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열매를 기다리고 날개 아래 모으시는 분
누가복음 13장은 두 가지 끔찍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로암에서 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들을 예로 드시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도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곧바로 이상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주인이 잘라 버리려고 하자, 포도밭 일꾼이 나서서 한 해만 더 기다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심판을 경고하셨던 예수님이 이제는 기다려 주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 대조는 장의 마지막에서 더욱 강렬해집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거부한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보여 주시는 모습은 분노한 심판자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암탉이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느냐!」 처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조금 더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품으시려는 분이 계십니다.
그 사이에서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 몸이 굽어 있던 여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며, 동서남북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그 나라의 식사 자리에 함께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문이 닫힌 뒤에는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장에는 하나님의 인내와 심판, 넓은 초대와 닫히는 문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는데, 왜 그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13장은 이 질문을 추상적인 신학 논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만나시는 사람들과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사람들이 그 나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왜 하필 그 사람들이 죽었을까
이 장은 누군가가 전해 온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몇 사람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을 알렸습니다.누가복음 13:1 · 두루새김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빌라도의 명령이나 그 아래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피가 제물에 섞였다는 표현은 이 일이 제사와 관련된 거룩한 장소에서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건의 원인이나 빌라도의 정치적 책임을 설명하는 대신, 사람들이 품고 있을 법한 한 가지 생각을 꺼내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았다고 생각하느냐?」누가복음 13:2 · 두루새김
사람들은 사건을 알렸을 뿐, 희생자들이 죄가 더 많았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건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을 수 있는 판단을 드러내십니다. 어떤 사람이 끔찍한 일을 겪었다면, 그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오래도록 다루어지는 질문입니다. 신명기 28장에는 이스라엘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복과 저주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심판하신다는 가르침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뒤집어서, 고통의 크기로 그 사람의 죄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욥기의 친구들이 바로 그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욥이 큰 고통을 겪으므로 그에게 큰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욥기의 이야기는 그 판단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 역시 희생자들을 향한 그러한 판단을 거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들처럼 멸망할 것이다.」누가복음 13:3 · 두루새김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잘못 읽으면 희생자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는, 결국 같은 논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방향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죄를 판단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보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설명하는 일은 때로 그 불행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일이 됩니다. 저 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긴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나는 저 사람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거리 두기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의로움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실로암의 열여덟 사람
예수님은 이번에는 다른 사건을 꺼내십니다.
「실로암에서 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어떠냐?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았다고 생각하느냐?」누가복음 13:4 · 두루새김
첫 번째 사건에는 로마 총독의 폭력이 있었고, 두 번째에는 탑이 무너진 사고가 있습니다. 사건의 성격은 다르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죽었을까요? 그들에게는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같습니다. 「아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 그런 재난을 당했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3절과 5절의 「그들처럼 멸망할 것이다」는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든 예상치 못하게 죽을 수 있듯이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심판이 갑작스럽게 닥칠 수 있다는 경고로 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심판 예고와 연결해,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이 장차 역사적 재앙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포함한다고 봅니다. 누가복음 19:41–44와 21:20–24에서는 예루살렘에 닥칠 파괴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두 읽기는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모든 사람이 희생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지 않으시고, 그들의 불행을 죄의 확실한 증거로 삼는 일을 거부하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책임까지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그 사람을 죄인으로 몰 근거가 아니지만,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면, 하나님은 왜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그 질문을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빌라도는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었고, 고대 기록에서도 그의 통치 아래 벌어진 폭력과 갈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갈릴리 사람들의 학살 사건 자체는 현재 알려진 다른 고대 문헌에서 따로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 사람들이 반란에 가담했는지, 왜 죽었는지,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의 수로와 못으로 알려진 지역이지만, 탑의 정확한 위치와 무너진 원인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두 사건 모두 「죄가 더 많았다고」 옮겼지만, 4절 원문에서 예수님은 「죄인」 대신 「빚진 사람들」이라는 낱말을 쓰십니다.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큰 빚을 진 사람들이었느냐는 물음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를 한 해 더 기다리는 이유
어떤 사람에게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그 포도밭에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습니다. 주인은 열매가 맺혔는지 살펴보려고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런 일이 삼 년째 반복되었습니다.
「그가 포도밭 일꾼에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찾으러 온 지 벌써 삼 년째인데 하나도 없다. 이 나무를 잘라 버려라. 땅까지 쓸모없게 만들도록 둘 이유가 있느냐?』」누가복음 13:7 · 두루새김
주인의 판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도밭의 땅은 끝없이 넓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계속 자리를 차지하면 다른 식물을 기를 기회도 줄어듭니다. 주인은 이유 없이 나무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잘라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밭 일꾼이 나섭니다.
「일꾼이 대답했다. 『주인님, 올해만 더 그대로 두세요. 제가 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게요.』」누가복음 13:8 · 두루새김
일꾼은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주인이 잘못 보았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한 해를 더 달라고 요청하고, 그 한 해 동안 자신이 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시간을 더 달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곧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꾼의 기다림에는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열매를 기다리는 수고가 들어 있습니다.
세 해와 한 해의 의미
세 해는 주인이 이미 충분히 기다렸다는 사실을, 추가된 한 해는 다시 주어진 기회를 나타냅니다.
이 비유의 배경에는 이스라엘을 나무나 포도밭에 비유하는 구약의 전통이 있습니다. 이사야 5:1–7에서 하나님은 정성껏 가꾼 포도밭에서 좋은 포도를 기대하셨지만 들포도가 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포도밭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는 공의와 의로움이었습니다. 이런 이미지에 비추어 보면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백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나무가 누구만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향한 경고로 읽을 수 있고, 말씀을 듣는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비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중심은 열매와 기다림의 관계에 있습니다.
비유는 왜 결말을 알려 주지 않을까?
「『앞으로 열매를 맺으면 좋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때 잘라 버리세요.』」누가복음 13:9 · 두루새김
비유는 여기서 끝납니다.
한 해 뒤에 열매를 맺었을까요? 결국 잘려 버렸을까요? 본문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잘려 버린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을 나무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지금 그 나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주인은 열매를 찾고 있습니다. 일꾼은 조금 더 돌볼 시간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나무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비유를 하나님은 언제나 심판을 끝없이 미루신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한 해를 더 기다리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열매 없는 나무를 즉시 없애기만 원하신다고 읽는 것도 이 장면을 놓치는 일입니다. 심판이 정당한 상황에서조차 다시 돌보고 기다리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열여덟 해 동안 제대로 몸을 펴지 못했던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세 해를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기간으로, 추가된 한 해를 특정한 역사적 기간으로 연결하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본문은 그렇게 대응시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미가 7:1에서도 예언자는 열매를 찾아도 얻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빌려 공동체의 부패를 탄식합니다. 포도밭 일꾼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읽을 신학적 근거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를 요청하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찾아가 회복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일꾼을 예수님이라고 직접 밝히지는 않으므로, 인물을 확정해 연결하기보다 일꾼이 보여 주는 인내와 돌봄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서 실제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안식일에 풀려나야 할 사람
예수님은 안식일에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곳에는 열여덟 해 동안 병을 일으키는 영에게 시달려 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몸이 굽어 허리를 전혀 펴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13:11 · 두루새김
누가는 이 여자의 이름도, 병명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열여덟 해라는 시간은 이 장의 앞부분, 실로암에서 죽은 열여덟 명에도 등장했습니다. 두 숫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누가가 특정한 상징을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까이 놓인 두 장면을 비교하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죽음을 놓고 그들의 죄를 판단하려 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오랫동안 고통받는 사람을 보시고 그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 고통을 당할 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먼저 문제 삼으시는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그를 묶고 있는 고통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녀가 믿음을 고백했다거나 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를 보고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누가복음 13:12 · 두루새김
예수님이 손을 얹으시자 곧바로 몸이 펴졌고, 그 여자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가는 그녀의 감정이나 이후의 삶을 상상해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가 기록한 것은 몸이 펴졌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필 안식일이었을까?
그런데 회당 책임자는 이 일을 보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회당 책임자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화가 나서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나 있다. 그러니 그 엿새에 와서 치료를 받아라. 안식일에는 받지 마라.」누가복음 13:14 · 두루새김
그의 주장은 출애굽기 20:9–10의 안식일 계명과 연결됩니다. 이 사람의 문제를 단순히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중요한 일이었고,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신 쉼을 누리는 날이었습니다.
문제는 병을 고치신 일을 어떤 종류의 일로 판단해야 하는가입니다. 회당 책임자는 고치는 행위를 안식일에 피해야 할 노동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일을 안식일의 의미와 연결하십니다.
주님께서 회당 책임자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누구나 안식일에도 구유에 매어 둔 소나 나귀를 풀어서 물을 먹이러 데려가지 않느냐?」누가복음 13:15 · 두루새김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사람은 짐승보다 귀하니 예외를 인정하라는 논리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섬세한 연결이 있습니다.
소를 풀어 주는 날에 사람을 풀어 주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의 딸인데, 사탄에게 묶인 지 벌써 열여덟 해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이 묶임에서 풀려나야 하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3:16 · 두루새김
15절에서 소나 나귀를 「풀어서」 데려가는 행위와 16절에서 여자가 묶임에서 「풀려나야」 하는 행위에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 뤼오(λύω)가 쓰입니다. 12절의 「풀려났다」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에도 짐승을 묶어 둔 자리에서 풀어 주지 않느냐, 그렇다면 열여덟 해 동안 묶여 있던 이 여자가 안식일에 풀려나는 것은 얼마나 더 마땅한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과 자비를 서로 대립시키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 20:11에서는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다는 사실이 안식일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였고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안식일은 한때 노예였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었음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묶여 있던 여자가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안식일의 의미와 충돌하기보다 그 의미를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회당 책임자는 안식일이므로 병을 고치는 일을 미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므로 이 여자가 자유롭게 되는 일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딸
누가는 이 여자의 이름도, 가족도, 사회적 지위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가 누구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딸입니다.
이 호칭은 그 여자가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을 맺으신 백성에 속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그를 통해 민족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2:1–3). 그 약속의 역사에 속한 사람이 지금 회당 안에서 오랫동안 묶여 있는데, 회당 책임자는 그녀의 고통이 끝나는 순간보다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문제에 더 집중합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19:9에서 삭개오에게 쓰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찾아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집안의 기록이나 종교적 지위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는 사건 속에서 실제적인 의미를 드러냅니다.
부끄러워하는 사람들과 기뻐하는 사람들
이 장면은 두 무리의 상반된 반응으로 끝납니다. 예수님께 맞서던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고, 무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하시는 영광스러운 일들을 보며 기뻐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 사건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한 여자가 열여덟 해의 묶임에서 벗어난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까요?
조금 더 깊이
당시 안식일에 가축을 어떻게 돌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유대 집단 사이에서도 규정과 실천에 차이가 있었고,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일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도 논의되던 문제였습니다. 17절의 두 반응은 원문에서 모두 미완료 시제로 표현되어, 당시의 반응을 진행되는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작은 씨앗이 새들의 집이 되기까지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으냐? 무엇에 비길 수 있겠느냐?」누가복음 13:18 · 두루새김
예수님이 고르신 비유는 의외로 소박합니다. 왕의 궁전도, 강력한 군대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성도 아닙니다. 누군가의 뜰에 심긴 겨자씨와 한 여자가 밀가루에 넣은 누룩입니다.
겨자씨는 어떻게 나무가 되는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져다가 자기 뜰에 심었다. 그것이 자라 나무가 되었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누가복음 13:19 · 두루새김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미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작은 시작과 크게 자란 결과를 대조하십니다. 그러나 나무가 얼마나 높이, 얼마나 굵게 자랐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가지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큰 나무는 여러 생명에게 그늘과 자리를 주는 왕권의 이미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쓰시면서 뜻밖에도 백향목이 아닌 작은 겨자씨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권력처럼 처음부터 압도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가 자라났을 때는 새들이 깃들일 자리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커진다는 것은 크기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누가 쉼과 자리를 얻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반죽 전체를 바꾸는 작은 누룩
예수님은 다시 질문하십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겠느냐?」누가복음 13:20 · 두루새김
이번에는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세 사톤에 섞어 넣고, 반죽 전체가 부풀 때까지 두었다.」누가복음 13:21 · 두루새김
세 사톤은 약 30킬로그램 안팎의 상당한 양의 밀가루입니다. 원문은 여자가 누룩을 「숨겨 넣었다」(κρύπτω)고 표현합니다. 누룩은 넣은 뒤에는 겉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두 비유 모두 처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것이 결국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겨자씨는 바깥으로 자라나고, 누룩은 안에서 퍼져 나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깥으로 넓어질 뿐 아니라, 그 나라가 들어간 곳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킵니다.
누가복음 12:1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누룩이 언제나 악이나 언제나 선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고,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그 작용입니다.
이 두 비유는 바로 앞의 안식일 치유를 새롭게 보게 해 줍니다. 회당에서 한 여자가 몸을 펴고 하나님을 찬양한 일은 세상의 큰 사건들과 비교하면 작은 일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오랫동안 묶여 있던 자리에서 자유롭게 되는 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크고 넓게 자란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겨자 식물은 종류와 자라는 조건에 따라 크게 자랄 수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목재용 나무와는 다릅니다. 에스겔 17:22–24에서는 하나님이 높은 백향목의 가지를 심으시고, 그것이 큰 나무가 되어 여러 새가 그 아래 깃들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실패와 심판을 배경으로 하나님이 새로운 왕권과 회복을 이루실 것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다니엘 4:10–12의 큰 나무는 여러 민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느부갓네살 왕의 권세를 나타냅니다. 새들을 여러 민족이나 이방 사람들의 상징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하며, 13:29의 동서남북에서 모여드는 사람들과 연결하면 더욱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으시므로, 확정적인 일대일 대응보다 작은 시작에서 자라나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의미를 중심에 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톤은 곡식이나 밀가루의 분량을 나타내는 단위로, 환산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숨겨 넣었다」를 「섞어 넣고」로 옮겼습니다.
좁은 문과 동서남북에서 모여드는 사람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고 계신다고 다시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도시와 마을들을 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누가복음 13:22 · 두루새김
누가복음 9:51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그 뒤의 장면들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향해 나아가시는 과정입니다. 이제 길 위에서 한 사람이 질문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는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2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숫자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질문한 사람을 포함한 청중 전체에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3:24 · 두루새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구원받을지를 궁금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며, 남의 운명을 계산하기보다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하십니다.
좁은 문은 왜 좁은가?
「힘써라」에 해당하는 원어(ἀγωνίζομαι)는 경쟁하거나 힘써 싸우는 행동, 목표를 향해 온 힘을 다하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는 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구원이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보상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씨앗과 누룩처럼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자라는 나라로 설명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 그것을 가볍게 여기거나 뒤로 미루지 말라는 긴급한 요청입니다.
마태복음 7:13–14에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이 대조되지만, 누가복음에는 좁은 문 하나만 등장하고 이어지는 비유에서 그 문이 닫힙니다. 누가의 이야기에서는 두 길을 비교하는 것보다,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지금 열려 있지만 언젠가는 닫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집주인이 문을 닫은 뒤에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고 나면, 너희는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집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누가복음 13:25 · 두루새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집주인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우리 동네 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누가복음 13:26 · 두루새김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모두 과거에 만나고 가까이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밖에 남아 있을까요?
「그러나 집주인은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악한 일을 하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누가복음 13:27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접했지만, 그 가르침을 듣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집주인이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겉으로 친분을 내세우지만 집주인이 인정할 만한 관계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46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말씀은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좁은 문은 구원의 자리가 너무 비좁아 몇몇 특별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에서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이 좁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방식대로 소유하거나, 종교적 지위만을 내세워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밖에 있는 사람과 안에 있는 사람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 자신은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 너희는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누가복음 13:28 · 두루새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 나라에 있다는 것은 그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새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조상들이 그 나라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후손인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맞게 응답하는 것은 구별됩니다.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북쪽과 남쪽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울 것이다.」누가복음 13:29 · 두루새김
문은 좁습니다.
그러나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출신지는 한곳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한 지역이나 민족만의 식탁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베푸시고, 죽음을 없애시며,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을 약속하는 이사야 25:6–8과 깊이 닿아 있습니다.
「비스듬히 누울 것」은 당시 식사 자리에서 자리를 잡고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문밖에 있었는데, 이제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그 식탁에 자리를 잡습니다. 자신이 안에 들어갈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밖에 있을 수 있고, 참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식탁에 앉을 수 있습니다.
「보아라, 꼴찌인 사람들 가운데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인 사람들 가운데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누가복음 13:30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모든 첫째가 반드시 꼴찌가 된다는 일률적인 규칙이 아니라, 현재의 지위와 평가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자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 몸이 굽어 있던 여자를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회당 책임자는 그녀가 자유롭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신을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느냐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시는 일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대와 경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계속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길을 멈추게 하려는 위협이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의 「문」은 성문이나 출입문을 가리키는 낱말이고, 누가복음은 집의 문을 가리키는 낱말을 씁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집주인 비유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헤롯이라는 여우와 예루살렘을 향한 길
바리새파 사람 몇 명이 예수님께 다가와 경고합니다.
바로 그때 바리새파 사람 몇 명이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헤롯이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누가복음 13:31 · 두루새김
여기서 헤롯은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누가복음 3:19–20), 요한은 결국 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습니다(마가복음 6:17–29).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경고를 전한 것은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진심이었을까요, 아니면 헤롯의 이름을 빌려 예수님을 떠나게 만들려는 의도였을까요? 본문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항상 예수님과 적대적인 집단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되며, 이 장면에서는 그들의 경고가 실제로 친절한 행동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해라. 『보아라, 나는 오늘과 내일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가 완성에 이를 것이다.』」누가복음 13:32 · 두루새김
헤롯을 「여우」라 부르시는 말은 교활한 통치자라는 뜻으로도,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예수님의 사명을 좌우할 힘이 없는 인물이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 헤롯의 권위를 높게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하고 계신 일을 밝히십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일, 앞서 몸이 굽은 여자를 풀어 주셨던 바로 그 일입니다. 헤롯이 죽이겠다고 위협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명은 멈추지 않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가 완성에 이를 것이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을 정확히 사흘 뒤에 사역을 마치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고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일이 일정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내가 완성에 이를 것이다」는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일을 끝낸다는 뜻으로도, 예루살렘에서 맞이하실 고난과 죽음까지 포함해 사명이 마침내 완성에 이른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의미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지만, 본문은 어느 한쪽으로 확정하도록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사흘째 날의 부활과 곧바로 같은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자리에서 강조되는 것은 헤롯의 위협에도 예수님께서 주어진 길을 끝까지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3:33 · 두루새김
「가야 한다」는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누가복음이 반복해서 쓰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상황에 밀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명을 따라 움직이고 계십니다. 위협 앞에서 그 길을 버리지도 않으시고, 위험을 피할 능력을 과시하려 무모하게 행동하지도 않으십니다. 하셔야 할 일을 계속하십니다.
예언자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는가?
이 말씀을 모든 예언자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었다는 역사적 진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에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자의 책망과 반어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도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받아들여야 할 도시가 오히려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곳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도시를 향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완성에 이를 것이다」의 그리스어 텔레이우마이는 문법적으로 중간태나 수동태로 읽을 수 있는 형태여서, 맡겨진 일을 완수한다는 뜻과 완성되거나 온전하게 된다는 뜻이 모두 가능합니다. 누가복음의 전체 이야기 속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명의 완성과 깊이 연결됩니다.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표현은 누가복음 9:22에서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며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도 쓰였습니다.
품으려는 암탉과 품에 들지 않으려는 새끼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느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누가복음 13:34 · 두루새김
성경에서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때로 강한 감정이나 중요한 부르심을 나타냅니다. 이 장면에서 그 반복은 예루살렘을 향한 깊은 탄식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죽이는 그 도시를 향해 심판을 선언하고 돌아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암탉에 비유하십니다. 암탉은 새끼들이 위험에 놓이지 않도록 날개 아래 모아 자신의 몸으로 덮어 줍니다. 겨자씨가 자란 나무에 새들이 깃들였던 것과 완전히 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생명을 품고 보호하는 자리라는 공통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시편 91:4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시편 57:1에서 시인은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룻기 2:12에서 보아스는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자기 백성을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자신이 모으려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예언자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보호하시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말씀하십니다.
회당에서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 주신 분이 이제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모으고 싶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슬픈 말씀은 마지막의 짧은 문장,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품으려 하셨습니다. 그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모으지 못하신 이유를 자신의 사랑이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모으고 보호하기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그 초대를 거부하는 현실도 존재합니다.
그 탄식은 계획이 실패했다는 아쉬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받으실 피해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슬퍼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자신을 죽일 것을 아시면서도, 그 도시를 품으려 하셨던 마음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너희 집이 버려진 채 너희에게 남겨진다
「보아라, 너희 집이 버려진 채 너희에게 남겨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십니다!』 하고 말할 때까지는 결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3:35 · 두루새김
여기서 「집」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상징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그 보호를 잃고 버려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보호하시던 예루살렘과 그 주민 전체가 그 보호를 거부한 결과로 버려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성전은 도시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두 읽기는 어느 정도 이어지지만, 「집」을 성전 건물 하나로만 제한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버려집니까? 앞 구절이 그 이유를 보여 줍니다. 그들을 모으려는 뜻이 먼저 있었고, 그들은 그 뜻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기다리시는지에 관한 모든 질문이 여기서 해결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하는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십니다!」는 시편 118:26을 인용한 말입니다. 시편 118편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이며,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자신이 오시는 일과 연결하십니다.
누가복음 19:38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실 때 제자들의 무리가 비슷한 시편의 말씀으로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예루살렘 전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뒤이어 탄식과 심판 예고가 계속되므로, 그 장면에서 13:35의 의미가 모두 끝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만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장차 반드시 회개할 것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이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로만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려 하셨던 분이며,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열매와 자유와 식탁 — 이 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나라
열매와 자유와 식탁, 이 장의 장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그려 냅니다. 그 나라는 인간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경고와 잘려 나갈 수 있는 나무와 닫히는 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 없는 나무를 한 해 더 돌보려는 일꾼이 있고, 열여덟 해 묶여 있던 여자가 풀려나며, 작은 씨앗이 새들의 자리가 되고, 동서남북에서 온 사람들이 식탁에 앉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이 심판의 경고를 없애지 않습니다. 심판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말씀을 지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 장은 그 이유를 하나님의 사랑이나 능력의 부족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그 거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서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고난을 겪으실 길을 계속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가 자신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아십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그 도시를 얼마나 여러 번 모으려 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마치 암탉이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듯이 말입니다.
새끼들을 품으려는 날개는 펼쳐져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은 그 펼쳐진 날개와 그 아래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