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잃었던 사람을 찾은 기쁨에 함께하기
누가복음 15장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다 같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 주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누가복음 15:2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하시는지만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맞아 주시고 함께 식사하신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왜 그런 사람들과 식사하시는지 직접 변론하시는 대신,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으려고 집 안을 뒤지는 여자,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세 이야기에는 같은 장면이 반복됩니다. 무엇인가를 잃고, 그것을 되찾고,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에는 뜻밖의 변화가 있습니다.
잃었던 아들이 돌아와 잔치가 벌어졌는데, 다른 아들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양을 찾은 목자의 친구들도, 은전을 찾은 여자의 이웃들도 함께 기뻐하도록 초대받았는데,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의 형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집을 떠난 아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하지 못하는 또 다른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을까요?
이 장의 첫머리로 돌아가면 이유가 보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가오고 있는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맞아 주신다고 불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묻고 계신 셈입니다.
잃었던 사람을 다시 찾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너희는 왜 그 기쁨에 함께하지 못합니까?
세 비유를 관통하는 것은 단순히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찾아냈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찾아낸 사람이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기쁨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는지가 문제로 남습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 한 마리를 찾다
누가는 먼저 두 무리를 보여 줍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이 그의 말을 들으려고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누가복음 15:1 · 본디새김
한쪽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지배 아래 세금 징수에 관여하던 사람들로, 수탈이나 부정직한 징수와 연결되어 비난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세리가 실제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죄인」 역시 하나의 직업이나 신분이 아니라, 종교적·도덕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거나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다가온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으려고 다가왔다고 기록합니다.
반대편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죄를 심각하게 여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죄와 회개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환대하시는 일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불평에 대답하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는 얼마나 중요한가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다가 그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광야에 남겨 두고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5:4 · 본디새김
「너희 가운데 누가」라는 질문은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는 말투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행동이 그렇게 당연하지만은 않습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는데, 목자는 그들을 광야에 남겨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갑니다. 경제적인 계산만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본문은 아흔아홉 마리에게 실제로 어떤 위험이 있었는지, 다른 목자가 돌보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를 찾는 일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언제까지 찾는지 말씀하십니다. 「찾을 때까지」입니다.
얼마 동안 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찾는 일을 언제 멈추는지가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잃다」라는 표현이 이 장의 세 이야기를 묶습니다.
양을 잃습니다.
은전을 잃습니다.
아들을 잃습니다.
그리고 잃었던 것을 다시 찾습니다.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메는 이유
「그리고 찾고 나서 기뻐하며 그것을 자기 두 어깨에 멘다.」누가복음 15:5 · 본디새김
이 장면은 흔히 목자가 지친 양을 구해 돌아오는 목가적인 그림으로 그려지지만, 본문은 양이 다쳤는지, 지쳤는지, 스스로 걸을 수 없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표현은 「기뻐하며」입니다. 한 마리를 찾아 돌아오는 일이 고된 일이었을 수 있지만, 목자는 양을 되찾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게. 잃었던 내 양을 찾았네.』」누가복음 15:6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양을 얼마나 힘들게 찾았는지 자랑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를 잃었던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으니 함께 기뻐하자고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맞아들이시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을 보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양을 되찾은 목자가 기뻐하는 것은 이해하면서, 하나님이 잃었던 사람을 되찾으시는 일을 왜 기뻐하지 못합니까?
아흔아홉 의인에게는 회개가 필요 없을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두고 하늘에 있을 기쁨은 회개할 필요를 지니지 않은 의인 아흔아홉을 두고 있을 기쁨보다 더할 것이다.」누가복음 15: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한쪽에서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 한 사람에게 특별한 기쁨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들」이라는 표현에 반어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스스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예수님을 비판하던 사람들의 자기 인식을 겨냥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상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는 의로운 삶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9–14의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가 후자의 문제를 더욱 분명히 다룹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핵심은 누가 실제로 얼마나 의로운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양은 목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회개하는 죄인에게 일어나는 기쁨과 연결하십니다. 따라서 양의 행동 하나하나를 인간의 회개 과정과 대응시키기보다, 비유에서 목자의 행동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잃었던 것을 찾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 기뻐하십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일과 떨어져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죄인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18:12–14의 병행 비유는 양이 「헤매는」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며, 잃어버린 작은 사람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설명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잃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 동사의 그리스어 어근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는 문맥에 따라 잃다, 멸망하다라는 뜻을 가지며, 이 장에서 양과 은전과 아들의 이야기를 연결합니다. 또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양을 고치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 않았다고 책망하시고(에스겔 34:4), 자신이 직접 양들을 찾고 돌보겠다고 말씀하십니다(34:11–16). 에스겔의 본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과 흩어진 백성의 회복을 다룹니다. 예수님은 그 본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으시지만,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찾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실제로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이 어떤 것인지 설명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 그 긍휼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집 안에서 잃어버린 은전 한 닢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번에는 목자가 아니라 한 여자입니다.
「또 어떤 여자가 드라크마 열 닢을 가지고 있다가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을 때까지 꼼꼼히 뒤지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5:8 · 본디새김
첫 번째 비유와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가운데 하나를 잃고,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고, 마침내 찾아낸 뒤 사람들을 불러 함께 기뻐합니다. 그런데 장소와 물건이 달라집니다. 양은 광야에서, 은전은 집 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양을 찾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은전 한 닢을 찾으려면 집 안을 꼼꼼하게 살펴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의 처지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찾는 사람의 태도는 같습니다.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드라크마 한 닢의 무게
드라크마는 그리스계 은화의 단위입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지역과 시대, 임금 조건에 따라 실제 구매력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 닢 가운데 한 닢, 전체의 열에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여자에게 손실이 작지 않았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돈이 여자의 결혼 장식품에 달려 있던 동전이었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문은 그 돈의 용도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자의 행동입니다. 그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고, 꼼꼼하게 찾습니다. 목자는 넓은 광야를 돌아다녔고, 여자는 작은 집 안을 샅샅이 살핍니다. 두 사람의 행동은 다르지만, 잃어버린 것을 찾는 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는 같은 마음을 보여 줍니다.
은전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양은 어쩌면 목자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전은 그런 행동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은전을 찾는 여자의 행동도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나님 앞에 기쁨이 생기는 일과 연결하십니다.
그러므로 비유 전체를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돌아오는가에 관한 설명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은전의 비유는 회개하는 사람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과, 찾았을 때의 기쁨을 보여 줍니다.
누가 기뻐하는가?
「그리고 찾고 나서 여자인 친구들과 이웃 여자들을 불러 모아 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게. 내가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네.』」누가복음 15:9 · 본디새김
첫 번째 비유의 목자가 했던 말과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는 사실을 혼자 간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하자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생긴다.」누가복음 15:10 · 본디새김
흔히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설명하지만, 원문은 기쁨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기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천사들도 그 기쁨에 참여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누가 기쁨의 직접적인 주체인지를 이 문장만으로 세세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앞의 두 비유를 함께 읽으면 그 기쁨의 성격은 분명해집니다. 목자도 여자도 기뻐하고, 친구들과 이웃들이 자신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질문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받아 주실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분이 이미 기뻐하시는 일을 사람들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투덜거린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이 질문이 훨씬 어려워집니다.
양은 목자를 떠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했다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은전은 스스로 무엇을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이야기의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재산을 받아 먼 곳으로 가고, 그것을 탕진합니다. 이번에는 잃어버린 일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도 다시 찾았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그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을 둘 가지고 있었다.」누가복음 15:11 · 본디새김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집 나간 작은아들의 비유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들이 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야기의 앞부분에서는 작은아들이 중심에 있지만, 뒤에서는 맏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가운데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 저에게 돌아오는 몫을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누가복음 15:12 · 본디새김
이 요청은 단순히 용돈을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자기에게 상속될 재산을 미리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 행동을 사실상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행위와 같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의 가족관계와 상속 관습을 고려하면 이 요청이 아버지에 대한 심각한 무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설명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작은아들이 실제로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보다 자신의 몫을 먼저 차지하는 일을 원했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만 재산을 준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살림」(βίος)으로 옮긴 낱말은 생명이나 삶,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가족이 살아가는 기반이 되는 재산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맏아들이 등장할 때 중요해집니다. 맏아들도 이미 자기 몫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의 몫을 실제로 어떻게 소유하고 관리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고, 아버지가 여전히 집안의 일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도 뒤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재산 분배가 작은아들에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내 것은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단서입니다.
먼 지방으로 떠난 아들
「며칠 지나지 않아 작은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서 먼 지방으로 떠났다. 그리고 거기서 절제 없이 살며 자기 재산을 탕진했다.」누가복음 15:13 · 본디새김
「먼 지방」은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작은아들은 이제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그의 내면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지만, 그가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탕진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작은아들이 창녀들과 어울려 재산을 썼다고 흔히 설명하지만, 13절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나중에 등장하는 맏아들입니다(15:30). 이 차이를 기억하면 뒤에서 맏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진 것이 사라지자 사람들도 사라졌다
작은아들이 재산을 모두 써 버린 뒤 심한 기근이 닥칩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재산을 잃은 일에 그 지방에 닥친 기근이 겹칩니다. 기근 자체가 작은아들의 잘못 때문에 발생했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지만, 그에게는 기근을 견딜 자원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 지방 주민 한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고 돼지를 치게 됩니다. 유대인 청중에게 이것은 특히 비참한 처지로 들렸을 것입니다. 레위기 11:7–8에서 돼지는 먹지 말아야 할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자기 배를 채우고 싶어 했으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누가복음 15:16 · 본디새김
처음에 그는 자기 몫을 요구해 받아 먼 곳으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먹을 것을 스스로 마련할 능력조차 없습니다. 더욱 슬픈 것은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재산도 없고, 자신을 돌보아 줄 관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굶주림 가운데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1:17의 장자 상속권 규정에 따르면 맏아들은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몫을 받았습니다. 아들이 둘뿐이고 이 규정대로 나눈다면 맏아들은 셋 가운데 두 몫, 작은아들은 한 몫을 받는 셈이지만, 이 비유가 실제로 그 비율대로 재산을 나누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쥐엄 열매는 지중해 지역에서 자라는 캐럽나무의 꼬투리 열매로 이해됩니다. 사람도 먹을 수 있었지만 가축의 먹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돌아가려는 것 아닐까요?
「그가 제정신이 들어 말했다. 『내 아버지의 품꾼 가운데 빵이 넘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어 가는구나.』」누가복음 15:17 · 본디새김
이 장면은 흔히 작은아들이 회개하는 순간으로 설명되고, 그렇게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하며, 죄를 지었다고 고백할 말도 준비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가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먹을거리입니다. 아버지의 품꾼들은 빵이 넘치는데 자신은 굶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해졌기 때문에 돌아가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닐까요?
여기에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작은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했으므로 진정한 회개의 시작으로 봅니다. 다른 쪽에서는 그의 결심이 무엇보다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현실적인 계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해, 아직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보다 자신의 생존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읽습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죄를 고백할 말을 준비하지만, 그 결심의 첫 동기는 굶주림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마지막 비유에는 앞선 두 비유와 달리 「회개」라는 낱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해석에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은아들의 동기가 얼마나 순수했는지 최종 판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하고,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돌아가기 전에 준비한 말
「『일어나 내 아버지에게 가서 말하겠다. 〈아버지, 제가 하늘을 거슬러 또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누가복음 15:18 · 본디새김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건한 우회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에 대한 잘못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도 죄를 지었다고 인정합니다. 단순히 재산 관리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저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무절제하게 사용한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꾼 가운데 하나처럼 써 주십시오.〉』」누가복음 15:19 · 본디새김
그는 아들의 지위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임금을 받고 일하는 품꾼으로 받아 달라고 청하려 합니다. 아들의 신분으로 재산을 요구했던 사람이 이제는 품꾼이 되어 먹고살기를 원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 스스로 계산하고 있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갈 길을 나름대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보았다
「그래서 일어나 자기 아버지에게 갔다. 아들이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 그리고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추었다.」누가복음 15:20 · 본디새김
아들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봅니다. 그리고 달려갑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할지 준비했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들이 죄를 고백하기 전에 아버지는 그를 가엾게 여겼고,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물론 아들은 이미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환대가 아들의 고백을 듣고 그 진정성을 심사한 뒤에야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가엾이 여겼습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긍휼은 마음속으로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에 머물지 않고,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 행동하는 긍휼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춥니다. 그는 돌아오는 아들에게 거리를 두지 않고, 잘못을 추궁하기 위해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σπλαγχνίζομαι)로 옮긴 동사는 내장이나 몸속 깊은 곳에서 느끼는 강한 감정과 연결된 표현으로, 깊은 연민과 긍휼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 7:13에서 예수님께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셨을 때, 10:33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가엾게 여겼을 때에도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세 장면 모두 깊은 연민이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위로하시고 아들을 살리시며,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고, 이 비유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끌어안습니다. 「거듭 입을 맞추었다」(καταφιλέω)로 옮긴 동사는 강하게 또는 애정을 담아 입맞추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두고 당시의 나이 든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달리는 것은 극도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므로 특별한 문화적 파격이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달려가는 행동이 매우 적극적인 환대를 보여 준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당시의 모든 존경받는 아버지는 절대로 뛰지 않았다는 식의 일반화는 신중해야 합니다. 또 호세아 11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자녀처럼 사랑하고 돌보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백성을 향한 자신의 긍휼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 말씀은 이 비유를 직접 예고한 인용문은 아니지만, 자녀의 배반과 그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주제에서 깊은 연결을 보여 줍니다.
품꾼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들로 맞아들여지다
이제 작은아들이 준비했던 말을 합니다.
「아들이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하늘을 거슬러 또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누가복음 15:21 · 본디새김
작은아들은 자신이 준비했던 말을 끝까지 하지 않습니다. 18–19절에서 그는 하늘과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지었다는 고백, 더는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인정, 자신을 품꾼 가운데 하나로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 앞에서 말한 것은 앞의 두 가지뿐입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꾼 가운데 하나처럼 써 주십시오」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중간에 끊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버지의 환대를 경험하면서 그 말을 더는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이 이어지지만, 아들의 말이 실제로 중단되었는지 또는 그가 스스로 그 말을 생략했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그에게 품꾼으로 일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노예들에게 명령합니다.
「아버지가 자기 노예들에게 말했다. 『어서 가장 좋은 긴 옷을 내와 그에게 입혀라.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누가복음 15:22 · 본디새김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부터 바꿉니다. 이 행동들은 아들이 먹을 것을 얻으러 돌아온 품꾼으로 취급되지 않고, 가족의 일원으로 환대받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반지를 반드시 가문의 인장 반지로 단정하거나, 아버지가 재산 관리권을 다시 주었다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옷과 신발을 법적으로 아들의 신분이 완전히 복구되었음을 나타내는 정해진 의식으로 볼 근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명예와 환대의 표시라는 사실은 문맥에서 분명합니다.
작은아들은 품꾼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아들로 맞이합니다.
아들은 먹고살 수 있는 자리를 얻으려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를 다시 가족의 식탁으로 데려옵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여는 이유
「『그리고 살찌워 기른 송아지를 끌어와 잡아라. 먹고 즐기자.』」누가복음 15:23 · 본디새김
살찌워 기른 송아지는 일상적인 간단한 식사보다 특별한 잔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잔치를 벌입니까? 아들이 재산을 되찾아 왔거나, 갚겠다고 약속했거나, 성실한 품꾼이 되어 손실을 보충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직접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없어졌다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잔치를 즐기기 시작했다.」누가복음 15:24 · 본디새김
처음 두 비유의 말이 다시 돌아옵니다. 잃었던 것을 찾았고, 그래서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이나 은전이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표현을 문자적인 죽음과 부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관계가 끊어지고 사라졌던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살아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잃어버린 아들이었고, 이제 아버지는 그를 다시 얻었습니다. 이것이 잔치의 이유입니다.
재산은 실제로 사라졌고, 작은아들이 저지른 잘못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환대는 그 잘못이 사소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되찾았다는 기쁨이 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의 처음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왜 죄인들을 맞아 주시고 그들과 함께 드십니까? 잃었던 사람이 돌아왔고,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양을 찾은 목자는 친구들을 불러 함께 기뻐했고, 은전을 찾은 여자도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기뻐했습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 역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누가 함께 기뻐할까요?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잔치 밖에 선 아들
「그의 맏아들은 밭에 있었다.」 그는 동생처럼 집을 떠나 재산을 탕진하지 않고, 아버지의 집에 머물며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 가까이 오자 예상하지 못한 음악 소리와 춤추는 기척이 들립니다. 집 안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묻지 않고, 집 밖에서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 알아봅니다.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으므로 이미 동생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이 작은 장면을 통해 맏아들이 집 안의 기쁨과 아직 떨어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종이 그에게 말했다. 『형제분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그를 성한 몸으로 되돌려 받으셨기에 살찌워 기른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누가복음 15:27 · 본디새김
이 대답에는 특별한 비난이 없습니다.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줄 뿐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화가 납니다.
「그는 화가 나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나와서 그에게 간청하고 있었다.」누가복음 15:2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작은아들이 먼 곳에서 돌아왔고, 아버지가 달려가 그를 맞이했습니다. 이번에는 맏아들이 집에 가까이 왔지만 들어가지 않으려 하고, 아버지가 다시 나옵니다. 이번에는 달려갔다고 기록하지 않는 대신, 간청합니다. 「간청하고 있었다」는 미완료 시제로, 아버지가 한 번 들어오라고 명령하고 돌아선 것이 아니라 맏아들을 계속 설득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제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작은아들이고, 집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맏아들입니다.
처음에 집을 떠났던 아들은 돌아왔습니다. 한 번도 집을 떠나지 않았던 아들이 오히려 잔치에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맏아들의 불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그가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여러 해 아버지께 종살이해 왔고 아버지의 분부를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제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누가복음 15:29 · 본디새김
이 말을 들으면 맏아들이 지나치게 자기 의로움에 빠져 있다고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만을 너무 빨리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실제로 아버지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본문도 그를 밭에서 돌아오는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아버지의 분부를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다는 주장이 완벽하게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는 살찌워 기른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왜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은 특별한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모든 것을 낭비하고 돌아온 동생은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인간이 실제로 고민하는 공정성의 문제가 들어 있고, 예수님은 맏아들의 입을 통해 그 불만을 충분히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읽으면서 맏아들은 단순히 악하고 작은아들은 선하다는 결론을 내리면 안 됩니다. 작은아들이 저지른 잘못은 실제로 심각했고, 맏아들이 오랫동안 집안일을 해 왔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맏아들의 불만을 통해 더 깊은 문제를 보여 주십니다.
아들인데 왜 종살이라고 말할까?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보낸 세월을 「종살이해 왔다」고 말합니다. 노예로 섬기거나 종처럼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 세월을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아니라 종처럼 일한 시간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충실하게 명령을 따랐는지 말하며,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의 말속에서는 주인과 일꾼의 관계처럼 나타납니다.
이것은 작은아들의 이야기와 뜻밖의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작은아들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품꾼이 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맞아들였습니다. 반면 맏아들은 계속 아들로 살아왔지만, 자신은 아버지에게 종살이를 해 왔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아들이면서 품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들이면서 자신을 종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두 아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모두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자신의 역할과 보상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작은아들에게는 먹고살 수 있는 자리가, 맏아들에게는 자신의 성실함에 합당한 인정과 보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주려는 것은 그들의 계산보다 더 큽니다. 그분은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대하고 계십니다.
맏아들은 동생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그런데 아버지의 아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살림을 먹어 치운 이자가 오자 그를 위해 살찌워 기른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누가복음 15:30 · 본디새김
첫째, 창녀들과 어울렸다는 말은 맏아들의 주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야기 자체는 작은아들이 무절제하게 재산을 탕진했다고만 알려 줍니다. 맏아들이 실제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동생에 대한 분노와 경멸 속에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작은아들의 삶을 설명하는 객관적인 기록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맏아들은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와 동생 사이의 관계는 인정하면서도, 자신과 동생 사이의 관계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의 분노는 단순히 송아지 한 마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돌아온 동생을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15장의 첫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맞아 주시고 함께 식사하고 계시는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은 그 일을 불평합니다. 그들이 반드시 모든 율법을 잘못 이해했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맞아들이시는 일을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의 잘못을 비판할 근거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아들을 다시 얻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지 못하고, 그 분노 때문에 자신도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내 아들」에서 「이 네 형제」로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은 다 네 것이다.』」누가복음 15:31 · 본디새김
아버지는 맏아들을 꾸짖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얘야」는 자녀를 가리키는 말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표현입니다. 맏아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종살이를 해 왔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종이 아니라 자녀라고 부릅니다.
맏아들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있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내 것은 다 네 것이다」라는 말에서 이야기의 시작을 떠올려야 합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작은아들에게만이 아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은 자신의 몫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의 몫을 부정하지 않고, 작은아들이 돌아왔으니 맏아들의 재산까지 다시 나누어 주겠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온 뒤 새롭게 상속받을 몫이 있는지도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에게 베푼 환대를 자기 몫을 빼앗는 일처럼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동생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를 밀어내고 동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를 여전히 자신의 아들로 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바꾸어 놓은 한마디
「『그런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 네 형제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없어졌다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5:3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24절의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없어졌다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를 거의 그대로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네 형제」라고 말합니다.
맏아들은 동생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네 형제」라고 부릅니다. 맏아들이 자신의 말에서 지워 버린 관계를 아버지가 다시 되돌려 놓습니다.
돌아온 사람은 단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의 형제입니다. 이것이 잔치에 함께해야 할 이유입니다.
「마땅했다」(δέω)로 옮긴 동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반드시 하셔야 할 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일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자신이 잔치를 벌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돌아온 아들을 두고 기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맏아들의 판단 기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맏아들은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동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낭비했는지 계산하며 무엇이 공정한지를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른 사실을 보라고 합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고, 잃었던 아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정의와 자비가 서로 무관하다고 말하지 않고, 작은아들의 잘못이 사라졌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잘못을 기억하는 일이 아들이 돌아왔다는 기쁨을 영원히 막아서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여 줍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맞아들이시는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나님이 잃었던 사람을 되찾으시는 일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보여 주십니다. 문제는 이제 그 기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에서는 「다시 살아났고」에 해당하는 아네제센(ἀναζάω)이, 32절에서는 「살아났고」에 해당하는 에제센(ζάω)이 사용됩니다. 두 표현 모두 잃었던 아들이 다시 삶 가운데 돌아왔다는 의미를 전달하며, 이 차이만으로 서로 다른 신학적 사건을 설명한다고 볼 근거는 부족합니다. 「마땅했다」는 필요하다, 마땅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의 과거형입니다.
두 아들을 모두 찾아 나서는 아버지
이 비유를 마지막까지 읽으면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던 특징이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만 맞이하는 분이 아닙니다. 맏아들에게도 나갑니다.
작은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는 달려갔고, 맏아들이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을 때는 밖으로 나와 간청했습니다. 두 아들을 대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먼저 다가갑니다.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 열 닢 가운데 한 닢이 없어졌듯 두 아들 가운데 작은아들이 집을 떠났는데,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맏아들도 집 밖에 서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비유를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집을 떠나 관계가 끊어졌고, 맏아들은 집에 남아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문학적으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맏아들을 직접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며, 그가 집 밖에 있고 아버지가 나와 간청한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소외를 드러내는 해석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작은아들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가온 죄인들을, 맏아들의 이야기는 그들을 맞아들이는 일을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 비유를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은 맏아들이고 모든 세리들은 작은아들이라는 고정된 구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문제 삼는 것은 집단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종교적으로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자비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랫동안 잘못된 삶을 살아온 사람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 안에서도 두 아들의 모습이 서로 다른 때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가장 오래 보여 주시는 것은 두 아들의 부족함이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분노에 정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그와의 관계를 끊지 않고, 그를 자녀라고 부르며 잔치에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맏아들이 잔치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죄를 하찮게 만드는 기쁨이 아닙니다. 작은아들은 실제로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고, 아버지의 환대도 그가 재산을 탕진하지 않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회복된 관계의 기쁨이 잘못의 현실을 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잘못이 한 사람의 남은 삶과 모든 관계를 영원히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다시 형제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어려운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두 번째 문제까지 다루십니다. 이미 집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기쁨에 함께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그 어려움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맏아들은 여전히 화가 나 있고, 아버지는 그에게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동생과 함께 식사했는지, 끝내 들어가지 않았는지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 열린 결말에서 예수님이 처음부터 말씀을 들려주셨던 사람들에게는 아직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 맏아들이 실제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우리가 대신 정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했다」입니다.
집 안에서는 이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음악이 들리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 밖에는 아직 아버지와 맏아들이 서 있습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작은아들을 맞아들였고, 이제는 맏아들에게도 기쁨을 나누자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그 문밖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