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재물이 사라질 때 남는 것
누가복음 16장에는 두 부자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부자는 자기 재산을 관리하던 사람을 해고하려고 합니다. 관리인은 직장을 잃고 나면 자신을 맞아 줄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줄여 줍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의 주인은 그 행동을 칭찬합니다.
두 번째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아갑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온몸이 헐어 상처투성이인 가난한 사람이 누워 있지만, 부자는 자기 재산을 그 사람과 나누지 않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고, 부자는 고통 가운데서 자신이 외면했던 그 사람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나란히 놓으면 이 장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지금 가진 재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재물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무엇이 남는가?
예수님은 재물에 관한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 대신 매우 불편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정직하지 못한 관리인이 칭찬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 뒤에서 예수님은 작은 일에도 믿을 만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어떻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철저히 믿을 만한 태도를 요구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따라가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재물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다릅니다. 재물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것과 재물을 삶의 주인으로 삼는 것도 다릅니다.
의롭지 않은 관리인이 왜 칭찬받았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주인에게 고발했다.」누가복음 16:1 · 두루새김
당시 큰 재산을 가진 사람은 토지와 생산물, 빚 받을 권리 등을 직접 관리하기보다 관리인을 세워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관리인은 소유자는 아니지만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낭비한다」(διασκορπίζω)로 옮긴 동사는 흩어 버리거나 낭비한다는 뜻으로, 바로 앞 장에서 작은아들이 자기 재산을 탕진하는 장면에도 쓰였습니다(15:13). 한 사람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은 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주인의 재산을 맡은 관리인이지만, 두 사람 모두 재산을 낭비했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다만 작은아들이 재산을 탕진했다는 것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직접 알려 준 사실인 반면, 이 관리인에 대해서는 본문이 누군가가 그를 고발했다고만 기록합니다. 고발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보고하라고 요구하며 더는 관리인으로 일할 수 없다고 알립니다.
무엇을 할까?
「관리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이 나에게서 관리하는 일을 빼앗으니 이제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하자니 부끄럽다.』」누가복음 16:3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새롭게 살아갈 방법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12:17의 부자가 떠오릅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둔 그 부자의 물음과 관리인의 「무엇을 할까?」는 원문에서 같은 표현입니다. 그 부자는 더 큰 곳간을 짓기로 했습니다. 반면 이 관리인은 자신을 맞아 줄 사람들을 만들기로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다. 관리인 자리에서 물러나면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에 맞아 주도록 해야지.』」누가복음 16:4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이 영원히 관리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직 권한이 남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재산을 관리할 권한은 잃어버릴 수 있지만, 자신을 도울 사람들과의 관계는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기름은 절반, 밀은 오분의 일
첫 번째 사람은 기름 백 바토스를 빚졌고, 관리인은 빚 문서를 고쳐 오십이라고 쓰게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밀 백 코로스를 빚졌고, 관리인은 팔십이라고 쓰게 합니다. 기름은 절반이, 밀은 오분의 일이 줄었습니다.
왜 줄여 준 비율이 다른지, 줄어든 금액이 무엇이었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또다시 부당하게 썼다는 읽기, 빚 문서에 붙은 이자를 없앴다는 읽기, 자기 몫의 수수료를 포기했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관리인의 행동이 부정인지 아닌지가 달라지지만, 어느 하나를 확정된 역사적 사실처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빚을 줄여 준 사람들이 자신을 집으로 맞아들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남아 있는 권한을 미래의 관계를 만드는 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뜻밖의 반응이 나옵니다.
「주인은 그 정직하지 못한 관리인이 영리하게 행동했다고 칭찬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6:8 · 두루새김
주인은 무엇을 칭찬했는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관리인이 또다시 주인의 빚 문서를 고쳤는데, 어떻게 주인이 그를 칭찬할 수 있습니까?
칭찬의 대상은 정직함이 아니라 「영리하게 행동했다」는 점입니다. 「영리하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프로니모스(φρόνιμος)는 상황을 살펴 판단하고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뜻이며, 그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리하게 행동하면서도 정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아직 쓸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때 행동하여 미래를 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행동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 준 진지함과 영리함에 주목하게 하십니다.
8절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읽기가 갈립니다. 앞에서 계속 주인이라고 불린 인물이 있었으므로 비유 속 부유한 주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여기서부터 비유 바깥의 예수님의 평가가 시작된다고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관리인이 칭찬받은 이유가 옳아서가 아니라 영리해서라는 점은 같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이익을 위해 상황을 살피고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해 그만큼 진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이 영원한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조금 더 깊이
바토스와 코로스는 각각 액체와 곡물의 부피를 재는 단위로, 오늘날 단위로 바꾼 양은 역사적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모두 상당한 규모의 거래를 나타냅니다. 빚 감면을 두고, 첫째 읽기는 관리인이 아직 가진 권한으로 빚을 마음대로 깎아 주고 그 대가로 호의를 얻으려 했다고 봅니다. 둘째 읽기는 원래 문서에 들어 있던 이자나 추가 부담을 없앤 것이니 불법적인 이득을 줄인 일이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셋째 읽기는 주인에게 돌아갈 금액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아올 수수료나 몫을 내놓았다고 봅니다. 또 8절의 칭찬이 부정직함 자체를 칭찬하는 말은 아니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는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관리인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어라. 그 재물이 다할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히 머무를 곳으로 맞아 주도록 해라.」누가복음 16:9 · 두루새김
「재물」(μαμωνᾶς)로 옮긴 원문의 말은 아람어 계열에서 온 말로, 재물이나 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 재물을 「불의한」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표현은 옳지 않은 방식으로 얻어진 재물, 불의가 뒤섞이기 쉬운 세상의 재물, 또는 참된 의로움과 대비되는 이 세상의 부를 가리킨다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다음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아주 작은 일」과 「남의 것」에 연결하시며 그보다 더 크고 참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맥에서는 재물이 불의의 도구가 되기 쉽다는 점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재물이 모두 가치 없다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으로 친구들을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관리인은 무엇을 남기려고 했는가?
관리인은 곧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기에, 남아 있는 관리 권한으로 빚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일을 해 주고 그들이 자신을 맞아들이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동에서 재물을 사용하는 목적을 새롭게 보게 하십니다. 재물 자체를 영원히 붙잡아 두려 하기보다, 그것이 사라진 뒤에도 의미가 있는 일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친구들을 사귀라는 것은 돈으로 사람의 충성이나 호의를 사들이라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관리인의 계산적인 행동을 그대로 하나님 나라에서 따라야 할 기준으로 옮기지 않으십니다. 같은 재물이라도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재물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선과 맺은 관계는 재물 자체와 같은 방식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4:13–14에서 예수님은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라고 가르치시며, 그렇게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맥에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는 일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재물을 사용하여 그들과 관계를 맺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친구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견해가 있고, 「영원히 머무를 곳으로 맞아 주도록」이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이나 천사들이 맞아 주는 일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합니다. 재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것을 가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만듭니다.
재물이 다할 때
관리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집으로 맞아 주게 하려 했습니다(16:4).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이 영원히 머무를 곳으로 맞아들여지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같은 환대의 말이 두 번 등장하지만, 그 규모가 달라집니다.
관리인은 일자리를 잃은 뒤 머물 집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다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거처를 말씀하십니다. 재물로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안전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정받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재물을 부정직하게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곧바로 그 가능성을 차단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그 재물이 다할 때」도 해석이 갈립니다. 원문 동사는 다하다, 끝나다, 효력을 잃다 등의 뜻을 가질 수 있는데 주어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아, 재물이 다하거나 힘을 잃을 때로 읽을 수도 있고 사람이 생명을 마칠 때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재물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주어를 재물로 밝혀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이 가진 재물에는 끝이 있으니 그 끝을 내다보며 지금 사용하라는 메시지는 같습니다. 또 「친구들」을 둘러싸고는, 그리스어에서 복수로 된 주어가 반드시 앞의 친구들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논의됩니다.
작은 것에 신실한 사람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
「아주 작은 일에도 믿을 만한 사람은 큰일에도 믿을 만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큰일에도 정직하지 못하다.」누가복음 16:10 · 두루새김
이 문장이 앞의 비유 뒤에 놓였으므로, 관리인의 행동을 본받으라는 말씀은 부정직함까지 본받으라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미래를 내다보고 영리하게 행동한 점에 주목하게 하시지만, 제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깊이 믿을 만한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믿을 만한 태도는 재물의 액수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적은 재물을 다루는 일에서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재물을 맡았다고 해서 저절로 정직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 믿을 만하지 못했다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재물을 맡기겠느냐?」누가복음 16:11 · 두루새김
재물은 여기서 「참된 재물」과 대비됩니다.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재물조차 하나님 나라의 참된 가치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얼마나 많이 모았는지보다 얼마나 믿을 만하게 다루었는지를 보십니다.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 믿을 만하지 못했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것을 주겠느냐?」누가복음 16:12 · 두루새김
예수님은 재물을 「남의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관리인은 주인의 재산을 사용할 권한은 있었지만 최종적인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재물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시고, 인간은 절대적인 소유자라기보다 맡은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이해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렇다면 재물의 가치는 그것을 얼마나 오래 붙잡을 수 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맡겨진 동안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
「어떤 종도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따르고 다른 쪽을 업신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13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마태복음 6:24에도 거의 같은 형태로 나오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위치가 특별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재물을 섬길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은 사용할 수 있지만, 섬길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재물을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하는 주인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돈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이 주인이 된 것입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재물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돌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재물은 주인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듣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마음
바리새파 사람들은 돈을 좋아했는데, 이 모든 말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습니다.누가복음 16:14 · 두루새김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어졌지만 바리새파 사람들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바리새파 사람이 똑같이 탐욕스러웠다고 역사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을 재물을 사랑하는 태도와 연결하여 묘사합니다.
그들이 왜 비웃었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지 않습니다. 가르침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자신들의 재물과 지위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은 사람이라고 내세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역겨운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6:15 · 두루새김
사람들은 누군가의 재산과 지위, 경건한 행동을 보고 그를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지 아십니다.
이 말씀을 사람들이 존경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쁘다는 일반적인 주장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상 예수님은 부와 지위를 의로움의 증거로 여기고, 자신의 종교적인 지식과 실천을 이용하여 스스로 옳다고 내세우는 태도를 비판하십니다. 여기서 재물의 문제가 종교적 의로움의 문제로 옮겨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면 율법은 끝나는가?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 때까지였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고, 모두가 그 나라로 밀고 들어간다.」누가복음 16:16 · 두루새김
「율법과 예언자들」은 구약성경 전체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이 자신과 뜻을 드러내신 말씀을 가리키는 익숙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기준으로 시대적 전환이 일어났다고,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약속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글자에서 작은 획 하나가 없어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더 쉽다.」누가복음 16:17 · 두루새김
모순처럼 보일 수 있지만, 16절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선언이고, 17절은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효력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이유로 율법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 율법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6절의 「모두가 그 나라로 밀고 들어간다」도 읽기가 갈립니다. 그리스어 비아제타이(βιάζω)는 문법적으로 중간태와 수동태가 같은 형태여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쓴다는 뜻으로도, 사람들이 강하게 권유받아 밀려 들어간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는 사람들의 응답을, 후자는 하나님 나라 선포의 강력한 영향력을 강조하며, 문법과 문맥만으로 논의를 끝내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지금 전해지고 있고,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왜 갑자기 이혼을 말씀하실까?
「누구든지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이혼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하는 것이다.」누가복음 16:1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뒤의 재물 이야기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율법이 여전히 중요함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누가가 여러 가르침을 이 자리에 모아 놓았기 때문에 앞의 논쟁과 직접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신명기 24:1–4의 이혼 규정은 이혼을 장려하는 명령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이혼과 재혼 상황을 다루는 법적 규정입니다. 예수님은 법적으로 이혼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이 한 구절로 모든 이혼의 상황과 재혼의 도덕적 책임을 세세하게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학대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별거와 이혼 문제를 이 구절만으로 일률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은 사람의 법적 행동과 하나님 앞에서의 도덕적 책임이 항상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증거는 아니며, 율법의 허용 범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이 옳다고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으로 바꾸어 놓는 일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에서 한 부유한 사람의 삶을 보여 주십니다. 그의 대문 앞에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0:2–12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이혼 규정을 인간의 완고함과 연결하시고 창세기 2:24의 결혼에 관한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16:18은 그보다 짧고 단호하며, 마태복음 5:32와 19:9에 나오는 예외 표현도 없습니다. 이혼에 관한 말씀이 앞의 율법 선언을 단순히 예로 보여 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사람
「어떤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다.」누가복음 16:19 · 두루새김
자주색 염료로 물들인 옷과 고급 아마포 옷은 당시 값비싼 옷으로, 그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옷보다 더 중요한 표현은 「날마다」입니다. 그는 가끔 특별한 잔치를 벌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원문의 미완료 시제와 반복을 나타내는 표현이 이를 보여 줍니다.
「그의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가난한 사람이 버려져 있었는데, 온몸이 헐어 상처투성이였다.」누가복음 16:20 · 두루새김
한 사람은 호화로운 옷을 입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온몸이 헐어 상처투성이입니다.
한 사람은 날마다 풍성한 음식을 먹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어 합니다.
한 사람은 집 안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대문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에게는 이름이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을 가진 가난한 사람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라는 뜻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에서는 인물들이 어떤 사람, 부자, 주인, 아들처럼 소개되는데,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왜 그 이름인지 예수님은 설명하지 않으시니, 이름의 뜻을 비유 전체를 푸는 유일한 열쇠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뒤바뀜은 분명합니다. 세상에서는 부유한 사람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이름이 기억됩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잊힌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
나사로는 먼 마을이나 광야가 아니라 부자의 집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버려져 있었는데」라는 표현은 누가 그를 그곳에 두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데려다 놓았을 수도 있고, 그가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고 싶어 했지만, 실제로 얻어먹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개들까지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다고 기록합니다. 개들의 행동을 위로로 읽는 견해도 있지만, 앞뒤 흐름을 보면 사람들에게 제대로 돌봄받지 못하는 나사로의 비참한 처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를 때렸다는 이야기도, 재산을 빼앗았다는 말도, 대문 앞에 내던지라고 명령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두 사람의 일상을 나란히 놓으십니다. 한 사람은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고, 다른 사람은 바로 그 대문 앞에서 굶주립니다. 그리고 부자가 그를 도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본문이 부자의 하루하루를 모두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자에게는 재물이 있었고, 그 재물로 고통받는 사람을 도울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앞의 관리인은 빚진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려고 자신의 관리 권한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행동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가진 것으로 미래의 관계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반면 부자는 재물을 풍족하게 누리면서도 문밖에 있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한 것처럼 그려집니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의 삶이 끝납니다.
대문은 구렁텅이가 되었다
「그 가난한 사람이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땅에 묻혔다.」누가복음 16:22 · 두루새김
두 사람이 모두 죽었지만, 그들의 마지막을 그리는 방식은 다릅니다. 나사로에게는 천사들이 등장하고, 부자에게는 땅에 묻혔다는 사실만 기록됩니다. 다만 본문은 장례의 규모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부자에게만 성대한 장례가 있었다고 추측할 근거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품
고대의 식사에서는 사람들이 상에 기대어 앉았으며, 가까이 기대어 있는 사람은 서로의 품 가까이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품은 식탁에서 아브라함 곁에 있는, 영예롭고 위로받는 자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셨습니다(13:28–29).
살아 있을 때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어 했던 나사로가, 이제는 아브라함 곁의 자리에 있습니다. 반대로 부자는 하데스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데스는 무엇인가?
「하데스」(ᾅδης)는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표현으로,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같은 뜻의 히브리어 낱말을 옮길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6장이 그리는 하데스를 곧바로 후대 기독교 신학에서 정리된 지옥의 구조와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의 하데스와 아브라함의 품, 그 사이의 틈을 실제 죽음 이후 세계의 지리 구조로 읽는 해석도 있고, 당시 유대교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생각하던 죽음 이후 세계의 모습을 사용한 비유적 이야기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본문이 그리는 심판과 위로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모든 장면을 죽음 이후 세계의 물리적 구조에 관한 확정적인 정보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자가 처음으로 나사로를 부르다
「그가 소리쳐 말했다. 『아브라함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혀 주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길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6:24 · 두루새김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부터 알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그가 지금 나사로를 알아보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나사로가 원했던 것은 먹을거리였습니다. 부자가 원하는 것은 물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을 호소하지만, 그 위치는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그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가 두 차례나 나사로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는 점을 근거로, 죽은 뒤에도 나사로를 종으로 취급한다고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만 그의 속마음을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말투에서 드러나는 가능성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살아 있을 때 두 사람은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이에는 더 큰 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
「아브라함이 말했다. 『얘야, 살아 있을 때 너는 좋은 것들을 누렸고 나사로는 나쁜 일들을 겪었다는 것을 기억해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워한다.』」누가복음 16:25 · 두루새김
이 말씀을 부유했던 사람은 반드시 고통받고 가난했던 사람은 반드시 위로받는다는 자동적인 보상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나사로의 믿음이나 선행에 관한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불평등 속에서 부자가 나사로를 도왔다는 이야기는 없고, 아브라함의 말은 그 두 삶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평가를 드러냅니다.
누가복음 6:20–26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시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위로를 다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여기서 다시 울립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브라함도 그를 「얘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표현하는 호칭만으로 부자가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크고 깊은 틈이 가로놓여 있다.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거기서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게 되어 있다.』」누가복음 16:26 · 두루새김
앞에서는 대문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크고 깊은 틈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자가 대문을 열고 나사로에게 다가가 음식을 나누고 그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사로가 부자에게 물 한 방울을 가져다주고 싶어도 건널 수 없습니다. 본문이 그 틈을 닫혀 있던 대문이 변한 것이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두 장면을 나란히 읽으면 이 문학적 대조가 드러납니다.
살아 있을 때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부자가, 이제는 아무리 원해도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 한 가지 부탁을 더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본문이 죽음 이후 세계의 지형을 자세히 가르치기 위해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으며, 크고 깊은 틈과 두 곳 사이의 대화라는 독특한 구성에 주목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얘야」는 원문에서 바로 앞 장에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쓴 호칭과 같습니다(15:31). 그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늘 자신과 함께 있었고 자신의 것이 모두 그의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미 좋은 것들을 누렸다고 말합니다. 이 공통된 호칭만으로 두 인물을 같은 상징으로 볼 수는 없지만, 관계를 부르는 친근한 말과 그 관계가 실제로 어떤 삶으로 나타났는가 사이의 긴장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면 믿을까
「부자가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 부탁드립니다. 나사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누가복음 16:27 · 두루새김
이번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섯 형제를 도와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들이 이 고통의 자리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 경고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늦은 가족 사랑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의 속마음을 더 상상하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생각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충분히 듣지 못했던 경고를 형제들에게는 특별한 방식으로 전해야 한다고, 죽은 사람이 찾아가면 그들이 믿고 회개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 있다. 그들은 그 말을 들어야 한다.』」누가복음 16:29 · 두루새김
여기서 율법의 작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앞의 말씀(16:17)이 다시 떠오릅니다. 부자의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특별한 계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미 무엇을 말했는가?
부자는 재물도 음식도 부족하지 않았고, 그의 대문 앞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은 이미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15:7–11은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과 손을 닫지 말고 넉넉히 펴서 필요한 것을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19:9–10은 곡식을 끝까지 다 거두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해 남기라고 합니다. 이사야 58:6–7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고 가난한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삶과 연결하고, 아모스 6:4–7은 호화롭게 살며 공동체의 파멸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외면하는 삶과 함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말씀들은 같습니다. 부자에게도, 그의 형제들에게도 이미 그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새로운 표징을 원합니다.
「부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아버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면 그들은 회개할 것입니다.』」누가복음 16:30 · 두루새김
그에게 문제는 증거의 부족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살아나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16:31 · 두루새김
사람은 언제나 증거가 부족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따라 삶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는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돌아와 같은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기적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도 그러한 사건들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을 보았다는 사실이 곧 믿음과 순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풀어 주십니다(24:25–27, 44–47).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의 말씀과 분리되어 설명되지 않고, 성경이 증언해 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16:31을 부활하신 예수님마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언으로만 읽으면 초점이 좁아집니다. 이 말씀은 우선 부자의 형제들에 대한 경고이지만, 누가복음 전체를 읽는 독자에게는 기적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것과 그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깨닫는 일이 구별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재물을 맡은 사람과 대문 앞에 있던 사람
관리인은 맡은 재산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은 권한으로 미래의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면서도 대문 앞의 나사로와 재물을 나누지 않았고, 죽은 뒤 그 재물은 더 이상 그를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재물로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그 재물로 누구를 대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가 남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는 그 사람이 무엇을 섬기며 어떤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면 구원을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재물의 사용을 구원의 거래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과 재물을 섬기는 삶이 서로 다르고, 그 차이가 실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대답에서 끝납니다. 부자의 형제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씀을 듣고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이미 말씀이 있다는 사실만 남고, 부자는 더 이상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할 수 없습니다.
나사로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었고, 그에게 필요한 것도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먹을 것을 원했고,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은 이미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열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살던 집의 대문 앞에 나사로가 있었던 것처럼, 그의 형제들에게도 말씀을 듣고 행동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