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7–26장 · 거룩한 삶의 규정

밭 가장자리에서 드러나는 거룩함

레위기 19장은 성경에서 가장 웅장한 명령 가운데 하나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흔히 성소와 제사, 기도와 예배를 떠올릴 것입니다. 앞선 레위기에서 거룩함은 실제로 성소에 들어가는 방법, 제물을 바치는 절차, 정결과 부정함의 구별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장을 조금 더 읽으면 예상하지 못한 장소들이 나타납니다.

곡식을 거두는 밭, 품삯을 받아야 하는 노동자의 집, 듣지 못하는 사람이 서 있는 길, 재판이 열리는 자리, 이웃과 다투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이 모든 곳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라고 명령하십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올바르게 다루는 일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레위기 19장은 거룩한 삶에 대한 추상적인 정의를 내리는 대신,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자리들을 하나씩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매번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이름을 놓습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419장 본문 읽기 →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 거룩함의 대상은 누구인가?

레위기 19:1–2 본문 →

이 장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표현은 「온 회중」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거룩하여라. 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레위기 19:2 · 본디새김

앞선 여러 규정에서는 제사장이나 특정한 부정함을 겪은 사람이 직접적인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말씀을 듣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과 품꾼을 고용하는 사람, 재판하는 사람과 자녀를 둔 사람에게 해당하는 구체적인 명령은 서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거룩하라는 명령은 그 모든 사람에게 함께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래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의 출발점은 인간의 특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물론 거룩함에는 구별과 하나님께 속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그 구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곡식을 남기는 일, 품꾼의 임금을 지급하는 일, 이웃에게 앙심을 품지 않는 일, 거류민을 사랑하는 일이 모두 거룩함의 내용이 됩니다.

「나는 여호와야훼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라는 선언이 여러 규정 뒤에 반복됩니다. 이 선언은 서로 다른 명령들을 하나의 중심에 묶습니다. 제사와 농사, 경제와 재판,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권위 아래 놓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구체적인 명령은 뜻밖에도 부모와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안식일과 우상 — 거룩함의 첫 자리

레위기 19:3–4 본문 →

「『너희는 저마다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하여라. 내 안식일들을 지켜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3 · 본디새김

출애굽기 20:12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나오고, 그보다 앞선 20:8–11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레위기 19장은 이 두 명령을 한 절 안에 놓습니다.

출애굽기 20:12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순서이지만, 여기서는 어머니와 아버지 순서입니다. 이 순서만으로 특별한 가족 내 서열을 정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명령의 대상이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부모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경외」입니다. 이는 여호와야훼를 향한 경외와 동일한 수준의 종교적 숭배를 부모에게 드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서 마땅한 존중을 나타내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부모에 대한 경외 바로 옆에 안식일 준수가 놓입니다.

본문은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배열은 이스라엘의 삶에서 가족관계와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이 나란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을 쉬는 날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1:13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임을 알게 하는 표징으로 설명됩니다.

4절에서는 다른 신들에게 향하지 말고 금속을 부어 신들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은 자신이 의지하고 예배할 대상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3–4절은 가족관계, 거룩한 시간, 예배의 대상을 차례로 언급합니다. 거룩함은 이미 이 세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는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로 시선이 이동합니다.

친교 제물의 고기를 왜 셋째 날에는 먹지 못하는가?

레위기 19:5–8 본문 →

5–8절은 친교 제물에 관한 규정입니다.

친교 제물은 레위기 3장과 7장에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제물의 일부는 제단에 바쳐지고, 정해진 몫은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기를 먹는 기간이 강조됩니다.

제물을 바친 날과 그다음 날에는 먹을 수 있지만, 셋째 날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합니다. 셋째 날에 먹으면 그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먹은 사람은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것을 더럽힌 책임을 지게 됩니다.

레위기 7:15–18을 함께 읽으면 친교 제물의 종류에 따라 먹는 기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의 제물은 바친 날에 먹어야 하고, 서원이나 자원하는 제물은 다음 날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19장의 규정은 그 가운데 셋째 날까지 고기를 남겨 먹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을 다시 강조합니다.

친교 제물의 고기는 사람이 먹을 수 있지만, 그것은 먼저 여호와야훼께 바쳐진 제물입니다. 따라서 먹는 사람의 판단만으로 그 사용 방법을 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규정에 고기를 오래 보관할 때의 부패 위험이 고려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위생 문제를 금지의 이유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죄책을 짊어져야 한다.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것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다.』」레위기 19:8 · 본디새김

거룩한 제물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19장은 성소의 규정을 이어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단 위에 놓인 제물에서 수확을 앞둔 밭으로 이동합니다.

거룩한 사람은 왜 자기 밭을 끝까지 거두지 않는가?

레위기 19:9–10 본문 →

「『너희가 너희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는, 각자 자기 밭 가장자리까지 모조리 거두지 마라. 네가 수확할 때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마라.』」레위기 19:9 · 본디새김

곡식을 수확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노동한 결과를 얻는 일입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식이 자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므로 수확물을 최대한 거두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수확을 끝까지 마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남김이 있습니다. 하나는 밭의 가장자리를 의도적으로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확하다가 떨어진 이삭을 다시 줍지 않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수확하기 전부터 남겨 두는 몫이고, 두 번째는 수확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되찾지 않는 일입니다.

「『네 포도밭에서 남은 포도를 마저 따지 마라. 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를 줍지 마라. 가난한 이와 거류민을 위해 그것들을 남겨 두어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10 · 본디새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은 농부가 수확을 끝낸 뒤 남은 것을 우연히 얻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들을 위한 몫을 남겨 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수확이 끝난 뒤의 선택적인 선행으로만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수확하는 방법 자체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여전히 그 밭은 농부의 밭입니다. 본문도 「네 밭」, 「네 포도밭」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농부의 소유권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가 있습니다.

모압 출신의 룻은 베들레헴에서 이삭을 줍습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일꾼들의 뒤를 따라 이삭을 줍고, 그 곡식으로 나오미와 함께 살아갈 양식을 마련합니다. 룻기는 레위기 19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 수확물을 남겨 두는 규정이 실제로 어떤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지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9장은 남겨 두어야 할 곡식의 정확한 비율을 지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일정한 기부 비율이나 소득 분배 공식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제단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사람은 밭에서도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품꾼의 임금과 듣지 못하는 사람 —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거룩함

레위기 19:11–14 본문 →

11–14절은 사람 사이의 일상적인 관계를 다룹니다.

도둑질하지 말고, 속이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어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거짓말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면, 다른 사람을 속이는 데 하나님의 이름까지 끌어들입니다. 12절은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말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그 이름을 더럽히게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언어가 사람 사이의 불의를 감추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마라. 강탈하지 마라. 품꾼의 품삯을 밤을 넘겨 아침까지 네게 묵혀 두지 마라.』」레위기 19:13 · 본디새김

하루의 노동을 마친 품꾼에게 그날의 품삯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몫이었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4:14–15에서는 가난한 품꾼을 억압하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품삯을 주라고 명령하면서, 그가 가난하여 그 품삯에 마음을 두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품삯을 지급해야 하는 사람은 돈을 가지고 있는 쪽입니다. 그는 그 돈을 하루 더 붙잡아 둘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힘을 이용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직 지급하지 않은 돈이 고용주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그 돈을 마음대로 붙잡아 둘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앞의 밭 가장자리 규정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은 한 사람이 가진 권한에 경계를 세웁니다.

왜 듣지 못하는 이를 저주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듣지 못하는 이를 저주하지 마라. 보지 못하는 이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지 마라.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라.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14 · 본디새김

듣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장애물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상대방이 자신의 힘으로 그 상황을 인식하거나 대처하는 데 제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약점을 이용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그 행위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감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보호하거나 잘못을 밝혀내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해쳐도 된다는 허락이 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자신을 방어할 힘이 부족할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가난한 사람의 편도 들지 마라 — 공정함이 자비와 충돌하는가?

레위기 19:15–16 본문 →

15절은 예상 밖의 균형을 요구합니다.

「『너희는 재판에서 불의를 행하지 마라. 가난한 이의 편을 들지 마라. 힘 있는 이를 우대하지 마라. 네 동료를 공정하게 재판하여라.』」레위기 19:15 · 본디새김

9–10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수확물을 남겨 두라고 합니다. 15절에서는 재판을 할 때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한쪽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과, 사실과 관계없이 그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본문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라는 명령과 공정하게 판단하라는 명령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이 둘은 서로 경쟁하는 가치가 아니라, 각기 다른 상황에서 요구되는 의로움입니다.

16절은 재판의 자리에서 공동체의 일상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네 백성 가운데 돌아다니며 남을 헐뜯지 마라. 네 이웃이 피를 흘리는데 가만히 서 있지 마라.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16 · 본디새김

하나는 이웃의 생명이 위험할 때 가만히 서서 방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웃의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거나 그 피를 이용해 이익을 얻는 일을 금지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헐뜯음에 관한 명령과 연결하여, 거짓 증언이나 악의적인 고발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하게 만드는 상황을 고려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다만 어느 해석을 택하더라도 이웃의 생명과 관련된 상황에서 무책임하거나 해로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거룩한 공동체는 법정에서만 공정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에 관해 말하는 방식에서도 다른 사람의 삶을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두 절에서는 법정이나 거리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영역, 곧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번째 표현의 히브리어는 로 타아모드 알 담 레에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네 이웃의 피 위에 서지 마라’에 가깝습니다. 본문은 이 표현이 가리키는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구조 의무를 이 구절 하나에서 바로 도출하거나, 오직 거짓 증언만을 금지한다고 좁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 왜 꾸짖으라는 말씀이 있는가?

레위기 19:17–18 본문 →

레위기 19장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씀은 18절입니다.

「『네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 복수하지 마라. 그들에게 앙심을 품지 마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18 · 본디새김

그런데 이 말씀은 단독으로 놓여 있지 않습니다.

「『네 마음속으로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마라. 네 동료를 반드시 꾸짖어라. 그 사람 때문에 죄책을 짊어지지 마라.』」레위기 19:17 · 본디새김

상대방이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음속에 미움을 쌓아 둘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지내지만, 마음속에는 분노가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태도를 거룩한 관계의 완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필요한 책망이나 잘못에 대한 지적을 피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뒤따르는 「그 사람 때문에 죄책을 짊어지지 마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가?

하나는 이웃이 잘못한 일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아 그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대방을 꾸짖는 과정에서 자신도 잘못을 저질러 죄책을 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 꾸짖음이 분노나 모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경고로 이해됩니다.

이제 18절은 그 책임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끌고 갑니다.

복수하지 않습니다.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합니다.

복수는 상대방에게 해를 되돌려 주려는 행동입니다. 앙심은 그 해를 되돌려 주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계속 붙잡아 두는 태도입니다. 본문은 이 둘을 모두 금지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사랑을 명령합니다.

「너 자신처럼」을 정확하게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는 세부적인 논의가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자신을 대하는 기준과 이웃을 대하는 기준을 분리하지 말라는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잘못을 기억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자신의 존엄과 삶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웃을 대할 때도 그와 같은 진지함을 요구하십니다.

여기서 사랑은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좋게 평가하는 일이 아닙니다. 17절이 잘못을 꾸짖으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해를 당했을 때 아무런 판단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15절이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잘못을 없는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다루면서도 상대방을 미움과 복수의 대상으로만 남겨 두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장은 여기서 사랑의 대상을 설명하는 일을 끝내지 않습니다. 나중에 34절에서 같은 명령이 다시 등장하는데, 그때는 뜻밖의 사람이 그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호케아흐 토키아흐(⁨יָכַח⁩)는 같은 어근의 부정사와 동사가 결합되어 명령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꾸짖어도 좋다는 허락보다 강한 말입니다. 원문의 전치사 알라브는 이러한 해석을 한쪽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이웃의 잘못을 대하는 태도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마가복음 12:28–34에서 예수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묻는 질문에 신명기 6:4–5의 하나님 사랑과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을 연결해 답하십니다. 마태복음 22:34–40에서도 이 두 계명이 함께 등장합니다. 야고보서 2:1–9에서도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연결은 레위기 19장에서 이미 공정한 재판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이웃 사랑과 함께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섞지 말라는 규정과 자유롭지 않은 여자 노예

레위기 19:19–22 본문 →

19절은 다시 다른 종류의 명령들로 전환됩니다.

「『너희는 내 규례들을 지켜라. 네 가축을 서로 다른 두 종류끼리 교미시키지 마라. 네 밭에 두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마라. 두 종류를 섞어 짠 천으로 만든 옷을 네 몸에 걸치지 마라.』」레위기 19:19 · 본디새김

여기서 거룩함을 ‘구별’이라는 개념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종류가 가진 경계를 무시하지 않도록 명령받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모든 종류의 혼합이 하나님 앞에서 나쁘다는 원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26장의 성막 제작 규정에서는 여러 색의 실과 직물이 함께 사용됩니다. 또한 신명기 22:11은 혼합 직물의 금지를 양털과 아마포의 결합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가 모든 종류의 물질적 혼합을 일률적으로 금지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규정의 목적을 유전적 문제나 농업 생산성, 직물의 실용성에 관한 설명으로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세 가지 종류의 혼합을 금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바로 이 세 가지가 선택되었는지는 확실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유롭지 않은 여자 노예의 경우

20–22절에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어려운 법적 상황이 등장합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와 정액을 내는 성교를 했는데, 그 여자가 한 남자에게 정해진 여자 노예이고 몸값을 치러 풀려난 일이 전혀 없거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그 여자가 자유롭게 풀려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레위기 19:20 · 본디새김

여자의 법적 지위가 이 사건의 처벌을 판단하는 중요한 이유로 제시됩니다. 자유로운 여자와 자유롭지 않은 여자 노예가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이어 남자는 속건 제물인 숫양을 만남의 천막 입구로 가져옵니다. 제사장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해 속죄하고, 그는 용서를 받습니다. 이곳에서 속건 제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의 행위가 단순히 정결 절차만 필요한 신체 현상이 아니라 죄로 다루어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다만 본문은 여자 노예의 의사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동의했는지, 강요받았는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권력관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상황에서 여자 노예에게도 동등한 책임이 있었다고 말하거나, 반대로 이 규정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성적 착취 문제를 충분히 해결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고대 법률의 사회적 한계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규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과 그 사회적 구조를 오늘날에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본문이 가진 신분상의 불평등을 감추어서도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처벌이 있어야 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코레트(⁨בִּקֹּרֶת⁩)는 의미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조사나 심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처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어떤 형태의 처벌을 받는지 역시 이 구절에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법을 근거로 당시의 구체적인 재판 절차나 처벌 방법을 모두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나무의 열매를 먹기까지 다섯 해를 기다리는 이유

레위기 19:23–25 본문 →

23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제물을 셋째 날에 먹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위해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합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서 먹을 열매를 맺는 어떤 나무든 심으면, 그 나무의 열매를 할례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라. 세 해 동안 그것은 너희에게 할례받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먹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19:23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독특한 표현은 열매를 「할례받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아직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은 상태를 표현하는 비유입니다.

나무가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농업적인 이유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첫 세 해에는 먹지 않습니다.

사 년째에는 여호와야훼께 속한 거룩한 열매가 됩니다.

오 년째에는 사람이 먹습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열매가 맺혔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심는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에 시간이 놓이고, 그 시간의 한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몫이 놓입니다.

「『사 년째에는 그 모든 열매가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기 위한 거룩한 것이어야 한다.』」레위기 19:24 · 본디새김

사 년째의 열매는 단순히 인간의 소비를 위해 남겨진 생산물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기 위한 거룩한 열매로 구별됩니다. 그 구체적인 처리 방법을 이 구절이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 년째에는 그 열매를 먹어라. 이는 너희에게 그 나무의 소출을 더해 주기 위한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25 · 본디새김

이러한 순서에서 인간의 노동과 하나님의 선물이 만납니다. 나무를 심은 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때와 방식은 사람이 혼자 결정하지 않습니다.

밭의 수확물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 일부를 남겨 둡니다. 나무의 열매는 정해진 기간을 거쳐 여호와야훼께 거룩하게 구별된 뒤에 먹습니다.

거룩함은 자신이 얻은 것을 모두 즉시 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절제의 끝에 열매를 먹는 기쁨을 금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오 년째에는 그 열매를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몸에 남기는 표식과 영매를 찾는 일 — 누구에게 삶을 맡길 것인가?

레위기 19:26–31 본문 →

26–31절에는 서로 다른 여러 금지 명령이 모여 있습니다.

피 위에서 먹는 일, 점술, 머리카락과 수염을 특정한 방식으로 자르는 일, 죽은 이를 위해 몸에 상처를 내는 일, 표식을 새기는 일, 딸에게 매춘을 시키는 일, 영매와 점쟁이를 찾는 일이 등장합니다. 이 명령들이 하나의 의식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특히 점술과 죽은 이를 둘러싼 관행, 영매를 찾는 일은 사람이 자신이 처한 삶과 미래와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와 관계됩니다.

「피 위에서 먹지 마라」

「『너희는 피 위에서 먹지 마라. 징조를 살펴 점치지 마라. 점술을 행하지 마라.』」레위기 19:26 · 본디새김

앞서 레위기 17장에서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표현이 다릅니다.

히브리어 로 토켈루 알 하담은 문자적으로 ‘피 위에서 먹지 마라’에 가깝습니다. 피가 남아 있는 고기를 먹는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고, 피와 관련된 특정한 제의적 식사나 관습을 금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점술과 관련된 명령이 나오므로 피를 사용한 제의적 관행과 연결하여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확한 행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레위기 17장의 피 금지 규정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단정하거나, 특정한 점술 의식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징조를 살피거나 점술을 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도록 허락받지 않았습니다.

머리와 수염, 몸에 새기는 표식

27–28절은 몸을 다루는 방식에 관한 규정입니다.

머리 가장자리의 머리카락을 둥글게 깎거나 수염 가장자리를 훼손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죽은 이를 위해 살에 베인 자국을 내거나 몸에 표식을 새겨 넣는 일을 금지합니다.

특히 28절 앞부분은 죽은 이를 위한 행위라는 목적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4:1에서도 죽은 사람을 위해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행위가 금지됩니다. 이 연결을 보면 적어도 일부 규정은 죽음을 둘러싼 애도나 제의적 관습과 관련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9:28의 뒤쪽에 있는 표식을 새기는 금지에도 반드시 앞의 「죽은 이를 위해」라는 목적이 그대로 적용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대의 몸에 표식을 새기는 관행과 현대적인 문신의 모든 형태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전제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금지하는 행위와 현대의 다양한 신체 장식 관행을 구분하여 살펴야 합니다.

딸을 매춘에 내몰지 마라

「『네 딸에게 매춘을 시켜 그를 더럽히지 마라. 그 땅이 매춘하고 그 땅이 사악한 짓으로 가득 차는 일이 없게 하여라.』」레위기 19:29 · 본디새김

여기서 행위의 주체는 딸에게 매춘을 시키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몸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딸을 이용하는 행위가 그 땅 전체의 부패와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오직 이방 신전과 관련된 제의적 매춘만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좁혀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렇게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지위나 권한을 이용하여 딸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부모를 경외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이제 부모 또는 보호자가 딸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가족 안의 권위는 다른 가족 구성원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닙니다.

다시 안식일과 성소로

「『내 안식일들을 지켜라. 내 성소를 경외하여라.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30 · 본디새김

3절에서 이미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성소를 경외하라는 명령과 함께 놓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놓인 명령들은 들판에서 곡식을 거두는 일, 노동자의 임금을 지급하는 일, 이웃을 사랑하는 일, 몸과 가족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소의 거룩함은 그러한 일상과 분리된 별도의 영역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31절에서는 영매와 점쟁이를 찾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죽은 사람이나 초자연적 존재와 접촉하여 지식을 얻으려는 관행은 여호와야훼를 향한 신뢰와 충돌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오보트와 이드오님이 불려 오는 영적 존재들을 가리키는지, 그들과 접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이들을 영매와 점쟁이로 옮깁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향하거나 그들을 찾아 부정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 이르면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흰머리 난 사람 앞에서 일어서라 — 경외가 눈에 보이는 순간

레위기 19:32 본문 →

32절은 짧지만 강렬한 장면을 보여 줍니다.

「『흰머리 난 이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을 존중하여라.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라.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32 · 본디새김

14절에서 듣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연결되었습니다. 이제는 노인을 존중하는 일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은 오직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예배 행위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의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에도 나타납니다. 그 사람 앞에서 일어서는 행동은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런 행동까지 자신의 이름과 연결하십니다.

본문은 노인을 존중하라고 명령하지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무조건 정당화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장의 다른 부분에서는 공정한 재판과 필요한 꾸짖음도 명령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노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라기보다 그 사람에게 마땅한 존중을 나타내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존중을 넘어 사랑하라는 명령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입니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거류민이었다」 — 사랑의 경계가 넓어지다

레위기 19:33–34 본문 →

「『거류민이 너희 땅에서 너와 함께 머물면,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마라.』」레위기 19:33 · 본디새김

여기까지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금지 명령입니다. 그런데 34절은 훨씬 더 적극적인 관계를 요구합니다.

「『너희와 함께 머무는 거류민은 너희에게 너희 가운데 있는 본토인과 같아야 한다. 너희는 저마다 그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거류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34 · 본디새김

18절에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네 형제」와 「네 백성에 속한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34절에서는 사랑의 대상으로 거류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똑같이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단지 자신과 같은 민족이나 공동체에 속한 사람에게만 한정하여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거주하는 거류민은 분명히 그 사랑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다른 사람의 땅에 머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억압을 겪었고,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자신의 땅을 갖게 되었을 때, 과거에 자신들이 겪었던 처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경험한 역사적 구원을 그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근거로 삼으십니다.

거류민은 가난한 사람과 함께 밭의 이삭과 포도를 남겨 받아야 할 대상으로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사람이 됩니다.

먹을 것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거류민을 「본토인과 같아야 한다」고 한 말씀을 현대적인 모든 법적 권리가 완전히 동일해야 한다는 제도로 직접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법에는 본토인과 거류민 사이에 구체적인 지위의 차이가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차이를 이유로 거류민을 멸시하거나 학대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단지 과거의 고통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의 기억을 다른 사람을 대하는 행동으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경험한 해방을 새로운 억압의 권리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저울을 가진 사람이 거룩하다

레위기 19:35–37 본문 →

이제 장의 끝에 가까워지면서 본문은 다시 뜻밖의 장소로 이동합니다.

「『너희는 재판에서, 치수를 재는 일에서, 무게를 다는 일에서, 용량을 재는 일에서 불의를 행하지 마라.』」레위기 19:35 · 본디새김

재판에서는 사실을 왜곡하여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저울이나 되를 조작하여 잘못된 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실제로 주어야 할 몫이나 판단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재판의 공정함과 거래의 정확성을 같은 의로움의 문제로 다룹니다.

「『너희는 정확한 저울과 정확한 저울추와 정확한 에파와 정확한 힌을 갖추어라.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36 · 본디새김

에파는 곡물과 같은 마른 물질의 양을 재는 단위이고, 힌은 액체의 양을 재는 단위입니다. 원문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저울’, ‘의로운 저울추’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측정기기의 성능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래에서 상대방에게 돌아가야 할 양을 속이지 않는 공정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설명하는 장이 마지막에 저울과 저울추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억압을 당하던 곳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이 물건을 팔고 돈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섰을 때, 다른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경제적인 행동과 연결됩니다.

거류민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도 이집트에서 거류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저울을 사용해야 한다는 명령의 마지막에서도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일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구원의 기억은 예배의 고백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시장과 일터, 거래와 계약에서 실제적인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키고 그것들을 행하여라.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19:37 · 본디새김

이 선언은 각기 다른 명령 뒤에 놓이며 그 모든 명령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이 장에는 제의적 규정과 사회적 윤리, 공동체의 법과 특정한 고대 관습에 대한 금지가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규정을 하나의 윤리 원칙으로 완전히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낫이 멈춘 자리

레위기 19:1–37 본문 →

레위기 19장의 마지막을 읽고 나면, 다시 9–10절의 밭으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자신에게 허락된 권한을 행사할 때에도, 그 권한이 다른 사람의 삶을 해치지 않도록 경계를 지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농부가 자기 밭의 가장자리에 누구를 위한 자리를 남겨 두는가에서도 드러납니다.

곡식이 익었습니다. 농부는 수확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밭으로 나갑니다. 낫으로 곡식을 거두어들입니다.

그가 오랫동안 돌본 곡식입니다. 그가 씨를 뿌렸고, 기다렸고, 이제 수확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밭의 가장자리에 이르러 낫을 멈춥니다.

거기에 있는 곡식까지 모두 거둘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수확하다가 이삭이 떨어져도 다시 줍지 않습니다.

포도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포도를 끝까지 따지 않고, 떨어진 포도를 줍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한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수확할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힘을 끝까지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명령 뒤에 자신의 이름을 두십니다.

밭의 한쪽에는 아직 거두지 않은 곡식이 서 있습니다. 그 곡식은 잊혀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 때문에 남겨진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