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재물이 사라질 때 남는 것

누가복음 16장에는 두 부자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부자는 자기 재산을 관리하던 사람을 해고하려고 합니다. 관리인은 직장을 잃고 나면 자신을 맞아 줄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줄여 줍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의 주인은 그 행동을 칭찬합니다.

두 번째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아갑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헌데투성이인 가난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 재산을 그 사람과 나누지 않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고, 부자는 고통 가운데서 자신이 외면했던 그 사람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나란히 놓으면 이 장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지금 가진 재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재물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무엇이 남는가?

예수님은 재물에 관한 단순한 도덕적 훈계를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불편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의롭지 않은 관리인이 칭찬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 뒤에서 예수님은 작은 것에도 믿음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어떻게 의롭지 않은 사람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철저한 신실함을 요구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따라가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재물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다릅니다. 재물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것과 재물을 삶의 주인으로 삼는 것도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했는가보다, 그것으로 어떤 사람을 대하고 어떤 관계를 만들어 왔는가를 보게 하십니다.

읽는 시간 34분소단락 816장 본문 읽기 →

의롭지 않은 관리인이 왜 칭찬받았을까

누가복음 16:1–8 본문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말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관리인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주인의 재산을 흩고 있다고 주인에게 고발되었다.」누가복음 16:1 · 본디새김

관리인은 주인의 재산을 맡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큰 재산을 가진 사람은 토지와 생산물, 채권 등을 직접 관리하기보다 관리인을 세워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관리인은 소유자는 아니지만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흩고 있다」고 고발됩니다. 흩어 버리거나 낭비한다는 뜻의 이 동사는 바로 앞 장에서 작은아들이 자기 재산을 탕진하는 장면에도 사용되었습니다(15:13). 한 사람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은 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주인의 재산을 맡은 관리인이지만, 두 사람 모두 재산을 낭비했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재산을 탕진했다는 것은 서술자가 직접 알려 준 사실입니다. 반면 이 관리인에 대해서 본문은 누군가가 그를 고발했다고 기록합니다. 고발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 구체적인 경위는 설명되지 않지만, 주인은 그에게 재산 관리 내역을 제출하라고 요구하며 더는 관리할 수 없다고 통보합니다.

이제 관리인의 미래는 불투명해졌습니다.

무엇을 할까?

「관리인이 속으로 말했다. 『무엇을 할까? 내 주인이 나에게서 살림을 맡을 권한을 거두어 간다. 땅 파는 일은 힘에 부치고 구걸하기는 부끄럽다.』」누가복음 16:3 · 본디새김

그에게는 새로운 생존 방법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12:17에서 풍성한 소출을 거둔 부자도 자신에게 「무엇을 할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부자는 더 큰 곳간을 짓기로 했습니다. 반면 이 관리인은 자신을 맞아 줄 사람들을 만들기로 합니다.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지만, 미래를 앞두고 자신이 가진 자원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한다는 점에서는 비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림을 맡는 자리에서 밀려날 때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 집으로 맞아 주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누가복음 16:4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영원히 관리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직 권한이 남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재산 관리권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도울 사람들과의 관계는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기름은 절반, 밀은 오분의 일

첫 번째 사람은 기름 백 바토스를 빚졌고, 관리인은 그에게 증서를 고쳐 오십이라고 쓰게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밀 백 코로스를 빚졌고, 관리인은 팔십이라고 쓰게 합니다. 기름은 절반이, 밀은 오분의 일이 줄었습니다.

왜 첫 번째 사람의 빚은 절반을 줄여 주고 두 번째 사람의 빚은 오분의 일만 줄여 주었을까요? 본문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면된 금액이 주인의 원금인지, 이자나 추가 부담인지, 관리인 자신의 몫인지를 두고 여러 해석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관리인이 어떤 경제적 기법을 사용했는지를 모두 밝혀내야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목적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관리인의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빚을 줄여 준 사람들이 자신을 집으로 맞아들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남아 있는 권한을 미래의 관계를 만드는 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뜻밖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 의롭지 않은 관리인이 슬기롭게 처신했으므로 주인이 그를 칭찬했다.」 「이는 이 시대의 아들들이 자기 세대를 상대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슬기롭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6:8 · 본디새김

주인은 무엇을 칭찬했는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관리인이 또다시 주인의 채무 증서를 고쳤는데, 어떻게 주인이 그를 칭찬할 수 있습니까?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칭찬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주인이 그 관리인의 정직함을 칭찬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슬기롭게 처신했으므로」 칭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슬기롭게」는 상황을 분별하여 신중하고 영리하게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 자체가 그 행동의 도덕적 정당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리하게 행동하면서도 정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관리인은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위기를 외면하지 않았으며,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때 행동하여 자신의 미래를 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행동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처지를 분별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보여 준 진지함과 영리함에 주목하게 하십니다.

이어지는 「이 시대의 아들들이 … 빛의 아들들보다 더 슬기롭다」는 말씀에는 날카로운 대조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이익을 위해 상황을 살피고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해 그만큼 진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관리인은 관리권을 잃을 것을 알고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것들이 영원한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조금 더 깊이

바토스와 코로스는 각각 액체와 곡물의 부피를 재는 단위입니다. 정확한 환산치는 역사적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여기서 언급된 기름과 밀은 모두 상당한 규모의 거래를 나타냅니다. 감면에 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관리인이 아직 가진 관리 권한을 이용해 빚을 임의로 깎아 주고 그 대가로 사람들의 호의를 얻으려 했다는 해석입니다. 둘째, 원래의 채무 증서에 포함되어 있던 이자나 추가 부담을 없애 주었다는 해석으로, 이 경우 관리인의 행동은 불법적인 이득을 줄이는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 주인에게 돌아갈 금액 자체를 줄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올 수수료나 몫을 포기했다는 해석입니다. 본문은 감면된 금액이 이자인지, 수수료인지, 실제 원금의 일부인지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를 확정된 역사적 사실처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8절의 「주인」이 비유 속 부유한 주인인지,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인지도 해석이 갈립니다. 이전 문장들에서 계속 주인이라고 불린 인물이 있었으므로 그 부유한 사람이 칭찬했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여기서부터 비유 바깥의 예수님의 평가가 시작된다고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관리인이 칭찬받은 이유는 그의 의로움이 아니라 슬기로운 처신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는 뜻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6:9 본문 →

예수님은 관리인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지 않은 마몬으로 너희를 위해 친구들을 만들어라. 마몬이 다할 때에 그들이 너희를 다함없는 장막으로 맞아 주도록 하려는 것이다.」누가복음 16:9 · 본디새김

마몬은 아람어 계열에서 온 말로, 재물이나 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 마몬을 「의롭지 않은」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재물이 반드시 불법적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의롭지 않은 마몬」이라는 표현은 불의한 방식으로 얻어진 재물, 불의가 뒤섞이기 쉬운 세상의 재물, 또는 참된 의로움과 대비되는 현세적인 부를 가리킨다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가장 작은 것」과 「남의 것」이라고 부르시며, 그보다 더 크고 참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는 재물이 그 자체로 인간의 삶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며, 불의의 도구가 되기 쉽다는 점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재물을 모두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친구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관리인은 무엇을 남기려고 했는가?

관리인은 곧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남아 있는 관리 권한으로 빚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일을 해 주어 사람들이 자신을 맞아들이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동에서 재물을 사용하는 목적을 새롭게 보게 하십니다. 재물 자체를 영원히 붙잡아 두려 하기보다, 그것이 사라진 뒤에도 의미가 있는 일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돈으로 사람의 충성이나 호의를 사들이라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관리인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사람들의 호의를 확보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계산적인 행동을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로 옮기지 않으십니다. 같은 재물이라도 그것을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재물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선과 맺은 관계는 재물 자체와 같은 방식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4:13–14에서 예수님은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라고 가르치셨고, 바로 그런 환대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맥에서 재물로 친구를 만드는 일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재물을 사용하여 그들과 관계를 맺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16:9의 「친구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진 재물을 자기 자신에게만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합당하게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것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만듭니다.

마몬이 다할 때

「마몬이 다할 때에」라는 표현도 해석이 갈립니다. 재물이 다하거나 그 효력을 잃을 때를 가리킬 수 있고, 사람이 생명을 마칠 때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본문의 기본적인 메시지를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재물에는 끝이 있으므로, 그 끝을 내다보며 지금의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아 주도록」이라는 표현도 앞과 이어집니다. 관리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집으로 맞아 주게 하려 했습니다(16:4).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이 다함없는 장막으로 맞아들여지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같은 환대의 언어가 두 번 등장하지만, 그 규모가 달라집니다.

관리인은 이 세상에서 일자리를 잃은 뒤 머물 집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다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거처를 말씀하십니다. 재물로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안전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정받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재물을 부정직하게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곧바로 그 가능성을 차단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친구들」을 도움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다함없는 장막으로 맞아 주도록」이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이나 천사들의 환대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스어의 복수형 주어가 반드시 앞의 친구들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논의됩니다. 「다할 때에」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다하다, 끝나다, 효력을 잃다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이 문장에서는 주어가 명시되지 않아 무엇이 다하는지를 문맥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재물이 다한다는 읽기가 앞의 마몬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인간의 죽음과 연결하는 해석 역시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작은 것에 신실한 사람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

누가복음 16:10–13 본문 →

「가장 작은 것에서도 믿음직한 사람은 많은 것에서도 믿음직하고, 가장 작은 것에서도 의롭지 않은 사람은 많은 것에서도 의롭지 않다.」누가복음 16:10 · 본디새김

예수님은 의롭지 않은 관리인의 슬기로움을 말씀하신 바로 뒤에, 작은 것에서도 믿음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관리인의 행동을 본받으라는 말씀은 부정직함까지 본받으라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미래를 내다보는 슬기로움에 주목하게 하시지만, 제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신실함을 요구하십니다.

여기서 신실함은 재물의 액수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적은 재물을 다루는 일에서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재물을 맡았다고 해서 저절로 정직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서는 재물을 더욱 낮은 위치에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의롭지 않은 마몬을 다루는 데 믿음직하지 못했다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누가복음 16:11 · 본디새김

재물은 여기서 「참된 것」과 대비됩니다.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재물조차 하나님 나라의 참된 가치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얼마나 많이 모았는지보다 그것을 얼마나 신실하게 다루었는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 믿음직하지 못했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것을 주겠느냐?」누가복음 16:12 · 본디새김

예수님은 재물을 「남의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관리인은 주인의 재산을 사용할 권한은 있었지만 최종적인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재물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재물을 소유하고 관리합니다. 그러나 그 재산과 생명 자체가 영원히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적인 소유자라기보다 맡은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신학적 이해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그렇다면 재물의 가치는 그것을 얼마나 오래 붙잡을 수 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맡겨진 동안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마몬이라는 두 주인

「집안 종은 아무도 두 주인에게 노예 노릇을 할 수 없다. 하나를 미워하고 다른 하나를 사랑하거나, 하나를 따르고 다른 하나를 업신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마몬에게 함께 노예 노릇을 할 수 없다.」누가복음 16:1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마태복음 6:24에도 거의 같은 형태로 등장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위치가 특별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마몬으로 친구를 만들라고 말씀하셨고, 그런 다음 마몬을 섬길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몬은 사용할 수 있지만, 섬길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마몬을 섬긴다는 것은 재물을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하는 주인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돈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이 주인이 된 것입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재물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돌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재물은 주인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경쟁하는 주인이 되는 일을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듣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마음

누가복음 16:14–18 본문 →

이 모든 말을 바리새파 사람들이 듣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 그를 비웃고 있었다.누가복음 16:14 · 본디새김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어졌지만, 바리새파 사람들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바리새파 사람이 동일하게 탐욕스러웠다고 역사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을 재물을 사랑하는 태도와 연결하여 묘사합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비웃었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물에 관한 가르침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자신들이 가진 재물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 속에 더 깊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내세우는 이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역겨운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6:15 · 본디새김

사람들은 누군가의 재산과 지위, 경건한 행동을 보고 그를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지 아십니다.

이 말씀을 사람들이 존경하는 모든 것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나쁘다는 일반 명제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상 예수님은 인간이 부와 지위를 의로움의 증거로 여기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태도를 비판하십니다.

여기서 재물의 문제가 종교적 의로움의 문제로 옮겨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자신의 종교적인 지식과 실천을 이용하여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면 율법은 끝나는가?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 때까지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으로 전해지고 모두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누가복음 16:16 · 본디새김

앞에서는 재물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이제 율법과 예언자를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구약성경 전체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키는 익숙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기준으로 중요한 시대적 전환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사역 이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약속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획 하나가 없어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쉽다.」누가복음 16:17 · 본디새김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가 요한까지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율법에서 작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순처럼 보일 수 있지만 두 말씀은 구별됩니다. 16절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선언이고, 17절은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 담긴 뜻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이유로 율법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율법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6절의 「모두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쓴다는 뜻으로도, 들어가도록 강하게 권고받는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 나라는 지금 선포되고 있고,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시대에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혼에 관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왜 갑자기 이혼을 말씀하실까?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간음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혼당한 여자와 혼인하는 사람은 간음한다.」누가복음 16:1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뒤의 재물 이야기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율법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누가가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을 이 자리에 모아 놓았기 때문에 앞의 재물 논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가능성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이 문맥에 놓이면서 생기는 의미는 살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4:1–4의 이혼 증서 규정은 이혼을 무제한으로 장려하는 명령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이혼과 재혼 상황을 다루는 법적 규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법적으로 이혼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6:18은 짧고 단호한 형태로 전달됩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로 모든 이혼의 상황과 재혼의 윤리적 책임을 세세하게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학대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별거와 이혼 문제를 이 구절만으로 일률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은 사람의 법적 행동과 하나님 앞에서의 도덕적 책임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법적으로 허용되는 일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의롭게 내세운다는 비판과 함께 읽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율법의 허용 범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으로 바꾸어 놓는 일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에서 한 부유한 사람의 삶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문 앞에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밀고 들어간다」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문법적으로 중간태와 수동태가 같은 형태입니다. 중간태로 읽으면 사람들의 적극적인 응답이, 수동태로 읽으면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이 강조됩니다. 이 구절은 문법과 문맥만으로 모든 논의를 종결하기 어렵습니다. 이혼에 관해서는, 마가복음 10:2–12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의 이혼 규정을 인간의 완고함과 연결하시고 창세기 2:24의 결혼에 관한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하십니다. 마태복음 5:32와 19:9에 나오는 예외 표현은 누가복음의 이 구절에는 없습니다.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사람

누가복음 16:19–21 본문 →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를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지냈다.」누가복음 16:1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부자를 소개하십니다.

자주색 염료로 물들인 옷과 고급 아마포는 당시 값비싼 의복으로, 그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옷보다 더 중요한 표현은 「날마다」입니다. 그는 가끔 특별한 잔치를 벌인 것이 아니라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라는 이름의 가난한 사람이 헌데투성이인 채로 그의 대문 앞에 던져져 있었다.」누가복음 16:20 · 본디새김

한 사람은 호화로운 옷을 입었고, 다른 사람은 몸이 헌데로 뒤덮여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날마다 풍성한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은 그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어 합니다.

한 사람은 집 안에 있고, 다른 사람은 대문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유한 사람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이름을 가진 가난한 사람

예수님의 많은 비유에서는 인물들이 어떤 사람, 부자, 주인, 아들처럼 소개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그가 왜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예수님께서는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이름의 의미가 비유 전체를 해석하는 유일한 열쇠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의 역전은 분명합니다. 세상에서는 부유한 사람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이름이 기억됩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잊힌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

나사로는 먼 마을에도, 멀리 떨어진 광야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집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본문은 「던져져 있었다」라고만 말할 뿐 누가 그를 그곳에 두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데려다 놓았을 수도 있고, 그가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의 상태가 매우 비참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그 음식을 얻어먹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고 기록합니다.

이 개들의 행동을 나사로를 위로해 주는 친절한 행동으로 읽는 견해도 있지만, 본문은 그것을 긍정적인 치료 행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인간에게 제대로 돌봄받지 못하는 나사로의 비참한 처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나사로에게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를 때렸다는 이야기도, 그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말도, 그를 대문 앞에 내던지라고 명령했다는 사실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일상을 나란히 놓으십니다. 한 사람은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고, 다른 사람은 바로 그 대문 앞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그를 도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물론 본문이 부자의 하루하루를 모두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얻었는지, 나사로를 얼마나 자주 보았는지,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푼 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에게는 재물이 있었고, 그 재물로 고통받는 사람을 도울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앞의 관리인은 빚진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려고 자신의 관리 권한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행동이 반드시 의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자원으로 미래의 관계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반면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풍족하게 누리지만, 문밖에 있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한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의 삶이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미완료 시제와 반복을 나타내는 표현은 호화로운 생활이 부자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엘르아살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도우셨다」라는 뜻과 연결됩니다.

대문은 구렁텅이가 되었다

누가복음 16:22–26 본문 →

「그 가난한 사람이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다. 부유한 사람도 죽어 묻혔다.」누가복음 16:22 · 본디새김

두 사람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본문은 장례의 규모를 설명하지 않지만, 나사로에게는 천사들이 등장하고 부자에게는 매장되었다는 사실만 기록됩니다.

아브라함의 품

고대의 식사에서는 사람들이 상에 기대어 앉았으며, 가까이 기대어 있는 사람은 서로의 품 가까이에 자리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품은 식탁에서 아브라함 곁에 있는, 영예롭고 위로받는 자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셨습니다(13:28–29). 살아 있을 때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어 했던 나사로가, 이제는 아브라함 곁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반대로 부자는 하데스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데스는 무엇인가?

하데스(ᾅδης)는 죽은 자들의 영역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스올」을 옮길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6장의 하데스 묘사를 곧바로 후대 기독교 신학에서 정리된 지옥의 구조와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이 묘사하는 심판과 위로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이야기의 모든 장면을 사후 세계의 물리적 구조에 관한 확정적인 정보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은 두 사람의 삶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관계가 완전히 뒤집혔다는 사실입니다.

부자가 처음으로 나사로를 부르다

「그가 소리쳐 말했다. 『아브라함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사로가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가 제 혀를 식혀 주도록 그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꽃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6:24 · 본디새김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는지, 이 장면에서 알게 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나사로를 알아보고 있으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나사로는 살아 있을 때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 부자는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을 원합니다. 두 사람 모두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필요를 호소하지만, 그 위치는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그를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를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보내질 사람처럼 대합니다.

분명한 것은 부자가 이제 나사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을 때 두 사람은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이에는 더 큰 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

「아브라함이 말했다. 『얘야,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네 몫의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마찬가지로 나쁜 것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그러나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워한다.』」누가복음 16:25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세상에서 부유했던 사람은 반드시 고통받고 가난했던 사람은 반드시 위로받는다는 기계적인 보상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부자와 나사로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았는지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며, 나사로의 믿음이나 선행에 관한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풍성한 것을 누렸고 나사로는 고통 가운데 있었으며, 그 극단적인 불평등 속에서 부자가 나사로를 도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런 문맥에서 아브라함의 말은 부자가 누렸던 삶과 나사로가 겪었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평가를 드러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브라함도 그를 「얘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표현하는 호칭만으로 부자가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더 결정적인 사실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에 더해 우리와 너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굳게 가로놓여 있다.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려는 이들이 건너갈 수도 없고, 거기 있는 이들도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누가복음 16:26 · 본디새김

살아 있을 때 두 사람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부자의 대문 앞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서로 건너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앞에서는 대문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구렁텅이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자가 대문을 열고 나사로에게 다가가 음식을 나누고 그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사로가 부자에게 물 한 방울을 가져다주고 싶어도 건널 수 없습니다. 본문이 큰 구렁텅이를 부자가 닫아 놓았던 대문이 변한 것이라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장면을 나란히 읽을 때 나타나는 문학적 대조입니다.

살아 있을 때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부자가, 이제는 아무리 원해도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은 재물의 한계만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관계와 기회가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 한 가지 부탁을 더 합니다. 자신의 형제들에 관한 부탁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데스의 고통과 아브라함의 품, 그 사이의 큰 구렁텅이를 실제 죽음 이후 세계의 구체적인 지리 구조로 읽는 해석도 있고, 당시 유대교와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후 세계 이미지들을 사용한 비유적 이야기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본문이 죽음 이후 세계의 지형을 상세히 가르치기 위해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으며, 큰 구렁텅이와 두 영역 사이의 대화라는 독특한 구성에 주목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 달라고 하는 말투를 죽은 뒤에도 나사로를 종으로 취급하는 모습으로 읽는 견해가 있고, 그가 두 차례나 나사로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는 사실이 그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어떤 계급의식을 품고 있는지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그의 내면을 확정적으로 단정하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브라함의 말은 누가복음 6:20–26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시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으며 이미 위로를 다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얘야」는 바로 앞 장에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사용했던 호칭입니다(15:31). 앞 장에서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늘 자신과 함께 있었으며 자신의 것은 모두 그의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그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좋은 것을 이미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공통된 호칭만으로 두 인물을 반드시 같은 상징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관계를 부르는 친근한 말과 그 관계가 실제로 어떤 삶으로 나타났는가 사이의 긴장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면 믿을까

누가복음 16:27–31 본문 →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그러면 아버지, 그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자신을 도와 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형제들을 도와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에게는 형제가 다섯 명 있고, 그들이 자신과 같은 고통의 자리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 경고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부탁을 부자의 뒤늦은 가족 사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생각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충분히 듣지 못했던 경고를 형제들에게는 특별한 방식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이 찾아가면 그들이 믿고 회개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누가복음 16:2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율법의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의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도 새로운 특별한 계시가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미 무엇을 말했는가?

부자는 재물도 음식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대문 앞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은 이미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15:7–11에서는 가난한 형제가 있을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거나 손을 닫지 말고, 손을 넉넉히 펴서 그의 필요를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19:9–10에서는 밭의 곡식을 거둘 때 끝까지 다 거두지 않고 일부를 남겨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가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사야 58:6–7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억압의 멍에를 풀고,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며, 가난한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삶과 연결된다고 선언합니다. 아모스 6:4–7에서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 공동체의 파멸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이 말씀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외면하는 삶과 양립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자에게는 이미 그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에게도 그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새로운 표징을 원합니다.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아버지.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누가복음 16:30 · 본디새김

그에게 문제는 증거의 부족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지막 대답은 그 생각을 부정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일어나도 그들은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16:31 · 본디새김

사람은 언제나 증거가 부족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미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돌아와 같은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말씀을 모든 기적이나 특별한 경험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을 보았다는 사실이 곧 믿음과 순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은 아무리 놀라운 일을 보더라도 다른 설명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5장의 명령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역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으므로, 그들도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거나 경제적 부담으로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16:31은 누가복음의 전체 이야기 속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풀어 주십니다(24:25–27, 44–47).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의 말씀과 분리되어 설명되지 않고, 성경이 증언해 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16:31을 부활하신 예수님마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언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이 본문의 초점을 좁힐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선 부자의 형제들에게 주는 경고이지만, 누가복음 전체를 읽는 독자에게는 기적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것과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깨닫는 일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재물을 맡은 사람과 대문 앞에 있던 사람

누가복음 16:1–31 본문 →

누가복음 16장은 재물을 맡은 사람과 대문 앞에 있던 사람으로 재물과 인간의 삶을 연결합니다. 처음에 등장한 관리인은 곧 잃을 관리 권한으로 미래를 준비했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보다 더 큰 신실함을 요구하셨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한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지만, 그의 재물은 나사로의 고통을 덜어 주는 데 사용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죽었을 때 더 이상 그를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는 단순히 경제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섬기며 어떤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지를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의롭지 않은 관리인의 슬기를 보게 하시는 말씀과 철저한 신실함을 요구하시는 말씀은 여기서 만납니다. 재물이 사라질 때를 내다보며 사용하되, 그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면 구원을 구매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의 사용을 구원의 거래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과 마몬을 섬기는 삶이 서로 다르고, 그 차이가 실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대답에서 끝납니다. 부자의 형제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나사로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이미 말씀이 있다는 사실만 남습니다. 그리고 부자는 더 이상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 요청은 새로운 증거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대답은 이미 주어진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답은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놓여 있던 한 사람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나사로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었고, 그에게 필요한 것도 대단히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먹을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은 이미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열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살던 집의 대문 앞에 나사로가 있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말씀을 듣고 행동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