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15장 · 정결과 부정
식탁에서 삶 전체로 이어지는 거룩함
레위기 11장은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제사장들이 어떻게 제사를 드리고, 거룩한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는 낙타와 돼지, 물고기와 새, 메뚜기와 도마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동물의 굽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지, 죽은 동물이 그릇에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세세하게 규정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실까요?
동물의 굽과 지느러미에 관한 규정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연결됩니다.
레위기 10:10–11에서 여호와야훼는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것과 일상적인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고 백성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11장은 그 구별을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이제 거룩함의 문제는 성막의 제단에서 이스라엘의 식탁과 부엌, 씨앗을 보관하는 곳까지 넓어집니다.
무엇을 먹어도 되는가 — 동물의 생김새에서 시작되는 구별
여호와야훼가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했다.레위기 11: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아론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모세와 아론이 함께 말씀을 받습니다.
모세를 통해 전달되어 온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제 아론도 함께 받아 백성에게 전해야 합니다. 바로 앞 장에서 제사장에게 맡겨진 가르침의 역할이 여기서 구체화됩니다.
그런데 첫 번째 규정은 금지 명령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땅에 있는 모든 짐승 가운데 너희가 먹어도 되는 동물은 이러하다.』」레위기 11: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동물을 먹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허용된 동물과 허용되지 않은 동물의 구별이 주어집니다.
땅에 사는 짐승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요 특징을 살피도록 합니다. 굽이 온전히 갈라져 있는지, 되새김질하는지입니다. 본문은 굽이 갈라진 것과 두 쪽으로 나뉜 것을 함께 표현하여 굽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두 특징이 모두 충족되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네 동물은 그 기준의 경계를 보여 주는 사례들입니다. 낙타와 바위너구리, 산토끼는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분류되지만 굽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돼지는 굽의 조건을 충족하지만 되새김질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돼지가 특별히 사악하다거나 낙타가 본질적으로 더럽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각 동물이 정해진 기준 가운데 어떤 특징을 갖고 있고 어떤 특징을 갖지 못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동물이 왜 먹을 수 없는지는 다른 동물에 비해 도덕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분류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토끼도 되새김질을 하는가?
오늘날의 동물학에서 산토끼와 바위너구리는 소처럼 반추하는 동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들을 되새김질하는 동물로 설명합니다.
고대의 동물 분류에서 이 표현이 어떤 관찰 기준을 모두 포함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산토끼의 경우 먹이와 관련된 재섭취 행동이 관찰된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본문이 산토끼를 이렇게 분류한 정확한 이유가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규정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동물을 먹을 수 있는지 구별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읽으면서 고대의 분류를 현대 생물학 용어로 모두 바꾸려 하거나, 반대로 현대 생물학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돼지를 먹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 위생 때문일까?
돼지고기 금지를 위생상의 이유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대에는 돼지고기를 안전하게 보관하거나 조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지하셨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11장은 그런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체가 샘에 떨어져도 샘은 정결하게 유지되지만, 다른 물건은 부정해집니다. 같은 씨앗도 물이 닿았는지에 따라 부정 여부가 달라집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식품 안전 규정으로 환원하기 어렵습니다.
이 동물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다」고 선언됩니다. 본문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음식 규정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무엇이 허용되고 금지되는지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이 왜 주어졌는지는 44–45절에 이르러 밝혀집니다.
물과 하늘의 생물 — 서로 다른 기준으로 구별하다
땅의 짐승에 이어 물속 생물과 날아다니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각 영역의 분류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물속 생물에는 간단한 기준이 적용됩니다.
「『물에 있는 모든 것 가운데 다음 것들은 먹어도 된다. 물에, 곧 바다와 하천에 있으면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모두 먹어도 된다.』」레위기 11:9 · 본디새김
땅의 짐승에서는 굽과 되새김질이 기준이었다면, 물속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기준입니다.
그런데 날짐승으로 넘어가면 방식이 달라집니다.
본문은 모든 날짐승에 적용할 수 있는 한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독수리, 까마귀, 타조, 황새와 여러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는 오늘날 정확한 동물 종을 특정하기 어려운 명칭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흔히 모든 금지 동물을 육식성이나 포식성 동물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목록에 포식성 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목록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타조와 박쥐처럼 그 특징으로 쉽게 묶이지 않는 동물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박쥐가 날짐승 목록에 들어 있는 이유
19절 끝에는 박쥐가 등장합니다. 현대 동물학에서는 박쥐를 포유류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날짐승 목록에 포함됩니다.
새뿐 아니라 날개로 이동하는 생물까지 포괄하는 고대의 분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창세기 1장에서도 발견되는 고대의 세계 이해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은 물에서 움직이는 생물과 하늘을 나는 생물, 땅에 사는 생물을 구별하여 서술합니다.
두 본문의 배열이 완전히 같지는 않으므로 레위기 11장이 창세기 1장의 구조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다양한 생물들을 그 종류와 생활 영역에 따라 구별하여 바라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다양한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를 좋게 여기셨습니다(창세기 1:20–25). 레위기 11장은 그 생물들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어떤 생물을 먹을 수 있는지 구별하도록 합니다.
창조된 존재로서의 가치와 이스라엘에게 음식으로 허용되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날아다니는 곤충 가운데는 예외가 있다
20절부터는 날아다니며 우글거리는 작은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대부분은 먹지 못하게 하지만, 21절에서는 예외를 둡니다.
「『다만 날아다니며 우글거리고 네 발로 걷는 생물 가운데, 발 위쪽에 땅에서 뛰는 데 쓰는 두 다리가 있는 것은 먹어도 된다.』」레위기 11:21 · 본디새김
그리고 아르베, 살암, 하르골, 하가브라는 이름을 가진 종류들을 열거합니다. 이들은 메뚜기류와 관련된 이름으로 이해되지만, 각각을 현대 생물학의 특정 종과 정확하게 일치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의 ‘네 발’이라는 표현 역시 현대 곤충학의 다리 수를 정의하려는 설명이라기보다, 걷는 다리와 뛰는 데 사용되는 다리를 구별하여 묘사하는 고대의 관찰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단순히 어떤 모습의 동물이 인간에게 불쾌감을 주는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제 본문은 무엇을 먹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다른 문제로 이동합니다.
동물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먹어도 되는 동물도 죽으면 사람을 부정하게 한다
24절부터 본문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말이 있습니다.
‘사체’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살아 있는 동물들의 특징을 기준으로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죽은 동물의 몸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룹니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너희는 부정해진다. 그것들의 사체에 닿는 사람은 누구든 저녁까지 부정하다.』」레위기 11:24 · 본디새김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은 더 강한 접촉을 구별합니다.
「『그것들의 사체 일부를 나르는 사람은 누구든 자기 옷을 빨아야 하며 저녁까지 부정하다.』」레위기 11:25 · 본디새김
사체에 닿는 것과 사체를 나르는 것은 동일하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부정함과 죄는 같은 것이 아니다
부정해진다는 것은 언제나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죽은 동물의 사체를 옮기는 일은 생활하면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죽은 동물을 처리하는 행위가 반드시 부도덕하거나 악한 행동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로 인해 의례적으로 부정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부정하다’는 도덕적 죄악과 연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거룩한 영역과 관련하여 부적합한 의례적 상태에 있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11장의 사체 접촉 규정은 후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입니다.
부정함에는 끝나는 시점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옷을 빨아야 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결한 상태가 됩니다.
부정함은 한 사람의 인격에 찍히는 영구적인 낙인이 아닙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발생하고, 규정된 방식과 시간에 따라 해소되는 상태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예외: 먹을 수 있는 짐승의 사체
39절은 앞에서 살펴본 모든 음식 분류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합니다.
「『너희가 먹을 수 있는 짐승 가운데 하나가 죽으면, 그 사체에 닿는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하다.』」레위기 11:39 · 본디새김
살아 있는 짐승이 음식으로 허용되는가 하는 문제와, 죽은 사체가 접촉을 통해 부정함을 일으키는가 하는 문제는 구별됩니다.
규정에 따라 잡아 음식으로 사용하는 일과, 이미 죽어 있는 짐승의 사체를 접촉하거나 처리하는 일은 같은 상황이 아닙니다. 39–40절은 바로 후자를 다룹니다.
같은 동물도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지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규정의 대상이 됩니다.
죽음과 부정함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레위기 11장의 사체 규정에는 죽음이라는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29–31절에서도 땅에서 우글거리는 특정 생물들이 열거되는데, 그것들이 죽었을 때 접촉한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하다고 명시합니다.
물론 레위기의 모든 부정함이 죽은 동물의 접촉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뒤의 장들에서는 출산과 신체의 상태 등 여러 종류의 부정함을 다룹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죽은 몸이 부정함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여기에서 생명과 죽음의 구별이 의례적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생물들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생물들 가운데 허용된 것을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체는 살아 있는 생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죽은 작은 동물 하나가 부엌 전체에 영향을 미치다
이제 본문은 사람에게서 물건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죽은 채 어떤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 물건은 부정해진다. 나무 기구든 옷이든 가죽이든 자루든, 일에 쓰이는 어떤 기구라도 물에 담가야 한다. 그것은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뒤에는 정결해진다.』」레위기 11:32 · 본디새김
그런데 질그릇에 떨어지면 처리 방법이 달라집니다.
「『어떤 질그릇이든 그 안에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떨어지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해진다. 너희는 그 그릇을 깨뜨려라.』」레위기 11:33 · 본디새김
화덕과 아궁이도 사체가 떨어지면 허물어야 합니다(11:35). 질그릇과 다른 재료의 물리적 성질을 고려하여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재료들이 왜 서로 다른 처리를 받아야 하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적인 세균이나 위생 지식으로 이유를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부정함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물건도 부정해질 수 있으며, 물건의 종류에 따라 그 상태를 처리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릇과 옷과 화덕은 성막 안에 있는 특별한 기구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며 생활하는 곳에 있는 물건들입니다.
샘과 웅덩이는 왜 정결한가
「『다만 샘과 물이 모여 있는 웅덩이는 정결하다. 그러나 그것들의 사체에 닿는 사람은 부정해진다.』」레위기 11:36 · 본디새김
이 차이는 부정함을 단순히 세균이나 독성 물질이 퍼지는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사체가 물에 떨어졌다고 해서 그 물이 위생적으로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판단하는 것은 의례적 정결 상태입니다.
같은 사건에 관련된 대상들이 서로 다른 상태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정결 규정이 모든 물체에 기계적으로 똑같이 적용되는 일률적인 오염 규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른 씨앗과 젖은 씨앗
「『뿌릴 씨앗 어느 것 위에든 그것들의 사체 일부가 떨어지면 그 씨앗은 정결하다.』」레위기 11:37 · 본디새김
「『그러나 씨앗에 물이 부어지고 그 위에 그것들의 사체 일부가 떨어지면 그 씨앗은 너희에게 부정하다.』」레위기 11:38 · 본디새김
앞의 규정에서 물은 기구를 정결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씨앗에 물이 닿았다는 사실이 부정함을 판단하는 조건이 됩니다.
레위기 11장은 한두 가지 원리만 알면 모든 사례를 마음대로 추론할 수 있는 체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상황을 구별하여 구체적인 규정을 제시합니다.
제사장과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하게 부정함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규정에 따라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른 씨앗은 수분을 머금은 씨앗과 상태가 다르므로, 물이 닿은 씨앗이 사체와 접촉했을 때 부정함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차이가 정확히 어떤 물리적 원리 때문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혐오스러운 생물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41절에서 본문은 다시 먹어서는 안 되는 생물에 관한 명령으로 돌아옵니다.
「『땅에서 우글거리는 생물은 모두 혐오스러운 것이니 먹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11:41 · 본디새김
그리고 배로 다니는 생물, 네 발로 걷는 생물, 발이 많은 생물까지 언급합니다. 앞서 날아다니는 곤충 가운데 일부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땅에서 우글거리는 생물들이 음식으로 금지됩니다.
또한 29–31절에서 특정 생물의 사체 접촉에 따른 부정함을 규정한 것과, 41–42절에서 땅의 우글거리는 생물을 먹지 말라고 하는 명령도 구별해야 합니다. 한쪽은 사체 접촉의 문제이고, 다른 쪽은 음식의 문제입니다.
‘혐오스럽다’는 말은 도덕적 비난인가
이 장에서 「혐오스러운 것」(שֶׁקֶץ)이라는 표현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강한 거부의 의미를 지니지만, 레위기 11장에서는 특별히 먹어서는 안 되는 생물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특정한 생물을 음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강한 금지를 표현합니다.
이 구별은 43절에서 사람의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우글거리는 어떤 생물로도 너희 자신을 혐오스럽게 만들지 마라. 그것들로 자신을 부정하게 하여 그것들 때문에 부정한 상태가 되지 마라.』」레위기 11:43 · 본디새김
동물 자체가 이야기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동물을 구별하는 규정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이유를 직접 밝히십니다.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 모든 규정의 근거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이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을 성별하고 거룩하게 되어라.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땅에서 기어 다니며 우글거리는 어떤 생물로도 너희 자신을 부정하게 하지 마라.』」레위기 11:44 · 본디새김
지금까지 수많은 동물과 사체와 기구에 관한 세부 규정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여호와야훼는 어떤 동물이 위험한지, 왜 특정 동물을 먹으면 안 되는지를 다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규정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근거합니다.
「거룩하게 되어라」는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본래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하도록 부름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기준으로 제시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께 속한 백성으로서 삶을 구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이 거룩함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다른 민족과의 차이를 실제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4:2–3도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말씀에 이어 음식 규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구별의 근거는 민족적 우월성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여기서 이집트 탈출을 다시 언급하는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린 여호와야훼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거룩하게 되어라.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레위기 11:45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완벽하게 정결한 식생활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자신에게 속한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순서는 출애굽기 20:2에서도 나타납니다.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에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라고 밝히십니다.
출애굽기 6:6–7에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레위기 11:45의 표현은 바로 그 관계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 11장의 거룩함은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구원하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삶에 요구되는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거룩하다’는 하나님께 속하거나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말할 때는 그분이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위엄과 도덕적 순전함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마지막 문장에 이 장의 목적이 담겨 있다
레위기 11장은 긴 규정들을 마무리하면서 그 목적을 다시 밝힙니다.
「『이것은 짐승과 날짐승과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살아 있는 생물과 땅에서 우글거리는 모든 생물에 관한 가르침으로,』」레위기 11:46 · 본디새김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고, 먹어도 되는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레위기 11:47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동사는 ‘구별하다’입니다.
‘구별하다’는 레위기 10:10에서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것과 일상적인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 같습니다. 앞 장에서는 제사장이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
구별하는 일은 곧 모든 것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허용과 금지, 정결과 부정이 함께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거룩한 삶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피하는 삶과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동물을 먹고, 정결한 것을 사용하며, 부정한 상태가 되었을 때에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다시 정결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살아가되, 그 세계를 어떻게 사용하고 다루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별하는 백성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구별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레위기 11장의 동물 구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창세기 7:2에서는 홍수 이전에 이미 정결한 짐승과 정결하지 않은 짐승의 구별이 언급됩니다. 창세기 8:20에서는 노아가 정결한 짐승과 새들 가운데서 번제를 드립니다.
따라서 정결한 동물이라는 개념이 시나이산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11장은 그 구별을 이스라엘의 음식과 생활 규정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합니다.
한편 신약에서는 음식과 정결의 문제가 새로운 맥락에서 다루어집니다. 마가복음 7:18–23에서 예수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시면서 음식보다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을 강조하십니다. 사도행전 10:9–16에서는 베드로가 정결과 부정의 구별에 관한 환상을 보고, 이어 10:28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사람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부르지 말라는 뜻을 보여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레위기 11장이 원래부터 단순한 비유에 불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이 규정은 실제로 지켜야 할 음식과 정결 규정이었습니다. 신약은 그러한 전통을 배경으로 음식과 사람의 정결, 그리고 이방인의 공동체 참여 문제를 새롭게 다룹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을 오늘의 독자에게 그대로 적용할 때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본래 규정과 신약 공동체의 상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 음식 규정을 동일한 방식으로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레위기 11장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맺음말 — 한 알의 씨앗에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릴 때만 여호와야훼의 백성이 아닙니다. 음식을 준비할 때도, 물건을 다룰 때도, 씨앗을 보관할 때도 그분께 속한 백성입니다. 그 규정에서 오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 전체를 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일상적인 행동에 새로운 종교 규칙을 만들어 붙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구체적인 규정은 고대 이스라엘의 언약과 예배 질서에 속합니다.
또한 이 장은 다른 사람을 쉽게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하는 근거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레위기에서 부정함은 특정한 규정에 따라 판단되는 의례적 상태입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이 본질적으로 열등하거나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판단으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레위기 11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어쩌면 아주 작고 평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씨앗 한 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뿌리려고 보관한 씨앗 위에 작은 생물의 사체가 떨어졌을 때, 그 씨앗에 물이 닿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물기가 없는 씨앗과 물이 닿은 씨앗은 서로 다르게 취급됩니다.
성막도, 제단도, 제사장의 화려한 옷도 등장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농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씨앗을 살피는 일상적인 순간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1장은 바로 그런 일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집에서 씨앗을 살피는 사람은 서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여호와야훼께 속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은 거룩함을 제단 위에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의 식탁과 그릇, 그리고 땅에 뿌릴 작은 씨앗에까지 그분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