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무엇이 생명을 지켜 주는가
사람은 두려울 때 무엇인가를 붙잡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우면 자신을 감추려 하고, 미래가 불안하면 재물을 쌓아 두려 합니다. 중요한 것을 잃을까 두려우면 더 철저하게 통제하려 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우면 모든 것을 미리 알아 두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의 모습을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는 뜻밖의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곧바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재물이 넉넉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부르시면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주인을 위해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정작 주인이 돌아오면 그 종들을 식사 자리에 눕게 하고 직접 시중을 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를 주러 오셨을 것 같은 예수님께서 자신은 땅에 불을 던지고 갈라짐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말씀들에는 공통된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도, 많은 재산도, 미래에 대한 치밀한 계획도,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도 삶의 궁극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단순히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작은 생명까지 기억하시는지, 자신의 백성에게 무엇을 주기를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을 어떻게 맞이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 장의 한가운데에는 그 모든 말씀의 근거가 되는 선언,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셨다」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이야기는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해라.」누가복음 12:1 · 두루새김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먼저 경고하십니다. 앞 장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벌어진 갈등이 이 경고의 직접적인 배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다시 비난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제자들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누룩은 반죽 속에 섞이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위선도 그와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다가 조금씩 실제의 자신과 남들에게 보여 주는 자신이 달라지고,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사는 일보다 사람들 앞에서 경건하게 보이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덮어 둔 것은 모두 드러나고, 숨겨 둔 것은 모두 알려질 것이다.」누가복음 12:2 · 두루새김
아무리 훌륭한 모습으로 자신을 감추어도 실제의 모습은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3절을 보면 의미가 조금 더 넓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둠 속에서 한 말은 모두 밝은 데서 들릴 것이다. 방 안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도 지붕 위에서 널리 전해질 것이다.」누가복음 12:3 · 두루새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27에서는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이 공개적으로 선포하라고 명령하시지만, 누가는 제자들이 은밀하게 말한 것이 장차 공개적으로 알려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위선이 폭로된다는 경고로도, 지금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제자들의 말과 증언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문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이 장은 어느 하나로 의미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진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누구인가
「나의 친구인 너희에게 말한다. 몸을 죽일 수 있어도 그 뒤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누가복음 12:4 · 두루새김
「나의 친구」라는 다정한 호칭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매우 엄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믿음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그 위험을 더 큰 현실 속에 놓으십니다.
사람이 가진 권한은 몸을 죽이는 데까지 미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권한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알려 주겠다. 죽인 뒤에 게헨나에 던져 넣을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해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해라.」누가복음 12:5 · 두루새김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골짜기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구약에서 이 지역은 우상숭배와 자녀 희생의 악행과 연결되며(예레미야 7:31–32), 후대 유대교 전승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발전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두려움은 더 무서운 존재를 찾아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누가 사람의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모두 세어져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누가복음 12:7 · 두루새김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심판하실 권위를 가진 분이면서도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명조차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는 작은 동전인 두 아사리온에 팔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십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어져 있다는 말씀도 감시의 위협이 아니라, 문맥상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시인과 하늘에서의 시인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인정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인정할 것이다.」누가복음 12:8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개의 장면이 마주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현재의 장면과,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인정하시는 미래의 장면입니다. 다니엘 7:13–14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권위를 받는데, 예수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시며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의 운명을 하나님의 하늘 법정과 연결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일은 위험할 수 있지만, 그 말은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2:10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많은 독자에게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자신이 과거에 무심코 한 말이나 믿음이 흔들렸던 순간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떤 표현을 한 번 입 밖에 냈는가를 구분하는 규칙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3:28–30의 병행 문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더러운 영의 능력이라고 비난한 것이 이 경고의 배경이며, 누가복음에서도 바로 앞 장에 그와 같은 비난이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독하는 일을 하나님의 영이 증언하는 일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악한 것으로 거부하는 태도와 연결하는 해석에는 강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 그 죄가 성립하는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를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에는 신학적 논의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회당이나 관리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 끌려가도 어떻게 자신을 변호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때 성령께서 너희가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누가복음 12:12 · 두루새김
성령을 거부하지 말라는 경고와 성령께서 너희를 도우실 것이라는 약속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이후 사도행전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펼쳐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서 말하고(사도행전 4:8–12), 스데반이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들 앞에서 증언합니다(사도행전 6:10, 7장). 누가는 제자들이 얼마나 용감했는지만이 아니라, 그들의 증언을 도우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이기는 제자의 삶은 자기 확신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기억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곳간은 가득 찼지만 생명은 지킬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실 때,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전혀 다른 문제를 꺼냅니다.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물려받은 재산을 저와 나누라고 제 형제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2:13 · 두루새김
물려받은 재산을 나누는 일은 율법과 관련된 문제였고(신명기 21:15–17에는 맏아들의 상속권에 관한 규정도 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다툼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함께 판단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에게 재산을 나누라고 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을 나누어 줄 사람으로 세웠느냐?」누가복음 12:14 · 두루새김
예수님은 이 사람의 상속권이 정당한지 말씀하지 않으시고, 형제가 재산을 부당하게 독차지했는지도 본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재산을 공정하게 나누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법적 판결을 내리시는 대신, 그 문제 뒤에 숨어 있을 수 있는 더 근본적인 위험을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욕심을 경계하고 조심해라. 재산이 아무리 넉넉해도, 사람의 생명이 그 재산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누가복음 12:15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신 다음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개인의 재산 다툼이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가르침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떤 부자의 밭에서 곡식이 풍성하게 났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거둔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하지?』」누가복음 12:17 · 두루새김
그는 기존의 창고들을 헐고 더 크게 지으려고 합니다. 도둑질했다는 말도,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먹었다는 이야기도,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풍년을 맞아 곡식을 저장할 장소를 마련하려 했을 뿐이고, 일반적인 경제적 판단으로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문제는 그가 재산을 보관했다는 사실보다, 그 재산에 자신의 삶 전체를 맡기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해야겠다.」 「내 창고들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곡식과 재산을 모두 거기에 쌓아 두어야겠다.」 원문에서도 그의 계획에는 끊임없이 ‘나’와 ‘내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풍성한 곡식을 거두는 데 관여했을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가족도, 이웃도,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의 계획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풍성한 곡식이 가져다줄 수 있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미래를 위해 쌓아 두는 일입니다.
「그는 이어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여러 해 쓸 재산이 많이 쌓여 있으니, 이제 쉬어라. 먹고 마시며 즐겨라.』」누가복음 12:19 · 두루새김
그는 재산이 여러 해 동안 충분하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목숨도 여러 해 동안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여러 해를 살 수 있을 만큼 재산을 모았지만, 여러 해를 살 수 있는 생명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밤에 돌려 달라는 요구를 받는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목숨을 너에게서 거두어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20 · 두루새김
이 말씀에는 두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입니다. 그 사람은 「여러 해」를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오늘 밤」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먼 미래까지 계획했지만, 정작 오늘 밤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소유권입니다. 그는 자기 창고, 자기 곡식, 자기 재산, 자기 목숨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두어 갈 것이다」(ἀπαιτέω)로 옮긴 말은 돌려받거나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어리석다고 부르신 이유는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으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와 같다.」누가복음 12:21 · 두루새김
「하나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재물을 충분히 바치지 못한 사람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재물을 필요로 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선 비유와 뒤따르는 말씀을 함께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 속에서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쌓아 두는 삶이 문제로 드러납니다. 뒤에서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삶의 구체적인 방향을 보여 줍니다.
부자는 자신의 창고를 크게 만들려고 했지만, 그의 삶은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창고조차 없는 새들의 삶을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거두어 갈 것이다」로 옮긴 동사는 원문에서 3인칭 복수 형태여서, 누가 목숨을 요구하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시편 49:16–20의 주제와도 닿아 있습니다. 그 시편은 재물이 많아져도 사람이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전도서 2:18–19 역시 사람이 애써 쌓은 것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후계자에게 남겨야 하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이 본문들과 누가복음의 비유는 인간의 수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수고의 결과를 영원한 안전의 근거로 삼으려는 착각을 드러냅니다.
곳간 없는 새들과 작은 양 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누가복음 12:22 · 두루새김
「그러므로」라는 연결이 부자의 어리석음과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잇습니다. 부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고, 제자들은 먹고 입을 것이 부족할까 걱정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미래의 생존을 확보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부자는 충분히 쌓아 두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은 음식보다 더 귀하고, 몸은 옷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23 · 두루새김
음식과 옷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생명이 훨씬 귀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때로 먹고 입는 문제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의 삶을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까마귀에게는 곳간이 없습니다
「까마귀를 잘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고, 저장할 방이나 창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누가복음 12:24 · 두루새김
부자는 곡식을 저장할 창고가 부족해 더 큰 창고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장할 방이나 창고 자체가 없는 까마귀를 보라고 하십니다. 실제 새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움직이지만,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인간처럼 농사와 저장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생명도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자기 키를 한 규빗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누가복음 12:25 · 두루새김
「키」(ἡλικία)로 옮긴 말은 신체의 키로도, 수명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이 아무리 걱정해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까지 걱정함으로써 통제하려고 합니다.
솔로몬보다 아름답게 입은 꽃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잘 보아라. 애써 일하지도, 실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토록 화려했던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차려입지는 못했다.」누가복음 12:27 · 두루새김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부와 영광을 대표하는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0장은 그의 지혜와 부귀를 길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많은 재물과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화려함보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꽃의 아름다움이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그 꽃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합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이면 화덕에 던져질 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신다.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더 잘 입혀 주시겠느냐?」누가복음 12:28 · 두루새김
하나님은 오래 남지 않을 풀조차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가르침은 모든 신자가 충분한 음식과 옷을 항상 보장받는다는 약속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자체가 가난과 부족함을 실제적인 문제로 다루고 있으며, 뒤이어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가난의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부족함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삶 전체가 소유를 확보하는 일에 매이지 않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의 여러 민족이 애써 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누가복음 12:30 · 두루새김
제자들이 필요한 것을 알려 드려야만 하나님이 비로소 알게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구해라. 그러면 이런 것들도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누가복음 12:31 · 두루새김
생존에 필요한 것을 무시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 필요들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더 큰 현실 속에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셨다.」누가복음 12:32 · 두루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양 떼」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수만 명의 군중에 비하면 소수이고, 권력이나 재산도,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단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더 큰 집단이 되거나, 더 많은 재물을 모으거나,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들이 충분한 공로를 쌓아 얻어 내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기를 기뻐하시는 선물입니다.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목자로 노래되고, 에스겔 34:11–16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흩어진 양을 찾아 돌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본문들은 각각 개인의 신뢰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고유한 문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표현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양 떼처럼 돌보신다는 주제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작은 양 떼가 안전한 이유는 그 무리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돌보시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너희를 위해 낡지 않는 돈주머니를 마련하고, 하늘에 바닥나지 않는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오지 못하고, 좀벌레도 보물을 망가뜨리지 못한다.」누가복음 12:33 · 두루새김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이 다시 뒤집힙니다.
부자는 미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재물을 한곳에 모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때 바닥나지 않는 보물을 쌓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하늘의 재산을 일정한 비율로 쌓아 둔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가치 있고 사라지지 않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12:34 · 두루새김
우리는 흔히 마음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위해 돈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 방향도 보여 주십니다. 자신이 보물을 쌓아 둔 곳에 마음이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는 마음속 가치관이 바깥으로 나타난 결과만이 아니라,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더욱 굳게 만듭니다.
그래서 소유를 나누라는 명령은 재산에 관한 별도의 윤리 규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헬리키아는 신체의 키를 뜻할 수도 있고, 나이나 수명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한 규빗」은 길이 단위이므로 키를 늘린다는 해석이 문법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걱정에 대한 가르침에서는 수명을 늘리는 문제가 더 적절하다고 보아, 삶의 길이를 늘린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또 레위기 11:15에서 까마귀는 이스라엘이 먹지 말아야 할 새로 분류됩니다. 누가복음이 이 정결 규정을 직접 암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새를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이 인간이 부여하는 종교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돌아온 주인이 종을 섬기는 집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두어라.」누가복음 12:35 · 두루새김
예수님은 갑자기 집 안의 밤 풍경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므로, 언제든 문을 열어 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당시의 긴 옷자락을 걷어 올려 움직이기 편하게 하는 행동으로, 일을 하거나 길을 떠날 때 필요한 준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는 예상하기 어려운 반전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섬기는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는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주인은 허리에 띠를 매고 그들을 식사 자리에 눕게 한 다음, 다가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누가복음 12:37 · 두루새김
종들이 깨어 기다렸으니, 이제 종들이 주인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그를 섬겨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정반대의 일을 말씀하시며 당시의 주인과 종 사이에 기대되는 역할을 뒤집으십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세상의 모든 고용관계를 직접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인이 얼마나 뜻밖의 방식으로 자기 사람들을 대하는지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돌아온 주인은 그들을 자신의 일을 하는 도구로 대하지 않고, 식탁의 손님처럼 대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명령을 따른 대가로 보상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주인이 직접 다가와 섬기는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22:27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상에 앉은 사람과 섬기는 사람 중 누가 더 높은지를 물으시며, 자신은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영광은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권세로만 나타나지 않고, 자기 사람들을 위해 몸을 낮추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주인은 한밤중이나 새벽녘, 사람들이 쉽게 지칠 수 있는 늦은 시간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다릴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집주인과 도둑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인자를 도둑에 비유하는 것은 예상할 수 없는 시각에 오신다는 한 가지 특징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 못한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누가복음 12:40 · 두루새김
그렇다면 제자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을 두려워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하늘만 바라보아야 할까요? 베드로의 질문이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 이 비유는 저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누가복음 12:41 · 두루새김
예수님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직접 나누어 대답하지 않으시고,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믿음직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은 누구겠느냐? 주인이 집안 사람들을 맡겨 제때 정해진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할 사람 말이다.」누가복음 12:42 · 두루새김
관리인은 주인이 돌아올 날짜를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제때 나누어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긴장을 늦추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인이 맡긴 일을 충실히 하는 상태입니다.
이 장 앞부분의 부자와 비교하면 차이가 뚜렷해집니다. 부자는 「내 창고들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곡식과 재산을 모두 쌓아 두겠다고 했지만, 관리인은 그것이 주인의 것이며 자신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재물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지만, 소유자처럼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삶과 맡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삶은 다릅니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면서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한다면,」누가복음 12:45 · 두루새김
그 역시 주인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들을 돌보도록 맡겨진 권한을 이용해 그들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권한에 제한이 없다는 뜻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권한을 하나님의 뜻과 분리하는 순간, 사람은 그 권한을 자기 욕심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기다리지 않는 날, 예상하지 못한 시각에 주인이 돌아올 것이다. 주인은 그를 두 동강 내고, 믿을 수 없는 자들과 같은 벌을 내릴 것이다.」누가복음 12:46 · 두루새김
본문은 그 결과를 매우 거칠게 묘사합니다. 원문 자체가 강한 신체적 폭력의 표현을 사용하므로, 가볍게 벌을 준다는 의미로 바꾸면 경고의 강도가 사라집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주인의 뜻을 알고도 따르지 않은 종과 모르면서 잘못을 저지른 종을 구분하십니다. 두 사람 모두 책임을 지지만, 알고도 거역한 사람이 더 무거운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 매 맞을 만한 일을 한 종은 매를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고,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더 많이 요구할 것이다.」누가복음 12:48 · 두루새김
이 말씀이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사도들과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읽기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본문은 그 책임을 특정 직분에만 제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알고, 많은 권한과 기회를 받았으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면 그것은 특권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식사 자리에 눕게 하고 시중을 드시는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맡기신 권한을 가진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올바른 태도는 주인의 성품을 닮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한 집에서는 주인이 돌아오자 종들을 식사 자리에 눕게 하고 시중을 듭니다. 다른 집에서는 주인이 보이지 않는 동안 관리인이 동료들을 때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웁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12:11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첫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매고 신발을 신은 채, 이집트를 떠날 채비를 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누가복음의 장면은 주인을 맞이할 준비라는 점에서 상황이 다르므로, 출애굽기의 장면을 그대로 되풀이한다기보다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공통된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38절의 「한밤중」과 「새벽녘」은 원문에서 밤을 나누는 시간 단위인 둘째 경과 셋째 경이며, 정확한 시간 구분은 당시 사용된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46절의 「두 동강 내고」(διχοτομέω)는 말 그대로 몸이나 사물을 두 부분으로 자른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를 극단적인 형벌을 묘사하는 비유적 과장으로 보는 해석과, 당시의 실제로 가혹한 처벌 모습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보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왜 분열을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사명에 관해 매우 강렬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 그 불이 벌써 붙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누가복음 12:49 · 두루새김
여기서 불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을 나타내기도 하고(출애굽기 3:2), 깨끗하게 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며(말라기 3:2–3), 심판과 파괴를 나타내기도 합니다(말라기 4:1). 누가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이미 예수님의 일을 불과 연결했습니다. 요한은 자신보다 강한 이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했고,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3:16–17).
바로 뒤에서 예수님이 갈라짐을 말씀하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불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에 들어오셔서 이전과 같지 않게 만드시는 결정적인 일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불이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킨다고 밝히지 않으므로, 오직 성령만으로 또는 오직 파괴적인 심판만으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불이 벌써 붙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 문장은 이미 불이 붙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는 질문으로도, 불이 붙기를 간절히 바라는 감탄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일은 세상을 이전과 다른 상태로 이끌 것이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 자신도 고통을 겪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 마음이 얼마나 짓눌리는지!」누가복음 12:50 · 두루새김
여기서 세례는 요단강에서 받으셨던 물세례가 아니라, 예수님이 앞으로 겪으셔야 할 사건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구약에서 깊은 물과 큰 물결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시편 69:1–2에서 시인은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합니다. 누가복음 9:22에서 이미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할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일을 앞두고 마음이 얼마나 짓눌리는지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전혀 느끼지 못하시는 초연한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그 사명이 가져올 고통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 길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삶의 약속이 아닙니다. 자신도 고난을 향해 나아가시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평화와 분열의 역설
「내가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오히려 갈라짐을 일으키러 왔다.」누가복음 12:51 · 두루새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땅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2:14).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셨고(7:50, 8:48),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도 집에 평화를 빌라고 가르치셨습니다(10:5).
그런데 이제 평화가 아니라 갈라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바꾸셨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다투지 않는 상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는 삶을 포함합니다. 그런 회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기존의 질서가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의한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반응이 갈릴 수 있고,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맞서게 된다는 표현은 미가 7:6과 연결됩니다. 미가서는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공동체에서 가까운 가족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현실을 탄식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가져와, 자신이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반응을 일으키게 될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가족을 갈라놓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증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족과 다투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따르는 일이 때로 가족 사이의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다가 갈등을 겪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평화는 충돌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는 무난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들어올 때 드러나는 진실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통과하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갈등을 감수하라고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이 그 갈등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49절 후반부는 원문 문장 자체도 해석이 갈립니다. 질문으로 읽으면 「이미 불이 붙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가 되어 불이 이미 붙었다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감탄으로 읽으면 그 불의 시작을 간절히 바라는 표현이 됩니다. 두루새김은 「그 불이 벌써 붙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라고 옮겨 감탄으로 읽었습니다. 전통적인 주석에서는 감탄형 해석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지만, 문장의 형태와 앞뒤 흐름을 둘러싼 논의가 남아 있습니다.
날씨는 읽으면서 지금의 때는 읽지 못한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넘어 더 넓은 청중, 곧 무리를 향해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서쪽에서 구름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네』 하고 말한다. 그러면 그대로 된다.」누가복음 12:54 · 두루새김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몹시 덥겠네』 하고 말한다. 그러면 그대로 된다.」누가복음 12:55 · 두루새김
팔레스타인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어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올 가능성이 높고, 남쪽의 건조한 지역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무더운 날씨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능력을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모습을 보고 날씨를 알아볼 줄 알면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는 왜 알아보지 못하느냐?」누가복음 12:56 · 두루새김
이 장의 첫머리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는데, 이제는 무리를 향해 「위선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위선의 문제는 특정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날씨를 살피고 여행을 계획하기 위해 하늘을 관찰하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때인가?
여기서 「때」는 시계로 계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지닌 때를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시는 일을 알아보아야 하는 결정적인 시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며,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던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그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하나님의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판단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왜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지 않느냐?」누가복음 12:57 · 두루새김
다른 사람의 가르침만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을 들려주십니다.
관리에게 가는 길입니다.
아직 길 위에 있을 때
「너를 고소한 사람과 함께 관리에게 갈 때에는, 가는 길에 그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고, 재판관은 너를 법 집행관에게 넘기고, 집행관은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누가복음 12:58 · 두루새김
아직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고, 그에게는 상대방과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마지막 한 렙톤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2:59 · 두루새김
렙톤은 작은 단위의 동전입니다. 빚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해결해야 한다는 표현이 엄중합니다.
이 말씀은 다툼이 더 큰 법적 문제로 번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실생활의 조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아보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직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여러 해를 계획했지만 그날 밤 목숨을 거두어 갈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고, 관리인은 주인이 늦게 온다고 생각했지만 주인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돌아왔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런 흐름에서 마지막 소송의 비유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회개하고 응답해야 하는 긴급함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고소한 사람, 재판관, 집행관이 각각 누구를 상징하는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지막 한 렙톤까지 갚아야 한다는 말을 특정한 사후 형벌의 기간이나 제도를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생명은 재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참새조차 잊지 않으시고, 작은 양 떼에게 나라를 주기를 기뻐하시며,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식사 자리에 눕게 하고 직접 시중을 드는 주인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것을 혼자 차지하려 하지 않아도 되고,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감추지 않아도 되며, 주인이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그분이 맡기신 일을 충실히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깨어 있는 삶은 불안에 떨며 미래를 예측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오늘을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 길 위에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넘겨지기 전이고, 감옥에 갇히기 전입니다. 길 끝에는 판결이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이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은 그 길 위에서 끝납니다. 아직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고, 문도 닫히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