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17–26장 · 거룩한 삶의 규정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유

레위기 22장에는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듯한 두 명령이 나옵니다. 제사장은 어떤 때에는 거룩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정결해지면 다시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짐승은 온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짐승이라도 태어난 지 일곱 날이 지나지 않았다면 아직 바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결정하는 것일까요? 제사장의 신분도,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열심도, 짐승의 상태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다루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가 있습니다. 그 경계는 사람의 몸과 가족의 식탁, 제단에 바치는 짐승, 심지어 짐승이 태어난 뒤 흘러가는 시간에까지 미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인간의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다루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질서 안에는 사람을 먹이시고 생명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722장 본문 읽기 →

거룩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할 때

레위기 22:1–9 본문 →

거룩한 것에 가까이 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거리

여호와야훼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먼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위해 성별하는 거룩한 것들에서 자신을 멀리해야 하고,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22:2 · 본디새김

제사장에게 거룩한 것들에서 자신을 멀리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뜻밖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거룩한 것을 다루도록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자손이라도 몸에 부정함이 있는 상태에서 거룩한 것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2절의 명령은 제사장이 언제나 거룩한 것을 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분별하고 합당하지 않을 때 물러서야 한다는 뜻으로 구체화됩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에 접근할 권한을 받았지만, 그 권한을 무조건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것은 제사장에게 맡겨졌어도 제사장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두 차례나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야훼를 위해 성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2–3절). 백성이 바친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맡아 다루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말하여라. 『대대로 너희 모든 자손 가운데 누구든 몸에 부정함이 있는 채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야훼를 위해 성별하는 거룩한 것들에 가까이 가면, 그 사람은 내 앞에서 끊어질 것이다.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22:3 · 본디새김

본문은 단순히 공동체에서 쫓겨난다고 말하지 않고 「내 앞에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구별된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끊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구체적인 처벌 방식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그 위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한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부정함은 언제나 죄를 지었다는 뜻인가?

4–6절에는 제사장을 부정하게 만드는 여러 상황이 등장합니다. 차라아트, 몸의 유출, 시신으로 인한 부정함, 정액의 배출, 부정하게 하는 생물이나 사람과의 접촉 등입니다.

정액의 배출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 범죄가 아닙니다. 시신과의 접촉 역시 장례나 가족의 죽음과 관련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도 제사장이 가까운 가족의 죽음 때문에 부정하게 되는 경우를 허용합니다(레위기 21:1–3).

차라아트도 현대 의학에서 말하는 한 가지 특정 질병과 그대로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레위기 13–14장이 다루는 범위에는 여러 피부 병변과 의복이나 집에 생긴 이상 현상까지 포함됩니다.

따라서 이 규례를 이해할 때는 의례적 부정함과 도덕적 죄를 구별해야 합니다.

물론 부정한 상태에서 금지된 성물에 접근하는 행위는 잘못이 됩니다. 그러나 부정한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곧 그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해가 지면 다시 먹을 수 있다

그 절차는 6–7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모두 저녁까지 부정하다. 그는 자기 몸을 물로 씻지 않고서는 거룩한 것들을 먹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22:6 · 본디새김
「『해가 지면 그는 정결해지고, 그 뒤에는 거룩한 것들을 먹을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음식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2:7 · 본디새김

거룩한 음식은 제사장에게 단지 의식을 수행하기 위한 물건이 아닙니다. 그와 그 집안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부를 제사장의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다만 4절에서 말한 차라아트나 지속적인 유출과 같이 별도의 정결 절차가 필요한 상태까지 모두 하루 만에 끝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각 부정함의 성격에 따라 회복의 조건이 다르다는 전제 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8–9절은 이러한 규례를 지켜야 할 제사장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제사장은 스스로 부정함을 초래하는 음식을 피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단락은 처벌에 대한 경고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맡긴 의무를 지켜야 한다. 거룩한 것을 더럽혀 그 때문에 죄를 짊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죽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나는 그들을 성별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22:9 · 본디새김

제사장은 스스로 거룩한 사람이 되어 그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책임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레위기 22:10–16 본문 →

혈통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식탁

앞 단락이 제사장 자신의 상태를 다루었다면, 이제 관심은 제사장의 집안으로 옮겨 갑니다.

10절은 외부인은 누구도 거룩한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제사장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이나 품꾼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자기 은으로 사람을 사서 소유하면, 그 사람은 그것을 먹을 수 있다. 그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그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레위기 22:11 · 본디새김

이것은 개인의 신앙심이나 도덕적 자격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의 가구와 소속 관계를 기준으로 음식을 먹을 자격을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외부인」은 반드시 다른 민족 출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사장 집안의 거룩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어도 제사장 집안에 속하지 않으면 이 규정상 외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은 고대 사회의 노예 소유 제도를 전제합니다. 따라서 노예도 제사장의 식탁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사람을 소유하는 사회 구조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그것을 현대 사회의 윤리적 모범으로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떠났다가 돌아온 딸의 자리

12절에 따르면 제사장의 딸이 외부인인 남자의 아내가 되면 더 이상 그 거룩한 몫을 먹을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제사장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인으로 새로운 집안에 속하게 되면, 아버지 집안의 거룩한 음식에 대한 자격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13절은 다시 예외를 말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딸이 과부가 되거나 남편에게 쫓겨나고, 자손이 없으며, 젊었을 때처럼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 아버지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외부인은 누구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22:13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혼인과 자녀는 가문의 소속과 생계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자녀가 있다는 사실이 왜 자격을 제한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본문이 출생 혈통만이 아니라 현재의 가구 관계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규례를 현대적인 의미의 사회보장 제도로 곧바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여자의 경우에는 다른 규정이 적용되므로, 모든 취약한 여성을 포괄하여 보호한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앞 단락에서 부정했던 제사장이 정결해진 뒤 다시 음식을 먹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거룩한 식탁에 대한 접근은 단순히 한 번 주어지거나 영원히 박탈되는 고정된 자격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상태와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수로 먹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4절은 또 다른 경우를 다룹니다.

「『누구든 실수로 거룩한 것을 먹으면, 거기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 거룩한 것을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레위기 22:14 · 본디새김

이것은 레위기 5:15–16에서 거룩한 것에 대해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배상 규정과 연결됩니다. 본문은 고의와 실수를 구별합니다. 실수는 고의적인 모독과 같지 않지만, 실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발생한 손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잘못 사용했다면 그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15–16절에서는 책임의 방향이 다시 제사장들에게 향합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바친 거룩한 것을 더럽혀서는 안 되며,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잘못 먹음으로써 죄책을 짊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16절의 대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그 죄책을 지는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으로 읽습니다. 이는 앞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것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문맥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대명사의 연결 방식 때문에 제사장 자신들에게 돌아가는 죄책을 강조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분명한 것은 제사장의 거룩함이 개인적 자격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친 것을 올바르게 관리할 책임도 집니다.

이제 본문은 성물을 받아 관리하는 제사장에게서, 성물을 가져오는 백성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왜 온전해야 하는가

레위기 22:17–25 본문 →

무엇을 드리느냐보다 먼저,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17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8절은 이스라엘 집안의 사람들과 이스라엘에 사는 거류민이 서원이나 자원 제물로 번제를 드리는 경우를 다룹니다.

「『너희를 위해 받아들여지려면 소나 양이나 염소 가운데 온전한 수컷을 바쳐야 한다.』」레위기 22:19 · 본디새김
「『흠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바치지 마라. 그것은 너희를 위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2:20 · 본디새김
「『누구든 서원을 이행하려고, 또는 자원 제물로 소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여호와야훼에게 친교 제물을 바칠 때에는, 그 제물이 받아들여지려면 온전해야 한다. 그것에는 어떤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22:21 · 본디새김

이 반복은 본문의 관심이 단순히 제물의 외형을 검사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핵심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9절의 히브리어 리르초네켐(⁨רָצוֹן⁩)은 이 문맥에서 제물이 바치는 사람을 위해 받아들여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라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본문은 바로 이어서 제물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말합니다.

제물을 바치려는 사람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제물이 합당한지는 바치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정하십니다.

22절에는 눈이 보이지 않거나 뼈가 부러진 동물, 상처와 피부 병변이 있는 동물 등이 나열됩니다. 이런 동물은 제단에 올려서는 안 됩니다.

이 규정은 당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선택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가축은 먹을거리이자 재산이며 번식과 노동을 위한 자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제물로 쓸 수 있는 동물을 구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것을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라는 명령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준은 제물로서의 온전함입니다.

레위기에서 제물은 인간이 하나님께 건네는 임의의 선물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으신 백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드리는 예물입니다.

그렇다면 흠이 있는 동물은 전혀 드릴 수 없는가

23절에는 이 규정에서 가장 주의 깊게 읽어야 할 예외가 나옵니다.

「『몸의 한 부분이 지나치게 길거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 소나 양이나 염소는 네가 자원 제물로 삼아도 된다. 그러나 서원 제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레위기 22:23 · 본디새김

서원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다고 약속한 뒤 그 약속을 이행하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자원 제물은 그러한 서원에 매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입니다. 레위기 7:16도 두 종류를 나란히 구별합니다.

23절을 읽는 데에는 두 가지 가능한 이해가 있습니다.

첫째, 제단에 드리는 제물 자체에 대한 제한적인 예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흠이 있는 동물은 안 되지만, 이 절에서 특정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동물은 자원 제물로 바칠 수 있고 서원 제물로는 바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원 제물로 삼아도 된다」는 표현을 가장 직접적으로 읽는 방식입니다.

둘째, 제단의 희생 제물이 아닌 자발적인 헌물로 바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21–22절의 흠 없는 희생 제물 규정과의 일관성이 강조됩니다. 즉 동물을 성소를 위한 헌물로 내놓는 것은 허용되지만, 실제 제단에 올리는 희생 제물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만으로 이 논쟁을 완전히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든 서원과 자원 제물이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에는 바치는 사람의 의도뿐 아니라, 그 예물이 어떤 성격으로 드려지는지도 중요합니다.

사람의 몸과 제물의 몸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22절의 결함 목록은 앞 장에서 제사장의 신체적 흠을 다룬 규정과 비슷합니다(레위기 21:17–23).

앞 장은 신체적 흠이 있는 제사장에게도 거룩한 음식을 먹을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그는 자기 하나님의 음식, 곧 지극히 거룩한 것들과 거룩한 것들을 먹을 수 있다.」 (레위기 21:22) 그의 제단 봉사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제사장으로서 주어지는 양식 자체를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레위기 22장의 동물 규정은 제단에 바칠 제물의 조건을 다룹니다.

둘 다 신체의 온전함이라는 상징적 기준이 사용되지만, 그것은 인간과 동물의 가치가 신체적 완전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 장을 함께 읽으면 한 사람이 지닌 가치, 맡을 수 있는 제사 직무, 제단에 올릴 수 있는 제물의 조건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24절은 고환이 손상되거나 제거된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까지 금지합니다. 이어지는 「너희 땅에서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은 그러한 손상을 만들어 내는 행위까지 제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금지가 정확히 어떤 행위의 범위까지 미치는지는 구절만으로 모두 확정할 수 없습니다.

25절은 외국인의 손에서 받은 동물이라도 이런 흠이 있다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8절에서는 이스라엘에 사는 거류민도 제물을 바치는 사람으로 등장했습니다. 다만 이 거류민은 25절의 외국인과 구별되는 범주입니다.

25절이 금지하는 것은 외국인의 손을 거쳐 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손상되거나 흠이 있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일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출신이나 제물이 들어온 경로가 규정의 예외를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이제까지 본문은 제물의 상태를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단락에서 뜻밖에도 관심이 제물의 신체에서 그 짐승이 태어난 날과 어미와의 관계로 옮겨 갑니다.

온전한 짐승도 아직 바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레위기 22:26–28 본문 →

일곱 날 동안 어미 곁에 있어야 한다

27절은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가 태어나면 일곱 날 동안은 그 어미 곁에 있어야 한다. 여덟째 날부터는 여호와야훼에게 바치는 불 제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레위기 22:27 · 본디새김

앞 단락의 규정을 충족하는, 아무런 흠이 없는 새끼라 하더라도 태어난 즉시 제물로 바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단순히 일곱 날을 기다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기간 동안 새끼가 「그 어미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짐승이라는 사실이 그 짐승을 언제든 처분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왜 반드시 일곱 날이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규정이 오직 동물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거나, 반대로 순전히 형식적인 의례적 숫자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물을 바치려는 인간의 의도가 갓 태어난 생명의 시간에 무제한으로 우선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한날에 함께 죽여서는 안 되는 생명

28절은 여기에 또 하나의 제한을 더합니다.

「소든 양이나 염소든, 그것과 그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 된다.」레위기 22:28 · 본디새김

여기서 규정은 제단에 바치는 행위만이 아니라 짐승을 잡는 행위 자체를 제한합니다.

레위기 22장은 동물의 죽임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제사를 위해 짐승을 잡는 일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제사가 허용된다는 이유로 모든 방식의 죽임이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더욱 정해진 한계를 지켜야 합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짐승을 가져올 권한을 갖고 있지만, 그 생명의 시간과 관계까지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27절의 「그 어미 곁에」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2장 끝부분의 첫 새끼에 관한 명령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가축의 새끼를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한 뒤 여덟째 날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또한 레위기 12:3에는 사람의 남자아이가 태어난 뒤 여덟째 날 할례를 받는 규정이 나옵니다. 두 규례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덟째 날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과 제물을 다루는 시간의 경계로 사용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28절의 히브리어 표현이 어미와 새끼만을 가리키는지, 아비와 새끼의 관계까지 포함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이 「그것과 그 새끼」라고 옮긴 것은 성별을 명시하지 않은 원문의 여지를 살린 번역입니다. 이 규정은 신명기 22:6–7에서 새의 둥지를 발견했을 때 어미와 새끼를 함께 취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규정의 대상과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생명을 취할 수 있는 인간의 권한에 일정한 한계를 둔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감사의 제물은 그날에 먹어야 한다

레위기 22:29–30 본문 →

짐승의 나이와 죽임에 관한 명령 다음에는 다시 식탁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너희가 여호와야훼에게 감사 제물을 잡아 바칠 때에는, 너희를 위해 받아들여지도록 잡아 바쳐라.」레위기 22:29 · 본디새김
「그것은 그날에 먹어야 한다.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마라.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22:30 · 본디새김

여기서 감사 제물은 친교 제물의 한 형태입니다. 레위기 7:11–15는 감사 제물과 함께 드리는 음식 및 제물의 고기를 먹는 절차를 설명합니다.

레위기 7:16에 따르면 서원 제물이나 자원 제물은 바친 다음 날에도 남은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 제물은 바친 당일에 먹어야 합니다.

왜 감사 제물에는 이런 제한이 있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반드시 감사의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한 규정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음식은 인간의 일상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성격을 잃지 않습니다.

모든 규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돌아가는 이유

레위기 22:31–33 본문 →

마지막 세 절은 앞에서 나온 여러 명령을 한데 모읍니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거룩하게 여겨져야 한다. 나는 너희를 성별하는 여호와야훼이며,」레위기 22:32 · 본디새김

32절의 명령은 2절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명령으로 시작하여, 같은 명령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히 입으로 부르는 호칭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분이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를 맺으셨는지와 연결됩니다.

그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그분의 뜻에 따라 다루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본문은 거룩함을 성소 안에서 벌어지는 특정 의식으로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신체 상태와 식탁의 구성, 가축을 잡는 시기와 감사 제물을 먹는 날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방식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거룩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먼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그 사실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이다. 나는 여호와야훼다.」레위기 22:3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먼저 거룩한 규례를 모두 지켰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이끌어 내셨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셨습니다.

이 표현에서 구원의 목적은 단순히 노예 생활을 끝내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또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자신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이스라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자격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6:6–7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건져 내어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2:33은 바로 그 관계를 다시 불러옵니다. 레위기 19: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 장의 거룩함에는 부모를 공경하는 일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배려, 공정한 재판, 이웃을 사랑하는 일, 거류민을 대하는 태도까지 포함됩니다(레위기 19:9–18, 33–34).

다시, 해 질 무렵의 식탁으로

레위기 22:1–33 본문 →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음식은 인간이 함부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음식을 제사장의 양식으로 주셨으며, 정결해진 그가 다시 먹도록 하셨습니다.

부정함 때문에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했던 제사장이 몸을 씻고 기다립니다. 해가 집니다. 그는 정결해졌고 이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해가 지기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영원히 굶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것을 멀리해야 할 때를 정하신 여호와야훼께서, 다시 가까이 가서 먹을 수 있는 때도 정해 주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