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20–21장 · 성전에서 한 가르침
무너지는 성전과 남는 말씀
누가복음 21장은 두 개의 아주 작은 동전으로 시작합니다.
가난한 과부가 성전의 헌금궤에 렙돈 두 닢을 넣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누구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사람들은 성전의 웅장한 돌과 아름다운 봉헌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을 바라보시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고 다 헐릴 날들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성전의 거대한 돌들이 오래도록 남을 것처럼 보이고, 과부의 작은 동전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시고, 장의 뒷부분에서는 하늘과 땅조차 지나가겠지만 자신의 말씀은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까요?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들이 전쟁을 벌이고, 제자들이 박해받고, 하늘의 세력들까지 흔들린다면 무엇이 그들을 붙들어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예측하는 능력을 주려 하지 않으십니다. 재앙 속에서도 속지 않고,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살아가도록 준비시키십니다.
누가복음 21장은 세상의 마지막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말씀이라기보다, 흔들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보신 것
과부의 두 렙돈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사람들을 바라보십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헌금궤에 예물을 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과부가 다가와 렙돈 두 닢을 넣습니다. 렙돈은 당시 유대 지역에서 사용하던 매우 작은 액면의 동전이었습니다.
누가는 그를 「궁핍한 과부」라고 소개하고, 예수님께서도 그를 「가난한 과부」라고 부르십니다. 두 번에 걸쳐 강조되는 것은 그 여인의 경제적 형편입니다.
그가 말했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이들 모두보다 더 많이 넣었다.」누가복음 21:3 · 본디새김
금액으로만 비교한다면 이 말씀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액이 아니라 그 예물이 주는 사람의 삶에서 무엇을 차지하는지를 보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다 자기에게 남아도는 것에서 예물로 넣었는데, 이 여자는 모자란 가운데서 가진 살림을 다 넣었다.」누가복음 21:4 · 본디새김
부유한 사람들은 예물을 바친 뒤에도 생활을 이어 갈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것까지 모두 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동전 속에 담긴 한 사람의 삶을 보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칭찬하신 것일까요, 안타까워하신 것일까요
이 본문은 전통적으로 헌신적인 헌금의 모범으로 읽혀 왔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렸으므로, 사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헌신으로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드려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 여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평가하시므로, 이 해석에는 본문에 근거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여인이 가진 살림을 모두 내놓아야 하는 종교적 현실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이야기가 놓인 자리를 근거로 삼습니다. 20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과부들의 집을 먹어 치운다고 책망하셨습니다(20:47). 바로 다음 장면에서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살림을 모두 성전에 넣고, 그다음에는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반면 누가복음의 더 넓은 문맥을 살피며 과부의 행동을 긍정적인 헌신의 사례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헌신을 인정하셨다는 데 무게를 두고, 두 번째 읽기는 가난한 여인의 생계까지 받아들이는 종교 제도의 문제를 보게 합니다. 본문은 어느 쪽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직접 칭찬하는 표현을 사용하지도 않으셨지만, 그의 헌금을 비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장면을 오늘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활비까지 모두 헌금하도록 요구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도 과부처럼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헌금했는지, 누가 그에게 헌금을 요구했는지, 이후 어떻게 살아갔는지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셨는지는 분명합니다. 헌금궤에 들어가는 두 닢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두 닢이 한 가난한 여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
예수님께서는 궁핍한 과부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성전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져 있다」고 이야기합니다(21:5). 누가는 두 장면을 길게 연결해 설명하지 않지만, 독자는 앞의 작은 동전과 뒤의 거대한 돌을 나란히 보게 됩니다.
성전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과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 여인을 바라보셨고, 이제 사람들이 감탄하는 성전을 바라보시며 그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작은 헌금은 영원히 남고 큰 건물은 사라진다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과 사람들의 눈에 중요해 보이는 것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살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비오스(βίος)는 생명이나 삶을 뜻할 수 있지만, 재산이나 생활의 기반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이 문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자신의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끝은 곧바로 오지 않습니다
성전은 왜 그렇게 중요한 건물이었을까요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히 크고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두고 예배하는 중심지였고, 희생 제사와 절기 순례가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시작한 대규모 확장과 개축 사업을 통해 성전 구역은 더욱 웅장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바라보는 것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 — 그 가운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고 다 헐릴 날들이 올 것이다.」누가복음 21: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부정하시는 것은 건축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보장해 줄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속성입니다. 성전이 아무리 웅장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동으로 안전하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를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유다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근거처럼 여겼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의한 삶의 결과를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누가는 바로 앞에서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책망도 기록했습니다(19:46).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백성의 삶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곧바로 시간을 묻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일어나는지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그 표징은 무엇이겠습니까?」누가복음 21:7 · 본디새김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알아볼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상과 다른 대답으로 시작하십니다.
그가 말했다. 「너희가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이가 내 이름을 내세워 와서 『나다』 하고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누가복음 21: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경고하시는 위험은 전쟁이나 지진이 아닙니다.
속임수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자신이 특별한 구원자라고 주장하고,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전쟁과 소요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고 소요가 일어나는 소식을 듣거든 놀라 떨지 마라. 이런 일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이 곧바로 오는 것은 아니다.」누가복음 21: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전쟁과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시면서, 바로 그 사건들을 끝이 즉시 온다는 증거로 삼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판단하려 하고, 지진과 굶주림과 돌림병을 묶어 종말의 시간표를 만들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계산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어지는 10–11절에는 민족과 나라 사이의 전쟁, 큰 지진, 굶주림, 돌림병, 무서운 일들과 하늘의 큰 표징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건마다 날짜를 붙이지 않으셨고, 어느 지역에서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지 연대표를 제공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목록을 오늘날의 어떤 전쟁이나 자연재해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본문이 제공하는 정보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권위는 미래의 모든 정보를 공개하는 권위가 아닙니다. 미래를 다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라도 거짓된 확신에 끌려가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권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의 혼란을 이야기하시다가 갑자기 제자들 자신의 삶으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후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예루살렘 공략 과정에서 파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의 파괴와 직접적으로 연결하여 이해되는 역사적 배경입니다. 다만 누가가 이 예언을 기록할 당시 이미 그 사건을 알고 있었는지 등 복음서의 집필 시기와 역사적 예언의 관계는 별도의 연구 문제입니다.
박해는 끝이 아니라 증언의 자리가 됩니다
재앙보다 먼저 찾아올 일
「그런데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를 붙잡아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길 것이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왕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려갈 것이다.」누가복음 21:1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전쟁과 지진과 굶주림의 이야기를 이어 가시는 대신, 「이 모든 일에 앞서」 제자들이 먼저 겪게 될 일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단순히 불운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전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사람들 앞에 서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체포되어 공회 앞에 섭니다(사도행전 4:1–22). 사도들은 다시 붙잡혀 심문받습니다(5:17–42). 바울은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서 변론하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증언합니다(24–26장).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것이 너희에게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누가복음 21:13 · 본디새김
여기서 이야기가 뒤집힙니다.
제자들을 붙잡아 재판에 넘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왕과 총독 앞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평소에 접근하기 어려웠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리도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법정에 세우지만, 그곳이 오히려 예수님을 증언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적대적인 권력조차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미리 변론을 준비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러므로 미리 변론을 준비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여라.」누가복음 21:1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신앙에 관한 공부나 변론 준비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일반화하면 본문이 말하는 상황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 때문에 갑자기 붙잡혀 심문받게 될 상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모든 종류의 사전 학습이라기보다, 장차 자신이 어떤 심문을 받을지 미리 계산하고 완벽한 답변을 마련하려는 태도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입과 지혜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를 대적하는 이들은 아무도 그 지혜에 맞서지도 그것을 반박하지도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21:15 · 본디새김
제자들이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토론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11–12에서는 비슷한 상황에서 성령께서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셨고,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이 입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런데 15절의 약속을 반대자들이 언제나 제자들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그들을 무죄로 풀어 주리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6:10에서는 스데반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성령을 당해 내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그를 죽입니다.
진리를 반박할 수 없다는 것과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증언이 반드시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할 자리에서 필요한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죽임당할 것인데 머리카락 한 올도 없어지지 않는다니
「너희는 어버이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에 의해서도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죽일 것이다.」누가복음 21:16 · 본디새김
그런데 곧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너희 머리카락 한 올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1:18 · 본디새김
어떻게 두 말씀이 동시에 참일 수 있을까요? 18절을 육체적으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앞의 16절과 충돌합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철저히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7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머리카락까지 모두 세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죽임당할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먼저 명시되므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보호는 육체적인 죽음을 피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보호여야 합니다.
「너희는 견디어 너희 목숨을 얻어라.」누가복음 21:19 · 본디새김
제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박해를 피한다면 당장의 안전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깊은 생명의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9:24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원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죽음조차 그들의 생명을 최종적으로 빼앗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붙드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든 위험을 피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견디는 일입니다.
여기서 견딘다는 것은 고통 자체를 좋아하거나 위험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위협 때문에 자신이 믿고 따르는 분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실제로 도망쳐야 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미리 준비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프로멜레타오(προμελετάω)는 미리 연습하거나 준비한다는 뜻을 지니며,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당시의 변론이나 수사적 준비를 연상시킵니다. 19절의 「목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프쉬케(ψυχή)는 문맥에 따라 생명, 목숨,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16절의 죽음과 18절의 보호 약속을 함께 고려해 읽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일 때에는 도망하십시오
모든 위험을 견디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때 그 도시가 황폐하게 될 때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누가복음 21:2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전쟁과 소요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끝의 징조로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일반적인 전쟁의 소식과 다른, 특정한 도시가 군대의 포위를 당하는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매우 실제적인 행동을 명령하십니다.
「그때 유대 지방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도시 안에 있는 이들은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도시로 들어가지 마라.」누가복음 21:21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는 제자들에게 박해를 견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이 두 명령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과 위험한 장소에 무조건 머무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해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지만, 군대에 포위될 도시를 떠나는 것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위험을 무시하거나, 무모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반드시 충성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위험이 다가올 때 피해야 할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있는 도시가 왜 심판받습니까
「이날들은 적힌 모든 것이 채워지도록 벌이 내리는 날들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1:22 · 본디새김
「벌이 내리는 날들」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사용했던 심판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28장에는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이 전쟁과 포위, 굶주림과 흩어짐을 겪게 된다는 경고가 나오고, 예레미야와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도 예루살렘이 심판받을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우연한 재난으로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근거로 유대 민족 전체가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예루살렘에 닥칠 구체적인 재앙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오늘날 어떤 국가나 민족이 겪는 전쟁과 재난에 그대로 적용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고통을 먼저 언급하십니다.
「그날에는 배 속에 아이를 가진 이들과 젖 먹이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땅 위에 큰 곤경이 있고 이 백성에게 노여움이 내릴 것이다.」누가복음 21:23 · 본디새김
포위된 도시에서 피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몸이 무거운 여성이나 젖먹이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그 위험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궁핍한 과부의 살림을 보셨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전쟁이 닥쳤을 때 어린아이를 안고 도망해야 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시는 말씀 속에서도 구체적인 사람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때」는 언제 끝납니까
「그리고 그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 가운데로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방 사람들의 때가 채워질 때까지 그들에게 밟힐 것이다.」누가복음 21:24 · 본디새김
「이방 사람들의 때」는 무엇을 뜻할까요? 앞 문맥을 따르면 이방 세력이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역사적 기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정확히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나는지, 그 끝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읽기에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시대와 연결하며, 로마서 11:25의 「이방 사람들의 충만함」을 이 구절과 잇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며, 누가복음 21:24가 로마서의 주제를 직접 설명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명시하시는 것은 예루살렘의 고난에 「때가 채워질 때까지」라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역사의 주도권이 끝없이 이방 제국들의 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그 끝이 언제인지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야가 예루살렘이라는 한 도시를 넘어 온 세계로 확대됩니다.
세상은 두려움에 무너지지만 제자들은 머리를 든다
해와 달과 별들이 흔들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해와 달과 별들에 표징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너울이 내는 소리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괴로워할 것이다.」누가복음 21:2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예루살렘의 군사적 포위와 파괴를 말씀하셨다면, 이제는 해와 달과 별들, 바다와 너울, 하늘의 세력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은 구약의 예언서에서 낯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13:10에서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면서 별들이 빛을 내지 않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사야 34:4에서는 하늘의 군대가 사라지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요엘 2:10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날을 앞두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습니다. 이 본문들은 모두 거대한 역사적·신학적 변화를 우주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예언자들의 언어에서 해와 달과 별들이 흔들린다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들을 모두 단순한 비유로 축소하여 실제로 일어날 일과는 관계없는 문학적 장식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일어날 일에 관해 말씀하고 계시며, 누가는 그것을 예언자들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넋을 잃는다
「사람들은 사람 사는 온 땅에 닥쳐올 일을 내다보며 두려움에 넋을 잃을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1:26 · 본디새김
사람들은 아직 자신들에게 닥치지 않은 일까지 내다보며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이것은 성전의 파괴를 예고받고 곧바로 「언제」와 「무슨 표징」을 물었던 사람들의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미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나타날 때 오히려 더 큰 두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이 능력과 큰 영광으로 구름 속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누가복음 21:27 · 본디새김
여기서 말씀의 중심이 바뀝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들 가운데 드러나실 분이 계십니다.
구름 속에서 오시는 사람의 아들
이 표현은 다니엘 7:13–14를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과 함께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집니다. 그 환상에서 짐승의 모습으로 묘사된 제국들은 폭력적인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지만 결국 하나님께 심판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미지를 자신의 장래와 연결하여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제국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예루살렘은 군대에 에워싸이고,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권세는 폭력적인 제국들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예수님께 속합니다.
27절의 「사람의 아들이 … 오는 것」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예수님의 장래 재림과 최종적인 권위의 나타남으로 보는 견해는 25–26절의 우주적 혼란과 28절의 속량 약속을 종말의 완성에 연결합니다. 다니엘 7장이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견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높아지심, 그리고 예루살렘의 파괴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왕권을 강조합니다. 본문이 이 모든 사건 사이의 정확한 시간 간격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의 갈림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도 놓쳐서는 안 될 중심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배척당하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과 큰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만 너희는 머리를 들어라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펴고 너희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워지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1:28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넋을 잃습니다. 같은 사건을 마주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다릅니다. 몸을 편다는 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억눌리거나 두려움에 움츠러든 사람이 다시 곧게 일어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속량」은 해방이나 구속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68에서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속량하셨다고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앞둔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던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나타남과 연결됩니다. 다만 이 속량이 예루살렘의 파괴 속에서 제자들이 구출되는 일을 중심으로 가리키는지, 궁극적인 종말의 구원을 가리키는지는 27절의 해석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제자들은 이미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고, 예루살렘에 닥칠 비극에 대해서도 경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구원보다 마지막 말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실 분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서 자체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환상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이 나라를 받는다는 말씀과 연결합니다(다니엘 7:18, 27). 따라서 이 존재를 처음부터 예수님 개인만을 가리키는 직접적인 예언으로 단순화하기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왕권에 관한 본래의 환상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28절의 「속량」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아폴뤼트로시스(ἀπολύτρωσις)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은 날짜가 아니라 계절을 알려 준다
왜 무화과나무를 보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했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누가복음 21:29 · 본디새김
「이미 잎을 내면 너희가 보고 스스로 여름이 이미 가까운 줄 안다.」누가복음 21:30 · 본디새김
해와 달과 별들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넋을 잃는 이야기 뒤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나무의 잎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무에 잎이 나기 시작하면 여름이 가까워졌음을 압니다. 그러나 잎이 나기 시작한 날을 안다고 해서 여름의 모든 날씨와 사건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는 줄 알아라.」누가복음 21:31 · 본디새김
무화과나무를 현대의 특정 국가나 정치적 사건을 가리키는 암호로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만 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모든 나무」를 보라고 하십니다. 비유의 초점은 특정 나무의 상징성이 아니라, 잎이 나면 계절이 가까워진다는 일상적인 관찰입니다.
사람들은 앞서 성전이 언제 무너지고 어떤 표징이 나타날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건을 알아보는 지혜를 말씀하시지만, 그 지혜는 날짜를 계산하는 기술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시대의 변화를 분별하되, 그 변화에 사로잡혀 거짓된 확신이나 두려움으로 달려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이 세대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 이 세대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1:32 · 본디새김
「이 세대」는 누구이고, 「이 모든 일」은 어디까지 포함할까요? 「이 세대」를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으로부터 약 40년 뒤인 기원후 70년의 성전 파괴는 그 세대 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25–27절의 우주적인 표징과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 예수님까지 최종적인 재림과 종말의 완성으로 이해한다면, 「이 세대」 안에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말씀은 새로운 어려움을 낳습니다.
그래서 해석은 여러 갈래로 갈립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을 예루살렘의 파괴로 보는 읽기, 「이 세대」를 마지막 사건들을 직접 경험할 세대로 보는 읽기, 「세대」를 하나님을 거부하는 특정한 성격의 사람들로 보는 읽기, 그리고 역사적 세대와 신학적 성격의 세대 사이의 긴장이 남아 있다고 보는 읽기입니다. 어느 읽기든 설명해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 갈림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해석할 때는 하나의 연대표를 만들기 위해 본문에 없는 시간적 구분을 지나치게 세밀하게 집어넣거나,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 전체를 이미 끝난 사건으로 단순화하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확실하게 강조하시는지는 분명합니다.
지나가는 것과 지나가지 않는 것
「하늘과 땅은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1:33 · 본디새김
처음에는 성전의 돌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늘의 세력들까지 흔들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늘과 땅 자체가 지나갈 수 있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말씀은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사야 40:6–8에서는 모든 육체가 풀과 같고 그 아름다움이 들의 꽃과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고 선언합니다. 그 본문의 원래 문맥에서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위로와 연결됩니다. 인간의 영광과 정치적인 세력은 사라지지만,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겠다는 여호와야훼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바로 그러한 영속성을 가진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가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매우 구체적인 경고를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세대」를 마지막 사건들을 직접 경험할 세대로 보는 읽기는, 누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 세대」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설명해야 합니다. 「세대」를 특정한 성격의 사람들로 보는 읽기는 예수님께서 믿음 없는 세대나 악한 세대를 말씀하신 용례들(9:41; 11:29)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공관복음서의 「이 세대」 표현을 비교하며 두 읽기 사이의 긴장이 누가복음에서도 남아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파괴가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나타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문제는 아닙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음을 짓누르는 세 가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너희 마음이 흥청거림과 술 취함과 살림 걱정에 짓눌리고, 그날이 올무처럼 갑자기 너희에게 닥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누가복음 21:34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험은 전쟁과 지진과 박해가 아니라 일상의 문제입니다. 흥청거림과 술 취함은 지나친 쾌락과 방종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성격이 다릅니다.
살림 걱정입니다.
먹고사는 문제, 생활을 유지하는 문제, 앞날을 염려하는 문제입니다. 공통점은 마음이 짓눌린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에 빠져 현실을 잊고, 어떤 사람은 생활의 염려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볼 여유를 잃습니다. 두 사람의 생활 방식은 정반대처럼 보여도, 모두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를 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8장의 씨 뿌리는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걱정과 재물과 삶의 즐거움에 눌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8:14). 거기서도 평범한 삶의 염려와 즐거움이 말씀을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걱정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할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그 걱정이 마음 전체를 짓누르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없애 버리는 상태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늘 깨어, 닥쳐올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힘을 얻도록 빌어라.」누가복음 21:36 · 본디새김
이 깨어 있음은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종말에 관한 정보를 찾는 행동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것을 기도와 연결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거짓된 예언에 속지 않고,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고, 일상의 걱정과 즐거움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벗어난다」는 말씀은 환난에서 실제로 피할 수 있도록 보호받는다는 뜻으로도, 환난을 통과하여 최종적인 심판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 도망하라고, 어떤 경우에는 견디라고 명령하셨으므로, 이 마지막 기도를 모든 어려움에서 자동으로 면제받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심은 예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언제 성전이 무너지고 어떤 표징이 나타날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가르치시는 것은 그날이 언제인지 계산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날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모든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을까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올리브 산에서 묵으셨다
누가는 긴 예언의 말씀을 마친 뒤 예수님의 일상을 짧게 기록합니다.
그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고 밤에는 나가서 올리브라 불리는 산에서 묵곤 했다.누가복음 21:3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마치신 뒤에도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백성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밤의 올리브 산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관례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실 것이고,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아직 그 밤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 반복 속에서 마지막 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그의 말을 들으려고 이른 새벽에 성전에 있는 그에게 나아오곤 했다.누가복음 21:38 · 본디새김
이 문장이 누가복음 21장의 마지막입니다.
무너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예배하는 소중한 장소였지만, 그 건물 자체가 영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국도, 도시도, 하늘과 땅도 영원한 안전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성전의 돌들이 남아 있어야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시며 자신의 백성을 붙드시는 일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래를 다 알 수 없는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고, 진리를 증언하고, 견디며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오늘의 책임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기 때문에 오늘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 새벽입니다.
밤을 올리브 산에서 보내신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계십니다. 아직 거대한 성전의 돌들은 그대로 서 있고, 사람들은 그곳이 언젠가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이 언제 무너질지 살피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무너질 성전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