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9장

이 장의 자리 · 38–41장 · 폭풍 속의 대답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

욥기 39장에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동물들이 잇달아 등장합니다.

길들일 수 없는 들나귀가 있고, 엄청난 힘을 가졌으면서도 밭을 갈아 주지 않는 들소가 있습니다. 자신의 알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는 타조가 있고, 전쟁의 함성을 들으면 오히려 흥분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죽임당한 것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피를 먹는 맹금류가 등장합니다.

이 동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유익하거나, 인간의 눈에 바람직하거나,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만 존재의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들나귀는 사람의 짐을 나르지 않아도 자유롭게 삽니다. 들소는 농부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강합니다. 타조는 인간이 기대하는 지혜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놀라운 속도로 달립니다. 전쟁에 나가는 말의 용맹함은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그 용맹함 자체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동물들을 하나씩 보여 주시며 욥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그들의 출생을 지켜보았느냐? 네가 그들을 자유롭게 했느냐? 네가 그들에게 힘과 지혜를 주었느냐? 네 명령으로 그들이 움직이느냐?

이 질문들은 단순히 인간이 동물을 얼마나 모르는지 지적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동안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거의 언제나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왜 고통받습니까? 악한 사람이 왜 번영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에 어떤 보상과 벌을 내리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을 인간의 이해관계가 중심이 아닌 세계로 이끄십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이 지켜보지 않아도 새끼가 태어납니다. 사람이 이용하지 못하는 힘도 존재합니다. 인간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동물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먹여 살리는 일은 때로 다른 생명이 죽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 세계를 보면서 욥은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벽하고 평화롭게 만드셨으니 고통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39장이 묘사하는 자연에는 굶주림과 위험과 죽음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판단으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 세계를 자신이 창조하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38장의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는 굶주린 까마귀 새끼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39장에서는 그처럼 인간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동물들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739장 본문 읽기 →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도 생명은 태어난다

욥기 39:1–4 본문 →

하나님께서는 먼저 산에서 새끼를 낳는 동물들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바위산 염소들이 새끼 낳는 때를 아느냐? 암사슴들이 산고를 겪는 것을 지켜보느냐?」욥기 39:1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동물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새끼를 낳는 때를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바위산 염소와 암사슴은 인간의 가축이 아닙니다. 산속과 들판에서 살아가며, 사람이 늘 곁에서 돌보는 동물도 아닙니다.

그런 동물들이 새끼를 낳을 때 누가 지켜봅니까?

사람이 있는 집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들이 그 일을 기억합니다. 양이나 소를 기르는 목자는 가축의 출산 시기를 살피고 새끼들이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산속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의 출산은 대부분 인간의 관심 밖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들의 임신 기간을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것들이 채우는 달수를 세느냐? 그것들이 새끼 낳는 때를 아느냐?」욥기 39:2 · 본디새김

「달수를 세느냐」는 질문에는 단순한 생물학적 지식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임신한 동물의 시간을 계속 살피며, 새끼가 태어날 때가 언제인지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 집의 가축들을 돌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야생동물이 언제 새끼를 낳는지 하나하나 살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연 세계에서는 그런 출산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몸을 웅크려 새끼들을 밀어 내고, 제 산고를 떠나보낸다.」욥기 39:3 · 본디새김
「그 새끼들은 튼튼해져 들에서 자라고, 나간 뒤에는 어미들에게 돌아오지 않는다.」욥기 39:4 · 본디새김

3절의 「산고를 떠나보낸다」는 표현은 출산의 고통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짧은 두 구절 안에 한 생명의 중요한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태어남, 성장함, 독립함.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에 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묻고 계십니다. 욥은 새끼가 태어나도록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새끼들이 자라는 모든 순간을 지켜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미를 떠나 살아갈 곳을 마련해 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고 돌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생명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모든 출산이 반드시 안전하게 끝난다는 보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도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출산에는 고통이 있고, 새끼들은 거친 들판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미처 살피지 못하는 세계를 자신의 질문 속에 포함하십니다.

욥에게는 이 장면이 남다르게 다가왔을 수 있습니다. 욥은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사랑하고 돌보았지만,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생명들을 지켜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욥의 자녀들이 왜 죽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산속에서 새끼들이 태어난다는 사실로 욥의 상실을 보상하거나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욥에게 그가 돌볼 수 있었던 세계보다 훨씬 넓은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이제 출생에서 자유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에서 새끼들이 어미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어미와 새끼의 모든 관계가 그 순간 완전히 끊어진다는 생물학적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생동물의 새끼들이 성장하여 독립하는 일반적인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합니다.

누가 들나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느냐?

욥기 39:5–8 본문 →

「누가 들나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느냐? 들나귀를 매는 줄들을 누가 풀어 주었느냐?」욥기 39:5 · 본디새김

들나귀는 원래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사람이 소유했다가 풀어 준 가축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누군가 그 동물을 묶어 두었다가 줄을 풀어 준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들나귀의 자유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에서 그 동물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자유롭게」(⁨חׇפְשִׁי⁩)에 해당하는 낱말은 종이 주인에게 매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낱말은 욥기 3장 19절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욥은 죽음의 세계를 묘사하며 종이 주인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앞의 3장 18절에서는 갇힌 사람들이 그곳에서 안식을 얻고, 그들을 몰아붙이는 자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읍의 소란을 비웃으며, 몰아붙이는 자의 고함을 듣지 않는다.」욥기 39:7 · 본디새김

여기서 「몰아붙이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גַשׂ⁩)는 욥기 3장 18절에서 갇힌 사람들이 더 이상 듣지 않는다고 했던 그 압박자의 표현과 같습니다.

같은 책 안에서 두 장면이 서로를 비추는 것입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죽음을 갈망하며, 죽어야만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살아 있는 들나귀를 보여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여기서 욥의 죽음에 대한 소망을 직접 반박하고 계신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낱말들이 만들어 내는 대비는 의미심장합니다.

욥이 죽음의 세계에서 생각했던 자유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살아 있는 동물의 세계에도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그 자유가 어떤 삶인지 설명하십니다.

「내가 메마른 벌판을 그 집으로, 소금 땅을 그 거처로 삼았다.」욥기 39:6 · 본디새김

들나귀의 집은 풍요로운 목장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좋은 땅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농사를 짓기에도 불리하고, 풍부한 물과 풀이 있는 장소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불편한 땅이 어떤 동물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거처가 됩니다.

「그것은 산들을 뒤져 풀을 뜯고, 푸른 것은 무엇이나 찾아다닌다.」욥기 39:8 · 본디새김

들나귀의 자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주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산들을 돌아다니며 풀을 찾아야 합니다. 메마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살아갑니다. 그 자유에는 위험과 수고가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매여 있는 삶이 아닙니다.

사람은 동물의 가치를 흔히 자신에게 얼마나 유용한지로 판단합니다. 나귀라면 짐을 실어 나르고, 농사일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나귀에게 주신 삶은 인간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도 자신의 창조 세계 안에 마련하셨습니다. 자유는 인간만이 누려야 할 가치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들나귀의 자유로운 삶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속합니다.

들소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인간이 사용할 수 있습니까?

힘이 크다고 모두 네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욥기 39:9–12 본문 →

「들소가 기꺼이 너를 위해 일하겠느냐? 네 구유 곁에서 밤을 보내겠느냐?」욥기 39:9 · 본디새김

들소는 큰 힘을 지닌 동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소의 힘을 인간의 농사일과 연결하여 질문하십니다.

「네가 들소를 그 밧줄로 고랑에 묶을 수 있느냐? 그것이 네 뒤에서 골짜기 땅을 써레질하겠느냐?」욥기 39:10 · 본디새김
「그 힘이 크다고 그것을 믿겠느냐? 네 수고의 결실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욥기 39:11 · 본디새김

들소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을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농부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힘센 동물이 아닙니다. 고랑을 따라 움직이고, 밧줄에 매이며, 농부의 지시에 응답하는 동물입니다. 곡식을 타작마당으로 가져오는 일을 맡기려면 그 동물이 인간의 노동 체계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들소는 그러한 동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밤에 사람의 구유 곁에서 지낼 것인지, 밭을 갈고 곡식을 모아 줄 것인지 물으십니다. 질문에 예상되는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그것이 네 곡식을 가져와 네 타작마당에 모아 주리라고 믿겠느냐?」욥기 39:12 · 본디새김

11절의 동사는 믿거나 신뢰한다(⁨בָּטַח⁩)는 의미를 지닌 낱말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소의 힘이 얼마나 큰지 묻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큰 힘을 네가 믿고 네 삶의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강한 힘과 신뢰할 수 있는 노동력은 다릅니다.

들소의 힘은 인간이 이용할 수 없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덜 강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에게 쓸모 있게 다스려지지 않는 힘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는 존재합니다.

들나귀는 사람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들소는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둘 다 자신의 창조 세계에 속한 동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동이나 가축 사육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가축을 기르고 땅을 경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과 권한이 모든 피조물을 자기 목적에 맞게 사용하도록 허락된 무제한의 지배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소의 힘을 통해 욥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떤 존재의 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 존재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 되느냐고.

그런데 다음 동물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들나귀와 들소는 적어도 자유롭고 강하다는 점에서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타조는 어리석은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רְאֵם⁩)는 강하고 거친 야생 소과 동물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됩니다. 멸종한 야생 소인 오록스와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 낱말만으로 현대 생물학적 종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6–28절의 인간에게 주어진 다스림에 관한 말씀과 연결해서 읽더라도, 욥기 39장은 인간이 실제로 모든 동물을 통제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질문을 다루므로, 한쪽이 다른 쪽을 단순히 부정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지혜롭지 않은 타조에게도 놀라운 능력이 있다

욥기 39:13–18 본문 →

「타조의 날개는 즐겁게 펄럭인다. 그러나 그것이 황새의 날개깃과 깃털이냐?」욥기 39:13 · 본디새김

타조는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하늘을 날아오르는 데 사용하는 새는 아닙니다. 날개를 크게 펼치고 펄럭이는 모습은 인상적이지만, 다른 새들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황새와 비교하는 표현은 원문에서도 해석이 어렵습니다. 「황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시다(⁨חֲסִידָה⁩)는 인애나 신실함을 뜻하는 헤세드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황새는 새끼를 돌보는 모습과 연결하여 생각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13절은 타조가 황새처럼 보이는 날개를 가졌지만, 황새와 같은 방식으로 새끼를 돌보지는 않는다는 대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질문이 황새의 날개와 타조의 날개를 정확히 어떤 관계로 비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단순히 황새는 훌륭한 어미이고 타조는 나쁜 어미라는 확정적인 판단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제 알들을 땅에 내버려 두고, 흙 위에서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다.」욥기 39:14 · 본디새김
「그러고는 발이 그 알을 짓누를 수 있고, 들짐승이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잊는다.」욥기 39:15 · 본디새김

타조는 나무 위에 둥지를 만드는 새가 아닙니다. 땅 위에 알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타조가 위험을 잊어버린 것처럼 묘사하십니다.

여기서 본문이 말하는 것은 타조의 행동에 대한 시적 관찰입니다. 모든 타조가 실제로 알을 버리고 새끼를 돌보지 않는다는 생물학적 법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조도 알을 품고 새끼를 돌보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시가 강조하는 모습은 분명합니다. 타조에게는 자신의 알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있습니다.

「제 새끼들을 제 것이 아닌 양 모질게 대하고, 제 수고가 헛되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욥기 39:16 · 본디새김
「하나님이 그것에게 지혜를 잊게 하고, 분별을 나누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욥기 39:17 · 본디새김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동물에게 지혜를 주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창조 세계를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우리가 보기에 완벽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기대하기 쉽습니다. 동물은 자기 새끼를 안전하게 돌보아야 하고, 위험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하며, 언제나 생존에 가장 유리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연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떤 동물은 놀라운 지혜를 가진 것처럼 행동합니다. 어떤 동물은 인간의 눈에 어리석거나 불완전해 보이는 행동을 합니다. 그럼에도 둘 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상황이 뒤집힙니다.

「그것이 높이 날개를 퍼덕일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비웃는다.」욥기 39:18 · 본디새김

타조는 날아오를 수 없지만, 날개를 펼치고 빠르게 달릴 수 있습니다. 18절은 바로 그 속도와 활력을 강조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부족해 보였던 동물이 다른 영역에서는 놀라운 능력을 드러냅니다.

한 가지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 존재의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타조는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다른 능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모든 결핍이 사실은 숨겨진 장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알이 위험에 노출되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조의 부족한 분별력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타조의 놀라운 속도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특성들이 한 피조물 안에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욥은 30장 29절에서 자신이 들짐승의 형제이며 타조의 벗이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황량한 곳의 동물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느낀 것입니다.

욥이 자신의 비참함을 표현하기 위해 언급했던 동물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피조물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욥에게 곧바로 자신의 고통을 긍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욥이 하찮거나 비참하게 여겼던 존재에도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모습이 있다는 사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는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연결이 있습니다. 타조가 말과 그 탄 자를 비웃자,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그 말을 등장시키십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지혜를 잊게 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나님께서 타조에게 지혜를 잊도록 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타조가 원래 인간과 같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과정을 설명한다기보다, 타조에게 특정한 분별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쟁터로 달려가는 말은 누구에게서 용기를 얻었는가?

욥기 39:19–25 본문 →

「네가 말에게 힘을 주느냐? 그 목에 갈기를 입히느냐?」욥기 39:19 · 본디새김

이제 하나님께서는 욥이 잘 아는 동물을 말씀하십니다. 말은 앞서 등장한 들나귀나 들소와 다릅니다. 인간은 말을 기르고 훈련하여 이동과 전쟁에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묻지 않으십니다.

「네가 그것을 메뚜기처럼 뛰게 하느냐? 그 투레질의 위세는 두려움을 일으킨다.」욥기 39:20 · 본디새김

메뚜기는 몸을 튀어 오르게 하며 빠르게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이 뛰어오르고 질주하는 모습을 그 움직임에 비유하십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묘사는 단순한 달리기와 다릅니다.

「골짜기에서 땅을 파헤치며 제 힘을 기뻐하고, 무기에 맞서 나아간다.」욥기 39:21 · 본디새김
「그것은 두려움을 비웃고 겁내지 않으며, 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욥기 39:22 · 본디새김

이 말은 전쟁터에 나가는 말입니다.

들나귀는 성읍의 소란을 비웃었습니다(39:7). 타조는 말과 그 탄 자를 비웃었습니다(39:18). 이제 말은 두려움을 비웃습니다(39:22).

세 구절의 「비웃다」(⁨שָׂחַק⁩)에는 모두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 웃음의 대상은 서로 다릅니다. 들나귀는 인간 사회의 소란에 매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타조는 말과 기수보다 빠르게 달리는 능력을 드러냅니다. 전쟁터의 말은 칼과 무기를 보고도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의 용맹함은 한층 복잡한 의미를 갖습니다.

들나귀는 인간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들소는 인간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반면 전쟁터의 말은 인간의 활동에 깊이 관여합니다. 기수를 태우고 전쟁에 나갑니다.

그러나 그 용맹함의 근원까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전쟁터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위에서 화살통이 덜거덕거리고, 창날과 투창도 덜거덕거린다.」욥기 39:23 · 본디새김
「떨림과 흥분 속에 땅을 삼키고, 뿔나팔 소리가 나면 가만히 서 있지 못한다.」욥기 39:24 · 본디새김
「뿔나팔이 울릴 때마다 『아하』 하고 말하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우렛소리와 전투 함성을 듣는다.」욥기 39:25 · 본디새김

「땅을 삼킨다」는 표현은 말이 얼마나 빠르고 힘차게 달려 나가는지를 보여 주는 시적 과장입니다. 마치 달리는 말이 앞에 있는 땅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것 같습니다. 25절에서는 말이 「아하」라고 말합니다. 나팔소리를 들었을 때 내는 흥분과 기세를 사람의 감탄사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 힘과 용기는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사용되는 장소는 전쟁터입니다. 말은 칼과 창을 향해 달려 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의 용맹함을 자신의 창조 세계에 속한 능력으로 보여 주신다고 해서 인간의 전쟁과 살육을 모두 긍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본문은 전쟁이 의로운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인간이 전쟁에 사용하는 동물의 힘과 기질조차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어려운 질문도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는 왜 이렇게 두려움을 모르고 위험을 향해 달려가는 생명도 있습니까?

이 질문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말은 타조와 다릅니다. 사냥당하지 않으려고 달아나는 동물도 아니고,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도 아닙니다. 이 말은 오히려 위험 속으로 돌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존재도 자신의 창조 세계에 포함하여 말씀하십니다. 창조 세계에 있는 모든 능력이 인간의 평안과 안전에 직접적으로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욥기 전체의 질문과 맞닿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에 왜 고통과 파괴가 존재하는지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연 세계에는 위험과 용맹, 생존과 죽음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 세계를 인간의 경험만으로 완전히 판단할 수 있습니까?

이제 마지막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갈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마는 뜻이 확정되지 않은 낱말입니다. 말의 목에서 휘날리는 갈기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지만, 천둥이나 전율을 연상시키는 위세를 뜻한다고 이해하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말의 목에 갈기를 입힌다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택했습니다. 24절의 뿔나팔에 관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그 소리를 믿지 않는다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너무 흥분하여 나팔이 울리는 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는 뜻인지, 소리가 나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뜻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전쟁의 신호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말의 모습이라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높은 곳에서 먹이를 찾고, 죽음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는 새들

욥기 39:26–30 본문 →

「매가 날아오르고 남쪽으로 제 날개들을 펼치는 것이 네 분별에서 비롯되느냐?」욥기 39:26 · 본디새김

남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계절과 바람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새의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그 방향 감각과 비행 능력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매는 욥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욥의 분별을 빌려 방향을 정하지도 않습니다.

「독수리가 높이 솟아오르고 높은 곳에 제 둥지를 두는 것이 네 명령에 따른 것이냐?」욥기 39:27 · 본디새김
「그것은 바위에 살며 밤을 보낸다, 바위의 이빨 위, 요새 같은 곳에서.」욥기 39:28 · 본디새김

「바위의 이빨」이라는 표현은 바위가 뾰족하게 솟아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곳은 「요새 같은 곳」입니다. 적이 쉽게 올라갈 수 없는 높은 성채처럼, 그 새는 접근하기 어려운 바위에서 살아갑니다.

여기까지 보면 안전한 거처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높은 곳에서 새끼를 기르고, 위험한 것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높은 장소의 다른 의미가 드러납니다.

「거기에서 먹이를 찾고, 그 눈은 멀리까지 바라본다.」욥기 39:29 · 본디새김

높은 바위는 단순히 안전한 거처가 아닙니다. 먹이를 찾기에 유리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은 아름다운 비행의 장면을 예상 밖의 모습으로 끝냅니다.

「그 새끼들은 피를 마시고, 죽임당한 것들이 있는 곳에 그것도 있다.」욥기 39:30 · 본디새김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피와 죽음입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창조 세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은 바위는 새끼를 보호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한 생명이 살아가는 일이 다른 생명의 죽음과 연결되는 세계입니다.

38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까마귀 새끼들은 먹을 것이 없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욥 38:41). 그런데 이번에는 맹금류의 새끼들이 피를 먹습니다. 두 장면 모두 새끼들의 먹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장면은 굶주림과 부르짖음을 보여 주고, 두 번째 장면은 피와 죽음이 있는 곳에서 먹이를 얻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는 생명을 먹이시는 돌봄이 언제나 인간의 눈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죽음과 고통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결론지을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자연 세계의 먹이 관계를 묘사하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죽음의 도덕적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장면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쉽게 이해하거나 단순한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더욱 깊게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매와 27절의 독수리라는 이름은 현대의 정확한 종을 확정한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로 옮긴 히브리어는 독수리나 대형 수리류, 일부 맹금류를 가리킬 수 있는 이름입니다. 30절의 「피를 마시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이곳에서 드물게 사용되는 표현이므로 정확한 행동을 세밀하게 복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새끼들이 피와 관련된 먹이를 섭취한다는 시적 장면은 분명합니다. 또한 「죽임당한 것들」은 죽은 존재들을 가리키지만, 이 구절만으로 반드시 전쟁에서 죽은 인간의 시체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전쟁터의 말이 등장했기 때문에 전쟁의 죽음을 떠올릴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맹금류가 먹이를 구하는 일반적인 상황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피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

욥기 39:1–30 본문 →

욥기 39장은 매우 조용한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도 새끼가 있었고, 마지막에도 새끼가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출생의 고통이 등장했고, 마지막에는 죽음과 피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명은 태어나고 죽는다는 자연의 순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세계에는 인간이 기뻐할 만한 장면도 있고, 인간이 불편하게 느낄 만한 장면도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중 아름다운 장면만을 골라 욥에게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위험과 무지와 굶주림과 죽음이 존재하는 세계를 그대로 보여 주십니다.

이 동물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인간보다 강하거나 신비롭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각기 다른 삶을 주셨으며, 그 삶이 인간의 목적에 모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로운 사람에 대한 보상과 악한 사람에 대한 벌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39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세계에는 인간의 의로움이나 죄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이러한 자연 세계의 묘사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불의와 폭력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모든 사건을 인간의 공로와 죄에 대한 즉각적인 보응으로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정의로운 통치입니다. 그러나 그 정의가 인간이 예상하는 모든 인과관계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고난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시작되었는지 이 장에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욥이 겪은 고통이 그의 죄에 대한 징계라고 선언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욥이 지금까지 사용해 온 판단의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욥에게 새로운 신뢰의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뢰는 자신의 질문을 거짓으로 만들거나 고통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과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구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독자는 여전히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을 다스리신다면, 왜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의 죽음에 기대어 살아갑니까? 왜 어떤 새끼들은 먹이를 얻고, 어떤 새끼들은 굶주립니까? 39장은 그 질문에 대해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동물들의 삶을 보여 주시고, 그 삶의 모든 순간을 네가 알고 다스릴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욥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높은 바위 위에서는 어린 맹금류들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 곳을 바라보던 어미 새는 먹이를 찾아 날아갑니다. 그 아래 어딘가에는 죽임당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피와 죽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모두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지 설명하는 말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욥은 이제 그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묻던 것은 자기에게 왜 이런 고통이 닥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은 자기 고통만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높은 바위 위의 새끼들은 여전히 먹이를 먹고 있고, 그들의 삶은 인간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 장면에서 하나님의 질문이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