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돌아온 사람과 뒤돌아보지 말아야 할 사람들
누가복음 17장에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는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가는 동안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돌아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장의 후반부에서는 정반대의 명령이 등장합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해라.」 롯의 아내는 소돔에서 빠져나왔지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드러나는 날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밭에 있는 사람도 뒤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한 사람은 돌아왔기 때문에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고치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반면 롯의 아내가 돌아본 것은 자신이 떠나야 했던 소돔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은혜를 베푸신 분께 향했고, 다른 사람은 떠나야 할 것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이 두 장면이 의도적인 문학적 대조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 장에 놓인 두 장면을 함께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믿음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합니까?
이 질문은 장의 첫머리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루에 일곱 번 돌아와 잘못을 뉘우친다고 말하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 명령받은 일을 다한 종이 특별한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비유, 열 명 가운데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하는 장면, 그리고 이미 그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장차 인자가 드러나는 날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모든 장면을 관통하는 것은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믿음이 누구를 향하는가, 그 믿음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을 의지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사람 하나를 귀하게 여기시고,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며, 자신에게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시는 분으로서, 장차 자신이 많은 고통을 겪고 버림받으실 것과 마지막에 드러날 자신의 날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사람을 넘어뜨리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을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누가복음 17: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일이 전혀 없는 세상이 곧 올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세상에서 피하기 어렵게 일어난다는 사실과, 그 일을 일으킨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지 강렬한 장면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런 사람은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죄에 빠뜨리느니, 차라리 목에 맷돌을 매단 채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누가복음 17:2 · 두루새김
맷돌은 곡식을 갈기 위해 사용하는 무거운 돌입니다. 그런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그리는 끔찍한 형벌의 장면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그런 사람을 바다에 던져 처벌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강한 비교를 통해 다른 사람의 믿음과 삶을 해치는 책임의 무게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 연약하거나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향력이 크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으십니다. 작고 연약한 사람 하나가 넘어지는 일도 매우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곧바로 방향을 바꿉니다.
죄를 꾸짖으면서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라. 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어라.」누가복음 17:3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명령이 나란히 있습니다.
꾸짖으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용서해야 한다는 이유로 잘못을 모른 척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잘못한 사람이 돌아올 길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명령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진지하게 다루기 때문에 회개가 중요하고, 회개가 있을 때 관계를 회복할 길을 열어 두기 때문에 용서가 중요합니다.
「꾸짖고」는 감정적으로 모욕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라는 뜻이 아니라,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바로잡도록 요구하는 행동입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는 해로운 행동을 다시 허용하거나, 위험한 관계 안에 무조건 머물러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죄를 지은 형제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가르치지만, 폭력이나 학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어떤 보호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한 것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말고, 회개하는 사람을 영원히 죄인으로만 붙잡아 두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요구를 더욱 어렵게 만드십니다.
「하루에 일곱 번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내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라고 해도 용서해 주어라.」누가복음 17:4 · 두루새김
이것을 하루에 정확히 일곱 번까지만 용서하고 여덟 번째부터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제한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숫자는 반복되는 잘못과 반복되는 용서의 어려움을 강조합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나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매번 「내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라고 말하면, 과연 진정으로 회개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질문에 관한 모든 경우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죄를 짓는 사람 때문에 마음이 굳어지고,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 쉬운 상처받은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분명히 꾸짖는 일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음을 열어 용서하는 일은 더욱 어려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일」(σκάνδαλον)로 옮긴 말은 본래 덫이나 함정과 관련된 말로 사용되었고,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거나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원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작은 사람들」을 어린아이로 보는 읽기는 누가복음 9:46–48에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고 그를 받아들이는 일을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과 연결하신 장면에 근거합니다. 제자 공동체의 연약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읽기는, 마태복음 18:6에서도 「작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연결된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믿음이 얼마나 많아야 용서할 수 있을까
사도들이 주님께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7:5 · 두루새김
그들이 정확히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요청은 하루에 일곱 번 돌아와 잘못을 뉘우친다고 말하는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씀 바로 뒤에 놓여 있습니다. 반복해서 용서하고,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려면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기대와 조금 다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다면, 이 뽕나무에게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겨라』라고 해도 그 나무가 너희 말을 따를 것이다.」누가복음 17:6 · 두루새김
겨자씨는 작은 씨앗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옮겨 심으라고 하시는 것은 뿌리가 강하게 뻗는 뽕나무이고, 그 나무가 심기는 곳은 다른 땅이 아니라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바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은 믿음의 양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더 많은 믿음을 가져야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작은 믿음조차 하나님께 의지할 때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큼 믿음이 모이면 작은 기적을 일으키고, 큰 나무만큼 믿음이 쌓이면 더 큰 기적을 일으킨다는 식의 계산이 아닙니다.
믿음의 능력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그 믿음이 누구를 신뢰하는가와 관련됩니다.
하루에 일곱 번 돌아오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때로 뿌리 깊은 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는 일만큼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충분히 커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순종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작은 믿음으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물론 이 비유를 믿음만 충분하면 원하는 기적을 반드시 일으킬 수 있다는 보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조종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양을 계산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이야기에서 그 믿음이 어떤 태도로 나타나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주인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에서 「뽕나무」(συκάμινος)로 옮긴 낱말은 일반적으로 뽕나무 종류와 연결되며, 누가복음 19:4에서 삭개오가 올라가는 돌무화과나무를 가리키는 낱말과는 구별됩니다.
명령받은 일을 다한 종은 왜 쓸모없다고 말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 종은 하루 동안 밭을 갈거나 양을 쳤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지만, 주인은 그를 곧바로 식사 자리에 눕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지 않겠느냐? 『내 저녁을 차려라. 허리에 띠를 매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시중을 들어라. 그 뒤에 네가 먹고 마셔라.』」누가복음 17:8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사람이 다시 주인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당시 노예제도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주인과 종의 관계를 비유의 배경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종에게 기대하는 일은 그가 맡은 의무입니다. 그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주인이 자신에게 특별한 빚을 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종이 시킨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누가복음 17:9 · 두루새김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순종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 주셔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너희도 명령받은 일을 다 하고 나면 이렇게 말해라.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누가복음 17:10 · 두루새김
여기서 「쓸모없는」이라는 말은 오해하기 쉽습니다.
원문의 낱말은 쓸모없다, 유익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종은 밭을 갈거나 양을 쳤고, 주인이 명령한 일을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존재를 깎아내리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보기는 어렵고, 주인에게 특별한 보상을 요구할 만한 공로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앞의 용서와도 연결됩니다.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돌아왔을 때 용서했다면, 그것을 특별히 대단한 공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용서가 제자에게 요구되는 마땅한 삶의 일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용서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비유에서는 주인이 종을 섬기지 않았는가?
누가복음 12:37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돌아와 깨어 기다리던 종들을 식사 자리에 눕히고 직접 시중을 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요?
두 비유는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2장의 비유에서는 돌아온 주인이 자기 사람들을 얼마나 놀랍게 맞이하고 대접하는지가 중심이었고, 17장의 비유에서는 제자가 자신의 순종을 어떤 태도로 이해해야 하는지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임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기쁘게 맞이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순종을 하나님께 내밀어 그분의 은혜를 요구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십니다.
믿음은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이루었는지 계산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병든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왜 한 사람만 돌아왔을까
누가는 다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고 계셨습니다.누가복음 17:11 · 두루새김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이웃해 있지만, 두 지역 사람들 사이에는 오랜 종교적·역사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경계는 단순히 지리적인 경계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떤 마을로 들어갈 때 나병에 걸린 남자 열 사람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누가복음 17:12 · 두루새김
이 짧은 표현에는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질환을 가진 사람은 공동체와 거리를 두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멀찍이 서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결 규정과 사회적 거리의 문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서 목소리를 높여 「예수 스승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몸에 손을 얹거나 직접 깨끗해졌다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뜻밖의 명령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은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습니다.누가복음 17:14 · 두루새김
레위기 14장에서는 피부 질환에서 회복된 사람이 제사장에게 확인받고 정결 절차를 거치도록 규정합니다. 제사장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정결 상태를 확인하고 공동체의 종교적 생활로 돌아오는 과정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순간, 그들은 아직 깨끗해졌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깨끗해진 다음에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라고 명령받았습니다.
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나고, 길을 가는 동안 변화가 일어납니다. 병을 고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눈에 보이는 변화가 나타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믿음은 모든 결과를 미리 확인한 다음에만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행동하는 태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깨끗해진 사람은 열 명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왔습니다.누가복음 17:15 · 두루새김
깨끗해진 사람은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중에 「열 사람이 모두 깨끗해지지 않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계속 제사장들에게 가고 있었을 수도 있고, 자신들이 나은 것을 기뻐하며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어디로 갔고 왜 그렇게 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열 명이 깨끗해졌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이 나은 일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다른 아홉 사람과 함께 멀찍이 서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예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누가복음 17:16 · 두루새김
누가는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바로 이 순간에 밝힙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알려 주지 않고, 그가 돌아와 감사하는 장면까지 보여 준 다음 그가 누구인지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가 느끼는 놀라움이 커집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종교적으로 경계할 수 있었던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의 일을 알아보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보다 더 착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사람이 누구인가는 종교적 소속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른 민족인 사람
「다른 민족인 이 사람 말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느냐?」누가복음 17:18 · 두루새김
「다른 민족인 이 사람」은 다른 민족이나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이 구분은 단순히 언어가 다르다는 뜻을 넘어, 누가 거룩한 장소에 들어갈 수 있는가와도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른 민족인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밀어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믿음과 감사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의 출신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막는 장벽이 되지 않습니다.
깨끗해진 것과 구원받은 것은 어떻게 다른가?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누가복음 17:19 · 두루새김
14절에서는 열 사람이 「깨끗해졌습니다」라고 기록했고, 15절에서는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도 세 표현의 동사가 모두 다릅니다.
마지막 동사 소조(σῴζω)는 병에서 구원하거나 낫게 한다는 의미로도, 더 넓게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몸의 치유와 무관한 순전히 영적인 구원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말로만 이해하면 누가가 마지막에 다른 동사를 선택한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열 사람 모두 깨끗해졌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한 사람에게 특별히 믿음과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확정적인 판결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마지막 운명은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돌아온 사람은 자신이 받은 치유를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알아보았고,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과 예수님께 감사하는 일이 같은 장면 안에 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치료 기술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열 명 모두 멀찍이 서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한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앞에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혼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깨끗해지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가라는 명령이 아니라, 구원을 선언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일어나 가라.」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도움을 베푸신 분을 알아보고 그분께 돌아오는 관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이미 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겼지만, 유대인들과는 예배의 중심지가 어디인지, 누가 올바른 신앙을 이어 왔는지에 관한 생각이 달랐고, 그리심산을 중요한 거룩한 장소로 여겼습니다. 성경에서 나병이라고 부르는 질환은 오늘날의 한센병과 반드시 동일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3–14장은 여러 피부 질환과 정결 상태를 다루며, 특히 13:45–46은 해당 질환을 가진 사람이 부정한 상태를 알리고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도록 규정합니다. 18절의 「다른 민족」(ἀλλογενής)으로 옮긴 낱말은 신약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등장하는데, 제2성전 시대 예루살렘 성전 안쪽의 제한된 구역으로 외국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그리스어 비문에도 사용되었고, 그 비문의 일부가 발견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 사람이 실제로 성전의 어떤 구역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까지 이 구절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는지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살펴서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누가복음 17:20 · 두루새김
질문은 「언제」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에서 마지막 때를 기다리던 기대와 연결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악을 심판하며, 자신이 다스리시는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실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날짜나 징조를 알려 주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이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자세히 살펴 시기와 장소를 알아맞힐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눈에 보이는 어떤 일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열 명은 실제로 몸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문제는 그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아라, 여기 있다』거나 『저기 있다』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17:21 · 두루새김
「너희 가운데」에 해당하는 원문 엔토스 휘몬(ἐντός)은 읽기가 갈립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된다는 「너희 안에」, 지금 예수님을 통해 그들 사이에 나타나 있다는 「너희 가운데」,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의 일인지, 예수님과 함께 이미 그들 앞에 와 있는 현실인지가 달라집니다. 이 문맥에서는 「너희 가운데」라는 읽기를 선호하지만, 다른 번역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으시는 분은 바로 조금 전 열 명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다스림이 이미 자신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1:20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쫓으신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에게 이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귀신을 내쫓으시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세상 가운데 들어왔다는 표징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보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면 모든 일이 완성된 것일까요? 악과 고통은 끝났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 문제를 다루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엔토스는 안쪽이나 내부를 나타내는 낱말이어서 「너희 안에 있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져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다가와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미 가운데 있는 나라와 장차 드러날 인자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인자의 날 가운데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보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7:22 · 두루새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장차 인자의 날을 간절히 바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나라의 모든 일이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악한 영을 내쫓으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병과 고통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자의 날 가운데 단 하루라도」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두 가지로 읽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함께하시는 날들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그리움으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고, 이어지는 번개와 심판의 묘사를 근거로 장차 인자가 영광스럽게 드러나시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는 상황으로 읽기도 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두 번째 읽기에 상당한 근거가 있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저기 있다』 또는 『보아라, 여기 있다』라고 할 것이다. 그곳으로 가지도 말고 뒤쫓지도 마라.」누가복음 17:23 · 두루새김
제자들은 예수님의 날을 기다리다가 조급해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서 어디에 나타나셨다고 말하면 찾아가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주장들을 뒤쫓지 말아야 할까요?
「번개가 번쩍이며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듯, 인자도 자기 날에 그렇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7:24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이 지켜보며 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번개가 하늘 전체에 비치는 것처럼 인자가 드러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앞의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문제를 다루셨고, 이 말씀은 장차 인자가 드러나시는 날이 은밀한 장소에서만 확인해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누군가가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와서 인자가 어느 곳에 나타나셨다고 알려 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번개가 하늘을 가로질러 빛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고난받으셔야 한다
「그러나 먼저 인자는 많은 고통을 겪고 이 세대에게 버림받아야 한다.」누가복음 17:25 · 두루새김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스럽게 드러나실 날을 말씀하시다가, 그보다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스럽게 드러나시는 날보다 앞에 고난과 거부가 있습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예수님의 사명을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압도하는 권능으로 세상을 즉시 굴복시키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만, 그 과정에서 고난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길을 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면 왜 그 나라를 가져오시는 분이 거부당하십니까? 누가는 그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분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영광스럽게 드러나실 인자는 먼저 버림받으시는 인자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고난을 피하시는 능력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감당하시는 순종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기다리는 것은 세상의 권력자처럼 힘을 과시하는 통치자의 등장만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들을 위해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서 마침내 드러나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날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설명하시기 위해 구약의 두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날들과 롯의 날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통을 겪고」(πάσχω)와 「버림받아야」(ἀποδοκιμάζω)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누가복음 9:22에서도 등장했습니다. 다만 9:22에서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인자를 버릴 것이라고 하셨고, 여기서는 「이 세대」에게 버림받으신다고 하십니다. 특정한 종교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가시는 세대 전체의 거부로, 범위가 더 넓게 표현됩니다. 또한 다니엘 7:13–14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며, 그 본문은 짐승으로 상징되는 세상 제국들의 폭력적인 지배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여 줍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인자가 고난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길을 먼저 걸어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의 환상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받으시는 인자가 어떤 길을 통해 그 사명을 이루시는지 예수님의 삶 안에서 새롭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날들
예수님은 「노아의 날들에 있었던 일이 인자의 날들에도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시며 창세기 6–9장의 홍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폭력이나 타락을 먼저 언급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던 모습을 묘사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그러다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누가복음 17:27 · 두루새김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악한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평범한 일상에 속한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평범한 일상과 홍수가 닥치는 일을 나란히 놓으십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셨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일상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결정적인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롯의 이야기는 더욱 구체적입니다.
「롯의 날들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누가복음 17:28 · 두루새김
이번에는 경제활동도 등장합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갈 것을 예상한다는 뜻이고, 씨를 심는다는 것은 앞으로 거둘 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사고파는 일 역시 내일도 거래와 생활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롯이 소돔을 떠난 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처럼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창세기 19장). 노아의 이야기와 롯의 이야기는 같은 구조를 가집니다.
일상생활이 계속됩니다.
결정적인 날이 옵니다.
그리고 이전의 질서는 무너집니다.
「인자가 드러나는 날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누가복음 17:30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모든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종말만 기다리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일, 결혼하는 일, 사고파는 일, 농사를 짓고 집을 세우는 일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들입니다. 문제는 그 일상생활이 앞으로도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태도입니다.
그런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아볼 필요가 없다는 확신으로 바뀌면 문제가 됩니다. 인자가 드러나시는 날은 인간이 자신의 일상적인 계산 속에 포함시켜 관리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시기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기를 계산하는 지식을 주시기보다, 그때가 왔을 때 어떤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점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롯의 아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는 노아 시대 사람들의 악함을 분명히 말합니다(창세기 6:5, 11–13). 누가복음의 예수님도 그 악함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 자리에서는 사건이 닥치기 전까지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계속했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해라
「그날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물건이 있어도 가지러 내려가지 마라. 밭에 있는 사람도 뒤로 돌아가지 마라.」누가복음 17:31 · 두루새김
그날에는 자신이 가진 물건을 되찾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설명하시면서 한 사람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해라.」누가복음 17:32 · 두루새김
롯의 가족은 소돔에서 빠져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고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기 19:26). 창세기는 그가 뒤를 돌아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탐욕 때문에 돌아보았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떠나야 할 곳에서 벗어나라는 명령에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바로 앞에서 집 안의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는 명령은 과거의 삶과 소유를 붙잡으려는 태도에 대한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려 낼 것이다.」누가복음 17:33 · 두루새김
롯의 아내 이야기와 이어진 이 말씀에서 목숨을 지킨다는 것은 생명을 보호하려는 정상적인 본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소유와 안전을 우선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먹고 마시고 집을 짓고 재산을 모으며 자신의 삶을 지키려 애쓰는 필요를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을 따르는 길에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앞에서 자신이 먼저 많은 고통을 겪으시고 버림받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자신의 생명을 함부로 위험에 빠뜨리거나 죽음을 추구하라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무엇을 궁극적인 안전의 근거로 삼는가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사람이 결국 참된 생명을 잃을 수 있고, 그 부르심을 따라 자신의 안전까지 내려놓는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의 앞부분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롯의 아내는 모두 방향을 바꾸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구원을 베푸신 분을 향했고 롯의 아내는 벗어나야 할 곳을 돌아보았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실제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인자가 드러나시는 날에 일어날 구분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지중해 지역의 집에는 평평한 지붕이 사용되기도 했고, 지붕 위에서 여러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31절은 현실적인 장면입니다. 33절의 말씀은 누가복음 9:24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다른 결과를 맞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은 데려가질 것이고 다른 사람은 남겨질 것이다.」누가복음 17:34 · 두루새김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두 여자가 함께 맷돌로 곡식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지고 다른 사람은 남겨집니다. 같은 공간에 있고 같은 일상을 공유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결과는 달라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이 겉으로 보이는 소속이나 생활이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이 서로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데려가지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일까?
한 사람은 데려가지고 다른 사람은 남겨집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는 사람일까요?
흔히 데려가지는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여 데려가시는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롯이 소돔에서 이끌려 나와 보호받았던 장면을 생각하면 그렇게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반면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홍수에 휩쓸려 사라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데려가지는 것이 오히려 심판으로 끌려가는 이미지가 될 수 있습니다. 원문의 수동형 동사만으로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특정한 종말의 시간표나 휴거의 세부 과정을 확정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누가 데려가지는지, 어디로 데려가지는지, 누가 그 사람을 데려가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강조하는 것은 인자의 날에 이루어질 구분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서로 다른 결과를 맞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모여드는 새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도 모여들 것이다.」누가복음 17:37 · 두루새김
그들이 사람들이 데려가지는 장소를 묻는지, 심판과 구분이 이루어지는 곳을 묻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지명을 알려 주지 않으시고, 아주 강렬한 이미지로 대답하십니다.
이 속담은 여러 갈래로 읽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는 읽기, 심판이 반드시 임해 피할 수 없다는 읽기, 독수리를 로마 군단의 상징으로 보아 예루살렘의 파괴를 암시한다는 읽기입니다. 이 속담이 어떤 한 가지 의미만을 의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집단과 모든 요소를 하나씩 짝지어 맞추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에 지리적인 정보를 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인자가 드러나시는 날은 번개가 하늘을 가로질러 빛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새들이 모이듯, 그 일이 일어날 때에는 분명한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사본에는 두 사람이 밭에 있다는 36절이 있지만,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 등 주요 고대 사본에는 없으며 마태복음 24:40의 같은 내용의 구절이 누가복음에 추가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두루새김 본문도 이 절을 생략하여 35절 다음에 37절이 이어집니다. 34–35절에 대해서는 두 해석을 모두 고려하면서 번역에서 가능한 한 그 모호함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37절의 원문 낱말은 독수리를 가리키지만, 고대 언어 사용에서는 독수리와 죽은 동물을 먹는 큰 맹금류를 가리키는 범위가 오늘날의 분류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어, 이 문맥을 근거로 죽은 동물을 먹는 새로 번역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욥기 39:27–30과도 연결되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은 새들이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먼 곳의 먹이를 바라보며 죽임당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욥기의 본래 문맥은 인간이 완전히 통제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첫째 읽기는 시체가 있는 곳에 새들이 모이듯 심판의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보고, 둘째 읽기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그 일을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셋째 읽기에 대해서는, 이 속담 자체가 로마 군단을 직접 가리킨다는 분명한 설명이 본문에 없습니다.
믿음이 향하는 곳 — 누가복음 17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
누가복음 17장의 가르침 한가운데에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보다,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면서도 인자가 영광스럽게 드러나실 날을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이 먼저 많은 고통을 겪고 이 세대에게 버림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의 예수님은 고난받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마지막에 번개처럼 드러나실 인자입니다.
이 장의 처음에서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장 끝에 이르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얼마나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신뢰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실제 삶에서 드러납니다.
반복해서 용서해야 하는 형제 앞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알아보는 순간에 드러납니다.
자신의 소유와 안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드러납니다.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은 길을 가다가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길을 멈추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누가는 그 사람이 이후 어느 길로 갔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게 된 그 사람과, 장차 인자가 드러나실 날을 기다려야 하는 제자들을 같은 장 안에 남겨 둡니다.
그들은 아직 길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셨고, 앞으로 자신의 날에 드러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그들이 따라야 할 분은, 다른 사람들이 「저기 있다」고 외치는 낯선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