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22–24장 · 죽음과 부활
모두가 무너지는 밤, 예수님께서 지키신 것
누가복음 22장에는 여러 사람의 손이 등장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기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과 거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노예의 귀를 잘라 내고, 예수님께서는 그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합니다.
같은 밤, 서로 다른 손들이 전혀 다른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놀라운 손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리키신 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넘겨지실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들과 식사하십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빵과 잔을 나누어 주신 뒤에, 「나를 넘기는 이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이어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을 넘길 것인지 서로 논의하는데, 그 대화는 뜻밖에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하는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하지만, 그날 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고도 슬픔에 지쳐 잠들고, 공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 고발할 근거를 찾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누가복음 22장은 인간의 충성이 무너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무너지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누가 더 큰가를 다투는 사람들 가운데서 섬기는 이로 계십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자신을 붙잡으러 온 사람의 다친 귀까지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 앞에서,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에 앉으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제자들이 왜 그렇게 약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조차 끝까지 충성하지 못하는 밤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으로 남아 계셨습니까?
누가는 그 답을 한 번의 선언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식탁에서 시작하여 올리브산과 대제사장의 뜰, 공회의 심문 자리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게 합니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배반과 폭력으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진 사건인지를 조금씩 알게 됩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없앨 기회를 찾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준비하십니다
유월절을 앞둔 예루살렘
누가는 시간을 알려 주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누룩 없는 빵의 명절, 곧 유월절이라 불리는 명절이 가까이 와 있었다.누가복음 22:1 · 본디새김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이집트를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날 밤 이집트에는 심판이 임했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일을 세대를 거쳐 기억하고, 그분과 맺은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는 절기였습니다. 본래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의 명절은 서로 구별되는 절기였지만(레위기 23:5–6), 제2성전기에는 두 절기를 포괄하여 유월절이라고 부르는 용법도 나타납니다. 누가가 두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그러한 용법과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념하는 명절이 가까워지는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없앨 길을 찾고 있었다.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2: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습니다. 공개적으로 체포하면 백성의 반발을 살 수 있으므로,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예수님을 붙잡을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때 유다가 등장합니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였다」
사탄이 이스가리옷이라 불리는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였다.누가복음 22:3 · 본디새김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였다」는 정보는 독자에게 낯설지 않지만, 배반을 이야기하는 바로 이 자리에서는 특별한 무게를 가집니다. 유다는 바깥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6:13–16),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역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예수님을 넘기는 일을 의논합니다.
누가는 이 행동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고 설명하지만, 유다가 자신의 의지와 책임 없이 조종당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직접 지도자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길 방법을 의논하고, 은전을 받기로 합의한 뒤, 적당한 기회를 찾습니다.
사탄의 활동과 유다의 책임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다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관해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돈을 받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돈만이 그의 유일한 동기였다고 본문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실망했기 때문인지, 다른 정치적인 기대가 있었는지도 이 장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유다의 복잡한 심리를 추측하도록 이야기를 꾸미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무엇을 했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고, 무리가 없는 데서 그를 그들에게 넘길 기회를 찾고 있었다.누가복음 22:6 · 본디새김
유다는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반박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은밀한 기회였고, 유다는 바로 그 기회를 제공하려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찾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한쪽에서는 배반이 준비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식탁이 준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마지막 식사를 알고 계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우리를 위해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에서 준비해야 하는지 묻는 제자들에게, 도시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나르는 사람을 만날 것이고, 그가 들어가는 집을 따라가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큰 다락방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가 보니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이 장면을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모든 일을 미리 아셨다는 표징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이미 누군가와 식사 장소를 마련해 두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였으며,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신 채 갑작스럽게 체포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의 고난을 말씀하셨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셨으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위협 때문에 자신의 길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유월절 식탁으로 나아가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차려진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주셨습니까
「바라고 바랐다」
식사할 시각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누우십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의 정식 연회에서는 낮은 상 주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바라고 바랐다.」누가복음 22:15 · 본디새김
「바라고 바랐다」(ἐπιθυμία)는 같은 어근의 명사와 동사를 함께 사용해 간절한 바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정해진 일정에 따라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식사를 간절히 바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바라셨을까요?
누가는 그 이유를 직접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식사가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난과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연결하는 특별한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일을 기억하는 바로 그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몸과 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옛 구원을 기억하는 자리가,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의미를 밝히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월절의 역사를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경험한 역사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기억이 담긴 식탁에서 자신의 죽음을 새롭게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다시 드시지 않겠다고 하셨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그것을 결코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2:16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읽으면 식탁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바라셨던 식사를 드시면서, 앞으로 그 식사를 다시 드시지 않을 때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곧이어 잔을 받아 감사하시고 「이것을 받아 서로 나누어라」 하신 뒤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나는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만든 것을 결코 마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2:18 · 본디새김
여기에는 지금 함께 먹고 마시는 시간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이루어질 미래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겪으실 고난을 바라보시면서도 그 고난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구원을 기억하는 식사가 미래의 완성을 기다리는 식사가 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 단순히 마지막 추억을 남기는 장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너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빵과 잔 —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그리고 빵을 집어 감사하고 떼어 그들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내 몸이다. [너희를 위하여 주어지는 몸이다.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렇게 하여라.」누가복음 22:19 · 본디새김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도 마찬가지로 주며 말했다. 「너희를 위하여 쏟아지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누가복음 22:20 · 본디새김
대괄호로 표시한 부분, 곧 19절 뒷부분부터 20절 끝까지는 일부 사본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실린 긴 본문을 따라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주시며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몸이 「너희를 위하여」 주어지는 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에게 일어날 비극으로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을 위한 사건으로 설명하십니다.
이어서 잔을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두 본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4:3–8에서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제물의 피를 뿌리며 하나님께서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피라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백성의 마음에 새기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이 새 언약과 연결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맺는 관계를 새롭게 세우는 사건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강요당하는 희생자로만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알고 계시고, 빵과 잔을 주시면서 그 죽음이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죽음의 의미를 규정하시는 분은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다만 이 짧은 말씀에 후대 기독교 신학이 발전시킨 속죄에 관한 모든 설명이 이미 명시되어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속죄의 방식과 범위에 관해서는 신약의 여러 본문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누가의 긴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제자들을 위해 주어지고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과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배반자의 손도 그 상 위에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과 잔을 주신 다음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보아라, 나를 넘기는 이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누가복음 22:21 · 본디새김
마가복음 14장과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배반에 관한 예고가 빵과 잔의 말씀보다 앞에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는 빵과 잔의 말씀 뒤에 배반자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식탁에 예수님을 넘길 사람도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제자들의 충성스러움이 이 식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드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 식탁이 마련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그를 거쳐 넘겨지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누가복음 22:22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역사와 무관하게 발생한 우연한 사고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해진 대로 가신다고 해서 예수님을 넘기는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은 두 사실이 어떻게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지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사실을 동시에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길을 알고 가시고, 예수님을 넘기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누가 그런 일을 할 것인지 서로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몸과 피에서, 자기들 가운데 누가 배반자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논의가 다른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22:19 뒷부분과 20절에는 중요한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긴 본문에는 17절의 첫 번째 잔, 19절의 빵, 20절의 두 번째 잔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본에서는 「너희를 위하여 주어지는 몸이다」부터 20절 끝까지가 빠져 있어, 잔이 빵보다 먼저 나오고 두 번째 잔은 없습니다. 이 차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새 언약을 설명하시는 말씀이 누가의 원래 기록에 어떤 형태로 있었는지와 관계됩니다. 여러 그리스어·시리아어 사본의 차이를 근거로 긴 본문이 더 이른 형태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있고, 짧은 본문이 원래 형태였고 긴 본문이 초기 교회의 성찬 전승을 반영한 확장이라는 견해도 논의되어 왔습니다. 어느 형태가 누가의 최초 본문인지는 단정하지 않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만 긴 본문의 빵과 잔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23–25에 기록된 바울의 성찬 전승과 표현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 새 언약과 기념이라는 요소를 공유합니다.
자신을 내어 주시겠다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다툽니다
마지막 식탁에서 벌어진 다툼
그리고 그들 사이에 다툼도 일어났다. 자기들 가운데 누가 더 큰 이로 보이는가 하는 것이었다.누가복음 22:2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고, 자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을 위해 내어 주신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다투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툼은 처음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9:46에서도 같은 논쟁이 일어났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며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식탁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더 큰 이로 보이는가」라는 표현은 실제로 누가 더 큰 권력을 가졌는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 속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하는 문제도 포함합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차지할 위치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방 사람들의 왕들은 그 이방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이들은 은인이라 불린다.」누가복음 22:25 · 본디새김
헬레니즘과 로마 세계에서는 권력자나 부유한 후원자가 사람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공공시설을 세우고, 그 대가로 명예와 충성을 얻는 관행이 널리 존재했습니다. 도시와 공동체는 그런 사람을 은인으로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권력자는 사람들을 지배하면서도 그들의 은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모순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도리어 너희 가운데 더 큰 이는 더 어린 이같이 되고, 이끄는 이는 섬기는 이같이 되어라.」누가복음 22: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에 지도력이나 책임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더 큰 이」와 「이끄는 이」를 언급하시되,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라고 하십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더 높은 사회적 권위를 인정받는 문화 속에서, 더 어린 사람처럼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겸손한 태도를 갖추라는 도덕적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눈앞의 식탁을 가리키십니다.
「나는 섬기는 이로 너희 가운데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더 크냐? 식사 자리에 누운 이냐, 섬기는 이냐? 식사 자리에 누운 이가 아니냐? 그런데 나는 섬기는 이로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22:27 · 본디새김
모두 식사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당시의 관습을 따르면 음식을 먹으며 대접받는 사람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그 기준을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섬기는 이로 그들 가운데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별도의 장면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식탁에서 자신을 섬기는 이라고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선생님이시며 주님이신 분께서 스스로를 섬기는 이의 자리에 놓으십니다. 이것은 권위를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가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 위에 서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기십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권위가 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참된 권위를 가지신 분이 그 권위를 사용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섬김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잠시 뒤 올리브산에서 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투는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너희는 내가 여러 시험을 겪는 동안 줄곧 나와 함께 남아 온 이들이다.」누가복음 22:2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 직후, 그들이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넘기려 하고, 베드로는 곧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함께 걸어온 시간을 지워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에 유다가 어떤 방식으로 포함되는지, 배반을 이미 결심한 유다에게도 같은 약속이 주어진 것인지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누가는 식탁을 떠나는 유다의 모습을 별도로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내 아버지가 나에게 나라를 부여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부여한다」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내 나라에서 내 상에 앉아 먹고 마시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판단할 것이다.」누가복음 22:30 · 본디새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 다투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에서 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왕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영광을 향한 소망 자체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이 어디에서 오며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새롭게 규정하십니다.
왕좌는 제자들이 서로 경쟁하여 빼앗을 자리가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서 나라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이로 그들 가운데 계시다면, 그 나라에서 다스리고 판단하는 권위도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자신을 높이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판단한다」는 것은 심판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통치와 관련된 역할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그 구체적인 실현 방식은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을 어떤 정치적 제도의 상세한 설계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을 주신 직후 한 제자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베드로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사탄은 베드로만을 시험하려 했을까요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로 치려고 내어 달라고 청했다.」누가복음 22:31 · 본디새김
여기에는 한국어 번역에서 놓치기 쉬운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시지만, 「너희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복수형(σύ)입니다. 사탄이 시험하려 한 대상은 베드로 한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입니다. 반면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시는 「너」는 단수형으로, 베드로를 특별히 가리킵니다.
모든 제자가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가운데 베드로에게 특별한 말씀을 주십니다.
「밀처럼 체로 친다」는 것은 곡식을 체에 넣고 흔들어 알곡과 다른 것들을 가르는 행동에서 나온 이미지로, 사람을 강하게 흔들어 믿음과 충성을 시험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나는 네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해 빌었다. 그리고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여라.」누가복음 22:32 · 본디새김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뜰의 불가에 앉지도 않았고, 여종의 질문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를 위해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시고, 그가 「돌이킨 뒤에」 해야 할 일까지 알려 주십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실패가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명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지나 돌이킨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을 굳세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약함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지만, 그 약함을 이유로 그를 미리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저는 죽음으로도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에게 말했다. 「주님, 저는 당신과 함께 감옥으로도 죽음으로도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22:33 · 본디새김
베드로의 말이 반드시 거짓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진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과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을 세 번 부인할 것이다.」누가복음 22:3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시몬아, 시몬아」라고 부르셨는데, 이제는 「베드로야」라고 부르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베드로」라고 부르시는 것은 이 자리뿐입니다. 바위라는 뜻이 담긴 이름을 가진 사람이 곧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가 이 이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대조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독자에게는 분명한 역설로 다가옵니다.
베드로는 아직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독자는 이미 그 실패 이후를 향한 예수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올리브산으로 가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매우 어려운 말씀을 더 하십니다.
「칼을 사라」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준비시키셨습니까
이전과는 다른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자루도 신도 없이 보냈을 때에 무엇이 모자라기라도 했느냐?」 그들이 말했다.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누가복음 22:35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 9:1–6과 10:1–12의 파송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준비하고 확보한 다음에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고 사람들의 환대와 공급에 의지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 있는 이는 그것을 챙기고, 자루도 마찬가지로 챙겨라. 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는 자기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누가복음 22:36 · 본디새김
이전에는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챙기라고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라고 적힌 이 말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 관한 일도 결말을 가지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2:3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53:12의 직접 인용입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고난을 겪으며,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는 인물로 묘사되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여행의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따르는 예수님께서 이제 무법자처럼 취급받으실 것이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이전과는 다른 적대적인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이 점까지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칼을 사라」라는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훨씬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력 저항을 명령하셨을까요
이 구절은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라는 실제적인 지시로, 적대와 위험의 시대를 나타내는 과장된 표현으로, 또는 이사야 53:12의 성취와 직접 연결된 말씀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도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실제적인 무장 명령이었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제자가 칼을 사용하는 행동을 멈추게 하셨을까요? 반대로 칼이 단순한 비유였다면, 제자들이 실제로 칼 두 자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따라서 이 구절을 무조건적인 무장 명령으로 확정하거나, 반대로 칼이라는 말에는 실제 무기와 관련된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데 다음 대화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그들이 말했다. 「주님, 보십시오, 여기 칼이 둘 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됐다.」누가복음 22:38 · 본디새김
「됐다」에 해당하는 히카논 에스틴(ἱκανός)은 「충분하다」는 뜻으로도, 「이제 그만하자」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자루면 충분하다고 인정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말씀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칼의 개수를 이야기하자 대화를 중단하신 것일까요? 본문은 어느 쪽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의미를 판단하려면 곧이어 실제로 칼이 사용되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은 그들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해석은 제자들이 앞으로 적대적인 환경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므로, 여행에 필요한 물품과 함께 자신을 보호할 수단도 갖추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둘째 해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닥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셨다고 봅니다. 셋째 해석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칼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예수님을 무법자처럼 취급하는 상황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습니다. 이 대목을 구약의 폭력과 복수 전승에 대한 누가의 비판적 활용으로 보는 읽기도 있고, 반대로 38절과 51절의 모호한 표현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모든 무력 사용을 원칙적으로 부정하셨다고 단정하는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님께서 구하신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늘 가시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는 나가서 늘 하던 대로 올리브산으로 갔다. 제자들도 그를 따라갔다.누가복음 22:3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위기가 닥쳤다고 해서 갑자기 낯선 행동을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 장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산에서 묵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21:37). 올리브산은 은밀하게 숨어 들어가신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전부터 머무르시던 곳입니다. 유다가 그 장소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누가복음은 유다가 정확히 어떤 정보를 제공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이르러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누가복음 22:40 · 본디새김
사탄은 제자들을 밀처럼 체로 치려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시험 속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자신도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에게서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무릎을 꿇으시고, 아버지께 말씀하십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아버지,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누가복음 22:4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을 피하실 수 있다면 피하고 싶으시다는 뜻을 아버지께 아뢰십니다. 이 점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아무런 두려움이나 괴로움 없이 받아들이셨다고 설명하면, 본문이 들려주는 기도의 무게가 사라집니다.
성경에서 잔은 때로 기쁨과 구원을 나타내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고난을 가리키는 이미지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도 곧 자신에게 닥칠 고난과 죽음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바람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자신의 바람을 마지막 기준으로 삼지도 않으십니다. 순종은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다른 선택을 전혀 바라지 않는 상태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고난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고난의 무게를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보다 앞세우는 행동입니다.
누가복음 11:2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스스로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뒤 자신도 그 시험의 자리에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다른 길을 걷지 않으십니다.
천사가 힘을 주고, 예수님께서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하늘에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힘을 주고 있었다.누가복음 22:43 · 본디새김
그는 괴로움에 빠져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의 땀이 핏덩이처럼 땅에 흘러내렸다.누가복음 22:44 · 본디새김
이 두 절은 일부 고대 사본에 없고 다른 사본에는 들어 있어, 누가가 처음 기록한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실린 형태대로 읽으면, 천사가 나타나 힘을 준 뒤에도 예수님의 괴로움이 사라졌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도움은 고난의 무게를 느끼지 않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힘을 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땀이 핏덩이처럼」이라는 표현을 실제로 피가 땀에 섞여 나왔다는 의학적 진단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처럼」이라는 비교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겪으신 괴로움의 극심함을 보여 줍니다. 그 괴로움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시며 기도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왜 잠들었을까
그는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이 슬픔 때문에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누가복음 22:45 · 본디새김
제자들이 잠든 이유를 「슬픔 때문」이라고 밝히는 것은 다른 복음서의 겟세마네 장면과 비교할 때 누가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제자들은 게으르거나 무관심해서 잠들었다고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실 것이라는 말씀, 제자들 가운데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들은 밤이었습니다. 그 슬픔이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누가가 더 설명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고난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도 무겁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괴로움을 겪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은 슬픔 때문에 잠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자고 있느냐? 일어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누가복음 22:4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슬픔을 모른 척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슬픔 때문에 기도를 멈춘 상태에 그대로 머물도록 두지도 않으십니다. 시험이 다가왔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무리가 도착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잔을 심판의 이미지로 쓰는 구약 본문으로, 예레미야 25:15–29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예언자에게 진노의 잔을 받아 민족들에게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이사야 51:17에서도 예루살렘이 여호와야훼의 진노의 잔을 마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만 누가복음 22:42만으로 그 고난의 속죄론적 의미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43–44절에 관해서는 이 구절들이 초기 필사 과정에서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있고, 반대로 초기 사본에서 삭제되었을 가능성을 옹호하는 해석도 있어 오래된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칼을 든 제자와 다친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
유다는 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넘겼을까
그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보아라, 무리가 왔다. 그리고 열둘 가운데 하나이며 유다라 불리는 이가 그 무리보다 앞서 오고 있었다. 그는 예수에게 입을 맞추려고 다가섰다.누가복음 22:47 · 본디새김
처음에는 지도자들과 은밀하게 거래하던 유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독자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데도 누가는 그가 「열둘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 말합니다. 이 배반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 안에서 일어났는지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입맞춤은 당시 친밀함이나 존경을 표현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을 넘기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유다야,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넘기느냐?」누가복음 22:4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가 왜 다가오는지 아시면서도 유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것은 배반자를 꾸짖는 말에 그치지 않고, 친밀함의 표현이 배반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앞서 식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손을 올려놓았던 사람이, 이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넘기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칼을 사용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그의 곁에 있던 이들이 벌어질 일을 보고 말했다. 「주님, 저희가 칼로 쳐도 되겠습니까?」누가복음 22:4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을 붙잡으러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칼로 저항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도 전에 한 사람이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대제사장의 노예를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냈다.누가복음 22:50 · 본디새김
요한복음 18:10은 그를 베드로라고 밝히지만, 누가의 이야기에서는 이름 없는 제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공격한 대상은 대제사장의 노예로, 체포를 계획한 지도자라고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제자는 위협에 칼로 대응하지만, 그 결과는 한 사람의 귀가 잘려 나가는 상처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말했다. 「이만 그쳐라.」 그리고 그 귀에 손을 대어 그를 낫게 했다.누가복음 22:51 · 본디새김
「이만 그쳐라」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로도,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하신 말로도 읽힐 수 있지만, 바로 다음 행동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귀에 손을 대어 그를 낫게 하십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도 귀가 잘리는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만, 잘린 귀를 고쳐 주시는 장면은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제자는 칼을 휘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어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붙잡으러 온 무리 가운데 상처 입은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이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지키려고 칼을 사용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칼에 상처 입은 사람을 회복시키십니다.
이 장면을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에서 모든 종류의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일반 법칙을 선언하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문제는 이 본문을 넘어서는 윤리적·신학적 논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신 일은,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누군가에게 가해진 상처를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가 보여 주는 예수님의 마지막 치유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자신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이때는 너희의 때이고 어둠의 권세다」
예수가 자기를 붙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강도를 잡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느냐?」누가복음 22:52 · 본디새김
그들은 무장하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을 생각이었다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밤에 무장한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었는데 너희는 나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는 너희의 때이고 어둠의 권세다.」누가복음 22:5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붙잡을 수 있는 때가 왔다고 인정하시면서도, 그때를 「어둠의 권세」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들이 법적·종교적 권위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장의 처음에 사탄이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어둠의 세력과 관련되어 묘사된다고 해서 그들의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도, 지도자들에게도 그들의 행동이 무엇인지 직접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너희의 때」는 제한된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영원한 권세를 가졌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권위를 최종적으로 없애는 일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장의 마지막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멀찍이 따라간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바라보십니다
베드로는 도망하지 않았지만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붙잡아 끌고 가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다.누가복음 22:54 · 본디새김
베드로는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합니다. 「멀찍이」는 실제 거리를 말하면서, 이 장면에서는 베드로가 처한 상황을 보여 주는 말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감옥으로도 죽음으로도 가겠다고 말했던 그가, 지금 예수님과 함께 붙잡혀 가지 않습니다.
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붙잡혀 안으로 끌려가셨고, 사람들은 뜰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앉아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앉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 드러날 수 있는 위험한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세 번의 질문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어떤 여종이 불빛 곁에 앉은 그를 보고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누가복음 22:56 · 본디새김
그는 부인하며 말했다. 「여자여,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누가복음 22:57 · 본디새김
첫 번째 부인은 예수님과의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던 베드로가, 이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조금 뒤에 다른 이가 그를 보고 말했다. 「너도 그들 가운데 하나다.」 베드로가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다.」누가복음 22:58 · 본디새김
이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속한 사람인지가 문제입니다. 첫 번째 부인이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면, 두 번째 부인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이가 힘주어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니까.」누가복음 22:59 · 본디새김
이번에는 베드로의 출신 지역이 근거로 제시되어 의심을 강화합니다.
베드로가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지 않다.」 그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곧 닭이 울었다.누가복음 22:60 · 본디새김
누가는 베드로가 말을 마친 뒤가 아니라,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닭이 울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단순히 비겁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데서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이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이 자기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하고 이른 그 말이 생각났다.누가복음 22:61 · 본디새김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사이에 예수님의 시선을 넣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보실 수 있는 위치에 계셨는지는 기록되지 않지만, 그 시선을 받은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을까요? 실망이었을까요? 슬픔이었을까요? 책망이었을까요? 아니면 연민이었을까요?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여 노려보셨다거나, 부드럽게 용서의 눈길을 보내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는 그 시선을 해석하는 대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독자는 식탁에서 하신 또 하나의 말씀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기에 앞서,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베드로의 실패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고, 그가 돌이킬 때를 위해 기도하셨던 실패를 보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 몹시 웁니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누가복음 22:62 · 본디새김
누가는 베드로가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고도, 예수님께 돌아가 용서를 구했다고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의 눈물이 예수님의 시선과 말씀에서 시작되었음을 압니다. 그가 부인한 것은 한 선생님과 알고 지낸 사실이 아니라, 믿고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주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그러나 그의 울음은 죄책감의 마지막 장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돌이킨 뒤에 형제들을 굳세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뜰 밖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떠나지 못하십니다.
눈을 가린 사람들은 누구이며, 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언으로 알아맞혀 보아라」
예수님을 붙들고 있던 남자들이 예수님을 때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가리고 물으며 말했다. 「예언으로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이가 누구냐?」누가복음 22:64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그런데 독자는 바로 앞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이루어진 직후, 사람들은 예언 능력이 있다면 보여 보라고 조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고난을 겪으실지, 유다가 자신을 넘길 것과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때리는 사람들에게 예언이란 눈을 가린 채 누가 때렸는지 맞히는 능력 정도로 여겨집니다. 누가가 보여 준 예수님의 예언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지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직접 설명한 상징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예수님의 시선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대조는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선을 받고 자신이 한 일을 깨달았지만, 예수님을 때리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이 조롱에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맞고 모욕당하십니다.
그리고 날이 밝습니다.
「너희는 내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 예수님께서는 누구신가
공회는 예수님께 대답을 요구합니다
날이 밝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님을 공회 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들이 말했다.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말하시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해도 너희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2:67 · 본디새김
「그리고 내가 물어도 너희는 결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2:68 · 본디새김
이 말씀을 들으면 누가복음 20장의 성전 논쟁이 떠오릅니다. 그때 지도자들은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지 물었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되물으시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권위를 설명하라고 요구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심문받는 사람의 불평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그들의 태도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한 설명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의 진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자신에 관해 결정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러나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에 앉아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2:69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 22장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공회 앞에 서 계십니다. 자유롭게 움직이실 수 없고, 이미 밤새 모욕과 폭력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에 앉으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시편 110:1과 다니엘 7:13–14의 이미지가 함께 나타나고, 예수님께서는 두 이미지가 가리키는 권위를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인간 왕의 오른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을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심문하는 공회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입니다. 그리고 그 선언은 멀리 떨어진 미래만이 아니라 「이제부터」로 시작됩니다. 이 말이 정확히 어떤 순간을 가리키는지, 높아지심의 시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논의할 수 있지만, 누가의 이야기 안에서는 분명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때는 너희의 때이고 어둠의 권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53). 이제 공회 앞에서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에 앉으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피고의 자리에 세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 권세를 받으실 사람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오?」
모두 말했다. 「그러면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누가복음 22:70 · 본디새김
이 대답은 번역과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휘메이스 레게테 호티 에고 에이미는 직역하면 「너희가 내가 그라고 말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어떤 번역은 이를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표현으로 이해하고, 다른 해석은 상대방의 표현을 그대로 되돌려 주면서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의 칭호를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으시는 대답으로 읽습니다. 두 읽기 모두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에 앉으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70절의 대답만 따로 떼어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전혀 밝히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심문자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입니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가 증언을 더 가질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그의 입에서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2:71 · 본디새김
이것이 누가복음 22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들은 충분한 말을 들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을 고발할 근거로 삼겠다는 태도입니다. 직접 들었다는 사실과 그 말씀의 진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유다는 예수님을 넘겼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밤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언 능력을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근거를 찾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0:1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시인이 「내 주」라고 부르는 이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0:42–44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되는지 물으셨습니다. 다니엘 7:13–14에서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환상을 봅니다. 두 본문은 동일한 장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시편 110편은 하나님 오른쪽에 앉는 왕의 권위를 말하고, 다니엘 7장은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를 받는 사람의 아들 같은 존재를 보여 줍니다.
그 밤에 예수님께서 지키신 것
그 밤에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의 행동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예수님께서 지키신 것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자신을 넘길 것도,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도 알고 계셨지만, 제자들과 식사하기를 간절히 바라셨고, 자신의 몸과 피가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투는 제자들 가운데 섬기는 이로 계셨고, 베드로가 실패하기 전에 그를 위해 기도하셨으며, 자신을 붙잡으러 온 무리 가운데 상처 입은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자신이 어떤 분으로 살아가실지를 결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사실이 올리브산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기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단순히 당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고,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아버지께 맡기시며, 그 길에서 끝까지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행하십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자신이 얼마나 강하게 결심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생각했고, 그의 결심은 그날 밤의 질문들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결심을 믿음의 마지막 보증으로 삼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모르는 사람이 큰소리로 충성을 약속하는 것보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돌이키는 일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공회의 심문 자리입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붙잡혀 서 계시고, 심문하는 사람들은 이제 충분한 증언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밤새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조롱하고, 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은 공회 앞에서도 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에 앉아 있을 것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