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누가복음 18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과 그에게 매달리는 과부, 경건한 바리새파 사람과 죄인인 세리, 예수님께 다가가려는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막아서는 제자들, 모든 것을 가진 부유한 관원과 길가에서 구걸하는 눈먼 사람입니다.
이들의 처지는 저마다 다릅니다. 과부는 자기 억울함을 풀 힘이 없고,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으며,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반면 부유한 관원은 많은 것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계명까지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아무것도 내세우지 못한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가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구걸하던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 장을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요? 그런데 그 나라가 애초에 사람이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하나의 원칙을 선언하시고 끝내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을 만나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이 붙들고 있는 것을 드러내시며, 결국 자신이 걸어가실 길을 보여 주십니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한 사람을 두려워하다
과부가 가진 단 하나의 힘
예수님께서는 먼저 한 재판관을 소개하십니다.
「어떤 도시에 재판관 하나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어려워하지도 않았다.」누가복음 18:2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재판관은 단순히 법률을 적용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이 약자를 짓누르지 못하도록 정의를 세우는 일도 그의 책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8:21은 재판을 맡을 사람의 자격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바로 그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과부 하나가 찾아옵니다.
「그 도시에 과부가 있었는데 그에게 자꾸 찾아와 말했다. 『제 소송 상대에게 당한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누가복음 18:3 · 본디새김
소송의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법적인 보호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부는 고아와 나그네와 함께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사람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신명기 10:18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하고, 이사야 1:17은 과부를 변호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과부를 보호해야 할 재판관이 오히려 과부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 줄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과부는 그를 움직일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끈질깁니다. 거절당해도 찾아오고, 재판관이 듣기 싫어해도 자신의 요구를 거두지 않습니다. 결국 재판관은 속으로 말합니다.
「『이 과부가 나를 괴롭히니 그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겠다. 자꾸 찾아와 끝내 나를 쳐 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누가복음 18:5 · 본디새김
이 장면에는 익살스러운 역전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던 재판관이 끝내 한 과부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마지막까지 선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결정을 바꾸는 이유는 정의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더는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이 예수님의 논증을 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분인가
주님이 말했다. 「의롭지 않은 그 재판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라.」누가복음 18:6 · 본디새김
여기서 비유를 잘못 읽기 쉽습니다. 과부가 재판관을 끈질기게 설득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끈질기게 설득해야 결국 응답을 얻는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하나님은 귀찮을 정도로 매달려야 겨우 움직이는 분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논증은 정반대입니다. 의롭지 않은 재판관조차 과부의 호소를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면,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을 닮으신 분이 아니라, 그와 대조되는 분입니다.
과부가 요구하는 것은 막연한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요청이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도 바로 그 정의의 회복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무엇이든 오래 기도하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보증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속히」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8). 그렇다면 왜 밤낮으로 부르짖어야 할까요? 실제로 7절의 「그들의 일을 두고 오래 참고 있겠느냐?」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오래 지체하시지 않겠느냐는 물음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그들을 두고 오래 참으신다는 서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장의 본문은 앞선 물음과 연결하는 읽기를 택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신자들은 여전히 억울함을 당하고, 하나님의 정의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속히」라는 약속은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짧은 기간의 보증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그리고 이루어질 때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선언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뜻밖의 질문으로 마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들의 억울함을 속히 풀어 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그런 믿음을 찾겠느냐?」누가복음 18:8 · 본디새김
처음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지가 문제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과부는 정당한 판결을 얻기 전까지 돌아오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그치지 않는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쳐 대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본래 눈 밑을 쳐서 멍들게 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재판관은 마치 과부에게 두들겨 맞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실제 폭행을 예상한다기보다 계속되는 요구에 완전히 진저리가 난다는 과장된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 비유는 바로 앞의 누가복음 17:22–37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날을 말씀하셨는데, 그날은 확실히 오지만 제자들이 마음대로 정하거나 앞당길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자기 자신만 바라본 사람
두 사람은 같은 성전에 올라갔다
두 번째 비유도 기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비유에서 기도의 문제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그는 자신을 근거로 자기가 의롭다고 확신하며 남들을 업신여기는 몇몇 사람에게도 이 비유를 말했다.누가복음 18:9 · 본디새김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한 확신과 다른 사람을 향한 멸시가 한데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확신이 어떻게 타인을 향한 멸시로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올라갑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고, 세리는 부당한 징수와 착취의 가능성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신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바리새파 사람이 위선자였거나 모든 세리가 부정직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두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판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 안에서 바리새파 사람은 실제로 상당한 종교적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 주에 두 번 금식하고 얻는 모든 것에서 열에 하나를 바칩니다.』」누가복음 18:12 · 본디새김
모세의 율법은 십일조를 명했고(신명기 14:22–29), 레위기 16:29–31은 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매주 두 차례 금식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요구된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는 경건의 기준을 매우 성실하게 실천하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일까요?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남들, 곧 강탈하는 자들, 의롭지 않은 자들, 간음하는 자들 같지 않고, 이 세리 같지도 않아 감사합니다.』」누가복음 18:11 · 본디새김
기도는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 시작하지만, 곧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같지 않은지를 열거하고, 마침내 같은 성전에 올라온 세리까지 끌어들입니다. 이 기도에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지를 증명하기 위한 비교 대상이 됩니다.
11절의 「서서 속으로」는 그리스어 문장 구조상 혼자 따로 서서 기도했다는 뜻으로도, 속으로 기도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장의 본문은 뒤의 뜻을 택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기도의 내용이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감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의 감사가 타인에 대한 멸시를 품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지만,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해 줄 거울로 다른 사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가슴을 거듭 치며 말했다. 『하나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누가복음 18:13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가 여러 문장으로 이어지는 것과 달리, 세리의 기도는 이 한 문장이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세리들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정을 설명하지도, 선행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비를 구합니다.
세리는 단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자신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받아 주시기를 구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상 밖의 판결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이 저 사람과 달리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누구나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14 · 본디새김
「의롭게 되어」는 수동형으로, 세리가 스스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은 그가 사실은 선량한 사람이었다고 설명하지 않고, 그의 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신이 아니라, 죄인인 자신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바리새파 사람은 악하고 세리는 착하다는 이야기로 바꾸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세리는 훌륭한 겸손의 실적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기도에는 제시할 수 있는 공로가 없었습니다.
14절 뒷부분은 누가복음 14:11에서 잔칫상의 윗자리를 두고 하셨던 말씀이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앞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는지가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 누가 의롭다고 인정받는지가 문제입니다. 마리아도 하나님이 권세 있는 이들을 자리에서 내리시고 낮은 이들을 높이셨다고 노래했습니다(1:52).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미 정해 놓은 서열을 그대로 인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유의 마지막에 두 사람은 성전에서 내려갑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올라왔는지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으로 내려갔는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단순한 동정심만이 아니라 죄와 관련된 용서와 화해의 뜻을 담을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속죄를 구하던 성전에서 울려 나온다는 점도 의미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두 사람이 제사가 드려지는 정확히 어느 시간에 왔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다
왜 제자들은 아이들을 막았을까
성전에서 두 사람이 내려간 다음, 누가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장면으로 옮겨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바라며 어린아이들을 데려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15절의 「젖먹이들」은 아직 어린 아기들까지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왔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거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로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제자들이 왜 그들을 막았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간을 빼앗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이 가르침을 들을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독립적인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었고, 아주 어린 아기들은 어른들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아이들을 가까이 불러 말했다. 「아이들이 나에게 오게 두어라. 막지 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1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에게 열려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나라에 속하는 까닭은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도, 남다른 경건을 보여 주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 아이들에 관해서는 그 어떤 자격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속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가복음 18:1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흔히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아이들의 순수함이나 도덕적 결백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받아들인다」는 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스스로 차지하거나 성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앞의 세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어린아이들은 그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획득할 능력을 증명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아무런 책임이나 순종도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라는 매우 구체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능력으로 얻을 대상으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입니까.
그 차이를 다음 장면이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모자란 한 가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관원이 그에게 물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겠습니까?」누가복음 18:18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는 아무 자격도 제시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열려 있었습니다. 이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등장하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의 질문은 진지합니다.
그런데 그는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는」 방법을 묻습니다. 상속은 근본적으로 누군가에게서 받는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물론 유대교 전통에서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다는 표현과 순종은 모순되지 않으므로, 이 질문만으로 그가 구원을 돈처럼 벌어들이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는 이 질문을 어린아이들의 이야기 바로 뒤에 놓아,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의 행위로 얻으려는 태도 사이의 긴장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호칭에 반응하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선한 이가 없다.」누가복음 18:19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선함을 부인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없고, 반대로 관원에게 자신의 신성을 암시적으로 고백하게 하셨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이 명시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선한」이라는 말의 기준을 하나님께로 돌리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증언을 금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모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들입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젊을 때부터 지켰습니다.」누가복음 18:2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의 진술을 거짓이라고 폭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말을 들으신 다음, 그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 무엇이 모자랄 수 있을까
예수가 듣고 그에게 말했다. 「너에게 아직 한 가지가 모자란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 보물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누가복음 18:22 · 본디새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는 중요한 한 가지가 모자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조금 더 지키라거나 금식 횟수를 늘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요구는 두 부분입니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가 지켜 왔다는 계명은 이웃을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포함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가진 것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소유로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요구의 마지막에는 예수님 자신이 계십니다.
관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삶을 제시하십니다. 재산을 버리는 일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 앞에서 그의 재산이 어떤 장애물이 되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은 모든 신자가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명령일까요? 누가복음 8:1–3에는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12:33에서 예수님께서는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고 하시며, 14:33에서는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관원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명령을 모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더라도, 재산에 대한 예수님의 도전 자체를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몹시 슬퍼졌다. 아주 부유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23 · 본디새김
그는 화를 내지도, 항의하지도 않습니다. 이 슬픔은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라기보다 오히려 그 무게를 느꼈기 때문에 생긴 것처럼 읽힙니다. 물론 본문은 그의 내면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만, 그 길을 위해 재산을 포기하라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가진 관원은 예수님께 가까이 왔다가 슬픔에 빠집니다.
많이 가졌다는 사실이 반드시 자유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이 소유한 것이 자신을 붙들기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예수가 몹시 슬퍼진 그 사람을 보고 말했다. 「재물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누가복음 18:24 · 본디새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25 · 본디새김
이 비유는 낙타가 애쓰면 겨우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일까요? 뒤따르는 대화가 그 질문에 답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들이 말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누가복음 18:26 · 본디새김
질문이 부자만의 문제에서 모든 사람의 구원 가능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유하고 지위도 있으며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켜 온 사람조차 들어가기 어렵다면, 도대체 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질문에는 그런 충격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누가복음 18:27 · 본디새김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에 관한 일반적인 진술만이 아닙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재산과 경건을 근거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 구원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관원에게 재산을 나누고 따르라고 하셨고, 그 요구를 통해 자기 힘을 의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를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은 1:37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선언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제자들은?
베드로가 말했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것을 두고 떠나 당신을 따랐습니다.」누가복음 18:28 · 본디새김
관원은 따르라는 요청 앞에서 슬퍼했지만, 제자들은 이미 많은 것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단순한 자랑인지, 자신들의 선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 말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꾸짖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가족을 두고 떠난 사람은 이때에 여러 곱절을 받고 오는 시대에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여러 곱절」을 재산이나 가족을 반드시 수량적으로 더 많이 얻는다는 보증으로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 보상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떠난 사람들의 상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이 헛되지 않다고 약속하신다는 점입니다.
관원이 받은 명령도 단순한 결핍으로의 초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늘에 보물을 가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예수님께서 향하고 계신 곳이 밝혀집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 성벽에 「바늘귀」라는 작은 문이 있어 낙타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 종종 등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그런 이름의 성문이 있었다는 고대의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이 이야기는 후대에 나타난 해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누가가 이어서 기록한 사도행전에는 믿는 사람들이 서로의 필요를 돌보고 재산을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사도행전 2:44–47, 4:32–35).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잃은 것들이 새로운 공동체적 삶 속에서 어떻게 채워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정경적 연결입니다. 다만 18:30의 약속을 오직 이러한 공동체 생활로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어떤 길인가
그는 열둘을 데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보아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해 사람의 아들에 관해 적힌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누가복음 18:31 · 본디새김
갑자기 예수님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앞선 모든 이야기의 의미를 한층 깊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원에게 모든 것을 나누고 따르라고 하셨고, 제자들에게도 소중한 것들을 떠나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걸어가시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조롱과 모욕을 받고 침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32 · 본디새김
「그리고 그들이 그를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사흘째 되는 날에 그가 살아날 것이다.」누가복음 18:3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소유를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은 안전한 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먼저 사람들의 폭력과 배척을 마주하실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고난은 우연한 비극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아시고, 예언자들을 통해 기록된 말씀을 이루는 길로 계속 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시는 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길을 걸어가신다는 것.
이 역설은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새롭게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으로 자신을 보호하시는 왕으로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거절과 고난을 마주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들 가운데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 말은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었고, 그들은 그 말들의 뜻을 알지 못했다.누가복음 18:34 · 본디새김
누가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세 번에 걸쳐 말합니다. 이미 9:44–45에서도 고난에 관한 말씀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워졌지만 그들의 이해는 아직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감추어져 있었다」는 수동형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해를 막으셨다는 뜻인지, 아직 깨달을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지만 그 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이 인간의 통상적인 기대와 얼마나 다른지를 드러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그 나라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나리라는 사실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누가는 한 눈먼 사람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데,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사람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만 듣고 예수님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0:6에는 하나님의 종이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는 모습이, 이사야 52:13–53:12에는 고난받는 종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높아짐이 묘사됩니다. 이 본문들은 그 자체의 역사적·문학적 맥락 안에서 먼저 이해해야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는 신약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특히 이사야 53장은 고난이 다른 이들의 죄와 구원에 관계될 수 있음을 보여 주며, 누가복음은 뒤에서 예수님께서 이사야 53:12를 자신에게 적용하시는 말씀을 기록합니다(22:37). 다만 18:31은 특정한 예언 구절 하나를 직접 인용하지 않고, 예언자들의 말씀 전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또 다니엘 7:13–14에는 하나님께 권세와 나라를 받는 사람의 아들 같은 존재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장차 나타날 영광뿐 아니라 지금 예고되는 고난과도 결합됩니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다
모두가 지나갈 때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다가가실 때입니다.
길가에 눈먼 사람이 앉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여리고에 들어가지 않으셨고, 19:1에 이르러서야 들어가십니다. 지금은 길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눈먼 사람은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 줍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가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누가복음 18:38 · 본디새김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왕위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후대에 하나님께서 보내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단순한 치유자 이상의 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까지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앞에서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 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예수님께 자비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그를 외치게 합니다.
아이들을 꾸짖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앞서 가는 이들이 잠잠하라고 그를 꾸짖었다. 그는 더욱더 소리를 질러 댔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누가복음 18:39 · 본디새김
15절에서 제자들은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스어에서도 두 장면에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막던 행동이 이번에는 눈먼 사람을 향합니다.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결과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잠재우려 합니다.
이것은 첫 번째 비유의 과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과부는 재판관이 청을 들어주려 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눈먼 사람도 사람들이 잠잠하게 하려 하자 오히려 더 크게 외칩니다. 누가복음 18장은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했는데, 마지막 이야기에는 포기하지 않고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 실제로 등장합니다.
그의 기도는 성전에서 드리는 정해진 기도가 아니라 길가에서 외치는 짧은 부르짖음입니다. 그는 지나가는 군중에게 돈을 달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다
예수가 걸음을 멈추고 눈먼 사람이 자기 앞으로 이끌려 오도록 분부했다. 눈먼 사람이 가까이 오자 예수가 그에게 물었다.누가복음 18:4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십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고, 그 길이 예언자들의 말씀을 이루는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앉아 있는 눈먼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십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은 그를 조용히 시키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무리의 움직임이 그를 지나쳐 가고 있었는데, 이제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말했다. 「주님,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8:41 · 본디새김
눈먼 사람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필요를 알고 계실 것이라는 이유로 그의 말을 생략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 말할 자리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로만 대하지 않으시고, 그의 소원을 듣고 응답하십니다. 그의 청은 구체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긴 질문 대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직접 말합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누가복음 18:42 · 본디새김
「구원했다」(σῴζω)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구원하다, 건져 내다, 치유하다라는 의미로 두루 쓰입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시력의 회복과 직접 연결되지만, 단순히 병을 고쳤다는 사실만으로 제한해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고(18:26),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제 길가에서 구걸하던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부유한 관원은 무엇을 더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눈먼 사람은 자신에게 아무런 구원의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실 수 있다고 믿고 외쳤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을 치유를 일으키는 인간의 독립적인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먼 사람이 자기 믿음의 힘으로 눈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길가에 앉아 있지 않다
그는 곧 다시 보게 되었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계속 따라갔다. 온 백성도 이 일을 보고 하나님에게 찬양을 바쳤다.누가복음 18:43 · 본디새김
그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35절에서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됩니다. 부유한 관원에게 예수님께서는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따랐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반면 눈먼 사람에게는 먼저 따라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는데도, 그는 눈을 뜨자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것을 부자는 모두 믿음이 없고 가난한 사람은 모두 믿음이 있다는 일반적인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에 관한 누가의 서술을 넘어서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나란히 놓여 드러나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관원은 예수님을 만나고도 자신의 소유에서 떠나지 못했고, 눈먼 사람은 길가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누가는 치유 이후의 삶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가 예수님을 계속 따라갔다고 기록합니다.
그 한 문장으로 충분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0:46은 이 사람을 바디매오라고 부르고,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오실 때 만나셨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0:29–30 역시 여리고에서 나올 때라고 하지만 눈먼 사람 두 명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차이를 두 여리고의 존재 등으로 조화시키려는 설명도 있지만, 본문만으로 정확한 사건 장소와 전승의 차이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 열려 있는가
누가복음 18장을 끝까지 읽고 나면, 첫 번째 비유의 마지막 질문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그런 믿음을 찾겠느냐?」가 다시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추상적인 정의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호소를 멈추지 않는 과부, 자비를 구하는 세리,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오는 아이들, 소유를 내려놓지 못해 슬퍼하는 관원, 그리고 다시 보게 된 눈먼 사람이 있습니다.
이 장의 중심은 인간의 겸손이나 믿음 자체가 아니라 그 겸손과 믿음이 향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드러납니다. 그 나라에서는 세상의 지위도, 재산도, 종교적 실천도, 자신에 대한 확신도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기 때문에 부르짖을 수 있고, 그 자비를 만났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에게 가능해지는 일은 결코 값싼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조롱과 모욕과 죽음이 기다리는 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그런데 그 길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눈먼 사람은 이제 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듣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라가고, 그 광경을 본 온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조금 전까지 길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이제 그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