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0–19장 · 예루살렘을 향한 길

찾아오신 왕을 알아보지 못하다

누가복음 19장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가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도시가 자기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야기로 끝을 향해 갑니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키가 작아 무리에 가려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정작 먼저 말을 건네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올려다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십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의 도시를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왕이 오신다고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시를 바라보며 우십니다. 그곳이 자신에게 찾아온 평화의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예수님께서 두 곳을 찾아가십니다. 한곳에는 구원이 찾아왔다고 선언하시고, 다른 한곳에서는 다가올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왕위를 받아 돌아오는 귀족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비유에서 왕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 사람들은 왕을 찬양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이 장에서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누가 예수님을 환영하고 누가 거부하는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 알아보았을까요?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619장 본문 읽기 →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았는데,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9:1–10 본문 →

부유한 세리의 우두머리가 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십니다.

바로 앞 장에서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리고 안에서는 눈을 뜨고도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보아라, 삭개오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리의 우두머리였고 부유했다.누가복음 19:2 · 본디새김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하면서 세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름은 삭개오이고, 세리의 우두머리이며,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돈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삭개오는 예수가 누구인지 보려고 했으나 키가 작아서 무리에 가려 볼 수 없었다.누가복음 19:3 · 본디새김

삭개오가 보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예수님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무리가 시야를 가리자 삭개오는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사회적 지위를 가진 성인 남성으로서는 체면을 내려놓은 모습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얼마나 의식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달려가 나무에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을 방해하는 무리 앞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도권이 갑자기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예수가 그 자리에 이르러 눈을 들어 그에게 말했다. 「삭개오야, 서둘러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거든.」누가복음 19:5 · 본디새김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보려고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무 아래에 이르러 오히려 삭개오를 올려다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의 이름을 알고 계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알아보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를 알아보시고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멀리서 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먼저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필요를 나타내는 이 말은 누가복음에서 자주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예수님의 사명을 설명할 때 쓰입니다(4:43; 9:22).

그런데 지금 그 필요가 뜻밖의 장소에서 나타납니다. 성전도,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의 집도 아닌,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여겨지는 세리의 우두머리의 집입니다.

삭개오는 서둘러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님을 맞아들입니다. 누가는 그가 믿음을 고백했다거나 회개했다고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리의 반응이 등장합니다.

모두 보고 다 같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 사람이 죄인인 남자의 집에 묵으러 들어갔다.」누가복음 19:7 · 본디새김

누가복음 15:2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음식을 먹으신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과 동전과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똑같은 반응이 실제 사건 속에 다시 나타납니다.

무리의 판단과 예수님의 행동이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삭개오는 정말 그날 처음으로 재산을 나누었을까요

삭개오가 서서 주님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줍니다. 그리고 누구에게서 무엇이든 거짓 고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곱절로 갚습니다.」누가복음 19:8 · 본디새김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삭개오의 회개 선언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줍니다」(δίδωμι)와 「갚습니다」(ἀποδίδωμι)는 원문에서 모두 현재형입니다. 그리스어 현재형은 문맥에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 행하는 선언을 나타낼 수도 있고, 평소에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회개의 선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재산을 새롭게 사용하기로 결단했다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누가복음 전체에서 재산과 가난한 사람들을 강조하는 흐름과 잘 어울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부유한 관원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는데(18:22), 이제 다른 부유한 사람인 삭개오가 실제로 재산을 나누겠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자신에 대한 변호입니다. 삭개오가 사람들의 비난에 맞서, 자신은 이미 재산 절반을 나누고 있으며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왔다고 말한다는 해석입니다. 이 경우 이야기의 핵심은 직업 때문에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 예수님께 인정받고 명예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두 읽기는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며, 본문이 어느 쪽을 최종적으로 의도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번역에서 현재형을 유지한 것은 이런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둡니다.

다만 두 읽기 모두에서 삭개오의 말은 추상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돌려주는 일에 관한 구체적인 진술입니다. 「네 곱절」은 일반적인 손해 보전을 넘어서는 무거운 책임입니다. 회개가 다른 사람에게 입힌 손해를 바로잡는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고, 동시에 사람의 직업과 평판만으로 그를 최종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드러납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왔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9: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오늘 그 집에 구원이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오늘」은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 속에 도착했음을 나타냅니다. 목자들에게 전해진 천사의 소식도 구원자가 오늘 태어나셨다는 선언이었고(2:11),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4:21).

삭개오는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직업을 이유로 그를 죄인 취급하며 예수님과 교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누가복음 13:16에서 오랫동안 병들었던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사람들이 경계 밖으로 밀어내려는 사람을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이야기는 더 중요한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누가복음 19:10 · 본디새김

이야기의 주어가 바뀝니다.

찾아 나선 사람은 삭개오인 것 같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를 찾아오신 분임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사람으로 여겨지는 삭개오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찾아야 할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판단보다 먼저,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리고는 요단강 계곡과 유대 산지를 잇는 교통로에 자리한 도시로, 농업 생산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지역이었으므로 세금과 통행세 징수에 관계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세리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르키텔로네스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그가 여러 세리의 업무를 감독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행정 조직을 책임졌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네 곱절」과 관련해, 출애굽기 22:1에는 도둑질한 소와 양에 대해 각각 다섯 배와 네 배로 배상하는 규정이 있고, 민수기 5:6–7은 잘못 취한 것에 원금의 5분의 1을 더해 배상하도록 규정합니다. 10절의 「잃어버린 것」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과 돌아온 아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말과 같은 계열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에스겔 34:16에서 하나님이 잃어버린 양을 찾고 흩어진 양을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에스겔 34장은 자기 양 떼를 돌보지 않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고, 하나님 자신이 양들을 찾아 돌보시겠다고 선언하는 장입니다. 누가복음 19:10은 그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지만 주제와 표현에서 뚜렷한 연결을 보여 주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목자의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말씀하십니다.

왕은 왜 떠나야 합니까

누가복음 19:11–27 본문 →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

삭개오의 이야기 바로 뒤에 긴 비유가 등장합니다. 누가는 이번에는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직접 설명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가 이어서 비유를 말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9:11 · 본디새김

그 기대가 어떤 정치적·군사적 모습이었는지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권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해방을 바라는 기대가 당시 유대 사회에 있었고, 다윗의 도시이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왕이 곧바로 나라를 차지하는 비유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말했다. 「어떤 귀족이 나라를 받아 돌아오려고 먼 지방으로 떠나갔다.」누가복음 19:12 · 본디새김

왕위를 얻으려면 먼저 떠나야 합니다.

그가 떠나 있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를 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맡겨진 돈으로 장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동안 드러날 충성과 거부의 문제를 제시하십니다.

그렇다고 이 비유를 재림이 오랫동안 지연된다는 구체적인 시간표로 곧장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비유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의 간격이 있지만 그 길이가 명시되지 않았고, 이 비유를 재림 지연의 문제만으로 설명하는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어떤 방식으로 나라를 얻으며, 그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았던 왕위의 이야기

예수님 시대 유대 지역의 왕권은 로마 제국의 승인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기원전 4년에 죽은 뒤,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스는 통치권을 승인받기 위해 로마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인들도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 그를 통치자로 세우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르켈라오스는 왕이라는 칭호를 즉시 얻지는 못하고 유대와 사마리아 등을 다스리는 민족통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비유의 귀족의 여행과 반대 사절단은 이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다만 비유가 아르켈라오스 한 사람을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배경을 알면 비유가 상당히 정치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한 사람이 왕권을 얻으려 하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왕이 된 다음에는 충성한 사람들과 반대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결과가 주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모두에게 같은 돈이 맡겨졌습니다

귀족은 열 명의 노예를 불러 열 므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5:14–30의 탈란톤 비유에서는 사람마다 다른 액수가 맡겨지지만, 누가의 비유에서는 열 명이 각각 한 므나씩 같은 액수를 받습니다.

귀족이 돌아온 뒤, 첫 번째 노예는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더 벌었고, 두 번째 노예는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고하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노예가 나와서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의 므나가 열 므나를 더 벌었습니다.』」누가복음 19:16 · 본디새김

그는 「제가 벌었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주인님의 므나가」 벌었다고 말합니다. 노예들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주인에게서 받은 재산을 맡아 사용했습니다.

한 므나를 맡아 장사한 일이 열 도시를 다스릴 권한으로 이어집니다. 맡겨진 작은 재산을 다루는 태도가 더 큰 책임을 맡길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시험이 된 것입니다. 이 비유를 예수님의 왕권에 대한 비유로 읽는다면, 예수님께서 떠나 계시는 동안 예수님의 사람들이 주어진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비유는 성공한 두 노예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는데 왜 책망받습니까

「그리고 다른 이가 와서 말했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님의 므나입니다. 저는 그것을 수건에 싸 둔 채 가지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9:20 · 본디새김

이 노예는 주인의 돈을 훔치지도, 낭비하지도, 위험한 투자로 잃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처음 받은 그대로 보관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를 책망합니다. 노예 자신이 이유를 설명합니다.

「『제가 주인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은 엄한 분이라 두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베십니다.』」누가복음 19:21 · 본디새김

주인이 실제로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노예가 주인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중요한 해석 문제입니다.

「그가 그에게 말했다.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판단하겠다, 악한 노예야. 내가 두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베는 엄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느냐?』」누가복음 19:22 · 본디새김

주인을 그토록 엄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돈을 맡겨 이자를 받을 수 있도록 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노예가 스스로 제시한 이유와 실제 행동 사이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전통적인 신학적 해석에서는 이 노예를 맡겨진 것을 활용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한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이 읽기에서 충성은 받은 것을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맡겨진 것에 응답하고 행동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마지막 명령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비유는 매우 거친 명령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 위에 왕 노릇 하는 것을 바라지 않던 이 내 원수들은 이리로 끌어와 내 앞에서 쳐 죽여라.』」누가복음 19:27 · 본디새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했던 노예가 아니라, 귀족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에 관한 명령입니다. 이 구절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실제로 반대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는 왕의 모습을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제시하신 것일까요? 이 비유에는 크게 두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왕의 귀환과 심판을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귀족이 떠나 왕위를 받아 돌아오는 이야기를 예수님의 죽음과 높아지심, 장차 나타날 왕권과 연결하고, 마지막 심판은 예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닥칠 최종적인 심판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고 봅니다. 이 해석은 11절의 기대와 잘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처럼 즉시 눈에 보이는 왕국을 세우시지 않으며, 왕의 권위가 드러나는 과정에는 거부와 심판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폭력적인 권력의 모습을 비판하는 해석입니다. 귀족을 예수님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아 권력을 얻는 통치자의 모습으로 읽습니다. 이 경우 주인의 태도와 처형 명령은 착취적 권력의 본질을 드러내고, 주인의 부당한 기대에 참여하지 않은 세 번째 노예를 다르게 평가할 가능성도 생깁니다. 이러한 읽기는 아르켈라오스와 같은 역사적 배경, 누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두 해석은 주인이 누구를 나타내는지, 세 번째 노예가 어떤 인물인지에서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27절의 명령을 곧바로 예수님께서 실제로 실행하실 폭력의 방식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비유가 왕의 귀환과 책임 및 심판에 관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반대자들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도시를 바라보며 우십니다.

두 장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왕권을 얻으려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준 직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왕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왕이 나귀 새끼를 필요로 하시다

누가복음 19:28–40 본문 →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준비하셨을까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누가복음 9:51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뜻을 굳히신 이후 계속되던 긴 여행이 이제 목적지에 가까워졌습니다.

올리브 산 근처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맞은쪽 마을로 보내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나귀 새끼를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방식을 직접 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나귀 새끼일까요?

스가랴 9:9에는 의롭고 구원을 가져오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오는 시온의 왕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9:10에서는 병거와 군마가 사라지고 그 왕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9장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왕의 모습은 그 예언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비유의 귀족은 왕권을 얻기 위해 멀리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력시위를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타시는 것은 군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입니다.

나귀를 타는 행위 자체가 왕권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실 인물들이 노새를 타는 일도 있었습니다(열왕기상 1:33–40). 이 장면은 왕권을 표현하는 행동이며, 예수님께서는 그 왕권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모습으로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하거든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누가복음 19:31 · 본디새김

실제로 나귀 새끼의 주인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하고 묻고, 제자들은 알려 주신 그대로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누가는 이 대화를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누가복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해 누군가가 가진 나귀 새끼를 필요로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드러내시는 일이 제자들의 순종과 다른 사람의 소유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들처럼 힘을 과시하는 행렬을 준비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 위에 겉옷을 깔고 예수님을 태우고,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깔기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9:13에서 사람들이 예후를 왕으로 세울 때 자신의 옷을 그의 발아래 깔았듯이, 이 행동은 왕을 향한 존경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왕이 오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노래한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그가 이미 올리브 산 내리막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들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모든 능한 일을 두고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누가복음 19:37 · 본디새김

그들은 병든 사람이 회복되고, 눈먼 사람이 다시 보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은 복을 받으셨다. 하늘에서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누가복음 19:38 · 본디새김

이 노래는 시편 118:26을 바탕으로 합니다. 시편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오는 이를 축복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왕」이라는 말이 명시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평화」라는 표현은 누가복음 2:14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노래했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가 선포되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하늘의 평화를 찬양합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평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는 평화가 찬양되고 있지만, 그 평화를 받아들여야 할 도시는 그 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돌들이 부르짖을 것이다

무리 가운데 바리새파 사람 몇이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누가복음 19:39 · 본디새김

왜 그들이 찬양을 막으려 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말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부르짖을 것이다.」누가복음 19:40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피조물까지도 증언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이 자기 도시에 오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그 일을 침묵시킨다 해도, 그 사실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잠잠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찬양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찬양 속에서 예수님 자신은 도시를 바라보며 우십니다.

평화의 왕이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다

누가복음 19:41–44 본문 →

환호하는 무리 한가운데에서 들리는 울음

그가 가까이 와서 도시를 보고 그곳을 두고 울었다.누가복음 19:41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사람들은 왕의 도착을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자신의 도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환영받지 못해 상처받은 사람의 눈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시가 겪게 될 고통을 내다보고 우십니다. 예루살렘의 잘못을 지적하시지만, 그 도시가 망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우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중간에 끊어지다

그가 말했다. 「너까지도 이날에 평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것들을 알았더라면 —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네 눈에서 숨겨졌다.」누가복음 19:42 · 본디새김

「네가 알았더라면」이라는 조건절 다음에 이어질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네가 알기만 했더라면……」 하고 말을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평화가 도시의 눈에서 감추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설명이 완성되지 않은 자리에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미래를 냉정하게 전달하는 예언자로만 서 계시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랑하시는 도시가 평화의 길을 놓쳤다는 사실 앞에서 우시는 분으로 서 계십니다.

예루살렘은 무엇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리고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땅에 메어치고, 네 안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너를 찾아온 그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9:44 · 본디새김

「찾아온」(ἐπισκοπή)에 해당하는 말은 돌보러 찾아오는 일, 방문, 살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첫머리에서 사가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속량하셨다고 찬양했고(1:68), 그 노래는 하나님이 백성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으로 이어졌습니다(1:79). 이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평화, 그 두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누가의 이야기 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가오시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도시는 그 방문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도시의 모든 주민이 예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제자들의 무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찬양했습니다. 그럼에도 도시 전체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선언은 그곳이 평화의 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너에게 그런 날이 닥칠 것이다. 네 원수들이 너를 둘러 흙둑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너를 조일 것이다.」누가복음 19:4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포위와 공성, 도시의 파괴를 묘사하시며, 그 일을 평화의 길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로 설명하십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심판으로 묘사하면서도,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 독자들이 그 비극을 슬퍼하도록 이끈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하셨다고 해서, 유대인 전체를 시대를 초월한 심판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 파멸을 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길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도시를 위해 우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비극은 단지 군사적 패배였을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올려다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그 도시는 평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것들을 보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 필요한 것은 적군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차리는 정치적 통찰만은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왕이 오셨습니다.

그 왕은 군대를 이끌고 적을 제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평화의 길을 따라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도시에는 오히려 포위와 파괴의 날이 다가옵니다. 누가는 평화와 심판을 서로 무관한 주제로 놓지 않습니다.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의 방문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파멸에 대한 예고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42절처럼 말을 끝맺지 않고 중단하는 표현을 수사학에서는 아포시오페시스라고 부릅니다. 44절의 「찾아온」에 해당하는 원문의 에피스코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방문이나 돌보심을 나타내는 문맥에서도 사용됩니다. 43–44절의 장면은 기원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성전이 파괴된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읽힙니다. 누가가 이 사건을 이미 알고 복음서를 기록했는지, 예수님의 예언을 어떻게 전승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비평적 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다

누가복음 19:45–48 본문 →

왜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으로 향하시고, 그곳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누가복음 19:4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구약의 두 본문을 결합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이사야 56:7입니다. 그 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붙들고 그분을 섬기는 이방 사람들까지 받아들여,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기쁨을 누리며 기도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래 문맥의 핵심은 하나님의 집이 어떤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예레미야 7:11입니다. 예레미야 7장은 예루살렘 성전 문에서 선포된 심판의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들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언자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를 하면서도 성전에 와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태도를 고발합니다. 바로 그 문맥에서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강도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소만이 아니라, 강도들이 약탈을 저지른 뒤 숨어 들어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이유를 단순히 상인들이 물건을 비싸게 팔았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용 물품을 사고파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불법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멀리서 온 순례자들에게는 제물과 물품을 구입하는 일이 실제로 필요했고, 본문은 상인들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모든 상거래를 악한 일로 규정하셨다고 읽기보다, 하나님의 집이 본래 무엇을 위한 장소인지를 선언하시며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예언자적 행동으로 심판하셨다고 이해하는 편이 본문에 더 가깝습니다.

기도의 집과 강도들의 소굴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통해 누구를 받아들이실지를 말하고,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그 집을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그분께 나아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 집을 자신들의 잘못된 삶을 정당화하거나 보호하는 곳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존재 자체를 하찮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그곳이 무엇을 위한 집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여리고에서 있었던 삭개오의 이야기와 대조를 이룹니다.

삭개오의 집은 사람들이 죄인의 집이라고 부르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구원이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책망하십니다.

누가는 개인의 집이 성전보다 거룩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장소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지는 사람들이 그곳에 붙여 놓은 이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죄인의 집이라고 여겨진 곳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날 수 있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날마다 가르치셨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 가운데 유력한 이들이 그를 없애려 했다.누가복음 19:4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잘못을 지적하신 뒤 그곳을 버리고 떠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성전에서 하신 행동은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서 가르치고 계신데, 그 집을 관리하는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가 예수님을 없애려 합니다.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제거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 뜻밖의 상황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온 백성이 그에게 매달려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9:48 · 본디새김

「매달려 듣고 있었다」는 매달려 있다는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에 온통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처음에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고, 이제 마지막에는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 매달려 있습니다.

찾아오신 왕은 어떤 분인가

누가복음 19:1–48 본문 →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찾아오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며, 마침내 성전을 찾아오십니다. 삭개오는 기뻐하며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제자들은 왕을 찬양하지만 도시는 평화의 길을 알아보지 못하며, 성전에서는 백성이 귀를 기울이지만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 합니다.

사람을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과,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은 같은 분입니다. 삭개오의 집에서 구원을 선언하시는 분이 성전에서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불의를 중요하지 않은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심판 선언 역시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한 태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승인하는 왕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겨지는 이에게는 가까이 다가가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돌아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방문 앞에서는 사람을 판단하던 기준도, 소유를 사용하던 방식도,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일의 의미도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장을 어떤 결단의 선언으로 끝맺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성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유력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도시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망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어떤 고난을 겪게 될지 아시면서도 날마다 그곳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매달려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