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22–24장 · 죽음과 부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신 왕

누가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 같은 요구를 받으십니다.

지도자들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그리스도, 곧 선택받은 사람이라면 자기를 구원해 보라지」라고 비웃습니다. 병사들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범죄자 하나도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아라」라고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이들의 요구에는 공통된 생각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면, 정말 왕이라면, 자기 자신부터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로마 병사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 증명하기 위해 어떤 능력도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분이셨을까요?

누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십니다. 자신과 함께 죽어 가는 범죄자에게는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니다.

모두가 예수님께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요구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해 구원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23장의 중심적인 역설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두 통치자 앞에 서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지만, 결국 예수님께서는 처형당하시고 실제로 폭동과 살인을 저지른 바라바는 풀려납니다.

그 뒤에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는 여자들, 억울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범죄자, 죽음을 지켜본 백부장,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무덤에 모시는 의회 의원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같은 사건을 보지만 서로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길게 묘사하는 대신, 그 죽음 앞에서 사람들의 진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죽음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으로 남아 계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38분소단락 923장 본문 읽기 →

죄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을까

누가복음 23:1–12 본문 →

종교적 심문이 정치적 고발로 바뀌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으로 끌려가십니다.

앞 장에서 의회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질문에 답하신 것을 듣고 더 이상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로마 총독에게 가져가는 고발의 내용은 달라집니다.

그들은 예수를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이 사람이 우리 민족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하며, 자기가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누가복음 23:2 · 두루새김

민족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것,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막았다는 것,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발은 로마 총독의 관심을 끌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중요한 문제는 유대교 내부의 종교적 논쟁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로마의 지배를 위협하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분이신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 고발 가운데 적어도 하나가 거짓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세금 문제에 관해 질문받으셨을 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25).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누가의 이야기 안에서, 고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도 문제 삼지 못했던 말을 정치적 혐의로 바꾸어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누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어떤 죄목으로 처형할 수 있는가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누가복음 23:3 · 두루새김

빌라도는 고발의 세 항목 가운데 왕이라는 주장에 초점을 맞춥니다. 당시 유대 지역에서 누가 정당한 왕인가 하는 문제는 로마의 지배 체제와 떼어 놓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네가 그렇게 말한다」(쉬 레게이스)는 상대방이 한 말을 되돌려 주는 표현입니다. 긍정적인 대답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고, 질문자가 이해하는 「왕」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대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왕권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왕이 아니십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왕권을 완전히 부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찬양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찬양을 막으라는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19:38).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뒤 선언합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다.」누가복음 23:4 · 두루새김

정치적인 반역 혐의로 고발당하셨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 전역에서 백성을 선동하셨다고 더욱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언급한 「갈릴리」라는 지명이 새로운 장면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헤롯은 무엇을 보았을까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이시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냅니다. 이 헤롯은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로,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통치자입니다(3:19–20; 9:9).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는데(9:9), 이제 그 바람이 이루어집니다.

헤롯은 예수를 보고 몹시 기뻐했습니다.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만나 보고 싶어 했고, 예수께서 표징을 행하시는 것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23: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붙잡혀 심문받는 사람으로 그의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헤롯은 몹시 기뻐합니다. 표징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어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을 돌아보거나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생각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헤롯에게 예수님께서는 호기심을 채워 주실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이십니다.

헤롯은 여러 가지로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누가복음 23:9 · 두루새김

이 침묵은 빌라도 앞에서 짧게 대답하셨던 모습과 다릅니다. 왜 침묵하셨는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헤롯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병든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헤롯은 그 능력을 자신이 보고 즐길 수 있는 표징으로 기대합니다.

그러자 헤롯과 병사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예수님을 왕처럼 꾸며 웃음거리로 만드는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전에는 서로 적대하던 사이였지만, 바로 그날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누가복음 23:12 · 두루새김

누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왜 나빴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반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두 통치자가 예수님의 사건을 계기로 서로 가까워집니다. 이것을 그들의 회개나 진정한 화해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한쪽은 예수님을 심문하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을 조롱했을 뿐입니다.

두 통치자가 서로 친구가 되는 날, 그들 앞에 서 계시던 죄 없는 사람은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하십니다.

그들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해서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바로 다음 재판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무죄하다는 판결을 들은 사람이 죽고, 살인자가 풀려나다

누가복음 23:13–25 본문 →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다시 불러 모읍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 사람이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며 나에게 데려왔다. 그러나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해 보니, 너희가 고발한 죄를 이 사람에게서 하나도 찾지 못했다.」누가복음 23:14 · 두루새김

헤롯 역시 사형에 처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덧붙인 뒤,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매질한 뒤에 놓아주겠다.」누가복음 23:16 · 두루새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면 그냥 놓아주면 됩니다. 그런데 왜 매질하려고 할까요?

본문은 빌라도의 속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예수님을 처형하라는 요구와 죄가 없으시다는 자신의 판단 사이에서 타협하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지는 않되 벌은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다면 벌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고 말하면서도, 그 무죄를 실제로 지켜 주는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바라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이 사람을 없애 버리십시오! 바라바를 놓아주십시오!」 하고 소리칩니다. 누가는 바라바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라바는 그 도시에서 일어난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1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폭동을 일으키셨다는 혐의를 받으시지만 그 죄가 증명되지 않습니다. 반면 바라바는 실제 폭동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병든 사람을 고치셨지만 정치적인 반란을 이끈 사람으로 고발되시고, 실제 폭동과 살인에 연루된 사람은 풀려납니다. 누가는 이 대조로 바라바 개인의 악함보다 재판의 부당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며 밀어붙였습니다. 그들의 외침이 끝내 이겼습니다.누가복음 23:23 · 두루새김

증거가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진실이 밝혀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외침이 끝내 이겼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세 번째로 말했지만, 결국 큰 소리로 밀어붙이는 요구를 들어주기로 판결합니다.

여기서 빌라도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방관자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여러 번 말하고도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넘기는 결정을 내린 통치자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큰 소리로 요구한 무리를 모든 유대인과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 특정한 재판 장면에 모인 무리이며, 누가복음 전체에는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많은 유대인도 등장합니다. 이 사건을 유대 민족 전체가 함께 죄를 지었다고 선언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들이 요구한 사람은 풀려나고, 예수님께서는 내맡겨지셨다

그는 사람들이 놓아 달라고 요구한 사람, 곧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라바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들의 뜻대로 하도록 넘겨주었습니다.누가복음 23:25 · 두루새김

폭동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놓아줍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넘겨줍니다.

기독교 신학은 여기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예수님께서 법적으로 바라바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고, 두 사람의 처지가 뒤바뀌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 장면을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일의 상징으로 읽는 것은 성경 전체를 더 넓게 연결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누가가 직접 보여 주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한 사람의 무죄를 인정한 제도가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하도록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당한 판결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를 향해 끌려가시고, 그 길에서 예기치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과 울면서 따라가는 사람들

누가복음 23:26–32 본문 →

구레네 사람 시몬은 왜 십자가를 졌을까

예수를 끌고 가던 사람들은 시골에서 오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했습니다.누가복음 23:26 · 두루새김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오늘날 리비아 지역에 있던 도시로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던 곳입니다. 시몬이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에 와 있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가 「시골에서 오던」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는 붙잡혔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했습니다」라고 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고(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4:27).

이제 실제로 십자가를 진 사람이 예수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누가는 시몬의 믿음이나 이후의 삶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진 것은 로마가 강제로 시킨 일이었으므로, 이 장면을 곧바로 시몬이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바꾸기보다 이야기의 표현과 주제가 서로 연결된다고 이해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누가는 시몬에 대한 설명을 더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왜 자신을 두고 울지 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무리 가운데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예수님을 위해 슬피 웁니다.

예수께서 여자들을 향해 돌아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마라.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누가복음 23:28 · 두루새김

처음 들으면 차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들 자신과 자녀들에게 닥칠 고난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구약 예언자들이 도시와 그 주민을 한 사람처럼 부르던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 도시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닥칠 포위와 파괴를 예고하셨습니다(19:41–44; 21:20–24).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길에서도 그 경고가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 아이를 낳아 본 적 없는 여자들, 젖을 먹여 본 적 없는 여자들은 복이 있다』라고 말할 날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3:29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자녀를 낳는 일은 대체로 하나님의 복과 연결됩니다. 시편 127:3은 자녀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복이라고 여기던 일이 극심한 재난 속에서는 더 큰 슬픔의 이유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를 잃는 부모의 고통, 자녀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의 절망이 이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산들을 향해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라고 하고, 언덕들을 향해 『우리를 덮어라』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누가복음 23:30 · 두루새김

호세아 10:8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불의를 꾸짖으면서,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산과 언덕에게 자신들을 덮어 달라고 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고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박한 바람을 표현하는 그 말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미래에 적용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도시의 파괴를 즐거워하신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고, 지금도 자신의 고통을 앞두고 계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염려하십니다.

물기 있는 나무와 마른 나무

「물기 있는 나무에 이런 일을 한다면, 마른 나무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누가복음 23:31 · 두루새김

물기 있는 나무와 마른 나무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한 해석은 물기 있는 나무를 죄 없으신 예수님께, 마른 나무를 심판받을 예루살렘에 연결합니다. 쉽게 타지 않는 나무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마르고 불타기 쉬운 나무에는 얼마나 더 큰 일이 벌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 연결합니다. 지금처럼 비교적 평온한 때에도 이런 폭력이 일어난다면, 전쟁과 파괴가 닥칠 때에는 얼마나 심각한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뜻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에 근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 자신의 처형을 예루살렘에 닥칠 더 큰 재난에 대한 경고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닥친 폭력의 피해자가 되시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겪을 재난을 바라보십니다.

범죄자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죽임을 당하러 끌려갔습니다.누가복음 23:32 · 두루새김

앞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를 저지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는 이사야 53:12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22:37). 이제 그 말씀이 구체적인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실제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곧 십자가 위의 대화에서 다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의 에스겔 20:47에는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가 함께 불타는 심판의 모습이 나옵니다. 23:31의 말씀이 그 본문을 떠올리게 할 가능성도 있지만, 누가가 이를 직접 인용했다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왕에게 사람들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누가복음 23:33–39 본문 →

해골이라 불리는 곳

해골이라고 불리는 곳에 이르자,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두 범죄자도 예수의 오른쪽과 왼쪽에 한 사람씩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누가복음 23:33 · 두루새김

누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을 아주 짧게 기록합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에서 반역자와 노예, 큰 죄를 지었다고 여겨진 사람들에게 적용되던 잔혹하고 공개적인 처형 방식으로, 몸의 고통뿐 아니라 극심한 수치와 굴욕을 겪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누가의 첫 독자들은 그것을 알았기에 긴 묘사가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의 관심은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쪽에 한 사람, 왼쪽에 한 사람, 두 범죄자 사이에 놓이십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도 벌을 받으셔야 할 범죄자 가운데 하나이십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첫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누가복음 23:34 · 두루새김

이 기도는 일부 고대 사본에는 없지만, 두루새김에 실린 형태에서는 십자가형의 시작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문맥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옷을 나누는 로마 병사들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고발한 지도자들, 처형을 요구한 사람들까지 더 넓게 포함한다고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누가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넘겨주었고, 지도자들은 고발했으며, 병사들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자신들이 처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역사 안에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입니다.

사도행전 3:17에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한 뒤,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선포합니다(사도행전 3:19). 무지는 책임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일을 돌아보고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죄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십니다.

누가복음 6:27–28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그 가르침을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직접 행하십니다. 본문은 이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따로 기록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셨는지는 분명합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용서입니다.

옷을 나누는 사람들과 바라보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집니다. 시편 22:18에서 고난받는 사람은 적들이 자신의 옷을 나누고 제비를 뽑는다고 탄식합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는 사람의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누가는 시편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옷을 나누며 제비를 뽑는 모습은 그 시편과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옷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에서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누가는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을 차례로 보여 줍니다.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지도자들은 비웃고, 병사들은 조롱하고, 마지막에는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범죄자 한 사람까지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그런데 그 조롱에는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들도 예수를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원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그리스도, 곧 선택받은 사람이라면 자기를 구원해 보라지.」누가복음 23:35 · 두루새김

그들은 비웃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구원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읽어 온 독자는 그것이 사실임을 압니다. 병든 사람들이 고침받았고, 죄인들이 용서를 받았고, 잃어버린 사람들이 찾아졌습니다.

지도자들은 바로 그 사실을 조롱의 재료로 사용합니다. 그 말에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라는 그들의 기준이 드러납니다. 병사들도 같은 방식으로 조롱합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누가복음 23:37 · 두루새김
예수의 위에는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글도 붙어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3:38 · 두루새김

처형당하는 사람의 죄목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행위는 통치 권력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방식이 될 수 있었고, 이 글 역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주장을 조롱하는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독자에게 그 글은 반어적으로 읽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왕이십니다.

다만 그 왕권은 병사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십자가에 남아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범죄자 하나가 같은 요구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범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를 모독하며 말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아라.」누가복음 23:39 · 두루새김

이번에는 「우리를」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그도 죽어 가는 사람이고, 죽음을 피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능력과 연결합니다.

그리스도라면 십자가를 벗어나야 합니다.

왕이라면 처형을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자라면 우선 눈앞의 죽음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해 내야 합니다.

세 차례의 조롱은 모두 이 생각을 공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하실 능력이 없으셨기 때문이라고 읽으면 누가복음이 지금까지 보여 준 예수님의 권위와 충돌합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언제든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으셨다는 사실을 이 장에서 직접 증명하려 해도 본문을 넘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왕권을 증명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왕권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시는 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에서, 자신과 함께 죽어 가는 또 한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23:34의 기도는 파피루스 75번과 바티칸 사본 등 일부 중요한 고대 사본에는 빠져 있지만, 다른 사본들과 고대 전승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누가가 기록한 말씀인지, 초기 필사 과정에서 더해졌는지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나중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고, 포함된 형태가 원래 본문일 가능성을 옹호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한 사람이 왕을 알아보다

누가복음 23:40–43 본문 →

두 범죄자가 같은 예수님을 보고 다른 대답을 하다

첫 번째 범죄자가 예수님을 모독하자, 다른 범죄자가 그를 꾸짖습니다.

다른 범죄자가 그를 꾸짖었습니다. 「너도 같은 벌을 받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누가복음 23:40 · 두루새김

그는 예수님께 먼저 말을 걸지 않습니다. 자신과 함께 처형당하는 범죄자를 꾸짖고, 자신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에 맞는 벌을 받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누가복음 23:41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물론 이것은 로마의 십자가형이라는 형벌 자체가 정당하고 바람직하다는 일반적인 선언이 아니라, 이 범죄자가 자신의 잘못과 처벌에 대해 내리는 판단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립니다. 빌라도와 헤롯이 죄를 찾지 못한 데 이어, 이제 십자가 위의 범죄자가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는 이어 예수께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누가복음 23:42 · 두루새김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지 않게 해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그가 바라보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머리 위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은 처형의 죄목으로 내걸려 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야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께 왕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금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승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죽어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것이라고 믿고, 그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의 왕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시편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가 여러 번 나옵니다. 시편 25:7은 젊은 날의 죄와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한결같은 사랑에 따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 시편 106:4는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 가운데 자신을 기억하시고 구원으로 찾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들에서 「기억하다」는 과거의 정보를 잊지 않는다는 뜻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말입니다.

십자가 위의 범죄자는 예수님께 자신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범죄자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부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말뿐입니다.

그의 믿음은 자기에게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억해 주실 수 있다는 신뢰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요청을 훨씬 넘어섭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말한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 · 두루새김

범죄자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범죄자는 예수님께서 장차 자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는 문장 부호가 없어 「오늘」을 앞에 붙여 「오늘 내가 너에게 말한다」로 읽을 여지도 있지만, 두루새김은 「오늘」을 낙원(παράδεισος)에 있을 시점과 연결하는 읽기를 따릅니다.

「낙원」은 정원이나 동산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으며, 그리스어 구약에서는 에덴동산을 묘사하는 데도 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낙원의 위치나 죽음 이후 세계의 구조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을 바탕으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약속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나와 함께.」

범죄자가 기대한 것은 왕이 자신을 잊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왕과 함께 있는 삶에 관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고 계신가

지도자들도, 병사들도, 첫 번째 범죄자도 예수님께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의 요구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신을 신뢰하며 기억해 달라고 구하는 범죄자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범죄자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음이 마지막 말이 되지 않는 약속을 주십니다. 자신이 죽어 가시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시는 왕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마지막 순간에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일반적인 구원 공식으로만 바꾸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범죄자가 어떤 구원의 조건을 충족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한 사람에게 자신의 나라와 생명에 관한 약속을 주실 권위를 가지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왕이 아니시라는 증거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왕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옵니다. 어둠이 땅을 덮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원문에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방식의 문장 부호가 없었습니다. 「오늘」을 앞 문장에 연결하면 「오늘 내가 너에게 말한다」가 되어 말씀하시는 날을 강조하고, 낙원에 있게 될 정확한 시점은 따로 밝히지 않는 셈이 됩니다. 뒤에 연결하면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가 되어 범죄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바로 그날의 일이 됩니다. 두루새김처럼 읽는 쪽이 더 개연성이 높지만 다른 읽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낙원」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고린도후서 12:4와 요한계시록 2:7에도 등장합니다.

어둠이 내리고 휘장이 찢어지다

누가복음 23:44–46 본문 →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세상이 어두워지다

때는 정오쯤이었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내려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누가복음 23:44 · 두루새김

원문의 「여섯째 시부터 아홉째 시까지」를 유대 사회의 낮 시간 계산에 따라 「정오쯤」부터 「오후 세 시」까지로 옮겼습니다.

한낮에 어둠이 내립니다.

누가는 그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본문을 특정한 일식이나 다른 천문 현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독자에게 한낮의 어둠은 날씨 변화 이상의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0:21–23에서 이집트에 내린 짙은 어둠은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시는 과정에서 나타난 재앙이었습니다.

아모스 8:9에서는 하나님께서 대낮에 해를 지게 하고 밝은 낮에도 땅을 어둡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 다음 절에서 그날이 외아들을 잃은 슬픔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언의 본래 문맥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한 심판입니다(아모스 8:4–6). 누가복음 23장이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한낮의 어둠과 죽음의 슬픔이라는 이미지는 예언자들의 심판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며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조롱을 둘러싸고 있던 세상에 내린 어둠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성소의 휘장이 왜 찢어졌을까

해가 빛을 잃었고,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누가복음 23:45 · 두루새김

휘장은 성소의 공간을 구분하는 천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성막의 휘장은 거룩한 곳과 지성소를 구분했습니다(출애굽기 26:31–33). 예수님 시대 성전에는 여러 휘장이 있었고, 누가는 정확히 어느 휘장을 가리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과 그분의 거룩함을 생각하던 성전의 한가운데에 찢어짐이 생긴 것입니다.

이 사건은 크게 세 방향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성전 중심의 기존 질서에 대한 심판의 표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사건, 예수님의 죽음이 일으킨 슬픔과 애도의 이미지입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누가가 휘장이 찢어지는 일을 예수님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휘장이 찢어진 뒤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중심은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에 놓입니다.

땅이 어두워집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십니다.

「아버지의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이 말을 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누가복음 23:4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시편 31:5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시편 31편에서 원수들에게 위협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듯한 고통을 겪는 사람은, 자신의 영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신뢰를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기도를 자신의 마지막 말씀으로 드리십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신뢰입니다. 올리브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고 하시면서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번에는 잔을 옮겨 달라고 청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니다.

로마 병사들의 손도,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의 손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은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고, 사람들의 폭력에 노출되셨으며, 실제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도 아버지를 향한 신뢰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뜻밖에도 로마 군인에게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휘장을 심판의 표시로 읽는 해석은 예수님께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에 기댑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로 읽는 해석은 히브리서 10:19–20이 예수님의 피와 몸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설명하며 휘장의 이미지를 쓰는 데 기대지만, 누가는 이 자리에서 그렇게 직접 해설하지 않습니다. 애도로 읽는 해석은 성경에서 옷을 찢는 행동이 깊은 슬픔을 나타낸다는 데 기댑니다. 또 마가복음 15:37–38과 마태복음 27:50–51에서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다음 휘장이 찢어지는데, 누가는 이를 마지막 기도보다 앞에 놓았습니다. 마가복음 15:34와 마태복음 27:46에는 예수님께서 시편 22:1을 인용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시는 장면이 있지만, 누가는 대신 시편 31편의 기도를 전합니다. 이 차이를 어느 한 복음서가 예수님의 고통을 더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식으로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본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누가복음 23:47–49 본문 →

백부장은 무엇을 보았을까

백부장은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누가복음 23:47 · 두루새김

백부장은 로마군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교로, 예수님의 처형 현장에 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로마의 정치 질서에 위협이 되는 왕이라고 고발한 사람들이 있었고, 로마 총독은 죄를 찾지 못하면서도 처형을 허락했으며, 로마 병사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로마군의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께서 의로운 사람이셨다고 선언합니다.

「의로운」으로 옮긴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는 문맥에 따라 결백하거나 정당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어, 백부장의 말은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 없는 사람이셨다는 인정으로, 빌라도와 두 번째 범죄자의 무죄 선언으로 이어진 흐름을 완성하는 증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분이셨다는 고백으로, 누가가 사용한 「의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의 신학적 의미를 강조하는 읽기입니다. 두 해석의 강조점은 다르지만, 이 선언이 장의 흐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거나(7:16) 눈먼 사람이 다시 보게 되었을 때(18:43)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가는 그가 부활을 믿게 되었다거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형을 집행하는 로마 권력의 현장에 있던 사람이,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의로움을 인정합니다.

백성은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이 광경을 보러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난 일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누가복음 23:48 · 두루새김

십자가형을 구경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돌아갈 때에는 가슴을 칩니다. 가슴을 치는 행동은 슬픔이나 깊은 괴로움, 때로는 회개의 감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3에서 세리는 자기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가슴을 쳤다는 사실만 기록되므로, 그들이 모두 회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는 그들이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거듭 사람들의 시선을 기록합니다. 백부장은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고, 사람들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가며, 예수님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지켜봅니다」. 같은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그들이 보는 것의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멀찍이 서 있는 사람들

예수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멀찍이 서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온 여자들도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3:49 · 두루새김

앞 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실 때 멀찍이 따라갔습니다(22:54). 이들이 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두려웠을 수도 있고, 처형 장소에 접근하는 것이 제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는 오히려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특히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을 언급합니다. 누가복음 8:1–3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던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정확히 같은 인물인지 23장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왔다는 설명은 그들의 오랜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놓이는지 살펴보는 사람들도 이 여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의회 의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5:39에서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의회 의원 요셉은 왜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었는가

누가복음 23:50–56 본문 →

모두가 예수님을 죽이는 데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요셉이라는 의회 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50 · 두루새김
그는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도시인 아리마대 출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3:51 · 두루새김

의회는 예수님을 심문했고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의회 의원 모두가 그 결정에 찬성했다고 말하지 않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 요셉이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것은 이 장에서 종교 지도자들에 관한 판단을 더욱 신중하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본문은 요셉이 예수님과 자신이 기다리던 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분명합니다.

죽은 사람의 몸을 거두는 일

요셉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누가복음 23:52 · 두루새김

처형당한 사람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로마 당국의 권한과 관련될 수 있었으므로, 요셉이 빌라도에게 직접 청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조용히 안타까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합니다. 그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지, 빌라도가 왜 허락했는지는 누가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처형당한 범죄자로 취급한 예수님의 시신을 요셉은 직접 거두어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릅니다.

그는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아마포로 감싸고,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두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무덤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53 · 두루새김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립니다.

아마포로 감쌉니다.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둡니다.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무덤이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놓였는지를 분명하게 해 주며, 뒤이어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해집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는 데에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의 권위가 사용되었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정중하게 거둔 사람도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그의 직함에서 자동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그가 무엇에 동의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합니다.

여자들은 무덤을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누가는 요셉의 행동만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여자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예수의 시신이 어떻게 놓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누가복음 23:55 · 두루새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이 여자들은 요셉이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일도 뒤따라가서 살펴봅니다. 그들이 무덤 내부를 얼마나 자세히 볼 수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누가는 그들이 무덤과 시신이 놓인 장소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여성들은 슬픔을 표현하는 사람들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지켜본 사람들이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시신을 돌볼 준비를 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안식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3:54 · 두루새김

「준비일」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하는 방식으로 계산되었으므로, 해가 지기 전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 시간 안에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십니다.

여자들은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습니다.누가복음 23:56 · 두루새김

여자들은 장례를 위한 향료와 향유를 준비했지만, 안식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을 멈춥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고 해서 그들이 즉시 모든 신앙적 질서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안식일을 지킵니다.

누가는 그들이 안식일을 어떤 마음으로 보냈는지,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부활을 기다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무덤에 놓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23장이 보여 주는 구원의 역설

누가복음 23:1–56 본문 →

누가복음 23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둘러싼 판단들로 가득합니다.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하고도 예수님을 넘겼고, 헤롯은 조롱했으며, 무리는 바라바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한 범죄자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기억해 달라고 청했으며,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의로운 사람이셨다고 선언했고, 요셉은 시신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했는가보다, 그 모든 판단 속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시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시고,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낙원을 약속하시며,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장의 마지막을 십자가 위의 영광스러운 선언으로 장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은 무덤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놓여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서 들렸던 조롱도, 사람들이 외쳤던 고함도, 백부장의 선언도 이제 들리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놓았지만, 할 일을 남겨 둔 채 계명에 따라 쉽니다.

누가복음 23장은 그렇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조용한 쉼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