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누가 내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율법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레위 사람도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봅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이 셋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율법사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예수님은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는지 물으십니다.

이웃은 단지 내가 찾아서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되어 주어야 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두 자매가 등장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열심히 섬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신을 혼자 섬기도록 내버려 두었다며 불평하고,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골랐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하셨는데, 마지막에는 일하는 사람보다 앉아서 말씀을 듣는 사람을 옹호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10장 전체를 따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흔두 사람을 보내시며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돌아온 제자들에게는 그들이 행사한 능력보다 더 기뻐해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율법사에게는 이웃이 되는 길을 보여 주시고, 마지막 집에서는 예수님을 맞아들인 사람이 무엇을 놓칠 수 있는지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찾아왔을 때, 그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읽는 시간 36분소단락 610장 본문 읽기 →

일흔두 사람을 보내시다 — 먼저 평화를 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10:1–12 본문 →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곳으로 먼저 보내시다

그 뒤에 주님이 다른 일흔두 사람을 세워 자기가 가려는 모든 도시와 고장으로 둘씩 자기보다 앞서 보냈다.누가복음 10: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예수님은 열둘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열두 사도 외에 「다른」 일흔두 사람을 세워 둘씩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확대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독립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곳에 먼저 갑니다. 그들이 행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는 일이며, 이 점은 뒤에서 예수님께서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것」이라고 하실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해 먼저 가는 사람들입니다.

추수할 것이 많은데 왜 기도부터 하라고 하실까?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므로 추수의 주인에게 그분의 추수를 하러 일꾼들을 내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누가복음 10:2 · 본디새김

추수할 것이 많다는 말씀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결론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추수의 주인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꾼들은 추수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밭에서 일하도록 보내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일은 그들의 열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가거라」라고 명령하십니다(10:3).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그 추수의 현장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인정하는 일이고, 파견은 그 주인의 일에 실제로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이 들어갈 세상이 안전한 곳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거라.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어린 양처럼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누가복음 10:3 · 본디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리를 제압할 강한 사냥꾼이 아니라, 이리에게 위협받기 쉬운 어린 양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전할 하나님의 나라에는 권위가 있지만, 그 권위가 세상에서 즉각적인 지배력이나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상처받고 거절당할 수 있는 처지로 보내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무장을 하거나 권력을 확보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도 따로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여행 중 길고 복잡한 인사에 시간을 쓰지 말라는 긴급성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맡겨진 일은 다른 것입니다.

낯선 집의 문 앞에서 처음 하는 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여라.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누가복음 10:5 · 본디새김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낯선 집에 들어가 처음으로 하는 말은 논쟁이나 위협이 아닙니다.

평화를 비는 말입니다.

이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안전과 온전함, 관계의 회복과 번영을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제자들은 그 집이 잘되기를 바라며 들어갑니다.

「거기 평화의 아들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누가복음 10:6 · 본디새김

여기서 ‘아들’은 반드시 혈통을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셈어적인 표현에서는 어떤 성격이나 상태에 속한 사람을 나타내는 데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화의 아들’은 제자들이 전하는 평화를 받아들일 사람, 그 평화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집에서도 예수님은 평화를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평화가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평화를 전하는 것이지만, 그 평화를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지는 제자들이 강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지만, 그 나라를 폭력이나 강제력으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십니다.

도움을 주러 간 사람이 도움을 받는다

「그들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면서 바로 그 집에 머물러라. 일꾼이 자기 삯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누가복음 10:7 · 본디새김

제자들은 병든 사람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기 위해 파견되지만, 자신의 먹을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받아야 합니다. 남을 돕는 사람들이 남의 도움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부끄러워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일꾼은 자기 삯을 받을 만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사역은 가치 있는 노동입니다.

동시에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는 명령은 더 좋은 숙소나 더 풍성한 대접을 찾아다니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환대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더 좋은 조건을 확보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받은 환대에 만족하며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역의 관계는 한쪽이 모든 것을 베풀고 다른 쪽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소식과 치유의 사역을 가져오고, 그들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은 음식과 거처를 제공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주고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왔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도시와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를 말씀하십니다. 받아들이는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거기 앓는 이들을 고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누가복음 10:9 · 본디새김

그런데 거절하는 도시에서는 발에 붙은 먼지를 털어 버리며 말합니다.

「『너희 도시에서 우리 발에 붙은 먼지까지 너희를 향해 털어 버린다. 다만 이것을 알아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누가복음 10:11 · 본디새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은 같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가까이 왔습니다.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도 가까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거절했다고 해서 그 사실 자체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 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환대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가 가져오는 평화와 치유를 경험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거절은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도시보다 견디기가 더 쉬울 것이다.」누가복음 10:12 · 본디새김

소돔은 창세기 19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입니다. 그런 도시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 주어진다는 말씀은 매우 강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은혜와 평화의 소식이라고 해서, 그것을 거절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은 그 은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의 책임도 함께 가져옵니다.

조금 더 깊이

일흔두라는 숫자에는 사본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어 사본에는 일흔, 다른 사본에는 일흔둘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 초기 사본은 일흔둘이라는 읽기를 전합니다. 이 숫자를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여러 민족이나 민수기 11:16–25의 일흔 장로와 연결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여러 민족을 향해 사명이 확대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숫자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상징적 연결의 가능성은 열어 두되 이 파견의 확실한 의미는 본문에 기록된 행동에서 찾아야 합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 많이 본 사람은 무엇을 더 책임져야 하는가

누가복음 10:13–16 본문 →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왜 심판의 근거가 되는가?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가운데서 일어난 기적들이 두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곳 사람들은 벌써 굵은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앉아 회개했을 것이다.」누가복음 10:13 · 본디새김

고라신과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갈릴리 지역의 도시들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고라신에서 일어난 기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사건별로 빠짐없이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바깥의 해안 도시들로, 구약의 예언서에서 교만과 불의에 대한 심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이사야 23장; 에스겔 26–28장).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일어난 기적들이 나타났다면 이미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는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가정적인 비교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지만, 그 기적들이 요구하는 회개의 응답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보았다는 사실과 그 기적의 의미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서로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많이 경험한 것이 곧 하나님께 올바르게 응답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보고 들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무거운 책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왜 낮아지는가?

「그리고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여지겠느냐? 너는 하데스까지 끌어내려질 것이다.」누가복음 10:15 · 본디새김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가르치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며,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런 도시가 하늘까지 높아지지 않고 오히려 하데스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높아지리라고 생각했던 도시가 낮아질 것이라는 심판의 역전입니다.

왜 그토록 놀라운 일을 경험한 도시가 이런 경고를 받아야 할까요? 기적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자동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시고도,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파견된 사람들과 예수님의 관계를 밝히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것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물리치는 것이다. 나를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것이다.」누가복음 10:16 · 본디새김

제자들의 권위는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소식을 받아들이는 일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과 연결되고, 그 소식을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을,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물론 이 말씀을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라고 주장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모든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말씀과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권위는 보내신 분에게서 나오며, 그 권위는 맡겨진 사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가버나움을 향한 말씀은 이사야 14:13–15의 교만한 바벨론 왕을 향한 조롱, 곧 스스로 하늘 높이 올라가려 하지만 결국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된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복음이 이사야 14장을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높아지려는 기대와 극적인 추락이라는 표현에는 분명한 문학적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데스는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표현이지만, 이 구절의 핵심은 그 영역의 세부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탄의 추락보다 더 기뻐해야 할 것

누가복음 10:17–24 본문 →

귀신들까지 복종하는데 왜 그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하실까?

그 일흔두 사람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했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까지 우리에게 복종합니다.」누가복음 10:17 · 본디새김

이들의 기쁨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귀신들이 자신들의 이름이나 능력 때문에 복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복종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받은 권위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누가복음 10:1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사탄이 먼 과거에 하늘에서 추방되었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사탄의 권세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두 해석 모두 알려져 있습니다. 앞의 해석은 이사야 14:12와 연결되어 왔지만, 이사야 14장의 본래 문맥은 바벨론 왕의 교만과 몰락을 다루므로 사탄의 과거 행적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뒤의 해석에는 제자들이 귀신들을 제압하고 돌아왔다는 직접적인 문맥상의 근거가 있습니다.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사탄의 추락에 관한 시간표를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 악한 영들의 지배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제압할 권위를 주었다. 어떤 것도 결코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0:19 · 본디새김

뱀과 전갈은 실제 위험한 생물이지만, 바로 앞에서 사탄의 추락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악한 세력의 위험을 나타내는 이미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제자가 어떤 사고나 질병이나 박해에도 절대 해를 입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박해와 고난을 겪는 사건도 나옵니다. 예수님은 악한 세력에 대해 주신 권위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다음 말씀은 방향을 바꿉니다.

「다만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는 것을 기뻐하여라.」누가복음 10:20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그들이 경험한 권능이 거짓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의미를 축소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기쁨의 중심을 바꾸십니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다는 것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생명에 관한 기록을 말하는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32:32–33에서 모세는 여호와야훼께서 기록하신 책을 언급하고, 다니엘 12:1에서는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0:20은 그와 같은 전통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공적인 사역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이 그들의 기쁨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능력을 행사하는가로 기쁨을 측정한다면, 사람들이 말을 거절하거나 병든 사람을 고치지 못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도 줄어든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뻐해야 할 가장 깊은 이유는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행했는가보다,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사역의 성과를 가볍게 여기는 말씀이 아니라, 그 성과가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최종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 자신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뻐 뛰신 이유

바로 그 시각에 그가 거룩한 영으로 기뻐 뛰며 말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이것을 지혜로운 이들과 슬기로운 이들에게서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기쁘신 뜻이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0:21 · 본디새김

누가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영으로 기뻐 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복종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것」을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사실을 찬양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은 실제 나이가 어린 아이들만이 아니라,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대비되는 이들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지식과 이성, 성경을 공부하고 깊이 생각하는 일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대비는 자신의 지혜와 지위를 근거로 모든 것을 안다고 여기는 태도와, 하나님이 드러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발견한 업적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 더 뛰어나다고 자랑할 근거는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있습니다.

「내 아버지가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아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고자 하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누가복음 10:2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아시는 선생님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는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앎의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관계의 근원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사명은 어떤 종교적인 지식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들과 왕들이 보고 싶어 했던 것

예수님은 제자들 쪽으로 돌아서서 그들에게만 따로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덧붙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기를 바랐지만 보지 못했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기를 바랐지만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0:24 · 본디새김

제자들이 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가까이 오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회복되고, 악한 영들이 물러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은 그들이 남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율법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을 읽어 보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서,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행하는가로 옮겨갑니다.

조금 더 깊이

10:18의 「보고 있었다」는 미완료 시제로, 예수님께서 지켜보셨던 일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문법만으로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확정할 수는 없으며, 이 말씀의 시점과 의미를 두고 여러 해석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10:19의 뱀을 밟는 이미지는 시편 91:13에도 사자와 뱀을 밟는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호를 노래하는 문맥입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 질문을 뒤집으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10:25–37 본문 →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보아라,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그를 시험하며 말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겠습니까?」누가복음 10:25 · 본디새김

이 질문은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질문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답을 제시하지 않고 되물으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율법에 무엇이라 적혀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느냐?」누가복음 10:26 · 본디새김

여기서 질문의 방향이 바뀝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답을 듣고 평가하려 했지만, 이제 자신이 율법을 어떻게 읽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미 주어진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누가복음 10:27 · 본디새김

이 대답은 두 구약 본문을 함께 놓은 것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여호와야훼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6:5이고, 둘째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18입니다. 신명기 6장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은 이웃 사랑이 단순히 따뜻한 감정을 품는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도둑질과 거짓말, 불의한 행동을 금하고, 원한과 보복 대신 사랑을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같은 장 34절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류하는 외국인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사의 대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바르게 보여 줍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바르게 대답했다. 이것을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누가복음 10:28 · 본디새김

예수님은 율법사의 성경 해석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다만 영원한 생명을 인간이 선행을 쌓아 얻는 보수로 이해해야 하는지까지 이 대화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을 확인시키시며, 그 앎이 실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여기서 대화를 끝내지 않습니다.

율법사가 자기를 의롭게 하고 싶어 예수에게 말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누가복음 10:29 · 본디새김

율법사는 왜 이웃의 범위를 묻는가?

누가는 그가 「자기를 의롭게 하고 싶어」 다시 질문했다고 밝힙니다. 앞서 옳은 대답을 한 그가, 이제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는 마음으로 이웃의 범위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는 숨겨진 문제가 있습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경계를 정하면, 그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기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만 규정하면, 다른 민족이나 종교의 사람,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 범위에서 제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율법사가 정확히 어떤 범위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묻는 순간, 사랑의 대상에 경계선을 그으려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예수님은 그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알려 주는 대신,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예수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떼의 손에 떨어졌다.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두들겨 팬 뒤에 반쯤 죽은 채로 버려두고 떠났다.」누가복음 10:30 · 본디새김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도 없습니다.

직업도 없습니다.

재산도 없습니다.

어느 민족에 속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강도들이 옷까지 벗겼습니다. 당시의 옷차림은 사람의 신분이나 소속을 알아보는 단서가 될 수 있었지만, 이 사람에게서는 그런 단서마저 빼앗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민족을 알아볼 수 없도록 설정하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 사람의 정체를 판단할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그저 심하게 다쳐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사는 누가 이웃인지 알고 싶어 했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제시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세 사람은 모두 그를 보았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갔다.」누가복음 10:31 · 본디새김
「레위 사람도 그 자리에 이르러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갔다.」누가복음 10:32 · 본디새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이스라엘의 성전 예배와 관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던 두 사람이 모두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 이유보다 행동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나갔습니다.

그들이 그 사람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보았지만,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보았다. 그런데 그다음이 달랐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가 있는 데 이르러 보고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누가복음 10:33 · 본디새김

제사장도 보았습니다.

레위 사람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다릅니다.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강한 연민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누가는 이 낱말을 앞서 예수님께서 나인의 과부를 보셨을 때 사용했습니다(7:13). 그때 예수님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보시고 가엾이 여기셨고, 장례 행렬을 멈추시고 죽은 아들을 일으켜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과 동일한 권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가 보인 반응은 예수님께서 고통받는 사람을 대하실 때 나타내신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관해 추상적인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어떤 사람을 보시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마리아 사람일까요?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9:53).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자고 했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사랑의 모범으로 등장합니다.

같은 민족에 속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한 집단 전체를 한 번의 행동으로 평가하려는 태도를 경계하게 합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종교적·사회적 갈등이 있었고, 요한복음 4:9에서도 그 거리감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그런 갈등의 경계에 있는 사람을 자비의 주인공으로 세우십니다. 율법사가 예상했을 법한 인물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의 기준은 민족이나 종교적 지위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돌봄으로 이어지다

「그가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으며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다.」누가복음 10:34 · 본디새김

다가갑니다.

상처를 싸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웁니다.

여관으로 데려갑니다.

돌봅니다.

이 행동들은 모두 실제적인 수고를 요구합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갈 수 있었던 짐승을 부상자에게 내어 주었고, 여관에 그냥 맡겨 놓고 떠나지 않고 직접 돌보아 줍니다.

「이튿날 그가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며 말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돈을 더 쓰시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누가복음 10:35 · 본디새김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수고뿐 아니라 적지 않은 돈도 사용합니다. 그는 부상자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 수는 없는 듯하지만, 자신이 떠난 뒤에도 돌봄이 이어지도록 마련합니다. 순간적인 동정심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이 계속 돌봄받을 수 있도록 책임을 이어 가는 사랑입니다.

그는 부상자의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주면 나중에 갚을 수 있는지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가 본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줍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에서 ‘누가 이웃이 되었느냐?’로

「네가 보기에 이 셋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누가복음 10:36 · 본디새김

율법사는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처음 질문은 사랑해야 할 사람의 범위를 정하려는 질문이고, 마지막 질문은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스어에서도 마지막 질문에는 ‘이웃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율법사는 내가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줄 것인지를 물으십니다.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먼저 판정하려 한다면, 사랑의 대상은 계속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은 상대방의 자격을 먼저 확인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누가복음 10:37 · 본디새김

율법사의 대답은 정확합니다. 그가 사용한 기준은 제사장이라는 직분도, 레위 사람이라는 신분도,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출신도 아닙니다. 자비를 베풀었는가 하는 행동입니다.

이 비유가 정말 가르치는 것

이 비유는 흔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라는 교훈으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옳지만, 그 정도로만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질문을 어떻게 뒤집으셨는지 충분히 보지 못합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더 알아야 할 지식을 주시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 삶에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도 쓰러진 사람을 보았으므로, 문제는 고통받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를 보고 무엇을 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깊은 의미는 인간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교훈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사람을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자비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율법사가 처음에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는 이웃 사랑을 실제로 행하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복음 10장은 다시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조금 더 깊이

10:25의 ‘시험하다’는 누가복음 4:12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에 사용된 동사와 같습니다. 광야에서는 예수님께서 시험을 물리치셨고, 이제 율법사는 예수님의 대답을 시험하려 합니다. 예루살렘은 산지에, 여리고는 요단 계곡의 낮은 지역에 있어 그 길은 실제로 상당한 고도 차이를 내려가는 길이므로, 「내려가다가」라는 표현은 지형과도 어울립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지나간 이유를 두고는 시체에 접촉하면 부정해질까 봐 그랬다고 흔히 설명하며, 민수기 19장에 시체 접촉으로 인한 부정의 규정이 있으므로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야기 속 제사장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여리고 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강도를 두려워했거나 일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을 가능성 역시 추론일 뿐이므로, 어떤 동기를 확정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것을 덧붙이는 일입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쓴 것은 당시의 치료 관행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는데, 포도주는 상처를 씻는 데, 기름은 상처를 부드럽게 하거나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현대 의학에서 효과가 검증된 처치였다는 뜻은 아니며, 본문은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처를 돌보았음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20:2에서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으로 제시되므로 두 데나리온은 그 사례를 기준으로 이틀 일당에 해당하지만, 그것이 당시 모든 노동자의 보편적 임금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사마리아 사람이 실제로 돌아왔는지, 부상자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또 율법사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을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반감 때문으로 보는 해석이 있지만, 본문은 그가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민족적 편견 때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 좋은 몫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0:38–42 본문 →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아들이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그가 어떤 마을에 들어갔다. 마르다라는 여자가 그를 맞아들였다.누가복음 10:38 · 본디새김

예수님은 일흔두 사람을 보내시면서 어느 집이든 들어가면 평화를 빌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면 그 집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거절하지 않고 환대했습니다.

더구나 바로 앞의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에서는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섬기는 행동은 칭찬받을 만한 일 아닐까요?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자매가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누가복음 10:39 · 본디새김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도행전 22:3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설명하는데, 그리스어 원문에는 가말리엘의 발치에서 교육받았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스승의 발치에 앉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자세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여성이 공식적인 율법 교육에서 어떤 기회를 가졌는지는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달랐으므로, 당시 모든 여성이 종교 교육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한 여성을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묘사한다는 사실은 분명 의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배우는 자리에 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자리를 옹호하십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르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는가?

마르다는 섬김이 많아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주님, 제 자매가 저 혼자 섬기도록 내버려 둔 것이 주님께는 상관없습니까? 그러니 저를 거들라고 마리아에게 말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0:40 · 본디새김

‘섬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누가복음에서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재산으로 섬기던 여자들의 행동에도 같은 어근의 동사가 사용되었고(8:3), 나중에 예수님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으로 설명하시기도 합니다(22:27). 그러므로 마르다가 섬기는 일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손님을 맞아들이고 음식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한 환대의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누가는 그녀가 섬김을 많이 했다고만 하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동사는 여러 방향으로 끌려가거나 주의가 분산되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맡은 일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 일들이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겨 주의를 빼앗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마음이 사로잡혀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일하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녀의 말은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명령하시도록 요구합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중요함 때문에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을 이해하는 데 핵심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주님이 그 여자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것을 걱정하고 마음이 어수선하다.」누가복음 10:41 · 본디새김

이름을 반복하는 방식은 성경에서 특별한 강조나 정서적인 무게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하며, 이 표현을 반드시 꾸중이나 분노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는 마르다가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하나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골랐기 때문이다. 그 몫은 마리아에게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10:42 · 본디새김

‘필요한 것은 하나’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고,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은 무엇일까요? 이 구절은 사본에 따라 「필요한 것은 하나다」로도, ‘필요한 것은 몇 가지이거나 하나다’로도 읽힙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든 예수님은 마리아가 선택한 몫을 옹호하시고, 그 몫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의 몫을 누가 빼앗으려 했는가?

왜 예수님은 굳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을 누군가 빼앗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르다였습니다.

마르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일어나 섬기는 일을 해야 하고, 말씀을 듣는 자리는 중단됩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일이 정당하다고 인정하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요구 때문에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마리아는 여성이기 때문에 섬기는 일만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도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제자의 자리에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은 그 선택을 좋은 몫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섬김을 전부 그만두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그녀가 하는 일을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지도 않으십니다. 많은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그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바쁘게 일하는 사람보다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이 언제나 더 거룩하다는 비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하는 일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밀어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섬김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섬김이 그 섬김의 대상이신 예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10:42에는 중요한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사본은 「필요한 것은 하나다」라고 전하고,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는 ‘필요한 것은 몇 가지이거나 하나다’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뒤의 읽기를 따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손님을 맞이하는 데 그토록 많은 음식을 준비할 필요는 없으며 몇 가지 또는 한 가지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의 읽기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과 직접 연결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가장 중요한 필요라는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더라도 이야기의 핵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보내시는 분,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고 좋은 몫

누가복음 10:1–42 본문 →

누가복음 10장을 처음부터 다시 보면 하나의 표현이 여러 장면에서 되돌아옵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일흔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곳으로 먼저 보내져 평화를 빌었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을 거절한 도시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은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지위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알아보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 응답은 사마리아 사람과 마리아에게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두 이야기를 ‘행동하는 신앙’과 ‘말씀을 듣는 신앙’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하는 경쟁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듣는 일과 행하는 일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21).

율법사의 문제는 옳은 답을 아는 일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좋은 행동을 하려는 분주함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몫을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는 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세워 보내셨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더 깊은 기쁨을 가르치셨으며,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이제 스스로 더 많은 선행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고, 손님을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를 자신을 돕도록 보내 달라고 부탁했지만,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고 두 번 부르시며 마리아가 좋은 몫을 골랐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마르다가 그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일을 멈추었는지, 마리아 곁에 앉았는지, 아니면 계속 손님을 섬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신 「그 몫은 마리아에게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남습니다.

집에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선택한 자리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