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17–26장 · 거룩한 삶의 규정

하나님 앞의 등불과 이름 모독

성막 안에는 밤마다 등불이 켜집니다. 제사장은 그 불빛을 돌보고, 안식일마다 새로운 빵 열두 개를 하나님 앞에 차려 놓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같은 일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 평온한 장면 바로 다음에 진영 안에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 모세에게 데려가고, 결국 그는 진영 밖에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왜 이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가 한 장에 놓여 있을까요?

그러나 두 장면에는 공통된 중심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여호와야훼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거룩함은 성막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바르게 다루는 일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진영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부딪칠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과 정의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본문은 등불과 빵이 뒤의 사건을 예고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 연결은 두 장면의 배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문학적·신학적 읽기입니다.

레위기 24장은 먼저 성막 안의 조용한 일상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24장 본문 읽기 →

저녁부터 아침까지, 하나님 앞의 등불을 돌보다

레위기 24:1–4 본문 →

등불은 왜 매일 손질해야 하는가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올리브를 찧어 낸 순수한 기름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등불을 늘 켜 놓도록 불을 밝히는 데 쓸, 올리브를 찧어 낸 순수한 기름을 네게 가져오게 하여라.」레위기 24:2 · 본디새김

제사장은 등불을 관리하지만, 그 등불에 필요한 기름은 백성에게서 옵니다. 성막 안에서 제사장이 수행하는 봉사는 공동체와 분리된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기름은 올리브를 찧어 낸 순수한 기름이어야 합니다. 본문은 등불을 밝히는 데 사용할 기름의 성질을 지정합니다.

「만남의 천막 안, 증언의 안쪽 휘장 밖에서 아론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야훼 앞에서 그 등불을 늘 손질해야 한다.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정이다.」레위기 24:3 · 본디새김

등불을 「늘」 켜 놓으라고 하면서, 왜 아론이 돌보는 시간은 「저녁부터 아침까지」라고 정해 놓았을까요? 히브리어 타미드(⁨תָּמִיד⁩)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정기적으로 이어지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그것은 등불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의무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든 등잔에 일 년 내내 밤낮으로 불꽃이 타올라야 한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3절은 특별히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불을 돌보는 일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7:20–21에도 같은 규정이 등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회적인 점등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관리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특별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큰일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성막에서 하나님 앞에 놓인 등불을 돌보는 일은 매일 반복됩니다. 어느 날의 불빛이 다음 날의 책임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등불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성막에는 공간의 구분이 있었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증언의 궤가 놓이고, 그 앞에는 휘장이 있었습니다. 등잔대는 그 휘장 바깥쪽 성소에 놓였습니다(출애굽기 26:33–35).

4절에는 「정결한 등잔대」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정결함이 등잔대의 재료나 제의적 상태 중 무엇을 특별히 강조하는지는 구절 자체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출애굽기 25:31–40에서는 등잔대가 순금으로 제작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4장은 그 제작 과정을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등잔대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성막의 완성은 봉사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속적인 봉사의 시작입니다.

안식일마다 하나님 앞에 놓이는 열두 개의 빵

레위기 24:5–9 본문 →

열두 개의 빵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등불 다음에는 빵이 등장합니다.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빵 열두 개를 구워라. 빵 하나마다 고운 가루 한 에파의 십분의 이가 들어가야 한다.」레위기 24:5 · 본디새김

본문은 그 숫자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고려하면, 열두 개의 빵이 하나님 앞에 놓인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출애굽기 28:9–12에서는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어깨에 지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합니다. 또 28:29에서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판결 가슴받이를 아론이 하나님 앞에 지니도록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의 봉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레위기 24장의 열두 빵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열두 빵을 열두 지파와 명시적으로 연결하지는 않으므로, 이것은 성막 전체의 상징 체계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빵 하나마다 들어가는 고운 가루의 양도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지난 장의 첫 수확물 빵 두 개처럼, 여기서도 빵 하나마다 들어가는 가루의 양이 분명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6절에서는 이 빵들을 정결한 상 위에 두 줄로 놓되, 한 줄에 여섯 개씩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줄이나 배열을 가리키는 말은 빵을 나란히 놓는 배열이나 쌓아 놓는 형태로 이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열두 빵을 여섯 개씩 두 배열로 놓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문은 그 빵을 「여호와야훼 앞의 정결한 상」 위에 놓으라고 합니다. 빵은 일상에서 사람이 먹는 음식입니다. 그러나 이 빵은 먼저 하나님 앞에 놓입니다.

이스라엘의 먹을거리가 하나님과 무관한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성막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친 빵은 누가 먹는가

「그 줄 위에 순수한 유향을 놓아라. 그 유향은 빵을 위한 기념 몫으로, 여호와야훼에게 바치는 불 제물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24:7 · 본디새김

레위기 2:2에서도 곡식 제물의 일부를 기념 몫으로 불살라 바치는 규정이 나옵니다. 레위기 24장에서는 유향이 그 기념 몫으로 언급됩니다.

이것을 빵 열두 개 전체를 불태운다는 뜻으로 읽으면 9절과 충돌합니다. 9절은 빵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먹도록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바치는 기념 몫이 되고, 빵은 제사장들에게 돌아가는 지극히 거룩한 음식이 됩니다.

이렇게 빵은 하나님 앞에 놓이면서도 사람의 식탁과 연결됩니다.

「안식일마다, 안식일마다 그는 그 빵을 여호와야훼 앞에 늘 차려 놓아야 한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오는 것으로, 영원한 언약이다.」레위기 24:8 · 본디새김

등불에는 저녁과 아침의 리듬이 있고, 빵에는 한 주의 리듬이 있습니다. 앞 장에서 안식일이 이스라엘 전체의 생활을 구별하는 날이었다면, 여기서는 안식일에 성막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일이 나타납니다.

8절은 이것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미 맺어진 관계 안에서, 정기적으로 빵을 바치는 일이 언약에 속한 지속적인 의무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은 그 빵이 제사장들의 몫이 되며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음식이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양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봉사는 공동체의 참여와 제사장의 책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제사장의 생계가 서로 연결된 일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이 질서정연한 장면은 갑자기 중단됩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남자

레위기 24:10–12 본문 →

왜 그의 부모를 먼저 소개하는가

10절은 새로운 사건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이스라엘 여자의 아들이 나왔다. 그는 이집트 남자의 아들이었다. 그 이스라엘 여자의 아들과 한 이스라엘 남자가 진영에서 서로 싸웠다.레위기 24:10 · 본디새김

그가 왜 싸웠는지, 두 사람이 무슨 문제로 다투었는지,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의 출신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이집트인 아버지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런 인과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후대에 형성된 이스라엘인의 신분 판정 기준을 이 사건에 그대로 적용하여 그의 법적 지위를 확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의 출신이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22절의 법 규정을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름이 기록된 사람과 기록되지 않은 사람

그 이스라엘 여자의 아들이 그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했다. 사람들이 그를 모세에게 데려왔다. 그의 어머니는 단 지파 디브리의 딸로, 이름은 슬로밋이었다.레위기 24:11 · 본디새김

그런데 정작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남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와 싸운 이스라엘 남자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은 모욕당한 하나님의 이름을 중심에 놓으면서도, 그 이름을 모독한 남자의 개인 이름은 전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이름 없이 소개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지웠다거나, 그것이 곧 형벌의 일부라는 식의 해석은 본문에 근거가 부족합니다. 다만 이야기의 관심이 그의 개인적인 이력보다 그가 저지른 행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에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어머니의 이름과 가문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도 그가 실제 이스라엘 공동체의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름 없는 외부 집단의 추상적인 대표가 아니라, 진영 안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

11절은 그가 「그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남자가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말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그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을 가리키는 임의의 소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그 이름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출애굽기 3:13–15, 6:2–8). 출애굽기 20:7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은 단지 특정한 단어를 무례하게 사용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여호와야훼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레위기 22:32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은 제사장과 제물에 관한 여러 규정의 결론에 놓여 있었습니다. 두 장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황은 다릅니다. 하나는 거룩한 제물을 다루는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입으로 행한 모독과 공동체의 법적 판단입니다.

사람들은 왜 즉시 처벌하지 않았는가

12절은 사건의 흐름을 잠시 멈춥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말에 따라 그들에게 분명한 지시가 주어지도록 그를 가두어 두었다.레위기 24:12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민수기 15:32–36의 사건과 비슷합니다. 그곳에서는 안식일에 나무를 모으던 사람을 붙잡아 두고,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후 여호와야훼의 지시가 내려지고, 공동체가 그 지시에 따라 행동합니다.

사람들이 심각한 잘못을 목격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각자의 판단대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사건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판단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겠다는 열심조차 하나님의 명령을 앞질러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장면을 현대적인 의미의 적법절차 제도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변론이나 증거 조사, 재판관의 심리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모독하다」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 나카브(⁨נָקַב⁩)는 본래 뚫거나 구멍을 내는 의미와 관련되고, 이름을 명시하거나 발설하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읽기와, 그 이름을 모독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별개의 동사로 「저주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연결 때문에 이 사건을 단순히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을 입으로 발음한 사건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사람에게 내려진 판결

레위기 24:13–16 본문 →

진영 밖에서 이루어지는 처형

13–1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데리고 나가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머리에 자기들의 두 손을 얹어야 한다. 온 회중은 그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레위기 24:14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진영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공간이었습니다. 민수기 5:1–4에서는 부정하게 된 사람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도록 명령하며,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진영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레위기 24장의 상황은 의례적 부정함의 처리와 같지는 않지만, 진영 밖이라는 공간이 공동체의 거룩함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처형 장소를 정한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의 죄가 공간적으로 진영을 더럽혔기 때문에 반드시 그곳에서만 죽여야 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증인들은 왜 그의 머리에 손을 얹는가

분명한 것은 처형에 앞서 그 말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별도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사건을 듣지도 못한 사람들이 소문만으로 행동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본문은 실제로 들은 사람들을 특별히 지목합니다. 그리고 처형은 그 증인들만이 아니라 온 회중의 책임으로 제시됩니다.

이 명령은 오늘날 개인이나 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판단으로 신성모독자를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는 뜻으로 곧바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사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 사형 규정의 윤리적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실제로 종교적 모독에 대한 죽음의 형벌을 명령합니다. 그 엄중함과 폭력성을 희석하지 않은 채, 이 법이 본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과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

15–16절은 개별 사건을 일반적인 법 규정으로 확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누구든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자기 죄를 짊어져야 한다.』」레위기 24:15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 온 회중이 그를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한다. 거류민이든 본토인이든 그 이름을 모독하면 죽임을 당해야 한다.』」레위기 24:16 · 본디새김

15절에는 「자기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엘로하이브(⁨אֱלֹהִים⁩)는 ‘그의 하나님’을 가리킬 수 있지만, 문맥에 따라 각 사람이 섬기는 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힐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로 다음 16절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사형을 명령합니다.

첫째, 15절과 16절이 같은 죄를 점차 분명하게 설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이 무엇인지, 곧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어서 밝힌다는 것입니다.

둘째, 두 절이 서로 구별되는 행위를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15절은 자기 하나님에 대한 저주와 그에 따른 죄책을 말하고, 16절은 특별히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과 사형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읽기는 문맥의 연속성에 주목합니다. 둘째 읽기는 표현과 처벌 규정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본문만으로 어느 쪽이 반드시 옳다고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어머니와 이집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규정은 본토인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외부 출신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류민이든 본토인이든 동일한 금지가 적용됩니다.

또한 요한복음 8:59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요한복음 10:31–33에서도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판단하며 돌로 치려 합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예수 시대에도 신성모독과 돌로 치는 처벌의 연결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레위기 24장의 법이 신약의 각 사건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었는지는 사건마다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법의 주제가 다시 바뀝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사건을 다루던 말씀이 갑자기 사람을 죽이는 일과 짐승을 죽이는 일, 그리고 신체에 손상을 입히는 일로 이어집니다. 왜 이런 규정들이 이곳에 함께 등장할까요?

조금 더 깊이

레위기에서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는 낯설지 않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장면이 나오고(레위기 1:4),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살아 있는 숫염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백합니다(레위기 16:21). 그러나 이 사건의 손 얹기를 그 모든 의식과 동일하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증인들이 자신들이 들은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그들이 들은 모독과 관련된 책임을 그 사람에게 돌리는 상징적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의식의 상황에 근거하지만, 어느 하나를 본문이 직접 명시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짐승의 생명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레위기 24:17–21 본문 →

모독에 대한 법에서 생명에 대한 법으로

17절은 간결합니다.

「『누구든 어떤 사람이라도 쳐 죽이면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레위기 24:17 · 본디새김
「『짐승을 쳐 죽인 사람은 목숨 대신 목숨으로 그것을 배상해야 한다.』」레위기 24:18 · 본디새김

두 절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릅니다.

여기서 「목숨 대신 목숨으로」라는 표현은 짐승을 죽인 사람도 반드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경우를 배상으로 규정합니다.

본문은 사람의 생명에 특별한 무게를 부여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17절이 모든 상황의 죽음을 구별 없이 설명하는 포괄적인 살인법 전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출애굽기 21:12–14는 고의적인 살인과 의도하지 않은 죽음을 구별합니다. 민수기 35:9–34도 의도하지 않은 살인과 고의적인 살인에 대해 서로 다른 절차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레위기 24:17만 떼어 내어 어떤 상황에서든 다른 사람을 죽게 한 사람은 예외 없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면 성경의 다른 법 규정들과 충돌합니다. 이 절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 관한 기본적인 형벌 원칙을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19–20절은 생명을 빼앗는 일에서 신체에 손상을 입히는 일로 옮겨 갑니다.

「『누구든 자기 동료의 몸에 손상을 입히면, 그가 한 그대로 그에게도 행해져야 한다.』」레위기 24:19 · 본디새김
「『골절은 골절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 그가 사람의 몸에 손상을 입힌 그대로 그의 몸에도 손상이 가해져야 한다.』」레위기 24:20 · 본디새김

이 규정은 흔히 ‘동해보복법’ 또는 ‘탈리오 법칙’이라고 불립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잔혹한 보복의 명령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의 언어는 매우 엄격하며, 가해자에게 동일한 신체적 손상을 가하도록 표현되어 있습니다.

처벌의 정도를 결정하는 기준은 피해자가 얼마나 분노했는지가 아닙니다. 가해자가 실제로 어떤 손상을 입혔는가입니다. 누군가 이를 부러뜨렸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는 것은 이 문장이 제시하는 대응 관계를 넘어섭니다.

이 규정은 피해에 상응하는 처벌이라는 원칙을 세웁니다.

출애굽기 21:23–25와 신명기 19:21에서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특히 신명기 19장은 거짓 증언에 관한 규정 안에서 이 원칙을 사용합니다. 이는 이러한 대응의 원칙이 개인적인 분풀이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법적 판단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규정이 실제로 언제나 신체에 동일한 손상을 입히는 방식으로 집행되었는지, 또는 어떤 상황에서 배상으로 처리될 수 있었는지는 별도로 살펴야 할 문제입니다. 후대의 해석 전통에서는 이를 금전 배상과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24:19–20 자체는 상해에 대하여 배상금으로 갈음한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신체적 손상으로 대응한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복수를 없애는 규정이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보복의 정도를 실제 피해와 연결하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5:38–42에서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을 언급하시며,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복으로 대응하지 않는 삶을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레위기 24:20의 표현과 연결됩니다. 다만 출애굽기 21:24와 신명기 19:21에도 같은 법이 나타나므로, 마태복음의 말씀이 레위기 24장 한 곳만을 직접 인용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개인적 관계에서 어떻게 악과 폭력에 대응할 것인지를 다룹니다. 따라서 이를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법적 책임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선언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반복되는 문장이 드러내는 기준

21절은 앞서 나온 두 종류의 사건을 다시 나란히 놓습니다.

「『짐승을 쳐 죽인 사람은 그것을 배상해야 하고, 사람을 쳐 죽인 사람은 죽임을 당해야 한다.』」레위기 24:21 · 본디새김

17–18절에서 먼저 사람을 죽이는 일과 짐승을 죽이는 일을 구별했습니다. 이어서 19–20절에서는 신체 손상을 다루었습니다. 마지막 21절은 다시 짐승의 죽음과 사람의 죽음을 대조합니다.

이것은 모든 잘못을 같은 정도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법의 구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이 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사건과 함께 나옵니까? 본문은 그 연결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음 절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하나의 법 — 본토인과 거류민에게 똑같이

레위기 24:22 본문 →

「『너희에게는 하나의 법이 있어야 한다. 거류민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같아야 한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4:22 · 본디새김

이 절은 15–21절 전체를 정리하는 선언처럼 읽힙니다.

이스라엘 안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고,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는 거류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종교적 영역에서 완전히 같은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이 단락이 다루는 법의 문제에서는 출신에 따라 처벌과 보호의 기준을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 거류민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면 같은 형벌을 받습니다. 둘째, 거류민의 생명과 신체에 관한 문제도 같은 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하나의 법은 외부 출신 사람에게도 동일한 책임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법의 보호에서 그들을 배제하지 않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민수기 15:15–16에도 비슷한 원칙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회중과 그들 가운데 머무는 거류민에게 동일한 규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명기 16:18–20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공정하게 재판하고 정의를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레위기 24:22의 하나의 법이라는 원칙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어머니와 이집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완전히 이스라엘 사람으로 취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별도의 법적 논의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본토인이든 거류민이든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그의 출신이 정확히 어떻게 분류되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한 행위에 관한 법적 판단을 피할 수도 없고,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별도의 처벌 기준을 적용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건은 개인의 출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적용되는 정의의 기준을 밝히는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 원칙의 마지막에는 또다시 하나님의 정체성이 놓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법을 지켜야 하는 근거가 이스라엘의 편의나 정치적 합의만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야훼께 있다는 뜻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입으로 모독하지 않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사람의 출신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지 않는 것도 그분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이나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때로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출신의 사람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자신과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의 잘못에는 관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24:22는 이 장이 다루는 법적 문제에 대해 하나의 법을 요구합니다.

이는 신앙적인 열심이 출신에 따른 이중 기준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판결이 실제로 집행되다

레위기 24:23 본문 →

레위기 24장은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했다. 그들은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데리고 나가 돌로 쳐 죽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행했다.레위기 24:23 · 본디새김

여기에는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감정이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의 어머니 슬로밋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와 싸웠던 이스라엘 남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공동체가 이 처형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부드럽게 바꾸지 않습니다. 또한 처형을 둘러싼 인간적인 슬픔이나 갈등을 서술하지도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지시가 분명하지 않아 그 사람을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실행했습니다.

이것이 이 사건의 서술적인 결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는 그 처벌을 둘러싼 윤리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왜 말로 저지른 모독에 사형이 내려집니까?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처형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은 이러한 현대적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해설자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은 이유를 임의로 만들어 그 처벌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등불을 돌보는 손과 돌을 든 손

레위기 24:1–23 본문 →

등불을 돌보는 손과 돌을 든 손이 같은 장에 등장합니다. 하나는 거룩한 공간을 유지하는 봉사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공동체의 질서를 위반한 사건에 대한 엄중한 처벌입니다. 본문의 대답은 성막에서만 이루어지는 의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돌보는 일에서도, 그분의 이름을 입으로 대하는 일에서도, 사람들의 생명과 신체에 관한 법을 적용하는 일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이 끝나면 독자는 다시 처음의 등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처형으로 이야기는 끝났지만, 성막에서 정기적으로 해야 할 봉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저녁이 오면 제사장은 등불을 돌보아야 하고, 다음 안식일이 오면 열두 개의 빵을 새롭게 차려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놓인 등불을 돌보는 일은 어느 한 사건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이름을 존중해야 하는 공동체로서, 다시 하루의 봉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