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열리는 문과 막히는 문
누가복음 11장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한 제자의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길을 막고 있다는 예수님의 책망으로 끝납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율법 전문가들을 향해 「너희는 깨달음의 열쇠를 치워 버렸다.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았고,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막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쪽에는 두드리면 열리는 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열쇠를 가진 사람들이 막아서는 문이 있습니다.
이 대조는 누가복음 11장의 여러 장면을 하나로 읽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아오도록 초대하시지만, 정작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오는 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자유롭게 하시며,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일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경건한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안에 정의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고 있는가?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가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어느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제자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누가복음 11:1 · 두루새김
누가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무엇을 기도하셨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한 제자가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기를 기다렸다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셨고, 제자는 그 모습을 보고 기도를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이론을 먼저 설명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삶을 보여 주신 다음 제자들이 그 삶에 참여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제자는 요한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당시 스승에게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도문 하나를 익히는 일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고, 무엇을 소망하며, 어떤 공동체로 살아갈 것인지를 배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마태복음 6:9–13에 나오는 기도보다 간결하지만, 짧은 만큼 그 중심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첫마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해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1: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성경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사야 63:16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호칭을 처음 만들어 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자들의 기도에도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멀리 계신 신에게 다가가는 특별한 절차를 가르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직접 말씀드리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기도의 중심이 곧바로 인간의 필요로 옮겨가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간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는 것이고, 두 번째 간구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보다 더 거룩해지셔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세상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고, 사람들이 그분을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에스겔 36:22–27에서 하나님은 여러 민족 가운데 더럽혀진 자신의 큰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일을 이루시는 방법은 자신의 백성을 모으고 깨끗하게 하시며,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는 일은 사람들이 더 경건한 말을 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새롭게 하시는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연결은 누가복음 11장의 뒤쪽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을 억누르던 악한 세력을 물리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 땅의 빵을 구한다
그다음 간구는 일상의 필요로 내려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빵을 날마다 주십시오.』」누가복음 11:3 · 두루새김
「필요한」(ἐπιούσιος)으로 옮긴 낱말은 그날 필요한 빵으로도, 다가올 날을 위한 빵으로도 읽힙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간구에 「날마다」라는 표현을 함께 놓습니다. 적어도 이 기도에서 빵은 날마다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필요로 제시됩니다.
여기에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의 경험이 떠오릅니다(출애굽기 16:4–5, 16–21). 광야의 백성은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제자들도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도 가운데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신앙은 인간의 몸과 필요를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구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누가복음 11:4 · 두루새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아야 할 것은 「죄」인데, 자신이 용서해야 할 사람은 「빚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죄를 빚에 비유하는 것은 관계의 언어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상대에게 갚아야 할 무엇인가가 생긴 것처럼 느껴지고, 용서는 그 빚을 계속 붙잡고 있지 않는 일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용서가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다만 이것을 우리가 먼저 충분히 용서해야 하나님이 그 대가로 용서하신다는 거래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 전체가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태도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받기를 구하는 사람은 동시에 다른 사람의 빚을 놓아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유혹을 포함하지만,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시련이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으로 유혹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지켜 달라는 간구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님의 나라도, 오늘의 빵도, 죄의 용서도, 시험 가운데 견디는 일도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법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구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한밤중에 벌어지는 작은 소동을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여행 중이던 친구가 찾아왔는데, 그에게는 손님을 대접할 빵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의 집을 찾아가 빵 세 개를 빌려 달라고 청합니다. 밤은 깊었고, 집 안의 친구는 이미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집의 공간이 좁고 가족이 가까이 잠자는 상황에서는 한 사람이 일어나 문을 여는 일이 집안 전체를 깨울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이들과 닫힌 문은 요청을 받은 사람의 난처함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문밖의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지 못하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다른 친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친구라는 이유로는 일어나서 주지 않더라도, 찾아온 사람이 체면도 가리지 않고 청하기 때문에 일어나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누가복음 11:8 · 두루새김
「체면도 가리지 않고 청하기」로 풀어 옮긴 말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태도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문밖 사람의 대담한 요청을 가리키는지 집 안 사람의 체면을 가리키는지는 읽기가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 곧바로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잠에서 깨워야 하는 귀찮은 이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비유는 오히려 그보다 훨씬 큰 확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절실한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열릴 것이다.」누가복음 11:9 · 두루새김
9절에서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명령에 각각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이 붙고, 10절에서는 누구나 받고 찾으며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이 먼저 있고, 그 명령이 가능한 이유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정말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을 받습니까? 실제 삶에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무엇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 대신 뱀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누가복음 11:11 · 두루새김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할 때 아버지가 뱀을 주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필요를 알고, 그에게 해로운 것을 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자녀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얻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아버지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면,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주시겠느냐?」누가복음 11:13 · 두루새김
우리는 지금까지 빵을 구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시는 선물은 빵도, 생선도, 달걀도 아닙니다.
성령입니다.
마태복음 7:11의 병행 구절에서는 하늘의 아버지가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누가는 그 자리에 「성령」을 놓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미 성령이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 광야의 시험과 사역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1:35, 3:22, 4:1, 4:18).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그 영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단순히 삶의 문제 하나를 해결해 주는 무엇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을 통해 사람들이 그분의 생명과 일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가 이어서 기록할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내려오시는 일은 이 말씀을 더 넓은 이야기 속에서 이해하게 해 줍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은 기도가 무엇을 구하는 일이었는지 실제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영의 지배를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체면도 가리지 않고 청하기」로 옮긴 그리스어는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입니다. 일반적인 해석은 문밖에서 빵을 구하는 사람의 뻔뻔할 만큼 대담한 요청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는 늦은 시간이니 포기해야 한다는 체면에 얽매이지 않으며, 두루새김도 이 해석을 따라 옮겼습니다. 다른 해석은 집 안에 있는 사람의 체면 또는 수치와 연결하여, 요청을 거절하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될 수 있기에 결국 빵을 내어 준다고 봅니다. 두 해석 모두 논의되고 있으며, 그리스어 표현만으로 완전히 판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을 못 하게 하는 귀신을 내쫓으십니다.
귀신이 나가자 말을 못 하던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고, 그가 말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사람들의 반응만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놀랍니다. 그런데 모두가 같은 의미로 놀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우두머리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으신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방금 귀신이 쫓겨났고, 말을 못 하던 사람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이 악한 힘에서 나왔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하늘에서 오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기적을 보았다는 사실과 그 기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상대방의 주장에 담긴 모순을 지적하십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면 그 나라는 스스로 갈라져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귀신을 내쫓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일을 행한 사람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는 사람들의 설명이 자신들이 보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욱 곤란한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 쪽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내쫓느냐? 그러므로 바로 그들이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누가복음 11:19 · 두루새김
「너희 쪽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귀신을 내쫓는 일은 인정하면서 예수님의 일만 악한 세력의 힘이라고 주장한다면, 같은 현상에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는 일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누가복음 11:20 · 두루새김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8: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집트에 재앙이 닥쳤을 때,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그 일을 자기 능력으로 되풀이하지 못하고 파라오에게 그것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드러난 것은 이집트의 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일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뽐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억누르던 세력보다 더 큰 능력이 나타났다는 증거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파라오의 지배 아래 있던 백성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악한 영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두 사건은 역사적 상황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억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 미래에만 속한 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젠가 오리라는 사실만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행하고 계시는 일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힘센 사람의 비유는 이 선언을 설명합니다. 무기를 갖춘 사람이 자기 집을 지키고 있으면 그의 재산은 안전합니다. 하지만 더 힘센 사람이 와서 그를 이기면 그가 믿고 있던 갑옷과 무기를 빼앗고 빼앗은 물건들을 나누어 줍니다. 이 비유에서 힘센 사람은 사탄의 지배를, 더 힘센 사람은 그 지배를 깨뜨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힘센 사람은 「그가 믿고 있던 갑옷과 무기」 때문에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나자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일은 사탄의 세력과 대등한 두 힘이 다투는 일이 아닙니다. 더 강한 분이 나타나셔서 기존의 지배를 무너뜨리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고,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어 버리는 사람이다.」누가복음 11:23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사람들을 무작정 적과 동지로 나누는 구호가 아닙니다. 지금 눈앞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있는데, 그것을 악한 세력의 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을 보고도 그것을 거부한다면, 단순히 중립적인 관찰자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판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판단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φθάνω)로 옮긴 동사는 여기서 단순히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보다 실제로 도달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잘 맞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과 출애굽기의 연결은 오래전부터 주목되어 왔습니다.
깨끗하지만 비어 있는 집
예수님께서는 악한 영이 쫓겨난 후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간 뒤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자신이 떠난 집은 깨끗이 쓸려 있고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 영은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돌아와 그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불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쫓겨난 사람은 자유로워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다시 이전보다 나빠질 수 있다고 말씀하실까요?
그 집은 깨끗하게 쓸려 있고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집에 살고 있는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비유를 귀신을 내쫓은 모든 사건 이후에 귀신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예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도 귀신에게 시달린 사람에게 그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유는 악한 것이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그곳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더러운 영이 나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오는 구원은 악한 것을 없애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아버지가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더러운 영이 떠난 뒤의 집을 말씀하십니다. 두 대목을 연결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히 악한 세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비유 자체는 그 집에 성령이 없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의 세부사항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때 한 여자가 무리 가운데서 외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하고 계실 때, 무리 가운데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을 배어 낳고 젖을 먹인 어머니는 복이 있습니다.」누가복음 11:27 · 두루새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누가복음 11:2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의 복됨을 부정하시는 것일까요? 누가복음의 앞부분을 기억하면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복되다고 부르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은 마리아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1:42–45). 마리아 역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받아들였습니다(1:38).
마리아의 복됨은 단순히 예수님을 낳았다는 혈연관계에만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삶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복의 문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주십니다. 예수님과 혈연관계가 없어도, 특별한 종교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됩니다.
이 말씀은 앞선 귀신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어떤 악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관계를 세웁니다.
무엇인가가 떠난 집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시작된 집입니다.
표징이 부족한가, 그것을 보는 눈이 없는가
무리가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표징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무리가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 말고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1:29 · 두루새김
앞에서 사람들은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보고도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셨다는 사실을 자신들이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이라고 하면 많은 독자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보낸 사건을 떠올릴 것입니다. 마태복음 12:40에서는 실제로 그 사건이 인자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표징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1장은 조금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듯이, 인자도 이 세대에게 표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1:30 · 두루새김
그렇다면 니느웨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요나서 3장에서 그들은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본문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를 물고기에게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고 확인했기 때문에 회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니느웨 사람들도 심판 때에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가 전한 말을 듣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누가복음 11:32 · 두루새김
따라서 누가복음 11장 자체에서는 요나의 표징이 그가 전한 말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강하게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한 복음서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더 넓은 의미를 읽을 수는 있지만, 이 대목을 곧바로 마태복음 12:40과 똑같이 설명하면 누가가 강조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요나뿐 아니라 솔로몬과도 비교하십니다.
「남쪽 나라의 여왕은 심판 때에 이 세대의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누가복음 11:31 · 두루새김
남쪽 나라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고(열왕기상 10:1–10),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전한 말을 듣고 회개했습니다(요나 3:4–10). 두 이야기 모두 이스라엘 밖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에 반응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큰 것을 마주하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 이름난 왕이었고, 요나는 심판과 회개를 선포하도록 보냄받은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만큼 뛰어난 또 다른 지혜자나 예언자가 아니십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가, 요나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지금 그들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표징을 기다립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빛이 있는데도 어두운 이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등불과 눈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서 숨겨진 곳에 놓거나 곡식을 재는 그릇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들어오는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등잔대 위에 놓는다.」누가복음 11:33 · 두루새김
빛은 감추기 위해 켜는 것이 아닙니다.
등불이 등잔대 위에 놓여 있다면 빛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다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를 눈에 비유하십니다.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밝고, 눈이 나쁘면 몸도 어둡다.」누가복음 11:34 · 두루새김
누가복음에서는 바로 앞의 표징 논쟁 때문에, 빛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영적인 눈이 문제가 됩니다. 빛이 밝아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눈이 온전하지 않으면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행동이 바로 그 빛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사람이 자유로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을 사탄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은 아닌지 살펴라.」누가복음 11:35 · 두루새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빛이 있다고 확신하면서 실제로는 어둠을 붙잡고 있다면, 빛을 찾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제 누가는 그 경고가 실제로 어떤 사람들에게 해당하는지 보여 주는 장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한 바리새파 사람의 식탁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맑으면」(ἁπλοῦς)으로 옮긴 낱말은 본래 단순하고 나뉘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맥에 따라 눈이 건강하고 온전하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하고, 한결같고 순수한 태도 또는 너그럽게 베푸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6:22–23에서는 이 말씀이 재물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 놓여 있어 욕심과 너그럽게 베푸는 태도의 대조가 두드러집니다.
깨끗한 그릇, 더러운 마음
어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들어가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우십니다. 그런데 집주인은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씻지 않으신 것을 보고 놀랍니다.
여기서 씻는다는 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손 씻기나 위생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의 정결 관습과 연결된 행위입니다. 식사 전에 행하는 의례적인 씻음은 구약에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명령한 규정이라기보다 정결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계기로 정결의 본질을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지만, 너희 속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심과 악함으로 가득하다.」누가복음 11:3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겉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가치 없다고 단순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결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묻고 계십니다. 왜 사람은 그릇을 깨끗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을 얻는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이나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시지 않았느냐?」누가복음 11:40 · 두루새김
이 질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말씀하십니다. 겉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속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이 겉으로 무엇을 하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니며, 그 행동을 만들어 내는 마음과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결과도 그분의 관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상 밖의 해결책을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 있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누가복음 11:41 · 두루새김
「그 안에 있는 것」은 그릇 안에 들어 있는 재물과 소유로도, 속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베푸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논점은 분명합니다. 참된 정결은 밖에서 오는 오염을 피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는 마음이 이웃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적인 의례의 문제를 다루시다가 재물을 사용하는 일과 이웃의 필요를 드러내십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선포하셨고(6:20), 자신이 하시는 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과 연결하셨습니다(4:18).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에 무관심하면서 자신만 오염되지 않으려 애쓰는 일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지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다
예수님의 첫 번째 「화가 있다」는 선언은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일을 다룹니다.
「그러나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 같은 온갖 채소의 십분의 일까지 바치면서,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소홀히 한다. 정의와 사랑은 실천했어야 했고,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누가복음 11:42 · 두루새김
박하와 운향과 채소는 일상의 식탁에서 사용되는 작은 식물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런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 정확하게 열에 하나를 구분해 바치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서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종교적 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세밀하게 구분하는 동안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지나쳐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일 자체를 없애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작은 계명을 지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작은 것에 정확한 사람이 큰 것을 외면하는 데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미가 6:6–8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예언자는 하나님께 많은 제물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사이의 관계를 묻고, 정의를 행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과 겸손히 걷는 삶을 제시합니다. 미가가 말하는 것은 예배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정의와 한결같은 사랑을 버린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문제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정확하게 드렸는가를 계산하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는 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누구보다 충실하다고 믿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책망은 사람들에게 높임받으려는 욕심을 향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과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한 관심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책망은 더욱 강렬합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표시 없는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걸어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 모른다.」누가복음 11:44 · 두루새김
민수기 19:16에 따르면 죽은 사람과 관련된 접촉은 의례적으로 부정한 상태를 가져옵니다. 표시 없는 무덤이 위험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깨끗하고 부정한지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 자신이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부정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경건해 보이지만, 그 경건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문제에 휘말리고 있는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의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어떻게 다른 사람까지 어둡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41절의 「그 안에 있는 것」을 그릇 안에 들어 있는 것, 곧 자신이 가진 재물과 소유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고, 사람의 속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베푸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문장 구조에 관한 논의가 있어 어느 쪽 하나로 모든 의미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깨달음의 열쇠를 가져간 사람들
예수님의 책망을 듣던 율법 전문가 가운데 하나가 말합니다.
율법 전문가 한 사람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누가복음 11:45 · 두루새김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활동 영역이 겹쳤지만, 본문에서는 율법 해석의 전문가라는 역할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율법 전문가들에게도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지기 힘든 짐을 지우면서, 정작 너희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누가복음 11:46 · 두루새김
문제는 짐을 지우는 사람과 짐을 지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율법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세하게 규정하지만, 정작 그 규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부담을 나누어 지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을 지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문제를 바라보십니다.
이 말씀을 누가복음 10:25–37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와 나란히 놓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율법 전문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문제를 질문했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길에서 만난 상처 입은 사람의 짐을 실제로 떠맡았습니다. 여기서도 율법을 아는 것과 그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 문제로 등장합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다른 사람을 짓누르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선물이 오히려 사람들을 어렵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예언자의 무덤을 세우는 사람들
다음 책망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짓는다. 그런데 그 예언자들을 죽인 사람들은 바로 너희 조상들이다.」누가복음 11:47 · 두루새김
예언자들을 죽인 것은 조상들이고, 그들의 무덤을 짓는 것은 후손들입니다. 그렇다면 후손들은 오히려 조상들의 잘못을 반성하며 예언자들을 기리는 것 아닐까요? 실제로 무덤을 세우는 행위에는 존경과 추모의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현재 행동을 함께 보십니다. 그들은 과거의 예언자들을 기념하면서 지금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무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과 예언자가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옛 예언자는 이미 죽었으므로 더 이상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자신의 삶과 판단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그 요구 앞에서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보였던 적대감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조상들의 일에 대한 동의라고 책망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예언자들을 존경하면서도 예언자들을 거절했던 과거의 태도를 현재에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내겠다. 그들은 그 가운데 일부를 죽이고 뒤쫓아 해칠 것이다.』」누가복음 11:4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말씀하셨다고 하시지만, 그 말씀의 출처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 자체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계속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거절당하거나 뒤쫓겨 해를 입었고, 때로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오랜 역사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아벨과 사가랴는 그 역사적 비극의 범위를 드러냅니다. 아벨은 창세기 4장에서 형제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사가랴는 역대기하 24:20–22에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백성의 잘못을 책망하다가 성전 뜰에서 죽임당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와 연결하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의 피가 인간의 폭력과 불의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에게 물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이전 세대의 모든 범죄에 대해 당시 살아 있던 모든 유대인이 혈통 때문에 유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초점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들을 거부하는 행위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빼앗긴 열쇠
율법 전문가들을 향한 마지막 책망입니다.
「너희 율법 전문가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깨달음의 열쇠를 치워 버렸다.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았고,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막았다.」누가복음 11:52 · 두루새김
여기서 「깨달음」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율법 전문가들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것은 그들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을 알고, 율법을 해석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에게 맡겨진 열쇠였습니다.
열쇠는 문을 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권한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 주는 데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을 가로막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장의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를 꾸짖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는 성경을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참된 성경 지식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밝힙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의 권위가 하나님보다 중요해지는 순간, 열쇠는 문을 여는 도구가 아니라 문을 막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책망은 지식을 탐구하거나 율법을 연구하는 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책임인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아는가뿐 아니라, 그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이 누구를 만나게 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성경을 가르치는 특정 집단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49절의 「하나님의 지혜」가 한 말씀은 구약성경의 어느 책에 기록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으며, 현재 전해지는 히브리 성경에는 이 문장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처럼 표현한 말씀으로 이해하는 견해, 전해 내려오던 지혜의 말씀이나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자료를 인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 등이 있고, 어느 하나를 본문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복음 7:35에서도 지혜가 자신의 자녀들로 말미암아 옳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표현이 등장하며, 마태복음 23:34에서는 비슷한 내용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똑같은 형태의 인용으로 다루기보다 두 복음서의 표현 차이를 인정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가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논의가 있으며, 누가복음은 그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으므로 역대기하의 사가랴와 같은 인물인지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두 가지 방법
이 장은 예수님께서 식사를 마치고 그 집에서 나오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나오시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세게 몰아붙이며 여러 가지를 캐묻기 시작했습니다.누가복음 11:53 · 두루새김
누가는 그 질문의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기회를 노렸습니다.누가복음 11:54 · 두루새김
처음의 제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마지막의 사람들도 예수님께 질문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에서 잘못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같은 질문이라도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의 태도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진리를 구하는 질문이 있고, 이미 자신의 결론을 정해 놓고 상대방을 공격할 구실을 찾는 질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시지만, 자신의 판단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는 책망하십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현실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행동으로 드러내십니다. 말을 못 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된 자리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이 나타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제자들을 초대하시며 말씀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에게 복의 길을 여십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와 있는데도,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갈립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하던 사람들은 그 나라를 악한 세력의 일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는 길까지 막았습니다.
처음에 한 제자는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이 있음을 알고 조심스럽게 요청했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버지를 부르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 하지만,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한 제자는 배우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붙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조금 전 그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깨달음의 열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에서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예수님을 붙잡을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