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누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가

누가복음 14장은 한 사람의 집에서 시작합니다.

그 집에는 예수님이 초대되어 계십니다.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식탁에서 어디에 앉으려고 하는지, 집주인이 어떤 사람들을 초대하는지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식탁의 질서를 하나씩 뒤집어 놓으십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에게는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고, 자신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집주인에게는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사람들을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더 큰 잔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오기를 거절하자, 가난한 사람들과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주인은 길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초대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곧바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향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면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모습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예수님은 누구를 초대하시는가? 그리고 그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누가복음 14장은 이 두 질문을 한데 묶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소유하려 하며, 자신의 삶에서 누구에게 최종적인 권한을 내어 주는지를 바꾸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한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다음 사람들이 앉는 자리를 바꾸시고, 식탁에 앉을 사람들의 명단 자체를 바꾸십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따라오려는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진지한 결단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814장 본문 읽기 →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켜볼 때, 예수님은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4:1–6 본문 →

이야기는 안식일에 벌어집니다.

예수가 안식일에 바리새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빵을 먹으러 들어갔다. 그런데 그들이 그를 엿보고 있었다.누가복음 14:1 · 본디새김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몸이 굽은 여자를 고치셨습니다. 이번에도 안식일 치유가 등장하지만, 장소는 회당이 아니라 한 지도자의 집입니다. 「엿보고 있었다」는 단순히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말보다 강한 표현으로, 예수님의 행동에서 문제를 찾아내려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뜻밖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보아라, 그의 앞에 몸이 붓는 병을 앓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누가복음 14:2 · 본디새김

집주인이 정식으로 초대한 손님인지, 치료를 받으려고 찾아온 사람인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게 된 사람인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고쳐 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가 율법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안식일에 고쳐도 되느냐, 안 되느냐?」누가복음 14:3 · 본디새김

그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추상적인 율법 논쟁이 아니라, 그들 앞에 있는 병든 사람을 두고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는 그 사람을 붙들어 낫게 하고 돌려보냈다.누가복음 14:4 · 본디새김

그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본문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곧 이야기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고치신 일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에 곧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4:5 · 본디새김

「곧바로」 위험에 빠진 생명을 구하는 일은 미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망설여야 할까요? 물론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긴급한 상황과 오랫동안 앓던 사람을 치료하는 상황은 완전히 같지 않고, 안식일에 응급 상황과 그렇지 않은 치료를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두 경우를 다르게 판단할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바로 그 구분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는가를 묻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쉼과 회복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안식일 규정에 예외 하나를 추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해석할 때 고통받는 사람의 생명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이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누가복음 14:6 · 본디새김

처음에는 예수님의 질문에 침묵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설명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은 병에서 나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동에서 문제를 찾으려 할 때, 예수님은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식탁에서 벌어지는 다른 일을 눈여겨보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그의 병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휘드로피코스(ὑδρωπικός)는 몸에 체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되어 붓는 상태를 가리키는 고대 의학 용어로, 전통적으로 수종(水腫)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날의 의학 용어로는 부종과 연결되지만, 이 표현만으로 정확한 원인 질환까지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끝자리에 앉는가

누가복음 14:7–11 본문 →

그는 청함을 받은 이들이 어떻게 윗자리를 고르는지 눈여겨보고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했다.누가복음 14:7 · 본디새김

이 장의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살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식사 자리에는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특히 격식을 갖춘 식사에서는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는가가 그 사람에게 부여된 명예와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윗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윗자리에 앉았는데, 자신보다 더 존귀한 사람이 나중에 들어옵니다. 집주인이 자리를 내주라고 말하자 그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명예와 수치가 중요하게 여겨지던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고른 자리가 오히려 수치를 당하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청함을 받거든 가서 끝자리에 비스듬히 누워라.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에게 『친구여, 위로 올라오게』 하고 말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때 너는 너와 함께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운 모든 이 앞에서 영광을 얻을 것이다.」누가복음 14:10 · 본디새김

9절에서 끝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나 차지하는 자리이고, 10절에서 끝자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같은 자리이지만 그곳에 도달하는 길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높이려다가 낮아졌고, 다른 사람은 자신을 낮추었다가 높은 자리로 초대받습니다.

이 장면은 잠언 25:6–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서지 말라고, 내려오라는 말을 듣기보다 올라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낫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끝자리에 앉아 높은 자리로 불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영리한 처세술이라는 뜻일까요? 비유만 떼어 놓고 보면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끝자리에 앉은 사람이 결국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얻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이 비유의 의미를 더 넓혀 줍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누구나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4:11 · 본디새김

「낮아질 것이고」(ταπεινόω)와 「높아질 것이다」(ὑψόω)는 원문에서 모두 수동형입니다. 누가 그 일을 행하는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전체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지위를 뒤집으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누가복음 1:52에서 하나님이 권세 있는 사람들을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리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셨다고 찬양했습니다. 그 선언이 이제 한 식탁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펼쳐집니다.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다른 사람 앞에서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는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경쟁에서 한발 벗어나,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높이려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손님에게는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집주인에게는 전혀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애초에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가?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십시오

누가복음 14:12–14 본문 →

그는 자기를 청한 사람에게도 말했다. 「점심이나 저녁을 차리거든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들도 너를 도로 청해 그것이 네게 보답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누가복음 14:12 · 본디새김

친구나 가족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핵심은 초대한 사람들이 자신을 「도로 청해」 보답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식사 초대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초대하면 관계가 강화되었고, 비슷한 초대를 돌려받음으로써 자신의 명예도 확인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를 사랑하여 대접하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제 삼으시는 것은 초대하는 기준이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으로 결정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기준으로 잔치를 벌이면 부유한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앞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초대받습니다. 초대받기 어려운 사람들은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들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잔치를 벌이거든 가난한 이들과 몸이 성치 않은 이들과 다리를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을 불러라.」누가복음 14:13 · 본디새김

네 부류 모두 당시의 식사 관계에서 경제적·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장애가 있는 모든 사람이 가난했다거나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한데 묶으신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너는 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니 말이다.」누가복음 14:14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그들이 특별히 선하거나 경건하기 때문에 초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식탁은 서로의 지위를 확인하고 호의를 교환하는 자리가 아니라, 보답할 능력과 무관하게 사람을 맞아들이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돌려줄 수 있는가에서, 그 사람이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보답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 것 같은데, 다시 보답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누구에게 보답을 기대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가난한 사람에게 그 호의를 갚아야 한다는 부담을 지우지 않으십니다. 보답은 하나님의 미래에 맡겨집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의인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실 것이라는 유대교의 부활 소망과 연결됩니다. 다니엘 12:2–3에서도 죽은 이들의 부활과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을 보답을 계산하여 더 많은 이익을 쌓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도 마음껏 대접할 수 있는 이유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삶을 기억하신다면, 모든 호의를 인간 사이에서 즉시 정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푸는 사람은 상대방이 보답할지 계속 따지지 않아도 되고, 받는 사람은 갚을 수 없는 호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종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끊임없이 빚을 계산하는 관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자, 식탁에 있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합니다.

잔치를 마련했는데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4:15–24 본문 →

함께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이 가운데 하나가 이 말을 듣고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빵을 먹을 이는 복이 있습니다.」누가복음 14:15 · 본디새김

그의 말 자체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누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질문을 바꾸십니다. 누가 그 잔치에서 복을 누릴 것인가보다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큰 저녁 잔치를 차리고 많은 이를 청했다.」누가복음 14:16 · 본디새김
「그리고 저녁 잔치 시간이 되자 자기 노예를 보내 청함을 받은 이들에게 말하게 했다. 『오십시오. 이미 다 준비되었습니다.』」누가복음 14:17 · 본디새김

당시 큰 잔치에서는 미리 초대하고, 음식이 준비되었을 때 다시 사람을 보내 참석하도록 알리는 방식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잔치 시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초대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하나같이 마다하기 시작했다. 첫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보아야 하네. 부디 내 사양을 양해해 주게.』」누가복음 14:18 · 본디새김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으므로 시험해 보러 가야 한다고, 세 번째 사람은 아내를 맞았으므로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토지, 생산과 노동에 필요한 가축, 결혼. 모두 일상적인 삶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들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그 일들이 잔치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그들의 숨은 동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른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집주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이미 준비된 잔치보다 자신들의 현재 일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미 다 준비되었습니다.」 손님들이 음식을 마련하거나 장소를 준비하거나 비용을 나누어 부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잔치에 오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지 않습니다.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잔치를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한 재산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초대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빵을 먹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했던 손님에게도 이 비유는 불편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얼마나 복된지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 나라가 다가왔을 때 응답하는 것은 같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리로 노예를 보내는 주인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거절하자 주인은 화가 납니다. 그렇다면 잔치는 취소될까요? 주인은 전혀 다른 명령을 내립니다.

「노예가 와서 자기 주인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러자 집의 주인이 성이 나서 자기 노예에게 말했다. 『어서 도시의 대로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이들과 몸이 성치 않은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를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누가복음 14:21 · 본디새김

13절에서 예수님이 집주인에게 초대하라고 하신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잔치를 베풀어야 하는지 가르치신 뒤,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잔치의 주인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집주인에게 요구하신 환대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본받는 환대입니다.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초대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마련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말했다. 『주인님, 명령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자리가 있습니다.』」누가복음 14:22 · 본디새김

주인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노예에게 말했다. 『내 집이 채워지도록 큰길과 울타리 곁으로 나가서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여라.』」누가복음 14:23 · 본디새김

초대가 집 주변에서 도시로, 다시 도시 바깥의 길로 확장됩니다. 도시 바깥의 사람들을 이방인과 연결하는 해석이 있는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에서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여러 민족에게 전해지는 흐름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미 있는 연결입니다. 다만 비유 자체가 도시의 사람들은 유대인이고 바깥의 사람들은 이방인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첫 초대의 거절을 유대 민족 전체의 거절로, 나중의 초대를 유대인 전체를 대체한 이방인의 초대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초대받은 사람들의 거절과, 그 거절에도 불구하고 더욱 넓어지는 잔치의 초대입니다.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라는 말의 의미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여라」는 조심해서 읽어야 할 구절입니다. 이 동사에는 강제하다, 압박하다라는 강한 의미가 있어, 원어가 본래 단지 정중하게 초대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인은 사람들을 재판하거나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잔치에 데려오기 위해 노예를 보냈습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초대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거듭 권하고 강하게 설득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구절을 후대의 강제 개종이나 종교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명령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잔치 비유를 넘어서는 적용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집이 사람들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의 집에는 아직 더 많은 사람을 맞아들일 자리가 있습니다.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유의 마지막은 엄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함을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내 저녁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4:24 · 본디새김

이 말은 비유 속 집주인의 말로도,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이 청중에게 직접 하시는 선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처음 초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잔치가 준비되지 않아서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거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지를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답해야 할 필요까지 없애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을 떠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구원을 잔치로 나타내는 이미지는 성경의 소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25:6–8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모든 민족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마련하시고 죽음을 없애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또 신명기 16:11–14에서는 절기를 기뻐할 때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도 함께 기뻐하도록 명령합니다. 이 본문들은 각각 이스라엘의 절기 생활과 종말론적 구원의 소망이라는 고유한 문맥을 가지고 있지만,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식탁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23절의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여라」(ἀναγκάζω)는 그리스어 아낭카손으로, 동사 아낭카조의 명령형입니다. 다른 문맥에서는 물리적 강제나 위협에 의한 강요를 나타낼 수도 있으며, 강한 권유와 설득으로 읽는 해석이 단어 자체에서 강제의 가능성을 지우는 것은 아니고 문맥에 근거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24절의 말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내 저녁 잔치」는 집주인의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표현과 복수형 「너희」는 예수님이 청중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형식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원문에 이 둘을 구분하는 명확한 표지가 없기 때문에 양쪽 읽기가 가능합니다.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씀

누가복음 14:25–27 본문 →

많은 무리가 그와 함께 가고 있었다. 그가 돌아서서 그들에게 말했다.누가복음 14:2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식탁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침을 듣고 싶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가족보다 자신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기라고 완곡하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워하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워하다」(μισέω)는 일반적으로 증오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이므로, 본문의 강한 표현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랑과 미움을 우선순위나 선택을 나타내는 대조적인 언어로 사용하기도 하고, 마태복음 10:37의 병행 말씀은 예수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미워하다」는 가족에 대한 악의나 증오를 명령한다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다른 모든 관계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강한 대조적 표현으로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가족을 사랑하되 예수님을 조금 더 사랑하라는 부드러운 권면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강한 표현을 남겨 두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실제로 가족관계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가족은 생계와 재산,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의 중요한 기반이었고, 가족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삶의 현실적인 손실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표현은 자신을 해치거나 자신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자신의 안전과 생존마저 무조건 최우선의 가치로 놓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온다는 것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7 · 본디새김

오늘날 십자가는 흔히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먼저 로마의 처형 도구였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습은 공개적인 수치와 고통 속에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따르는 일이 극심한 수치와 박해, 심지어 죽음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과 「내 뒤를 따라오는」 일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무관한 고난을 찾아다니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따르는 길에서 그러한 고난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이미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9:22). 예수님께서는 안전한 곳에 머무시면서 제자들에게만 희생을 요구하시는 스승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걸어가고 계신 길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보통의 스승이라면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의 가족과 재산과 생명보다도 자신을 따르는 일이 우선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사상에 동의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랑과 미움을 대조적 언어로 쓰는 예로 창세기 29:30–31이 있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고, 이어서 본문은 하나님이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셨다고 기록하는데, 히브리어에서는 이 대목에 「미움받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문맥은 야곱이 레아를 반드시 감정적으로 증오했다는 뜻보다, 라헬에 비해 레아가 덜 사랑받고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끝까지 지을 수 있는가, 끝까지 싸울 수 있는가

누가복음 14:28–33 본문 →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요구를 말씀하신 다음 두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하나는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하려는 왕입니다. 두 사람 모두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앉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계산해야 합니다.

기초만 놓고 끝내지 못한 망대

「그도 그럴 것이,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세우려 하면서 먼저 앉아 비용을 셈해 다 지을 만큼 가진 것이 있는지 따져 보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4:28 · 본디새김

계산하지 않으면 기초는 놓았지만 건물을 완성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비웃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짓기 시작했지만 다 짓지 못했다.』」누가복음 14:30 · 본디새김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일보다 완성하는 일입니다. 무리와 함께 걸어가는 것은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은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열광이 끝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큰 열정만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자신을 따르는 일이 어떤 선택인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만 명으로 이만 명을 상대하는 왕

「또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싸우러 가면서 먼저 앉아 이만 명을 이끌고 자기를 치러 오는 이에게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4:31 · 본디새김

상대방은 두 배입니다.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왕은 상대 왕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절을 보내 화친을 청할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가 시작한 일을 완성할 능력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두 번째 비유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두 비유를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라는 일반적인 처세술로 읽으면 마지막 문장이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포기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33 · 본디새김

망대 비유만 생각하면 제자가 되기 위해 충분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가진 것을 다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 요구는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것까지 내려놓을 준비를 하는 일입니다. 전쟁을 앞둔 왕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듯,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예수님의 부르심보다 앞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가진 것을 다 포기한다는 것

「포기하다」는 작별하다, 떠나보내다, 관계를 끊고 떠나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말입니다. 14:33에서는 자신의 소유 전체와 관계를 끊거나 그것을 내려놓는다는 강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제자가 재산을 전부 처분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여기에는 실제로 해석과 적용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이 말씀을 직접적으로 읽어, 실제로 소유를 떠나보내고 공동체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삶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2:44–45와 4:32–35에서 초대 신자들이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 이러한 실천과 연결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일률적인 무소유 규정보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권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19:1–10의 삭개오는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하며,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십니다. 반면 누가복음 18:22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부유한 지도자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본문들을 종합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에서 정확히 같은 재산 처분 방식을 요구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14:33의 강한 명령을 마음속으로만 소유를 포기하면 된다는 말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 소유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소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사용될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실제로 떠나보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최종적인 주인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장의 앞부분을 다시 보게 합니다. 큰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과 소와 결혼을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밭도, 소도, 가족도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보다 우선한다면 결국 예수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포기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아포탓소마이(ἀποτάσσομαι)입니다. 누가복음 9:61에서는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겠다는 말에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무엇이 문제인가

누가복음 14:34–35 본문 →

예수님께서는 제자도에 관한 긴 가르침을 소금에 관한 짧은 말씀으로 끝내십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좋다. 그런데 소금까지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소금에 맛이 더해지겠느냐?」누가복음 14:34 · 본디새김

「그러므로」는 이 말씀을 앞의 제자도와 잇습니다.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특성 때문에 유용합니다. 그 특성을 잃는다면 더 이상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에게 요구되는 본질적인 충성을 잃어버린다면, 제자라는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소금이 어떻게 짠맛을 잃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이 갈리지만, 비유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땅에도 거름 더미에도 쓸모가 없어 밖으로 내버린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누가복음 14:35 · 본디새김

마태복음은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는 문맥에서 이 말씀을 전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포기와 헌신에 관한 말씀 뒤에 소금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소금의 비유는 제자가 자기 역할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소금은 여전히 소금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는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들은 말씀을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받아들이라는 요청입니다.

조금 더 깊이

순수한 염화나트륨은 일반적인 조건에서 짠맛을 잃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고대의 소금에 다른 광물질이나 불순물이 섞여 있었으며, 소금 성분이 빠져나간 뒤 쓸모없는 물질이 남는 현상을 가리켰을 수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소금이 짠맛을 잃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극단적인 비유라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떤 소금의 물리적 상태를 염두에 두셨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5:13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힌다고 기록합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 — 자리를 내어 주시는 분,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시는 분

누가복음 14:1–35 본문 →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병든 한 사람을 고치시고, 자리다툼을 보시며, 초대받을 사람들의 명단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그 잔치의 주인은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골목으로, 다시 큰길과 울타리 곁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돌려줄 수 있는 사람들만을 초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초대가 아무런 응답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자격과 능력으로 구매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지만, 그 나라에 참여하는 일은 이전에 붙잡고 있던 모든 우선순위를 그대로 유지해도 되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값없이 초대하시지만, 자신을 따르는 삶이 값싼 일이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포기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향한 환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높은 자리를 포기하면 다른 사람이 앉을 자리가 생깁니다. 보답받을 권리를 내려놓으면 보답할 수 없는 사람과 식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소유를 자신의 절대적인 권리로 붙잡지 않으면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포기가 자동으로 사랑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가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관계와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14장은 화려한 잔치의 장면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 위에서 끝납니다. 그들은 누가 초대받는지,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으시고,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을 마치십니다.

길 위에는 여전히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서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계속 예수님을 따라갈 것인지가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