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20–21장 · 성전에서 한 가르침
누구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다가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셨고, 이제 그곳에서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지도자들이 그 권한의 근거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고 있었습니다(19:47).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진지하게 이해하는 일이라기보다, 그 권위를 문제 삼을 근거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은 바로 이 충돌을 따라갑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권위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위가 어디서 왔는지 되물으시고,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로 주인의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첩자들은 로마 황제의 권위를 앞세워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하려 합니다. 누가 성전을 다스릴 권한이 있습니까, 누구에게 세금을 돌려주어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리고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며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만, 정작 과부들의 집을 먹어 치우는 서기관들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 권위에 가장 충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권위는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문서나 직함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펼쳐 보이시고, 상대방의 질문 속에 감추어진 문제를 드러내시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조금씩 밝혀 가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묻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답을 피하다
예수님께서는 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을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함께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을 물으러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의 예배와 율법 해석, 공동체의 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말해 주십시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합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입니까?」누가복음 20:2 · 본디새김
여기서 권위는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을 뜻할 수 있습니다. 질문의 핵심은 예수님께 능력이 있으신지가 아니라, 누구의 허락을 받아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곧바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묻겠다」 하시고 세례자 요한에 관해 물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누가복음 20:4 · 본디새김
왜 하필 요한의 세례일까요?
누가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한 인물입니다. 그는 죄 용서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고(3:3),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는 하늘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3:21–22). 또 세리들까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례를 받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7:29–30).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 질문은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 앞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일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묻는 질문입니다.
지도자들은 대답하기 전에 서로 의논합니다.
그들은 서로 따져 보며 말했다. 「『하늘에서』라고 하면 그가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다.」누가복음 20:5 · 본디새김
「그런데 『사람에게서』라고 하면 온 백성이 우리를 돌로 쳐 죽일 것이다. 온 백성이 요한이 예언자라고 설득되어 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0:6 · 본디새김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실제로 하나님에게서 왔는지를 따져 보지 않습니다. 어느 대답이 자신들에게 불리할지를 계산합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진실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입니다.
결국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이 진정한 무지의 고백인지 회피인지는 앞선 의논이 이미 보여 줍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누가복음 20:8 · 본디새김
대답하실 수 없어 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알아보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을 주지 않으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만, 그 권위를 인정하는 데 따를 결과는 감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참된 권위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언제나 증거의 부족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미 주어진 증거를 받아들일 경우 자신의 지위와 판단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더 설명하시는 대신, 다음 비유를 통해 권위를 거부하는 일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 주십니다.
포도원의 소작인들은 왜 주인의 아들을 죽였을까
포도원은 누구의 것인가
그는 백성에게 이 비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세를 놓은 뒤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누가복음 20:9 · 본디새김
이사야 5:1–7에는 하나님께서 정성껏 가꾸신 포도원이 좋은 열매 대신 나쁜 열매를 맺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야는 그 포도원이 이스라엘 집이며,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열매는 정의와 의로움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 노래를 떠올리게 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포도원을 맡은 소작인들이 주인의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겨냥하시는 대상은 포도원을 맡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백성을 돌볼 책임이 있는 지도자들입니다. 비유의 끝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자신들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닫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20:19).
포도원은 소작인들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심고 마련한 포도원이며, 소작인들은 그곳을 맡아 관리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주인은 때가 되어 열매 가운데 자기 몫을 받으려고 노예를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첫 번째 노예를 매질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두 번째 노예에게는 모욕을 더하고, 세 번째 노예에게는 상처를 입혀 내쫓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포도원을 당장 파괴하지 않고 거듭 사람을 보냅니다.
이 반복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예언자들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 말씀을 보내셨지만, 그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은 때로 거절과 박해를 당했습니다(예레미야 7:25–26; 느헤미야 9:26). 예수님께서는 앞서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도시라고 탄식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34).
주인은 왜 아들을 보냈을까
「포도원 주인이 말했다. 『어떻게 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겠다. 아마 그들이 이 아들을 존중하겠지.』」누가복음 20:1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는 음성이 들렸고(3:22), 변화산에서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아들이라는 선언이 나왔습니다(9:35). 이제 포도원 주인의 입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앞서 보낸 노예들이 예언자들이라면, 마지막에 보내진 아들은 그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를 가진 분입니다.
물론 주인이 「아마」라고 말한 것을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유는 주인이 아들까지 보냈는데도 존중하지 않는 소작인들의 거부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냅니다.
「소작인들은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상속자다. 유산이 우리 것이 되도록 그를 죽이자.』」누가복음 20:14 · 본디새김
소작인들은 아들을 알아보지 못해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상속자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죽이기로 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 아들을 제거하면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에서 권위를 묻던 지도자들이 맡은 것도 자기들의 종교적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책임입니다. 포도원의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인 이유는 포도원을 돌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포도원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아들은 포도원 밖에서 죽임당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누가복음 20:15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이 찾아오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시고 제거되십니다.
「그가 와서 이 소작인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그런 일이 없기를.」누가복음 20:16 · 본디새김
포도원을 맡은 사람들이 주인의 권리를 거부하고 마침내 아들까지 죽였다면, 그들에게 포도원을 계속 맡길 수 없다는 심판과 책임의 이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 전체를 버리고 다른 민족으로 교체하셨다는 선언으로 곧장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비유에서 직접 책망받는 대상은 포도원을 맡은 소작인들이며, 19절은 지도자들이 그 비유가 자신들을 겨냥한 줄 알았다고 기록합니다. 「다른 이들」이 누구인지도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일과 연결해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 연결만으로 이 비유를 유대인 전체에 대한 폐기 선언으로 만드는 것은 본문보다 더 나아간 해석입니다.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그런 일이 없기를」이라는 외침은 비유가 청중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들렸는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바람에 맞춰 심판의 말씀을 거두지 않으시고, 성경의 다른 장면을 꺼내십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서 13:12는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셨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해석합니다. 다만 누가의 비유에서 포도원 밖으로 내쫓는 행동과 예수님의 처형 장소가 정확히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법적으로 그런 살인이 곧바로 소유권을 가져다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소작인들의 계획은 정당한 상속 절차가 아니라 주인의 권리를 빼앗으려는 폭력적인 욕망을 드러냅니다.
버려진 돌이 건물의 중심이 되다
그가 그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러면 기록된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 그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누가복음 20:17 · 본디새김
시편 118:22의 인용입니다. 시편 118편은 여호와야훼께서 고난과 위협 속에 있던 이를 구원하셨다는 감사의 노래이며, 사람들이 버린 돌이 중요한 돌이 되었다는 이미지는 사람들이 거절한 존재를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역전을 보여 줍니다.
조금 전 비유에서는 아들이 죽임당했습니다. 여기서는 버려진 돌이 건물의 중심이 됩니다. 사람들은 아들을 제거하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십니다.
인간의 거부가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누구나 부서질 것이다. 그런데 그 돌이 누구 위에 떨어지든지 그 사람을 부수어 흩을 것이다.」누가복음 20:18 · 본디새김
여기에는 돌을 통한 심판의 이미지가 더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을 거부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버려진 돌은 무가치한 돌이 아니었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이 원래 가리키는 「돌」의 역사적 대상에 대해서는 왕이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읽기 등으로 해석이 갈립니다. 본래 문맥에서도 버림받은 존재를 높이시는 분이 여호와야훼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기초의 모퉁잇돌인지, 건물 위쪽을 마감하는 돌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지만, 핵심은 버려진 돌이 중심적인 돌로 높아졌다는 역전입니다. 18절과 관련해서는 이사야 8:14–15에서 여호와야훼께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과 바위로 묘사되고, 다니엘 2:34–35에서 사람의 손으로 뜨지 않은 돌이 거대한 신상을 부숩니다. 18절이 두 본문을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반영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주제적 연결은 분명합니다.
비유를 알아듣고도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그가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한 줄 알았기 때문에 바로 그때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백성을 두려워했다.누가복음 20:19 · 본디새김
그들은 비유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자신들이 소작인들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도 행동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이야기 속 소작인들의 행동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지도자들에게서 다시 나타나는 셈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지 못한 이유는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이유와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일 뜻이 없습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은 누구의 것인가
칭찬으로 시작된 함정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자 방법을 바꿉니다. 누가는 그들이 보낸 첩자들의 정체를 먼저 밝혀 줍니다.
그들은 지켜보다가 스스로 의로운 척하는 첩자들을 보냈다. 그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아, 그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위에 넘기려 했다.누가복음 20:20 · 본디새김
이 문장을 알고 나면 뒤따르는 대화가 다르게 들립니다.
그들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께서 옳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참되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누가복음 20:21 · 본디새김
이 칭찬은 실제로 예수님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삭개오의 집에도 들어가셨고, 종교 지도자들의 압력 앞에서도 진리를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첩자들은 바로 그 성품을 이용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이제 로마 황제의 권위도 두려워하지 말고 대답해 보라는 압박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옳은 말을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목적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을 배신하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역자가 된다
「우리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도 됩니까, 안 됩니까?」누가복음 20:22 · 본디새김
유대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에 세금을 낸다는 것은 외국 통치자의 지배권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에는 경제적인 부담뿐 아니라 정치적 굴욕과 종교적인 갈등이 얽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도록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으실 수 있고, 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로마의 지배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난받으실 수 있습니다. 누가는 첩자들의 목적이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기는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누가복음 23:2에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셨다는 고발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누구의 초상인가
「데나리온 하나를 나에게 보여라. 이 동전은 누구의 초상과 새겨진 글을 지니고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누가복음 20:24 · 본디새김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였고, 예수님 당시의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초상과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주어라.」누가복음 20:25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흔히 정치적인 일은 국가에, 종교적인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이해하면 현대적인 국가와 종교의 분리 원칙으로 바꾸어 버리기 쉽습니다. 당시에는 정치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로마 황제의 권위 자체에도 종교적인 의미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지만,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는 목록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전에는 카이사르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독자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26–27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내용은 아니고, 창세기의 말씀을 가져와 예수님의 질문을 더 넓게 묵상하는 정경적 연결입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으로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있지만, 카이사르가 인간의 삶과 충성 전체를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권력을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황제에게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 주지도 않으십니다.
첩자들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에 놀라 잠잠해졌습니다(20:26). 예수님을 말로 붙잡으려고 온 사람들이 도리어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동전이 티베리우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이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 주화에는 황제의 이름과 지위뿐 아니라 신격화된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표현도 있었습니다. 다만 누가복음은 정확한 주화의 종류나 명문 전체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누가가 이 장면에서 정치적 함정과 로마 통치 아래 살아가는 신앙인의 충성 문제를 특별히 부각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곱 형제의 아내였던 여인은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왜 부활에 관해 물었을까
부활이 없다고 맞서 말하는 사두개파 사람들 가운데 몇이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누가복음 20:27 · 본디새김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이 부활 이후의 결혼 관계에 관해 묻습니다. 한 여인이 첫째 형제와 결혼했지만 자식 없이 남편이 죽고, 둘째와 셋째, 마침내 일곱 형제 모두가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가 자식 없이 죽습니다. 마지막에는 여인도 죽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가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누가복음 20:33 · 본디새김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이용하여 부활이라는 믿음 자체가 모순에 빠진다고 주장하려 합니다. 그들이 인용한 규정은 신명기 25:5–10의 형사취수, 곧 후사 없이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기 위해 남은 형제가 그 과부를 아내로 맞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의 목적은 죽은 형제의 이름과 가문, 상속의 계보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한 결혼법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에 관한 규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부활은 현재의 삶이 그대로 다시 시작되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한 여인을 일곱 사람이 동시에 아내로 맞는 모순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형제 가운데 누가 진정한 남편인지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질문 자체에 깔린 전제를 바꾸십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삶을 그대로 연장하는 것인가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시대의 아들들은 장가들고 시집간다.」 「그런데 저 시대와 죽은 이들 가운데서의 부활에 이르기에 걸맞다고 여겨진 이들은 장가들지도 시집가지도 않는다.」누가복음 20:34–35 · 본디새김
「이 시대」와 「저 시대」의 구별은 단순히 현재와 먼 미래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삶의 질서와, 부활로 죽음의 지배가 끝나는 삶의 질서를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더는 죽을 수도 없다. 그들은 천사와 같고, 부활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0:36 · 본디새김
이 시대에는 사람이 죽고, 후손을 남기는 일은 죽음 속에서도 한 사람의 이름과 가문이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형사취수 제도는 바로 이 조건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시대에는 죽음이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지배하지 않으므로, 후손을 통해 이름과 생명을 이어 가야 하는 질서도 같은 방식으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이 가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과 자녀를 통해 생명이 이어지는 현재의 질서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새 생명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천사와 같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사람이 천사가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며, 그 유사성은 문맥상 죽을 수 없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부활 이후 몸이 사라진다거나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와 기억이 없어질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문제들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을 무한정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화를 후손을 통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지속시키는 삶과,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직접 주시는 생명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 해석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왜 형사취수 규정을 부활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부활 본문에 관한 유일한 학문적 해석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모세의 가시덤불 이야기로 돌아가셨을까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덤불 대목에서 일러 주었다. 거기서 그는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누가복음 20:37 · 본디새김
출애굽기 3:6, 모세가 불타는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난 장면입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세 족장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붙드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이다. 모두가 그분에게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0:3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기록한 본문을 인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맺으신 관계를 죽음으로 끝난 관계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이 구절에서 부활까지 이르는 논증이 정확히 어떻게 성립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강조하는 읽기와, 죽은 족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는 선언을 강조하는 읽기입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현재의 결혼 관계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후의 생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십니다.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곧 사람이 죽음 이후에도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보여 주십니다.
사람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결혼 관계나 후손을 통한 이름의 지속만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논증을 「하나님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말씀하셨다」는 문법적 증명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3:6의 히브리어 표현은 영어처럼 시제를 표시하는 동사를 사용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6 자체도 부활의 방식이나 시점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언약적 신실하심을 강조하는 읽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관계를 지키시는 분이므로 죽음도 그 약속을 최종적으로 끊을 수 없다고 봅니다. 다른 읽기는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생명이 지속되므로 부활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부활의 소망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우리는 많은 경우 자기 삶의 지속성을 자녀와 후손, 업적, 다른 사람들의 기억, 집과 재산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확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진 생명의 근거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이 사실은 죽음으로 무효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존재가 지속된다는 위로로만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문제를 놓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소망은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죽음보다 강하신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서기관 몇이 대답하여 말했다. 「선생님, 옳게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0:39 · 본디새김
모든 종교 지도자가 예수님께 똑같이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서기관들에게는 예수님의 대답이 설득력 있게 들렸을 수 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제자가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사람들이 더 이상 감히 예수님께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고만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권위를 따져 물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질문이 멈췄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직접 질문을 던지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 12:2에는 이스라엘이 극심한 고난과 박해를 겪는 상황에서 죽은 사람들이 깨어나는 미래의 소망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시지만, 죽음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마지막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부활 신앙의 중심을 드러내십니다.
다윗의 자손인데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되는가
익숙한 메시아의 이름에 숨은 질문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라고들 하느냐?」누가복음 20:41 · 본디새김
얼핏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믿음을 부정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천사가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받으실 것이라고 선언하는 장면(1:32–33)과,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장면(18:38)을 기록해 왔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신다고 읽는 것은 누가복음 전체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 자신이 시편 책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누가복음 20:42 · 본디새김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받침으로 삼을 때까지.』」누가복음 20:43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분을 가리키는 「주」가 등장합니다. 시편 110:1의 히브리어에서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야훼이며, 두 번째는 「나의 주」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시인이 「나의 주」라고 부르는 이에게 말씀하시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아들이냐?」누가복음 20:44 · 본디새김
예수님의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기대와, 다윗 자신이 주라고 부를 만큼 높은 권위를 가지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의 계보와 왕권을 설명하지만, 시편 110편은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자신의 오른쪽에 앉히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오른쪽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왕권과 승리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단지 다윗의 혈통을 물려받는 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0편은 왕의 권위와 승리를 노래하는 왕실 시편으로 이해됩니다. 원래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사용되었는지, 처음에 누구를 가리켰는지는 논의가 있으며, 왕의 즉위나 왕권을 기념하는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메시아 해석 속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이 말씀을 했다는 전제 아래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밝히시는 방식
처음에 지도자들은 누가 당신에게 이 권위를 주었느냐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설명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장의 끝에 가까워진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밝히십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이 주라고 부르는 분이며,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발 받침으로 삼으실 때까지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시편 110편의 모든 표현을 어떻게 성취하실지 이 자리에서 직접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사도행전 2:34–36에서 베드로는 바로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20장의 질문에 대한 후속적인 정경적 해석입니다.
그 권위는 인간 지도자들이 승인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우시는 권위입니다.
성전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정당성을 심사하려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그 권위를 판정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가 누구에게 속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 관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이 과부의 집을 먹어 치우다
긴 옷과 높은 자리
「서기관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려 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고, 회당에서 윗자리에 앉고, 잔치에서 상석에 앉기를 좋아한다.」누가복음 20:46 · 본디새김
비판받는 것은 서기관이라는 직업 자체가 아닙니다. 누가는 조금 전 서기관 몇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옳다고 인정했다고 기록했습니다(20:39).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묘사하시는 특정한 태도와 행동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정한 옷을 입거나 존경받는 자리에 앉는 일 자체가 죄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런 대우를 「좋아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아 주는가가 중요해졌고, 성경 지식이 자신들을 높이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의로운 척하며 예수님을 칭찬하던 첩자들처럼, 여기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과 실제 행동 사이의 차이가 문제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심각한 사실을 밝히십니다.
과부들의 집을 먹어 치우는 사람들
「그들은 과부들의 집을 먹어 치우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한다. 이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누가복음 20:47 · 본디새김
과부들의 집을 단순히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 먹어 치운다고 말씀하십니다. 삼켜 먹거나 완전히 먹어 치우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강한 표현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과 생활의 기반을 탐욕스럽게 빼앗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립니다.
과부들의 집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긴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것은 기도의 분량이 아니라, 기도를 겉치레로 사용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약자를 착취하는 모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오래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라고 하신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과부를 보호하라고 반복해서 명령합니다. 출애굽기 22:22–24는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하며, 그들이 부르짖으면 여호와야훼께서 들으시겠다고 선언합니다. 신명기 24:17–21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왜곡하지 말고, 그들의 생계를 위해 수확물의 일부를 남겨 두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그 율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과부들의 집을 먹어 치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이 가진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해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과부들이 재산이나 상속을 둘러싼 법률적·경제적 문제에서 취약한 위치에 놓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 비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서기관들이 재산 관리의 권한을 악용했는지, 종교적인 권위를 이용했는지, 다른 방식으로 착취했는지는 누가가 설명하지 않아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의 권위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가르치고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장의 처음에서 예수님께 누가 권위를 주었느냐고 묻던 지도자들은, 장의 마지막에 이르러 오히려 자신들이 그 권위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포도원 소작인들은 맡은 포도원을 자기 것처럼 여기며 주인의 권리를 거부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맡은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적 권위를 사람들을 돌보는 데 쓰지 않고, 자신들을 높이며 과부들의 삶을 착취하는 데 씁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자기 소유처럼 여기는 순간, 맡은 사람은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장의 어느 질문에도 상대방이 정해 놓은 틀에 갇혀 대답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도 놓치고 있던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맡기신 포도원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사람들이 버린 것을 높이시는 분,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권위는 율법을 잘 알고 논쟁에서 이길 수 있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사명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는 사실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길게 기도한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사람을 정의롭게 대하고 있다는 보증이 되지도 않습니다.
성전에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인사하며, 회당과 잔칫상에는 그들을 위한 높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길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옷이나 자리나 기도의 길이를 바라보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보이지만, 그들에게 재산을 빼앗긴 과부들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 집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을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 가장 엄하게 책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라고 하신 사람들의 삶을 먹어 치우는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