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모든 것을 잃은 욥
아무 대가 없는 경외
욥기는 한 의로운 사람이 모든 것을 잃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책이 처음부터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의로운 사람에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십니까? 그러나 욥기 1장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질문은 고발자의 이 물음입니다. 「욥이 아무 대가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9절)
이 질문은 욥의 신앙뿐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삶을 사랑합니까? 풍요와 평안이 사라져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는 그대로이겠습니까?
독자는 이 질문이 제기되는 장면을 보지만, 정작 질문의 대상인 욥은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하늘에서는 욥의 신앙을 놓고 대화가 이루어지고, 땅에서는 욥이 그 이유를 모른 채 엄청난 재난을 맞습니다. 독자는 욥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고난의 모든 이유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은 단순한 인내의 모범담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묻는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온전한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
욥의 의로움은 독자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욥기는 우츠 땅에 사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의 이름은 욥입니다. 왕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며, 이스라엘의 특정 지파에 속한 사람으로 소개되지도 않습니다. 욥기는 그의 시대나 혈통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알려 줍니다.
우츠 땅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욥이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올곧았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 살았다.욥기 1:1 · 본디새김
네 가지 표현이 그의 삶을 그립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모든 행동에서 단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다는 절대적인 무죄보다는, 인격이 나뉘지 않고 성실하며 흠잡을 데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올곧다’는 말은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바르게 행한다는 뜻을 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악에서 떠나는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욥의 자기평가가 아닙니다. 이야기의 서술자가 그렇게 소개하며, 8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직접 똑같은 네 가지 표현을 사용해 욥을 평가하십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흔히 숨겨진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그런 의심이 시작되기 전에 욥의 인격에 대한 판단을 독자에게 제공합니다. 더구나 그 판단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따라서 이후 욥의 고난을 그가 저지른 어떤 은밀한 죄에 대한 처벌로 설명하려 한다면, 독자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충돌하게 됩니다.
욥기는 고난을 통해 그의 죄를 밝혀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의로움이 확인된 상태에서 고난을 바라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삶은 풍요로웠다
2–3절은 욥의 가족과 재산을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 양과 염소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 오백 쌍, 암나귀 오백 마리, 그리고 매우 많은 일꾼이 있었습니다.
가축은 단순한 재산 목록이 아닙니다. 소는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낙타와 나귀는 운송과 이동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서술자는 욥이 「동방의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다고 덧붙입니다. 그의 삶은 경제적으로 풍성했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지혜 전통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욥기의 첫 장면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과 복을 연결하는 기대와 잘 어울리는 삶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풍요가 보장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욥기는 그 둘을 혼동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욥이 가장 염려한 것은 자녀들의 마음이었다
4–5절에서 이야기는 욥의 재산으로부터 그의 가정으로 옮겨 갑니다.
욥의 아들들은 저마다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였고, 세 누이도 초대해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아들들이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그들이 상당히 성장한 자녀들임을 시사합니다. 욥의 가족에게는 함께 기뻐하는 삶의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잔칫날이 한 차례 지나면 욥은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 모두의 수대로 번제를 바쳤습니다.
잔칫날이 한 차례 다 돌고 나면, 욥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그들 모두의 수대로 번제를 바치곤 했다. 욥이 「어쩌면 내 아들들이 죄를 짓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욥은 늘 이렇게 했다.욥기 1:5 · 본디새김
욥은 자녀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행동만이 아니라, 자신이 알 수 없는 자녀들의 마음까지 염려합니다. 욥은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욥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곧 등장할 고발자는 욥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그의 신앙을 단정합니다. 두 사람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문제 삼지만, 그 태도는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욥이 염려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은 하늘 장면에서 더욱 날카로운 문제로 다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우츠 땅은 예레미야애가 4:21에서도 언급되지만,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잠언 3:9–10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과 풍성한 수확을 연결하고, 신명기 28:1–14 역시 순종과 복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시편 73편은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는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며, 시편 73:13–14에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려 했던 것이 헛된 일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욥기 1장은 이러한 긴장을 한 사람의 삶에 집중시킵니다. 4절의 ‘자기 날’이 생일이었는지, 형제들이 돌아가며 잔치를 맡은 날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잔치가 반복되었고, 자매들까지 함께 초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욥의 신앙을 둘러싼 하늘의 질문
하늘의 장면은 독자에게만 공개된다
6절은 갑자기 장소를 바꿉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야훼 앞에 서려고 왔고, 고발자도 그들 가운데 왔다.욥기 1:6 · 본디새김
땅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던 욥의 이야기가 독자가 볼 수 없는 하늘의 장면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님 앞에 모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다만 욥기 1장은 이 존재들의 정확한 성격이나 조직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등장하는 ‘고발자’는 히브리어로 하사탄(שָׂטָן)입니다. 여기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이 문맥에서는 단순한 고유명사보다는 ‘대적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역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존재는 땅을 두루 돌아다니다 왔다고 말합니다. 그가 땅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전에, 여호와야훼가 먼저 욥을 언급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고발자에게 말했다.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땅에는 그 같은 사람이 없다. 그는 온전하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 사는 사람이다.」욥기 1:8 · 본디새김
하나님은 욥을 부자나 동방의 큰 인물로 소개하지 않으십니다. 「내 종 욥」이라고 부르십니다. 땅에서 욥은 가장 큰 인물로 소개되었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이제 고발자가 바로 그 평가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무 대가 없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바꾼다
고발자가 여호와야훼에게 대답했다. 「욥이 아무 대가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욥기 1:9 · 본디새김
‘아무 대가 없이’는 대가 없이, 까닭 없이, 거저라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고발자는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 삼는 것은 그 동기입니다.
「바로 당신이 그와 그의 집안과 그가 가진 모든 것 둘레에 울타리를 치시지 않았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셨고, 그의 가축은 불어나 땅에 퍼졌습니다.」욥기 1:10 · 본디새김
울타리는 고발자가 욥의 형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 줍니다. 고발자는 이 모든 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욥의 신앙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까닭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 때문이라면, 복이 사라지는 순간 하나님을 섬길 이유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신앙을 일종의 교환 관계로 이해하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경외와 순종을 드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보호와 번영을 주십니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관계 자체가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고발자가 의심하는 것은 욥의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 안에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욥기의 독자에게도 향합니다.
고발자가 예측한 저주와 실제로 일어날 찬양
11절에서 고발자는 자기 주장을 시험할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부디 손을 뻗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욥기 1:11 · 본디새김
욥이 자녀들을 염려했던 5절의 ‘저주하다’와 고발자가 사용하는 11절의 ‘저주하다’에는 모두 본래 ‘복을 빌다’라는 뜻의 바라크가 사용됩니다. 문맥상 하나님을 직접 저주한다는 말을 피하는 완곡한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10절에서 고발자가 하나님이 욥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셨다고 말할 때도, 21절에서 욥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찬양받기를」이라고 말할 때도 이 동사가 등장합니다.
같은 낱말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면서 이야기 전체에 긴장을 만듭니다.
욥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저주했을까 염려했습니다. 고발자는 욥 자신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실제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허락하시는가
여호와야훼가 고발자에게 말했다. 「보아라.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네 손에 있다. 다만 그 자신에게는 네 손을 뻗지 마라.」 고발자는 여호와야훼 앞에서 나갔다.욥기 1:12 · 본디새김
이 허락은 욥기 1장에서 가장 불편하고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고발자의 제안을 허락하십니다. 허락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발자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왜 그 제안을 받아들이셨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하나님과 고발자가 내기를 벌이시는 단순한 이야기로 읽으면 중요한 긴장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과 고발자는 동등한 상대가 아닙니다. 고발자는 자기 뜻대로 욥에게 접근할 수 없으며, 허락된 범위를 넘어서서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허락이라는 사실이 고난에 관한 모든 질문을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경계를 정하셨다는 사실과, 그 경계 안에서 엄청난 상실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이 함께 남습니다.
욥은 자기가 어떤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욥이 고통 속에서 질문하고 탄식하는 것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늘의 장면은 독자에게 사건의 배후에 있는 논쟁을 보여 주지만, 욥이 겪는 고통을 쉽게 이해하거나 정당화할 권한까지 주지는 않습니다.
하루에 무너진 한 사람의 세계
잔치가 다시 등장할 때
13절은 앞의 가족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어느 날 욥의 아들딸들이 맏아들의 집에서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족이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은 욥의 행복한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은 일상적인 잔치가 비극의 무대가 됩니다. 재난은 그들이 평소처럼 함께 지내던 날에 찾아옵니다.
첫 번째 전령은 스바 사람들이 가축을 빼앗고 일꾼들을 죽였다고 알립니다. 두 번째 전령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과 염소와 일꾼들이 죽었다고 전합니다. 세 번째 전령은 칼데아 사람들이 낙타를 약탈하고 일꾼들을 죽였다고 보고합니다.
욥의 삶을 무너뜨리는 사건에는 인간의 폭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건은 성격이 다릅니다. 전령은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가축과 일꾼들을 삼켰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어느 한 방향에서만 위험이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네 번째 소식은 모든 것의 중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때 큰 바람이 광야 건너편에서 불어와 집의 네 모퉁이를 쳤습니다. 집이 젊은이들 위로 무너져 그들이 죽었습니다. 주인님께 알려 드리려고 오직 저 혼자만 빠져나왔습니다.」욥기 1:19 · 본디새김
고발자는 하나님이 욥과 그의 집안 둘레에 울타리를 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는 욥의 자녀들이 모여 있던 집의 네 모퉁이가 바람에 무너집니다. 이것은 동일한 낱말의 반복은 아니지만, 보호받던 공간이 붕괴되는 두 장면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만듭니다.
욥의 상실은 가축과 자녀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축을 돌보고 일하던 사람들 역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욥의 재산 목록에 딸린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재난 속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욥기 1장의 비극은 한 부자의 경제적 몰락만이 아니라, 그와 연결되어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무너지는 사건입니다.
「그가 아직 말하고 있는데」
그가 아직 말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말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과 염소와 일꾼들에게 붙어 타올라 그들을 삼켰습니다. 주인님께 알려 드리려고 오직 저 혼자만 빠져나왔습니다.」욥기 1:16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다음 보고에서도 반복됩니다. 첫 번째 재난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두 번째 소식이 도착하고, 두 번째 소식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째 소식이 들려옵니다. 서술자는 욥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무슨 질문을 했는지,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를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독자 역시 사건을 소화할 시간을 얻지 못합니다.
각 전령의 마지막에는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스바 사람들이 들이닥쳐 가축들을 빼앗고 일꾼들을 칼날로 쳐 죽였습니다. 주인님께 알려 드리려고 오직 저 혼자만 빠져나왔습니다.」욥기 1:15 · 본디새김
살아남은 사람은 있지만, 그 생존은 또 다른 죽음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반복 때문에 욥에게 도착하는 것은 구조의 소식이 아니라 상실의 소식뿐입니다.
그의 삶은 서서히 쇠퇴하지 않습니다. 하루의 일상이 계속되는 동안 자신이 의지하던 세계가 무너집니다.
욥은 이 모든 소식을 듣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이미 고발자가 욥에게서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술자는 욥의 대답을 마지막까지 미룹니다.
모든 보고가 끝난 뒤에야 욥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13절의 잔치에서 자녀들이 특별히 잘못된 잔치를 벌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16절의 ‘하나님의 불’은 번개와 같은 현상을 떠올릴 수 있지만 본문은 구체적인 자연현상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표현은 전령의 보고에 등장하므로, 이것을 곧바로 하나님이 욥의 죄를 벌하셨다는 서술자의 판단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19절에서 집이 무너지며 죽은 사람들은 ‘젊은이들’이라고 불립니다. 이 말은 앞의 보고들에서는 일꾼들을 가리켰으며, 이 절에서는 직전에 언급된 욥의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낱말 자체가 자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상 분명한 것은 욥이 자녀들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울부짖는 대신 찬양했는가
슬픔과 예배는 서로 반대되는 행동이 아니다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절했다.욥기 1:20 · 본디새김
이러한 행동은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문화에서 깊은 슬픔과 애도를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야곱도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창세기 37:34). 욥은 자신의 상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은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본문은 슬픔과 하나님을 향한 경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겉옷을 찢은 사람이 그대로 땅에 엎드립니다. 상실 때문에 무너진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욥의 경배는 슬픔이 사라진 뒤에 이루어지는 행동이 아니라, 슬픔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행동입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고백
욥은 마침내 입을 엽니다.
그가 말했다. 「알몸으로 나는 어머니 배에서 나왔고,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리라. 여호와야훼가 주셨고, 여호와야훼가 가져가셨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찬양받기를.」욥기 1:21 · 본디새김
욥이 처음 하는 말은 재난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존재에 관해 말합니다.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것, 자신이 소유하고 돌보며 이루어 온 것들이 자신의 생명과 함께 처음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로 돌아가리라’는 인간이 죽음을 통해 처음의 무소유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모든 것이 덧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곧바로 자기 삶에 있었던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을 고백합니다. 한편으로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이었다고 인정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선물을 잃은 지금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거두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발자의 주장이 시험받습니다.
고발자는 욥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복이 사라지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선물을 잃은 자리에서 그 선물을 주셨던 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가져가셨다」는 말은 모든 원인을 설명하는가
욥은 「여호와야훼가 가져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앞서 본 재난에는 스바 사람들의 폭력, 하늘에서 떨어진 불, 칼데아 사람들의 습격, 광야에서 불어온 바람이 등장합니다. 하늘에서는 고발자에게 재난을 일으킬 권한이 허락되었습니다. 욥은 그 배후의 대화를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욥의 고백을 모든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세부적인 설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과 소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가 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건과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사건을 어디까지 구별해야 합니까? 선하신 하나님이 악한 행동과 파괴적인 재난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욥기 1장은 이 질문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습니다.
다만 욥의 고백을 평가하는 서술자의 판단은 분명합니다.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욥은 죄를 짓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부당함을 돌리지도 않았다.욥기 1:22 · 본디새김
서술자는 욥이 이 순간 죄를 짓지 않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욥의 모든 질문이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욥은 아직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욥은 고난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그리로 돌아가리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어머니의 배로 돌아간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다만 본문이 ‘그리로’가 가리키는 장소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특정 장소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도서 5:15에도 인간이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그대로 돌아가며, 수고하여 얻은 것을 손에 가지고 갈 수 없다는 비슷한 성찰이 등장합니다. 22절의 ‘부당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어리석거나 부적절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하나님께 부당한 일을 돌리거나 그릇된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너진 집 밖에서 드린 경배
욥기 1장의 처음과 끝을 나란히 놓으면 변화가 보입니다. 처음에 욥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마지막에 욥은 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으로 남습니다. 일꾼들이 죽었고, 가축들이 사라졌으며, 자녀들이 모여 있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고발자는 욥의 신앙과 그의 복 사이에 단단한 거래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욥기의 서두는 이러한 계산법이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욥의 행동은 적어도 이 순간 그 관계가 단순한 거래보다 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선물을 잃었으나 선물을 주신 분을 향한 경외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장을 어떤 고난에서도 흔들림 없이 찬양하기만 하면 된다는 교훈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욥이 잃은 것은 추상적인 복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생명, 오랫동안 이루어 온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그 상실 앞에서 슬퍼하는 일은 신앙의 실패가 아닙니다. 또한 욥이 찬양했다는 이유로 그가 겪은 재난을 필요한 것이거나 좋은 것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욥의 신앙을 긍정하지만, 재난 자체를 선한 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셨는데도 그에게 재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태도는 욥기의 시작부터 경계받습니다.
고발자는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입에서는 저주 대신 찬양이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무너진 집이 다시 일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녀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욥의 슬픔은 그대로 남아 있고, 욥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늘에서는 욥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땅에서는 그 질문조차 듣지 못한 한 사람이 슬픔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욥기 1장은 그 모습에서 멈춥니다.
무너진 집과 잃어버린 가족, 찢어진 겉옷과 깎인 머리털. 그리고 아무것도 되찾지 못한 채 땅에 엎드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찬양받기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