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22–24장 · 죽음과 부활
눈이 열리자 보이기 시작한 것
누가복음 24장에는 이상한 장면이 반복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찾아갑니다. 예수님의 몸을 찾으려고 왔지만, 정작 무덤 안에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두 제자가 길을 걷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곁으로 다가와 함께 걸으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 가운데 서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고도 죽은 사람의 영을 보는 줄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장은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빈 무덤에서는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는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그들의 생각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시작합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단순히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의 눈과 생각을 열어 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4장은 부활을 증명하는 사건들의 목록으로만 읽기에는 아깝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변화의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빈 무덤 앞에서 당황합니다.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부활 소식을 듣고도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예수님을 직접 본 제자들조차 놀라움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 다가오십니다. 왜 자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는지, 성경이 그것을 어떻게 증언하는지, 그리고 이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차례로 밝혀 주십니다.
처음에는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찾으러 무덤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성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무덤에 없는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다시 만나다
여자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무덤으로 갔을까
그 주간의 첫날 아주 이른 새벽에 그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누가복음 24:1 · 본디새김
이야기는 매우 평범한 행동으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여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어떻게 놓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향료와 향유를 준비한 뒤 안식일에는 계명대로 쉬었습니다(23:55–56). 이제 안식일이 지나자 자신들이 준비했던 일을 마치려고 다시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에 간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돌보기 위해 향료를 가져갑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음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부활을 예상하고 기뻐하며 무덤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에 남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하자 첫 번째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돌이 무덤에서 굴려 치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누가복음 24:2 · 본디새김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으나 주 예수의 몸을 발견하지 못했다.누가복음 24:3 · 본디새김
누가는 「발견했다」와 「발견하지 못했다」를 나란히 놓습니다. 돌은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찾으러 온 몸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누가는 여자들이 부활을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빈 무덤은 그 자체만으로 부활의 모든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몸을 옮겼을 수도 있고, 자신들이 모르는 다른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이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느냐?」
여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땅을 향해 얼굴을 숙이자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이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5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여자들이 예수님을 찾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몸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예수를 「살아 있는 이」라고 부릅니다.
여자들이 잘못 찾아온 것은 무덤의 위치가 아니라, 예수님을 이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여기 없다. 하지만 다시 살아났다. 그가 아직 갈릴리에 있을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여라.」누가복음 24:6 · 본디새김
두 사람은 새로운 가르침을 길게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여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처음 주어진 정보만이 아니라, 그들이 전에 들었던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한 그 말이다.」누가복음 24: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 9:22와 18:31–33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예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제자들의 기대와 맞지 않았기에 그들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사흘째 되는 날 무덤이 비어 있습니다.
「살아나야 한다」(δέω)는 말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필요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표현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셔야 할 사명을 설명할 때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상하지 못한 비극 뒤에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말을 기억해 냈다.누가복음 24:8 · 본디새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았고, 두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 기억이 그들의 행동을 바꾸어 놓습니다.
처음에는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활의 소식을 가지고 열한 사람과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누구의 증언을 믿을 것인가
누가는 이 여자들의 이름을 밝힙니다. 막달라 사람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마리아,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입니다. 구체적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무덤에서 보고 들은 일을 사도들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요안나는 누가복음 8:3에서도 등장합니다. 헤롯의 집안 관리인 구사의 아내로 소개되며,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기던 여성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부활 소식을 전한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이 말은 헛소리처럼 보였고, 그들은 여자들을 믿지 않았다.누가복음 24:11 · 본디새김
「헛소리」는 터무니없거나 믿을 수 없는 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도들은 여자들의 보고를 단순히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보류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여자들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았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가까운 문맥에서는 그들이 부활 자체를 예상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여자들의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몸을 굽혀 들여다보고 아마포 천들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벌어진 일을 놀라워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누가복음 24:12 · 본디새김
누가는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하는 일이 곧바로 완전한 믿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곧이어 등장하는 두 제자도 여자들의 증언을 들었고, 무덤을 확인했다는 소식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제 누가는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길 위에 세웁니다.
조금 더 깊이
「헛소리」로 옮긴 그리스어 레로스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고대 지중해 사회의 여러 법적·사회적 맥락에서 여성의 증언이 남성의 증언보다 낮게 평가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증언이 언제나 법적으로 무효였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또 24:12은 일부 고대 사본에서 빠져 있으므로 본문비평상의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린 형태대로 읽더라도, 누가는 빈 무덤을 확인하는 일이 곧바로 완전한 믿음에 이르게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다
바로 그날, 두 사람은 엠마오로 향한다
보아라, 바로 그날에 그들 가운데 둘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누가복음 24:13 · 본디새김
「바로 그날」은 여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날입니다.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갔던 날입니다. 그런데 그날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을 서로 논의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있을 때에 예수 자신이 가까이 와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누가복음 24:15 · 본디새김
독자는 곧바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붙들려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누가복음 24:16 · 본디새김
「눈이 붙들려」는 단순히 슬픔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는 말과 다릅니다. 붙들리거나 제어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수동형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누가 또는 무엇이 그들의 눈을 붙들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과 살아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즉시 밝히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순 스타디온은 당시 사용하던 스타디온의 길이에 따라 약 11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다만 일부 고대 사본에는 백육십 스타디온으로 기록되어 있어 엠마오의 정확한 위치에 관한 논의가 있으며, 여러 후보지가 제안되었지만 누가가 가리킨 마을을 확정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붙들려」로 옮긴 그리스어 에크라툰토의 원인을 두고는,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들의 인식을 막으셨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달라진 상태와 제자들의 이해 부족을 함께 고려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이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원인을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할 분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은 침울한 얼굴로 멈춰 섭니다.
그 가운데 클레오파스라는 사람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예루살렘에 나그네로 머무는 이들 가운데 요 며칠 사이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는 이는 당신 혼자입니까?」누가복음 24:18 · 본디새김
이 말에는 누가가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반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모르시는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이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온 백성 앞에서 일과 말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셨다는 것,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 여자들이 천사들에게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설명 한가운데에는 깊은 실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할 분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더해 그 일이 있은 뒤로 오늘이 사흘째입니다.」누가복음 24:21 · 본디새김
누가복음 1:68에서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셔서 속량하셨다고 찬양했습니다. 2:38에서도 안나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속량을 기다리는 소망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의 첫머리부터 이어져 온 중요한 소망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는 그 속량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속량의 소망이 실패했다는 증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의 생각을 뒤집으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속량을 좌절시킨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일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모든 정보를 알고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
그들은 여자들이 「천사들이 나타난 환상까지 보았다」고 말한 것도, 그 천사들이 「그가 살아 있다」고 했다는 것도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는 이들 가운데 몇이 무덤으로 갔는데,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24:24 · 본디새김
빈 무덤은 확인되었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예수님께서 지금 그들과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문제도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셔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다시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십니다.
성경을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결말을 잘못 이해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을 꾸짖으셨을까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 어리석은 이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 마음이 굼뜬 이들아.」누가복음 24:25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을 먼저 위로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십니다.
「어리석은」이라는 말은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언자들의 말씀을 충분히 믿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성경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기대에 맞는 말씀은 붙들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말씀은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았느냐?」누가복음 24: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지만 결국 영광을 얻으셨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에게 고난은 구원의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영광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놓으십니다.
그들은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길에 바로 그 고난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성경 구절을 설명하셨을까
그리고 모세와 모든 예언자의 글에서 시작해 모든 성경에서 자기를 두고 적힌 것을 그들에게 풀어 주었다.누가복음 24:2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단 한 구절만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풀어 주었다」는 해석하고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밝혀 주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본문들을 설명하셨을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절들의 목록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복음 자체에 이미 나타난 구약과 예수님의 관계를 통해 그 설명의 방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에서 자신에 관한 것을 풀어 주셨다는 말은 구약의 모든 문장이나 등장인물이 예수님을 직접 예언하는 암호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야기들은 먼저 각각의 역사와 문학적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는다는 것은 구약의 본래 의미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본래 의미를 충분히 살피면서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그들의 소망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길을 새롭게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풀어 주셨는데도 두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말씀을 들으며 마음은 변화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은 여전히 붙들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풀어 주었다」로 옮긴 그리스어는 디에르메뉴센입니다. 누가는 구절 목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수님께서 어떤 순서로 무슨 구절을 설명하셨는지 재구성하여 확정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52:13–53:12에는 멸시와 고난을 겪는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종의 고난은 다른 이들의 죄와 관계되며 고난 이후의 높아짐도 나타납니다. 종의 정체에 관한 본래 문맥과 해석에는 논의가 있지만, 누가복음 22:37에서 예수님께서는 53:12의 말씀을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셨습니다. 시편 118:22에서는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됩니다. 본래는 여호와야훼께서 버림받은 존재를 높이시는 역전을 노래하는 시편이며,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0:17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시편 110:1은 여호와야훼께서 「내 주」라고 불리는 이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2:69에서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능력 오른편에 앉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구약에는 창조와 출애굽, 언약과 율법, 이스라엘의 실패와 심판, 예언자들이 선포한 회복의 약속, 의로운 사람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본문들은 원래 문맥에서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고난과 높아지심을 통해 그 말씀들이 새로운 깊이로 읽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는다는 것은 모든 본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억지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말씀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셨으며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 차근차근 이해하는 일입니다.
손님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다
「저희와 함께 머무십시오」
엠마오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는 체하십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강하게 권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강하게 권하며 말했다. 「저희와 함께 머무십시오. 저녁때가 다 되었고 날이 이미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머물려고 들어갔다.누가복음 24:29 · 본디새김
두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계속 함께 계시기를 원합니다. 길에서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가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던 사람에게 밤에 머물 곳을 제공하는 일은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다만 누가는 그들이 환대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초대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함께 머물러 달라고 간절히 권합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식탁에 앉자 역할이 뒤바뀝니다.
빵을 떼는 순간
그가 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웠을 때에 빵을 들어 축복하고 떼어 그들에게 건네고 있었다.누가복음 24:3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손님이십니다. 그런데 식탁에서는 마치 식사의 주인처럼 행동하십니다.
이 동작은 누가복음을 읽어 온 사람에게 익숙합니다. 9:16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신 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22:19에서도 마지막 식탁에서 빵을 집어 감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빵을 들어 축복하고 떼어 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이 바로 이때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 앞에서 사라졌다.누가복음 24:31 · 본디새김
처음 다가오셨을 때 붙들려 있던 눈이 이제 열립니다. 그리고 알아본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십니다. 오랫동안 함께 걸었는데, 알아보자마자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사실에만 매달리지 않고, 조금 전 길 위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엠마오의 두 사람이 앞서 있었던 빵의 기적이나 마지막 식사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누가가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시는 독특한 손동작을 기억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장면을 특별히 성찬식을 거행한 사건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빵을 떼어 주시는 행동이 마지막 식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잔이나 새 언약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사라지심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알려 주신 뒤에는 더 이상 육체적으로 함께 계실 필요가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시고 사라지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 안에서 타오르고 있지 않았느냐?」
그들이 서로 말했다. 「그가 길에서 우리에게 말할 때에, 성경을 열어 줄 때에 우리 마음이 우리 안에서 타오르고 있지 않았느냐?」누가복음 24:32 · 본디새김
두 사람은 빵을 떼는 순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알아본 뒤에는 길에서 들었던 말씀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을 때에도,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이미 마음속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열다」(διανοίγω)라는 동사를 반복합니다. 31절에서는 두 사람의 눈이 열립니다. 3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성경을 열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4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생각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세 자리에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성경이 열립니다.
눈이 열립니다.
생각이 열립니다.
성경이 새롭게 이해되면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게 되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성경의 의미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됩니다.
두 사람의 마음을 타오르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단순히 마음이 뜨거워지면 예수님을 만난 증거라는 교훈으로 바꾸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에게 새로운 감정을 주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다
두 사람은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전에는 날이 기울었으니 함께 머물러 달라고 강하게 권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날 밤 길을 되돌아갑니다.
누가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 감정으로 가득했는지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동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경험을 간직하고 머무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뜻밖의 소식을 듣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주님이 참으로 다시 살아났고 시몬에게 보였다」고 말하고 있었다.누가복음 24:34 · 본디새김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나신 사건 자체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만남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본문이 말하지 않은 대화를 상상하여 채워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앞선 장면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하기 전에 「시몬아, 시몬아」라고 부르시며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22:31–32). 누가는 그 만남의 내용을 알려 주지 않지만,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시몬을 위해 하신 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엠마오의 두 사람도 길에서 있었던 일과 빵을 뗄 때 예수님을 알아본 일을 이야기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서 들은 말씀,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보고, 엠마오의 두 사람이 경험한 일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십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들이 이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예수 자신이 그들 가운데 섰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누가복음 24:36 · 본디새김
그들이 말하고 있던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확인이 있을까요?
그런데 누가가 기록한 반응은 예상과 다릅니다.
그들은 놀라 떨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영을 보는 줄로 여겼다.누가복음 24:37 · 본디새김
그들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빈 무덤에 관한 증언을 들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자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은 땅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2:14).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은 하늘의 평화를 찬양했습니다(19:38). 이제 십자가와 죽음을 지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 가운데 서서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인사는 일부 사본에 빠져 있으나 현대 비평 본문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용되던 평화의 인사와 연결되지만, 이 장면에서는 일상적인 인사 이상의 울림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이 아니시라는 말씀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뒤흔들려 있느냐?」 하고 물으신 뒤 말씀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고 확인하여라. 영은 살과 뼈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를 지니고 있다.」누가복음 24:39 · 본디새김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 사건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단지 영적인 의미에서 살아 계시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만 기록되지도 않습니다.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실제로 나타나시고, 자신이 영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 장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전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엠마오의 두 사람은 함께 걸으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고, 눈이 열린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부활을 단순히 이전의 일상적인 육체 상태로 돌아오는 사건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본문이 보여 주는 모습이 더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활을 비물질적인 영혼의 생존으로만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알던 예수님과 다른 존재가 대신하여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아 계심은 인간이 익숙하게 경험하는 생명의 조건을 넘어섭니다. 누가는 부활의 연속성과 새로움을 함께 붙듭니다.
기뻐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다시 놀랍습니다.
그들이 기쁨에 겨워 아직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을 때에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 먹을 것을 좀 가지고 있느냐?」누가복음 24:41 · 본디새김
앞에서는 두려워서 믿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기쁨에 겨워 아직 믿지 못합니다. 너무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기쁜 일이라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길게 설명하시는 대신 평범한 질문 하나를 하십니다. 그들은 구운 생선 한 조각을 드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고 그들 앞에서 드십니다.
누가는 이 행동을 통해 부활한 몸이 어떤 생물학적 원리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제자들이 영이라고 생각한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들 앞에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엠마오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자 함께 걸으며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이곳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이라고 생각하자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음식을 드십니다. 두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해 부족을 단순히 꾸짖고 끝내지 않으시고, 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모두 준비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깨닫게 하신 뒤에야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한 말이 이것이다. 나를 두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적힌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누가복음 24:44 · 본디새김
유대 성경은 전통적으로 율법, 예언서, 성문서로 구분되었고, 시편은 성문서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책입니다. 여기서 시편이라는 명칭이 성문서 전체를 대표하는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시편을 강조하시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성경 전체를 자신의 사명과 연결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때 그가 그들의 생각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했다.누가복음 24:45 · 본디새김
엠마오의 두 사람은 성경이 열리는 경험을 했고, 그다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이제 모여 있는 제자들의 생각이 열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랫동안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시리라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단순한 정보의 양이 아니라,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성경과 예수님의 삶을 서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다」는 말씀은 어느 구절을 가리킬까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다.」누가복음 24:46 · 본디새김
구약에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본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4:46과 정확히 같은 문장으로 그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설명하는 구절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셨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성경 전체가 가리키는 구원 사건을 종합하여 설명하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시편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다윗에게 약속된 왕권과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의 소망 등이 함께 그 배경을 형성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성경 속에 숨겨진 암호 같은 예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길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이스라엘의 성경을 따라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설명은 고난과 부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호세아 6:2도 자주 거론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이틀 뒤에 살리시고 셋째 날에 일으키실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본래 문맥에서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예수님 개인의 부활 날짜를 직접 예언하는 말씀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후대 그리스도교 해석에서 그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누가가 24:46에서 그 구절을 직접 인용했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성경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기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는 것이다. 그 선포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다.」누가복음 24:4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시는 일만 성경의 성취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기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는 일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 안에만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성경과 단절된 새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소망이 폐기되고 전혀 다른 종교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모든 민족을 향해 펼쳐지는 사건입니다.
선포할 내용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죄 용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먼저 자기 힘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난받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죄 용서를 받으라는 선포입니다.
그런데 그 선포가 시작되는 곳이 뜻밖입니다. 예루살렘,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도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예수님의 활동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죄 용서의 소식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던 도시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의 소식을 듣는 출발점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2:3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49: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종이 이스라엘의 회복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의 본래 문맥은 각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이스라엘의 회복 및 종의 사명에 관한 것이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선포를 통해 그 약속들이 더 넓게 성취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죄 용서를 받기 위한 회개」는 현대 비평 본문에 근거한 번역입니다. 다른 주요 본문에서는 회개와 죄 용서가 병렬로 놓이는 읽기도 있지만, 어느 읽기를 택하든 회개와 죄 용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증인이 되라는 명령보다 먼저 주어진 것
「너희는 이 일들의 증인이다.」누가복음 24:48 · 본디새김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할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일을 증언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말해야 할 것은 자기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 사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신 일과 그 일이 성경 안에서 지니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듣는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의 부활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을 때에도 영을 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증인이 됩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성경을 풀어 주셨고, 자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생각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증언은 제자들이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던 확신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곧바로 온 세상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의 약속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이 도시에 머물러라.」누가복음 24:49 · 본디새김
누가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자신보다 능력 있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3:16). 그리고 사도행전 1:4–5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으로 세례받을 일을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성령과 그분이 주시는 능력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성경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만으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모두 감당할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증언은 인간의 확신과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이 약속을 남겨 둔 채 마지막 장면으로 나아갑니다.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떠나시는 예수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
그는 그들을 베다니 가까이까지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했다.누가복음 24:50 · 본디새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시는 행동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규칙을 주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실패를 다시 따져 묻는 일도 아닙니다. 두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절망했고,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으며,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을 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은 제사장적 축복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신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불안 속에 남겨 놓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9:22에서 아론은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민수기 6:22–27에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 위에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두어 축복하도록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만 누가는 예수님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록하지 않으므로, 민수기의 축복문을 그대로 말씀하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축복이 끝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떠나시다
그들을 축복하는 동안에 그는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누가복음 24:5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축복을 마치고 떠나신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축복하는 동안에」 떠나십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두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는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구절에는 중요한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고대 사본에서는 이 표현이 빠져 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떠나셨다는 말만 기록됩니다. 52절의 「그에게 엎드려 절하고」도 일부 사본에는 없습니다. 반면 파피루스 75번 등 중요한 고대 사본에는 이 표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24장만 읽으면 부활에서 마지막 축복까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도행전 1:3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한 가지 이해는 누가복음이 부활과 떠나심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압축하여 서술했고, 사도행전은 그 기간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논의에서는 마지막 장의 사본 차이가 이러한 시간적 긴장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살핍니다. 누가복음 24장 자체는 마지막 축복까지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 명시하지 않으므로, 이 장의 순서를 세밀한 일일 연대표로 확정하기보다 누가가 마지막 장면을 통해 무엇을 보여 주려는지 주목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셨는데 왜 제자들은 기뻐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엎드려 절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누가복음 24:52 · 본디새김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실망하고 슬퍼하며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셨는데도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셨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제자들의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기 전에 그들을 축복하셨고, 높은 곳에서 오는 힘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하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다림은 절망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신뢰하는 기다림입니다.
무덤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성전에 머물다
그리고 그들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다.누가복음 24:53 · 본디새김
누가복음 1장에서 제사장 사가랴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했던 자신과 엘리사벳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렇게 성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제 다시 성전에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성전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복음서를 끝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더욱 기뻐하며 찬송합니다.
그 성전에서 시작될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아직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만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셨는가
누가복음 24장에서 처음에는 누구도 부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몸을 찾으러 무덤으로 가고,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을 헛소리처럼 여기고, 엠마오의 두 사람은 함께 걷고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모여 있던 제자들은 영을 보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자들에게는 이미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엠마오의 두 사람에게는 성경을 풀어 주십니다.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는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음식을 드시며, 그들의 생각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부활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지혜로 마침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낸 성공담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자신을 알려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먼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베다니 가까이까지 데리고 나가 두 손을 들어 축복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축복을 받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슬픔에 잠겨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처음에 여자들은 예수님의 몸을 찾으러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시 찾기 위해 그 무덤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무덤을 향하던 발걸음은 멈추었고, 이제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