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열매를 기다리고 날개 아래 모으시는 분
누가복음 13장은 두 가지 끔찍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있고,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들을 예로 드시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도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곧바로 이상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주인이 찍어 버리려고 하자, 포도밭 일꾼이 나서서 한 해만 더 기다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심판을 경고하셨던 예수님이 이제는 기다려 주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 대조는 장의 마지막에서 더욱 강렬해집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거부한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그 도시를 향해 마지막으로 보여 주시는 모습은 분노한 심판자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처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조금 더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품으시려는 분이 계십니다.
그 사이에서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 몸이 굽어 있던 여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며, 동서남북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그 나라의 식탁에 앉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문이 닫힌 뒤에는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장에는 하나님의 인내와 심판, 넓은 초대와 닫히는 문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는데, 왜 그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13장은 이 질문을 추상적인 신학 논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만나시는 사람들과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사람들이 그 나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왜 하필 그 사람들이 죽었을까
이 장은 누군가가 전해 온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에 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을 그에게 알렸다.누가복음 13:1 · 본디새김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빌라도의 명령이나 그 휘하의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피가 제물의 피와 섞였다는 표현은 이 일이 제사와 관련된 거룩한 장소에서 일어났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건의 원인이나 빌라도의 정치적 책임을 설명하는 대신, 사람들이 품고 있을 법한 한 가지 생각을 꺼내십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그런 고난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누가복음 13:2 · 본디새김
사람들은 사건을 알렸을 뿐, 희생자들이 더 큰 죄인이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건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을 수 있는 판단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리신다면, 특별히 큰 불행을 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오래도록 다루어지는 질문입니다.
신명기 28장에는 이스라엘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복과 저주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심판하신다는 가르침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뒤집어서, 어떤 사람이 겪은 고통의 크기로 그 사람의 죄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욥기의 친구들이 바로 그런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욥이 큰 고통을 겪으므로 그에게 큰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욥기의 이야기는 그 판단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도리어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들처럼 멸망할 것이다.」누가복음 13:3 · 본디새김
예수님 역시 희생자들을 향한 그러한 판단을 거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읽으면 희생자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는 식으로 같은 논리를 되풀이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방향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죄를 판단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보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설명하는 일은 때로 그 불행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일이 됩니다. 저 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긴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나는 저 사람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거리 두기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의로움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실로암의 열여덟 사람
예수님은 이번에는 다른 사건을 꺼내십니다.
「또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졌을 때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은 어떠냐?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빚진 이들이라고 생각하느냐?」누가복음 13:4 · 본디새김
첫 번째 사건은 로마 총독의 폭력과 관련되어 있었고, 두 번째는 망대가 무너진 사고입니다. 사건의 성격은 다르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죽었을까요? 그들에게는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요?
이번에 예수님은 「죄인」 대신 「빚진 이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은 같습니다. 「아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 그런 재난을 당했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3절과 5절의 「그들처럼 멸망할 것이다」는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든 예상치 못하게 죽을 수 있듯이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심판이 갑작스럽게 닥칠 수 있다는 경고로 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심판 예고와 연결해,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이 장차 역사적 재앙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포함한다고 봅니다. 누가복음 19:41–44와 21:20–24에서는 예루살렘에 닥칠 파괴가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두 읽기는 반드시 서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모든 사람이 희생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한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불행을 그들의 죄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삼는 일을 거부하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책임까지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그 사람을 정죄할 근거가 아니지만,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그 질문을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빌라도는 당시 유대를 통치하던 로마의 총독이었고, 고대 기록에서도 그의 통치 아래 벌어진 폭력과 갈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갈릴리 사람들의 학살 사건 자체는 현재 알려진 다른 고대 문헌에서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정치적 반란에 가담했는지, 빌라도가 왜 이들을 죽였는지,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의 수로와 못으로 알려진 지역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망대의 정확한 위치와 붕괴 원인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빚진 이들」로 옮긴 그리스어는 본래 빚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를 한 해 더 기다리는 이유
어떤 사람에게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그 포도밭에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나무에 열매가 맺혔는지 살펴보려고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런 일이 세 해째 반복되었습니다.
「그가 포도밭 일꾼에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아보러 세 해째 오지만 찾지 못한다. 그것을 찍어 버려라. 어찌하여 그것이 땅까지 못 쓰게 하느냐?』」누가복음 13:7 · 본디새김
주인의 판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도밭의 땅은 무한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계속 자리를 차지한다면 다른 식물을 기를 기회도 줄어듭니다. 주인은 아무런 이유 없이 나무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를 찍어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밭 일꾼이 개입합니다.
「포도밭 일꾼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주인님,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 때까지 올해만 더 그대로 두십시오.』」누가복음 13:8 · 본디새김
일꾼은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주인이 잘못 보았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한 해를 더 달라고 요청하고, 그 한 해 동안 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시간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신이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곧 방치인 것은 아닙니다.
이 일꾼의 기다림에는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열매를 기다리는 수고가 들어 있습니다.
세 해와 한 해의 의미
여기서 세 해는 주인이 이미 충분히 기다렸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추가된 한 해는 다시 주어진 기회를 나타냅니다.
이 비유의 배경에는 이스라엘을 나무나 포도밭에 비유하는 구약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 이미지에 비추어 보면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면서도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백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나무가 누구만을 가리키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향한 경고로 읽을 수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비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중심은 열매와 기다림의 관계에 있습니다.
비유는 왜 결말을 알려 주지 않을까?
「『앞으로 열매를 맺으면 — 그렇지 않으면 그 나무를 찍어 버리실 것입니다.』」누가복음 13:9 · 본디새김
비유는 여기서 끝납니다.
한 해 뒤에 열매를 맺었을까요, 결국 찍혀 버렸을까요? 본문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찍혀 버린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을 나무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십니다.
주인은 열매를 찾고 있습니다.
일꾼은 조금 더 돌볼 시간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나무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비유를 하나님은 언제나 심판을 무기한 미루신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한 해의 유예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열매 없는 나무를 즉시 제거하기만 원하신다고 읽는 것도 비유의 중요한 장면을 놓치는 일입니다. 심판이 정당한 상황에서조차 다시 돌보고 기다리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포도밭 일꾼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킬까요? 그렇게 읽을 만한 신학적 근거는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를 요청하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찾아가 회복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포도밭 일꾼을 예수님이라고 직접 밝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확정적인 인물 대응보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 일꾼이 보여 주는 인내와 돌봄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열여덟 해 동안 제대로 몸을 펴지 못했던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안식일에 풀려나야 할 사람
예수님은 안식일에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곳에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보아라, 열여덟 해 동안 약함을 일으키는 영을 지닌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몸이 굽어 조금도 허리를 펴지 못했다.누가복음 13:11 · 본디새김
누가는 이 여자의 이름도, 어떤 병명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열여덟 해 동안 몸이 굽은 채 살아왔고, 스스로 허리를 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열여덟이라는 숫자는 이 장의 앞부분에도 등장했습니다.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졌을 때 죽은 사람이 열여덟 명이었습니다. 두 숫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누가가 특정한 상징을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놓인 두 장면을 비교하면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죽음을 놓고 그들의 죄를 판단하려 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오랫동안 고통받는 사람을 보시고 그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 고통을 당할 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문제 삼으시는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그를 묶고 있는 고통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녀가 믿음을 고백했다거나 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녀를 보셨고, 부르셨습니다.
예수가 그 여자를 보고 불러 말했다. 「여자여, 그대는 약함에서 풀려났다.」누가복음 13:12 · 본디새김
예수님이 손을 얹으시자 곧바로 몸이 펴졌고, 그 여자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오래도록 몸이 굽어 있던 사람이 마침내 허리를 폅니다. 누가는 그녀의 감정이나 이후의 삶을 상상해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가 기록한 것은 몸이 펴졌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치유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응답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왜 하필 안식일이었을까?
그런데 회당장은 이 일을 보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를 냅니다.
회당장은 예수가 안식일에 고친 것을 두고 성이 나서 무리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다. 그러니 그 엿새에 와서 고침을 받되, 안식일에는 받지 마라.」누가복음 13:14 · 본디새김
그의 주장은 출애굽기 20:9–10의 안식일 계명과 연결됩니다. 이 사람의 문제를 단순히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노동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신 쉼을 누리는 날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를 어떤 종류의 일로 판단해야 하는가입니다. 회당장은 고치는 행위를 안식일에 피해야 할 노동의 범주에 넣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그 일을 안식일의 의미와 연결하십니다.
주님이 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끌고 가 물을 먹이지 않느냐?」누가복음 13:15 · 본디새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단순히 사람은 짐승보다 귀하니 예외를 인정하라는 논리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섬세한 연결이 있습니다.
소를 풀어 주는 날에 사람을 풀어 주다
「그런데 보아라, 사탄이 열여덟 해 동안 묶어 둔 이 여자는 아브라함의 딸이다. 안식일에 이 사슬에서 풀려나야 하지 않았느냐?」누가복음 13:16 · 본디새김
15절에서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푸는」(λύω) 행위와 16절에서 여자가 사슬에서 「풀려나는」 행위에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12절의 「풀려났다」 역시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반복이 예수님의 논증을 만듭니다.
너희는 안식일에도 짐승을 묶어 둔 자리에서 풀어 주어 물을 마시게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열여덟 해 동안 묶여 있던 이 여자가 안식일에 풀려나는 것은 얼마나 더 마땅한 일이겠느냐? 예수님은 안식일과 자비를 서로 대립시키지 않으시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 안식일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여 주십니다.
출애굽기 20:11에서는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다는 사실이 안식일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였고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안식일은 한때 노예였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었음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사슬에 묶여 있던 여자가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안식일의 의미와 충돌하기보다 그 의미를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이므로 치유를 미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므로 이 여자가 자유롭게 되는 일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딸
예수님은 그 여자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십니다.
누가는 이 여자의 이름도, 가족도, 사회적 지위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가 누구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호칭은 그 여자가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그를 통해 민족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2:1–3). 그 약속의 역사에 속한 사람이 지금 회당 안에서 오랫동안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그녀의 고통이 끝나는 순간보다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문제에 더 집중합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딸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 장면은 이후 누가복음 19:9에서 삭개오에게도 적용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찾아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는 사건 속에서 실제적인 의미를 드러냅니다.
부끄러워하는 사람들과 기뻐하는 사람들
이 장면은 두 무리의 상반된 반응으로 끝납니다. 예수님께 맞서던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영광스러운 일을 보고 기뻐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 사건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한 여자가 열여덟 해의 속박에서 벗어난 일,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까요?
조금 더 깊이
당시 안식일에 가축을 어떻게 돌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유대 집단 사이에서도 규정과 실천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일은 실제로 안식일의 허용 범위와 관련하여 논의되던 문제였습니다. 17절의 원문은 부끄러워함과 기뻐함을 모두 미완료 시제로 표현하여 당시의 반응을 진행되는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작은 씨앗이 새들의 집이 되기까지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은가? 무엇에 견줄까?」누가복음 13:18 · 본디새김
그런데 예수님이 고르신 비유는 의외로 소박합니다. 왕의 궁전도 아니고, 강력한 군대도 아니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성도 아닙니다. 누군가의 뜰에 뿌려진 겨자씨와 한 여자가 밀가루에 넣은 누룩입니다.
겨자씨는 어떻게 나무가 되는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 자기 뜰에 뿌렸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누가복음 13:19 · 본디새김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시작과 크게 자란 결과 사이의 대조가 의도적으로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가장 눈여겨볼 장면은 식물이 커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무가 얼마나 높이 자랐는지, 얼마나 굵어졌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이미지는 큰 나무가 여러 생명에게 그늘과 자리를 제공한다는 구약의 왕권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하시면서 뜻밖에도 백향목처럼 웅장한 나무가 아니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한 식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권력처럼 처음부터 압도적인 위용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가 자라났을 때 새들이 깃들일 자리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커진다는 것은 그 나라의 크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누가 쉼과 자리를 얻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새들을 여러 민족이나 이방 사람들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특히 13:29에서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모여드는 장면과 연결하면 그런 의미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확정적인 일대일 대응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작은 시작에서 자라나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의미를 중심에 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반죽 전체를 바꾸는 작은 누룩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 견줄까?」 하고 다시 질문하십니다. 이번에는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 밀가루 세 사톤 속에 숨겨 넣어 반죽 전체가 부풀 때까지 두었다.」누가복음 13:21 · 본디새김
세 사톤은 약 30킬로그램 안팎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당한 양의 밀가루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밀가루의 양만이 아니라, 여자가 누룩을 「숨겨 넣었다」는 표현입니다. 누룩을 넣은 뒤에는 그것이 겉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두 비유 모두 처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것이 결국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두 비유에는 차이도 있습니다.
겨자씨는 바깥으로 자라납니다.
누룩은 안에서 퍼져 나갑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성장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적으로 확장될 뿐 아니라, 그 나라가 들어간 곳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킵니다.
누가복음 12:1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누룩은 위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누룩의 작용, 곧 아주 작은 것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위선도 사람과 공동체 전체에 퍼질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도 처음에는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그 영향이 퍼져 나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바로 앞의 안식일 치유를 새롭게 보게 해 줍니다. 회당에서 한 여자가 몸을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은 세상의 큰 사건들과 비교하면 작은 일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시작되고 자라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크고 넓게 자란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겨자 식물은 종류와 생육 조건에 따라 크게 자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목재용 나무와는 다릅니다. 에스겔 17:22–24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높은 백향목의 가지를 가져다가 심으시고, 그것이 큰 나무가 되어 여러 새가 그 아래 깃들이게 하십니다. 그 본문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실패와 심판이라는 배경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새로운 왕권과 회복을 이루실 것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다니엘 4:10–12에서도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고 짐승들이 그 그늘 아래 머무는 큰 나무가 등장하는데, 그 나무는 여러 민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느부갓네살 왕의 거대한 권세를 나타냅니다. 두 본문은 나무의 의미가 서로 다르지만, 큰 나무가 여러 생명에게 그늘과 자리를 제공한다는 왕권의 이미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톤」은 곡식이나 밀가루의 분량을 나타내는 단위이며, 세 사톤의 양은 환산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좁은 문과 동서남북에서 모여드는 사람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고 계신다고 다시 알려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면서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며 가르쳤다.누가복음 13:22 · 본디새김
누가복음 9:51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그 뒤의 여러 장면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향해 나아가시는 과정으로 제시됩니다.
이제 길 위에서 한 사람이 질문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주님, 구원받는 이들이 적습니까?」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누가복음 13:23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신학적인 호기심에서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숫자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몇 명이 구원받을 것인지 말씀하지 않으시고, 질문을 하던 사람을 포함한 청중 전체에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이가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3:24 · 본디새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구원받을지를 궁금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남의 운명을 계산하기보다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하십니다.
좁은 문은 왜 좁은가?
「애써라」는 경쟁하거나 힘써 싸우는 행동, 목표를 향해 분투하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단순히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구원이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되는 보상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씨앗과 누룩처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자라는 나라로 설명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 그것을 가볍게 여기거나 뒤로 미루지 말라는 긴급한 요청입니다.
마태복음 7:13–14에는 좁은 문과 넓은 문, 그리고 그 길들이 어디로 이끄는지가 대조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좁은 문 하나만 등장하고, 이어지는 비유에서는 그 문이 닫힙니다. 따라서 누가의 이야기에서는 두 종류의 길을 비교하는 것보다,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지금 열려 있지만 언젠가는 닫힌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집주인이 문을 닫은 뒤에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고 나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님, 우리에게 열어 주십시오』 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그가 대답하여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이들인지 알지 못한다.』」누가복음 13:25 · 본디새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집주인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때 너희가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먹고 마셨고 당신이 우리 동네 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누가복음 13:26 · 본디새김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과거의 접촉과 가까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밖에 남아 있을까요? 본문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의 대답은 그 이유를 드러냅니다.
「그러면 그가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가 어디서 온 이들인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저지르는 모든 자들아.』」누가복음 13:27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접했지만, 그 가르침을 듣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집주인이 그들이 「어디서 온 이들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지리 정보의 부족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외적인 친분과 달리, 집주인이 인정할 만한 관계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누가복음 6:46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두 본문에 공통된 것은 말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좁은 문은 구원의 자리가 너무 비좁아서 몇몇 특별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에서 오히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이 좁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방식대로 소유하거나, 자신의 종교적 지위만을 내세워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문이 닫힌 뒤에는 이전에 누렸던 종교적 친숙함만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과 안에 있는 사람
「거기에 울부짖음과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고 너희 자신은 밖으로 내쫓기는 것을 너희가 볼 때에 그러할 것이다.」누가복음 13:28 · 본디새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의 역사를 대표하는 조상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은 그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새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조상들이 그 나라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혈통이나 종교적 소속에 대한 안일한 확신을 흔드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것은 구별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북쪽과 남쪽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울 것이다.」누가복음 13:29 · 본디새김
앞에서는 좁은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식사 자리에 앉습니다.
문은 좁습니다.
그러나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출신지는 한곳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한 지역이나 민족만의 식탁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25:6–8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모든 민족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베푸시고, 죽음을 없애시며,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식탁은 그러한 구약의 소망과 깊이 닿아 있습니다.
「비스듬히 누울 것이다」는 당시 식사 자리에서 자리를 잡고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식탁에 참여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문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그 식탁에 자리를 잡습니다.
「보아라, 꼴찌인 이들 가운데 첫째가 될 이들이 있고 첫째인 이들 가운데 꼴찌가 될 이들이 있다.」누가복음 13:30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모든 첫째가 반드시 꼴찌가 되고 모든 꼴찌가 반드시 첫째가 된다는 기계적인 역전의 규칙이 아닙니다. 현재의 지위와 평가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자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이 장 앞부분의 여자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여덟 해 동안 몸이 굽어 있던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회당장은 그녀가 자유롭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신을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느냐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시는 일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대와 경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계속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길을 멈추게 하려는 위협이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문」으로 옮긴 그리스어도 두 복음서가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성문이나 출입문을 가리키는 퓔레를, 누가복음은 집의 문을 가리키는 튀라를 사용합니다.
헤롯이라는 여우와 예루살렘을 향한 길
바리새파 사람 몇 명이 예수님께 다가와 경고합니다.
바로 그 시각에 바리새파 사람 몇 명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누가복음 13:31 · 본디새김
여기서 헤롯은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누가복음 3:19–20에서는 그가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기록하고, 마가복음 6:17–29에서는 요한이 결국 헤롯의 명령으로 처형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롯이 예수님에게 위험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경고를 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진심이었을까요, 아니면 헤롯의 이름을 빌려 예수님을 다른 곳으로 떠나게 만들려는 의도였을까요? 본문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항상 예수님과 적대적인 집단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면에서는 그들의 경고가 실제로 친절한 행동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의도보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가서 이 여우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내가 오늘과 내일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온전해진다.』」누가복음 13:32 · 본디새김
「여우」가 이 문맥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교활하고 음흉한 통치자를 가리킨다는 읽기가 있고, 반대로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예수님의 사명을 좌우할 만한 권세를 지니지 못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두 읽기 모두 예수님께서 헤롯의 권위를 높게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일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고 계십니다. 앞서 몸이 굽은 여자를 풀어 주셨던 바로 그 일입니다.
헤롯이 죽이겠다고 위협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명은 멈추지 않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온전해진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은 33절에서 「오늘과 내일과 그다음 날」로 되풀이됩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정확히 사흘 뒤에 모든 사역을 마치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고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정해진 길을 계속 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표현은 자신의 일이 일정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온전해진다」라고 옮긴 말은 문법적으로 중간태나 수동태로 읽을 수 있는 형태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완수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앞의 귀신 축출과 치유 사역을 끝낸다는 뜻이 강조되고, 완성되거나 온전하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예루살렘에서 맞이하실 고난과 죽음까지 포함해 예수님의 사명이 궁극적인 완성에 이르는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두 의미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지만, 본문은 어느 한쪽으로 모든 것을 확정하도록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사흘째 날에 부활하신 사건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의 전체 이야기 속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명의 완성과 깊이 연결되지만, 이 자리에서 강조되는 것은 헤롯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나는 오늘과 내일과 그다음 날에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3:33 · 본디새김
「가야 한다」에는 누가복음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9:22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며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반드시」의 언어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정치적 상황에 밀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움직이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헤롯이 위협한다고 그 길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무모한 행동을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며 가르치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담대함입니다.
예언자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는가?
이 말씀을 모든 예언자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었다는 역사적 진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앞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알고 계셨으며,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자적 책망과 반어적인 표현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도시이며,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받아들여야 할 바로 그 도시가 오히려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곳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도시를 향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품으려는 암탉과 품에 들지 않으려는 새끼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내진 이들을 돌로 치는 이여.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런데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누가복음 13:3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도시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때로 강한 감정이나 중요한 부르심을 나타냅니다. 이 장면에서 그 반복은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탄식으로 들립니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이들을 돌로 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향해 단순히 심판을 선언하고 돌아서지 않으시고, 자신을 암탉에 비유하십니다. 새끼들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날개 아래 모아 자신의 몸으로 덮어 주는 모습입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었을 때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새끼들을 품으려는 암탉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이미지는 완전히 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생명을 품고 보호하는 자리라는 공통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시편 91:4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시편 57:1에서는 시인이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겠다고 고백하고, 룻기 2:12에서 보아스는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날개 아래 피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보호 아래 머무는 삶을 보여 줍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백성을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자신이 모으려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예언자의 역할에만 한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보호하시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진술은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 구원을 자신의 행동으로 가져오시는 분입니다. 회당에서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 주신 분이 이제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모으고 싶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슬픈 말씀은 34절 마지막의 짧은 문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품으려 하셨습니다.
그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을 모으지 못하신 이유를 자신의 사랑이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모으고 보호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의 초대를 거부하는 현실도 존재합니다.
앞에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일꾼은 한 해를 더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여기서는 예언자들을 죽이는 예루살렘에 대한 책망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몇 번이나 모으려 하셨다고 탄식하십니다. 두 장면 모두 구원하려는 뜻과 그것을 거부하는 현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아쉬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앞날을,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슬퍼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 도시를 품으려 하셨던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너희 집이 너희 몫으로 내버려진다
「보아라, 너희 집이 너희 몫으로 내버려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 할 때가 오기까지는 너희는 나를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3:35 · 본디새김
여기서 「집」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고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이 하나님의 보호를 잃고 버려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과 그 주민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면, 하나님이 보호하시던 공동체가 그 보호를 거부한 결과로 버려지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었고 도시의 종교적 정체성과 분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두 읽기는 어느 정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반드시 성전 건물 하나로만 제한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버려집니까? 34절이 그 이유를 보여 줍니다. 그들을 모으려는 뜻이 먼저 있었고, 그들은 그 뜻을 거부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기다리시는지, 어떤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지에 관한 모든 질문을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하는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
35절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는 시편 118:26을 인용합니다. 시편 118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이고, 이 표현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성전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자신의 등장과 연결하시며, 장차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그 축복의 말을 하게 될 때를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9:38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실 때 제자들의 무리가 비슷한 시편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예루살렘 전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뒤이어 예수님의 탄식과 심판 예고가 계속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예루살렘 입성 장면과 연결할 수는 있지만, 그 의미가 거기서 모두 끝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만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장차 반드시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여기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버려지는 집의 이미지는 예레미야 12:7이나 22:5에서 하나님의 집이 버려지고 황폐하게 되는 심판의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열매와 자유와 식탁 — 이 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 13장의 여러 장면을 연결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와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경고가 있고, 찍혀 버릴 수 있는 무화과나무와 닫히는 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경고가 하나님의 성품을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를 한 해 더 돌보려는 일꾼, 열여덟 해 동안 묶여 있던 여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예수님, 새들이 깃드는 나무와 반죽을 바꾸는 누룩, 동서남북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식탁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이 심판의 경고를 없애지 않습니다.
심판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말씀을 지우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3장은 이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어느 한쪽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시고, 기다리시고, 회복시키고, 품으려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들의 거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둘 사이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그 길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길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고난을 겪으실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가 자신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아십니다. 그럼에도 암탉이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듯이 그 도시를 얼마나 여러 번 모으려 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새끼들을 품으려는 날개는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3장은 그 펼쳐진 날개와 그 아래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