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3–17장 · 마지막 식사와 작별
세상에 남겨 두고 함께 있게 하시는 기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조금 이상한 두 가지 부탁을 하십니다.
먼저 「나는 당신이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청합니다」(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 갈 무렵에는 「아버지, 나는 당신이 나에게 주신 이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2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쪽에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지 말라고 하시고, 다른 쪽에서는 자신이 계신 곳에 함께 있게 해 달라고 하십니다. 이 두 부탁은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 자신에게 오기만을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에도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세상에 남아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무엇이 그들을 지켜 줄 것이며,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와 달리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기도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아버지께 드리시는 긴 기도를 전합니다.
기도는 크게 세 방향으로 펼쳐집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십니다(1–5절). 이어서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6–19절). 마지막으로 그 제자들의 말을 통해 자신을 믿게 될 사람들까지 기도 안에 품으십니다(20–26절).
그런데 이 세 부분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그것을 세상에 전합니다. 기도는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향해 넓어집니다.
영광을 구하는 기도, 그러나 누구의 영광인가
예수는 이 말을 하고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말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복음 17:1 · 본디새김
첫마디는 「때가 왔습니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때’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아직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고(2:4),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도 그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7:30; 8:20). 그러다가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선언하십니다(12:23).
그런데 그때 말씀하신 영광의 길은 뜻밖에도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12:24).
이제 그때가 실제로 다가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아버지의 영광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납니다.
여기서 영광은 단순히 높은 지위나 찬란한 광채를 뜻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 영광이 사람들에게 가져올 유익은 2절이 답합니다.
「당신이 그에게 모든 육에 대한 권한을 주신 대로 말입니다. 그에게 주신 모든 이에게 그가 영원한 생명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2 · 본디새김
‘모든 육’은 인간의 연약한 육체만을 가리키기보다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성경적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 대한 권한을 받으셨으며, 그 권한은 생명을 주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절은 영원한 생명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것입니다 —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 본디새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면 흔히 끝없이 오래 사는 것을 떠올립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생명의 길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관계의 언어로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습득한다는 의미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참으로 알아보고 믿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7–8절).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지급되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관계에서 이미 시작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과 구별되는 피조물이라는 뜻일까요?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예수님의 존재를 피조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5절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당신 곁에서 지녔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당신 곁에서 당신이 나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복음 17:5 · 본디새김
이는 말씀이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는 요한복음 서두의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1:1, 14).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두 사실을 함께 제시합니다.
그런데 4절에서 잠시 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하도록 주신 일을 온전하게 이루어 땅에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했습니다.」요한복음 17:4 · 본디새김
아직 십자가에 달리지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이미 일을 온전하게 이루셨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이미 행하신 계시와 가르침의 사역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눈앞의 십자가까지 내다보며 완료된 일처럼 말씀하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받으신 사명을 삶 전체로 받아들이셨으며, 이제 그 사명의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이전에 아버지 곁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세상에 남겨질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첫째 해석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드러내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일을 이미 수행하셨다는 데 근거합니다. 둘째 해석은 그 일이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는 말로 읽으며, 요한복음 19:30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으시며 하시는 완료 선언과 연결됩니다. 두 해석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기도는 제자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것이었고 당신이 그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말을 지켰습니다.」요한복음 17: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주신 것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과 자신을 드러내시는 행위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4:5–7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모세 앞에서 선포하신 이름은 발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사랑과 신실함이 풍성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면서도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직접 인용되지는 않지만, 이름을 드러낸다는 말이 무엇을 뜻할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돕는 구약의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과 행동을 통해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18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수행하셨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십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말들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들을 받았고, 내가 당신에게서 나온 줄 참으로 알았으며, 당신이 나를 보내신 줄 믿었습니다.」요한복음 17:8 · 본디새김
그러나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곧 흩어져 자신을 홀로 남겨 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3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지나치게 좋게 평가하신 것일까요?
제자들은 여전히 연약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곧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시작된 믿음을 아버지 앞에서 인정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성취가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아들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이어지는 선물에 대한 응답입니다.
「나는 그들을 두고 청합니다. 세상을 두고가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주신 이들을 두고 청합니다. 그들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7:9 · 본디새김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셨다고 말하고, 이 장의 21절과 23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믿고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9절은 세상을 향한 관심 자체를 부정하는 선언이라기보다, 지금 드리는 기도의 직접적인 대상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세상에 남아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것은 다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것은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았습니다.」요한복음 17:10 · 본디새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 소유가 선언됩니다. 앞에서 아버지께서 모든 육에 대한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이어집니다. 아버지께 속한 이들이 아들에게 속해 있으며, 아들에게 속한 이들이 아버지께도 속해 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이들은 특별히 대단한 집단이 아닙니다. 곧 흩어질 사람들이며, 한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배반하러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지켜 주십시오」 —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 남는 것
「그리고 나는 더는 세상에 있지 않지만 그들은 세상에 있고 나는 당신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당신이 나에게 주신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십시오. 우리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1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아직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만,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다가오는 일을 확실한 현실로 내다보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들과 함께 걸으시고, 가르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눈앞에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부탁하십니다. 지켜 달라는 기도와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함께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보호는 제자들이 위험을 피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하나를 이루도록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 됨의 기준은 「우리처럼」, 곧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시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시며, 아버지는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서로 구별되지만 뜻과 사랑 안에서 하나이십니다. 제자들에게 요청되는 하나 됨도 의견을 일치시키거나 다투지 않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 관계가 그들의 공동체 안에도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 한가운데에는 어두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당신이 나에게 주신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줄곧 지켰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보호했고 그들 가운데 멸망의 아들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7:12 · 본디새김
‘멸망의 아들’은 문맥상 유다를 가리킵니다. 문자 그대로 멸망에게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멸망과 깊이 연결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실제로 멸망의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도 배반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이 이루어졌다는 표현만으로 유다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배반하도록 강제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은 유다의 배반을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이해하도록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책임이 정확히 어떻게 관계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신 뒤 남은 제자들이 스스로 충분히 강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 달라고 청하십니다. 그리고 곧이어 뜻밖의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당신께로 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 안에 가득 채워진 내 기쁨을 지니도록 이 말들을 세상에서 합니다.」요한복음 17:13 · 본디새김
배반과 이별과 적대가 다가오는 밤에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이 기쁨은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사실과,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소리 내어 드리시는 것도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기쁨을 지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보호와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지를 듣게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하나’는 그리스어에서 중성 형태이며,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이시라고 하신 요한복음 10:30에서도 같은 형태가 사용됩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 없는 한 인격이라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12절이 말하는 성경은 요한복음 13:18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자신과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이 자신을 대적한다는 시편 41:9입니다. 본래 이 시편은 가까이 지내던 신뢰받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의인의 탄식이며, 요한복음은 그 배신의 언어를 예수님의 상황에 연결합니다.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 떠나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길
이제 기도는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를 향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의 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7:14 · 본디새김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언제나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구원하려 하시는 세상을 가리키기도 하고(3:16–17),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인간 사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1:10; 15:18–19). 이 대목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적대적인 세상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면 세상과의 접촉을 끊는 것이 안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기도하십니다.
「나는 당신이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청합니다.」요한복음 17:15 · 본디새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관계를 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정체성과 삶의 근원이 세상의 가치와 적대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18절에서 분명해집니다.
「당신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한복음 17:18 · 본디새김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떠나 피신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도 같은 방향으로 보내심을 받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음’과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음’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 안에서 다른 삶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의 「악한 자」는 ‘악한 자’로도 ‘악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기도의 중심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악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세상 안에서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보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부탁을 하십니다.
「진리 안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말이 진리입니다.」요한복음 17:17 · 본디새김
‘거룩하게 하다’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거나 특정한 목적에 바친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바로 다음 절에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말씀이 나오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그들을 구별하여 세워 달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 진리는 막연한 철학적 진리가 아니라 「당신의 말」입니다. 제자들이 받아들인 아버지의 말씀이 그들의 삶을 새롭게 규정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로 구별합니다.
요한복음 10:36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아버지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청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제자들의 사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나는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들도 진리 안에서 거룩해져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19 · 본디새김
예수님에게도 아직 고쳐야 할 부정함이 있다는 말씀일까요? 앞에서 살펴본 ‘거룩하게 하다’의 뜻을 기억하면, 이는 더 나은 도덕적 상태에 도달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신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을 위해」라는 표현과 십자가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문맥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사명에 자신을 바치신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다만 이 절 자체가 십자가를 명시하지는 않으므로, 이는 문맥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홀로 거룩해져서 자신의 일을 계속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그들을 위해 내어놓으시면서, 그들도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구별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거룩함을 세상과 최대한 멀어지는 일로 이해하면, 세상에 보내신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충돌하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말씀과 진리를 잃어버리면, 그 역시 예수님께서 바라신 모습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철수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원어 투 포네루는 문법적으로 ‘악한 자’와 ‘악한 것’ 모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로 읽으면 사탄 또는 악의 인격적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뜻이 되며, 요한복음에 「이 세상의 임금」이 등장한다는 점(12:31; 14:30; 16:11)이 이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악한 것’으로 읽으면 악 자체, 또는 악이 행사하는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뜻이 되며, 문법적으로 가능한 해석이므로 배제할 수 없습니다. 19절은 제사장과 제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구약의 언어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본문이 특정 제사 의식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말을 통해 나를 믿는 사람들」 — 기도의 범위가 넓어지다
20절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또 한 번 방향을 바꿉니다.
「그런데 나는 이들만을 두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통해 나를 믿는 사람들을 두고도 청합니다.」요한복음 17:20 · 본디새김
앞으로 나타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통해 믿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받으신 말을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8절). 이제 그 말은 제자들을 통해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게 넓어집니다.
「아버지, 당신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당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들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청합니다.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당신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21 · 본디새김
다시 ‘하나 됨’이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같은 생각을 하는 두 존재의 협력 정도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서로 안에 계신다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상호 관계를 나타내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아버지를 드러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14:10–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그 관계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조직에 속한다거나, 서로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참여하고, 그 관계로부터 서로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는 의미가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 됨의 목적은 「당신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미움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믿음으로 초대받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하나 됨은 그들 자신만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하는 증언의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제자들을 하나 되게 합니까?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22 · 본디새김
기도의 시작에서는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받으신 영광을 이미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그 영광의 내용을 하나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사역에 참여하는 것,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날 영광에 참여하는 것,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생명과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읽기가 갈립니다. 이 관점들은 서로 관련될 수 있지만, 이 한 구절만으로 영광을 어느 한 요소와 완전히 동일시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나누시며, 그들이 하나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하나로 온전해져 있도록 나는 그들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계십니다. 이는 당신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23 · 본디새김
세상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으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셨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사랑으로 제자들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독특한 관계의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은 사랑을 얻기 위해 만들어 내는 성과라기보다,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일에 가깝습니다. 동일한 제도나 표현 방식을 강요하는 것만으로는 이 하나 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이유로 진리나 사랑을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기도하셨고, 이제 사랑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진리와 사랑은 이 기도에서 서로 경쟁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둘 다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영광에 대해, 첫째 읽기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사역에 제자들을 참여시키신 것에 무게를 둡니다. 둘째 읽기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날 예수님의 영광에 제자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고, 셋째 읽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생명과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예수님의 존재, 사명, 사랑, 그리고 십자가와 긴밀히 연결되므로 이 관점들은 서로 관련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기를」 — 기도가 향하는 마지막 자리
이제 예수님의 기도는 마지막 부분에 이릅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이 나에게 주신 이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이 바라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터가 놓이기 전에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7:2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남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보호받고, 거룩해지고, 하나 되어 자신을 증언하는 것이 예수님의 바람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과 함께하여 자신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4:2–3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러 가시며, 다시 오셔서 그들을 자신이 계신 곳에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은 그 약속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예수님과 함께하는 궁극적인 미래를 바라보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그 일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시작에서는 세상이 있기 전에 지니셨던 영광을 말씀하셨습니다(5절). 이제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상의 터가 놓이기 전에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광과 사랑이 나란히 놓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에서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를 드러내셨고,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며, 이제 그 제자들도 자신과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는 창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오래된 사랑이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했지만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신이 나를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요한복음 17:25 · 본디새김
앞에서는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11절). 이제는 「의로우신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안다’는 말은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신 3절로 우리를 되돌려 놓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기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한 가지 관심이 이어집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시고, 그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도록, 나는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또 알려 줄 것입니다.」요한복음 17:26 · 본디새김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이름을 앞으로도 알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약속은 이어질 십자가 사건과, 진리의 영이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고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을 알려 주실 것이라는 약속(16:13–15)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름을 계속 알려 주실 구체적인 방식을 따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대신 그 목적을 밝히십니다.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제자들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그들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 주심으로써 시작되는 관계이며, 그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 안에 거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하늘을 향한 기도, 세상에 남는 사랑
예수님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지를 끊임없이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한과 말씀과 영광을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과 생명을 주시고 자신이 받으신 영광을 나누셨습니다. 그래서 보호를 구하시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구하시고, 그들이 하나 되기를 구하십니다. 그들은 사랑을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세상에 보내집니다.
처음에 던진 물음, 곧 세상에서 데려가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은 여기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데려가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남아 있는 그들을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에 맡기십니다. 그들을 통해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마침내 자신과 함께하여 자신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의 마지막은 이 미래의 바람을 말씀하시는 24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현재의 제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해 눈을 드시고,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 곁에서 지니셨던 영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마지막에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도록」 해 달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은 이제 제자들이 살아갈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려 합니다.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시작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세상에 남겨질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말씀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