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잃었던 사람을 찾은 기쁨에 함께하기

누가복음 15장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불평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 주고 함께 밥까지 먹는군.」누가복음 15:2 · 두루새김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지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맞아 주시고 함께 밥을 먹으신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왜 그런 사람들과 밥을 먹으시는지 직접 설명하시는 대신,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 하나를 찾으려고 집 안을 뒤지는 여자의 이야기, 그리고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세 이야기에는 같은 장면이 반복됩니다. 무엇인가를 잃고, 그것을 되찾고,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에는 뜻밖의 변화가 있습니다.

잃었던 아들이 돌아와 잔치가 벌어졌는데, 다른 아들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 이야기는 집을 떠난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오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하지 못하는 또 다른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을까요?

이 장의 첫머리로 돌아가면 이유가 보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는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맞아 주신다고 불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묻고 계신 셈입니다.

잃었던 사람을 다시 찾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너희는 왜 그 기쁨에 함께하지 못합니까?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15장 본문 읽기 →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 한 마리를 찾다

누가복음 15:1–7 본문 →

누가는 먼저 두 무리를 보여 줍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5:1 · 두루새김

세리는 로마의 지배 아래 세금을 걷는 일에 관여하던 사람들로, 부정직하게 세금을 걷는 일과 연결되어 비난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인」도 하나의 직업이나 신분이 아니라, 종교적·도덕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던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요구하거나 시험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으려고 다가왔다고 기록합니다.

반대편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죄를 심각하게 여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죄와 회개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맞아 주시는 일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불평에 대답하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는 얼마나 중요한가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다가 한 마리를 잃었다고 하자. 그러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남겨 두고,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5: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는 듯이 물으십니다. 하지만 이 행동이 그렇게 당연하지만은 않습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는데 목자는 그들을 광야에 남겨 두고 한 마리를 찾아갑니다. 돈과 손익만 따져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본문은 아흔아홉 마리에게 어떤 위험이 있었는지, 다른 목자가 돌보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를 찾는 일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찾을 때까지」 찾아다닙니다.

얼마 동안 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찾는 일을 언제 멈추는지가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잃었다」라는 말이 이야기 전체를 묶습니다. 이 동사의 그리스어 어근은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로, 문맥에 따라 잃다, 멸망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양을 잃습니다.

동전을 잃습니다.

아들을 잃습니다.

그리고 잃었던 것을 다시 찾습니다.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메는 이유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누가복음 15:5 · 두루새김

본문은 양이 다쳤는지, 지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표현은 「기뻐하며」입니다. 양을 메고 돌아오는 일이 고되었을 수 있지만, 목자는 그 양을 짐스럽게 여기지 않고 되찾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세요. 잃었던 내 양을 찾았어요.』」누가복음 15:6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이 양을 얼마나 힘들게 찾았는지 자랑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를 잃었던 실수를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으니 함께 기뻐하자고 말할 뿐입니다.

목자의 이야기는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양을 되찾은 목자가 기뻐하는 것은 이해하면서, 하나님이 잃었던 사람을 되찾으시는 일은 왜 기뻐하지 못합니까?

아흔아홉 의인에게는 회개가 필요 없을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아홉을 두고 기뻐하는 것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크게 기뻐할 것이다.」누가복음 15:7 · 두루새김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아홉이 실제로 있다는 말일까요? 여기서 읽기가 갈립니다. 한쪽은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 한 사람에게 특별한 기쁨이 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다른 쪽은 이 표현이 반어적이라고 봅니다. 스스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예수님을 비판하던 사람들의 태도를 겨냥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상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는 의로운 삶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태도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8:9–14). 그러나 예수님의 핵심은 누가 얼마나 의로운지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양은 목자에게 잘못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회개하는 죄인의 기쁨과 연결하십니다. 그러니 양의 행동 하나하나를 회개 과정과 맞추어 보기보다, 목자의 행동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일과 떨어져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죄인이 돌아오는 일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18:12–14의 병행 비유는 양이 헤매는 모습을 중심으로, 작은 사람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설명합니다. 누가복음은 「잃었다」를 중심에 둡니다. 또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 않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꾸짖으시고(34:4), 자신이 직접 양들을 찾고 돌보겠다고 말씀하십니다(34:11–16). 예수님께서 그 본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으시지만,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은 그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실제로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들이시는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잃었던 사람을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그들 가운데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집 안에서 잃어버린 은전 한 닢

누가복음 15:8–10 본문 →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번에는 목자가 아니라 한 여자입니다.

「또 어떤 여자가 드라크마 동전 열 개를 가지고 있다가 하나를 잃었다고 하자. 그러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5:8 · 두루새김

구조는 첫 번째 비유와 거의 같지만 장소와 물건이 달라집니다. 양은 광야에서, 동전은 집 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양을 찾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동전을 찾으려면 집 안을 꼼꼼하게 살펴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의 처지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찾는 사람의 태도는 같습니다.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드라크마 한 닢의 무게

열 개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자의 손실이 작지 않았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고, 샅샅이 뒤집니다. 목자는 넓은 광야를, 여자는 작은 집 안을 살피지만, 두 사람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는 데 할 수 있는 일을 다합니다.

동전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전을 찾는 여자의 행동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의 기쁨과 연결하십니다. 그래서 비유 전체를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돌아오는가에 관한 설명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동전의 비유는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속이 아니라, 그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과 찾았을 때의 기쁨을 보여 줍니다.

누가 기뻐하는가?

「동전을 찾으면 친구로 지내는 여자들과 이웃 여자들을 불러 모아 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세요. 잃었던 드라크마 동전을 찾았어요.』」누가복음 15:9 · 두루새김

목자가 했던 말과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찾았다는 기쁨을 혼자 간직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기쁨이 있다.」누가복음 15:10 · 두루새김

원문은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하기보다 기쁨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기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천사들도 그 기쁨에 참여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제 질문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받아 주실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분이 이미 기뻐하시는 일을 사람들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이 질문이 훨씬 어려워집니다.

양이 떠나려는 뜻을 가지고 행동했다고 설명되지 않고, 동전은 스스로 무엇을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이야기의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재산을 받아 먼 곳으로 가서 그것을 마구 써 버립니다. 그런 사람도 다시 찾았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드라크마는 그리스계 은화의 단위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실제로 살 수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돈이 결혼 장식품에 달린 동전이었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문은 그 용도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누가복음 15:11–16 본문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누가복음 15:11 · 두루새김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집 나간 작은아들의 비유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들이 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에서는 작은아들이 중심에 있지만, 뒤에서는 큰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 제게 돌아올 몫을 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누가복음 15:12 · 두루새김

아직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물려줄 재산을 미리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 행동을 사실상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행위로 해석하기도 하며, 당시 관습을 생각하면 심각한 무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설명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실제로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보다 자기 몫을 먼저 차지하는 일을 원했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만 재산을 준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기서 「재산」(βίος)으로 옮긴 낱말은 생명이나 삶, 먹고살 수단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가족이 살아가는 바탕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큰아들이 등장할 때 중요해집니다. 그가 자기 몫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고 아버지가 여전히 집안일을 이끌고 있지만, 큰아들도 이미 자기 몫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내 것은 모두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해하는 단서입니다.

먼 지방으로 떠난 아들

「며칠 뒤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 먼 지방으로 떠났다. 거기서 흥청망청 살며 재산을 마구 써 버렸다.」누가복음 15:13 · 두루새김

「먼 지방」은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작은아들은 이제 자기 재산으로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그의 마음속이 어땠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누가가 분명히 기록하는 것은 그가 절제 없이 살며 재산을 마구 써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작은아들이 창녀들과 어울려 재산을 썼다고 흔히 설명하지만, 13절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나중에 등장하는 큰아들입니다(15:30). 이 차이를 기억하면 뒤에서 큰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동생을 바라보는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진 것이 사라지자 사람들도 사라졌다

작은아들이 재산을 모두 써 버린 뒤 그 지방 전체에 먹을 것이 몹시 부족해집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재산을 잃은 일과, 그의 잘못 때문이라고 본문이 말하지 않는 먹을거리 부족이 겹칩니다. 그에게는 그 어려움을 견딜 재산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지방 사람에게 의지해 돼지를 돌보게 됩니다. 레위기 11:7–8에서 돼지는 먹지 말아야 할 부정한 동물이므로, 유대인 청중에게 이 일은 특히 비참한 처지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누가복음 15:16 · 두루새김

처음에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먹을 것을 스스로 마련할 능력조차 없습니다. 더욱 슬픈 것은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재산도 없고, 자신을 돌보아 줄 관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굶주림 가운데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1:17에 따르면 맏아들은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몫을 받았습니다. 이 규정대로라면 큰아들은 두 몫, 작은아들은 한 몫을 받는 셈이지만, 비유가 그 비율대로 나누었다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흥청망청 살며」로 옮긴 말은 절제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쥐엄나무 열매는 지중해 지역에서 자라는 캐럽나무의 꼬투리 열매로 이해되며, 사람도 먹을 수 있었지만 가축의 먹이로도 쓰였습니다.

배가 고파서 돌아가려는 것 아닐까요?

누가복음 15:17–20 본문 →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빵이 넉넉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어 가는구나!』」누가복음 15:17 · 두루새김

이 장면은 흔히 작은아들이 회개하는 순간으로 설명됩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버지의 아픈 마음이 아니라 먹을거리입니다. 그는 배가 고프고, 아버지의 집에 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한 회개일까요? 해석이 갈립니다. 한쪽은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가기로 했으므로 진정한 회개의 시작으로 봅니다. 다른 쪽은 그의 결심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현실적인 계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그는 죄를 고백할 말을 준비하지만 첫 동기는 굶주림으로 나타나고, 마지막 비유에는 앞의 두 비유와 달리 「회개」라는 낱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동기가 얼마나 순수했는지 최종 판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하고,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돌아가기 전에 준비한 말

「『일어나 아버지께 가야겠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씀드리고,』」누가복음 15:18 · 두루새김

「하늘」은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대신 경건하게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에 대한 잘못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도 죄를 지었다고 인정합니다. 재산 관리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저버린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 가운데 하나로 써 달라고 해야겠다.』」누가복음 15:19 · 두루새김

품꾼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들의 신분으로 재산을 요구했던 사람이 이제는 품꾼이 되어 먹고살기를 원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가 있지만, 동시에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되찾을지 스스로 계산하고 있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보았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직 멀리 있는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몹시 가엾게 여겼다.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추었다.」누가복음 15:20 · 두루새김

아들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봅니다. 그리고 달려갑니다.

아들이 죄를 고백하기 전에 아버지는 그를 가엾게 여기셨고, 그에게 달려가셨습니다. 물론 아들은 이미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환영은 아들의 고백을 듣고 진심인지 살핀 뒤에야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몹시 가엾게 여겼다」로 옮긴 말은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로, 몸속 깊은 곳에서 느끼는 강한 감정과 연결된 표현입니다. 누가에게 이 마음은 마음속 감정에 머물지 않고 상대에게 다가가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에게 거리를 두지 않습니다. 잘못을 따져 묻기 위해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같은 동사가 누가복음 7:13에서 예수님께서 외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실 때, 10:33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볼 때 쓰입니다. 세 장면 모두 그 마음이 위로하고 돌보고 끌어안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거듭 입을 맞추었다」로 옮긴 동사는 강하게 또는 애정을 담아 입 맞추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당시 나이 든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달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모든 존경받는 아버지가 절대로 뛰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호세아 11장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녀처럼 돌보셨지만 멀어진 이스라엘을 향해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 비유를 직접 예고한 말씀은 아니지만, 자녀의 배반과 그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주제에서 깊이 이어집니다.

품꾼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들로 맞아들여지다

누가복음 15:21–24 본문 →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어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요.』」누가복음 15:21 · 두루새김

18–19절에서 준비한 말은 세 가지였습니다. 죄를 지었다는 고백,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인정, 품꾼으로 써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앞에서 말한 것은 앞의 두 가지뿐입니다.

왜 마지막 요청은 나오지 않았을까요? 아버지가 말을 중간에 끊었다는 읽기도, 아버지의 환대를 경험한 아들이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확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누가가 두 말을 다르게 기록했고, 아버지가 그에게 품꾼으로 일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했다. 『어서 가장 좋은 긴 옷을 가져다 입혀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발에 신발을 신겨라.』」누가복음 15:22 · 두루새김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부터 바꿉니다. 본문은 반지의 구체적인 기능을 말하지 않지만, 옷과 반지와 신발이 아들을 귀하게 대하고 반갑게 맞아 주는 표시라는 사실은 문맥에서 분명합니다. 그는 먹을 것을 얻으러 온 품꾼이 아니라 가족의 한 사람으로 환대받습니다.

작은아들은 품꾼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아들로 맞이합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여는 이유

「『살찌워 둔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함께 먹으며 즐기자.』」누가복음 15:23 · 두루새김

살찌워 둔 송아지는 일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특별한 잔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들이 재산을 되찾아 왔기 때문도, 손해를 갚겠다고 약속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버지가 직접 이유를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잔치를 즐기기 시작했다.」누가복음 15:24 · 두루새김

처음 두 비유의 말이 다시 돌아옵니다. 잃었던 것을 찾았고, 그래서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이나 동전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실제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지고 사라졌던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재산은 실제로 사라졌고, 작은아들의 잘못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환영은 그 잘못이 사소해서가 아니라, 그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되찾은 기쁨이 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장 첫머리의 불평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왜 죄인들을 맞아 주시고 함께 드십니까? 잃었던 사람이 돌아왔고,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목자는 친구들을, 여자는 이웃들을 불러 함께 기뻐했습니다. 아버지도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함께 기뻐할까요?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잔치 밖에 선 아들

누가복음 15:25–30 본문 →

「그때 큰아들은 밭에 있었다. 돌아와 집에 가까이 이르자 음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다.」누가복음 15:25 · 두루새김

큰아들은 동생처럼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머물며 자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묻지 않고, 밖에서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 알아봅니다. 아직 무슨 일인지 몰랐으니 적대감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누가는 이 작은 장면으로 큰아들이 집 안의 기쁨과 떨어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종이 대답했다. 『동생분이 돌아왔어요. 아버님이 아들을 건강한 모습으로 되찾으셔서 살찌워 둔 송아지를 잡으셨어요.』」누가복음 15:27 · 두루새김

이 대답에는 아무 비난이 없습니다.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줄 뿐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 그에게 들어오라고 간청했다.」누가복음 15:28 · 두루새김

아버지가 다시 나옵니다. 이번에는 달려가지 않고 간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한 번 명령하고 돌아선 것이 아니라, 큰아들을 설득하려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처음에 집을 떠났던 아들은 집 안에 있습니다. 한 번도 집을 떠나지 않았던 아들은 집 밖에 서 있습니다.

큰아들의 불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보세요.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종처럼 일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어요.』」누가복음 15:29 · 두루새김

큰아들이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고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오랫동안 일했고, 본문도 그를 밭에서 돌아오는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재산을 다 써 버린 동생을 위해 송아지를 잡은 일이 그에게는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사람이 실제로 고민하는 공정성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아들의 입을 통해 그 불만을 충분히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큰아들은 악하고 작은아들은 선하다는 결론으로 서둘러 가서는 안 됩니다. 작은아들의 잘못은 심각했고, 큰아들의 오랜 수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들인데 왜 종처럼 일했다고 말할까?

29절의 「종처럼 일했고」(δουλεύω)는 노예로 섬긴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세월을 종처럼 일한 시간으로 설명하고, 그에 맞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합니다. 그의 말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주인과 일꾼의 관계처럼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아들이면서 품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들이면서 자신을 종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작은아들에게는 먹고살 자리가, 큰아들에게는 성실함에 맞는 인정과 보상이 필요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집에서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대하고 계십니다.

큰아들은 동생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 버린 아버지의 이 아들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 살찌워 둔 송아지를 잡으셨어요!』」누가복음 15:30 · 두루새김

첫째, 창녀들과 어울렸다는 말은 이야기 자체가 알려 준 사실이 아니라 큰아들의 주장입니다. 그가 실제로 알고 있었는지, 분노와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둘째, 큰아들은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와 동생의 관계는 인정하면서 자신과 동생의 관계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의 분노는 송아지 한 마리의 문제가 아니라, 돌아온 동생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모두 잘못 이해했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맞아들이시는 일을 기뻐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큰아들도 동생을 비판할 근거는 있지만, 아버지가 그 아들을 다시 얻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지 못하고, 그 분노 때문에 자신도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8절의 「간청했다」는 원문에서 미완료 시제로, 아버지의 간청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내 아들」에서 「이 네 동생」으로

누가복음 15:31–32 본문 →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은 모두 네 것이다.』」누가복음 15:31 · 두루새김

아버지는 꾸짖는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얘야」는 자녀를 가리키는 말로, 아들에게 친근하게 건네는 부름입니다. 큰아들은 자신이 종처럼 일했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자녀라고 부릅니다.

큰아들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지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몫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작은아들이 돌아왔으니 그 몫을 다시 빼앗아 나누겠다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동생을 맞아 주는 일이 자기 몫을 빼앗는 일처럼 느껴졌을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그를 밀어내고 동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아들로 대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바꾸어 놓은 한마디

「『하지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되찾은 동생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5:32 · 두루새김

24절의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지만, 하나가 바뀌었습니다. 「이 내 아들」이 「이 네 동생」이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동생을 「아버지의 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네 동생」이라고 부르십니다. 큰아들이 자신의 말에서 지워 버린 관계를 아버지가 되돌려 놓으십니다. 돌아온 사람은 아버지의 아들일 뿐 아니라 큰아들의 동생입니다.

「마땅했다」(δέω)로 옮긴 동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반드시 하셔야 할 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일을 말할 때 자주 쓰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잔치를 벌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돌아온 아들을 두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큰아들은 무엇이 공정한지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실을 보라고 하십니다. 죽었던 동생이 살아났고, 잃었던 동생을 되찾았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잘못이 사라졌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잘못을 기억하는 일이 아들이 돌아온 기쁨을 영원히 막아서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다시 살아났고」와 32절의 「살아났고」는 원문에서도 조금 다른 형태의 동사이지만, 둘 다 잃었던 아들이 다시 삶 가운데 돌아왔다는 뜻을 전하며, 이 차이만으로 서로 다른 신학적 사건을 설명한다고 볼 근거는 부족합니다.

두 아들을 모두 찾아 나서는 아버지

누가복음 15:1–32 본문 →

아버지는 작은아들만 맞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큰아들에게도 나가십니다.

작은아들이 멀리 있을 때 아버지는 달려갔고, 큰아들이 들어오려 하지 않을 때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비유를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로 읽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짜임을 보면 설득력이 있지만, 본문이 큰아들을 직접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가 집 밖에 서 있고 아버지가 나와 간청한다는 사실로 관계에서 멀어져 있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작은아들은 말씀을 들으려고 다가온 죄인들을, 큰아들은 그들을 맞아들이는 일을 불평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 비유를 모든 바리새파 사람은 큰아들이고 모든 세리는 작은아들이라는 고정된 구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문제 삼는 것은 집단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에 대한 사람의 반응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두 아들의 모습이 서로 다른 때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죄를 하찮게 만드는 기쁨도 아닙니다. 작은아들은 실제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아버지의 환영도 그가 재산을 다 써 버리지 않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다만 그 잘못이 한 사람의 남은 삶과 모든 관계를 영원히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은 때로 잃었던 사람 자신보다 그를 맞아들이는 사람에게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려움까지 다루십니다. 장 첫머리에서 불평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맞아들이시는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잃었던 사람을 되찾으시는 일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보여 주시고, 이미 집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에 함께하자고 요청하십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큰아들이 잔치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큰아들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였을까요, 끝내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 열린 결말 덕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에게는 아직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 속 큰아들의 선택을 우리가 대신 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되찾은 동생이기 때문이다」입니다. 집 안에서는 이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음악이 들리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 밖에는 아직 아버지와 큰아들이 서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그 문밖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