 ‘온전하다’라는 말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인격의 성실함, 흠잡을 데 없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특히 3절의 ‘굳게 붙들고 있다’는 표현은 욥이 자신의 온전함을 계속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욥이 모든 것을 잃고도 침착하게 행동했다고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욥의 신앙과 인격이 극심한 상실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평가하십니다.

고발자는 계속해서 욥의 속마음을 의심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욥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말씀하십니다. 욥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지만, 욥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무 까닭 없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먼저 ‘아무 까닭 없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힌남(⁨חִנָּם⁩)은 1:9에서 고발자가 사용한 말과 같습니다. 고발자는 「욥이 아무 대가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욥이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당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구절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다르지만, 같은 낱말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고발자는 욥의 신앙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욥은 복을 얻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고발자는 욥의 신앙에서 숨겨진 대가를 찾으려 했지만, 하나님은 욥의 고난에서 그것을 정당화할 잘못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잘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충돌합니다. 물론 ‘아무 까닭 없이’라는 표현이 이 사건에는 어떤 목적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까지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욥이 이러한 재난을 당할 만한 잘못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고발자가 자신을 ‘부추겼다’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욥을 ‘삼키라’는 표현까지 사용하십니다. ‘삼키다’는 파괴하거나 집어삼키는 행동을 나타내는 강한 동사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단지 멀리서 재난을 지켜보셨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고발자의 부추김과 하나님의 허락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 안에서 연결합니다.

본문은 고발자가 욥을 해치도록 부추겼다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여호와야훼가 그 부추김의 대상이셨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이를 허락하셨는지, 그러한 허락과 하나님의 의로움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긴장을 너무 일찍 해소해서는 안 됩니다.

욥기 2장은 하나님을 악의 직접적인 실행자로 단순화하지도 않고, 고난의 발생과 아무 관계가 없는 방관자로 그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욥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욥기의 질문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모습은 시편의 탄식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44:17–22에서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언약을 배반하지 않았는데도 고난을 겪는 백성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죄에 대한 당연한 보응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합니다.

「가죽 대신 가죽」 — 고통은 몸으로 들어온다

욥기 2:4–8 본문 →

고발자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욥의 온전함을 확인하시자 고발자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습니다.

고발자가 여호와야훼에게 대답했다. 「가죽 대신 가죽입니다. 사람은 자기 목숨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내놓습니다.」욥기 2:4 · 본디새김

‘가죽 대신 가죽’이라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는 문자 그대로 두 번의 ‘가죽’을 교환 관계로 연결합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피부를 지키기 위해 다른 가죽을 내놓는다는 비유로 읽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손실과 보상의 교환이라는 의미를 좀 더 넓게 읽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어지는 문장이 고발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고발자는 욥의 앞선 반응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욥의 진정한 신앙을 증명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직 자기 생명은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고발자의 논리는 더욱 냉혹해집니다.

욥은 이미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고발자는 그 상실마저 욥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감수할 수 있는 손해처럼 취급합니다.

이것은 고발자가 욥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여 줍니다. 고발자의 눈에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가족과 재산을 잃어도 자기 몸이 안전한 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발자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잃어버린 관계 때문에 얼마나 깊이 고통받는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생존을 위한 계산으로 환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욥의 몸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부디 손을 뻗어 그의 뼈와 살을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욥기 2:5 · 본디새김

‘뼈와 살’은 인간의 몸 자체를 가리킵니다. 고통을 몸 바깥의 세계에 머물게 하지 말고 욥의 몸속으로 들여보내라는 요청입니다. 이번에는 욥이 가진 것을 빼앗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욥 자신이 고통을 겪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숨을 보존하라는 명령이 고통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

여호와야훼가 고발자에게 말했다. 「보아라. 그가 네 손에 있다. 다만 그의 목숨만은 살려 두어라.」욥기 2:6 · 본디새김

하나님은 다시 한계를 정하십니다. 하지만 이번 허락의 범위는 욥 자신입니다. 이전에 보호받았던 그의 몸이 이제 고발자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것과 고통에서 보호받는 것은 다릅니다.

7절에서 고발자는 욥을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심한 종기로 칩니다. 몸 전체를 가리키는 이 표현은 욥이 피할 수 있는 부위가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는 부분적인 통증이나 일시적인 불편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몸 전체가 고통의 장소가 됩니다.

8절은 욥의 상황을 아주 작은 행동으로 압축합니다.

욥은 자기 몸을 긁으려고 질그릇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는 재 속에 앉아 있었다.욥기 2:8 · 본디새김

질그릇 조각은 깨진 그릇의 파편입니다. 이 짧은 장면에는 앞의 장대한 재산 목록과 정반대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수천 마리의 가축과 수많은 일꾼을 거느리던 사람이 이제 깨진 그릇 조각 하나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몸을 긁어야 할 만큼 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재는 구약에서 애통과 낮아짐을 나타내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그가 재 속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그의 몸과 삶이 얼마나 낮아진 상태에 놓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욥은 자기 삶을 설명할 말을 찾기도 전에, 깨진 질그릇 조각으로 아픈 몸을 긁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제기된 질문은 이제 추상적인 신학 논쟁이 아닙니다. 한 인간의 몸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종기’에 해당하는 낱말은 출애굽기 9:9–11에서 이집트에 내린 재앙과 신명기 28:27, 35에서도 등장합니다. 특히 신명기 28:35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생기는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욥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다만 이러한 표현이 있다고 해서 욥의 질병을 특정한 현대 의학적 병명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질병의 원인이나 진단명이 아니라 고통의 범위와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그에게 어떤 약이나 치료가 제공되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질그릇 조각이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통증이나 가려움을 잠시 완화하려는 것이었는지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나 3:6에서는 니느웨 왕이 왕좌에서 내려와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습니다. 재가 실제로 어디에 쌓여 있었는지, 욥이 마을 밖에 있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온전함을 붙들고 있나요?」 — 아내의 말

욥기 2:9–10 본문 →

아내 역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다

욥이 재 속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말을 건넵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온전함을 굳게 붙들고 있나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요.」욥기 2:9 · 본디새김

욥의 아내는 이 장에서 처음으로 직접 말합니다.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는 욥의 고난을 함께 겪은 사람입니다.

죽은 열 명의 자녀는 욥의 자녀인 동시에 그의 자녀이기도 합니다. 집안의 모든 재산을 잃은 일 역시 그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편의 몸마저 심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내가 이 모든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의 울음이나 애도, 마음속의 생각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직 남편에게 건넨 한마디만 전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처음부터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거나, 고발자의 의도를 알고 행동하는 인물처럼 이해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히브리어 본문만으로도 아내가 깊은 상실을 겪은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 상실이 어떤 마음으로 지금의 말을 하게 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은 고발자의 요구와 일치합니다. 고발자는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아내는 바로 그 일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렇지만 이 일치가 아내가 고발자의 직접적인 도구로 행동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 둘 사이에 어떤 접촉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만이 아닙니다. 욥에게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내는 욥의 고통보다 그의 온전함을 문제 삼는다

아내의 첫마디는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온전함을 굳게 붙들고 있나요?」입니다. 이것은 3절에서 여호와야훼가 사용하신 표현과 거의 같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여전히 자신의 온전함을 굳게 붙들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내는 바로 그 온전함을 언제까지 붙들 것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긍정하신 것을 아내는 문제 삼는 셈입니다.

물론 아내의 반응을 이해할 만한 이유는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곧게 살아온 결과가 지금과 같은 고통이라면, 왜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내의 말에는 이러한 항의가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욥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죽기를 바랐는지,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는지, 신앙을 버리라는 절망적인 권유였는지는 본문만으로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욥에게는 이것이 또 하나의 고통이 됩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계속 붙들어야 하는지 질문받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욥의 이름을 부르며 위로하는 대신, 그의 온전함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욥은 아내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는가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들 가운데 하나처럼 말하는군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면서, 나쁜 것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욥은 자기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욥기 2:10 · 본디새김

그는 아내 자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규정하기보다, 그가 어리석은 여자들 가운데 하나처럼 말한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어리석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단순히 지능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삶에 관한 판단이 어긋난 태도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시편 14:1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도 같은 어근의 낱말로 표현됩니다. 욥은 아내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 아내의 전 인격을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는 반문을 던집니다. 이 반문은 욥기 2장의 중심에 놓인 고백입니다.

이 문맥에서 ‘나쁜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이라기보다, 인간에게 닥치는 재난이나 불행을 가리킵니다. 욥은 선행과 악행이 똑같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누리는 좋은 삶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욥은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두 사람이 함께 겪은 삶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좋은 것들을 누렸고, 이제 함께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러한 삶을 하나님의 주권과 분리해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반문이 모든 고난을 아무 질문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지금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 일을 허락하셨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좋은 것을 받을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쁜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버리는 태도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욥은 고난을 좋은 것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나쁜 일이 닥쳤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자신의 고통이 정당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자기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10절의 마지막 문장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욥은 자기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1장의 결말과 닮았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고발자가 예측했던 것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내 역시 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입술에서는 그러한 저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욥의 모든 생각과 감정이 평온했다고까지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에게 분노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입술로’라는 표현이 욥의 마음속에는 이미 죄가 있었다는 암시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구절은 우선 지금까지 욥이 말한 것에 대한 평가입니다.

욥이 저주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욥에게 아무 질문도 없다는 것은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욥기에서 앞으로 등장할 탄식과 질문을 읽을 준비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9절에서 히브리어 본문보다 훨씬 긴 아내의 발언을 전합니다. 거기에서 아내는 잃어버린 자녀들, 자신이 겪은 고생, 무너진 생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없는 이러한 내용은 원래의 짧은 발언을 이해하는 역사적 읽기의 한 사례이지만, 그것을 히브리어 본문에 실제로 기록된 사실로 옮겨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의 고통이 매우 심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 세 친구의 침묵

욥기 2:11–13 본문 →

친구들이 찾아온 이유는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2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세 친구가 등장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이들의 출신지보다 그들이 욥에게 온 이유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그에게 닥친 이 모든 재앙을 듣고 저마다 자기 고장에서 왔다. 그들은 테만 사람 엘리파즈와 슈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초파르였다. 그들은 욥을 찾아가 그의 슬픔을 나누고 그를 위로하려고 함께 만나기로 한 터였다.욥기 2:11 · 본디새김

우연히 그를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고, 의도적으로 욥을 찾아왔습니다.

이후 욥기에서 세 친구는 욥과 날카로운 논쟁을 벌입니다. 그들의 말에는 욥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당하게 판단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들이 거짓된 마음으로 욥을 찾아왔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적어도 2장에서 그들은 고통받는 친구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먼 길을 찾아올 만큼 욥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함께 그의 곁에 머물 만큼 그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멀리서 눈을 들어 보았으나 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울고, 저마다 자기 겉옷을 찢고, 자기들 머리 위로 하늘을 향해 흙먼지를 던졌다.욥기 2:12 · 본디새김

고발자는 욥의 ‘뼈와 살’을 치라고 요구했습니다. 실제로 욥은 온몸에 심한 종기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친구들의 반응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멀리서 바라보는 순간 그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 장면은 욥의 고난이 단순히 몸 안에서 느끼는 통증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까지 달라졌습니다.

욥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던 외적인 표지들이 하나씩 사라진 것입니다. 많은 가축을 거느리던 부자의 모습도, 가족에게 둘러싸여 살던 아버지의 모습도 이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의 친구들 앞에는 재 속에 앉아 있는 병든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 사람을 보고 외면하거나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울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말하기 전에 그와 함께 운다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보자 곧바로 설명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소리 높여 울고, 옷을 찢고, 머리 위로 흙먼지를 던지는 행동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깊은 슬픔과 애통을 표현할 때 나타납니다.

욥은 자녀들의 죽음을 들었을 때 자기 겉옷을 찢었습니다. 이제 친구들도 욥을 보고 자기들의 겉옷을 찢습니다. 욥이 자기 상실을 표현한 행동을 친구들이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들이 욥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욥과 똑같은 일을 겪지 않았고, 그의 몸이 느끼는 고통을 직접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욥의 슬픔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을 설명하기 전에,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인정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람은 흔히 무언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처음 한 일은 어떤 설명이나 충고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의 처지를 보고 함께 울었습니다.

일곱 날과 일곱 밤의 침묵

13절은 욥기 2장을 마감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욥과 함께 땅바닥에 일곱 날과 일곱 밤을 앉아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매우 심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욥기 2:13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욥기의 앞선 이야기와 전혀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1장에서는 전령들이 쉬지 않고 들어와 재난을 알렸습니다. 앞의 전령이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다음 전령이 나타났습니다. 한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고통스러운 소식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욥에게 할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욥이 겪는 고통이 보통의 말로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일곱 날은 구약에서 애도와 연결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보낸 일곱 날과 일곱 밤은 이러한 애도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욥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마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처럼 그 곁에 앉아 있습니다. 욥의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는 살아 있지만, 이전에 누리던 삶의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이제 몸의 고통까지 더해져 친구들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욥을 멀리서 보고 울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방문하여 위로의 말을 건넨 뒤 떠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욥이 앉아 있는 바로 그 땅바닥에 함께 앉습니다.

욥은 재 속에 앉아 있고, 친구들은 그의 곁에 땅바닥에 앉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같은 공간에 머무릅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을 없애 주지 못하지만, 그 고통 속에 있는 욥을 혼자 남겨 두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세 친구의 정확한 출신지를 모두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테만은 에돔과 관련된 지역명으로 구약에 등장하며, 예레미야 49:7에서는 에돔과 테만의 지혜가 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단서만으로 세 친구의 상세한 신분이나 배경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확히 어떤 신체적 변화 때문에 친구들이 욥을 알아보지 못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종기로 얼굴이 얼마나 변했는지, 욥이 어떤 자세로 앉아 있었는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7:6에서도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옷을 찢고 머리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50:10에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위해 일곱 날 동안 애도합니다. 사무엘상 31:13에서도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장사한 뒤 일곱 날 동안 금식합니다.

재 속에 앉은 네 사람

욥기 2:1–13 본문 →

욥기 2장은 하늘에서 시작해 재 속에서 끝납니다.

하나님은 욥이 온전함을 붙들고 있다고 인정하십니다. 그의 고난에 정당한 까닭이 없다는 사실도 밝히십니다. 그런데 욥의 몸이 공격받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의 의로움을 알고 계시지만, 그것이 욥에게 고난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친구들도 욥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두 관계의 성격은 다르지만, 이 장에는 고통 속에서 관계를 끊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는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욥기 2장이 실제로 보여 주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이 장의 끝에서 고발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장면도 사라집니다.

남은 것은 네 사람입니다.

욥의 몸은 여전히 아픕니다. 죽은 자녀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재산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욥은 왜 이러한 고통을 겪는지 알지 못합니다. 친구들 역시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떠나지 않습니다.

욥의 고통은 아무 말로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고통 앞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곱 날과 일곱 밤.

누구도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욥기 2장은 그 침묵 속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