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끝까지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는 맹세

욥은 자신에게 불의를 행하셨다고 여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내 권리를 빼앗은 하나님, 내 삶을 쓰라리게 한 전능자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일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였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항의가 한 문장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그런 욥이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결백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욥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논쟁은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인정하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7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 욥은 돌연 악인에게 닥칠 파멸을 길게 묘사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친구들이 욥을 정죄할 때 사용했던 논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왜 욥은 자신을 괴롭혀 온 친구들의 말을 다시 꺼내는 것일까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주장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이 27장의 두 번째 절반을 읽는 열쇠입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27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내 권리를 빼앗으셨다는 맹세

욥기 27:1–4 본문 →

27장은 새로운 문학적 도입으로 시작합니다.

욥이 다시 시를 읊으며 말했다.욥기 27:1 · 본디새김

‘시를 읊다’로 옮긴 이 표현은 욥기의 일반적인 대화 도입과는 조금 다릅니다. 욥기 29:1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욥이 단순히 친구의 말에 대꾸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입장을 무게 있게 선언하기 시작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 선언은 맹세의 형식을 취합니다.

「내 권리를 빼앗은 하나님, 내 삶을 쓰라리게 한 전능자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네.」욥기 27:2 · 본디새김

‘내 권리(⁨מִשְׁפָּ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재판’, ‘판결’, ‘정의’, ‘권리’ 등을 뜻하는 말에 ‘나의’라는 소유 표현이 붙은 것입니다. 욥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셨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공정한 판단을 받지 못했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욥과 하나님의 관계를 법정의 언어로 이해하게 합니다. 욥은 자신이 유죄라는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무죄를 밝혀 줄 공정한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권리를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향해 제기한 주장이지, 서술자가 하나님이 실제로 부당한 판결을 내리셨다고 확정한 문장은 아닙니다. 욥기 1–2장에서 독자에게 알려 준 사실 역시 욥의 고난이 친구들이 주장하는 죄의 결과가 아님을 보여 주지만, 그렇다고 욥이 하나님의 모든 의도를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은 자신이 경험한 현실을 정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분의 처사가 자신에게 부당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리겠다.’

오히려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선언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맹세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은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하나님의 권위 아래 두는 행위였습니다. 예레미야 4:2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신다’는 맹세의 표현이 진실과 정의와 연결됩니다.

욥은 하나님을 자신이 경험한 불의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도, 자신의 진실을 보증할 최종 권위로 그분을 부릅니다.

이 긴장이 욥의 신앙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께 화가 나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자신의 말을 책임지려고 합니다.

이어지는 3–4절은 이 맹세의 내용을 밝힙니다.

「내 숨이 내 안에 남아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내 코에 있는 동안에는,」욥기 27:3 · 본디새김
「내 입술은 불의를 말하지 않겠네. 내 혀는 속임수를 내뱉지 않겠네.」욥기 27:4 · 본디새김

3절의 ‘숨’과 ‘하나님의 숨결’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2:7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욥은 자신의 생명이 아직 하나님에게서 공급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신을 쓰라리게 하신 분이 동시에 자신을 살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숨이 남아 있는 동안 욥은 자신의 입술과 혀를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욥은 앞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생애 전체를 걸어 선언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싸움은 말의 싸움입니다. 그는 재산을 지킬 수 없었고, 자녀들을 지킬 수 없었으며, 자신의 몸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진실이라고 아는 것을 거짓으로 바꾸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욥이 끝까지 지키려는 것은 자신의 체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을 책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를 읊다’로 옮긴 1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자신의 마샬을 들어 올린다는 뜻입니다. 마샬은 잠언, 비유, 격언, 교훈적 시 등 여러 종류의 지혜로운 발화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또 히브리어 맹세문에서는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이라는 조건 형식을 사용하여 강한 부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4절도 이러한 맹세 형식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친구들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왜 불의인가

욥기 27:5–6 본문 →

「내가 자네들을 옳다고 하다니, 결코 그럴 수 없네. 나는 숨질 때까지 내 온전함을 버리지 않겠네.」욥기 27:5 · 본디새김
「나는 내 의로움을 붙들었고 그것을 놓지 않겠네. 내 마음은 내가 살아온 어느 날을 두고도 나를 꾸짖지 않네.」욥기 27:6 · 본디새김

욥이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친구들의 판단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고난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죄를 추론했습니다. 고난의 크기를 보면 죄도 중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이 죄를 인정하지 않을수록 그들은 욥이 완고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그들의 해석에 동의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진실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5절의 ‘온전함’은 욥기 2:3과 2:9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3에서 하나님은 욥이 여전히 자신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9에서는 욥의 아내가 그에게 언제까지 자신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겠느냐고 묻습니다. 27장에서 욥은 바로 그 온전함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독자는 욥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이미 하나님에게서 들었습니다(1:8; 2:3). 그러나 욥 자신은 그 하늘의 대화를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27장의 선언은 자신의 결백이 이미 하나님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확인을 받지 못했는데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붙든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죄도 없다고 주장한다는 뜻일까요? 본문의 논쟁을 고려하면 그렇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욥이 직접 맞서고 있는 것은 지금의 재앙이 자신의 감추어진 악행에 대한 정당한 응보라는 친구들의 주장입니다. 그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욥기 13:23에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알려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붙드는 것은 어떤 잘못도 저지른 적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선언하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6절의 마지막 표현 「내 마음은 내가 살아온 어느 날을 두고도 나를 꾸짖지 않네」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지금 친구들이 자신에게 씌우려는 죄목을 인정할 만한 날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욥의 확신이 지나치게 강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이 선언은 단순한 자기 과시가 아닙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욥에게 그런 고백은 겸손이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낮추는 말이라고 해서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저지르지 않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행동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사실을 왜곡할 필요는 없습니다. 욥에게 하나님 앞의 정직은 자신의 무죄를 거짓으로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선언을 마친 욥은 이제 자신과 친구들 사이의 문제에서 ‘악한 자’의 운명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악한 자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가

욥기 27:7–12 본문 →

「내 원수가 악한 자처럼 되기를, 나를 거슬러 일어선 자가 불의한 자처럼 되기를 바라네.」욥기 27:7 · 본디새김

7절은 앞의 맹세와 뒤의 악인에 관한 가르침을 연결합니다.

이 문장을 친구들에 대한 직접적인 저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욥을 거슬러 말했고, 욥의 결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원수’와 ‘나를 거슬러 일어선 자’가 반드시 세 친구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단순히 감정의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누가 의롭고 누가 불의한지에 관한 판단이 걸려 있습니다. 자신이 악인이라는 친구들의 판단을 거절했으므로, 이제 진정으로 악한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 말하려는 것입니다.

8–10절에서 욥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불경한 자가 이득을 얻는다 해도,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뽑아낼 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욥기 27:8 · 본디새김
「그에게 곤경이 닥칠 때, 하나님이 그의 부르짖음을 듣겠는가?」욥기 27:9 · 본디새김
「그가 전능자를 기뻐하겠는가? 언제나 하나님을 부르겠는가?」욥기 27:10 · 본디새김

이 질문들은 모두 악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묻습니다. 첫 번째는 희망, 두 번째는 부르짖음, 세 번째는 기쁨과 기도입니다. 욥은 악한 사람이 얼마나 부유한지, 얼마나 오랫동안 성공하는지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악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본디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악한 사람에게 이득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궁극적인 희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욥 자신의 처지와 대조가 생깁니다.

욥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지켜 줄 만한 어떤 안정된 조건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욥이 묘사하는 불경한 사람은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기뻐하며 언제나 그분을 부르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10절에서 욥은 지금 전능자를 기뻐할 만한 형편이 아닙니다. 그는 전능자가 자신의 삶을 쓰라리게 하셨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항의하고, 질문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욥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말은 여기서 고통이 없고 감정이 평온한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0절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부르는 삶과 그분을 기뻐하는 삶을 함께 놓습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온해서 그분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항의할 만큼 괴로우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문제를 판단하실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욥이 악인이라는 친구들의 판단에 반대되는 한 가지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어떻게 응답하실지는 아직 모릅니다.

11절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관해 자네들을 가르치겠네.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숨기지 않겠네.」욥기 27:11 · 본디새김

이것은 앞선 논쟁의 역할을 뒤집습니다. 친구들은 오랫동안 욥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이제 욥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손에 관해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언 바로 뒤에 책망이 이어집니다.

「보게, 자네들 모두가 보았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헛되게, 헛되게 구는가?」욥기 27:12 · 본디새김

12절의 반복은 강한 비판입니다. ‘헛되게’라는 말은 전도서에서 잘 알려진 말과 연결되며, 입김, 덧없음, 헛됨 등의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모든 인생이 덧없다는 뜻이 아니라, 친구들의 판단과 말이 실속 없고 무익하다는 비판입니다.

그들이 악인의 운명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을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교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교훈을 욥에게 적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제 그 점을 이해한 독자는 후반부에서 더욱 당혹스러운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이득을 얻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바차(⁨בָּצַע⁩)에서 왔습니다. 이 동사는 원래 자르거나 떼어 내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이익을 얻는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는 ‘이득을 얻는다 해도’와 ‘목숨을 거두실 때’라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지만, 동사의 의미와 문장 연결에는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욥은 왜 친구들이 하던 말을 다시 하는가

욥기 27:13–15 본문 →

「이것이 악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받을 몫이며, 포악한 자들이 전능자에게서 받을 유산이네.」욥기 27: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욥기 20:29에서 초파르가 악인의 운명을 설명하며 말했던 내용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도 악인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몫과 유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재앙의 묘사도 친구들의 주장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욥은 바로 이런 논리에 맞서 싸워 왔습니다.

욥기 21장에서 그는 악한 사람들도 오래 살고, 권세를 얻고, 재산이 늘어나는 현실을 지적했습니다(21:7–13). 악인의 등불이 얼마나 자주 꺼지는지 되물으며, 악인은 반드시 곧바로 파멸한다는 친구들의 주장을 문제 삼았습니다(21:17–18). 그런 욥이 27장에서는 악인의 파멸을 마치 당연한 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욥이 악인의 심판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친구들의 판단은 거부한다는 해석입니다. 욥은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그가 반대한 것은 모든 고난을 죄에 대한 심판으로 설명하고, 자신이 겪는 재앙을 죄의 증거로 사용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읽기는 13절 이하를 친구들의 익숙한 가르침을 되풀이하거나 논쟁적으로 재사용하는 부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악인의 운명을 다시 들려준다는 해석입니다. 이렇게 읽을 근거도 있습니다. 후반부의 표현들은 친구들의 기존 연설과 매우 닮아 있으며, 욥이 앞에서 주장한 내용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처럼 13절 이하를 계속 욥의 말로 읽으면서도, 그가 악인의 운명에 관한 전통적인 언어를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지는 신중하게 살펴보는 편이 좋습니다. 두 읽기 모두 욥의 실제 경험과 후반부의 묘사가 충돌한다는 사실을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그의 아들들이 많아진다 해도 그들은 칼의 몫이며, 그의 후손들은 빵으로 배를 채우지 못할 것이네.」욥기 27:14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번영의 보증이 되지 못합니다. 13절에서 악한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자신의 몫을 받습니다. 14절에서는 그의 자녀들이 칼의 몫이 됩니다. 악인이 많은 것을 자신의 몫으로 차지하려 했지만, 결국 그의 가족이 파괴적인 힘의 몫이 되는 역전입니다.

15절에서는 남은 사람들마저 죽습니다.

「그에게 남은 이들은 죽음에 묻히고, 그의 과부들은 울지 않을 것이네.」욥기 27:15 · 본디새김

정상적인 애도마저 이루어지지 않는 극심한 재앙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 구절들을 읽을 때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욥 자신도 자녀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자녀를 잃은 사실을 그의 가정에 임한 심판과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의 입에서도 악인의 자녀들이 죽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이 모든 자녀의 죽음을 부모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욥기 1–2장에서 독자는 이미 욥의 자녀들이 죽은 사건을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27장의 표현을 가볍게 만들어 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는 욥의 말이 그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얼마나 무겁게 들리는지를 느낍니다.

악인이 재앙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과 재앙을 당한 사람이 악인이라는 판단은 같지 않습니다.

욥이 악인의 파멸을 말하는 이 장면은 그 구별을 계속 요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의 마지막 논쟁에서는 초파르의 세 번째 발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원래 다른 발언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본문의 현재 배열을 넘어서는 가설이며, 확인할 수 있는 명시적인 화자 변경이나 확실한 본문 증거는 없습니다. 15절의 ‘죽음에 묻히고’라는 표현은 질병이나 전염병으로 죽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히브리어의 ‘죽음’은 문맥에 따라 파괴적인 역병을 암시할 수 있지만, 여기서 특정 질병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과부들이 울지 않는다는 말도 슬픔이 사라졌다는 뜻인지, 애도할 여유조차 없는 철저한 파멸을 뜻하는지, 혹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지 않을 만큼 그가 버림받았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편 78:64에도 사람들이 칼에 쓰러지고 과부들이 애곡하지 못하는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쌓아 놓은 재물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욥기 27:16–18 본문 →

「그가 은을 먼지처럼 쌓고, 옷을 진흙처럼 마련한다 해도,」욥기 27:16 · 본디새김
「그가 마련한 옷은 의인이 입고, 은은 죄 없는 이가 나누어 가질 것이네.」욥기 27:17 · 본디새김

악인의 파멸은 가족의 문제에서 재산의 문제로 옮겨 갑니다.

먼지와 진흙은 특별히 귀하거나 드문 것이 아닙니다. 발밑에 흔하게 존재하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귀한 은과 옷을 그런 물질처럼 많이 모아 놓습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풍요의 모습과 함께 은근한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재산을 모았지만, 그가 끝까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7절에서는 재산의 주인이 바뀝니다. ‘마련하다’라는 동사의 반복이 의미 있습니다. 악인이 마련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노력과 소유가 분리됩니다.

악인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정작 자신의 재물이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현실에서 부정하게 쌓은 재산이 반드시 의로운 사람에게 이전된다는 일반 법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악인의 재산이 가진 불안정성과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묘사합니다.

18절에서 그 불안정성이 집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그는 좀벌레처럼 제 집을 지었고, 지키는 이가 만든 초막처럼 지었네.」욥기 27:18 · 본디새김

집은 인간에게 안정의 상징입니다. 사람은 집을 짓고 그 안에 살며,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계획합니다.

그런데 욥이 묘사하는 악인의 집은 좀벌레의 집과 같습니다.

좀벌레는 옷감을 갉아 먹는 작고 약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만드는 보금자리는 견고한 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들판을 지키는 사람이 만든 초막입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족이 살아갈 집이 아니라 특정한 일을 위해 세우는 임시 거처입니다.

좀벌레의 집과 지키는 이의 초막은 서로 다른 이미지지만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악인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 집이 실제로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에서는 이 교훈을 들을 때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욥에게도 한때 집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집과 그 안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사건이 욥의 불의함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집이 무너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주인의 인격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밭이나 포도원을 지키는 사람은 수확철에 임시로 머무를 작은 거처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잠언 10:25에서는 폭풍이 지나갈 때 악인은 사라지지만 의인은 영원한 기초와 같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 모두 악인의 안전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집과 파괴의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욥기 27:19–21 본문 →

「그는 부자로 누워도 거두어지지 않네. 눈을 뜨니, 그는 사라지고 없네.」욥기 27:19 · 본디새김

19절은 짧지만 해석하기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거두어지지 않네’는 부자로 누웠지만 죽은 뒤 조상들에게 합당하게 합류하거나 장사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칠십인역처럼 부자로 누웠지만 다시는 그렇게 눕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그는 사라지고 없네’ 역시 부자가 죽어 없어졌다는 뜻인지, 그가 가진 재산이 사라졌다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 다른 장면을 만듭니다. 하나는 부유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룻밤 사이에 재산이 사라지는 몰락입니다.

그러나 공통된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가 누울 때 가지고 있던 것은 그에게 지속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욥은 이 장면을 더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눕고, 눈을 뜨고, 그다음에는 무언가가 사라져 있습니다. 짧은 표현이 오히려 파멸의 갑작스러움을 강조합니다.

20절에서는 그 파멸이 강렬한 이미지로 펼쳐집니다.

「공포가 물처럼 그를 덮치고, 밤에는 폭풍이 그를 훔쳐 가네.」욥기 27:20 · 본디새김

앞에서 악인은 은과 옷을 쌓아 놓았습니다. 그 재산이 마치 자신을 보호해 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밀려드는 물과 폭풍 앞에 서 있습니다. 물처럼 덮친다는 표현은 막을 수 없는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도둑은 주인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물건을 가져갑니다. 마찬가지로 폭풍은 한밤중에 찾아와 그가 누리던 안전을 갑자기 빼앗습니다.

「동풍이 그를 실어 가니 그가 떠나가고, 그가 있던 곳에서 그를 휩쓸어 가네.」욥기 27:21 · 본디새김

사람은 자신이 차지한 자리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재산, 집, 가족, 사회적 지위가 모두 그 자리를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폭풍은 사람을 ‘그가 있던 곳’에서 떼어 놓습니다. 그는 단순히 무엇을 조금 잃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서 있던 기반 전체에서 밀려납니다.

이 장면은 욥기 1:19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큰 바람이 집을 덮쳐 욥의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27장의 동풍과 1장의 큰 바람이 동일한 바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람이 인간의 집과 삶을 갑작스럽게 파괴한다는 이미지가 반복됩니다.

바로 이 반복 때문에 27장의 악인 묘사는 더욱 불편하게 들립니다. 악인에게 닥친다고 묘사되는 재앙과 욥 자신이 실제로 당한 재앙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재앙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왜 특정한 사람에게 일어났는지는 그 광경만으로 알아낼 수 없습니다.

욥의 경험이 이미 그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거두어지지 않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아사프(⁨אָסַף⁩), 곧 모으거나 거두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본문의 형태는 ‘거두어지다’, ‘모아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그가 더 이상 같은 상태를 계속하지 못한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동쪽이나 동남쪽의 건조한 사막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때로 매우 뜨겁고 파괴적인 힘을 가진 바람으로 묘사됩니다. 호세아 13:15에서도 동풍은 물의 근원을 마르게 하고 샘을 말리는 파괴적인 힘으로 등장합니다.

마지막에 들리는 손뼉과 쉿쉿 소리

욥기 27:22–23 본문 →

「그를 향해 내던지며 가엾게 여기지 않으니, 그는 그 손에서 기를 쓰고 달아나네.」욥기 27:22 · 본디새김
「그를 향해 손뼉을 치고, 그 자리에서 그를 향해 쉿쉿 소리를 내네.」욥기 27:23 · 본디새김

27장의 마지막 장면은 악한 사람의 완전한 몰락을 보여 줍니다.

동작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22절에서 무언가를 그에게 내던지는 주체는 앞 절의 동풍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23절에서 손뼉을 치고 쉿쉿 소리를 내는 주체 역시 명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악인의 몰락을 보고 조롱하는 장면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앞에서 묘사한 폭풍과 그 파괴적인 힘이 계속 의인화되어 있다고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 표현은 적대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손뼉을 친다는 것은 쉿쉿 소리를 내는 것과 나란히 놓여 있으므로 조롱과 경멸을 드러내는 몸짓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가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손뼉을 칩니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 악인이었는지를 그 손뼉이 증명할 수 있습니까?

본문은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욥기의 이야기 전체는 우리가 그 대답을 쉽게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욥 자신도 공동체 안에서 조롱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욥기 19:13–19에서 그는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하고 미워한다고 탄식했습니다.

악인이 조롱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조롱받는 사람이 반드시 악인인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은 문맥상 하나님의 심판이 바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15에서도 예루살렘의 파멸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비웃으며 머리를 흔듭니다. 그런 점에서 욥기 27장의 마지막 장면 역시 파멸한 사람을 향한 공개적인 조롱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끝까지 붙드는 것

욥기 27:1–23 본문 →

27장을 하나로 읽으면 욥의 태도가 복잡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자신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으셨다고 항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만약 욥이 하나님께 정의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권리를 빼앗겼다고 항의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항의는 하나님께 정의를 기대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욥은 악인이 번영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악인의 파멸을 이야기합니다. 이 두 진술을 하나로 묶어 ‘악인은 언제나 번영하다가 반드시 마지막 순간에 파멸한다’는 확정적인 시간표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외적인 결과만으로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판단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욥은 바로 그 풀리지 않은 긴장 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욥에게는 자신의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감추어진 죄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집을 부리는 것과 다릅니다. 고집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물었습니다(13:23). 그가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죄를 사실로 인정하라는 요구입니다.

욥기 27장에는 두 종류의 붙듦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은을 먼지처럼 쌓고, 옷을 진흙처럼 마련하고, 자기 집을 세웁니다. 그는 자신이 확보한 것들이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바람이 그를 그 자리에서 휩쓸어 갑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의 몸은 병들었고,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도 아직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하나만큼은 놓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나는 내 의로움을 붙들었고 그것을 놓지 않겠네.」

이 말이 욥의 모든 질문을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의 삶을 쓰라리게 하셨는지도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그의 맹세는 마침내 아주 단순한 결심으로 남습니다. 「내 입술은 불의를 말하지 않겠네. 내 혀는 속임수를 내뱉지 않겠네.」

폭풍이 불고, 재산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손뼉과 조롱이 들리는 가운데, 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힘이 없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을 방법도 아직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입술에서 나올 말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숨이 남아 있는 동안, 자신이 진실이라고 아는 것을 거짓으로 바꾸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