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3–17장 · 마지막 식사와 작별

세상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때

요한복음 16장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16:7).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이롭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직접 보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물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신 뒤 제자들이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자신들을 죽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는 일까지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고, 제자들은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제자들에게 이로운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역설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6장의 마지막을 먼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너희는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고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여기에는 요한복음 16장을 관통하는 두 가지 대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지만 제자들은 버림받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고난을 겪지만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의 한가운데에는 「너희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20)라는 또 다른 역설이 있습니다. 슬픔이 끝나고 새로운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시는 일, 변호해 주실 성령의 오심,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을 보게 되는 일, 아버지께 직접 구할 수 있게 되는 일을 차례로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는 자신 있게 믿음을 고백하는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이 곧 흩어져 자신을 혼자 버려둘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평화와 기쁨은 무엇을 근거로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제자들이 얼마나 굳건하게 예수님께 매달려 있는가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이루시고 어떤 관계를 열어 주시는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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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다

요한복음 16:1–4 본문 →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이 지금까지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너희가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이것을 너희에게 이야기했다.」요한복음 16:1 · 본디새김

「걸려 넘어지다」는 단순히 실수하거나 잠시 낙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에서 비롯되어, 신앙과 관계에서 실족하거나 믿음에서 이탈하는 의미로도 쓰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은 고난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면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서 쫓겨나고 박해받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묻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로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배척당하는 것일까?

특히 2절은 충격적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회당 공동체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여길 때가 온다.」요한복음 16:2 · 본디새김

당시 유대 사회에서 회당은 성경을 읽고 예배하며 공동체의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배제되는 일은 종교적 소속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드린다」(λατρεία)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봉사를 뜻하는 낱말이 쓰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들이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것이다.」요한복음 16:3 · 본디새김

종교적인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일이 반드시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확신으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박해를 유대인 전체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 역시 유대인이었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도 등장합니다. 본문이 겨냥하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을 거절하는 행동입니다.

어떤 행동이 종교적인 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를 아는 관계를 강조하시고, 뒤에서는 진리의 영께서 세상의 잘못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적 확신 자체가 진리의 최종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처음부터 말씀하지 않으신 까닭도 밝히십니다.

「그러나 그 일들의 때가 오면 그 일들에 관해 내가 너희에게 말했다는 것을 너희가 기억하도록 이것을 너희에게 이야기했다. 이것을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4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전에는 박해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갈등의 중심에는 주로 예수님 자신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제자들이 직접 그 갈등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보다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은 이미 이런 배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9장에서 눈먼 사람의 부모는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 예수님에 관한 질문에 직접 답하기를 피했고(9:22), 12장에서는 지도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12:42). 1절의 「걸려 넘어지다」는 원문의 스칸달리조, 2절의 「예배를 드린다」는 라트레이아를 옮긴 말입니다.

아무도 다시 묻지 않는 질문 — 어디로 가십니까?

요한복음 16:5–7 본문 →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 아무도 나에게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지 않는다.」요한복음 16:5 · 본디새김

정말 아무도 묻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베드로는 분명히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13:36). 도마도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14:5).

예수님께서는 지금 아무도 묻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도마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와 자신들이 어떻게 따라갈 수 있는지에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떠남이 무엇을 이루게 될 것인지 제자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슬픔이 너희 마음을 가득 채웠다.」요한복음 16: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자신들은 어떻게 될까요? 누가 그들을 이끌어 줄까요? 앞으로 닥칠 박해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그런 걱정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가장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변호해 주실 분이 결코 너희에게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복음 16:7 · 본디새김

예수님의 떠남은 성령의 오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임재와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행동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는 진리의 영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시고, 그들을 진리 안에서 이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동행보다 성령의 임재가 더 우월하다는 단순한 비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을 완성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가르치실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세상의 잘못을 밝혀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했는데, 성령께서 세상의 잘못을 드러내시다

요한복음 16:8–11 본문 →

「그분이 오시면, 죄를 두고 의를 두고 심판을 두고, 세상의 잘못을 밝혀 드러내실 것이다.」요한복음 16: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요한복음 16장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구절은 흔히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죄책감을 일으켜 회개하도록 하시는 일로 설명됩니다. 그런 역할을 성령의 사역과 연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조금 더 넓은 장면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 옳고, 제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원문의 엘렝코(ἐλέγχω)는 잘못을 밝히다, 죄를 드러내다, 논박하여 잘못을 입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는 결과까지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이 입증되어도 그 사람이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붙잡혀 심문받고 죽임당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단할 것이고, 세상의 권력은 예수님을 처형할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판단 자체가 뒤집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 —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

「죄에 관해서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세상의 모든 죄를 목록으로 나열하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며,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시고 아버지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거절하는 일은 한 종교적 교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과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생명을 거절하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3:19에서도 심판은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판단할지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절한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의 —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

「의에 관해서는 내가 아버지에게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1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일이 왜 의를 드러내는 것일까요? 먼저 「의」가 누구의 의를 가리키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드러내신다는 해석입니다. 이 읽기에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의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대비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자신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는 해석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일은 세상이 내린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사실, 곧 예수님의 정당함이 입증되는 일을 드러냅니다.

두 해석은 서로 연결될 수 있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유가 「내가 아버지에게로 가고」라는 사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 자신이 옳으셨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해석은 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재는 세상에 의해 제거되셨다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의 일부입니다.

심판 — 이미 심판받은 세상의 임금

「심판에 관해서는 이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11 · 본디새김

세상의 권력은 예수님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임금」은 요한복음 12:31과 14:30에서도 등장하며, 하나님께 맞서는 악한 지배 권세를 가리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높이 들리실 때 이 세상의 임금이 밖으로 내쫓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31–32).

그렇다면 세상의 악은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박해와 고난을 겪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판결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났지만, 세상에서는 여전히 그 판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설명을 함께 읽으면 성령께서 하실 일이 분명해집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거절이 죄로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예수님의 의로움이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제거함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심판받은 쪽은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법정과 종교 공동체에서 죄인처럼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박해자들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제자들이 고난을 피하게 해 주는 약속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진리가 사라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은 세상을 향한 증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이미 심판을 받았다」에는 완료형 케크리타이가 쓰입니다. 판결이 내려졌고 그 결과가 유효하다는 의미를 표현합니다. 악의 권세가 이미 심판받았다는 사실과, 그 권세의 활동과 영향이 역사 속에서 즉시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구별됩니다.

아직 지고 갈 수 없는 말씀을 누가 이해하게 할 것인가

요한복음 16:12–15 본문 →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세상을 향해 하실 일을 설명하신 뒤, 제자들을 다시 바라보십니다.

「나는 아직 너희에게 할 말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은 그 말을 지고 갈 수 없다.」요한복음 16:12 · 본디새김

「지고 갈 수 없다」는 무언가를 들어 올리거나 지고 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비유적으로 어떤 부담이나 무게를 감당하는 일에도 쓰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지적인 이해력만 부족하다는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알지 못하고, 그 사건 이후 자신들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계를 아십니다. 그러나 그 한계 때문에 진리를 알지 못한 채 남겨 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에서 이끄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에게서 나온 말을 하지 않고 도리어 들을 것을 모두 이야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6:1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도 제자들의 배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진리」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 말씀을 성령을 받으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게 된다는 약속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독립적인 메시지를 만들어 전하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고, 듣는 것을 전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분이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내 것에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14 · 본디새김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새로운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13절의 「앞으로 올 일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 제자들이 겪게 될 일들을 이해하도록 하는 가르침을 포함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미래의 모든 사건을 미리 예측하는 능력을 약속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것이 내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그분이 내 것에서 받으신다고, 또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요한복음 16:15 · 본디새김

여기서는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관계가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되고, 성령께서는 예수님께 속한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십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자신들이 아직 감당하지 못하는 진리를 점차 알아 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부재를 이용해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주장이나 경험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활동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그 활동이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떠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혼란을 다시 다루시면서 하나의 짧은 표현을 반복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고, 다시 조금 있으면 보게 된다

요한복음 16:16–22 본문 →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더는 보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요한복음 16:16 · 본디새김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묻습니다. 「『조금』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동시에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로서는 두 말씀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해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곧 죽으신 예수님을 더 이상 이전처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고, 그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합니다(20:19–20).

성령의 오심을 통해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되는 일이나, 장래에 예수님과 완전히 함께하게 될 소망까지 포함하여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20–22절에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과정과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생각하면, 부활 후의 만남을 우선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곧바로 죽음과 부활의 일정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들이 경험하게 될 감정의 변화를 말씀하십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곡할 것이고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복음 16:20 · 본디새김

예수님을 미워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위협이 사라진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제자들에게는 스승을 잃는 사건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과 슬픔의 관계를 뒤집으십니다.

슬픔이 단순히 기쁨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가져온 바로 그 사건이 나중에 기쁨의 이유가 되는 변화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제자들은 그 죽음을 더 이상 단순한 실패나 상실로만 이해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변화를 설명하시기 위해 아이를 낳는 여인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에는 슬픔을 지니고 있다. 자기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면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기쁨 때문에 그 괴로움을 더는 기억하지 않는다.」요한복음 16:21 · 본디새김

출산의 고통과 기쁨은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닙니다. 출산 후의 기쁨은 고통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생깁니다. 제자들이 슬퍼할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이지만, 그 죽음은 마지막 결과가 아닙니다. 그들의 슬픔은 그 사건의 마지막 의미가 드러나기 전의 슬픔입니다.

다만 이 비유를 모든 고난이 반드시 더 큰 축복을 낳는다는 보편적인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 삶에서는 고통이 고통으로 남는 경우도 있고, 슬픔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이유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경험하게 될 특별한 변화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예수님의 말씀을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저 참으면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긴다는 식으로 사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다시 그들을 만나시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도 지금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볼 것이고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너희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지 않는다.」요한복음 16:22 · 본디새김

16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볼 것이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행동의 주체가 바뀝니다.

이 표현이 반드시 제자들의 수동성만을 강조하려는 의도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남은 제자들이 어떻게든 예수님을 찾아내는 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만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합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성공이나 인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계시며 자기 사람들을 만나신다는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복음 20:20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자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합니다. 십자가에서 입으신 상처가 사라진 것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상처를 지니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기뻐합니다.

그들이 슬퍼했던 사건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건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슬픔을 없었던 일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 슬픔의 의미를 바꾸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에는 보는 행동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동사가 쓰입니다. 첫 번째 「보지 못한다」에는 테오레오의 활용형이, 두 번째 「볼 것이다」에는 호라오의 활용형이 쓰입니다. 두 동사는 의미 영역이 겹치므로 단어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는 육체적인 시각, 다른 하나는 영적인 통찰을 뜻한다고 엄격히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이 같은 문장 안에서 두 표현을 달리 사용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출산의 비유는 구약 예언서의 이미지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26:17–19에서는 이스라엘이 고통스럽게 출산하려는 여인과 같이 신음했지만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탄식하고, 이어서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이 선포됩니다. 이사야 66:7–9에서는 시온이 해산의 고통과 새로운 탄생의 이미지로 묘사되며, 그 본래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회복 약속과 새로운 백성의 탄생이 중심입니다. 요한복음 16장은 이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고통을 겪는 가운데 새로운 생명이 나타난다는 주제적 연결은 분명합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요한복음 16:23–28 본문 →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에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복음 16:23 · 본디새김

처음에는 예수님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고, 곧바로 아버지께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묻다」(ἐρωτάω)와 「구하다」(αἰτέω)에는 서로 다른 동사가 쓰입니다. 두 단어의 의미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지만, 이 문맥에서는 첫 번째를 질문하는 일로, 두 번째를 기도로 구하는 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말씀의 흐름이 보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 질문해 왔고, 지금도 그분의 말씀을 두고 서로 묻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무슨 뜻입니까?」

「조금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거쳐 다시 그들을 만나시고, 성령께서 그들을 진리 안으로 이끄시면 지금처럼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게 된다는 약속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와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와 동시에 제자들은 아버지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것입니다. 한 읽기에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에게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으로 읽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내 이름으로」가 아버지께서 주시는 행위와 연결되어,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구조로 이해합니다. 어느 쪽이든 제자들의 기도와 아버지의 응답이 예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에게 청하겠다고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요한복음 16:26 · 본디새김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 청하여 성령을 보내시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4:16). 다음 장에서도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17:9). 예수님께서 더 이상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일까요?

이어지는 27절이 이 말씀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해 왔고 내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줄 믿어 왔기에 아버지가 친히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2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면 반드시 자신이 아버지를 설득하셔야 한다는 생각을 바로잡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자들을 사랑하기를 꺼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들이시는 분도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중보와 아버지의 사랑을 서로 대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아버지를 사랑 없는 분에서 사랑하는 분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고 이루는 일입니다.

사람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청을 듣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해,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는 더 강한 표현이나 더 특별한 방법을 찾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관계 안에서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요청이 제자들이 기대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과의 관계와 사명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관계를 다시 한번 자신의 정체와 연결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세상에 와 있다.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에게로 간다.」요한복음 16:28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에는 예수님의 길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

제자들이 겪게 될 변화는 모두 이 길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으므로 제자들은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성령께서 오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첫 번째 「묻다」에는 에로타오가, 두 번째 「구하다」에는 아이테오가 쓰입니다. 에로타오는 질문하거나 요청한다는 뜻을 가질 수 있고, 아이테오는 무엇인가를 청하거나 요청하는 의미에 더 자주 사용됩니다.

이제 믿는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 너희는 흩어진다

요한복음 16:29–33 본문 →

그의 제자들이 말했다. 「보십시오, 이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고 빗댄 말은 하나도 하지 않으십니다.」요한복음 16:29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조금」이라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자, 마침내 알아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누가 당신에게 물을 필요를 지니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줄 믿습니다.」요한복음 16:30 · 본디새김

이 고백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 아직 할 말이 많지만 그들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셨고(12절),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3절). 그런데 제자들은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큰 시험 앞에 놓이게 될지 아직 모릅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이제 믿느냐?」요한복음 16:31 · 본디새김

이것을 제자들의 믿음을 인정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그들의 지나친 자신감을 드러내는 반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맥에서는 두 의미의 긴장이 함께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곧 겪게 될 시험 앞에서 어떻게 나타날지도 알고 계십니다.

「보아라, 너희가 저마다 자기에게 속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버려둘 때가 온다. 그리고 그때가 이미 왔다. 그런데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32 · 본디새김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질문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곧 그 자리가 비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시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외로움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실제로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떠남이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까지 끊어 놓지는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자신들이 버려진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고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자신의 길에서도 같은 사실이 드러납니다.

물론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실 고난의 모든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은 그 고난 전체를 미리 체계적으로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씀 뒤에 이 장의 마지막 선언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가지게 하려고 이것을 너희에게 이야기했다. 세상에서 너희는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16:33 · 본디새김

「내 안에서」 평화를 가지고, 「세상에서」 고난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현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평화는 세상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이기실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기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에 주어집니다.

아직 재판받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예수님의 패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승리는 무엇보다 세상의 미움과 불신앙이 예수님의 사명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임금은 이미 심판받았으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알고 계십니다. 다가오는 죽음은 예수님께서 사명을 잃어버리신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이겼다고 생각할 바로 그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이 모든 박해를 이겨 내는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곧 흩어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라고 하시면서, 그 근거로 제자들의 충성심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승리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요한복음 16장의 시작과 끝이 서로를 비춥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미리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을 예고하시면서도 자신 안에서 평화를 누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실패 가능성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의 평화는 자신의 믿음이 언제나 흔들림 없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예수님께서 무엇을 이루시는지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평화는 실패를 가볍게 여기거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자들의 연약함이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일의 마지막 말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모여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말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저마다 자기에게 속한 곳으로 흩어져 예수님을 혼자 버려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떠날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자신이 이미 이루신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조금 더 깊이

32절의 장면은 스가랴 13:7에서 목자가 맞으니 양 떼가 흩어진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복음 26:31과 마가복음 14:27은 그 말씀을 예수님의 체포와 제자들의 흩어짐에 직접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6:32는 스가랴를 명시적으로 인용하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예고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33절의 「이겼다」는 원문의 네니케카로, 니카오(이기다·정복하다)의 완료형입니다. 다만 이 완료형 하나만으로 십자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이 이미 역사적으로 완료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아직 이야기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사건들을 앞두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 있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