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17–26장 · 거룩한 삶의 규정
거둘 때에도 남겨 두고, 풍요로울 때에도 초막에 머물기
한 해 농사를 마친 사람이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창고를 채웠습니다. 긴 노동 끝에 마침내 풍족함을 누릴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뜻밖의 일을 명령하십니다. 튼튼한 집에서 나와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수확을 시작할 때에는 또 다른 명령을 하십니다. 새로운 곡식을 거두더라도 하나님께 먼저 바치기 전에는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밭을 수확할 때에는 가장자리까지 남김없이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주워 모으지 말라고 하십니다.
수확을 시작할 때에는 기다려야 하고, 수확하는 동안에는 남겨 두어야 하며, 수확을 마쳤을 때에는 집을 떠나 초막에 머물러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풍요를 누리는 순간마다 인간의 행동에 이런 제한을 두시는 것일까요?
레위기 23장은 흔히 이스라엘의 종교 달력을 설명하는 장으로 읽힙니다. 실제로 안식일과 유월절, 누룩 없는 빵의 축제, 첫 수확물과 쉰 날의 절기, 일곱째 달의 여러 거룩한 날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장의 관심은 단순히 어느 날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장소와 제물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시간까지 자신의 뜻에 따라 구별하도록 가르치십니다.
누구의 시간인가
절기는 사람이 정하지만, 하나님께 속한다
여호와야훼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가 거룩한 모임으로 선포할 여호와야훼의 절기들, 이것들이 나의 절기들이다.』」레위기 23: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절기들을 거룩한 모임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절기들은 여호와야훼의 절기이며, 하나님은 그것들을 「나의 절기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절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쉬기로 정한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가운데 구별해 두신 시간입니다. 거룩한 시간은 개인이 마음속으로만 기억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함께 인정하고 모이며 일상의 활동을 달리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구별하시고, 이스라엘은 그 구별을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한 해의 절기보다 먼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그런데 여러 절기를 소개하는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은 유월절이 아니라 안식일입니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일곱째 날은 온전히 쉬는 안식일이며 거룩한 모임이다. 어떤 일도 하지 마라.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이날은 여호와야훼의 안식일이다.』」레위기 23: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거룩한 시간은 일 년에 몇 번 찾아오는 특별한 축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 쉬는 평범한 한 주에도 하나님의 질서가 새겨져 있습니다. 농사가 잘되든 잘되지 않든, 수확기가 오든 오지 않든, 이스라엘은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8–11은 안식일을 창조의 일곱째 날과 연결하고, 신명기 5:12–15는 이집트에서 종으로 살았던 경험과 하나님의 해방을 기억하게 합니다. 두 본문은 안식일이 단순한 피로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일을 통해 먹을 것을 얻고 삶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이 되면 그 일을 멈춥니다. 자신의 노동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지 않도록 한 주의 리듬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성막이나 제단 근처에 있는 사람만 지키는 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곳마다 지켜야 합니다.
이 장에서 안식은 성소의 경계를 넘어 가정과 마을, 일상의 노동이 이루어지는 자리로 확장됩니다.
이후 절기 규정에는 주로 「어떤 노동도 하지 마라」라는 금지가 나오지만, 안식일과 속죄일에는 더 포괄적인 「어떤 일도 하지 마라」라는 금지가 사용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일반적인 ‘일’과 ‘노동에 해당하는 일’을 가리키는 표현이 구별됩니다. 다만 본문만으로 그 구체적인 작업 범위를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해의 절기들을 소개하십니다. 매주 돌아오는 거룩한 시간이 먼저 자리 잡고, 이제 그 위에 이스라엘이 일 년 동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날들이 펼쳐집니다.
달력이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기억하다
열나흗날의 유월절과 열닷샛날의 축제
첫째 달의 절기는 두 부분으로 소개됩니다.
「『첫째 달 열나흗날 두 저녁 사이에는 여호와야훼의 유월절이 있다.』」레위기 23:5 · 본디새김
「『이달 열닷샛날에는 여호와야훼의 누룩 없는 빵의 축제가 있다.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라.』」레위기 23:6 · 본디새김
두 행사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본문은 날짜와 명칭을 구별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집들이 죽음의 재앙을 면했던 사건과 연결되고, 누룩 없는 빵의 축제는 이집트에서 급히 떠나던 때의 음식과 연결됩니다(출애굽기 12:1–20, 29–39).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셨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을 해마다 다시 기억하고, 그 기억에 맞추어 먹는 음식과 노동의 방식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2:39는 이스라엘이 급히 쫓겨나면서 빵 반죽을 발효시킬 겨를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레위기 23장은 그 역사적 설명을 되풀이하지 않고, 이제 정착하여 살아갈 백성에게 그 빵을 이레 동안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한때는 떠나느라 시간이 없어 먹었던 음식이, 이제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먹는 음식이 됩니다.
이레 동안 이어지는 축제의 첫날과 일곱째 날에는 거룩한 모임이 있고 노동을 멈춥니다. 축제는 단지 한 끼의 음식을 먹고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일상에 일정한 길이의 시간을 따로 마련하여 구원의 기억을 간직하게 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기부터는 이집트의 기억에 새로운 요소가 더해집니다.
아직 광야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앞으로 그들이 얻게 될 땅의 수확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두 저녁 사이」는 히브리어 벤 하아르바임입니다. 이 표현이 해가 기울기 시작한 뒤부터 해질 때까지인지, 해가 진 뒤 어두워지는 시간인지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만으로 오늘날의 시계에 맞춘 정확한 시각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새 곡식을 먹기 전에 해야 할 일
수확의 첫 장면은 먹는 일이 아니라 바치는 일이다
10절에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수확물을 거두게 되면, 처음 거둔 곡식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와라.』」레위기 23:10 · 본디새김
하나님은 「너희가 얻은 땅」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그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살아가는 백성에게 앞으로 땅에 들어가 수확하게 될 때의 일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 땅에서 수확할 첫 곡식은 그들의 노동이 가져올 소중한 결실이 될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밭을 돌보며 수확의 때를 기다린 사람에게 처음 익은 곡식은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첫 수확물을 먹기 전에 제사장에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제사장은 그 곡식단을 여호와야훼 앞에서 흔들어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날에는 흠 없는 어린 숫양을 번제로 드리고, 곡식 제물과 포도주도 함께 바쳐야 합니다.
「『바로 이날까지, 너희가 너희 하나님의 제물을 가져올 때까지 빵도 볶은 곡식도 생곡식도 먹지 마라. 이는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정이다.』」레위기 23:14 · 본디새김
이스라엘에게 수확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성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얻은 선물입니다. 그들은 씨를 뿌리고 수고했지만, 땅을 주신 분은 여호와야훼십니다.
첫 곡식단을 바치는 일은 그 사실을 수확의 시작부터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6:1–11의 첫 수확물 의식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첫 수확물을 바치면서 자신들의 조상이 겪은 고난과 이집트에서의 해방,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기억하도록 명령받습니다.
수확의 열매와 구원의 역사가 별개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은 언제인가
11절에는 날짜를 계산할 때 중요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는 너희를 위해 받아들여지도록 그 곡식단을 여호와야훼 앞에서 흔들어 바쳐야 한다. 안식일 다음 날에 제사장이 그것을 흔들어 바쳐야 한다.』」레위기 23:11 · 본디새김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안식일이 정확히 어느 날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이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곡식단을 흔들어 바치는 날은 주간 안식일 다음 날이며, 해마다 달력상의 날짜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이를 누룩 없는 빵의 축제 첫날에 이루어지는 쉼과 연결합니다. 이 경우 첫 곡식단을 바치는 날은 첫째 달 열엿샛날로 계산됩니다.
두 해석은 각각 3절의 주간 안식일과 7절의 절기 중 노동 금지 규정에 주목합니다. 다만 본문은 11절의 안식일이 어느 쪽인지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날짜 논쟁에 그치지 않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쉰 날의 절기를 언제 지킬 것인지도 이 출발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계산을 따르더라도 본문이 강조하는 구조는 같습니다.
첫 곡식단을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새로운 수확을 먹기 시작하는 기준이 되고, 그날부터 다음 절기까지의 시간을 세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제 절기는 하나의 날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수확의 시작이 다음 수확의 감사로 이어집니다.
한 단의 곡식에서 두 개의 빵까지
일곱 주를 세고, 다시 하루를 더한다
15–16절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 곧 흔들어 바칠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라. 온전한 일곱 주가 되어야 한다.』」레위기 23:15 · 본디새김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쉰 날을 세고, 여호와야훼에게 새 곡식 제물을 바쳐라.』」레위기 23:16 · 본디새김
유월절이나 초막절은 몇째 달 며칠이라는 날짜가 직접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절기는 앞선 의식에서부터 시간을 세어서 도달합니다.
이 절기는 출애굽기 34:22와 신명기 16:9–10에 나오는 칠칠절과 연결됩니다. 뒤에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절기 역시 이 쉰 날의 계산에서 이름이 비롯됩니다.
수확은 어느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시작이 있고,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첫 곡식단을 바친 뒤 쉰 날을 세는 행위는 수확의 시작과 그다음 결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합니다.
누룩 없는 빵 다음에 발효된 빵이 등장한다
17절은 뜻밖의 지시를 내립니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흔들어 바칠 빵 두 개를 가져와라. 그것들은 고운 가루 십분의 이 에파로 만들어야 하며, 발효시켜 구워야 한다. 여호와야훼에게 바치는 첫 수확물이다.』」레위기 23:17 · 본디새김
첫째 달의 축제에서는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쉰 날이 지난 뒤에는 발효된 빵을 하나님께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누룩 없는 빵의 축제는 이집트에서 급하게 떠났던 일을 기억하게 합니다. 반면 이 절기에서는 새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바칩니다. 곡식을 거두고 가루로 만들고 반죽을 발효시켜 굽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처음에는 곡식 한 단을 가져왔다면, 이제는 가공하여 완성한 빵 두 개를 가져옵니다.
레위기 2:11은 누룩을 넣은 곡식 제물을 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치는 것을 금지합니다. 여기서도 본문은 발효된 빵 자체를 제단에서 불사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빵을 흔들어 바치고, 그와 함께 별도의 번제와 다른 제물들을 드리도록 합니다.
18–20절에는 많은 제물이 등장합니다. 어린 숫양 일곱 마리와 수소 한 마리, 숫양 두 마리가 번제로 바쳐지고, 숫염소 한 마리는 정화 제물로, 어린 숫양 두 마리는 친교 제물로 바쳐집니다.
제사는 단순히 수확이 많아졌으므로 감사한다는 감정의 표현만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제의적 행위가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 절기에는 수확의 기쁨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그리고 제사장을 위한 몫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단락의 끝에서 본문은 갑자기 제단을 떠나 밭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빵 두 개에 들어가는 가루의 양은 두 개를 합쳐 십분의 이 에파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문장 구조상 각각의 빵에 그 양이 들어간다고 보는 해석도 있어 정확한 배분은 논의의 여지가 남습니다. 20절의 흔들어 바치는 대상과 그 순서는 히브리어 문장 구조 때문에 해석상 차이가 있지만, 첫 수확물의 빵과 두 어린 숫양이 함께 언급되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서 제사장의 몫이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2:1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성령이 임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하나님께 첫 수확물을 바쳤다면, 밭의 끝은 누구의 것인가
「『너희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는, 너는 거두면서 네 밭의 가장자리까지 남김없이 거두지 마라. 네 수확에서 떨어진 이삭도 주워 모으지 마라.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 그것들을 남겨 두어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레위기 23:22 · 본디새김
이 절은 절기 규정들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앞에서는 쉰 날의 절기를 위한 빵과 제물, 거룩한 모임과 노동 중단을 설명했습니다. 다음에는 일곱째 달의 특별한 날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이에 왜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한 수확 규정이 놓였을까요?
이 명령은 이미 레위기 19:9–10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23장에서 반복되는 위치가 중요합니다. 첫 곡식단을 바치고, 쉰 날을 세어 새 곡식 제물을 바치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수확물을 어떻게 거두어야 하는지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첫 수확물을 바쳤다는 사실이 나머지 수확물을 전부 자기 것처럼 처리할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수확의 시작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동시에 수확의 현장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의 몫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제사장 앞에서, 다른 하나는 농부의 밭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가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거둘 수 있는 것을 일부러 남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둘 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얻은 수확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모든 수확을 마친 다음 남는 것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밭의 가장자리를 남기고, 떨어진 이삭을 다시 모으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몫이 수확의 우연한 잔여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룻기 2장은 이러한 규정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모압 여자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습니다. 룻은 남편을 잃은 여성이자 이스라엘 밖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삭을 주울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수확 관습과 관련되며, 보아스는 법이 요구하는 최소한을 넘어 룻을 보호하고 배려합니다(룻기 2:8–16).
이 명령의 마지막은 특별한 보상 약속이 아닙니다. 왜 밭의 가장자리를 남겨야 합니까? 그것이 자신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야훼께서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사람은 자신이 바친 것을 기억할 뿐 아니라, 자신이 거두지 않고 남겨 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일곱째 달, 울림으로 시작되는 시간
무엇을 기억하라는 울림인가
23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절기의 흐름은 일곱째 달로 옮겨 갑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일곱째 달 초하룻날은 너희에게 쉼의 날, 울림으로 기념하는 날, 거룩한 모임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23:24 · 본디새김
히브리어 테루아(תְּרוּעָה)는 큰 소리로 울리거나 외치는 소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나팔 소리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민수기 29:1도 이 날을 울림과 관련된 날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23:24 자체에는 특정 악기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더 어려운 질문은 무엇을 기억하라는 울림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날을 기념의 날이라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월절에는 이집트에서의 해방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초막절에도 그 기원이 설명됩니다. 그러나 일곱째 달 초하룻날의 울림에는 그러한 설명이 덧붙지 않습니다.
후대 유대교에서는 이 날이 새해와 관련된 중요한 절기로 자리 잡았지만, 레위기 23장 자체는 이 날을 새해의 시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후대의 절기 의미를 본문이 직접 말하는 내용과 구별해야 합니다.
이날은 긴 설명보다 들리는 소리로 특징지어집니다.
그 소리가 정확히 어떤 역사적 사건을 환기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공동체가 평상시의 생활을 멈추고 특별한 날이 시작되었음을 함께 인식하도록 하는 역할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열흘째 날이 되면 분위기는 크게 달라집니다.
속죄일 —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자신을 괴롭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날
일곱째 달 열흘날에는 속죄일이 있습니다.
「다만 이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에게 거룩한 모임이 있어야 한다. 너희 자신을 괴롭게 하여라. 여호와야훼에게 불 제물을 바쳐라.」레위기 23:27 · 본디새김
전통적으로 이 표현은 금식과 연결되어 이해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금식과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시편 35:13).
그러나 레위기 23:27 자체는 금식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금식만으로 한정하거나, 반대로 내면의 겸손한 마음만 가지면 된다는 식으로 좁히는 것은 모두 본문의 표현보다 더 나아가는 해석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날이 평소와 다르게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마라. 이날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앞에서 너희를 위해 속죄하는 속죄일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3:28 · 본디새김
이 장은 제사장의 구체적인 의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레위기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대제사장이 자신과 집안,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속죄 의식을 수행하고, 성소를 이스라엘의 부정함과 죄로부터 정화하는 절차가 설명됩니다(레위기 16:11–19, 29–34).
레위기 23장은 그 의식을 반복해서 설명하는 대신, 백성 전체가 이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집중합니다.
평소에는 노동이 삶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수확기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야 곡식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일에는 다른 어떤 일보다 하나님 앞에서 속죄가 이루어지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 그날의 의미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적인 활동을 멈추고, 자신들을 위해 이루어지는 속죄 앞에 서야 합니다.
속죄일의 중심에는 인간이 무엇을 성취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와 부정함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가 놓여 있습니다.
자기반성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행위지만, 레위기에서 속죄는 그것만으로 완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의적 절차를 통해 그분 앞에서 죄와 부정함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합니다.
백성이 자신을 낮추는 행위는 그 속죄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죄가 이루어지는 날에 요구되는 백성의 응답입니다.
속죄일에는 왜 이토록 엄중한 경고가 있는가
29–30절은 규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강력한 경고를 내립니다.
29절은 그 사람이 「끊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3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그 사람을 그의 백성 가운데서 멸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절은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지만, 본문은 그 처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속죄일은 개인이 형편에 따라 참여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는 선택적인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가 자신들의 죄와 부정함을 하나님 앞에서 다루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선택처럼 보이는 행동도,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거룩한 시간을 거부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날의 쉼은 개인의 휴식 취향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공동으로 지켜야 할 응답입니다.
저녁부터 다음 저녁까지
32절은 속죄일의 시간을 더욱 정확하게 규정합니다.
「이날은 너희에게 온전히 쉬는 안식일이다. 너희 자신을 괴롭게 하여라. 그달 아흐렛날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 너희의 안식일을 지켜라.」레위기 23:32 · 본디새김
앞서 수확의 첫 곡식을 먹을 수 있는 시점이 정해져 있었듯이, 여기서는 일상적인 일을 멈추고 자신을 괴롭게 해야 하는 시간의 경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23장은 속죄일의 엄숙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불과 며칠 뒤, 같은 달에 전혀 다른 명령이 내려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초막으로 들어가라
속죄일에서 초막절로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는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킵니다.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이 있고 노동을 멈춥니다. 이레 동안 여호와야훼에게 제물을 바치며, 여덟째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과 집회가 있습니다(34–36절).
속죄일의 엄숙함과 초막절의 기쁨은 서로 모순되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지키도록 요구받는 것입니다. 속죄일에는 자신의 죄와 부정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초막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과 그분의 구원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할 때와 기뻐해야 할 때가 모두 있습니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절기 설명이 다시 시작된다
37–38절은 마치 이 장 전체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들은 너희가 거룩한 모임으로 선포할 여호와야훼의 절기들이다. 여호와야훼에게 불 제물, 곧 번제와 곡식 제물, 희생 제물과 부어 바치는 제물들을 그날그날의 몫대로,』」레위기 23:37 · 본디새김
이어서 절기에 정해진 제물은 안식일의 제물이나 개인이 드리는 선물, 서원 제물, 자원 제물과 별도로 바쳐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고 해서 공동체가 정해진 날에 드려야 할 제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헌신의 방식에는 각각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를 마무리하는 듯한 문장 뒤에 39절이 다시 시작됩니다.
「『다만 일곱째 달 열닷샛날에는, 너희가 땅의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 이레 동안 여호와야훼의 절기를 지켜라. 첫날은 쉼의 날이고 여덟째 날도 쉼의 날이다.』」레위기 23:39 · 본디새김
앞 단락은 초막절의 거룩한 모임과 제물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본문은 제물 목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그 절기를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봄의 첫 수확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마침내 한 해의 소출을 거두어들이는 시점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하나님은 두 가지 행동을 명령하십니다. 기뻐하라는 것과 초막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와 나뭇가지를 가져와 기뻐하라
4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날에 너희를 위해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와 종려나무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의 가지와 시냇가 버드나무들을 가져와라. 이레 동안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하여라.』」레위기 23:40 · 본디새김
레위기 23장에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일을 멈추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명시적으로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기쁨이 단순한 부수적 감정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절기를 지키는 백성이 해야 할 일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수확물이 많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기쁨은 자신들의 성취만을 바라보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살아가며 수확을 얻었다는 사실과 연결된 기쁨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16:13–15의 초막절 규정에서도 확인됩니다. 그곳에서는 수확물을 거두어들인 뒤 절기를 지키며, 아들과 딸, 종들과 레위 사람, 거류민, 고아, 과부가 함께 기뻐하도록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는 자신 혼자만의 만족으로 닫혀서는 안 됩니다.
풍요로운 사람이 왜 임시 거처에서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기쁨을 명령한 다음에 42절이 이어집니다.
「『이레 동안 초막에서 살아라. 이스라엘의 모든 본토인은 초막에서 살아야 한다.』」레위기 23:42 · 본디새김
수확이 풍성하다는 것은 생계를 유지할 자원을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과 창고에 많은 것을 쌓아 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때 집 밖의 임시 거처에서 일주일을 보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낼 때 그들을 초막에서 살게 했다는 것을 너희 후대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레위기 23:43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후손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말로만 전달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후손들도 실제로 초막에서 살아 보게 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집을 나와 임시 거처에 머물면서,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살아갑니다. 곡식을 수확하고 저장하며 집을 짓고 정착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처음부터 그런 안정된 생활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왔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가시는 여정을 지나 이 땅을 받았습니다.
가장 풍족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이 한때 아무것도 안정적으로 소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수확한 것을 슬퍼하거나 풍족한 삶을 죄책감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가 자신들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좋은 집을 짓고 살며 재산이 많아질 때, 자신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풍요가 자신들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23장의 초막절은 같은 신앙의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가르칩니다.
신명기는 잊지 말라고 말하고, 레위기는 초막에서 살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는 말로 경고하고, 다른 하나는 몸으로 기억하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종려나무와 버드나무는 명시되어 있지만, 「아름다운 나무」와 「잎이 무성한 나무」는 나무의 특성을 표현합니다. 후대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를 특정한 나무와 열매로 이해하여 절기 의식에 사용하지만, 레위기 본문 자체가 그 종류를 모두 명시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절은 열매와 나뭇가지를 가져오라고 하고, 뒤의 42절은 초막에서 살라고 합니다. 이 나뭇가지들이 모두 초막의 건축 재료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이 구절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느헤미야 8:14–17에서는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가져와 초막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레위기 규례가 후대에 실제로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연결입니다. 요한복음 7:2, 37–39에서는 초막절이 예수의 가르침과 생수에 관한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사도행전 2:1과 요한복음 7:2, 37–39는 각 절기가 신약의 사건과 연결되는 사례이지, 레위기 23장의 모든 세부 규정이 그 사건들만을 가리키도록 기록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레위기 23장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의 질서를 설명합니다.
수확을 마친 뒤, 초막에서 보내는 일곱 날
사람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자원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얻은 것들이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과 소유권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풍요를 누리기 위해 과거를 잊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야훼를 기억할 때, 지금 누리는 풍요가 어떤 선물인지 더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하여 얻은 모든 것이 곁에 있습니다. 저장할 곡식도 있고 돌아갈 집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지냅니다.
그곳에서 자녀들은 왜 자신들이 집을 두고 이곳에 머무는지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질문에 대답할 내용을 이미 알려 줍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초막에서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땅을 주시기 전에 먼저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실을 후대가 알게 하려고 절기를 정하셨습니다. 이 장은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모세가 여호와야훼의 절기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했다는 말로 끝납니다.
초막 밖에는 수확을 마친 땅이 있고, 초막 안에는 그 땅을 받기 전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이레 동안 하나님 앞에서 기뻐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