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22–24장 · 죽음과 부활

모두가 무너지는 밤, 예수님께서 지키신 것

누가복음 22장에는 여러 사람의 손이 등장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과 거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 내고, 예수님께서는 그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합니다.

같은 밤, 서로 다른 손들이 전혀 다른 일을 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가리키신 배반자의 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잔을 나누어 주신 뒤에 「나를 넘겨줄 사람도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있다」(22:21)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그 사람의 손이 예수님과 함께 상 위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넘겨지실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들과 식사하십니다.

곧이어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가를 두고 다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하지만 그날 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고도 슬픔에 지쳐 잠들고, 의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 고발할 근거를 찾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누가복음 22장은 인간의 충성이 무너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무너지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누가 더 높은가를 다투는 사람들 가운데서 섬기는 사람으로 계시고,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십니다. 자신을 붙잡으러 온 사람의 다친 귀까지 고쳐 주시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 앞에서 인자가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조차 끝까지 충성하지 못하는 밤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으로 남아 계셨습니까?

누가는 그 답을 한 번의 선언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식탁에서 시작하여 올리브산과 대제사장의 뜰, 의회의 심문 자리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게 합니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배반과 폭력으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진 사건인지를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읽는 시간 36분소단락 1122장 본문 읽기 →

모두가 예수님을 없앨 기회를 찾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준비하십니다

누가복음 22:1–13 본문 →

유월절을 앞둔 예루살렘

누가는 시간을 알려 주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월절이라고도 부르는 무교절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2:1 · 두루새김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양옆의 기둥과 위쪽 가로대에 바르고,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이집트를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날 밤 이집트에는 심판이 내렸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일을 세대를 거쳐 기억하고, 그분과 맺은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는 절기였습니다. 본래 유월절과 무교절은 서로 구별되는 절기였지만(레위기 23:5–6), 제2성전기에는 두 절기를 함께 묶어 유월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념하는 명절이 가까워지는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지만 백성이 두려워 어떻게 죽일지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2: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습니다. 공개적으로 붙잡으면 백성의 반발을 살 수 있으니, 지도자들에게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예수님을 붙잡을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때 유다가 등장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그때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이스가리옷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습니다.누가복음 22:3 · 두루새김

누가는 배반을 이야기하는 바로 이 자리에서 유다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유다는 바깥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6:13–16),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예수님을 넘겨주는 일을 의논합니다.

누가는 이 행동의 뒤에 사탄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유다가 자신의 의지와 책임 없이 조종당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직접 지도자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법을 의논하고, 돈을 받기로 합의한 뒤, 적당한 기회를 찾습니다.

사탄의 활동과 유다의 책임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다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돈을 받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돈만이 그의 유일한 동기였는지, 예수님께 실망했거나 다른 정치적인 기대가 있었는지는 이 장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유다의 마음을 추측하도록 이야기를 꾸미지 않고, 그가 무엇을 했는지 보여 줍니다.

유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무리가 없을 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누가복음 22:6 · 두루새김

유다는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은밀한 기회였고, 유다는 바로 그 기회를 제공하려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 기회를 찾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한쪽에서는 배반이 준비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식탁이 준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마지막 식사를 알고 계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서 우리가 먹을 유월절 음식을 준비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에서 준비해야 하느냐고 묻자, 도시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를 만날 것이고, 그가 들어가는 집을 따라가면 식사할 자리가 깔린 큰 위층 방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가 보니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미리 아셨다는 표시로 이해할 수도 있고, 이미 누군가와 식사 장소를 마련해 두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였으며,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예상하지 못하신 채 갑작스럽게 붙잡히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의 고난을 말씀하셨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셨으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유다가 기회를 찾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위협 때문에 자신의 길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유월절 식탁으로 나아가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차려진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주셨습니까

누가복음 22:14–23 본문 →

「간절히 바랐다」

식사할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비스듬히 누우십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의 정식 잔치에서는 낮은 상 주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누가복음 22:15 · 두루새김

원문은 같은 어근의 명사와 동사를 함께 써서 간절한 바람을 강조하고, 두루새김은 그 강조를 「간절히 바랐다」(ἐπιθυμέω)로 옮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유월절 식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식사를 간절히 바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바라셨을까요?

누가는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식사가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난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연결하는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일을 기억하는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몸과 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옛 구원을 기억하는 자리가,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의미를 밝히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다시 드시지 않겠다고 하셨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게 바란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월절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유월절 음식을 결코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2:16 · 두루새김

이 말씀을 읽으면 식탁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을 받아 감사 기도를 하시고 「이것을 받아 서로 나누어 마셔라」 하신 뒤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나는 이제부터 포도주를 결코 마시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2:18 · 두루새김

여기에는 지금 함께 먹고 마시는 시간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이루어질 미래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겪으실 고난을 바라보시면서도 그 고난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구원을 기억하는 식사가 미래의 완성을 기다리는 식사가 됩니다.

빵과 잔 —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또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하고 떼어 그들에게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어지는 내 몸이다. 나를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해라.」누가복음 22:19 · 두루새김
식사를 마친 뒤에 잔도 마찬가지로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해 쏟아지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누가복음 22:20 · 두루새김

일부 사본에는 19절의 「너희를 위해 주어지는」부터 20절 끝까지가 없습니다. 아래에서는 두루새김에 실린 긴 본문을 따라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주시며 그것이 「너희를 위해 주어지는」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말은 「너희를 위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에게 일어날 비극으로만 설명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위한 사건으로 설명하십니다.

이어서 잔을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두 본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4:3–8에서 모세는 제물의 피를 뿌리며 하나님께서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피라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법을 백성의 마음에 새기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새 언약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그 새 언약과 연결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새롭게 세우는 사건으로 제시됩니다.

죽음의 의미를 정하시는 분은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렇다고 이 짧은 말씀에 후대 기독교 신학이 발전시킨 속죄에 관한 모든 설명이 이미 담겨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속죄의 방식과 범위는 신약의 여러 본문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누가의 긴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제자들을 위해 주어지고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과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배반자의 손도 그 상 위에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과 잔을 주신 다음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보아라. 나를 넘겨줄 사람도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있다.」누가복음 22:21 · 두루새김

마가복음 14장과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배반에 관한 예고가 빵과 잔의 말씀보다 앞에 나오지만, 누가는 그 뒤에 배반자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해」라고 말씀하시는 식탁에 예수님을 넘겨줄 사람도 함께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집니다.

제자들의 충성스러움이 이 식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드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 식탁이 마련되었습니다.

「인자는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누가복음 22:22 · 두루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지만, 그 사실이 유다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이 구절은 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두 사실을 동시에 선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누가 그런 일을 할 것인지 서로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몸과 피에서, 자기들 가운데 누가 배반자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의논이 다른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22:19 뒷부분과 20절에는 중요한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긴 본문에는 17절의 첫 번째 잔, 19절의 빵, 20절의 두 번째 잔이 나오지만, 짧은 본문에서는 잔이 빵보다 먼저 나오고 두 번째 잔은 없습니다. 여러 그리스어·시리아어 사본의 차이를 근거로 긴 본문이 더 이른 형태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있고, 반대로 짧은 본문이 원래 형태이며 긴 본문은 초기 교회의 성찬 이야기를 반영해 늘어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형태가 누가의 최초 본문인지는 단정하지 않는 것이 적절합니다. 긴 본문의 빵과 잔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23–25의 바울의 성찬 전승과 표현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 새 언약과 기억이라는 요소를 공유합니다.

자신을 내어 주시겠다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다툽니다

누가복음 22:24–30 본문 →

마지막 식탁에서 벌어진 다툼

그들 사이에 누가 가장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는지를 두고 다툼도 일어났습니다.누가복음 22:2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방금 자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을 위해 내어 주신다고 하셨고, 배반자가 식탁에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 다투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툼은 처음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9:46에서도 같은 논쟁이 일어났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며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가 가장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는지」라는 표현은 실제 권력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 속에서 누가 더 높게 여겨지는가의 문제도 포함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왕들은 백성 위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은인이라고 불린다.」누가복음 22:25 · 두루새김

헬레니즘과 로마 세계에서는 권력자나 부유한 후원자가 돈으로 도움을 주거나 공공시설을 세우고, 그 대가로 명예와 충성을 얻는 관행이 널리 있었습니다. 도시와 공동체는 그런 사람을 은인으로 칭송했습니다. 권력자는 사람들을 지배하면서도 은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을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모순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마라.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고, 이끄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라.」누가복음 22:26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과 「이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역할을 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라고 하십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문화 속에서,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눈앞의 식탁을 가리키십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있다」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누운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누운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있다.」누가복음 22:27 · 두루새김

모두 식사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대접받는 사람이 시중드는 사람보다 높았고,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자신은 섬기는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요한복음 13장의 것이고, 누가가 기록한 것은 이 선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위를 포기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권위가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 위에 서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큰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기십니다.

예수님의 섬김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잠시 뒤 올리브산에서 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투는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너희는 내가 여러 시험을 겪는 동안 줄곧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다.」누가복음 22:2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 직후, 그들이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넘겨주려 하고 베드로는 곧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어온 시간을 지워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에 배반을 이미 결심한 유다가 어떻게 포함되는지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누가는 식탁을 떠나는 유다의 모습을 따로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하시고 이렇게 이어 가십니다.

「너희가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게 하려는 것이다. 또 너희는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누가복음 22:30 · 두루새김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지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소망을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새롭게 설명하십니다. 왕좌는 서로 경쟁하여 빼앗을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라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그 권위도 앞서 말씀하신 섬김의 원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두루새김이 「심판할 것이다」(κρίνω)로 옮긴 원문의 말은 심판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다스리는 역할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을 주신 직후 한 제자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31–34 본문 →

사탄은 베드로만을 시험하려 했을까요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로 치려고 내달라고 요구했다.」누가복음 22:3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시지만, 「너희를」은 원문에서 복수형입니다. 사탄이 시험하려 한 대상은 제자들 전체입니다. 반면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시는 「너를」은 단수형으로,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밀처럼 체로 치려고」 한다는 것은 곡식을 체에 넣고 흔들어 알곡과 다른 것들을 가르는 행동에서 나온 이미지입니다. 여기서는 사람을 강하게 흔들어 믿음과 충성을 시험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해 기도했다. 너는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해라.」누가복음 22:32 · 두루새김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뜰의 불가에 앉지도 않았고, 여종의 질문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를 위해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시고, 그가 「돌아오거든」 해야 할 일까지 알려 주십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가 실패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실패가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를 지나 돌아온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을 굳세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음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몬이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음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22:33 · 두루새김

그 순간 베드로는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과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말할 것이다.」누가복음 22:34 · 두루새김

앞에서는 「시몬아, 시몬아」라고 부르셨는데, 이제는 「베드로야」라고 부르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베드로」라고 부르시는 것은 이 자리뿐입니다. 바위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곧 예수님을 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게 됩니다. 누가가 의도한 대조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독자에게는 분명한 역설로 다가옵니다.

베드로는 아직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그 약함을 아시면서도 그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올리브산으로 가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매우 어려운 말씀을 더 하십니다.

「칼을 사라」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준비시키셨습니까

누가복음 22:35–38 본문 →

이전과는 다른 시간이 다가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가방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모자란 것이 있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누가복음 22:35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 9:1–6과 10:1–12에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갖춘 다음에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나 사람들이 맞아 주고 필요한 것을 내어 주는 데 의지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가방이 있는 사람도 그것을 챙겨라.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누가복음 22:36 · 두루새김

이전에는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챙기라고 하십니다.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그는 법을 어긴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라는 말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에 관해 기록된 일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2:37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53:12의 직접 인용입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은 멸시받고 고난을 겪으며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법을 어긴 사람처럼 취급받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이전과 달리 적대적인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이 점까지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칼을 사라」라는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훨씬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력 저항을 명령하셨을까요

이 구절은 다가올 위험에 대비해 자신을 보호할 수단을 갖추라는 실제적인 지시로, 위험의 시대가 닥친다는 것을 강조하는 과장된 표현으로, 또는 예수님께서 법을 어긴 사람처럼 취급받는 상황과 직접 연결된 말씀으로 읽힙니다. 어느 해석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실제 무장 명령이었다면 왜 곧이어 제자가 칼을 쓰는 것을 멈추게 하셨는지, 단순한 비유였다면 제자들이 실제로 칼 두 자루를 내놓는 장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남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무조건적인 무장 명령으로 확정하거나, 반대로 칼이라는 말에 실제 무기와 관련된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여기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됐다.」누가복음 22:38 · 두루새김

「됐다」에 해당하는 히카논 에스틴(ἱκανός)은 「충분하다」는 뜻으로도, 「이제 그만하자」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자루면 충분하다고 인정하신 것일 수도 있고, 제자들이 말씀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칼의 개수를 이야기하자 대화를 중단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밝히지 않으므로, 곧이어 실제로 칼이 사용될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가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세 읽기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실제적인 지시로 보는 읽기는 제자들이 앞으로 적대적인 환경에서 활동하게 되므로 여행 물품과 함께 보호 수단도 갖추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과장된 표현으로 보는 읽기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상황이 닥친다는 사실을 극단적인 말로 강조하셨다고 봅니다. 세 번째 읽기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칼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이사야 53:12처럼 예수님을 법을 어긴 사람으로 취급하는 상황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을 누가가 구약에 전해지는 폭력과 복수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는 읽기도 있고, 38절과 51절의 표현이 모호하다는 점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모든 무력 사용을 원칙적으로 부정하셨다고 단정하는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님께서 구하신 것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22:39–46 본문 →

예수님께서는 늘 가시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가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따라갔습니다.누가복음 22:3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위기가 닥쳤다고 해서 낯선 곳으로 숨어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앞 장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산에서 묵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21:37). 유다가 그 장소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누가는 유다가 정확히 어떤 정보를 넘겼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라.」누가복음 22:40 · 두루새김

사탄은 제자들을 밀처럼 체로 치려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시험 속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시고, 자신도 제자들에게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큼 떨어져 무릎을 꿇으십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아버지, 원하시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누가복음 22:4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피하실 수 있다면 피하고 싶으시다는 뜻을 아버지께 솔직히 말씀드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아무런 두려움이나 괴로움 없이 받아들이셨다고 설명하면, 이 기도의 무게가 사라집니다. 성경에서 잔은 하나님의 심판과 고난을 가리키는 비유로도 쓰이고, 여기서도 곧 닥칠 고난과 죽음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바람을 숨기지 않으시면서도, 그 바람을 마지막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순종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고난의 무게를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보다 앞세우는 행동입니다.

누가복음 11:2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스스로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뒤 자신도 그 시험의 자리에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다른 길을 걷지 않으십니다.

천사가 힘을 주고, 예수님께서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 힘을 주었습니다.누가복음 22:43 · 두루새김
예수께서는 괴로움 속에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핏덩이처럼 땅으로 떨어졌습니다.누가복음 22:44 · 두루새김

이 두 절은 일부 고대 사본에는 없습니다. 두루새김에 실린 형태대로 읽으면, 천사가 힘을 준 뒤에도 예수님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하늘에서 오는 도움은 고난의 무게를 느끼지 않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힘을 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땀이 핏덩이처럼」은 「처럼」이라는 비교 표현으로, 의학적 진단이라기보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괴로움이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왜 잠들었을까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2:45 · 두루새김

누가는 제자들이 잠든 이유를 슬픔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복음서의 겟세마네 장면과 비교할 때 누가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제자들은 게으르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배반자와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말씀을 들은 무게에 지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괴로움을 겪으셨지만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슬픔 때문에 잠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자고 있느냐? 일어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라」 하며 그들을 깨우십니다. 그들의 슬픔을 모른 척하지 않으시지만, 시험이 다가왔기 때문에 그 상태에 머물도록 두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무리가 도착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잔을 심판에 비유하는 구약 본문으로는 예레미야 25:15–29(여호와야훼께서 예언자에게 진노의 잔을 받아 민족들에게 마시게 하라고 하심)와 이사야 51:17(예루살렘이 여호와야훼의 진노의 잔을 마심)이 있습니다. 다만 22:42만으로 그 고난이 죄를 씻는 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2:43–44가 누가가 처음 기록한 본문에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오래된 논쟁이 있습니다. 초기에 본문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추가되었을 가능성을 말하는 해석도 있고, 초기 사본에서 삭제되었을 가능성을 지지하는 해석도 있어,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칼을 든 제자와 다친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22:47–53 본문 →

유다는 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넘겼을까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유다는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다가갔습니다.누가복음 22:47 · 두루새김

처음에는 지도자들과 몰래 거래하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도 그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되풀이해, 이 배반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 안에서 일어났는지 드러냅니다. 입맞춤은 당시 친밀함이나 존경을 표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느냐?」누가복음 22:4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가 왜 다가오는지 아시면서도 이름을 부르시고, 친밀함의 표현이 배반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식탁의 친밀함과 입맞춤의 친밀함이 모두 배반의 이야기 속에 놓입니다.

제자들은 칼을 사용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예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차리고 물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칼로 쳐도 되겠습니까?」누가복음 22:4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칼로 저항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도 전에 한 사람이 행동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누가복음 22:50 · 두루새김

누가는 칼을 휘두른 사람을 이름 없는 제자로 남겨 둡니다. 그가 친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으로, 예수님을 붙잡을 일을 계획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위협에 칼로 대응한 결과는 한 사람의 귀가 잘려 나가는 상처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두어라.」 그리고 그 종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습니다.누가복음 22:51 · 두루새김

「그만두어라」는 제자들에게 칼을 그만 쓰라는 말로도, 붙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 정도는 허용하라는 말로도 읽히지만, 바로 다음 행동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종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십니다.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장면입니다.

제자는 칼을 휘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어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제자가 예수님을 지키려고 입힌 상처를,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십니다. 이 장면을 모든 상황에서 모든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일반 법칙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실제로 하신 일은 분명합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예수님의 마지막 치유는 자신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지금은 너희의 때이며, 어둠이 힘을 휘두르는 때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붙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강도를 잡으러 나오듯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었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때이며, 어둠이 힘을 휘두르는 때다.」누가복음 22:53 · 두루새김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성전에서는 예수님을 붙잡지 않고, 밤에 무장한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붙잡을 수 있는 때가 왔다고 인정하시면서도, 그때를 「어둠이 힘을 휘두르는 때」라고 부르십니다. 법과 종교의 권위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장의 처음에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도, 지도자들에게도 그들의 행동이 무엇인지 직접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의 때」는 제한된 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권위를 최종적으로 없애는 일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장의 마지막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51절의 「그만두어라」는 원문 표현이 문법적으로 해석이 갈립니다. 제자들에게 칼을 사용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신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잠시 기다리거나 이 정도는 허용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읽기를 택했습니다. 칼을 휘두른 사람을 요한복음 18:10은 베드로라고 밝힙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도 귀가 잘리는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만, 잘린 귀를 고쳐 주시는 장면은 없습니다.

멀찍이 따라간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바라보십니다

누가복음 22:54–62 본문 →

베드로는 도망하지 않았지만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붙잡아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습니다.누가복음 22:54 · 두루새김

그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합니다. 「멀찍이 떨어져」는 실제 거리를 말하면서, 이 장면에서는 베드로가 처한 상황을 보여 주는 말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겠다던 사람이, 지금 함께 붙잡혀 가지 않습니다.

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으로 끌려가셨고, 사람들은 뜰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앉아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들 사이에 앉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 드러날 수 있는 위험한 자리입니다.

세 번의 질문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첫 번째 질문은 여종에게서 나옵니다. 그는 불빛 곁의 베드로를 빤히 바라보며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부인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몰라요.」누가복음 22:57 · 두루새김

첫 번째 부인은 예수님과의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조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예요.」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니에요.」누가복음 22:58 · 두루새김

이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속한 사람인지가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또 다른 사람이 힘주어 말했습니다. 「분명히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갈릴리 사람이잖아요.」누가복음 22:59 · 두루새김

이번에는 베드로의 출신 지역이 근거로 제시되어, 의심이 더 강해집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저는 몰라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곧 닭이 울었습니다.누가복음 22:60 · 두루새김

말을 마친 뒤가 아니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닭이 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주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말할 것이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누가복음 22:61 · 두루새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장면입니다. 다른 복음서들도 베드로가 닭 울음에 잘못을 깨닫는 이야기를 전하지만, 누가는 그사이에 예수님의 시선을 넣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보실 수 있는 위치에 계셨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을까요? 실망이었을까요? 슬픔이었을까요? 책망이었을까요? 아니면 베드로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을까요?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 시선을 해석하는 대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고 기록합니다.

독자는 그 말씀에 앞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독자가 보고 있는 것은 베드로의 실패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고, 그가 돌아올 때를 위해 기도하셨던 실패입니다.

밖으로 나가 몹시 웁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습니다.누가복음 22:62 · 두루새김

누가는 그가 용서를 구했다고도, 예수님께 돌아갔다고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부인한 것은 한 선생님과 알고 지낸 사실이 아니라, 믿고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주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그러나 그의 울음은 죄책감의 마지막 장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돌아온 뒤에 형제들을 굳세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뜰 밖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떠나지 못하십니다.

눈을 가린 사람들은 누구이며, 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22:63–65 본문 →

「예언해 보아라!」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때리며 조롱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얼굴을 가리고 물었습니다. 「예언해 보아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냐?」누가복음 22:64 · 두루새김

독자는 바로 앞에서 베드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직후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예언 능력이 있다면 보여 보라고 조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겪으실 고난도, 유다의 배반도, 베드로의 부인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언이란 눈을 가린 채 누가 때렸는지 맞히는 능력 정도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보여 준 예수님의 예언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지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입니다. 본문이 직접 설명한 상징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바로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선을 받고 자신이 한 일을 깨달았고, 예수님을 때리는 사람들은 그 눈을 가리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이 조롱에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맞고 모욕당하십니다. 그리고 날이 밝습니다.

「너희는 내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 예수님께서는 누구신가

누가복음 22:66–71 본문 →

의회는 예수님께 대답을 요구합니다

날이 밝자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여 예수님을 의회로 끌고 갑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말해라.」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말해도 너희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2:67 · 두루새김
「내가 물어도 너희는 결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2:6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누가복음 20장의 성전 논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지도자들은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물었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되물으시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화에서 이미 드러난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한 설명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의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자신에 관해 결정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이제부터」 인자는 어디에 계시는가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는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2:6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의회 앞에 서 계십니다. 밤새 모욕과 폭력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을 심문하는 의회보다 더 높은 권위인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에는 두 구약 본문의 모습이 함께 나타납니다. 시편 110:1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시인이 「내 주」라고 부르는 이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0:42–44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니엘 7:13–14에서는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 두 본문은 같은 장면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모습이 가리키는 권위를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이 선언은 「이제부터」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순간을 가리키는지는 논의할 수 있지만, 누가의 이야기 안에서는 분명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너희의 때이며, 어둠이 힘을 휘두르는 때다」(22:53)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의회 앞에서는 「이제부터」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피고의 자리에 세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 권세를 받으실 인자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들이 모두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누가복음 22:70 · 두루새김

이 대답의 원문 휘메이스 레게테 호티 에고 에이미는 직역하면 「너희가 내가 그라고 말한다」에 가깝습니다. 어떤 번역은 이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시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상대방의 표현을 되돌려 주면서,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의 칭호를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으시는 대답으로 읽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으므로, 70절만 떼어 자신의 정체를 전혀 밝히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심문자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입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이제 무슨 증언이 더 필요하겠느냐? 우리가 직접 그의 입에서 들었는데.」누가복음 22:71 · 두루새김

이것이 누가복음 22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들은 충분한 말을 들었다고 판단하지만, 그 말씀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고발할 근거로 삼으려 합니다. 직접 들었다는 사실과 그 말씀의 진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었지만, 그 지식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께서 지키신 것

누가복음 22:1–71 본문 →

그 밤에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조롱하고, 죄인으로 판단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유다는 입맞춤으로 넘겨주었고, 제자들은 마지막 식탁에서도 높은 자리를 다투었으며,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고, 의회는 예수님을 고발할 근거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자신이 어떤 분으로 살아가실지를 결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가 배반한다고 해서 제자들을 향한 섬김을 거두시지 않았고,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다고 말할 것이라고 해서 그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무장한 사람들 가운데 상처 입은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믿지 않을 사람들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실 권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결정한 가장 깊은 기준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올리브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자신이 얼마나 강하게 결심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생각했지만, 그 결심은 그날 밤의 질문들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결심을 믿음의 마지막 보증으로 삼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모르는 사람이 큰소리로 충성을 약속하는 것보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돌아오는 일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붙잡혀 서 계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권위 아래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이 누구신지 끝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인자는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을 것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