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마지막 찬양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지키십시오
유다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거친 경고를 담은 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자는 어떤 사람들에게 화를 선언하고, 그들을 물 없는 구름과 뿌리째 뽑힌 나무에 비유하며, 영원한 캄캄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의 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이야기가 스물다섯 절에 걸쳐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경고의 강도가 아니라, 그토록 격렬한 경고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향하는가입니다.
편지는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켜진 사람들에게 보내집니다(1절). 저자는 그들에게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명령합니다(3절). 그러나 편지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 싸움은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키고(21절),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22절),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 내는 것입니다(23절).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실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24절).
처음의 ‘지켜진 사람들’이 마지막의 ‘지켜 주시는 하나님’과 만납니다. 그 사이에 ‘자신을 지키라’는 명령이 놓여 있습니다.
이 구조를 발견하면 유다서를 읽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독자들이 적을 찾아내는 일에 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떤 사람으로 부르셨는지 기억하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공동체를 지키는 것입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이런 편지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3절에서 그는 「우리가 함께 지닌 구원에 대하여」 쓰려고 애쓰던 차에 「그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하며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방향을 바꾸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편지의 긴장이 시작됩니다. 공동의 구원을 이야기하려던 사람이 왜 싸움을 요청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그 싸움은 어떻게 끝내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될까요?
이미 사랑받고 지켜진 사람들
유다는 왜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가,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켜진 이들, 곧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유다서 1:1 · 본디새김
여기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알려진 야고보일 가능성이 큽니다(사도행전 15:13; 갈라디아서 1:19). 마가복음 6:3에는 예수님의 형제들 가운데 야고보와 유다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따라서 편지의 저자를 예수님의 형제 유다와 동일시하는 전통에는 신약 본문에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유다서 자체는 저자가 어느 야고보의 형제인지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저자의 정확한 신원과 집필 시기, 수신 지역을 이 편지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소개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과 예수님의 가족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의 친형제라면, 혈연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고백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의미는 저자의 신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전제한 해석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수신자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유다는 독자들을 먼저 그들의 행동이나 능력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랑받고, 지켜지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지켜진’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 지속적인 상태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하는 완료 수동 분사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격을 확보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번역에는 문법적인 갈림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존된 사람들이라는 읽기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켜진 사람들이라는 읽기가 가능하며, 이 본문은 앞의 해석을 택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들의 정체성이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하는 행동에 기대고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유다는 곧 자신을 지키라고 명령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명령보다 먼저, 독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명령은 그 사랑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받은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부름입니다.
싸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3절에서 유다가 요청하는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함께 지닌 구원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쓰려고 온갖 애를 쓰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번에 넘겨진 그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하며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유다서 1:3 · 본디새김
‘그 믿음’은 개인이 하나님을 얼마나 강하게 신뢰하느냐는 심리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넘겨진’ 것이라는 표현은 공동체가 받아서 간직하고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단번에’는 믿음이 결정적으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공동체가 새로운 질문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받은 복음의 본질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그 본질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몰래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이 심판을 받도록 미리 적힌 자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니,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어 놓고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유다서 1:4 · 본디새김
침입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다른 것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을 용서한다는 사실을, 이제 어떤 삶을 살아도 상관없다는 주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보다 은혜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더 깊이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이것을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면서 그분의 주 되심을 밀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6:1~2에서 바울이 던지는 질문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은혜가 많아지도록 죄 안에 머물러도 됩니까?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유다에게도 은혜는 방탕을 허락하는 면허증이 아니라, 사람을 이전과 다른 주인에게 속하게 하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부탁하는 싸움은 규칙을 강화하여 구원을 지켜 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주 되심을 서로 떼어 놓지 말라는 요청입니다.
이제 유다는 그 주 되심을 거부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설명하기 위해 오래된 이야기들을 불러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주님을 거부할 수 있는가
유다가 꺼내 드는 첫 번째 이야기는 출애굽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한 번 알아 두었지만, 나는 이것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주려 합니다. 곧, 예수께서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해 내시고는, 두 번째로는 믿지 않은 자들을 멸하셨습니다.유다서 1:5 · 본디새김
출애굽은 일반적으로 구원과 자유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셔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해 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야기의 뒷부분을 되새겨 줍니다.
구원받은 백성 가운데서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멸망했습니다.
민수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뒤, 이집트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결국 출애굽한 세대 가운데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습니다.
유다가 경고하는 대상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외부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신앙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고?
이 본문은 출애굽의 구원자를 ‘예수’라고 번역합니다.
유다서 5절의 그리스어 사본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라고 읽는 사본들과 ‘주’ 또는 그 밖의 표현을 전하는 사본들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라는 읽기를 따르며, 어느 읽기가 원문에 가장 가까운지는 본문비평의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라는 읽기를 따르면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출애굽 사건을 나중에 해석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건에서 구원하시고 심판하신 주체로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역사와 긴밀히 연결하는 매우 높은 그리스도론적 진술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관심은 예수님의 선재에 관한 추상적인 교리를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출애굽에서 구원하신 분과 불신앙을 심판하신 분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경고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주시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그분이 바로 주인이십니다.
자기 자리를 떠난 천사들
그리고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제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을 위하여 영원한 사슬로 캄캄함 아래 지켜 두셨습니다.유다서 1:6 · 본디새김
유다는 천사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다서가 뒤에서 에녹의 예언을 직접 인용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6절이 하늘의 존재들이 인간 여자들에게 내려온 이야기를 담은 『에녹1서』의 전승과 관계가 있다고 이해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전승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지 않으므로 세부 사항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자리’와 ‘지킴’입니다. 천사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을 위하여 지켜 두셨습니다.
1절의 사랑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켜진 이들입니다. 6절의 반역한 천사들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같은 ‘지킴’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향합니다.
하나는 구원을 위한 보존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을 위한 구금입니다.
이 대조는 13절의 ‘어둠의 캄캄함이 영원히 지켜져 있습니다’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유다는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행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소돔의 이야기는 무엇을 경고하는가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둘레의 성읍들도 그들과 같은 모양으로 음행에 빠지고 다른 육을 좇아갔으므로, 영원한 불의 벌을 받으며 본보기로 놓여 있습니다.유다서 1:7 · 본디새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창세기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롯의 집을 방문한 남자들에게 성적 폭력을 가하려 했고, 결국 성읍은 심판받습니다. 유다는 단순히 음행을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육’을 좇았다고 말합니다. ‘다른’은 다른 종류나 성격의 대상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이 낱말만으로 그 대상이 무엇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해석은 ‘그들과 같은 모양으로’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갈립니다. ‘그들’을 바로 앞의 천사들로 읽고 『에녹1서』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으면, 천사들의 이탈과 소돔의 죄는 서로 다른 존재의 경계를 넘으려는 행위라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반면 창세기 19장의 문맥에 더 무게를 두면, 소돔 사람들이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저지르려 한 폭력과 성적 타락이 강조됩니다. 두 관점은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지만, 유다의 표현만으로 하나의 세부 해석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세 본보기를 나란히 놓으면 공통된 흐름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천사들은 자기 자리를 떠났으며, 소돔의 사람들은 욕망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모두 자신들이 놓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권위를 거스른 결과입니다.
유다는 이를 통해 4절의 사람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면서 그분의 주 되심을 부인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10:1~5에서도 바울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경험한 구원과 심판을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에 적용하며, 10:4는 그들을 따르던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그리스도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6절과 관련된 『에녹1서』 6~11장의 전통은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 이야기를 확장하여, 하늘의 존재들이 인간 여자들과 결합하고 세상에 악을 퍼뜨렸다고 해석합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모독하는 사람들
천사장 미가엘도 하지 않은 일
그런데도 이자들 역시 똑같이 꿈에 취하여, 육은 더럽히고, 주 되심은 물리치고, 영광들은 모독합니다.유다서 1:8 · 본디새김
앞의 세 본보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문제는 행동과 권위의 관계입니다. ‘영광들’은 곧이어 천사장 미가엘이 등장하므로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지만, 유다가 직접 정의하지 않으므로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주 되심’ 역시 하나님의 통치나 천상의 권세로 읽을 수도 있고, 4절에서 명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이어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와 다투며 모세의 몸에 대하여 논쟁할 때에, 감히 모독하는 말로 심판을 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유다서 1:9 · 본디새김
이 사건은 구약성경에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다툼의 정확한 내용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다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명확합니다.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와 다투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모독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스가랴 3:2를 떠올리게 합니다. 스가랴의 환상에서 사탄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발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사탄을 꾸짖으십니다. 유다가 전하려는 것은 악한 세력을 상대할 때 쓰는 특별한 주문이 아니라, 미가엘이 스스로 최종 판결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미가엘도 판단을 주께 맡깁니다.
침입자들은 이와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진정한 권위를 지닌 천사장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판단을 주께 맡기는데, 그들은 자기 한계를 모른 채 말합니다. 유다가 비판하는 교만은 자신이 판단할 수 없는 것까지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모독하고, 아는 것으로는 썩어 가다
그러나 이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은 모독하고, 말 못 하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는 썩어 갑니다.유다서 1:10 · 본디새김
두 종류의 앎이 대조됩니다. 문제는 지식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참된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권위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면서, 자신의 욕망에는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합니다.
이 대조를 읽으면 8절의 ‘꿈에 취하여’라는 표현도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그들이 꿈을 통해 특별한 권위를 주장했을 수도 있고, 현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비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그들의 영적인 확신은 올바른 삶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특별한 영적 지식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가장 기본적인 분별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가인, 발람, 고라가 하나의 길이 되다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들이 가인의 길로 갔고, 삯을 좇아 발람의 헤맴으로 쏟아졌으며, 고라의 반항으로 망했기 때문입니다.유다서 1:11 · 본디새김
가인은 창세기 4장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하셨지만(창세기 4:7),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않고 형제를 죽였습니다.
발람은 민수기 22~24장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요청받은 예언자입니다. 민수기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저주하지 못하지만, 성경의 다른 본문은 그를 부당한 이익과 연결합니다(베드로후서 2:15). 고라는 민수기 16장에서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반항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도전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형제를 해치는 죄가, 발람에게서는 이익을 좇는 타락이, 고라에게서는 권위에 대한 반역이 나타납니다. 유다가 고발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해치고, 이익을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부인합니다.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으면 형제와의 관계, 물질을 대하는 태도, 권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유다는 그들을 이미 가인의 길로 갔고 고라의 반항으로 망한 사람처럼 묘사합니다. 그들의 최종 심판이 모두 끝났다는 뜻이라기보다, 옛 인물들의 이야기에 현재의 사람들을 겹쳐 놓아 그 길의 결말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그 길을 따라가지 않도록 하는 경고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34:5~6은 모세의 죽음과 장사에 관하여 기록하지만, 미가엘과 마귀의 논쟁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대 기독교 저술가들은 이 이야기를 모세의 승천이나 유언에 관한 유대교 전승과 연결했으나, 현재 전해지는 관련 문헌에는 유다서가 묘사하는 논쟁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모세의 시신 매장에 관한 다툼으로 보는 해석과, 모세의 몸이 하나님의 임재로 옮겨지는 문제에 관한 논쟁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물 없는 구름과 길 잃은 별
유다서에서 가장 시각적인 부분입니다.
저자는 논증을 잠시 멈추고 사랑의 잔치에 나타난 암초, 물 없는 구름, 열매 없는 나무, 거친 파도, 헤매는 별들을 빠르게 펼쳐 보입니다. 각 이미지는 앞에서 설명한 죄가 공동체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드러냅니다.
사랑의 잔치에 숨어 있는 암초
이자들은 여러분의 사랑의 잔치에서 함께 어울려 먹는 암초요, 겁도 없이 자기 자신의 목자 노릇을 하는 자들이요, 바람에 밀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열매 없고 두 번 죽어 뿌리째 뽑힌 늦가을 나무요,유다서 1:12 · 본디새김
‘사랑의 잔치’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나누던 공동체의 식사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진행 방식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공동체 밖에서만 활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식탁에 앉는 사람들입니다.
‘암초’라고 번역된 스필라데스는 위험한 암초로 읽을 수도 있고, 잔치에 생긴 얼룩이나 흠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암초’는 뒤따르는 자연물 비유들과 잘 어울리는 읽기입니다. 암초는 항해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식탁에 앉아 있지만, 그들의 행동이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다음 표현은 위험의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목자는 양 떼를 돌보아야 하는데, 이들은 목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자기 자신만 돌봅니다.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자신만 먹이고 양 떼를 먹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시고(34:2~4), 마침내 하나님 자신이 양 떼를 찾고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34:11~16).
그들은 공동체의 사랑을 누리지만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4절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는 행위가 일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함께 나누도록 주어진 사랑이 자기만을 위하는 수단으로 변합니다.
약속하지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것들
다음 이미지들은 모두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것들입니다.
구름은 비를 기대하게 합니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구름은 생명과 소망의 징조입니다. 하지만 이 구름에는 물이 없습니다. 늦가을 나무라면 열매를 기대할 수 있지만, 이 나무에는 열매가 없을 뿐 아니라 뿌리까지 뽑혀 있습니다. ‘두 번 죽어’는 그 생명 없음의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구름처럼 보이지만 비를 내리지 못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이지만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목자처럼 행동하지만 양을 돌보지 않습니다.
유다가 말하는 거짓됨은 잘못된 명제를 가르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약속하는 것과 실제로 가져오는 결과가 정반대라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은혜를 말할지 모르지만,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은 방탕과 자기중심성입니다.
바다의 거품과 헤매는 별
제 부끄러움을 거품처럼 뿜어내는 바다의 사나운 물결이요, 헤매는 별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둠의 캄캄함이 영원히 지켜져 있습니다.유다서 1:13 · 본디새김
거친 파도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그 물결이 뿜어내는 것은 부끄러움입니다. 이사야 57:20도 악인들을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 올리는 요동치는 바다에 비유합니다.
11절의 발람의 ‘헤맴’과 13절의 ‘헤매는 별들’은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길을 벗어난 발람의 이야기가 하늘의 이미지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별들은 빛나는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캄캄함을 향합니다.
물을 주지 못하는 구름, 열매를 주지 못하는 나무, 부끄러움만 내뿜는 파도, 정해진 길에서 벗어난 별. 이들은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의 캄캄함은 6절에서 반역한 천사들이 갇혀 있는 캄캄함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천사들이 자기 자리를 떠나 심판 아래 놓였듯이, 이들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에녹의 예언은 왜 등장하는가
아담으로부터 일곱째인 에녹도 이자들을 두고 예언하여 말했습니다. 「보아라, 주께서 그에게 속한 수만의 거룩한 이들과 함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경건하지 않게 저지른 온갖 경건하지 않은 일과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그를 거슬러 내뱉은 온갖 모진 말에 대하여 모든 사람을 책망하시려고 오셨다.」유다서 1:14–15 · 본디새김
창세기 5:21~24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하지만, 유다가 인용하는 문장은 창세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에녹1서』 1:9와 대응하는 예언입니다.
유다가 에녹의 예언을 인용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에녹1서』 전체가 유다에게 동일한 권위를 지녔다거나, 오늘날 모든 교회가 그 문헌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유다가 선택하여 인용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경건하지 않은’ 모든 행위와 말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15절에서 이 표현은 행위의 방식, 행위 자체, 죄인들의 성격을 묘사하며 세 차례 반복됩니다. 그들이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했다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을 향한 삶의 방향 자체가 뒤틀렸다는 강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언의 마지막에 심판받는 것은 행동뿐 아니라 ‘모진 말’입니다. 이것은 8~10절의 모독과 연결되고, 16절의 말에 대한 고발로 이어집니다.
이자들은 투덜거리는 자들이요 제 몫을 탓하는 자들이며, 자기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입은 부풀린 말을 하고, 그들은 이익을 얻으려고 사람의 얼굴을 우러러봅니다.유다서 1:16 · 본디새김
11절의 발람 이야기가 다시 떠오릅니다. 삯을 좇는 마음은 사람의 입까지 바꾸어, 진실을 말해야 할 입이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유다는 그들의 내면을 직접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말하며 누구에게 아첨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의 신앙을 판단하는 근거는 영적인 주장 자체가 아니라, 그 주장이 실제 삶에서 만들어 내는 열매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헤매는 별들’의 그리스어 플라네타이는 떠돌거나 헤매는 존재를 가리키며, 영어 ‘planet’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고대의 하늘 관찰에서 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과 달리 위치를 바꾸어 가는 천체들은 특별하게 여겨졌습니다. 유다가 인용한 에녹의 예언과 현존하는 『에녹1서』 그리스어 본문 사이에는 표현 차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유다는 거의 끊임없이 ‘이자들’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4절에서 시작된 비판은 여러 심판 이야기와 비유를 거쳐 16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17절에서 독자를 부르는 방식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유다서 1:17 · 본디새김
유다가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행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출애굽과 천사들과 소돔의 이야기를 되새겨 주었고, 이제는 사도들의 경고를 기억하게 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18절).
이자들은 갈라놓는 자들이요, 목숨에 속한 자들이며, 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유다서 1:19 · 본디새김
‘갈라놓는 자들’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어 표현에 구체적인 목적어가 없으므로,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자신들만의 집단을 만드는 사람들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목숨에 속한 자들(ψυχικός)’은 목숨·생명을 뜻하는 낱말에서 나온 형용사입니다. 유다는 그들이 인간의 육체를 가졌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대조의 핵심은 ‘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에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지식이나 특별한 경험을 주장했을 수 있지만, 유다는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끌리고 있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은 인간의 본성적인 판단만으로 받아들이고 분별할 수 없다는 고린도전서 2:14~15의 구분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유다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정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다음 절이 보여 주듯이, 그들은 자신이 어떤 영에 의해 기도하고 어떤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는 부름은 그들을 침입자들과 구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삶의 길을 열어 줍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
이제 유다의 긴 편지가 실제 권면으로 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 가고, 거룩한 영 안에서 기도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지키십시오.유다서 1:20–21 · 본디새김
중심 명령은 ‘자신을 지키십시오’입니다
그리스어 문장에서 네 행동은 동등하게 나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심이 되는 명령형 동사는 ‘지키십시오(τηρέω)’이고, ‘자신을 세워 가고’, ‘기도하며’, ‘기다리면서’는 분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일, 예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일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행동이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1절에서 독자들은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21절에서는 그들이 자신을 지켜야 할 자리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으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도 문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편지의 시작에서 독자들이 이미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는다고 말한 사실은 하나님의 선행하는 사랑에 무게를 실어 줍니다.
먼저, ‘가장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그 믿음을 위하여 싸우라고 했고, 여기서는 그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 가라고 합니다. 같은 믿음이 싸움의 대상이자 공동체를 세우는 토대가 됩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은 잘못된 주장을 반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받은 복음 위에 세워 가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거룩한 영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침입자들은 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 대조는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들과 실제로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능력이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영적 성취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비에 의존합니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리고 어떤 이들, 곧 의심하는 이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십시오.유다서 1:22 · 본디새김
지금까지 그렇게 심각하게 경고했던 유다가, 마지막에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의 범주로 묶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고 주 되심을 부인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혼란 속에서 의심하고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위험에 깊이 빠져 있어 건져 내야 합니다.
‘의심하는 이들’에 해당하는 디아크리노메누스(διακρίνω)는 문맥에 따라 의심하는 사람들 또는 논쟁하는 사람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9절에서 미가엘이 마귀와 ‘다투며’라고 할 때도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본문을 따라 읽으면 신앙 안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요청이고, 그리스어의 가능성을 고려하면 자신과 논쟁하는 사람들까지 자비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의미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상대가 혼란스럽거나 다투는 상태에 있다고 해서 자비를 거둘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불에서 낚아채어 구원하십시오
또 어떤 이들은 불에서 낚아채어 구원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 속에서, 육으로 더럽혀진 속옷까지도 미워하며 자비를 베푸십시오.유다서 1:23 · 본디새김
어떤 사람은 불에서 낚아채야 합니다.
이 이미지는 스가랴 3:2의 ‘불에서 꺼낸 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본문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사탄의 고발을 받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변호하십니다. 위험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의견 교환이 아니라, 그가 향하는 길에서 실제로 돌이키도록 돕는 일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두려움 속에서’ 자비를 베풀라고 합니다. 자비를 베풀면서도 죄와 타락의 위험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육으로 더럽혀진 속옷’이라는 강렬한 표현이 보여 주듯, 사람을 구하는 행동과 그를 파괴하는 행위를 받아들이는 행동은 같지 않습니다.
22~23절은 사본에 따라 두 부류의 사람을 다루는 읽기와 세 부류를 구별하는 읽기로 갈리며, 이 번역은 세 부류로 읽을 수 있는 본문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권면을 세 종류의 사람을 판별하는 고정된 분류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대하지 않되, 어느 경우에도 사람을 향한 자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3절의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명령이 마침내 드러내는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믿음을 위하여 싸우는 일은 믿음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그 믿음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도록 붙드는 일도 포함합니다. 올바른 은혜를 지킨다는 것이 공동체 안에서 자비를 없앤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과 사람을 구하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22~23절의 짧은 읽기와 긴 읽기 가운데 어느 형태가 더 이른 본문인지에 대해서는 현재도 학술적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3절의 표현은 스가랴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에서 건져 낸다는 구원의 이미지는 분명히 연결됩니다.
누가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는가
유다는 이제 독자들에게 더 이상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자기 영광 앞에 흠 없이 큰 기쁨으로 세우실 수 있는 분, 곧 우리 구원자이신 유일한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능력과 권위가 모든 시대 이전에도, 이제도, 앞으로 모든 시대에 걸쳐 있기를 빕니다. 아멘.유다서 1:24–25 · 본디새김
1절에서 독자들은 ‘지켜진 이들’이었습니다. 6절에서는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이 심판을 위하여 지켜졌고, 13절에서는 방탕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캄캄함이 지켜져 있었습니다. 21절에서 독자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마침내 그 모든 표현의 근원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독자들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자신을 지키라는 명령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유다는 독자들이 자기 힘만으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을 끝까지 지키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흠 없이 큰 기쁨으로
앞에서는 더러운 육, 부끄러움을 뿜어내는 물결, 열매 없는 나무, 캄캄함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흠 없이’와 ‘큰 기쁨’이 등장합니다.
‘흠 없이’는 구약의 제사 제물에 쓰이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유다는 이 정결과 온전함이 인간의 자기완성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세우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자리는 ‘큰 기쁨’의 자리입니다. 편지 전체에 그토록 많은 심판과 두려움의 장면이 있었지만, 독자들이 마지막에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심판을 피해야 한다는 공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유다에게 그 두 태도가 함께 가능한 이유는 구원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유다는 마지막 찬양을 ‘우리 구원자이신 유일한 하나님’께 드리면서, 그 영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기를 빕니다. 1절에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했고, 4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인이시며 주이신 분으로, 21절에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자비의 주로 불렀습니다. 저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도, 죄를 고발할 때도, 미래를 이야기할 때도, 찬양을 드릴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십니다.
25절의 ‘영광과 위엄과 능력과 권위’는 앞서 인간이 함부로 거부하거나 모독했던 주 되심과 권위의 문제를 마무리합니다. 참된 권위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자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지켜 주시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시대 이전에도, 이제도, 앞으로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는 공동체의 혼란보다 먼저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송영에는 그리스어 원문상 명시적인 정동사가 없어, 영광이 ‘있다’는 선언으로도 ‘있기를 빕니다’라는 기원으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공동체가 흔들리고 사람이 실패해도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 자체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서가 보여 주는 믿음의 싸움
왜 함께 지닌 구원에 관하여 쓰려고 했던 유다가 믿음을 위하여 싸우라는 편지를 쓰게 되었을까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은혜는 받으면서 다스림은 거부했고, 영적인 것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알지 못하는 것을 모독했으며, 공동체의 사랑을 누리면서 자신만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키라고 권합니다. 이 말은 외부의 위험을 피하여 숨어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불에 빠진 이들을 낚아채어 구원하라는 부름입니다.
믿음을 위하여 싸우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지키십시오.
둘은 서로 다른 명령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받은 믿음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식입니다.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지 않는 것만큼이나,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자비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편지 앞부분에서는 자기 자리를 떠난 천사들이 캄캄함 아래 묶여 있고, 바다의 사나운 물결은 부끄러움을 뿜어내며, 헤매는 별들은 어둠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다릅니다.
이번에는 흔들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넘어질 수 있고, 아직 온전하지 않으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연약함이 아니라, 그들을 넘어지지 않게 지키고 자기 영광 앞에 흠 없이 세우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캄캄함과 심판의 이미지로 가득했던 편지는,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큰 기쁨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