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하나님의 길의 끝자락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입니까? 하늘을 다스리시고, 땅을 붙드시며,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죽음의 세계까지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욥은 이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구들보다 훨씬 장엄하고 생생한 언어로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누구보다 깊이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 위대하심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크심을 근거로 욥의 잘못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전능하시므로 욥이 겪는 재앙에도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이유는 욥의 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반대로 묻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크신 분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다 헤아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6장은 이 질문을 독특한 방식으로 펼쳐 보입니다. 욥은 먼저 친구의 무익한 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이어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하늘 끝까지 시선을 옮기며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장엄한 묘사를 마친 자리에서 「이것들은 그의 길들의 끝자락일 뿐이네」라는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설명하기는커녕, 겨우 그 바깥 가장자리에 닿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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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말은 누구를 도왔는가

욥기 26:1–4 본문 →

욥은 빌닷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네는 힘없는 이를 얼마나 잘 도왔는가? 기운 없는 팔을 얼마나 잘 구했는가?」욥기 26:2 · 본디새김
「지혜 없는 이에게 얼마나 잘 조언했는가? 건실한 지혜를 얼마나 풍성히 알려 주었는가?」욥기 26:3 · 본디새김

칭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뼈아픈 반어입니다. 빌닷은 앞 장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순결하심을 말하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25:2–6). 그 말의 내용에는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인간이 연약하다는 사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말이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되묻습니다.

그는 단순히 빌닷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왔다’, ‘구했다’, ‘조언했다’, ‘알려 주었다’는 표현을 차례로 사용합니다.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사용하는 행위입니다.

욥이 따지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지식이 사람에게 미치는 실제 효과입니다.

친구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설명하는 동안 욥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과 자녀를 잃었고, 질병으로 고통받았으며,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정죄를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되풀이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되었습니까?

여기서 욥은 신학적 지식 자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곧 이어지는 그의 말은 그가 하나님에 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해 왔는지 보여 줍니다.

옳은 말을 안다는 것과 그 말을 옳게 사용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친구들의 잘못은 반드시 그들이 말한 모든 명제가 거짓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참된 사실을 가지고도 욥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할 수 있었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금 욥에게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4절에서 욥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자네는 누구에게 말을 한 것인가? 누구의 숨결이 자네에게서 나온 것인가?」욥기 26:4 · 본디새김

첫 번째 질문은 빌닷의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묻습니다. 욥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말이었습니까, 아니면 이미 가지고 있는 신학적 확신을 반복하는 말이었습니까? 두 번째 질문에서 욥은 빌닷의 말에 누구의 권위가 실려 있는지를 묻는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 숨결의 정체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이제 말의 내용뿐 아니라 말의 출처와 권위까지 문제 삼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해서 곧바로 하나님의 판단을 대변하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욥은 자신이 그 사실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번째 질문의 ‘숨결’은 히브리어 네샤마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문맥에서는 말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숨결이나 그 말을 낳은 영적·지적 근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음의 세계도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어지지 않는다

욥기 26:5–6 본문 →

「죽은 자들의 혼령들이 몸부림치네, 물과 그 안에 사는 것들 아래에서.」욥기 26:5 · 본디새김
「그 앞에서 스올은 벌거벗어 있고, 아바돈에는 덮개가 없네.」욥기 26:6 · 본디새김

갑자기 이야기의 무대가 바뀝니다. 빌닷은 높은 하늘과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엄을 말했습니다. 욥은 거기서 출발하지 않고 정반대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가 볼 수 없는 깊은 곳, 죽은 자들이 머무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몸부림친다’는 말은 떨거나 고통 가운데 뒤틀리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욥은 죽은 자들조차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묘사합니다.

‘물과 그 안에 사는 것들 아래에서’라는 표현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물 아래에 죽은 자들의 영역이 있다고 보는 읽기도 있고, 죽은 자들의 혼령뿐 아니라 물과 그 거주자들까지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떤다고 보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욥은 인간의 시야와 경험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스올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어 있다’고 말합니다. 아바돈에는 ‘덮개가 없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죽음의 세계는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세계조차 아무것도 가리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깊은 비밀인 곳도 하나님께는 감추어진 곳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죽은 이후의 삶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욥은 죽은 자들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무엇을 경험하는지 체계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식이 미치는 범위에 있습니다.

죽음의 영역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라면 욥의 고통도 분명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이 곧 욥이 그 고통의 이유를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 감추어진 것이 없음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시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드러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구별이 곧 이어지는 우주 묘사의 밑바탕을 이룹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죽은 자들의 혼령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레파임입니다. 다른 문맥에서는 고대의 거인족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시편 88:10과 이사야 14:9에서는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욥기 26장에서도 바로 다음 절에 스올이 등장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혼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스올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바돈은 ‘멸망’이나 ‘파멸’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표현으로, 여기서는 스올과 나란히 놓여 죽음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잠언 15:11에서도 스올과 아바돈이 함께 등장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달린 땅

욥기 26:7–10 본문 →

「그는 허공 위에 북쪽을 펼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땅을 매다네.」욥기 26:7 · 본디새김

앞에서는 땅 아래 죽음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 시선이 하늘과 땅으로 옮겨 갑니다. 욥은 하나님이 하늘을 ‘펼치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04:2에서도 하나님은 하늘을 휘장처럼 펼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매달려면 그것을 붙잡아 줄 지지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욥은 땅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달려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을 현대 천문학에 대한 선행 지식처럼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욥이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중력이나 행성의 운동 원리가 아닙니다. 그는 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땅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인간의 경험에서는 무언가를 떠받치는 기둥이나 받침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드시는 세계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지지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욥은 구름을 바라봅니다.

「그는 자기의 먹구름 속에 물을 묶어 두고, 구름은 그 물 아래에서도 터지지 않네.」욥기 26:8 · 본디새김

물은 무겁고 아래로 흐릅니다. 그런데 하늘에는 엄청난 양의 물을 머금은 구름이 떠 있습니다. 구름은 언제나 물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는 하나님은 물도 하늘에 붙들어 두십니다. 하나는 땅의 안정이고, 다른 하나는 구름 속 물의 보존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유지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는 보좌의 표면을 가리고, 그 위에 자기 구름을 펼치네.」욥기 26:9 · 본디새김

여기에는 중요한 번역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키세(⁨כִּסֵּא⁩)는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고, 모음 읽기를 달리하여 ‘보름달’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보좌로 읽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 자리를 구름으로 가리시는 장면이 됩니다. 보름달로 읽으면 구름이 밝은 달을 가리는 자연 현상을 묘사하게 됩니다. 두 읽기 모두 주변의 하늘과 구름 묘사에 어울립니다.

본디새김처럼 보좌로 읽을 때 특히 의미 있는 대조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깊은 스올까지 보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보좌를 직접 볼 수 없습니다.

6절에서 죽음의 세계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어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하나님 자신의 보좌는 구름에 가려집니다.

하나님께는 감추어진 세계가 없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가려진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거나 세상에 무관심하시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욥의 묘사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에도 구름과 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드러나지만, 그 활동의 모든 이유까지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10절에서 욥은 바다 위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는 물 위에 둥글게 경계를 그었네, 빛과 어둠이 맞닿는 끝까지.」욥기 26:10 · 본디새김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바다 위에도 경계가 있습니다. 지평선 또는 수평선에서 하늘과 물이 만나는 듯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빛과 어둠이 맞닿는다는 표현은 공간적인 경계를 나타낼 수도 있고, 빛과 어둠의 시간적 한계를 함께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시각적 흐름에서는 공간적 경계를 그리는 장면이 자연스럽습니다.

고대의 시적 세계에서 경계는 단순한 선이 아닙니다. 경계를 정한다는 것은 구분과 질서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4–10에서도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물을 구분하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바다는 멀리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경계를 그으십니다.

인간에게 끝을 알 수 없는 세계도 하나님께는 한계가 정해진 세계입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북쪽’은 하늘의 북쪽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북쪽은 신적인 산이나 천상의 영역과 연결되기도 했지만, 여기서 특정 신화적 장소를 가리킨다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허공’은 창세기 1:2에서 땅이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과 같습니다. 질서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 비어 있음, 황량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욥기 38:8–11에서 하나님은 바다의 경계를 정하신 일을 말씀하시고, 38:22–38에서는 눈과 비와 구름과 하늘의 질서에 관해 질문하십니다. 이는 욥이 26장에서 찬양한 세계와 주제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들을 26장에 미리 끌어와 욥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장에서 욥은 아직 하나님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기둥이 떨고, 바다의 괴물이 무너진다

욥기 26:11–13 본문 →

지금까지의 장면에서 하나님은 세계를 펼치시고, 붙드시고, 묶어 두시고,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제 묘사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하늘의 기둥들이 흔들리고, 그의 꾸짖음에 놀라 멍해지네.」욥기 26:11 · 본디새김

앞에서 욥은 땅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의 기둥을 말합니다. 이 표현들을 하나의 물리적 우주 구조에 맞추어 해석하려 하면 오히려 본문의 시적 효과를 놓치기 쉽습니다.

땅을 떠받칠 지지대가 없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유지하시며, 견고한 기둥으로 상상되는 것들조차 그분 앞에서는 흔들립니다. 하늘의 기둥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욥의 시에서는 그것들이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 응답하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12절에서는 바다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바다를 뒤흔들었고, 자기 분별로 라하브를 짓부쉈네.」욥기 26:12 · 본디새김

여기서 ‘라하브’는 여호수아기에 등장하는 여인 라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표기와 문맥이 다릅니다. 욥기에서 라하브는 바다와 연결되는 혼돈의 세력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에서 바다는 단순히 많은 물이 모여 있는 장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과 혼돈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욥기가 하나님과 실제로 동등한 어떤 신적 존재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을 서술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욥은 고대에 알려진 바다와 괴물의 이미지를 가져와, 그 어떤 위협적인 힘도 하나님과 대등하지 않음을 노래합니다.

‘바다를 뒤흔들었고’라는 표현은 바다를 요동하게 하는 행위로 읽기도 하고, 반대로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 행위로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이해하더라도 뒤에 나오는 라하브의 패배와 연결되는 핵심은 같습니다. 바다가 아무리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힘으로만 바다를 다스리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분별로 라하브를 무너뜨리십니다. 욥기 12:13에서도 욥은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이 있고 계략과 명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지혜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는 사실에서 욥의 죄에 대한 확신으로 곧장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능력에 지혜와 분별이 함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그 지혜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모든 판단을 대신 설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13절에서 다시 하늘이 등장합니다.

「그의 숨결로 하늘은 맑네. 그의 손이 달아나는 뱀을 꿰뚫었네.」욥기 26:13 · 본디새김

앞에서 구름 속에 물을 묶어 두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하늘을 맑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름으로 가리실 수도 있고, 바람으로 걷어 내실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달아나는 뱀’은 라하브와 함께 읽을 때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하늘을 맑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달아나는 뱀을 꿰뚫습니다.

하나님의 동일한 능력이 한편에서는 질서를 드러내고, 다른 한편에서는 혼돈의 힘을 제압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는 욥은 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욥은 하나님이 혼돈을 다스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왜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허락하셨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의 고백을 단순한 승리의 찬송과 다르게 만듭니다.

욥의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이미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찬양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욥은 자기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에는 경외심과 함께 풀리지 않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 9:13에서도 라하브를 돕는 자들이 하나님 아래 엎드린다고 말합니다. 시편 89:9–10은 하나님이 거친 바다를 다스리시고 라하브를 부수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사야 51:9–10에서는 라하브를 쪼개시고 바다를 마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언급되며,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12절의 히브리어 동사 라가는 이 문맥에서 바다를 요동하게 하거나 격동시키는 행위로 읽기도 하고, 반대로 바다를 진정시키거나 잠잠하게 하는 행위로 읽기도 합니다. 13절 ‘그의 숨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문맥에 따라 숨결, 바람, 영을 뜻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바람이 하늘을 맑게 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바람을 하나님의 숨결로 표현하면 창조 세계가 그분의 능력에 의해 움직인다는 의미가 살아납니다. 이사야 27:1에는 이 표현과 직접 대응하는 히브리어 구절이 나타납니다. 거기에서는 ‘달아나는 뱀’이 리워야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욥기 26:13의 뱀 역시 평범한 뱀의 묘사라기보다 혼돈의 괴물과 연결된 시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희미한 속삭임뿐이다

욥기 26:14 본문 →

「보게, 이것들은 그의 길들의 끝자락일 뿐이네. 우리가 그에 관해 듣는 말은 얼마나 희미한 속삭임인가? 그의 힘찬 행위들이 내는 천둥을 누가 헤아리겠는가?」욥기 26:14 · 본디새김

이 마지막 절은 앞의 모든 묘사를 새로운 빛 아래 놓습니다.

욥은 방금 스올과 아바돈, 하늘과 땅, 구름과 바다, 라하브와 달아나는 뱀에 관해 말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 가장 평온한 장면과 가장 두려운 장면을 모두 불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마친 뒤 자신이 설명한 것은 겨우 ‘끝자락’이라고 합니다.

‘끝자락’은 끝이나 가장자리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펼쳐지는 광대한 영역 가운데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가장자리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옷자락의 끝부분을 조금 보았다고 해서 옷 전체를 본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이 앞서 열거한 것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다만 그 의미를 과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행위는 참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전부는 아닙니다.

앞에서 욥은 하나님의 능력을 시각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제 그는 청각적인 이미지로 전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무언가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한 속삭임과 같습니다.

그리고 속삭임의 반대편에 천둥을 놓습니다.

속삭임과 천둥은 모두 소리지만 크기가 전혀 다릅니다. 속삭임은 귀를 기울이면 겨우 들을 수 있습니다. 천둥은 온몸으로 느낄 만큼 거대합니다.

욥은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무언가를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세상에 흔적을 남기며, 인간은 그 흔적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참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아직 속삭임의 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욥은 ‘우리가’라고 말합니다. 그는 친구들만 무지하고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 제한된 인식 안에 포함합니다.

처음에 욥은 빌닷에게 ‘자네’라고 말하며 그의 지혜를 비판합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라고 말하며 인간 모두의 지식이 제한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의 논박은 자신이 더 위대한 지혜를 소유했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욥의 태도가 보여 주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인식의 겸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긴장은 욥기 후반부와도 이어집니다. 28장에서는 인간이 땅속 깊은 곳에서 보물을 찾아내면서도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38장 이후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도 창조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크심은 왜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가

욥기 26:1–14 본문 →

욥기 26장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질문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왜 지금 이 일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욥은 첫 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욥이 왜 고난당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친구들은 이 두 질문 사이의 거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고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욥에게 임한 재앙의 의미까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참된 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능하심을 근거로 하나님이 왜 그 사람에게 고난을 주셨는지까지 단정한다면, 우리는 알고 있는 사실에서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욥이 하나님의 지혜를 완전히 알 수 없으니 그분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 자신이 긴 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일을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어디까지가 우리가 아는 것이며 어디서부터는 모르는 것인지를 분별하도록 이끕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함께 하나님께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욥이 보여 주는 신앙은 모든 답을 소유한 신앙이 아닙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분께 묻기를 멈추지 않는 신앙입니다.

26장의 마지막에서 욥은 더 이상 친구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광대한 세계로 향합니다.

죽은 자들의 세계는 그분 앞에 드러나 있고, 땅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달려 있으며, 구름은 물을 품고 하늘에 떠 있습니다. 하늘의 기둥은 그분의 꾸짖음에 떨고, 거대한 바다의 세력도 그분의 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본 욥은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소리의 작은 일부뿐입니다.

그리고 욥은 마지막 질문을 남깁니다. 「그의 힘찬 행위들이 내는 천둥을 누가 헤아리겠는가?」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