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22–24장 · 죽음과 부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신 왕

누가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 같은 요구를 받으십니다.

지도자들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그리스도, 골라 뽑힌 이라면 자기를 구원해 보라지」 하고 비웃습니다. 병사들은 「네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 하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범죄자 하나도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아라」 하고 모독합니다(23:35, 37, 39). 이들의 요구에는 공통된 생각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면, 정말 왕이라면, 자기 자신부터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로마 병사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 증명하기 위해 어떤 능력도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분이셨을까요?

누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십니다. 자신과 함께 죽어 가는 범죄자에게는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니다.

모두가 예수님께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요구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해 구원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23장의 중심적인 역설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두 통치자 앞에 서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께서는 처형당하시고, 실제로 폭동과 살인을 저지른 바라바는 풀려납니다.

그 뒤에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는 여인들, 억울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범죄자, 죽음을 지켜본 백부장, 예수님의 몸을 거두어 무덤에 모시는 공회 의원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길게 묘사하는 대신, 그 죽음 앞에서 사람들의 진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으로 남아 계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35분소단락 923장 본문 읽기 →

죄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을까

누가복음 23:1–12 본문 →

종교적 심문이 정치적 고발로 바뀌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으로 끌려가십니다.

앞 장에서 공회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질문에 답하신 것을 듣고 더 이상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로마 총독에게 가져가는 고발의 내용은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하기 시작하며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 민족을 그릇된 길로 이끌고 카이사르에게 세금 내는 것을 막으며 자기가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말하는 것을 찾아냈습니다.」누가복음 23:2 · 본디새김

이 고발은 로마 총독의 관심을 끌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중요한 문제는 유대교 내부의 종교적 논쟁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로마의 지배를 위협하는 정치적 선동가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세금 거부와 왕권 주장은 바로 그 문제를 건드립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 고발 가운데 적어도 하나가 거짓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세금 문제에 관해 질문받으셨을 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주어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꼬투리를 잡지 못했습니다(20:25). 적어도 누가의 이야기 안에서, 고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몰라서 잘못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듣고도 문제 삼지 못했던 말을 정치적 혐의로 바꾸어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누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어떤 죄목으로 처형할 수 있는가입니다.

「네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가 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누가복음 23:3 · 본디새김

빌라도는 고발의 세 항목 가운데 왕권 주장에 초점을 맞춥니다. 당시 유대 지역에서 왕권의 정당성은 로마의 지배 체제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한 부정도, 명백하고 무조건적인 긍정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왕권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왕이 아니시지만, 자신의 왕권을 완전히 부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찬양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찬양을 막으라는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19:38).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뒤 선언합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유죄 사유도 찾지 못하겠다.」누가복음 23:4 · 본디새김

그러나 고발하는 사람들은 더욱 강하게 우기며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 전역에서 백성을 부추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갈릴리」라는 지명이 새로운 장면을 열어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네가 그렇게 말한다」의 그리스어 쉬 레게이스는 상대방이 한 말을 되돌려 주는 표현입니다. 긍정적인 대답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고, 질문자가 이해하는 「왕」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대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헤롯은 무엇을 보았을까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출신이시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냅니다.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통치자입니다(누가복음 3:19–20; 9:9). 누가복음 9:9에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보고 싶어 했던 그의 바람이 이제 이루어집니다.

헤롯은 예수를 보고 몹시 기뻐했다. 그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터라 오래전부터 그를 보고 싶어 했고, 예수가 하는 표징을 하나 보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3:8 · 본디새김

체포되어 심문받는 사람 앞에서 헤롯은 몹시 기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어 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돌아보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실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이십니다.

헤롯은 그에게 이런저런 말로 거듭 물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누가복음 23:9 · 본디새김

빌라도 앞에서 짧게 대답하셨던 예수님께서 헤롯 앞에서는 침묵하십니다. 왜 침묵하셨는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으며, 헤롯의 모든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이었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헤롯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전시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병든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데 쓰인 그 능력을, 헤롯은 보고 즐길 표징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자 헤롯과 병사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예수님의 참된 왕권은 인정하지 않고, 왕처럼 꾸며 웃음거리로 만든 것입니다. 다만 누가는 그 옷의 색깔이나 구체적인 형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전에는 서로 미워하는 사이였던 헤롯과 빌라도가 바로 그날 서로 친구가 되었다.누가복음 23:12 · 본디새김

두 사람의 관계가 왜 나빴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두 통치자가 예수님의 사건을 계기로 가까워집니다. 이것을 그들의 회개나 진정한 화해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한쪽은 예수님을 심문하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을 조롱했을 뿐입니다.

두 통치자가 서로 친구가 되는 날, 그들 앞에 서 계시던 무죄한 사람은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하십니다.

그들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해서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바로 다음 재판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무죄하다는 판결을 들은 사람이 죽고, 살인자가 풀려나다

누가복음 23:13–25 본문 →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다시 불러 모읍니다.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백성을 잘못된 방향으로 돌아서게 하는 자라며 이 사람을 나에게 데려왔다. 그런데 보아라, 내가 너희 앞에서 따져 물었지만, 너희가 그에게 제기하는 혐의에 관해 이 사람에게서 아무 유죄 사유도 찾지 못했다.」누가복음 23:14 · 본디새김

헤롯 역시 사형에 처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덧붙인 뒤,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징계해 놓아주겠다.」누가복음 23:16 · 본디새김

유죄 사유를 찾지 못했다면 그냥 놓아주면 됩니다. 그런데 왜 징계하려고 할까요? 본문은 빌라도의 내면을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처형하라는 요구와 무죄하시다는 자신의 판단 사이에서 타협하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타협 자체가 정의롭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유죄 사유가 없다면 처벌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고 말하면서도, 그 무죄를 실제로 지켜 주는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바라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자 그들이 모두 함께 소리쳤다. 「이 사람을 없애십시오.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십시오.」누가복음 23:18 · 본디새김
그는 그 도시에서 일어난 어떤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었다.누가복음 23:1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폭동을 일으키셨다는 혐의를 받으셨지만 그 죄가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바라바는 실제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대조는 바라바 개인이 악한 사람이었다는 교훈이 아니라, 재판의 부당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병든 사람을 고치신 분이 정치적인 반란의 주동자로 고발되시고, 실제 폭동과 살인에 연루된 사람은 풀려납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요구하며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누가복음 23:23 · 본디새김

증거가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진실이 밝혀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판결했다.누가복음 23:24 · 본디새김

그러나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방관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서 유죄 사유를 찾지 못했다고 세 번 말한 사람이며,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넘기는 결정을 내린 통치자입니다. 누가는 그의 무죄 판단을 강조하면서도 그가 무죄한 사람을 처형하도록 내어 주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또한 큰 소리로 요구한 무리를 모든 유대인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 특정한 재판 장면에 모인 무리이며, 누가복음 전체에는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많은 유대인도 등장합니다. 이 사건을 유대 민족 전체의 집단적 죄책을 선언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들이 요구한 사람은 풀려나고, 예수님께서는 내맡겨지셨다

그는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 곧 그들이 요구하던 이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예수를 그들의 뜻에 내맡겼다.누가복음 23:25 · 본디새김

바라바는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자유를 얻고, 죄가 없는 사람이 죽음의 자리에 섭니다. 기독교 신학은 여기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예수님께서 법적으로 바라바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고, 두 사람의 처지가 뒤바뀌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 장면을 대속적 죽음의 상징으로 읽는 것은 더 넓은 정경적 연결과 신학적 해석입니다.

누가가 직접 보여 주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한 사람의 무죄를 인정하는 제도가 무죄한 사람을 처형하도록 판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 끌려가시는 길에서 예기치 않은 사람을 만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과 울면서 따라가는 사람들

누가복음 23:26–32 본문 →

구레네 사람 시몬은 왜 십자가를 졌을까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들에서 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 뒤를 따라가게 했다.누가복음 23:26 · 본디새김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오늘날 리비아 지역에 있던 도시로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던 곳입니다. 시몬이 왜 예루살렘에 와 있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는 붙들렸고, 십자가를 지는 일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 뒤를 따라가게 했다」고 씁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고(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4:27). 이제 실제로 십자가를 진 사람이 예수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곧바로 시몬이 믿음으로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시몬의 믿음이나 이후의 삶을 기록하지 않으며, 그가 십자가를 진 것은 로마의 강제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두 장면의 관계는 직접적인 동일시보다는 문학적·주제적 연결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왜 자신을 두고 울지 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무리 가운데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예수님을 두고 곡합니다.

예수가 그들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마라. 도리어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누가복음 23:28 · 본디새김

처음 들으면 차갑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연민을 잘못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난만 바라보지 말고 그들 자신과 자녀들에게 닥칠 고난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은 「시온의 딸」이나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표현으로 도시와 그 주민을 인격화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 도시의 운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19:41–44와 21:20–24에서 예고하신 예루살렘의 포위와 파괴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길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보아라,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과 낳은 적 없는 태와 젖 먹인 적 없는 가슴은 복이 있다』 할 날들이 오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3:29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자녀를 낳는 일은 대체로 하나님의 복과 연결됩니다. 시편 127:3은 자녀를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유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복이라고 여기던 일이 극심한 재난 속에서는 더 큰 슬픔의 이유가 됩니다. 아이를 잃는 부모의 고통, 자녀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의 절망이 이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산들을 향해 『우리 위에 떨어져라』 하고 언덕들을 향해 『우리를 덮어라』 하기 시작할 것이다.」누가복음 23:30 · 본디새김

호세아 10:8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불의를 책망하면서,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산과 언덕에게 자신들을 덮어 달라고 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 절박한 언어를 예루살렘의 미래에 적용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시의 파괴를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을 앞두고도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염려하십니다.

물기 있는 나무와 마른 나무

「그도 그럴 것이, 물기 있는 나무에 이런 일을 한다면 마른 나무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누가복음 23:31 · 본디새김

이 비유는 간결하지만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한 해석은 물기 있는 나무를 죄 없으신 예수님께, 마른 나무를 심판받을 예루살렘에 대응시킵니다. 쉽게 타지 않는 나무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마르고 불타기 쉬운 나무에는 얼마나 더 큰 일이 벌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두 나무를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 대응시킵니다. 비교적 평온한 지금도 이런 폭력이 일어난다면, 전쟁과 파괴가 닥칠 때에는 얼마나 심각한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뜻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에 근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 자신의 처형을 예루살렘에 닥칠 더 큰 재난에 대한 경고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억울하게 죽임당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이 겪을 재난을 바라보십니다.

그 밖에 범죄자 둘도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하러 끌려가고 있었다.누가복음 23:32 · 본디새김

앞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는 이사야 53:12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22:37). 이제 그 말씀이 구체적인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실제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곧 십자가 위의 대화에서 다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20:47에는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가 함께 불타는 심판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본문을 연상시킬 가능성도 있지만, 누가가 이를 직접 인용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왕에게 사람들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누가복음 23:33–39 본문 →

해골이라 불리는 곳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 이르자 거기서 그와 범죄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한 사람은 예수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왼쪽에.누가복음 23:33 · 본디새김

누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을 짧게 기록합니다. 누가 못을 박았는지, 몸에 어떤 상처가 생겼는지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형은 반역자와 노예, 중대한 범죄자에게 적용되던 잔혹하고 공개적인 처형이었고, 육체적 고통과 함께 극심한 수치를 겪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첫 독자들은 그것을 알았을 것이고, 누가의 관심은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범죄자들 사이에 놓인 또 하나의 범죄자이십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를 찾지 못했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첫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가 말했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옷을 나누며 제비를 뽑았다.누가복음 23:34 · 본디새김

이 기도는 일부 중요한 고대 사본에 없어 본래 누가가 기록한 말씀인지 논쟁이 있습니다. 실린 형태에서 이 기도는 십자가형의 시작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문맥에는 예수님을 못 박고 옷을 나누는 로마 병사들이 있지만, 고발한 지도자들과 처형을 요구한 사람들까지 포함한다고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누가는 대상을 한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넘겨주었고, 지도자들은 고발했으며, 병사들은 실제로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지는 그들이 자신들이 처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17에서 베드로도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하지만, 곧이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선포합니다(사도행전 3: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죄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6:27–28)을 가장 극단적인 자리에서 직접 행하십니다. 다만 본문은 이 청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따로 서술하지 않으므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죄가 그 순간 자동으로 용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셨는지는 분명합니다. 보복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기도는 파피루스 75번과 바티칸 사본 등에는 빠져 있지만, 다른 사본들과 고대 전승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견해와 포함된 형태가 원래 본문일 가능성을 옹호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옷을 나누는 사람들과 바라보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며 제비를 뽑습니다. 이 장면은 시편 22:18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22편은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는 사람의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누가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연결은 뚜렷합니다.

예수님의 옷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에서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누가는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을 차례로 보여 줍니다.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지도자들은 비웃고, 병사들은 조롱하고, 마지막에는 함께 매달린 범죄자까지 모독합니다. 그 조롱에는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지도자들도 비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다른 이들은 구원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그리스도, 골라 뽑힌 이라면 자기를 구원해 보라지.」누가복음 23:35 · 본디새김

「이 사람이 다른 이들은 구원했다.」 그들은 비웃기 위해 이 말을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읽어 온 독자는 그것이 사실임을 압니다. 병든 사람들이 고침받았고, 죄인들이 용서받았고, 잃어버린 사람들이 찾아졌습니다. 지도자들은 바로 그 사실을 조롱의 재료로 삼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라는 기준이 드러납니다.

말했다. 「네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누가복음 23:37 · 본디새김
그의 위에는 새겨진 글도 있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누가복음 23:38 · 본디새김

처형자의 죄목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은 통치 권력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방식이 될 수 있었고, 이 글도 예수님의 왕권 주장을 조롱하는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독자에게 그 글은 반어적으로 읽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왕이십니다. 다만 그 왕권은 병사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매달린 범죄자 가운데 하나가 그를 모독하며 말했다. 「너는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아라.」누가복음 23:39 · 본디새김

이번에는 「우리를」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죽음을 피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죽음을 피할 능력과 연결합니다. 그리스도라면 십자가를 벗어나야 하고, 구원자라면 우선 눈앞의 죽음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해 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세 차례의 조롱은 모두 이 생각을 공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예수님께 자신을 구하실 능력이 없으셨기 때문이라고 읽으면 누가복음이 지금까지 보여 준 예수님의 권위와 충돌합니다. 반대로 언제든 내려오실 수 있으셨다는 사실을 이 장에서 직접 증명하려 해도 본문을 넘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왕권을 증명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시는 길을 이미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에서, 자신과 함께 죽어 가는 또 한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한 사람이 왕을 알아보다

누가복음 23:40–43 본문 →

두 범죄자가 같은 예수님을 보고 다른 대답을 하다

다른 하나가 대답하여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너는 같은 유죄 판결 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느냐?」누가복음 23:40 · 본디새김
「그리고 우리야 마땅히 벌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한 일에 걸맞은 것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잘못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다.」누가복음 23:41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 판결이 자신이 한 일에 걸맞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로마의 십자가형이라는 형벌 자체가 정당하다는 일반적인 선언이 아니라, 이 범죄자가 자신의 잘못과 처벌에 대해 내리는 판단입니다.

빌라도도, 헤롯도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십자가 위의 범죄자가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로 들어오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누가복음 23:42 · 본디새김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지 않게 해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그가 바라보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고, 머리 위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은 처형의 죄목으로 내걸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야 왕이심을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께 왕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눈에 보이는 승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미래를 신뢰합니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시편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가 여러 번 나옵니다. 시편 25:7은 젊은 날의 죄와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인자하심에 따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 시편 106:4는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 가운데 자신을 기억하시고 구원으로 찾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들에서 「기억하다」는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말입니다.

범죄자는 자신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범죄자보다 나은 사람임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그가 부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말뿐입니다. 그의 믿음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신뢰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요청을 훨씬 넘어섭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 · 본디새김

범죄자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범죄자는 예수님께서 장차 나라에 들어오실 때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을 「내가 너에게 말한다」에 붙여 읽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일반적인 번역처럼 낙원에 있을 시점과 연결하는 읽기가 더 개연성이 높습니다. 「낙원」은 동산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으며, 그리스어 구약에서는 에덴동산을 묘사하는 데도 쓰입니다(신약의 고린도후서 12:4; 요한계시록 2:7). 예수님께서는 낙원의 위치나 죽음 이후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지 않으시므로, 이 한 구절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약속의 중심은 「나와 함께」입니다. 범죄자가 기대한 것은 왕이 자신을 잊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왕과 함께 있는 삶에 관한 약속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원문에는 오늘날 같은 문장 부호가 없었으므로, 「오늘」에 해당하는 세메론을 앞에 연결하여 「오늘 내가 너에게 말한다」라고 읽을 가능성이 문법적으로 열려 있습니다. 이 경우 말씀하시는 날이 강조되고 낙원에 있게 될 시점은 따로 명시되지 않습니다. 뒤에 연결하면 약속은 바로 그날의 일이 됩니다. 번역을 따르되, 다른 읽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원문의 여지를 인정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고 계신가

지도자들도, 병사들도, 첫 번째 범죄자도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의 요구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신을 신뢰하며 기억해 달라고 구하는 범죄자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범죄자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음이 마지막 말이 되지 않는 약속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 가시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시는 왕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마지막 순간에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일반적인 공식으로만 바꾸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범죄자가 어떤 조건을 충족했는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한 사람에게 자신의 나라와 생명을 약속하실 권위를 가지셨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왕이 아니시라는 증거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왕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어둠이 내리고 휘장이 찢어지다

누가복음 23:44–46 본문 →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세상이 어두워지다

이미 여섯째 시쯤이었고 온 땅에 어둠이 내려 아홉째 시까지 계속되었다.누가복음 23:44 · 본디새김

한낮에 어둠이 내립니다.

누가는 그 원인이나 범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독자에게 한낮의 어둠은 예언자들의 심판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한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던 세상에 어둠이 내립니다.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하지만, 어둠은 이 죽음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낮 시간 계산으로 여섯째 시는 대략 정오, 아홉째 시는 오후 세 시 무렵입니다. 누가가 어떤 자연 현상이었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이 본문을 특정한 일식이나 천문 현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10:21–23에서 이집트에 임한 짙은 어둠은 여호와야훼의 심판 가운데 나타난 재앙이었습니다. 아모스 8:9는 대낮에 해를 지게 하고 땅을 어둡게 하시겠다고 선언하며, 다음 절에서 그날이 외아들을 잃은 슬픔과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예언의 본래 문맥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한 심판입니다(아모스 8:4–6). 누가복음 23장이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왜 찢어졌을까

해가 빛을 잃었고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로 찢어졌다.누가복음 23:45 · 본디새김

성막의 휘장은 거룩한 곳과 지성소를 구분했습니다(출애굽기 26:31–33).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생각하던 성전의 한가운데에 파열이 생깁니다.

이 사건은 성전에 대한 심판의 표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사건으로, 슬픔과 애도의 이미지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누가가 휘장이 찢어지는 일을 예수님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다음 휘장이 찢어지지만(마가복음 15:37–38; 마태복음 27:50–51), 누가복음에서는 휘장이 먼저 찢어지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는 죽음을 성전의 변화와 연결하면서도 마지막 장면의 중심을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 두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땅이 어두워집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 시대 성전에는 여러 공간과 휘장이 있었고 누가는 어느 휘장인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지성소 앞의 특정한 휘장이었다고 단정할 때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심판의 표징으로 읽으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고와 이어져 성전 중심의 기존 질서에 닥칠 중대한 변화를 나타냅니다. 길이 열리는 사건으로 읽을 때는 예수님의 피와 몸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휘장의 이미지를 쓰는 히브리서 10:19–20이 의미 있는 정경적 연결이 됩니다. 다만 누가는 이 자리에서 그렇게 직접 해설하지 않습니다. 애도의 이미지로 읽는 쪽은 성경에서 옷을 찢는 행동이 깊은 슬픔을 나타낸다는 데 근거하며, 휘장의 파열을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싼 우주적·종교적 충격의 일부로 봅니다. 마지막 장면의 배열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에 관해서도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예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이 말을 하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누가복음 23:4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31:5의 기도입니다. 원수들에게 위협받고 버림받는 듯한 고통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을 여호와야훼의 손에 맡기며 신뢰를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기도를 마지막 말씀으로 드리십니다.

마가복음 15:34와 마태복음 27:46에는 시편 22:1을 인용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가 기록되지만, 누가는 시편 31편의 기도를 전합니다. 이 차이를 어느 복음서가 고통을 더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식으로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신뢰입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을 옮겨 달라고 하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순간에는 잔을 옮겨 달라고 청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운명을 로마 병사들의 손에도,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의 손에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은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고, 실제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이 뒤따르고, 그 반응은 뜻밖에도 로마 군인에게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본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누가복음 23:47–49 본문 →

백부장은 무엇을 보았을까

백부장은 이 일을 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의로웠다.」누가복음 23:47 · 본디새김

백부장은 로마군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교였고, 예수님의 처형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질서에 위협이 되는 왕으로 고발되셨고, 총독은 죄를 찾지 못하면서도 처형을 허락했으며, 로마 병사들은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로마군의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의로우셨다고 선언합니다.

마가복음 15:39에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의로웠다」고 말합니다.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결백하다는 뜻도 담을 수 있어,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무죄한 사람이셨다는 인정으로, 빌라도와 두 번째 범죄자의 선언에 이어지는 흐름을 완성하는 증언입니다. 다른 하나는 법적 결백을 넘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분이셨다는 고백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말로 보는 읽기입니다. 강조점은 다르지만, 백부장의 선언이 이 장의 흐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7:16) 눈먼 사람을 다시 보게 하셨을 때(18:43)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누가는 그가 부활을 믿게 되었다거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형을 집행하는 로마 권력의 현장에 있던 사람이,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의로움을 인정합니다.

백성은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이 광경을 구경하러 함께 모여든 모든 무리는 벌어진 일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누가복음 23:48 · 본디새김

구경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돌아갈 때에는 가슴을 칩니다. 이 행동은 슬픔이나 비통함, 때로는 회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3의 세리도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모두 회개했다거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백부장도, 무리도, 예수님을 알던 이들도 이 일을 「보고」 있습니다. 같은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그들이 보는 것의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멀찍이 서 있는 사람들

그와 알고 지내던 이들은 모두 멀찍이 서 있었다. 갈릴리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여자들도 그곳에 서서 이 일을 보고 있었다.누가복음 23:49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베드로도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22:54). 이들이 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두려웠을 수도 있고, 처형 장소에 접근하는 것이 제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는 오히려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특히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을 언급합니다. 누가복음 8:1–3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던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23장만으로 그들이 모두 같은 인물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왔다는 설명은 그들의 오랜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놓이는지를 살펴보는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회 의원 요셉은 왜 예수님의 몸을 거두었는가

누가복음 23:50–56 본문 →

모두가 예수님을 죽이는 데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보아라,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회 의원이었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누가복음 23:50 · 본디새김
이 사람은 그들의 결정과 행위에 뜻을 함께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 사람들의 도시인 아리마대 출신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누가복음 23:51 · 본디새김

공회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공회 의원 모두가 그 결정에 찬성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공회에 속해 있었지만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는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장에서 종교 지도자들에 관한 판단을 더욱 신중하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본문은 그가 예수님과 그 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부활을 예상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분명합니다.

죽은 사람의 몸을 거두는 일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다가가 예수의 몸을 달라고 청했다.누가복음 23:52 · 본디새김

처형자의 몸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로마 당국의 권한과 관련될 수 있었으므로, 요셉이 빌라도에게 직접 청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지, 빌라도가 왜 허락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까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려 아마포로 감싸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두었다. 그 무덤에는 아직 아무도 누운 적이 없었다.누가복음 23:53 · 본디새김

아직 아무도 누운 적이 없는 무덤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놓였는지를 분명하게 해 주며, 뒤이어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해집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는 데 공회의 권위가 사용되었지만, 예수님의 몸을 정중하게 거둔 사람도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그의 직함에서 자동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그가 무엇에 동의하지 않았고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합니다.

여자들은 무덤을 눈여겨보았다

갈릴리에서부터 그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따라가서 무덤을 살펴보고 그의 몸이 어떻게 놓였는지 눈여겨보았다.누가복음 23:55 · 본디새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여자들은 무덤까지 따라가 예수님의 몸이 어떻게 놓였는지 눈여겨봅니다. 그들이 무덤 내부를 얼마나 자세히 볼 수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누가는 그들이 시신의 안치 장소를 확인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슬픔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몸을 돌볼 준비를 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안식일이 시작되고 있었다.누가복음 23:54 · 본디새김

「준비일」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하루가 저녁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안식일이 다가온다는 것은 해가 지기 전까지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했다. 안식일에는 계명대로 쉬었다.누가복음 23:56 · 본디새김

이 기록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돌보는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한 까닭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졌을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안식일을 지켰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어떤 마음으로 보냈는지,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으므로, 그들이 부활을 기다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들이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무덤에 놓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23장이 보여 주는 구원의 역설

누가복음 23:1–56 본문 →

누가복음 23장은 예수님의 정체를 둘러싼 판단들로 가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위험한 인물로, 어떤 사람들은 조롱할 대상으로 봅니다. 그러나 범죄자와 백부장은 예수님의 무죄와 의로움을 알아보고, 요셉은 예수님의 몸을 거둡니다.

그런데 누가가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했는가보다, 그 모든 판단 속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자신과 함께 죽어 가는 범죄자에게는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마지막 말씀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와 다른 사람을 향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시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지신 권위를 자신의 고통을 제거하는 데 쓰지 않으시고, 자신을 신뢰하는 한 사람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시는 데 쓰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지키지 못했고, 요셉은 공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을 빌라도처럼 하지 말고 요셉처럼 하라는 교훈으로 끝내면 이야기를 사람들의 도덕적 성공과 실패에 관한 기록으로 축소합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여전히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장의 마지막을 십자가 위의 영광스러운 선언으로 장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은 무덤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아마포로 감싸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둡니다. 여자들은 뒤따라가서 예수님의 몸이 어떻게 놓였는지 눈여겨보고,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합니다. 할 일이 남아 있지만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십자가 곁에서 들렸던 조롱도, 사람들이 외쳤던 고함도, 백부장의 선언도 이제 들리지 않습니다. 무덤에는 예수님의 몸이 놓여 있고, 여자들은 계명대로 쉽니다.

누가복음 23장은 그렇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조용한 쉼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