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머리말과 탄생
모든 사람이 볼 하나님의 구원
누가복음 3장은 일곱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디베료 황제, 본디오 빌라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 안나스, 가야바.
앞의 다섯 사람은 당시 로마 제국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고, 뒤의 두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적 권력과 관계된 인물들입니다. 누가는 이렇게 황제로부터 지방 통치자와 대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상을 움직이던 권력자들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긴 명단이 끝난 뒤 등장하는 문장은 뜻밖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이던 때에, 하나님의 말이 광야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누가복음 3:2 · 본디새김
하나님의 말씀은 황제의 궁전에도, 총독의 관저에도, 예루살렘 성전에도 임하지 않습니다.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임합니다.
누가는 권력자들이 모두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시기를 밝히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디베료 통치 15년째는 통상 기원후 28~29년 무렵으로 계산되지만, 당시의 연호 계산 방식에 관한 논의가 있어 정확한 시작일을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연대와 통치자를 밝힌 뒤, 누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에게는 통치하는 영토도, 군대도, 관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예언서에서 익숙하게 만나는 문장입니다. 예레미야 1:2와 호세아 1:1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자에게 임하는 사건이 그의 활동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누가는 광야의 요한을 그 예언자들의 계보에 세웁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전하는 말씀은 다가오는 구원과 함께 다가오는 심판을 알립니다. 그는 회개를 요구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에 도끼가 놓여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는 과연 어떤 분일까요?
요한의 말대로라면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고, 밀과 겨를 가르실 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분이 등장하시는 장면을 보면 예상과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길을 준비하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요한은 요단강 일대를 다니며 「죄 용서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생각과 방향의 전환을 가리키며, 요한의 선포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서는 삶의 변화를 포함합니다. 누가는 요한의 사역을 설명하자마자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이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담긴 책에 이렇게 적힌 그대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주의 길을 마련하라. 그분의 길을 곧게 하라.』」누가복음 3:4 · 본디새김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굽은 곳은 곧은 길이 되고 험한 곳은 평탄한 길이 될 것이다.』」누가복음 3:5 · 본디새김
「『그리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누가복음 3:6 · 본디새김
이 인용은 이사야 40:3–5에 근거합니다. 이사야 40장은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통 속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위로와 회복을 선포하는 새로운 단락의 시작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고난이 끝날 것을 알리십니다.
그리고 광야에 길을 마련하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대 세계에서 왕이 행차할 때 산과 골짜기, 험한 길이 방해하지 않도록 길을 정비하는 모습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이사야에서 그 길은 궁극적으로 여호와야훼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에 길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누가는 이 말씀을 요한의 사역에 적용합니다. 마가복음 1:3과 마태복음 3:3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뒤에 나오는 골짜기와 산, 굽은 길의 이미지까지 이어서 기록하고, 마지막에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맺습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누가의 이야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누구를 위한 길인가
이사야 40:5의 히브리어 본문은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그리스어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누가는 그리스어 성경의 표현을 따라갑니다.
「모든 육체」는 모든 살아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안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을 보게 될 대상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단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러 광야로 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선포합니다. 구원의 출발점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려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분이 오실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골짜기를 메우고 산을 낮추며 굽은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이사야 본래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길을 묘사하는 시적 이미지입니다. 누가는 그 이미지를 요한의 회개 선포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오시는 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 이미지를 설명하는 긴 신학적 강론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이 요한에게 던지는 질문,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를 기록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골짜기나 산이 아니라 옷과 음식, 세금과 군인의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어디에서 맺히는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환영하는 말부터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했다. 「독사의 새끼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었느냐?」누가복음 3:7 · 본디새김
요한은 그들이 세례를 받으려 한다는 사실보다, 그 세례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려 하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회개의 세례는 임박한 심판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걸맞은 열매를 내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킬 수 있으니, 속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하지 마라.」누가복음 3:8 · 본디새김
요한은 단지 회개했다고 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열매를 내라고 합니다.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열매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의 삶도 그에 걸맞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언약적 정체성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요한은 그 언약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회개의 필요성을 피할 수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일을 혈통에만 묶어 둘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 요한이 이방인들을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신학을 모두 설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지위가 심판으로부터의 무조건적인 면제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내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누가복음 3:9 · 본디새김
도끼가 언젠가 준비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심판의 가능성이 먼 미래의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중한 경고를 들은 사람들은 요한을 떠나지 않습니다.
질문합니다.
무리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누가복음 3:10 · 본디새김
옷 한 벌이 회개의 열매가 된다
요한의 대답은 놀라울 만큼 일상적입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속에 받쳐 입는 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누가복음 3:11 · 본디새김
요한은 사람들에게 광야로 들어와 자신처럼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종교 의식을 더 행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가진 옷과 음식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옷은 바깥에 걸치는 외투가 아니라 몸에 입는 기본적인 의복으로,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수량의 재산을 가지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는 삶을 회개의 열매로 제시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결핍을 알아보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과 이웃을 향한 책임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세리와 군인에게는 무엇이 요구되는가
이어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정해진 세액보다 더 거두지 마라.」누가복음 3:13 · 본디새김
세리는 세금과 통행세 등을 거두는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세금 징수 구조에서는 징수 과정의 부정과 남용이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세리가 똑같은 제도로 일했다거나 모두 부정직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세리의 일 자체를 즉시 그만두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직무와 권한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우리도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에게서도 위협하여 빼앗지 말고 아무도 거짓으로 고발하지 마라. 그리고 너희 급료에 만족하여라.」누가복음 3:14 · 본디새김
질문은 같은 구조인데, 요한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맞춰 각각 다른 대답을 합니다. 군인들은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협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그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에게 주어진 대답을 함께 놓으면 이렇습니다.
옷과 음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나누라고 합니다.
세금을 거두는 사람에게는 부당하게 더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합니다.
세 대답은 서로 다르지만 한 방향을 향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요한에게 회개는 종교적인 신분을 얻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행동을 통해 사람이 스스로 구원자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분을 맞이할 준비로 회개에 걸맞은 열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정직과 절제는 구원자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구원자를 맞이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은 점차 요한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군인들이 정확히 어느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병력과 관계된 사람들일 가능성 등이 논의되지만, 누가는 그들의 소속을 밝히지 않습니다.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요한의 선포를 들은 백성은 마음속으로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헤아립니다.
요한은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회개를 요구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 기대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장차 오실 분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이 모두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힘센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 그분은 너희에게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누가복음 3:16 · 본디새김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당시 낮은 지위의 사람이 맡는 봉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은 그 일조차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만큼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두 사람이 행하는 일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고, 그 회개를 나타내는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그가 선포하는 구원이 완성되도록 하는 일은 자신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사람들을 준비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과 최종적인 심판을 가져오는 일은 장차 오실 분의 권한에 속합니다.
그분은 요한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분입니다.
성령과 불은 무엇을 뜻하는가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불은 무엇일까요? 읽기는 셋으로 갈립니다. 불을 하나님이 백성을 정결하게 하고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보는 읽기, 구원의 성령과 대비되는 심판의 불로 보는 읽기, 성령의 오심에 정결과 심판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는 읽기입니다. 이 차이는 모든 사람이 성령과 불을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오시는 분을 향한 반응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맞는 것인지와 관계됩니다. 문장 자체만으로는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왜 곧이어 밀과 겨의 이미지를 사용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그분은 손에 곡식을 까부르는 갈퀴를 들고 계신다. 자기 타작마당을 말끔히 치우고 밀을 자기 곳간에 모아들이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겨는 꺼지지 않는 불에 다 태워 버리실 것이다.」누가복음 3:17 · 본디새김
곡식을 타작한 뒤에는 바람을 이용해 가벼운 겨와 무거운 알곡을 가려내야 합니다. 요한은 장차 오실 분을 그 작업을 마무리하실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분은 단지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알리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밀을 모으시고 겨를 가르실 분입니다.
「자기 타작마당」과 「자기 곳간」이라는 표현은 오시는 분이 타작마당을 정리할 권한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요한은 백성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하지만, 마지막에 열매를 판별하고 심판하는 일을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하실 분이 오십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처럼 엄중한 경고를 설명한 뒤 뜻밖의 문장으로 요한의 선포를 정리합니다.
이처럼 그는 그 밖에도 많은 것을 권하며 백성에게 복음을 전했다.누가복음 3:18 · 본디새김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책망,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 꺼지지 않는 불까지 이야기했는데 왜 이것이 기쁜 소식일까요? 심판 자체가 즐거운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와 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시려 한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에게로 사람들을 모으는 대신, 자신보다 능력이 크신 분이 오고 계신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요한의 선포가 복음인 까닭은 결국 요한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분에게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불을 정결의 능력으로 읽는 근거로는 오실 분을 정련하는 불에 비유하는 말라기 3:2–3과, 성령이 임할 때 불꽃처럼 갈라지는 혀들이 나타나는 사도행전 2:3–4가 있습니다. 심판으로 읽는 근거는 가까운 문맥입니다. 바로 앞의 9절에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가 불에 던져지고, 바로 다음 17절에서는 겨가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집니다. 가까운 문맥의 불은 분명하게 심판의 이미지이므로, 16절을 구원의 성령과 심판의 불이라는 서로 다른 결과로 이해하는 견해에는 강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예언자
누가는 요한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감금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분봉왕 헤롯은 자기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 일로, 또 자기가 저지른 모든 악한 일로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있었으며,누가복음 3:19 · 본디새김
그 모든 일에 이것까지 더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이다.누가복음 3:20 · 본디새김
처음 등장했던 통치자들의 명단 가운데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이 요한의 선포에 반응합니다.
백성은 요한의 책망을 듣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세리들도 물었습니다. 군인들도 물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요한에게 책망받자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요한의 말씀 앞에 선 사람들의 반응이 모두 같지 않습니다. 앞서 군인들에게 힘으로 다른 사람을 위협하여 빼앗지 말라고 했던 요한은 이제 통치자의 악한 행동을 책망합니다. 그의 선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멈추지 않고 권력자에게도 같은 도덕적 책임을 요구합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이야기를 마친 다음, 누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뜻일까요? 반드시 그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1:9과 마태복음 3:13–17은 요한이 활동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누가는 사건들의 정확한 발생 순서를 일일이 따라가기보다, 여기서 요한의 공적 활동을 하나의 이야기로 마무리한 뒤 예수님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길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길을 준비받으실 분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십니다.
그런데 요한이 손에 갈퀴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리하실 분이라고 선포한 예수님은 처음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까요?
백성 가운데 한 사람처럼 세례를 받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사건은 성경 밖의 역사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18권 116–119절에서 헤롯 안티파스가 요한을 가두고 죽였다고 기록합니다. 다만 헤롯이 요한의 대중적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반란 가능성을 막으려 했다고 설명하므로, 복음서가 강조하는 헤로디아 문제와는 동기의 설명이 다릅니다. 두 기록은 요한의 감금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공유하지만, 헤롯이 왜 그를 제거하려 했는지 설명하는 방식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누가는 감금 사건을 먼저 언급한 뒤, 세례를 베푼 사람이 누구인지 직접 말하지 않은 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서술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놀라울 만큼 짧습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을 때, 예수도 세례를 받은 뒤 기도하는 가운데 하늘이 열렸다.누가복음 3:21 · 본디새김
마태복음 3:13–17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주저하는 모습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기록됩니다. 누가는 그 대화를 전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늘이 열립니다.
누가복음에서 기도는 예수님의 삶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기 전에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6:12–13),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기도하고 계시며(9:18–20), 산 위에서 모습이 변하실 때에도 기도하십니다(9:28–29). 누가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는 장면에서도 기도를 특별히 부각하고 있습니다.
죄 용서를 선포하던 세례에 예수님도 참여하셨다
요한은 죄 용서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회개하셔야 했을까요?
누가는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셨다거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회개 선포가 아무 관계 없는 별개의 사건인 것도 아닙니다. 누가는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을 때,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세례를 죄인들과의 연대 또는 자신이 구원하실 백성과의 동일시로 이해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읽기는 이후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모습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누가는 3장에서 그 모든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를 이 한 가지로 완전히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그분이 손에 갈퀴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리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장면에서 누가는 그분이 사람들을 심판하시거나 명령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백성과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때 하늘이 열립니다.
하늘의 목소리는 누구에게 말하는가
그리고 거룩한 영이 몸을 지닌 모습으로, 비둘기처럼 예수 위에 내려왔다.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두고 기뻐했다.」누가복음 3:22 · 본디새김
하늘의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내 아들이다」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직접 말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설명하는 말이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서술됩니다.
그렇다고 누가가 이 목소리를 예수님 혼자만 들으셨다고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청중의 범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발화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구약의 두 본문이 연결됩니다. 시편 2:7에서 하나님은 기름 부음 받은 왕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편은 본래 이스라엘 왕권의 문맥에서, 왕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도록 세움받았다는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왕권의 언어를 예수님에게 적용하도록 독자를 이끕니다.
또 이사야 42:1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붙들고 기뻐하는 종을 소개하시고, 그에게 자신의 영을 주어 민족들에게 정의를 베풀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음성은 직접적인 한 구절의 완전한 인용이라기보다, 이 두 표현이 하나의 선언 안에서 만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기쁨을 받으시는 분이고, 성령이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왕권과 성령으로 수행할 사명이 함께 나타납니다. 이 선언만으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모든 사역이나 예수님의 장래 고난을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분으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는지는 선명해집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는 것은
누가는 성령의 내려오심이 「몸을 지닌 모습으로, 비둘기처럼」 나타났다고 서술합니다. 이 표현이 성령 자체가 실제 새로 변했다는 것을 반드시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 분명한 사실은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장차 오실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분이 등장하시자 성령이 그분 위에 내려옵니다. 요한의 말이 가리키던 분이 누구신지 밝혀 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분이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는 뜻일까요? 누가의 앞선 서술은 그렇게 읽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것이라고 기록했고(1:35), 열두 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장면도 전했습니다(2:49).
따라서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하늘의 음성으로 확증되고, 성령의 내려오심을 통해 그분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엄청난 선언 다음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곧바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름들이 길게 이어지는 족보를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고대 증거에는 하늘의 음성이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시편 2:7에 더 가까운 형태로 전해집니다. 이 읽기는 예수님의 아들 되심이 세례 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논의를 낳았습니다. 다만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읽기는 더 이른 그리스어 사본에서도 확인되며, 서로 다른 사본을 근거로 예수님의 신분이 그날 처음 생겨났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비둘기가 상징하는 것을 두고는, 창세기 8장에서 노아의 방주로 돌아오는 비둘기와 연결하여 새로운 시작을 읽기도 하고, 창세기 1:2의 수면 위에 있는 하나님의 영과 연결하여 새로운 창조의 이미지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가 이 장면에서 그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러한 연결은 정경 전체를 고려한 주제적 해석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아담의 아들까지
족보는 쉽게 건너뛰게 되는 부분입니다.
요셉, 헬리, 맛닷, 레위, 멜기, 얀나……. 낯선 이름들이 계속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아담에 이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족보가 놓인 자리가 특별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너는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 직후, 누가는 예수님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일을 시작할 때 서른 살쯤이었다. 그는 요셉의 아들로 여겨졌고, 요셉은 헬리의 아들,누가복음 3:23 · 본디새김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두 차원을 나란히 놓습니다.
예수님은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태어나셔서 한 가족 안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선언은 그분의 정체가 그 사회적 관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 끝나자마자 누가는 그분이 속하신 인간의 역사를 길게 펼쳐 놓습니다.
족보는 왜 뒤에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는가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게로 내려옵니다. 누가복음은 반대 방향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지나고, 노아를 지나고, 마지막에는 아담에 이릅니다.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의 역사 안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보여 줍니다. 누가 역시 아브라함과 다윗을 지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의 계보를 인류의 시작에까지 연결합니다.
요한이 준비하는 길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길입니다. 그 구원을 가져오실 예수님의 족보는 이스라엘의 조상을 넘어 온 인류의 조상이라고 묘사되는 아담에게까지 도달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계없는 보편적인 구원자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속한 역사가 아담에게까지 이어지는 더 넓은 인간의 역사 속에 놓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족보가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두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는 상당 부분 같은 인물들을 공유하지만, 다윗 이후에 크게 갈라집니다. 마태복음 1:6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거쳐 내려오고, 누가복음 3:31은 다윗의 아들 나단을 거쳐 올라갑니다. 요셉의 아버지도 마태복음 1:16에서는 야곱, 누가복음 3:23에서는 헬리입니다.
이 차이를 설명하는 견해는 셋으로 갈립니다. 누가가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했다는 견해, 두 족보가 모두 요셉과 관련되지만 하나는 법적 관계를, 하나는 혈통적 관계를 기록했다는 견해, 두 복음서가 서로 다른 계보 자료와 신학적 구성 방식을 사용했다는 견해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설명도 모든 차이를 확실하게 해결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족보의 의미를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두 족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역사적 질문과, 누가가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족보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누가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역사에 연결하면서도 그 연결을 아담까지 확장한다는 것은 족보 자체의 배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특징입니다.
마지막 이름이 아담인 이유
누가의 족보는 이렇게 끝납니다.
가이난은 에노스의 아들, 에노스는 셋의 아들, 셋은 아담의 아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누가복음 3:38 · 본디새김
세례 장면과 족보의 마지막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정확히 같은 의미일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다른 인간 조상을 통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첫 사람입니다. 누가가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존재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특별한 탄생의 약속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되셨으므로, 아담과 예수님을 똑같은 종류의 아들이라고 단순하게 등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같은 표현을 서로 다른 맥락에 놓음으로써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류의 시작에 아담이 있고, 지금 새로운 구원의 시작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 밖에서 그 역사를 구경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그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리아의 족보라는 견해에서는 누가의 헬리를 마리아의 아버지로, 요셉을 그의 사위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자신의 족보가 마리아의 족보라고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이 설명을 사실로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법적·혈통적 관계로 나누는 견해에서는 유대 사회의 형사취수 관습이나 법적 부자 관계가 설명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 견해는 두 족보를 하나의 실제 계보로 완전히 조화시키기 어렵다고 봅니다. 나단 역시 다윗의 아들로 사무엘하 5:14에 기록되어 있고, 두 족보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같은 이름에서 일부 겹치지만 그 전후의 계보는 다시 달라집니다. 한편 아담과 예수님의 연결은 바울의 로마서 5:12–21이나 고린도전서 15:21–22, 45–49와 함께 읽을 때 더 풍성해집니다.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와 생명의 길이 열렸다고 대조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발전시킨 이러한 신학을 누가복음 3장에 그대로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이곳에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순종을 직접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 직후 계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구성이, 정경 전체를 읽는 독자가 예수님과 인류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길은 누구에게 열리는가
누가복음 3장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질문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 이르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회개의 부름은 사람의 출신과 직업을 가로질러 다가왔습니다. 무리도, 세리도, 군인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고, 헤롯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가두었습니다. 반응은 갈리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혈통이나 권력, 직업이나 종교적 지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면제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고 밀과 겨를 가르실 권한을 가지셨다고 선포한 분은, 회개하러 나온 백성 사이에 서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와 악을 가볍게 여기시는 분도, 인간의 현실과 멀리 떨어져 심판만 기다리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분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는 선언을 곧바로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실제로 회개의 요구와 심판의 경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소식이 향하는 범위가 특정한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요한은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서 사람들을 만나실 분은 요한이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하늘에서 「너는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린 뒤, 인간의 긴 역사가 이어집니다. 요셉, 헬리, 맛닷, 레위, 다윗, 아브라함, 노아…….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이름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한 사람이 남습니다.
아담입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구원의 선포가 인간의 가장 먼 시작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계보의 맨 앞, 이제 막 자신의 일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그분 위에 성령이 내려오셨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그분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는 약속 앞에, 그 구원을 가져오실 아들이 서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