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무엇이 생명을 지켜 주는가

사람은 두려울 때 무엇인가를 붙잡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우면 자신을 감추려 하고, 미래가 불안하면 재물을 쌓아 두려 합니다. 중요한 것을 잃을까 두려우면 더 철저하게 통제하려 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우면 모든 것을 미리 알아 두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의 모습을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는 뜻밖의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곧바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재물이 넉넉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부르시면서, 가진 것을 팔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주인을 위해 깨어 기다리는 노예들이 복되다고 하시면서, 정작 주인이 돌아오면 그 노예들을 식탁에 앉히고 직접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를 주러 오셨을 것 같은 예수님께서 자신은 땅에 불을 던지고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말씀들에는 공통된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인간이 의지하는 것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많은 재산도, 미래에 대한 치밀한 계획도,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도 삶의 궁극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단순히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작은 생명까지 기억하시는지, 자신의 백성에게 무엇을 주기를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을 어떻게 맞이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 장의 한가운데에는 그 모든 말씀의 근거가 되는 선언,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가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가 놓여 있습니다.

읽는 시간 39분소단락 612장 본문 읽기 →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누가복음 12:1–12 본문 →

이야기는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밟힐 정도로 몰려들었다는 묘사는 예수님의 주변이 얼마나 혼잡했는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군중의 열광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 주목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서로 밟을 정도로 모여들었다. 그가 먼저 자기 제자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것은 곧 위선이다.」누가복음 12:1 · 본디새김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앞 장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벌어진 갈등이 이 경고의 직접적인 배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다시 비난하는 데 머물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왜 하필 누룩일까요? 누룩은 반죽 속에 섞이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은 위선도 그와 같다고 경고하십니다.

위선은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말이나 악행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다가 조금씩 실제의 자신과 남들에게 보여 주는 자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사는 일보다 사람들 앞에서 경건하게 보이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덮여 있는 것 가운데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 가운데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누가복음 12: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위선에 대한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모습으로 자신을 감추어도 실제의 모습은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3절을 보면 의미가 조금 더 넓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둠 속에서 말한 모든 것이 빛 가운데서 들릴 것이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누가복음 12:3 · 본디새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27에서는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이 공개적으로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반면 누가는 제자들이 은밀하게 말한 것이 장차 공개적으로 알려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위선이 폭로된다는 경고뿐 아니라, 지금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제자들의 말과 증언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문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이 장은 어느 하나로 의미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감출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진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누구인가

「나의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몸을 죽이고 그 뒤에는 더는 아무것도 할 능력을 지니지 않은 이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누가복음 12:4 · 본디새김

「나의 친구」라는 다정한 호칭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매우 엄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단순히 비난받거나 조롱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십니다.

사람들은 몸을 죽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위험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믿음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그 위험을 더 큰 현실 속에 놓으십니다. 사람이 가진 권한은 몸을 죽이는 데까지 미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권한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일러 주겠다. 죽인 뒤에 게헨나에 던져 넣을 권위를 가진 이를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를 두려워하여라.」누가복음 12: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두려움은 단순히 더 무서운 존재를 찾아 복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사람의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위협이 아무리 크게 느껴져도 그것이 최종적인 권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져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누가복음 12:7 · 본디새김

조금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와 하나님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함께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심판하실 권위를 가진 분이면서도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명조차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아사리온에 팔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새는 값싸게 거래되는 새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중 한 마리도 잊히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의 머리카락까지 모두 세어져 있다는 말씀은 감시의 위협이 아니라, 문맥상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시인과 하늘에서의 시인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누가복음 12:8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개의 장면이 마주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현재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인정하시는 미래의 장면입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이제 예수님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중요한 인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시며, 여기서는 자신을 시인하는 사람의 운명을 하나님의 천상 법정과 연결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일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는 말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나오는 거룩한 영에 관한 말씀은 더욱 엄중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면 그 말이 그 사람에게 용서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영을 모독한 이에게는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12: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많은 독자에게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자신이 과거에 무심코 한 말이나 믿음이 흔들렸던 순간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떤 표현을 한 번 입 밖에 냈는가를 구분하는 규칙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3:28–30의 병행 문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더러운 영의 능력이라고 비난한 것이 이 경고의 배경입니다. 누가복음에서도 바로 앞 장에 그와 같은 비난이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영의 모독을 하나님의 영이 증언하는 일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악한 것으로 거부하는 태도와 연결하는 해석에는 강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그 죄의 성립 조건과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를 어디까지 규정할 수 있는지에는 신학적 논의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회당이나 권력자들 앞에 끌려가면 어떻게 자신을 변론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영이 바로 그때 말해야 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12 · 본디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용기나 언변만으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한 영을 거부하지 말라는 경고와 거룩한 영이 너희를 도우실 것이라는 약속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용감한 사람들이었는지만 보여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시고 그들의 증언을 도우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이기는 제자의 삶은 자기 확신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기억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골짜기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구약에서 이 지역은 우상숭배와 자녀 희생의 악행과 연결되며(예레미야 7:31–32), 후대 유대교 전승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발전했습니다. 6절의 아사리온은 작은 단위의 동전이었습니다. 8절의 「사람의 아들」과 관련해, 다니엘 7:13–14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권위를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12절의 가르침은 이후 사도행전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펼쳐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서 말하고(사도행전 4:8–12), 스데반이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들 앞에서 증언합니다(사도행전 6:10, 7장).

곳간은 가득 찼지만 생명은 지킬 수 없었다

누가복음 12:13–21 본문 →

예수님께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실 때,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전혀 다른 문제를 꺼냅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 형제에게 유산을 저와 나누라고 말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2:13 · 본디새김

이 요청은 갑작스럽지만, 당시 상황에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유산 분배는 율법과 관련된 문제였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분쟁 해결을 요청하는 일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21:15–17에는 장자의 상속권에 관한 규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무엇이 옳은지 함께 판단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에게 재산을 나누라고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그가 그에게 말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위에 재판관이나 재산 나누는 이로 세웠느냐?」누가복음 12:14 · 본디새김

예수님은 이 사람의 상속권이 정당한지 부당한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형제가 재산을 부당하게 독차지했는지도 본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재산 분배의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분쟁의 법적 판결을 내리시는 대신, 그 문제 뒤에 숨어 있을 수 있는 더 근본적인 위험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온갖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재산이 넉넉해도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15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개인의 재산 분쟁이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가르침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떤 부유한 사람의 밭에서 풍성한 소출이 나왔습니다. 그는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가 속으로 따져 보며 말했다. 『무엇을 할까? 내 소출을 모아 둘 데를 가지고 있지 않구나.』」누가복음 12:17 · 본디새김

그래서 그는 기존의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지으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도둑질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먹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풍년을 맞았고, 그 소출을 저장할 장소를 마련하려고 했으니, 일반적인 경제적 판단으로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문제는 그가 재산을 보관했다는 사실보다, 그 재산에 자신의 삶 전체를 맡기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말을 자세히 읽으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할까?」

「이렇게 하겠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짓고」

「내 곡식과 재물을 다 모아 두겠다.」

「내 목숨에게 말하겠다.」

그의 계획에는 끊임없이 「나」와 「내 것」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풍성한 소출을 거두는 데 관여했을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가족도, 이웃도,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의 계획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가 실제로 이웃에게 전혀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들어 들려주시는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보여 주는 그의 관심은 매우 좁아서, 풍성한 소출이 가져다줄 수 있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미래를 위한 축적입니다.

「『그리고 내 목숨에게 말하겠다. 목숨아, 너는 여러 해 쓸 만큼 쌓여 있는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 쉬어라, 먹어라, 마셔라, 즐거워하여라.』」누가복음 12:19 · 본디새김

그는 재물이 여러 해 동안 충분하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목숨도 여러 해 동안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곡식을 충분히 확보했으므로 이제 삶까지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 해를 살 수 있을 만큼 재물을 모았지만, 여러 해를 살 수 있는 생명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점을 무너뜨리십니다.

오늘 밤에 돌려 달라는 요구를 받는 것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너는 네 목숨을 돌려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20 · 본디새김

이 말씀에는 두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입니다. 그 사람은 「여러 해」를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오늘 밤」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먼 미래까지 계획했지만, 정작 오늘 밤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소유권입니다. 그는 자기 곳간, 자기 곡식, 자기 재물, 자기 목숨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목숨을 돌려 달라는 요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어리석다고 부르신 이유는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자기를 위해 쌓아 두고 하나님께는 부요하지 않은 사람이 그러하다.」누가복음 12:21 · 본디새김

「하나님께는 부요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재물을 충분히 바치지 못한 사람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재물을 필요로 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선 비유와 뒤따르는 말씀을 함께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 속에서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축적하는 삶이 문제로 드러납니다. 뒤에서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부요한 삶의 구체적인 방향을 보여 줍니다.

부자는 자신의 곳간을 크게 만들려고 했지만, 그의 삶은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곳간을 보여 주십니다.

곳간조차 없는 새들의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돌려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의 그리스어 동사는 아파이투신(ἀπαιτέω)으로, 돌려받거나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이 동사는 3인칭 복수 형태이며, 누구에게서 요구를 받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시편 49:16–20의 주제와도 닿아 있습니다. 그 시편은 재물이 많아져도 사람이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전도서 2:18–19 역시 사람이 애써 쌓은 것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후계자에게 남겨야 하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이 본문들과 누가복음의 비유는 인간의 수고를 부정하지 않고, 수고의 결과를 영원한 안전의 근거로 삼으려는 착각을 드러냅니다.

곳간 없는 새들과 작은 양 떼

누가복음 12:22–34 본문 →

그가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누가복음 12:22 · 본디새김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의 어리석음을 말씀하신 다음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서로 반대되는 문제처럼 보입니다. 부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고, 제자들은 먹고 입을 것이 부족할까 걱정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미래의 생존을 확보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부자는 충분히 쌓아 두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 염려하는 사람은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지만, 삶의 안전을 재물과 양식의 확보 여부에만 연결하려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다루시면서 먼저 삶의 가치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먹을거리보다 귀하고 몸이 옷보다 귀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23 · 본디새김

먹을거리와 옷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생명이 그 모든 것보다 훨씬 귀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때로 먹고 입는 문제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의 삶을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까마귀에게는 곳간이 없습니다

「까마귀를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고 저장고도 곳간도 없는데 하나님이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누가복음 12:24 · 본디새김

부자는 소출을 저장할 곳간이 부족해 더 큰 곳간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곳간 자체가 없는 까마귀를 보라고 하십니다. 까마귀는 농사를 짓지도 않고 곡식을 저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하나님이 먹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처럼 농사와 저장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생명도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는 물음으로 문제의 중심이 다시 인간의 가치로 돌아옵니다. 하나님께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염려의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해서 자기 키에 한 규빗을 더할 수 있느냐?」누가복음 12:25 · 본디새김

「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헬리키아(ἡλικία)는 신체의 키를 뜻할 수도 있고, 나이나 수명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한 규빗」은 길이 단위이므로 키를 늘린다는 해석이 문법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염려에 대한 가르침에서 수명을 늘리는 문제가 더 적절하다고 보아, 삶의 길이를 늘린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의 논지는 같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염려해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까지 염려함으로써 통제하려고 합니다.

솔로몬보다 아름답게 입은 꽃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실을 잣지도 않는다.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모든 영광 속에서 이 꽃들 가운데 한 송이만큼도 차려입지 못했다.」누가복음 12:27 · 본디새김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부와 영광을 대표하는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0장은 그의 지혜와 부귀를 길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영광을 들판의 꽃 한 송이와 비교하시며, 인간이 많은 재물과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화려함보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꽃의 아름다움이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꽃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합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화덕에 던져지는 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신다면, 너희를 얼마나 더 입히시겠느냐?」누가복음 12:28 · 본디새김

예수님은 꽃의 생명이 짧다는 사실을 오히려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남지 않을 풀조차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이 가르침은 모든 신자가 충분한 음식과 옷을 항상 보장받는다는 약속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자체가 가난과 결핍을 실제적인 문제로 다루고 있으며, 뒤이어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빈곤의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결핍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삶 전체가 소유를 확보하는 일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분명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의 이방 사람들이 애써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 아버지는 너희에게 이것들이 필요한 줄 알고 계신다.」누가복음 12:30 · 본디새김

제자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알려 드려야만 그분이 비로소 알게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다만 그분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것들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누가복음 12:31 · 본디새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생존의 필요를 무시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 필요들을 어떤 더 큰 현실 속에 놓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가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32 · 본디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양 떼」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수만 명의 군중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권력이나 재산도 부족할 수 있고,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단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기 위해 더 큰 집단이 되거나, 더 많은 재물을 모으거나,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들이 충분한 공로를 쌓아 하나님에게서 얻어 내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선물입니다.

작은 양 떼가 안전한 이유는 그 무리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돌보시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언 다음에 예수님은 매우 구체적인 명령을 하십니다.

「너희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낡지 않는 돈주머니, 곧 하늘에 다함없는 보물을 너희를 위해 만들어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오지 않고 좀이 상하게 하지 않는다.」누가복음 12:33 · 본디새김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이 다시 뒤집힙니다.

부자는 미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재물을 한곳에 모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때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마련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늘의 재산을 일정한 비율로 적립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가치 있고 사라지지 않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34 · 본디새김

우리는 흔히 마음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위해 돈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 방향도 보여 주십니다. 자신이 보물을 쌓아 둔 곳에 마음이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어디에 투자하며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는 단지 마음속 가치관이 바깥으로 나타난 결과만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 자체가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더욱 굳게 만듭니다. 이 때문에 소유를 나누라는 명령은 재산에 관한 별도의 윤리 규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 나라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11:15에서 까마귀는 이스라엘이 먹지 말아야 할 새로 분류됩니다. 누가복음이 이 정결 규정을 직접 암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새를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이 인간이 부여하는 종교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2절의 「작은 양 떼」에서는 구약의 목자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시편 23편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목자로 노래되고, 에스겔 34:11–16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흩어진 양을 찾아 돌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본문들은 각각 개인의 신뢰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고유한 문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표현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양 떼처럼 돌보신다는 주제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돌아온 주인이 노예를 섬기는 집

누가복음 12:35–48 본문 →

「너희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두어라.」누가복음 12:35 · 본디새김

예수님은 갑자기 집 안의 밤 풍경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므로, 언제든 문을 열어 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당시의 긴 옷자락을 걷어 올려 움직이기 편하게 하는 행동으로, 일을 하거나 길을 떠날 때 필요한 준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는 예상하기 어려운 반전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섬기는가?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그 노예들은 복이 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이 띠를 매고 그들을 상에 기대어 앉게 하고 다가가 섬길 것이다.」누가복음 12:37 · 본디새김

주인이 돌아왔고, 노예들은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노예들이 주인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그를 섬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띠를 맵니다.

주인이 노예들을 상에 기대어 앉힙니다.

그리고 주인이 다가가 그들을 섬깁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미지는 당시의 주인과 노예 사이에 기대되는 역할을 뒤집습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세상의 모든 고용관계를 직접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인이 얼마나 뜻밖의 방식으로 자기 사람들을 대하는지 보여 주려는 데 있습니다.

돌아온 주인은 그들을 단순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대하지 않고, 식탁의 손님처럼 대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단순히 명령을 수행한 대가로 보상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기다리게 하신 주인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와 섬기는 환대의 대상이 됩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22:27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상에 앉은 사람과 섬기는 사람 중 누가 더 높은지를 물으시며, 자신은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영광은 단지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위해 몸을 낮추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주인이 둘째 경이나 셋째 경에 오더라도 노예들이 깨어 있으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은 사람들이 쉽게 지칠 수 있는 늦은 시간에 돌아올 수도 있고,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기다릴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집주인과 도둑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안다면 집주인은 집이 뚫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도둑에 비유하는 것은 예상할 수 없는 시각에 오신다는 한 가지 특징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채비를 갖추고 있어라. 사람의 아들이 너희가 예상하지 않는 시각에 오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40 · 본디새김

그러나 이 말씀은 제자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을 두려워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하늘만 바라보라는 뜻일까요? 베드로의 질문이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이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누가복음 12:41 · 본디새김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상 구분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믿음직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은 누구냐? 주인이 자기 집안 사람들 위에 세워 때맞추어 그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할 사람 말이다.」누가복음 12:42 · 본디새김

관리인은 주인이 돌아올 날짜를 계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때맞추어 나누어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긴장을 늦추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주인이 맡긴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상태입니다.

이 장 앞부분의 부유한 사람과 비교하면 차이가 더욱 뚜렷해집니다. 부자는 풍성한 곡식을 자기 곳간에 저장하려고 했고, 관리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재물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지만, 부자는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불렀고, 관리인은 그것이 주인의 것이며 자신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누가 더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유자처럼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삶과, 맡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삶의 차이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관리인이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면 그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더디 온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 노예가 자기 마음속으로 『내 주인이 더디 온다』 하고, 남종과 여종을 때리기 시작하고 먹고 마시고 취하면,」누가복음 12:45 · 본디새김

이 사람이 처음부터 다른 노예들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권력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주인의 노예였지만, 다른 노예들을 돌보도록 맡겨진 권한을 이용해 그들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신의 권한에 제한이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권한을 하나님의 뜻과 분리하는 순간, 사람은 그 권한을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결과를 매우 거칠게 묘사합니다.

「그 노예의 주인이 그 노예가 기다리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올 것이다. 그리고 그를 둘로 잘라 그의 몫을 믿음직하지 못한 이들과 함께 둘 것이다.」누가복음 12:46 · 본디새김

「둘로 잘라」는 문자적으로 몸이나 사물을 두 부분으로 자른다는 뜻입니다. 이를 극단적인 형벌을 묘사하는 비유적 과장으로 보는 해석과, 당시의 실제로 가혹한 처벌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보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원문 자체는 강한 신체적 폭력의 표현을 사용하므로, 단순히 가볍게 벌을 준다는 의미로 바꾸면 경고의 강도가 사라집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주인의 뜻을 알고도 따르지 않은 사람과, 모르면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구분하십니다. 두 사람 모두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지만, 알고도 거역한 사람이 더 무거운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매 맞을 만한 일을 한 이는 매를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모든 사람에게 많이 요구될 것이고,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더 많이 요구할 것이다.」누가복음 12:4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구에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더 많이 맡은 사람일수록 더 무거운 책임을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들과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읽기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책임을 특정 직분에만 제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알고, 많은 권한과 기회를 받았으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면 그것은 특권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식탁에 앉혀 섬기시는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맡기신 권한을 가진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올바른 태도는 주인의 성품을 닮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누가복음 12장은 두 종류의 집을 보여 줍니다. 한 집에서는 주인이 돌아오자 노예들을 식탁에 앉히고 섬깁니다. 다른 집에서는 주인이 보이지 않는 동안 관리인이 동료들을 때리고 자신의 욕망을 채웁니다.

예수님은 어느 집이 예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12:11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첫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매고 신발을 신은 채 준비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그 사건은 이집트를 떠날 채비를 하는 백성의 모습을 보여 주지만, 누가복음의 장면에서는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출애굽기의 직접적인 재현이라기보다,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공통된 이미지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38절의 둘째 경과 셋째 경의 정확한 밤 시간 구분은 당시 사용된 경계 체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왜 분열을 말씀하시는가

누가복음 12:49–53 본문 →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사명에 관해 매우 강렬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 그 불이 이미 붙었다면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누가복음 12:49 · 본디새김

앞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예상하지 못한 시각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이미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기도 하고(출애굽기 3:2), 정결하게 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며(말라기 3:2–3), 심판과 파괴를 나타내기도 합니다(말라기 4:1). 누가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이미 예수님의 사역을 불과 연결했습니다. 요한은 자신보다 강한 이가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3:16–17).

따라서 누가복음 12장의 불도 하나님의 심판과 정결, 그리고 예수님의 등장으로 일어나는 결정적인 구분과 관련해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바로 뒤에서 예수님이 분열을 말씀하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불은 사람들의 삶을 이전과 같지 않게 만드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을 오직 성령만으로, 또는 오직 파괴적인 심판만으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그 이미지를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명시하지 않습니다.

이미 붙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이 구절은 문장 자체도 해석이 갈립니다. 질문으로 읽으면 이미 불이 붙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는 뜻이 되고, 바람을 나타내는 감탄으로 읽으면 이미 불이 붙었기를 얼마나 바라는가라는 뜻이 됩니다.

두 읽기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불의 시작 시점을 이해하는 데 차이를 만듭니다. 질문형 읽기는 불이 이미 붙었다는 가능성을 강조할 수 있고, 감탄형 읽기는 그 불의 시작을 간절히 바라는 표현이 됩니다. 전통적인 주석에서는 감탄형 해석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지만, 문장의 형태와 문맥을 둘러싼 논의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은 세상을 이전과 다른 상태로 이끌 것이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 자신도 고통을 겪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받아야 할 세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려 있는가.」누가복음 12:50 · 본디새김

여기서 세례는 요단강에서 받으셨던 물세례를 다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앞으로 겪으셔야 할 고난과 죽음에 대한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누가복음 9:22에서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이제는 그 일을 앞두고 자신이 얼마나 짓눌려 계신지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전혀 느끼지 못하시는 초연한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사명이 가져올 고통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 길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전혀 겪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삶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도 고난을 향해 나아가시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평화와 분열의 역설

「내가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누가복음 12:5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의 앞부분과 강하게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땅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2:14).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셨고(7:50, 8:48),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도 집에 평화를 빌라고 가르치셨습니다(10:5).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바꾸신 것일까요?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물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평화가 어떤 평화인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단순히 다투지 않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는 삶을 포함합니다. 그런 회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기존의 질서가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의한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관계와 가치관을 무조건 승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반응이 갈릴 수 있고,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맞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가족을 분열시키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증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족과 다투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따르는 일이 때로 가족 사이의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다가 갈등을 겪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평화는 사람들의 거부와 충돌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는 무난한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들어올 때 드러나는 진실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통과하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갈등을 감수하라고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먼저 고난의 세례를 받으시며, 자신이 그 갈등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49절의 그리스어는 카이 티 텔로 에이 에데 아네프테로, 이 문장을 질문으로 읽느냐 감탄으로 읽느냐에 따라 앞의 두 읽기가 갈립니다. 50절의 세례 이미지와 관련해, 구약에서 깊은 물과 큰 물결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나 압도적인 위기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시편 69:1–2에서 시인은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합니다. 53절의 가족 간 갈등은 미가 7:6과 연결됩니다. 미가서에서는 사회의 신뢰가 무너지고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비극적인 현실이 묘사되며, 그 본래 문맥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공동체의 상태에 대한 탄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미지를 가져와, 자신이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반응을 일으키게 될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날씨는 읽으면서 지금의 때는 읽지 못한다

누가복음 12:54–59 본문 →

이제 예수님은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제자들에게 집중하셨지만, 마지막에는 더 넓은 청중을 향해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가 무리에게도 말했다. 「서쪽에서 구름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너희는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하고, 그 말대로 된다.」누가복음 12:54 · 본디새김
「그리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불볕더위가 닥치겠다』고 말하고 그렇게 된다.」누가복음 12:55 · 본디새김

이 말씀에는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환경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지역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어서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올 가능성이 높고, 남쪽의 건조한 지역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무더운 날씨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낯빛은 가려 볼 줄 알면서 어찌하여 지금이 어떤 때인지는 가려 볼 줄 모르느냐?」누가복음 12:56 · 본디새김

이 장의 첫머리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리를 향해 「위선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위선의 문제는 특정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당장 필요한 문제에서는 뛰어난 판단력을 발휘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날씨를 살피고, 여행을 계획하기 위해 하늘을 관찰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판단하는 일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때인가?

이 구절에서 「때」는 단순히 시계로 계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적절한 시기, 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때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시는 일을 알아보아야 하는 결정적인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며,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앞 장에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던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판단하는 데는 그 능력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판단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너희 스스로 옳은 것을 판단하지 않느냐?」누가복음 12:57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사람들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가르침만 따라서는 안 된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을 들려주십니다.

재판관에게 가는 길입니다.

아직 길 위에 있을 때

「그도 그럴 것이, 네가 네 소송 상대와 함께 관원에게 갈 때에 가는 길에 그와의 분쟁에서 풀려나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고, 재판관이 너를 집행관에게 넘기고, 집행관이 너를 감옥에 던질 것이다.」누가복음 12:58 · 본디새김

아직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상대방과 분쟁을 해결할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치고 재판관에게 넘겨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마지막 렙톤 하나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2:59 · 본디새김

렙톤은 작은 단위의 동전입니다. 마지막 렙톤이 정확히 얼마에 해당하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빚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해결해야 한다는 표현의 엄중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단순히 소송을 당하기 전에 합의하라는 실생활의 조언일까요? 그렇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툼이 더 큰 법적 문제로 번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가르침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예수님이 「지금이 어떤 때인지」 분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비유에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장에는 예기치 못한 순간이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부자는 여러 해를 계획했지만 그날 밤 생명을 돌려 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관리인은 주인이 더디 온다고 생각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때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재판관에게 가는 길에서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런 흐름에서 마지막 소송의 비유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회개하고 응답해야 하는 긴급함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비유의 각 인물을 무조건 특정한 영적 존재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소송 상대가 반드시 누구를 상징하는지, 재판관과 집행관이 각각 누구를 나타내는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지막 렙톤까지 갚아야 한다는 말을 특정한 사후 형벌의 기간이나 제도를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도 본문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생명은 재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참새조차 잊지 않으시고, 작은 양 떼에게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시며,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식탁에 앉혀 직접 섬기는 주인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독점하려 하지 않아도 되고,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감추지 않아도 되며, 주인이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그분이 맡기신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그러한 삶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우리를 길 위에 세워 놓으십니다. 한 사람이 소송 상대와 함께 재판관에게 가고 있습니다. 아직 법정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에게는 여전히 상대방과 이야기하고 분쟁을 풀어낼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길 끝에는 판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아보라고, 그리고 아직 길 위에 있을 때 분쟁에서 풀려나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은 그 길 위에서 끝납니다. 아직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고, 문도 닫히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