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누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가

누가복음 14장은 한 사람의 집에서 시작합니다.

그 집에는 예수님이 초대되어 계십니다.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식탁에서 어디에 앉으려고 하는지, 집주인이 어떤 사람들을 초대하는지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식탁의 질서를 하나씩 뒤집어 놓으십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에게는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고, 자신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집주인에게는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사람들을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더 큰 잔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 잔치에서는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오기를 거절합니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과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주인은 도시 바깥의 길에 있는 사람들까지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초대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곧바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향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면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모습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예수님은 누구를 초대하시는가? 그리고 그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누가복음 14장은 이 두 질문을 한데 묶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소유하려 하며, 자신의 삶에서 누구에게 최종적인 권한을 내어 주는지를 바꾸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 말씀으로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한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다음 사람들이 앉는 자리를 바꾸십니다.

그리고 식탁에 앉을 사람들의 명단 자체를 바꾸십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따라오려는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진지한 결단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814장 본문 읽기 →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켜볼 때, 예수님은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4:1–6 본문 →

이야기는 안식일에 벌어집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파 지도자 한 사람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예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4:1 · 두루새김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몸이 굽은 여자를 고치셨습니다. 이번에도 안식일 치유가 등장하지만, 장소는 회당이 아니라 한 지도자의 집입니다.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παρατηρέω)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단순히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말보다 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에서 문제를 찾아내려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뜻밖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 앞에는 몸이 붓는 병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4:2 · 두루새김

그가 집주인이 정식으로 초대한 손님인지, 치료를 받으려고 찾아온 사람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게 된 사람인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고쳐 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율법 전문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예수께서 율법 전문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느냐, 안 되느냐?」누가복음 14:3 · 두루새김

그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추상적인 율법 논쟁이 아니라, 그들 앞에 있는 병든 사람을 두고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침묵합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병든 사람을 붙잡아 고쳐 주고 돌려보내셨습니다.누가복음 14:4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 침묵 앞에서 더 긴 논쟁을 벌이지 않으십니다. 그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본문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곧 이야기에서 사라지지만, 그 사람을 고치신 일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이 됩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곧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4:5 · 두루새김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두지 않고 「곧바로」 끌어낼 것입니다. 위험에 빠진 생명을 구하는 일은 미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망설여야 할까요?

물론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긴급한 상황과 오랫동안 앓던 사람을 치료하는 상황은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응급 상황과 그렇지 않은 치료를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두 경우를 다르게 판단할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바로 그 구분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는가를 묻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쉼과 회복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에 예외 하나를 추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해석할 때 고통받는 사람의 생명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이 말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14:6 · 두루새김

처음에는 예수님의 질문에 침묵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설명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은 병에서 나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동에서 문제를 찾으려 할 때, 예수님은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고치신 뒤 식탁에서 벌어지는 다른 일을 눈여겨보기 시작하십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서로 어디에 앉으려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사람의 병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몸에 체액이 비정상적으로 쌓여 붓는 상태를 가리키는 고대 의학 용어로, 전통적으로 수종(水腫)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몸이 붓는 병」으로 옮겼습니다. 오늘날의 의학 용어로는 부종과 연결되지만, 이 표현만으로 정확한 원인 질환까지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끝자리에 앉는가

누가복음 14:7–11 본문 →

예수께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골라 잡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누가복음 14:7 · 두루새김

이 장의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살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식사 자리에는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특히 격식을 갖춘 식사에서는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는가가 그 사람에게 주어진 명예와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자신보다 더 귀한 손님이 나중에 들어옵니다. 집주인이 자리를 내주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맨 끝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스스로 선택한 자리가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초대받으면 가서 맨 끝자리를 잡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친구여, 더 높은 자리로 올라오세요』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너는 함께 식사하는 모든 사람 앞에서 존중받게 될 것이다.」누가복음 14:10 · 두루새김

9절에서 맨 끝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나 차지하는 자리입니다. 10절에서 맨 끝자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같은 자리이지만 그곳에 도달하는 길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높이려다가 낮아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낮추었고, 집주인에게서 높은 자리로 초대받습니다.

이 장면은 잠언 25:6–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서지 말라고, 높은 사람 앞에서 내려오라는 말을 듣기보다 올라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낫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맨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집주인이 높은 자리로 불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영리한 방법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큰 명예를 얻으려는 전략이 됩니다. 비유만 떼어 놓고 보면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이 비유의 의미를 더 넓혀 줍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누구나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누가복음 14:11 · 두루새김

예수님은 식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을 인간의 자기 높임과 낮아짐에 관한 더 큰 원칙으로 연결하십니다. 「낮아지고」(ταπεινόω)와 「높아질 것이다」(ὑψόω)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모두 수동형입니다. 누가 그 일을 행하는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전체의 흐름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지위를 뒤집으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누가복음 1:52에서 하나님이 권세 있는 사람들을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리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셨다고 찬양했습니다. 그 선언이 이제 한 식탁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펼쳐집니다.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다른 사람 앞에서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는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경쟁에서 한발 벗어나,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높이려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손님들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뒤, 예수님은 그 잔치를 마련한 집주인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애초에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가?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십시오

누가복음 14:12–14 본문 →

예수께서는 자신을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점심이나 저녁을 차릴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들이 너를 다시 초대해서 네가 보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라.」누가복음 14:12 · 두루새김

친구나 가족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예수님은 친척과 친구들과의 식사를 금지하는 규칙을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초대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시 초대해서」 보답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식사 초대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면 관계가 더 굳어질 수 있었고, 비슷한 초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명예도 확인받을 수 있었습니다. 식사는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 호의를 돌려받는 관계망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를 사랑하여 대접하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제 삼으시는 것은 초대하는 기준이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으로 결정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기준으로 잔치를 열면 부유한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앞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초대받습니다. 초대받기 어려운 사람들은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들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잔치를 열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누가복음 14:13 · 두루새김

네 부류 모두 당시의 식사 관계에서 경제적·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장애가 있는 모든 사람이 가난했다거나 사회에서 완전히 밀려났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한데 묶으신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네게 보답할 수 없으니 너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의로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4:14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들이 특별히 선하거나 경건하기 때문에 초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점이 예수님이 권하시는 잔치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식탁은 사람들이 서로의 지위를 확인하고 호의를 교환하는 자리가 아니라, 보답할 능력과 무관하게 사람을 맞아들이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을 대하는 기준을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돌려줄 수 있는가에서, 그 사람이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로 옮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보답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다시 보답을 말씀하십니다. 모순일까요?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누구에게 보답을 기대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그 호의를 갚아야 한다는 부담을 지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보답은 하나님의 미래에 맡겨집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때」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의로운 사람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실 것이라는 유대교의 부활 소망과 연결됩니다. 다니엘 12:2–3에서도 죽은 이들의 부활과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받을 보답을 계산하여 더 많은 이익을 쌓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내게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도 마음껏 대접할 수 있는 이유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삶을 기억하신다면, 모든 호의를 인간 사이에서 즉시 계산하여 주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베푸는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보답할지 계속 따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받는 사람도 자유롭게 합니다. 자신이 갚을 수 없는 호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매여 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자, 식탁에 있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합니다.

잔치를 마련했는데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4:15–24 본문 →

함께 식사하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누가복음 14:15 · 두루새김

그의 말 자체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누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25:6–8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마련하시고 죽음을 없애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질문을 바꾸십니다. 누가 그 잔치에 들어가서 복을 누릴 것인가보다 먼저,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큰 저녁 잔치를 마련하고 많은 사람을 초대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잔치 시간이 되자 주인은 종을 보냅니다.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전하게 했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세요.』」누가복음 14:17 · 두루새김

그들은 이미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잔치가 준비되었을 때 벌어집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같이 거절하기 시작했다. 첫 사람이 종에게 말했다. 『밭을 샀는데 가서 봐야 해요. 가지 못하는 걸 이해해 주세요.』」누가복음 14:18 · 두루새김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쌍을 샀으므로 시험 삼아 일을 시켜 보러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결혼했으므로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땅, 생산과 노동에 필요한 가축, 결혼 — 모두 일상적인 삶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밭을 사는 일이 죄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소에게 일을 시켜 보는 일이나 결혼하는 일 자체를 비난하지도 않으십니다. 문제는 그 일들이 잔치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그들의 숨은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른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집주인을 일부러 무시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이미 준비된 잔치보다 자신들의 현재 일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세요.」 손님들이 직접 음식을 마련해야 하는 것도, 장소를 준비해야 하는 것도, 비용을 나누어 부담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잔치에 오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지 않습니다.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잔치를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한 재산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초대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이 복되다고 말했던 손님에게도 이 비유는 불편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얼마나 복된지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 나라가 다가왔을 때 응답하는 것은 같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리로 종을 보내는 주인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거절하자 주인은 화가 납니다. 그렇다면 잔치는 취소될까요? 주인은 음식을 모두 치우고 문을 닫아 버릴까요?

그런데 주인은 전혀 다른 명령을 내립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화를 내며 종에게 말했다. 『어서 도시의 큰길과 골목으로 나가라. 가난한 사람들,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와라.』」누가복음 14:21 · 두루새김

13절에서 예수님은 잔치를 열 때 바로 이런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비유 속 주인이 그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잔치를 베풀어야 하는지 가르치신 뒤,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잔치의 주인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초대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마련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이 돌아와서 말합니다.

「종이 말했다. 『주인님, 시키신 대로 했어요. 그런데 아직 자리가 남아 있어요.』」누가복음 14:22 · 두루새김

주인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했다. 『길과 울타리 곁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해라. 내 집을 가득 채워라.』」누가복음 14:23 · 두루새김

초대가 도시의 큰길과 골목을 넘어 도시 바깥의 길로 넓어집니다. 주인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잔치를 포기하지 않고, 한 무리를 데려왔는데도 자리가 남아 있으니 다시 사람을 찾으러 보냅니다. 그의 집에는 아직 더 많은 사람을 맞아들일 자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도시 바깥의 사람들을 이방인과 연결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에서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여러 민족에게 전해지는 흐름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미 있는 연결입니다. 다만 비유 자체가 도시의 사람들은 유대인이고 바깥의 사람들은 이방인이라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첫 초대의 거절을 유대 민족 전체의 거절로, 나중의 초대를 유대인 전체를 대신한 이방인의 초대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라는 말의 의미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해라」에 쓰인 그리스어 동사 아낭카조(ἀναγκάζω)에는 강제하다, 압박하다, 반드시 하게 만들다라는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문맥에서는 힘이나 위협으로 강요하는 일을 나타낼 수도 있으므로, 원어가 본래 단지 정중하게 초대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인은 사람들을 재판하거나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잔치에 데려오기 위해 종을 보냈습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초대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거듭 권하고 강하게 설득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단어 자체에서 강제의 가능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앞뒤 상황에 근거해 어떤 의미가 적절한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후대에 다른 종교로 바꾸도록 강요하거나 종교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명령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잔치 비유를 넘어서는 적용입니다.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유의 마지막은 엄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4:24 · 두루새김

이 말은 비유 속 집주인이 계속 하는 말로도, 예수님이 비유를 마치고 듣는 사람들에게 직접 하시는 선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처음 초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잔치가 준비되지 않아서 참여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거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지를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답해야 할 필요까지 없애지는 않으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큰 잔치에서는 미리 초대하고, 음식이 준비되었을 때 다시 사람을 보내 참석하도록 알리는 방식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초대한 일(16절)과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알리는 일(17절)은 서로 다른 단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내 잔치 음식」은 집주인의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와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너희」는 예수님이 듣는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형식처럼 들립니다. 원문에 이 둘을 구분하는 명확한 표시가 없어 양쪽 읽기가 가능합니다. 또 구약에서 신명기 16:11–14는 절기를 기뻐할 때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도 함께 기뻐하도록 명령하고, 이사야 25:6–8에서는 하나님이 여러 민족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이 본문들은 각각 이스라엘의 절기 생활과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소망이라는 고유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누가복음 14장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식탁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씀

누가복음 14:25–27 본문 →

많은 무리가 예수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4:25 · 두루새김

여기서 장면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식탁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침을 듣고 싶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고만 기록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십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가족보다 자신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기라고 돌려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워하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 쓰인 그리스어 동사는 일반적으로 미워하다, 증오하다라는 뜻이므로, 본문의 강한 표현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랑과 미움을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선택하는지 나타내는 서로 반대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0:37에 나오는 같은 뜻의 말씀은 예수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미워하지 않으면」은 가족에 대한 악의나 증오를 명령한다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다른 모든 관계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뜻을 강하게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가족을 사랑하되 예수님을 조금 더 사랑하라는 부드러운 권면으로 줄여서도 안 됩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매우 강한 표현을 남겨 두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실제로 가족관계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가족은 생계와 재산, 사회적 지위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었습니다. 가족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마음의 갈등만이 아니라 삶에서 실제 손실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가능성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표현은 자신을 해치거나 자신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자신의 안전과 생존마저 무조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놓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온다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7 · 두루새김

오늘날 사람들은 십자가를 흔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던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먼저 로마의 처형 도구였습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수가 공개적으로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형벌이었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습은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사람의 모습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불편한 일을 참고 살아가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일이 극심한 수치와 박해, 심지어 죽음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무관한 고난을 찾아다니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9:22). 자신은 안전한 곳에 머무시면서 제자들에게만 희생을 요구하시는 스승이 아니십니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시면서, 자신이 먼저 걸어가고 계신 길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보통의 스승이라면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과 예수님 자신에게 삶을 맡기는 일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9:30–31이 좋은 예입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고, 이어서 본문은 하나님이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 대목에 「미움받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앞뒤 내용은 야곱이 레아를 감정적으로 증오했다는 뜻보다, 라헬에 비해 레아가 덜 사랑받고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끝까지 지을 수 있는가, 끝까지 싸울 수 있는가

누가복음 14:28–33 본문 →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요구를 말씀하신 다음 두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첫 번째는 탑을 지으려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전쟁을 하려는 왕입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두 사람 모두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앉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계산해야 합니다.

기초만 놓고 끝내지 못한 탑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지으려 한다면, 먼저 앉아서 끝까지 지을 돈이 있는지 비용을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4:28 · 두루새김

계산하지 않으면 기초는 놓았지만 끝까지 짓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사람은 짓기 시작하더니 끝내 다 짓지 못했네!」 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일보다 끝까지 짓는 일입니다.

무리와 함께 걸어가는 것은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따라가는 일은 마음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뜨거운 마음이 끝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큰 열정만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자신을 따르는 일이 어떤 선택인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만 명으로 이만 명을 상대하는 왕

「또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싸우러 가면서 먼저 앉아 따져 보지 않겠느냐? 군사 만 명으로, 이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왕에게 맞설 수 있을지 말이다.」누가복음 14:31 · 두루새김

상대방이 두 배입니다.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하면 이 왕은 상대 왕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사람들을 보내 평화를 청할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는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낼 능력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두 비유를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라는 일반적인 세상살이의 지혜로만 읽으면 마지막 문장이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33 · 두루새김

탑 비유만 생각하면 제자가 되기 위해 충분한 돈이나 필요한 것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더 많은 것을 마련하라는 말이 아니라,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탑을 지으려는 사람은 끝까지 짓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계산합니다. 전쟁을 앞둔 왕은 자신의 군사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예수님의 부르심보다 앞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진 것을 다 포기한다는 것

「포기하지 않으면」의 ‘포기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아포탓소마이(ἀποτάσσομαι)입니다. 이 단어는 작별하다, 떠나보내다, 관계를 끊고 떠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누가복음 9:61에서는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겠다는 말에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제자가 재산을 전부 처분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여기에는 실제로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실제로 가진 것을 떠나보내고 공동체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삶이 요구된다고 읽습니다. 사도행전 2:44–45와 4:32–35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가진 것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 이 읽기와 연결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의 규칙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권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18:22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부유한 지도자에게 모두 팔라고 요구하셨지만, 19:1–10에서는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겠다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본문들을 함께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에서 정확히 같은 재산 처분 방식을 요구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14:33의 강한 명령을 마음속으로만 가진 것을 포기하면 된다는 말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가진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의 삶에서 가진 것은 더 이상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사용될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실제로 떠나보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장의 앞부분을 다시 보게 합니다.

큰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과 소와 결혼을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밭도, 소도, 가족도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보다 우선한다면 결국 예수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될 수 있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무엇이 문제인가

누가복음 14:34–35 본문 →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삶에 관한 긴 가르침을 소금에 관한 짧은 말씀으로 끝내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마저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누가복음 14:34 · 두루새김

갑자기 왜 소금을 말씀하실까요? 원문에서는 이 말씀을 「그러므로」(οὖν)라는 말로 앞의 가르침과 연결합니다. 두루새김에는 이 연결어가 드러나 있지 않지만, 가족과 자기 목숨과 가진 것보다 예수님을 우선해야 한다는 말씀과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쓸모가 있습니다. 그 특성을 잃는다면 더 이상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도 제자에게 꼭 필요한 충성을 잃어버린다면, 겉으로 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땅에도 거름 더미에도 쓸모가 없어 밖에 내버린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누가복음 14:35 · 두루새김

맛을 잃은 소금은 다른 무엇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소금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소금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더 많은 사람이 따라오게 하는 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들은 말씀을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받아들이라는 요청입니다.

조금 더 깊이

순수한 염화나트륨은 일반적인 조건에서 짠맛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소금에 다른 광물질이나 불순물이 섞여 있어, 소금 성분이 빠져나간 뒤 쓸모없는 물질이 남는 현상을 가리켰을 수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소금이 짠맛을 잃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극단적인 비유라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떤 소금의 상태를 염두에 두셨는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비유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5:13은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맛을 잃은 소금이 밖에 버려져 짓밟힌다고 기록하는 반면,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포기와 헌신에 관한 말씀 뒤에 소금을 두어 제자가 자기 역할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 — 자리를 내어 주시는 분,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시는 분

누가복음 14:1–35 본문 →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줄곧 사람들을 식탁으로 데려가십니다. 잔치의 주인은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도시의 큰길과 골목으로, 다시 길과 울타리 곁으로 종을 보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돌려줄 수 있는 사람들만을 초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초대가 아무런 응답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자격과 능력으로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참여하는 일은 이전에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의 순서를 그대로 유지해도 되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값없이 초대하시지만, 자신을 따르는 삶이 값싼 일이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포기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반갑게 맞아들이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높은 자리를 포기하면 다른 사람이 앉을 자리가 생깁니다.

보답받을 권리를 내려놓으면 보답할 수 없는 사람과 식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의 절대적인 권리로 붙잡지 않으면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포기가 자동으로 사랑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가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관계와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14장은 화려한 잔치의 장면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 위에서, 소금에 관한 짧은 비유로 끝납니다. 그들은 누가 초대받는지,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길 위에는 여전히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서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계속 예수님을 따라갈 것인지가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