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4–9장 · 갈릴리에서의 활동

영광의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희게 빛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갈 때 베드로는 「스승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초막 셋을 만듭시다」라고 말합니다. 그곳에 머물고 싶었던 것일까요? 베드로가 정확히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놀라운 광경이 끝나려는 순간에 베드로가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을 굳이 기록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붙들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는 영광의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일을 향하고 계십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눈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게 될 떠남」이었습니다(9:31). 산에서 나타난 영광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고난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얼굴을 그쪽으로 굳게 향했다」고 기록합니다(9:51).

누가복음 9장은 이처럼 예수님의 길이 결정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장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제자들이 놀라운 권위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쯤 되는 남자들을 포함한 큰 무리를 먹이시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모든 일이 영광스러운 결말을 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받으시고 버림받으셔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다투고, 자신들과 함께 다니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막으려 하며, 예수님을 거절한 마을에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가시는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아는 것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드러나는지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읽는 시간 43분소단락 99장 본문 읽기 →

열둘을 보내시다 — 권위는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누가복음 9:1–9 본문 →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불러 모으십니다.

그가 열둘을 불러 모아 모든 귀신을 다스리고 병을 고칠 힘과 권위를 주었다.누가복음 9:1 · 본디새김

본문은 제자들이 본래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들이 행하게 될 일의 출발점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받은 권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앓는 이들을 낫게 하라고 그들을 보냈다.누가복음 9:2 · 본디새김

말씀과 치유가 함께 있습니다. 제자들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로 파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행해 오신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시면서,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권위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먼저 정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명령이 뜻밖입니다.

그들에게 말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챙겨 가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전도, 속옷 두 벌도 안 된다.」누가복음 9:3 · 본디새김

귀신을 다스릴 권위까지 받은 사람들이 왜 빵과 돈도 없이 길을 떠나야 할까요?

권위를 받았지만 모든 것을 갖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제자들의 사역이 무엇에 의존하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권위를 받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미리 확보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자고 무엇을 먹을지는 방문하는 사람들의 환대와 연결됩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누가복음 9: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도울 능력과 권위를 주셨지만,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위치에 두십니다. 권위를 행사하면서도 누군가의 집에 머물러야 하고, 누군가의 환대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역의 방식은 제자들이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과시하는 대신, 예수님에게 받은 사명과 그들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의 환대에 의지하도록 이끕니다.

다만 이 명령을 모든 시대의 선교사가 반드시 돈과 여벌옷 없이 여행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규칙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복음 22:35–36에서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아무것도 없이 보내셨던 일을 돌아보시면서 이후에는 다른 준비를 말씀하십니다. 9장의 명령은 이 파견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받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보내지지는 않았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거든 그 도시에서 나오면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려라.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누가복음 9:5 · 본디새김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는 행동은 그 도시가 제자들이 전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소식은 듣는 사람이 아무런 책임 없이 무시해도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절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설득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도시를 벌하라고도 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증거를 남기고 떠나야 합니다. 이 장의 후반부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마리아 마을에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도 되느냐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는 것도, 처음부터 주어진 명령이 보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칩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권위가 실제 사역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헤롯은 왜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해하는가?

그런데 누가는 갑자기 헤롯의 반응을 들려줍니다. 분봉왕 헤롯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듣고 몹시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사람도 있으며,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헤롯에게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특별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헤롯이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냐?」 그를 보려고 애썼다.누가복음 9:9 · 본디새김

누가복음은 3:19–20에서 헤롯이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기록했지만, 요한의 죽음은 이곳에서 헤롯 자신의 말로 처음 분명히 언급됩니다. 누가가 이 자리에서 강조하는 것은 헤롯의 궁금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십니까?

이 질문은 이 장에서 점차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헤롯이 궁금해하고, 조금 뒤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시며, 마침내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제자들의 사역과 함께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받은 권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병을 고치자, 사람들은 그 일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묻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고, 어떤 길을 가시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6:8과 비교하면 지팡이에 관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는 지팡이 하나를 허락하지만, 누가는 지팡이까지 가져가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본문이 실제로 다르므로 어느 한쪽을 다른 쪽과 같게 고쳐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준비물의 세부 목록보다, 보내시는 예수님과 그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관계입니다. 헤롯이 왜 요한의 죽음을 명령했는지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마가복음 6:17–29에 나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다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누가복음 9:10–17 본문 →

돌아온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보고하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신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낱낱이 이야기합니다. 누가는 앞에서 ‘열둘’이라고 부른 이들을,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자리에서 다시 ‘사도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도라는 이름이 그들의 실제 사명과 연결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만 데리고 벳새다라는 도시로 물러가십니다. 사역을 마친 제자들과 따로 시간을 보내려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지만, 누가는 그 목적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곳을 알아내고 따라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아들여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둘은 현실적인 문제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무리를 돌려보내 주변 마을과 시골에서 묵을 곳을 찾고 음식을 구하도록 하자고 제안합니다.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생각한 현실적인 제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말고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해 먹을 것을 사 온다면 몰라도.」누가복음 9:13 · 본디새김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먹이라고 하셨을까?

그곳에는 남자가 오천 명쯤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고 있고, 먹을 것을 사 오려면 얼마나 큰 비용과 수고가 필요한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황을 모르셔서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자신들의 부족함을 확인한 뒤에 그들을 통해 무리를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쉰 명쯤씩 무리 지어 기대어 앉게 하라고 명령하시자,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합니다.

그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고 떼었다. 무리 앞에 차려 놓도록 제자들에게 계속 주었다.누가복음 9:1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빵을 드시고 축복하십니다.

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사람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줍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만 제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먹을 것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사도들을 파견하신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받은 권위로 병든 사람들을 고쳤고, 이제는 예수님에게 받은 음식을 무리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자원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받고,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을 떠올리다

누가는 그곳을 「인가가 없는 곳」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16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열왕기하 4:42–44에서는 엘리사가 적은 양의 빵으로 백 명을 먹이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만한 양으로 모두를 먹일 수 있겠느냐고 묻지만 결국 먹고도 음식이 남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이 어느 구약 본문의 직접적인 성취라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장면과 주제를 통해 연결되는 사건들입니다. 모세는 만나를 내려 주신 여호와야훼의 약속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엘리사는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빵을 나누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직접 빵을 드시고 축복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모두 먹고 배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 분량으로 거두어졌다.누가복음 9:17 · 본디새김

제자들은 음식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먹었습니다. 조금씩 맛본 것이 아니라 배불리 먹었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음식은 부족함을 겨우 면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 이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신지 물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오천이라는 숫자가 남자를 가리킨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여자와 어린이까지 포함한 전체 인원은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한 총인원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열두 광주리가 열두 제자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둘 다 이 장의 문맥에서 연상할 수 있는 대상이지만, 누가는 남은 음식과 열두 제자 또는 열두 지파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가복음 9:18–27 본문 →

베드로는 정답을 말했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기도하고 계시고, 제자들도 함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중요한 결정과 계시가 기도와 연결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 줍니다. 열둘을 선택하시기 전에도 밤새 기도하셨습니다(6:12–13).

예수님께서 무리가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시자, 제자들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사람. 앞서 헤롯이 들었던 소문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과거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들과 비슷한 권능을 보고, 예수님을 놀라운 예언자적 인물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누가복음 9:20 · 본디새김

이제 예수님께서는 함께 걸어왔고, 예수님의 권위를 받아 사역했으며, 수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모습을 본 제자들에게 직접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이 장에서 결정적인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하며, 히브리어 ‘메시아’에 대응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졌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다스릴 왕에 대한 기대도 이 칭호와 연결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단지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그들을 꾸짖어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일렀다.누가복음 9:2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공개적으로 큰 칭찬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만으로는 예수님께서 어떤 그리스도이신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고백의 의미를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왜 버림받으시고 죽임당하셔야 하는가?

그가 말했다.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누가복음 9:22 · 본디새김

이것은 제자들이 기대했을 법한 메시아의 모습과 충돌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면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적들을 물리치며 영광스럽게 다스리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당하실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까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체념일까요?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누가복음의 문맥에서 이 필요성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에 성경에 기록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4:44–46). 예수님께서 고난을 피하지 못하실 만큼 무력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고난의 길을 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고백이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맞지만, 예수님의 왕권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승리의 방식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이며,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실 것인지까지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제자가 선택하는 특별한 고난인가?

그가 모두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누가복음 9:23 · 본디새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나 원하지 않는 병, 가족과의 갈등을 모두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고난이 믿음의 삶과 관계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의미로만 읽으면 본래의 날카로움이 사라집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 도구였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가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의 권력 아래 빼앗기게 되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자신의 안전과 지위와 생명을 최우선으로 지키려는 삶과 충돌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에 「날마다」를 덧붙입니다. 모든 제자가 반드시 실제 십자가형으로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자기부인의 태도가 한 번의 극적인 결단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지속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9:24 · 본디새김

여기서 ‘목숨’은 단순히 육체와 분리된 불멸의 영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을 삶의 최종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참된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말라거나, 일부러 위험한 일을 찾아 나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나 때문에」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나 무모한 희생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고난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위해 고난까지 감수할 수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순전히 인간의 용기와 결단을 시험하는 말씀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신다고 밝히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예수님께서 가시지 않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사람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이들이 있다.」누가복음 9:2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해석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여기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살아 있는 동안 보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곧이어 나오는 산 위의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보는 해석, 예수님의 부활과 높아지심과 성령의 오심과 복음의 확산으로 보는 해석,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해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바로 이어지는 산 위의 사건을 이 말씀과 어떻게 이어 읽을지가 달라집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 배열만 놓고 보면 첫 번째 해석이 특별한 힘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지 여드레쯤 지난 뒤, 세 제자가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누가는 9:27의 성취가 바로 그 사건이었다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산 위의 사건을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 준 장면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 말씀의 모든 의미가 거기에서 소진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누가는 우리를 그 산 위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떠남’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9:22의 「…해야 한다」에는 원문에서 어떤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나타내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사야 52:13–53:12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은 멸시와 고난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짊어지지만, 여호와야훼의 뜻이 그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누가복음 9:22가 이사야 53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9:23의 「날마다」는 마가복음 8:34와 마태복음 16:24의 대응 구절에는 없는 말입니다. 9:24의 ‘목숨’으로 옮긴 원어는 문맥에 따라 생명, 목숨,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9:27의 두 번째 해석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사역 이후 사도행전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데 근거합니다. 종말과 연결해 읽는 경우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이들」이라는 시간적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중요한 논점이 됩니다.

산 위에서 드러난 영광 — '그의 말을 들어라'

누가복음 9:28–36 본문 →

기도하시는 동안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가 기도하는 동안에 그의 얼굴 모습이 달라졌고 그의 옷이 희어져 번쩍였다.누가복음 9:29 · 본디새김

누가는 예수님의 얼굴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능력을 얻으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자들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적은 음식으로 큰 무리를 먹이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에게 나타나는 영광을 봅니다.

보아라, 두 사람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세와 엘리야였다.누가복음 9:30 · 본디새김

왜 하필 모세와 엘리야일까요?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지도자이자 율법을 받은 예언자이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던 때에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했던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을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해하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고, 그 연결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들이 율법과 예언서를 상징한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연결은 하나님을 만나는 산의 경험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호와야훼의 계시를 받았고(출애굽기 19–20장),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열왕기상 19:8–18). 이제 두 사람이 산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납니다.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의 ‘떠남’이었다

그들은 영광 가운데 나타나 그가 예루살렘에서 이루게 될 떠남을 말하고 있었다.누가복음 9:31 · 본디새김

여기서 ‘떠남’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엑소도스(ἔξοδος)입니다. 어떤 곳에서 나간다는 뜻이며,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 이 낱말은 출애굽, 곧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온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사건을 이끈 모세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떠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낱말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떠남과 출애굽의 모든 세부 사항이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떠남을 엑소도스라고 부르는 것은 독자가 출애굽과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문학적 단서입니다.

또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떠남을 ‘겪게 되신다’고만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그 떠남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고난을 단지 예수님에게 닥쳐오는 비극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로 제시합니다.

제자들은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광 가운데 있는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고난으로 이어질 떠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피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바로 그 길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왜 초막을 짓자고 했을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잠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봅니다.

그 두 사람이 그에게서 떠나갈 때에 베드로가 예수에게 말했다. 「스승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초막 셋을 만듭시다.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누가복음 9:33 · 본디새김

베드로가 왜 초막을 지으려 했는지는 본문에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초막절을 떠올리는 해석이 있고, 베드로가 영광스러운 순간을 붙잡아 두려 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읽기에는 특별한 문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말한 시점이 「그 두 사람이 그에게서 떠나갈 때」였다고 굳이 기록합니다. 그들이 떠나려 하자 초막을 짓자고 말했다면, 그들을 계속 머물게 하고 싶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본문에서 확실한 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고, 이제는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봅니다. 그런데도 그 영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의 길이 어떤 길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아는 것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구름에서 들린 말씀은 왜 ‘그의 말을 들어라’인가?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 구름이 생겨 그들을 덮습니다. 그들은 구름 안으로 들어가면서 두려워합니다. 출애굽기 24:15–18에서 구름이 시내산을 덮고 그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듯, 성경에서 구름은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됩니다.

구름에서 말하는 소리가 났다. 「이 사람은 내 아들이며, 골라 뽑힌 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누가복음 9:35 · 본디새김

먼저 「골라 뽑힌 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말씀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3:22). 이번 표현에서는 이사야 42:1과의 연결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붙들고 선택한 종에게 자신의 영을 두시고, 그를 통해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왕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선택된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어라」. 이것이 산 위 사건의 절정입니다. 하늘의 소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감상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초막을 지어 그 자리에 머무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 명령은 신명기 18:15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하며, 백성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산 위에는 모세가 있는데, 구름에서 들린 말씀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바로 얼마 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받으시고 버림받으셔서 죽임당하시며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바로 그 말씀입니다. 산 위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소리가 났을 때 예수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잠잠했고 자기들이 본 것 가운데 아무것도 그 무렵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누가복음 9:36 · 본디새김

모세와 엘리야는 떠났고, 구름에서 들리던 소리도 그쳤습니다. 제자들 앞에는 예수님만 남아 계십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산 위에 계속 머무르는 길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9:31의 떠남이 가장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앞서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고난과 죽음입니다(9:22). 그러나 이 장은 다시 살아나심을 함께 말하고, 51절은 예수님의 「들려 올라갈 날들」을 언급하므로, 떠남을 죽음으로만 좁히기보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고난과 죽음, 부활과 높아지심의 전체 흐름과 연결해 읽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31절 자체는 떠남에 포함되는 사건들을 하나씩 열거하지 않습니다. 초막절을 떠올리는 해석은 이스라엘이 초막절에 광야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신들을 돌보셨던 일을 기억했다는 데 근거합니다(레위기 23:42–43). 그러나 누가는 이 사건이 초막절에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고, 초막절을 기념하려고 초막을 제안했다고 확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9:35의 ‘골라 뽑힌 이’는 이사야의 ‘선택한 종’과 완전히 같은 그리스어 형태는 아니지만, 의미와 문맥에서 중요한 연관성을 지닙니다. 여러 주요 사본이 전하는 ‘골라 뽑힌 이’라는 읽기는 마가·마태의 ‘사랑하는’과도 다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3:22에서도 신명기 18:15를 예수님과 연결하므로, 이 장면에서 예수님을 모세가 예고한 예언자와 연결하는 읽기에는 중요한 정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통이었다

누가복음 9:37–45 본문 →

권위를 받은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하다

다음 날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오시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칩니다.

보아라,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소리쳐 말했다. 「선생님, 간청합니다. 제 아들을 돌아봐 주십시오. 저에게 하나뿐인 아들입니다.」누가복음 9:38 · 본디새김

또다시 하나뿐인 자녀를 둔 부모가 등장합니다. 앞 장에서 야이로는 하나뿐인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번에는 한 아버지가 악한 영에게 시달리는 하나뿐인 아들을 돌아봐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들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몸이 뒤흔들리며, 거품을 내고, 상처를 입습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내쫓아 달라고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청했지만 그들은 내쫓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9:40 · 본디새김

이 말은 9장의 시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에게 모든 귀신을 다스릴 힘과 권위를 주셨고, 그들은 실제로 마을들을 다니며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누가는 여기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만으로 제자들이 기도를 적게 했기 때문이라거나, 권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배열은 대조를 만듭니다. 권위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맡아 행하지만, 여전히 예수님께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영광을 보이신 분이 한 아이의 고통 앞에 서시다

예수가 대답하여 말했다. 「아, 믿음 없고 뒤틀린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고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여기 데려오너라.」누가복음 9:4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강한 탄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누구를 책망하셨는지는 본문에 명확히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귀신을 내쫓지 못한 제자들일 수도 있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포함한 세대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다가오고 있을 때 귀신이 그를 메어치고 심하게 뒤흔들었다. 예수가 더러운 영을 꾸짖고 아이를 낫게 하여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누가복음 9:42 · 본디새김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는 표현은 나인에서 죽은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7:15). 두 사건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아이만이 아닙니다. 그 아이를 잃을까 두려워하거나, 이미 잃어버린 부모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한 사람의 몸을 회복시키는 일에 그치지 않고, 무너지고 있던 가족의 삶까지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산 위의 영광과 산 아래의 고통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달라지고 옷이 희게 빛났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악한 영에게 시달리며 몸이 뒤흔들리는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 위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가운데 예수님과 이야기했고, 산 아래에서는 한 아버지가 아들을 살려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의 영광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내려오셔서 고통받는 아이를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지니신 분이지만,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 길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길입니다.

사람들이 놀라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아이의 회복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큰 위엄에 몹시 놀라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마다 감탄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이 곧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9:44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귀신을 명령으로 쫓아내신 분이, 이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붙잡히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에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십니다.

산 위에서 하늘의 소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명령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귀담아들으라고 하십니다. 두 장면은 서로를 비춥니다. 제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고난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이 말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을 두고 그에게 묻기를 두려워했다.누가복음 9:45 · 본디새김

누가는 그 말씀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이 머리가 나쁘거나 주의 깊게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환원할 수 없는 서술입니다. 다만 왜 그 말씀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누구의 어떤 행동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 묻지도 못합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두려웠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가장 중요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어서 이야기한 주제는 자기들 가운데 누가 더 큰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9:28–29에는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귀신을 내쫓지 못한 이유를 묻는 장면이 있지만, 누가는 그 대화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믿음 없고 뒤틀린 세대」라는 표현은 신명기 32:5, 20에서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책망하는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9:44의 「넘겨질」에 사용된 동사는 넘겨주다 또는 넘겨지게 하다는 뜻으로, 뒤에 예수님께서 붙잡혀 다른 사람들의 권력 아래 놓이시는 사건들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절은 누가 예수님을 넘겨주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한 예수님의 운명을 확인하기 두려웠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가능한 해석일 뿐입니다.

가장 큰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9:46–50 본문 →

죽음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서열을 논한다

그들 사이에 따짐이 생겼다. 자기들 가운데 누가 더 큰가 하는 것이었다.누가복음 9:46 · 본디새김

이것은 누가복음 9장 전체에서 가장 뼈아픈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큰지 따집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십니다.

그들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아이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모두 가운데 가장 작은 이, 그 사람이 크기 때문이다.」누가복음 9:48 · 본디새김

왜 아이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어린이를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의 상징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누가 더 큰가를 따지는 자리에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작은 아이가 세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는 높은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사람이 되려는 열망을 이용하여 더 높은 자리를 얻는 방법을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뒤집으십니다. 이것은 겸손한 척하면 더 높은 자리를 얻게 된다는 보상 체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크기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구체화됩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작은 사람을 하찮게 여길 수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작은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말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막으려 했습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9:49 · 본디새김

방금 전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더 큰가를 다투었습니다. 이제는 자기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두 사건 모두 자신들의 위치와 소속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요한은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모욕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귀신을 내쫓는 척하며 사람을 속였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기준이 ‘예수님을 거스르는가’보다 ‘우리와 함께 있는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막지 마라. 너희를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9:50 · 본디새김

제자들은 그 사람을 자신들 바깥의 사람으로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너희」를 거스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떤 종교적인 행동이든 모두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11:23).

두 말씀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룹니다. 9장에서는 제자들이 자기들과 함께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을 막으려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독점하려는 태도를 바로잡으십니다.

여기서 앞선 실패가 다시 떠오릅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는데, 귀신을 내쫓는 다른 사람을 막으려 했습니다. 누가가 이 두 사건을 직접 비교하지는 않지만, 같은 장 안에 놓인 대조는 인상적입니다.

제자들이 가장 크고 중요한 사람들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따름이 실제로 어떤 길이 되는지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9:40의 대응 구절에는 「우리를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의 본문은 「너희」라고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얼굴을 향하시다

누가복음 9:51–56 본문 →

이 한 절에서 누가복음의 방향이 바뀐다

그가 들려 올라갈 날들이 차 갈 때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얼굴을 그쪽으로 굳게 향했다.누가복음 9:51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이야기의 목적지로 뚜렷하게 등장하고,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 길에서 겪으시는 일들과 가르침을 길게 들려줍니다.

먼저 「들려 올라갈 날들」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함께 읽으면 이 표현은 예수님의 하늘로 올려지심과 연결됩니다(사도행전 1:2, 9–11). 그러나 그곳에 이르시기까지는 먼저 예루살렘에서의 고난과 죽음이 있습니다. 9:51은 예수님의 여정이 단순히 죽음을 향하는 길만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거쳐 높아지시는 전체 흐름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얼굴을 그쪽으로 굳게 향했다」입니다. 원문은 얼굴을 굳게 세운다는 표현으로, 단순히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뜻보다 강한 결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실지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얼굴을 굳게 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산 위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떠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굳게 하십니다.

고난의 길은 예수님께 닥쳐오는 예상 밖의 사고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알고도 걸어가시는 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예수님께서 앞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이 예수님을 맞을 채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갑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9:53 · 본디새김

사마리아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전통에 뿌리를 둔 공동체였지만, 유대 사람들과 예배의 중심지를 비롯한 중요한 문제에서 갈등을 겪어 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을 거룩한 예배 장소로 여겼고,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배했습니다(요한복음 4:20).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사마리아 마을이 받아들이지 않은 사건은 이러한 역사적·종교적 긴장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누가는 누구의 결정으로 예수님을 거절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살라 버리라고 우리가 말하기를 원하십니까?」누가복음 9:54 · 본디새김

조금 전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과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한 마을에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고 싶어 합니다.

엘리야의 불을 떠올리는 제자들

야고보와 요한의 말은 열왕기하 1:9–12를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야를 잡으러 온 왕의 군대 지휘관이 왕의 명령으로 내려오라고 요구하자,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사르게 하라고 말하고, 실제로 불이 내려옵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는 엘리야가 산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으므로, 두 제자의 요구는 엘리야 전승과 연결해서 읽을 만한 장면입니다. 다만 직접 인용이 아니라 사건의 모습과 맥락에서 발견되는 연결입니다.

그가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었다.누가복음 9:55 · 본디새김

꾸짖음을 받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실 때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에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 거절을 파괴적인 심판으로 갚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위를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자신들을 거절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데 사용하려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책임에 관한 가르침도 분명히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즉시 하늘의 불을 내리게 하려는 행동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거절하는 사람들을 불로 태우며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누가복음 9:56 · 본디새김

그들은 사마리아 마을과 싸우지 않습니다. 그곳을 불태우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모든 거부를 즉시 굴복시키는 데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 거절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이어 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들려 올라갈 날들」에 쓰인 원어는 들어 올려짐, 받아 올려짐을 뜻합니다. 「얼굴을 굳게 향했다」는 표현에서는 이사야 50:7과의 연결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게 한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이 이사야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을 알고도 물러서지 않는 결단이라는 점에서 두 표현은 중요한 주제적 연결을 지닙니다.

길 위에서 만난 세 사람 — 따르겠다는 말과 실제로 따르는 일

누가복음 9:57–62 본문 →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누가복음 9:57 · 본디새김

그는 예수님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따르겠다고 나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여우도 굴을, 하늘의 새도 깃들 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데가 없다.」누가복음 9:5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난하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일정한 거처를 확보하지 못하고 이동해야 하는 생활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우와 새에게도 머물 곳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불안정한 처지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언제나 집을 소유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맞이하고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주거 규칙을 제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이 감수해야 할 수 있는 삶의 불안정함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고난받으시고 죽임당하실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도 따르겠느냐는 질문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열심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그가 따르겠다는 길의 성격을 먼저 드러내십니다.

먼저 아버지를 묻게 해 주십시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 사람이 말했다. 「주님, 먼저 가서 제 아버지를 묻게 해 주십시오.」누가복음 9:59 · 본디새김

아버지를 장사하는 일은 자녀에게 매우 중요한 책임이 아닙니까? 성경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중요한 계명입니다(출애굽기 20:12).

그가 그에게 말했다. 「죽은 이들이 자기들의 죽은 이들을 묻게 두어라.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널리 알려라.」누가복음 9:60 · 본디새김

먼저 이 사람의 아버지가 이미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가 실제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장례라는 긴급하고 중요한 가족의 의무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앞세우라는 매우 강한 요구가 됩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그의 요청은 아버지가 죽고 장례를 마칠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겠다는 말이 됩니다. 누가는 그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아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상황이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이들이 자기들의 죽은 이들을 묻게 두어라」에서 앞의 ‘죽은 이들’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나라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반면 죽음과 장례의 문제를 더욱 강하게 대비하는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그 충격을 무조건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널리 알리라는 구체적인 사명을 주고 계십니다. 핵심은 가족을 소중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그 부르심을 끝없이 뒤로 미룰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작별 인사만 하고 오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말했다. 「주님,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제 집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해 주십시오.」누가복음 9:61 · 본디새김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말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알맞지 않다.」누가복음 9:62 · 본디새김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며 고랑을 내야 합니다. 계속 뒤를 돌아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대로 잡기 어렵고, 고랑이 곧게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문제가 단순히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 했다는 데 있을까요?

엘리사는 작별 인사를 했는데 왜 이 사람은 안 되는가?

열왕기상 19:19–21에서 엘리야는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던집니다. 엘리사는 부모와 작별 인사를 한 뒤 따르겠다고 말하고, 돌아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 뒤 엘리야를 따라가 그의 시중을 듭니다. 두 이야기 모두 따르라는 부르심과 가족과의 작별이 있고, 엘리사가 부름받았을 때 바로 쟁기로 밭을 갈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연결해 읽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행위 자체가 죄라고 선언하셨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엘리사는 소를 잡고 농기구를 땔감으로 써서 음식을 마련해 나누어 주고 떠납니다. 다시 돌아가 원래의 일을 계속하려 했다고 기록되지 않으며, 이전의 삶을 정리하는 행동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한 번의 작별 인사라는 행동 자체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 계속 뒤를 돌아보는 태도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나중에 실행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부르심이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아는 것에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누가복음 9:1–62 본문 →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의 권위로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권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무리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는 일을 경험했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고, 세 제자는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까지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고난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누가 더 큰지 다투고, 함께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막으려 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을 내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길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예고하시고, 작은 아이를 곁에 세우시며, 다른 사람을 막으려는 제자들을 바로잡으시고, 거절당한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을 피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 자체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 칭호를 자신의 기대에 따라 채워 넣는다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 위에서 들린 하늘의 명령은 「그의 말을 들어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기대를 바로잡으시도록 허락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마지막 세 사람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숨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요구를 하시는 분은 그 길을 자신은 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굳게 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보면 마지막 쟁기의 비유가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은 사람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자신도 이미 한 방향을 향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이루실 떠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고통받는 아이를 회복시키셨고,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을 지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길 위에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누군가는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앞에는 아직 갈아야 할 밭이 남아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고랑이 비뚤어질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가야 할 방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예루살렘을 향해 굳게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계속 가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