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22–24장 · 죽음과 부활

눈이 열리자 보이기 시작한 것

누가복음 24장에는 이상한 장면이 반복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찾아갑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고 왔지만, 정작 무덤 안에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두 제자가 길을 걷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곁으로 다가와 함께 걸으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 가운데 서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 다가오십니다. 빈 무덤에서는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는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4장은 부활을 증명하는 사건들의 목록으로만 읽기에는 아깝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무덤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824장 본문 읽기 →

무덤에 없는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다시 만나다

누가복음 24:1–12 본문 →

여자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무덤으로 갔을까

그 주간의 첫날 아주 이른 새벽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누가복음 24:1 · 두루새김

이야기는 매우 평범한 행동으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어떻게 놓였는지 살펴보고, 향료와 향유를 준비한 뒤 안식일에는 계명대로 쉬었습니다(23:55–56). 이제 안식일이 지나자 준비했던 일을 마치려고 다시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에 간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시신이 무덤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시신을 돌보려고 향료를 가져갑니다. 부활을 예상하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에 남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옆으로 굴려져 있고, 안으로 들어가도 「주 예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은 열려 있지만 그 안에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이 없습니다.

누가는 이때 여자들이 부활을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빈 무덤은 그 자체만으로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시신을 옮겼을 수도 있고, 자신들이 모르는 다른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왜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땅으로 숙였습니다. 두 남자가 말했습니다. 「왜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5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여자들이 예수님을 찾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찾으러 왔는데, 두 사람은 예수님을 「살아 있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여자들이 잘못 찾아온 것은 무덤의 위치가 아니라, 예수님을 이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다시 살아나셨다. 아직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하신 말을 기억해라.」누가복음 24:6 · 두루새김

두 사람은 새로운 가르침을 길게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여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처음 주어진 정보만이 아니라, 그들이 전에 들었던 말씀입니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누가복음 24:7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 9:22와 18:31–33의 고난과 부활 예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말씀이 제자들의 기대와 맞지 않았기에 그들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사흘째 되는 날 무덤이 비어 있습니다.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필요를 나타냅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셔야 할 사명을 설명할 때 여러 차례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비극 뒤에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누가복음 24:8 · 두루새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빈 무덤을 보았고, 두 사람의 말을 들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 기억이 그들의 행동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일을 열한 사도와 나머지 사람들 모두에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돌보려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누구의 증언을 믿을 것인가

누가는 이 여자들의 이름을 밝힙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마리아,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입니다. 이름 없는 여자들이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들이 무덤에서 보고 들은 일을 사도들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요안나는 누가복음 8:3에서도 등장합니다. 헤롯의 집안 관리인 구사의 아내로, 자신의 재산으로 예수님 일행을 돕던 여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한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이 헛소리처럼 들려 믿지 않았습니다.누가복음 24:11 · 두루새김

「헛소리」는 터무니없거나 믿을 수 없는 말을 가리킵니다. 사도들은 여자들의 보고를 확인될 때까지 보류한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이라서 믿지 않았을까요?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여성의 증언이 남성의 증언보다 낮게 평가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증언이 언제나 법적으로 무효였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또 누가는 사도들이 여자들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았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문맥에서 문제는 그들이 부활 자체를 예상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시신을 감쌌던 천들만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난 일을 놀라워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누가복음 24:12 · 두루새김

누가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하는 일이 곧바로 완전한 믿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곧이어 등장하는 두 제자도 여자들의 증언을 들었고, 무덤을 확인했다는 소식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제 누가는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길 위에 세웁니다.

조금 더 깊이

「헛소리」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또 12절은 일부 고대 사본에서 빠져 있어 본문비평상의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린 형태대로 읽더라도, 누가는 빈 무덤의 확인이 곧바로 믿음으로 이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다

누가복음 24:13–24 본문 →

바로 그날, 두 사람은 엠마오로 향한다

바로 그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4:13 · 두루새김

여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고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갔던 바로 그날,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을 두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의논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함께 걸으십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이 가려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24:16 · 두루새김

「눈이 가려져」로 옮긴 그리스어 에크라툰토(κρατέω)는 붙들리거나 제어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수동형입니다. 단순히 슬픔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원인을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들의 인식을 막으셨다고 읽을 수도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달라진 상태와 제자들의 이해 부족을 함께 고려해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설명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원인을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과 살아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즉시 밝히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어요」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물으시자, 그들은 슬픈 얼굴로 걸음을 멈춥니다.

그들 가운데 클레오파스라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 요 며칠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 사람은 당신뿐인가요?」누가복음 24:18 · 두루새김

이 말에는 반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최근의 사건을 모르는 유일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그 사건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들이 아는 정보는 상당히 정확합니다.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온 백성 앞에서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이셨고,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여자들이 천사들에게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 한가운데에는 깊은 실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지도 오늘로 사흘째예요.」누가복음 24:21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이 그들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그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리는 소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68에서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셔서 구해 주셨다고 찬양했고, 2:38에서 안나는 예루살렘이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누가복음의 첫머리부터 이어져 온 소망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는 그 해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해방의 소망이 실패했다는 증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 그 생각을 뒤집으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소망을 좌절시킨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일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모든 정보를 알고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

두 사람은 여자들이 천사들의 환상까지 보았다는 말도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 몇이 무덤에 가 보니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어요. 하지만 그분을 보지는 못했어요.」누가복음 24:24 · 두루새김

빈 무덤은 확인되었지만,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예수님께서 지금 그들과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보여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고난을 겪으셔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다시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기 전에 먼저 성경을 풀어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약 11킬로미터」는 원문의 예순 스타디온을 오늘날의 거리 단위로 옮긴 것입니다. 일부 고대 사본에는 백육십 스타디온으로 기록되어 있어 엠마오의 정확한 위치에 관한 논의가 있고, 여러 후보지가 제안되었지만 누가가 가리킨 마을을 확정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결말을 잘못 이해했다

누가복음 24:25–27 본문 →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을 꾸짖으셨을까

예수께서 두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 이렇게도 더디구나.」누가복음 24:2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을 먼저 위로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는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으로만 읽을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말한 구원의 약속을 알고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기대에 맞는 말씀은 붙들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말씀은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겪고 자신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았느냐?」누가복음 24:26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셨지만 결국 영광을 얻으셨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겪고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에게 고난은 구원의 실패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영광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놓으십니다.

그들은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길에 바로 그 고난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과 함께 걸으시며 성경을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성경 구절을 설명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모세의 글과 모든 예언자의 글에서 시작해, 성경 전체에 걸쳐 자신에 관해 기록된 내용을 두 사람에게 풀어 주셨습니다.누가복음 24:27 · 두루새김

「풀어 주셨습니다」는 해석하고 설명한다는 뜻으로, 이미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밝혀 주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자신에 관한 내용을 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본문들을 설명하셨을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누가는 인용 목록을 기록하지 않으므로, 예수님께서 어떤 순서로 무슨 구절을 설명하셨는지 확정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적용하신 구약 본문들이 그 설명의 방향을 짐작하게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경 전체에 걸쳐 자신에 관해 풀어 주셨다는 말은 구약의 모든 문장이나 등장인물이 예수님을 직접 예언하는 암호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와 출애굽, 언약과 율법, 이스라엘의 실패와 회복의 약속, 의로운 사람의 고난에 관한 이야기들은 먼저 각각의 역사와 문학적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 본래 의미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의미를 충분히 살피면서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두 사람의 소망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길을 새롭게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풀어 주셨는데도 두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안에서 그 방향을 보여 주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52:13–53:12에는 다른 이들의 죄와 관계된 고난과 그 이후의 높아짐을 겪는 종이 나옵니다. 이 종의 정체에 관한 본래 문맥과 해석에는 논의가 있지만, 누가복음 22:37에서 예수님께서는 53:12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셨습니다. 시편 118:22의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역전을 예수님께서는 20:17에서 인용하셨고, 시편 110:1의 하나님 오른쪽에 앉는 이에 관한 말씀은 22:69의 「인자가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에 앉을 것」이라는 선언과 이어집니다. 이 본문들은 구약의 원래 문맥에서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니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고난과 높아지심을 통해 그 말씀들이 새로운 깊이로 읽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손님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다

누가복음 24:28–35 본문 →

「저희와 함께 머무세요」

엠마오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는 척하십니다.

두 사람이 예수께 간곡히 청했습니다. 「저희와 함께 머무세요. 저녁이 다 되었고 날도 이미 저물었어요.」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시려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누가복음 24:29 · 두루새김

두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계속 함께 계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길에서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가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식사 자리에 함께하자 역할이 뒤바뀝니다.

빵을 떼는 순간

예수께서는 두 사람과 함께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빵을 들고 축복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그들에게 건네셨습니다.누가복음 24:30 · 두루새김

초대받은 손님이신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서는 마치 식사의 주인처럼 행동하십니다.

이 동작은 누가복음을 읽어 온 사람에게 익숙합니다. 9:16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축복하신 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22:19의 마지막 식탁에서도 빵을 집어 감사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누가복음 24:31 · 두루새김

처음 다가오셨을 때 가려져 있던 눈이 이제 열립니다. 그리고 알아보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사라지십니다.

오랫동안 함께 걸었던 분을 알아보자마자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정체를 알려 주신 뒤에는 더 이상 몸으로 함께 계실 필요가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사라지실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사실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조금 전 길 위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지 않았어?」

두 사람이 서로 말했습니다. 「그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지 않았어?」누가복음 24:32 · 두루새김

그들은 빵을 떼는 순간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알아본 뒤에야 길에서 들었던 말씀이 어떤 말씀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던 그때에도 이미 마음속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원문에서는 여기서 같은 동사 디아노이고(열다)가 반복됩니다. 31절에서는 두 사람의 눈이 열립니다. 3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성경을 열어 주셨다고 말하는데, 두루새김은 이를 「성경을 풀어 주실 때」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4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이 열립니다.

눈이 열립니다.

마음이 열립니다.

성경이 새롭게 이해되면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게 되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성경의 의미를 더 깊게 깨닫게 됩니다.

두 사람의 마음을 타오르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마음이 뜨거워지면 예수님을 만난 증거라는 교훈으로 바꾸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감정을 주시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다

두 사람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전에는 날이 저물었으니 함께 머물러 달라고 청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날 밤 길을 되돌아갑니다.

누가는 그들의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행동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실망한 채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특별한 경험을 간직하고 머무르지 않고 다른 제자들과 나누려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뜻밖의 소식을 듣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주님이 정말 다시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나타나셨어.」누가복음 24:34 · 두루새김

누가는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나신 사건 자체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만남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본문이 말하지 않은 대화를 상상하여 채워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하기 전에 시몬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시며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2:31–32).

엠마오의 두 사람도 길에서 있었던 일과 빵을 뗄 때 예수님을 알아본 일을 이야기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서 들은 말씀,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보고, 엠마오의 경험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두 사람이 앞서 있었던 빵의 기적이나 마지막 식사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누가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시는 독특한 손동작을 기억하여 알아보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 장면을 성찬식을 거행한 사건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식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잔이나 새 언약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한편 낯선 여행자에게 밤에 머물 곳을 제공하는 일은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이었지만, 누가는 두 사람이 그 의무를 지키려고 초대했다고 설명하지 않고 「간곡히 청했다」고만 말합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유령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누가복음 24:36–43 본문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직접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누가복음 24:36 · 두루새김

그들이 말하고 있던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확인이 있을까요?

그들은 깜짝 놀라 두려워하며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누가복음 24:37 · 두루새김

그들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빈 무덤에 관한 증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자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은 땅의 평화를 노래했고(2:14),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은 하늘의 평화를 찬양했습니다(19:38). 이제 십자가와 죽음을 지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 가운데 서서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령이 아니시라는 말씀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불안해하느냐? 왜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느냐?」 하고 물으신 뒤 말씀하십니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고 확인해라. 유령에게는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내게는 있다.」누가복음 24:39 · 두루새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 사건이나, 단지 영적인 의미에서 살아 계시다는 상징적 표현으로만 기록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실제로 나타나 자신이 유령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 장의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전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계시지도 않습니다. 엠마오의 두 사람은 함께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했고, 눈이 열린 순간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은 사람이 이전의 일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오는 일로도, 몸 없는 영혼이 살아남는 일로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누가는 두 사실을 함께 붙듭니다.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의 살아 계심은 인간이 익숙하게 경험하는 생명의 조건을 넘어섭니다. 부활은 이전의 삶과 이어지면서도 새로운 삶입니다.

기뻐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 믿지 못한 채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누가복음 24:41 · 두루새김

앞에서는 두려워서 믿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너무 기뻐서 아직 믿지 못합니다. 너무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기쁜 일이라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길게 설명하시는 대신 먹을 것을 청하십니다. 그들이 구운 생선 한 조각을 건네자,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드십니다.

누가는 이 행동으로 부활한 몸이 어떤 생물학적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들 앞에 계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행동으로 보여 줍니다.

엠마오의 길에서는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며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이곳에서는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음식을 드십니다. 두 장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해 부족을 꾸짖고 끝내지 않으시고, 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모두 준비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36절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과 40절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일은 일부 사본에 빠져 있으나 현대 비평 본문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화의 인사는 당시 유대 사회의 인사와 연결되지만, 이 장면에서는 일상적인 인사 이상의 울림을 가집니다.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2–44에서 썩을 몸과 썩지 않을 몸, 육의 몸과 영의 몸을 구별합니다. 표현 방식은 누가복음 24장과 다르고, 바울의 「영의 몸」을 육체가 전혀 없는 존재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두 본문은 부활을 죽었던 몸이 그대로 다시 사는 일이나 영혼이 영원히 사는 일과 같게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깨닫게 하신 뒤에야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다

누가복음 24:44–49 본문 →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을 때 했던 말이 바로 이것이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에 관해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누가복음 24:44 · 두루새김

유대 성경은 전통적으로 율법, 예언서, 성문서로 구분되었고, 시편은 성문서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여기서 시편이 성문서 전체를 대표한다고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시편을 강조하신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는 한두 구절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경 전체를 자신의 사명과 연결하십니다.

그때 그들이 성경을 깨닫도록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누가복음 24:45 · 두루새김

엠마오에서는 성경이 열리고 눈이 열렸습니다. 이제 모여 있는 제자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정보를 쌓아 주시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성경을 이해하는 생각의 틀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랫동안 들었지만,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시리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부족했던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알고 있는 성경과 예수님의 삶을 서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이제 성경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하나의 구원 역사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은 어느 구절을 가리킬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사흘째 되는 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누가복음 24:46 · 두루새김

구약의 어느 구절에 이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을까요? 이 문장과 정확히 같은 구절은 구약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셨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전체가 가리키는 구원 사건을 모아 설명하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시편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다윗에게 약속된 왕권과 회복의 소망 등이 그 배경을 이룹니다. 숨겨진 암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길로 이루어지는지 이스라엘의 성경을 따라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일까지 포함한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하는 일을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다.」누가복음 24:47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부활만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일도 성경이 이루어지는 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 밖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성경과 끊어진 새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창세기 12:3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이사야 49: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소망이 버려지고 전혀 다른 종교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모든 민족을 향해 펼쳐지는 사건입니다.

회개는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사람들이 먼저 자기 힘으로 완전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고난받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죄 용서를 받으라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시작되는 곳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도시, 예루살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앰으로써 그분의 활동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던 그 도시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의 소식을 듣는 출발점이 됩니다.

증인이 되라는 명령보다 먼저 주어진 것

「너희는 이 일들의 증인이다.」누가복음 24:48 · 두루새김

증인은 자기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 사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신 일과 그 일이 성경 안에서 지니는 의미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듣는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여자들의 부활 소식을 믿지 않았고, 함께 걸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증인이 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성경을 풀어 주시고, 살아 계심을 확인하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증언은 제자들이 처음부터 지니고 있던 확신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온 세상으로 떠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머물라고 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내겠다.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도시에 머물러라.」누가복음 24:49 · 두루새김

누가복음 3:16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보다 능력 있는 분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언했고, 사도행전 1:4–5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성령으로 세례받을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과 그분이 주시는 능력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성경도 새롭게 이해했지만, 그것만으로 해야 할 일을 감당할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향한 사명을 주시면서, 그 사명을 해낼 힘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복음의 증언은 인간의 확신과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6:2에는 하나님께서 이틀 뒤에 살리시고 셋째 날에 일으키실 것이라는 말씀이 있어 자주 거론됩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본래 문맥에서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을 가리키며, 후대 그리스도교 해석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할 수는 있어도 누가가 24:46에서 그 구절을 직접 인용했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창세기 12:3과 이사야 49:6도 본래 문맥은 각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이스라엘의 회복 및 종의 사명에 관한 것이며, 누가복음은 그 약속들이 예수님을 통해 더 넓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 47절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는 현대 비평 본문에 근거한 번역이고, 다른 주요 본문에는 회개와 죄 용서를 나란히 놓는 읽기도 있습니다. 어느 읽기든 회개와 죄 용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떠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24:50–53 본문 →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

예수께서는 그들을 베다니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 두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누가복음 24:50 · 두루새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시는 일은 새로운 규칙을 주시는 것도, 그들의 실패를 다시 따져 묻는 것도 아닙니다. 두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두 손을 들어 축복하는 모습은 구약의 제사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 9:22에서 아론은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고, 민수기 6:22–27에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위에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두어 축복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만 누가는 축복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으므로, 민수기의 축복문을 그대로 말씀하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축복이 끝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떠나시다

그들을 축복하시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누가복음 24:5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축복을 마치고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시는 동안」 떠나십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두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셨는데 왜 제자들은 기뻐했을까

그들은 예수께 엎드려 절하고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누가복음 24:52 · 두루새김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슬퍼하며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셨는데도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떠나셨다는 사실은 같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기 전에 그들을 축복하셨고,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절망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신뢰하는 기다림입니다.

무덤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성전에 머물다

그들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누가복음 24:53 · 두루새김

누가복음 1장에서 제사장 사가랴는 성전에서 분향하다가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다시 성전에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성전이 무너지는 장면이 아니라 제자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복음서를 끝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더욱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조금 더 깊이

51절의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와 52절의 「예수께 엎드려 절하고」는 일부 고대 사본에 빠져 있지만, 파피루스 75번 등 중요한 고대 사본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24장만 읽으면 부활부터 떠나심까지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도행전 1:3은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누가복음이 부활과 떠나심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압축해 서술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이 사본 차이가 그 시간적 긴장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살피는 논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자체는 마지막 축복까지 며칠이 지났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셨는가

누가복음 24:1–53 본문 →

이 장의 사람들은 모두 처음에는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은 시신을 찾으러 갔고, 사도들은 그 증언을 헛소리처럼 여겼고, 엠마오의 두 사람은 함께 걸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모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이에 달라진 것은 그들이 마침내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셔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시고, 눈을 열고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과 부활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이해한 사람들은 지식을 쌓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실망한 채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은 돌아왔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증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이제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베다니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 두 손을 들어 축복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축복을 받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슬픔에 잠겨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무덤으로 갔습니다. 마지막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시 찾기 위해 그 무덤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알고, 약속하신 일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덤을 향하던 발걸음은 멈추었고, 이제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