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누가 내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어떤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10:29)

이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율법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레위 사람도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봅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예수님은 율법 전문가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보기에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10:36)

율법 전문가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는지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알려 주지 않으시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이웃은 단지 내가 찾아서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되어 주어야 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두 자매가 등장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열심히 대접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자신을 혼자 일하게 내버려 두었다며 불평하고,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골랐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하셨는데, 마지막에는 일하는 사람보다 앉아서 말씀을 듣는 사람을 옹호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을 풀려면 10장 전체를 따라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흔두 사람을 보내시며 사람들이 그들을 맞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돌아온 제자들에게는 그들이 발휘한 능력보다 더 기뻐해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율법 전문가에게는 이웃이 되는 길을 보여 주시고, 마지막 집에서는 예수님을 맞아들인 사람이 무엇을 놓칠 수 있는지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찾아왔을 때, 그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읽는 시간 33분소단락 610장 본문 읽기 →

일흔두 사람을 보내시다 — 먼저 평화를 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10:1–12 본문 →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곳으로 먼저 보내시다

그 뒤 주님께서 다른 일흔두 사람을 뽑아 일을 맡기셨습니다. 자기가 가시려는 모든 도시와 장소로 두 사람씩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누가복음 10:1 · 두루새김

앞 장에서 예수님은 열둘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열두 사도 외에 「다른」 일흔두 사람을 더 뽑아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따로 떨어져 자신들의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곳에 먼저 가서,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합니다. 이 점은 뒤에서 예수님께서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것이고」라고 하실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해 먼저 가는 사람들입니다.

추수할 것이 많은데 왜 기도부터 하라고 하실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둘 곡식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곡식의 주인에게 곡식을 거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누가복음 10:2 · 두루새김

거둘 곡식이 많다는 말씀을 들으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결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곡식의 주인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꾼들은 주인의 밭에서 일하도록 보내지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일은 그들의 열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가거라」라고 명령하십니다(10:3).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그 곡식을 거두는 곳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와 행동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이 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인정하는 일이고, 보냄을 받는 것은 그 주인의 일에 실제로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이 들어갈 세상이 안전한 곳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거라.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어린 양처럼 늑대들 한가운데로 보낸다.」누가복음 10:3 · 두루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을 늑대를 제압할 강한 사냥꾼이 아니라, 늑대에게 위협받기 쉬운 어린 양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전할 하나님의 나라에는 권위가 있지만, 그 권위가 세상에서 곧바로 지배력이나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상처받고 거절당할 수 있는 처지로 보내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무장을 하거나 권력을 확보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돈주머니와 가방과 신발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여행 중 길고 복잡한 인사에 시간을 쓰지 말라는 뜻으로, 그만큼 일이 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먼저 맡겨진 일은 다른 것입니다.

낯선 집의 문 앞에서 처음 하는 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렇게 말하여라.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빌어요.』」누가복음 10:5 · 두루새김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낯선 집에 들어가 처음으로 하는 말은 논쟁이나 위협이 아닙니다.

평화를 비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다툼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안전과 온전함, 관계의 회복과 번영을 포함하는 폭넓은 뜻을 가집니다. 제자들은 그 집이 잘되기를 바라며 들어갑니다.

「거기에 평화를 받아들일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빌어 준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누가복음 10:6 · 두루새김

원문의 「평화의 아들」은 셈어 말투에서 어떤 성격이나 상태에 속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어서, 두루새김은 이를 「평화를 받아들일 사람」으로 옮겼습니다.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집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평화를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라고 하시지 않고, 평화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평화를 전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그 평화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지는 제자들이 강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지만, 그 나라를 폭력이나 강제력으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십니다.

도움을 주러 간 사람이 도움을 받는다

「그 집에 머물면서 그들이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은 일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마라.」누가복음 10:7 · 두루새김

제자들은 병든 사람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기 위해 보내지지만, 자신의 먹을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받아야 합니다. 남을 돕는 사람들이 남의 도움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부끄러워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일꾼은 일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십니다.

동시에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마라」는 명령은 더 좋은 숙소나 더 풍성한 대접을 찾아다니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을 이용해 더 좋은 조건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소식과 병든 사람을 고치는 일을 가져오고, 그들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은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주고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왔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도시와 맞아들이지 않는 도시를 말씀하십니다. 맞아들이는 도시에서는 차려 주는 음식을 먹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줍니다.

「그곳의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어요.』」누가복음 10:9 · 두루새김

맞아들이지 않는 도시에서는 발에 붙은 먼지를 털어 버리며 말합니다.

「『여러분의 도시에서 우리 발에 붙은 먼지까지 여러분을 향해 털어 버려요. 그렇지만 이것은 알아두세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어요.』」누가복음 10:11 · 두루새김

두 경우 모두 소식은 같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왔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 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반갑게 맞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나라가 가져오는 평화와 치유를 경험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거절은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도시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누가복음 10:12 · 두루새김

소돔은 창세기 19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입니다. 그런 도시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 주어진다는 말씀은 매우 강한 경고입니다.

은혜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은 그 은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의 책임도 함께 가져옵니다.

조금 더 깊이

일흔두라는 숫자는 사본에 따라 일흔으로도 기록되어 있고, 일부 초기 사본에는 일흔둘로 적혀 있습니다. 이 숫자를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여러 민족이나 민수기 11:16–25의 일흔 장로와 연결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여러 민족을 향해 사명이 넓어지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숫자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상징적 연결의 가능성은 열어 두되 보내시는 일의 확실한 의미는 본문에 기록된 행동에서 찾아야 합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 많이 본 사람은 무엇을 더 책임져야 하는가

누가복음 10:13–16 본문 →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왜 심판의 근거가 되는가?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가운데서 일어난 기적들이 두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곳 사람들은 벌써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다.」누가복음 10:13 · 두루새김

고라신과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일하셨던 갈릴리 지역의 도시들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바깥의 해안 도시들로, 구약의 예언서에서 교만과 불의에 대한 심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이사야 23장; 에스겔 26–28장). 예수님은 그 도시들에 같은 기적이 나타났다면 이미 회개했을 것이라고, 만약 그랬다면 어떠했을지를 비교하십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지만, 그 기적들이 요구하는 회개의 응답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경험한 것이 곧 하나님께 올바르게 응답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보고 들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무거운 책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왜 낮아지는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너는 하데스까지 끌려 내려갈 것이다.」누가복음 10:15 · 두루새김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며,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가 하늘까지 높아지지 않고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인 하데스까지 끌려 내려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높아지리라고 생각했던 도시가 낮아질 것이라는 심판의 뒤바뀜입니다.

그토록 놀라운 일을 경험한 도시가 왜 이런 경고를 받아야 할까요? 기적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자동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시고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묻고 계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것이고, 너희를 거부하는 사람은 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를 거부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거부하는 것이다.」누가복음 10:16 · 두루새김

제자들의 권위는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소식을 받아들이는 일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 소식을 거부하는 일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물론 이 말씀을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모든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말씀과 사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권위는 보내신 분에게서 나오며, 그 권위는 맡겨진 사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에는 고라신에서 일어난 기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가버나움을 향한 말씀은 이사야 14:13–15에서 하늘 높이 올라가려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교만한 바벨론 왕을 향한 조롱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한다고 밝히지는 않지만, 높아지려는 기대와 급격한 추락이라는 표현에는 분명한 문학적 연결이 있습니다.

사탄의 추락보다 더 기뻐해야 할 것

누가복음 10:17–24 본문 →

귀신들까지 복종하는데 왜 그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하실까?

일흔두 사람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누가복음 10:17 · 두루새김

이들의 기쁨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귀신들이 자신들의 이름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종했다고 말합니다. 받은 권한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누가복음 10:1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사탄이 먼 과거에 하늘에서 쫓겨났던 사건을 가리킬 수도 있고, 제자들이 하는 일을 통해 사탄의 힘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앞의 읽기는 이사야 14:12와 같은 구절과 연결되어 왔지만, 이사야 14장의 본래 문맥은 바벨론 왕의 교만과 몰락을 다루므로 사탄의 과거 행적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뒤의 읽기는 제자들이 귀신들을 제압하고 돌아왔다는 바로 앞의 문맥에서 직접적인 근거를 얻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셨고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 악한 영들의 지배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다. 어떤 것도 결코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0:19 · 두루새김

뱀과 전갈은 실제 위험한 생물이지만, 바로 앞에서 사탄의 추락을 말씀하셨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악한 세력의 위험을 나타내는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제자가 어떤 사고나 질병이나 박해에도 절대 해를 입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박해와 고난을 겪는 사건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다음 말씀이 기쁨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한다고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다는 것을 기뻐하여라.」누가복음 10:20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들이 경험한 능력이 거짓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의미를 줄이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다는 것

출애굽기 32:32–33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책을 언급하고, 다니엘 12:1에서는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0:20은 그와 같은 전통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얼마나 큰 능력을 발휘하는가로 기쁨을 측정한다면, 사람들이 말을 거절하거나 병든 사람을 고치지 못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도 줄어든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생각을 바로잡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보다,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일의 성과를 가볍게 여기는 말씀이 아니라, 일의 성과가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최종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 자신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뻐 뛰신 이유

바로 그때 예수께서 성령으로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이 일들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0:21 · 두루새김

원문은 기뻐 뛰는 듯한 큰 기쁨을 나타내는 말을 써서, 두루새김은 「크게 기뻐하며」(ἀγαλλιάω)라고 옮겼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복종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께서 「이 일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주셨다는 사실을 찬양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은 실제 나이가 어린 아이들만이 아니라,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대비되는 이들입니다. 이 대비는 지식과 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와 지위를 근거로 모든 것을 안다고 여기는 태도와 하나님이 드러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발견한 업적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비밀을 알게 된 사람에게는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 아신다.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는 아들과, 아들이 그분을 알려 주려는 사람만 안다.」누가복음 10:2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관해 많은 정보를 아시는 선생님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앎의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이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관계의 바탕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사명은 종교적인 지식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들과 왕들이 보고 싶어 했던 것

제자들 쪽으로 돌아서서 그들에게만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누가복음 10:23 · 두루새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했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 싶어 했지만 듣지 못했다.」누가복음 10:24 · 두루새김

제자들이 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가까이 오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회복되고, 악한 영들이 물러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복은 그들이 남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율법 전문가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보고 있었다」(θεωρέω)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미완료 시제로, 예수님께서 지켜보셨던 일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문법만으로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확정할 수는 없어서, 이 말씀의 시점과 의미를 두고 여러 해석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19절의 뱀과 전갈을 밟는 모습은 시편 91:13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호를 노래하며 사자와 뱀을 밟는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 질문을 뒤집으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10:25–37 본문 →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때 율법 전문가 한 사람이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며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겠습니까?」누가복음 10:25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가볍지 않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질문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누가복음 10:26 · 두루새김

예수님의 답을 평가하려던 율법 전문가는 이제 자신이 율법을 어떻게 읽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미 주어진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율법 전문가가 대답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또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누가복음 10:27 · 두루새김

이 대답은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을 함께 놓은 것입니다. 신명기 6장은 이스라엘 신앙에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은 도둑질과 거짓말, 불의한 행동을 금하고 원한과 보복 대신 사랑을 선택하라고 가르치며, 이웃 사랑이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같은 장 34절은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러 사는 외국인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옳게 대답했다. 이것을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누가복음 10:28 · 두루새김

율법 전문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고, 예수님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다만 이 대화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사람이 선행을 쌓아 얻는 대가로 이해해야 하는지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을 확인시키시며, 그 앎이 실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 전문가는 여기서 대화를 끝내지 않습니다.

율법 전문가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누가복음 10:29 · 두루새김

율법 전문가는 왜 이웃의 범위를 묻는가?

누가는 그가 다시 질문한 이유를 밝힙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알고 있다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정하는 일은 중요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숨겨진 문제가 있습니다. 이웃의 경계를 정하면, 그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기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만 정하면, 다른 민족이나 종교의 사람, 서로 적대하는 사람은 제외할 수 있습니다.

율법 전문가가 정확히 어떤 범위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묻는 순간, 사랑의 대상에 경계선을 그으려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예수님은 그 경계선을 알려 주는 대신,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두들겨 팬 뒤, 그를 반쯤 죽은 채로 버려두고 떠났다.」누가복음 10:30 · 두루새김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름도, 직업도, 재산도 없고, 어느 민족에 속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신분이나 소속을 알아보는 단서가 될 수 있었던 옷마저 빼앗겼습니다.

그는 그저 심하게 다쳐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 전문가는 누가 이웃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제시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세 사람은 모두 그를 보았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갔다.」누가복음 10:31 · 두루새김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똑같이 길 반대편으로 지나갔다.」누가복음 10:32 · 두루새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이스라엘의 성전 예배와 관련된 사람들로,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지나갑니다.

흔히 시체에 닿으면 부정해질까 봐 지나갔다고 설명하지만, 예수님은 두 사람이 지나간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행동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보았지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보았다. 그런데 그다음이 달랐다

「그런데 길을 가던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마음 깊이 가엾게 여겼다.」누가복음 10:33 · 두루새김

제사장도 보았습니다. 레위 사람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다릅니다.

「마음 깊이 가엾게 여겼다」로 옮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강한 연민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누가는 이 낱말을 예수님께서 아들을 잃은 나인의 과부를 보셨을 때 사용했습니다(7:13). 그때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시고 죽은 아들을 일으켜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권능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가 보인 반응은 예수님께서 고통받는 사람을 대하실 때의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사람을 보시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이웃 사랑을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마리아 사람일까요? 앞 장에서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9:53),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자고 했다가 예수님께 꾸짖음을 들었습니다. 9장의 사마리아 마을에서는 거절이, 10장의 사마리아 사람에게서는 자비가 나타납니다.

같은 민족에 속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한 집단 전체를 한 번의 행동으로 평가하려는 태도를 경계하게 합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종교적·사회적 갈등이 있었습니다(요한복음 4:9). 예수님은 그런 갈등의 경계에 있는 사람을 자비의 주인공으로 세우시며, 사랑의 기준이 민족이나 종교적 지위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돌봄으로 이어지다

「그는 다가가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으며 싸매주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봐주었다.」누가복음 10:34 · 두루새김

다가갑니다. 상처를 싸매줍니다. 자기 짐승에 태웁니다. 여관으로 데려갑니다. 돌봐줍니다.

이 행동들은 모두 실제적인 수고를 요구합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처를 돌보고, 자신이 타고 갈 수 있었던 짐승을 다친 사람에게 내어 주며, 여관에 맡겨 놓고 떠나지 않고 직접 돌봐줍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며 말했다. 『이 사람을 돌봐 주세요. 돈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아드릴게요.』」누가복음 10:35 · 두루새김

두 데나리온은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는 다친 사람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머물 수는 없는 듯하지만, 자신이 떠난 뒤에도 돌봄이 이어지도록 마련합니다. 순간적인 동정심에 그치지 않고 책임을 이어 가는 사랑입니다.

그는 다친 사람의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갚을 수 있는지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가 본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줍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에서 ‘누가 이웃이 되었느냐?’로

「네가 보기에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누가복음 10:36 · 두루새김

처음 질문은 사랑해야 할 사람의 범위를 정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리스어에서도 이 차이가 드러나, 마지막 질문에는 「이웃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먼저 판정하려 한다면, 사랑의 대상은 계속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은 상대방의 자격을 확인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율법 전문가가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누가복음 10:37 · 두루새김

그의 대답은 정확합니다. 그가 사용한 기준은 제사장이라는 직분도, 레위 사람이라는 신분도,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출신도 아닌, 자비를 베풀었는가 하는 행동입니다.

이 비유가 정말 가르치는 것

이 비유는 흔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라는 교훈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만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율법 전문가의 질문을 어떻게 뒤집으셨는지 충분히 보지 못합니다. 율법 전문가는 율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에게 더 알아야 할 지식을 주시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문제는 고통받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를 보고 무엇을 하는가에 있습니다.

나인에서 예수님은 과부가 자격이 있는지, 어떤 보답을 할 수 있는지 따지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행동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람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교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사람을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자비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율법 전문가가 처음에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는 이웃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곧바로 한 여자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시험하다」는 누가복음 4:12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명령에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 광야에서는 예수님께서 시험을 물리치셨고, 이제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의 대답을 시험하려 합니다. 예루살렘은 산지에, 여리고는 요단 계곡의 낮은 지역에 있어서 「내려가다가」는 실제 지형과 어울립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다친 사람의 민족을 알아볼 수 없도록 설정하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의 정체를 판단할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 대해서는, 민수기 19장에 시체에 닿으면 부정해진다는 규정이 있으므로 정결 규정 때문에 지나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 제사장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쪽으로 내려가고 있으므로, 종교적 의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나갔다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동기를 덧붙이는 일입니다. 강도를 두려워했거나 일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을 가능성 역시 짐작일 뿐입니다. 기름과 포도주는 당시 치료 관행과 연결해, 포도주는 상처를 씻는 데, 기름은 상처를 부드럽게 하거나 보호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대 의학에서 효과가 검증된 처치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0:2에서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으로 제시되므로 두 데나리온은 그 기준으로 이틀 일당에 해당하지만, 그것이 당시 모든 노동자의 보통 임금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사마리아 사람이 실제로 돌아왔는지, 다친 사람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또 율법 전문가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을 반감 때문에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 어려웠다고 보는 해석이 있지만,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민족적 편견 때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 좋은 몫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0:38–42 본문 →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아들이다

예수께서 일행과 길을 가다가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를 맞아들였습니다.누가복음 10:38 · 두루새김

예수님은 일흔두 사람을 보내시면서 사람들이 맞아들이면 그 집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반갑게 맞아들입니다. 더구나 바로 앞의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에서는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섬기는 행동은 칭찬받을 만한 일 아닐까요?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0:39 · 두루새김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도행전 22:3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발치에서 교육받았다고 말합니다. 스승의 발치에 앉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자세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누가가 한 여성을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묘사한다는 사실은 분명 의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배우는 자리에 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자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르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는가?

마르다는 대접할 일이 많아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주님, 마리아가 저 혼자 일하게 내버려 두는데도 마음이 쓰이지 않으십니까? 저를 도와주라고 말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0:40 · 두루새김

「대접할 일」(διακονία)로 옮긴 말은 섬김을 뜻하며, 누가복음에서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재산으로 섬기던 여자들의 행동에도 같은 어근의 동사가 쓰였고(8:3), 예수님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으로 설명하기도 하십니다(22:27). 마르다가 섬기는 일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누가는 「정신이 없었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원문은 여러 방향으로 끌려가거나 주의가 흩어지는 상황을 나타내는 동사를 씁니다. 맡은 일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 일들이 마르다의 마음을 끌어당겨 주의를 빼앗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마음이 사로잡혀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마르다의 말은 단순한 도움 요청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명령하시도록, 마리아가 하고 있는 일을 멈추고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을 걱정하며 마음이 어수선하구나.」누가복음 10:41 · 두루새김

이름을 두 번 부르는 방식은 성경에서 특별한 강조나 감정의 깊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하며, 반드시 꾸중이나 분노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는 마르다가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골랐기 때문이다. 그 몫은 마리아에게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10:42 · 두루새김

필요한 것은 하나인가, 몇 가지인가?

이 구절에는 중요한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사본은 필요한 것이 하나라는 뜻으로 전하고,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랐습니다. 다른 일부 사본은 「필요한 것은 몇 가지이거나 하나다」로 읽을 수 있어서, 손님 대접에 그토록 많은 음식은 필요 없고 몇 가지면 충분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따른 읽기는 마리아가 고른 좋은 몫과 직접 연결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가장 중요한 필요라는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다만 어느 읽기를 따르더라도 이야기의 핵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선택한 몫을 지켜 주십니다.

마리아의 몫을 누가 빼앗으려 했는가?

왜 예수님은 굳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을 누군가 빼앗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르다였습니다.

마르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일어나 섬기는 일을 해야 하고, 말씀을 듣는 자리는 중단됩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여성이기 때문에 섬기는 일만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제자의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섬김을 전부 그만두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그녀가 하는 일을 가치 없다고 선언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많은 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그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바쁘게 일하는 사람보다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이 언제나 더 거룩하다는 단순한 비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 하는 일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밀어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섬김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섬김이 그 섬김의 대상이신 예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성이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율법 교육에서 어떤 기회를 가졌는지는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달랐으므로, 당시 모든 여성이 종교 교육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누가복음에서 듣는 일과 실천하는 일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하신 말씀(8:21)에서도 드러납니다.

보내시는 분,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고 좋은 몫

누가복음 10:1–42 본문 →

누가복음 10장에는 하나의 주제가 여러 장면에서 되돌아옵니다. 누군가를 맞아들이고 그 말을 듣는 일입니다. 일흔두 사람을 맞아들인 집과 거절한 도시,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다는 기쁨, 이웃이 되어 준 사마리아 사람, 예수님을 맞아들인 마르다의 집이 모두 그 물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하신 예수님이 왜 마지막에는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옹호하실까요? 이 두 이야기를 「행동하는 신앙」과 「말씀을 듣는 신앙」의 경쟁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듣는 일과 실천하는 일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율법 전문가의 문제는 옳은 답을 아는 일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좋은 행동을 하려는 분주함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데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몫을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그 행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고, 말씀을 듣는 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셨고, 아버지를 알려 주셨으며, 율법 전문가의 질문에 대답하시고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스스로 더 많은 선행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고, 아버지를 알아 가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을 삶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자신을 도와주라고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고 두 번 부르시고, 마리아가 좋은 몫을 골랐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마르다가 그 말씀을 듣고 일을 멈추었는지, 마리아 곁에 앉았는지, 계속 손님을 대접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남습니다. 「그 몫은 마리아에게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집에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