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9장 · 갈릴리에서의 활동
누구를 위한 기쁜 소식인가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놀라운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사로잡힌 이들이 풀려나며, 눈먼 이들이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반기시는 때가 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벼랑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화나게 했을까요?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해방과 은혜가 어째서 그토록 격렬한 거부를 불러일으킨 것일까요?
이 질문을 풀어 주는 열쇠가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반김을 받는 해를 선포하도록 나를 보내셨다」(4:19)고 읽으시고, 불과 다섯 절 뒤에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반김을 받지 못한다」(4:24)고 말씀하십니다. ‘반김을 받는(δεκτός)’과 ‘반김을 받지 못한다’는 그리스어로 같은 낱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반기시는 때가 찾아왔는데, 정작 그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는 자기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십니다.
누가는 이 역설을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는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광야의 시험을, 그 뒤에는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해방과 치유의 사건들을 배치합니다.
이 장의 여러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의 뜻에 따라, 누구를 위해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십니까?
광야에서 시험받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이 이끄신 곳이 광야였다
3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늘의 소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3:22). 이어지는 족보는 예수님을 거슬러 올라가 아담에 이르며, 아담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3:38).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신 예수님께서 처음 향하신 곳은 영광스러운 왕궁도, 환호하는 군중 앞도 아닙니다. 광야입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예수님을 이끈 분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는 거룩한 영으로 가득 차서 요단강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며 영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날이 다 차자 배가 고파졌다.누가복음 4:1–2 · 본디새김
예수님은 거룩한 영이 떠나셨기 때문에 광야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영으로 가득 차서 그곳에서 시험받고 계십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영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이끄시고(4:1), 갈릴리에서 능력으로 함께하시며(4:14), 나사렛에서는 이사야 말씀의 첫머리에 나타납니다(4:18). 따라서 광야의 시험은 앞으로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행하실 사역이 어떤 성격을 지닐 것인지를 처음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사십 일이라는 기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온 뒤 사십 년 동안 광야를 걸었습니다. 신명기 8:2–3에서 모세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낮추시고 시험하셨으며, 굶주림을 경험하게 하신 까닭을 설명합니다. 그들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십 일과 이스라엘의 사십 년은 동일한 사건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세 번의 시험에서 모두 신명기의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광야의 시험을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마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 —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마귀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말하여라.」누가복음 4:3 · 본디새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신 예수님의 배고픔을 마귀는 이용합니다. 그런데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무엇이 잘못일까요?
누가는 그 행위를 금지된 일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배고픔이 잘못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마귀가 예수님의 아들 됨을 권능을 행사해야 할 근거로 삼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의 필요를 해결할 능력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대답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누가복음 4:4 · 본디새김
신명기 8:3의 본래 문맥에서 이 말씀은 만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굶주리게도 하셨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던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은 생명이 먹을거리 자체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살리시는 여호와야훼께 달려 있음을 배우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빵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빵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빵보다 앞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기 필요를 즉시 충족할 권리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아들로서의 능력이 아버지께 대한 신뢰를 대신하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과 질병에 무관심하신 분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9:10–17에서는 굶주린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문제는 권능 자체가 아니라, 그 권능을 누구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가에 있습니다.
두 번째 시험 — 세상을 다스리되 하나님을 버리라는 제안
두 번째 시험은 훨씬 거대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한순간에 온 땅의 모든 나라를 보여 줍니다.
마귀가 그에게 말했다. 「이 모든 권세와 그 나라들의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 권세가 나에게 넘겨져 있고, 내가 원하는 누구에게나 주기 때문이다.」누가복음 4:6 · 본디새김
권세가 마귀에게 넘겨져 있다는 것은 누가의 설명이 아니라 마귀 자신의 주장이며, 그 주장이 어디까지 참인지를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분명한 것은 거래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그 모든 권세가 네 것이 될 것이다.」누가복음 4:7 · 본디새김
권세를 얻는 대가로 경배의 대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주 너의 하나님에게 절하여라. 그리고 그분만을 예배하여라.』」누가복음 4:8 · 본디새김
신명기 6:13이 속한 신명기 6장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풍요를 누릴 때 여호와야훼를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는 배고픔이 신뢰를 시험했다면, 풍요로운 땅에서는 번영과 권력이 그 신뢰를 시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일 자체를 거절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복음 1:32–33에서 천사는 이미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받으시고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마귀는 왕권을 제안하지만, 그 왕권을 얻는 길로 하나님 아닌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거부하십니다.
왕이 되느냐의 문제보다 어떤 왕이 되느냐의 문제가 앞서는 것입니다.
이 장 후반부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고,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할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4:32, 36).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께 충실하신 아들의 사역 안에서 드러납니다.
세 번째 시험 —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뛰어내려도 되는가?
마귀가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아래로 몸을 던져라.」누가복음 4:9 · 본디새김
이번에는 마귀 자신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시편 91:11–12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를 두고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여 너를 지키게 할 것이다.』」누가복음 4:10 · 본디새김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네가 돌에 발을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누가복음 4:11 · 본디새김
시편 91편은 여호와야훼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이 위험과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마귀는 그 약속을 거꾸로 사용합니다. 보호를 약속하셨으니, 일부러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 그 약속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이런 말씀이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누가복음 4:12 · 본디새김
신명기 6:16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마싸에서 여호와야훼를 시험한 사건입니다(출애굽기 17:1–7). 물이 없자 백성은 여호와야훼께서 정말 자기들 가운데 계시는지 따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신뢰하기보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이 정한 방식으로 행동하시도록 요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지만, 그 약속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수단으로 바꾸지 않으십니다.
세 시험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하려는 제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광야에서 드러난 아들의 모습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요구하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께 충실한 아들입니다.
마귀는 모든 시험을 마치고 「때가 오기까지」 떠납니다(4:13). 시험이 영원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상으로 나아가십니다.
나사렛 회당 — 하나님께서 반기시는 때가 왔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말씀
예수님은 거룩한 영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셔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십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길러지신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고 한 자리를 찾아 읽으십니다.
「주의 영이 내 위에 있다. 그분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가 사로잡힌 이들에게 풀려남을, 눈먼 이들에게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고, 짓눌린 이들을 풀어 놓아 보내며,」누가복음 4:1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61:1–2를 중심으로 하며, 이사야 58:6의 해방 선언도 포함합니다. 본래 이사야 61장은 황폐해진 시온의 회복을 바라보는 말씀으로, 여호와야훼께서 억눌린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시고 폐허가 된 곳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두루마리를 말아 돌려주고 앉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 귀에 들리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누가복음 4:21 · 본디새김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의 회복이 지금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난과 억압이 그날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실 분이 사람들 가운데 오셨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약속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선언입니다.
18절의 ‘기름을 붓다’는 표현은 왕이나 제사장 등을 특별한 직무에 세우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도 이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이사야가 전한 회복의 사명을 감당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의 내용이 뜻밖입니다.
왕의 권세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 눈먼 사람들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마귀는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보여 주었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실 때 가장 먼저 언급하신 사람들은 가난하고 사로잡히고 짓눌린 이들입니다.
풀려남이라는 말이 품은 의미
18절의 ‘풀려남’과 ‘풀어 놓아’에는 그리스어 원문에서 모두 아페시스(ἄφεσις)라는 낱말이 쓰입니다. 놓아 줌, 풀어 줌, 면제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런데 3:3에서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죄 용서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의 ‘용서’가 바로 같은 낱말입니다. 같은 말이 어떤 자리에서는 죄의 용서를, 다른 자리에서는 사로잡힌 사람의 풀려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해방은 무엇일까요? 이사야의 말씀을 내면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로만 읽으면 가난과 억압의 현실이 사라지고, 정치적·경제적 해방만을 뜻한다고 읽으면 누가가 이미 사용한 죄 용서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누가는 두 의미를 서로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을 죄에서 용서하시는 일과, 실제로 그를 짓누르는 힘에서 풀어 주시는 일 모두에 관계됩니다.
이사야 58:6에서 여호와야훼는 겉으로는 금식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모습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짓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이 표현을 이사야 61장의 인용에 함께 놓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명이 얼마나 구체적인 해방을 향하는지가 선명해집니다. 뒤에 이어지는 치유와 귀신 축출에서 예수님은 그 해방을 말로만 선포하지 않으시고 실제로 가져다주십니다.
‘주의 반김을 받는 해’는 어떤 해인가?
「주의 반김을 받는 해를 선포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누가복음 4:19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자유를 선포하고 상실한 땅과 자유를 회복하도록 한 레위기 25장의 희년을 떠올리게 합니다(레위기 25:8–13). 이사야 61장 역시 그와 같은 회복과 해방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다만 여기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은 예수님께서 희년의 성취를 직접 선언하셨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해석은 희년과의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누가복음의 중심 주제는 희년 법률의 직접 시행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오는 폭넓은 회복에 있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이 ‘해’는 달력상의 열두 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때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61:2에는 은혜의 해 뒤에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알린다는 말씀이 이어지지만, 예수님의 인용은 그 앞에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다른 자리에는 심판에 관한 가르침도 분명히 나옵니다. 다만 이 첫 설교에서 예수님은 은혜와 해방을 전면에 내세우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은혜가 누구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지가 논쟁의 중심이 됩니다.
처음에는 모두 좋게 말하지 않았는가?
모두 그를 두고 좋게 말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에 놀랐다. 그리고 말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누가복음 4:22 · 본디새김
누가는 사람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좋게 말하고 놀랐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질문도 처음부터 조롱이었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알던 사람에게서 뜻밖의 말씀이 나오자 놀라움을 드러낸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익숙한 출신 때문에 예수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은 이 질문이 어떤 문제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권능과 말씀을 지니고 고향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권능은 먼저 누구에게 베풀어져야 할까요?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
고향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했는가?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할 말을 먼저 꺼내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틀림없이 나에게 이 속담을 말할 것이다. 『의사야, 네 몸을 고쳐라. 우리가 가버나움에서 일어났다고 들은 그 모든 일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하여라.』」누가복음 4:23 · 본디새김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여기에서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는 예수님의 권능을 확인하려는 마음과 함께, 고향이라면 그 혜택을 누릴 특별한 자격이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엿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는 기적 대신, 두 예언자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왜 등장하는가?
예수님은 하늘이 삼 년 여섯 달 동안 닫혀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의 시대를 언급하십니다(4:25). 많은 과부가 굶주림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지지 않고, 오직 시돈 땅 사렙다에 사는 한 과부에게만 보내졌다.」누가복음 4:26 · 본디새김
열왕기상 17:8–24에서 엘리야가 만난 사렙다의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먹고 나면 아들과 함께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따라 행동했고, 그 집의 밀가루와 기름은 기근 동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지 않은 여인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참됨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았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 한 사람만 깨끗해졌다.」누가복음 4:27 · 본디새김
열왕기하 5:1–14의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던 시리아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전하자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결국 따랐고 깨끗해졌습니다. 이어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합니다(열왕기하 5:15).
두 사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의 경계 밖에서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스라엘은 버림받고 이방인만 선택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의 두 이야기는 그런 선언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정한 소속과 자격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향 출신의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해 주시기를 기대하던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경계를 넘어 은혜를 베푸셨던 사건들을 들려주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확신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반김’이라는 말이 되돌아오다
그가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반김을 받지 못한다.」누가복음 4:24 · 본디새김
하나님의 반김은 넓게 열려 있지만, 그 은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반김을 받지 못하십니다. 여기에는 유명한 사람이 고향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사회적 관찰보다 깊은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기대와, 그 은혜가 하나님 자신의 뜻을 따라 주어진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충돌한 것입니다.
물론 누가는 그들의 분노가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사례에 반발했을 수도 있고, 고향에 기적을 베풀라는 요구를 거절당했다고 느꼈을 수도 있으며, 두 요소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전개가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지만, 그 말씀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 앞에서는 분노했습니다.
벼랑 끝에서 일어난 일
회당에 있던 이들이 「모두 분노로 가득 찼다」(4:28). 그들은 예수님을 도시 밖으로 내쫓고 벼랑 끝으로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조금 전까지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던 사람들이 이제 그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은 뜻밖에 짧습니다.
그는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 계속 갔다.누가복음 4:30 · 본디새김
누가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자리를 벗어나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걸음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붙들어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의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향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은 아직 누가가 들려주지 않은 일입니다. 가버나움 이야기는 31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시간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14–1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소문이 퍼졌다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1–6과 마태복음 13:53–58에는 고향 방문이 사역의 상당 부분이 진행된 뒤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사역의 앞부분에 놓아 예수님의 사명과 그 사명을 거부하는 반응을 먼저 보여 주며, 이런 배열은 나사렛 이야기가 뒤이어 펼쳐질 사역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면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가버나움 — 해방을 선포하는 말씀이 해방을 이루다
가르침의 권위가 드러나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의 말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4:32 · 본디새김
나사렛에서처럼 가버나움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랍니다. 다만 누가는 여기서 단순히 지식이 많거나 표현이 뛰어난 것 이상의 ‘권위’를 강조하고, 그 권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곧바로 보여 줍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의 영을 지닌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 나사렛 사람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를 멸하러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누가복음 4:34 · 본디새김
광야에서 마귀는 두 번이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가버나움의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부르고, 뒤이어 다른 귀신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4:41). 3장에서 하늘이 선언했던 예수님의 정체가 4장에서는 마귀와 귀신들의 입에서도 언급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 귀신을 꾸짖으며 말했다. 「입을 다물어라.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한가운데로 내던지고,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은 채 그에게서 나갔다.누가복음 4:35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귀신과 논쟁하거나 자신이 누구신지를 증명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명령하십니다.
귀신이 사람을 내던졌지만, 그 사람은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의 중심은 귀신의 격렬한 반응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해방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위력을 과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억눌려 있던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모두 놀라 서로 말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그가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이 나간다.」누가복음 4:36 · 본디새김
가르침에서 느꼈던 권위가 실제로 사람을 얽매고 있던 힘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해방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실제로 해방을 이루는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사로잡힌 이들에게 풀려남을」이라는 선언이 여기서 구체적인 모습을 얻습니다.
회당에서 한 가정으로
예수님은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녀를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그 여자 곁에 서서 열을 꾸짖었다. 그러자 열이 그 여자를 떠났다. 그 여자는 곧 일어나 그들을 섬겼다.누가복음 4:39 · 본디새김
‘꾸짖었다(ἐπιτιμάω)’는 동사는 앞서 귀신을 꾸짖으실 때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열병도 귀신 때문에 생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는 더러운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과 심한 열을 앓는 여자를 구별해서 기록합니다. 같은 동사가 드러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더러운 영도 물러나고 병도 떠난다는, 그 권위가 미치는 범위입니다.
그 여자는 ‘곧’ 일어나 사람들을 섬깁니다. 치유가 즉각적이었고, 병 때문에 중단되었던 삶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사람을 억누르던 귀신이 떠났고, 집에서는 여자를 괴롭히던 열이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해방은 회당 안에 머무르지 않고 한 가정의 방 안에도 찾아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다
해가 질 무렵에 온갖 병을 앓는 이들을 둔 사람들이 모두 그 병자들을 예수에게 데려왔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었다.누가복음 4:40 · 본디새김
누가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고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셨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보여 준 것은 온 땅의 모든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 앞에는 병들고 괴로워하는 개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귀의 제안은 모든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사역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장면만으로 예수님의 왕권을 개인적인 치유에만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뒤에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보내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에 등장했던 가난한 이들, 눈먼 이들, 짓눌린 이들은 이제 추상적인 집단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길을 받는 실제 사람들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왜 귀신들의 말을 막으셨는가?
귀신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소리를 질러 말했다. 「당신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가 꾸짖어 그것들이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귀신들이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4:41 · 본디새김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의 정체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알려지는 것을 막으셨다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누가는 그 동기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오해를 막으려 하셨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예수님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도 예수님의 명령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귀신에게서 인정받는 것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기적을 요구했을 때도, 귀신들이 정체를 외쳤을 때도 예수님은 다른 이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따라 행동하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지는 이제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밝혀집니다.
사람들은 붙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떠나십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날이 밝자 그는 나가서 한적한 곳으로 갔다. 무리가 그를 찾아다니다가 그에게 이르렀고, 자기들을 떠나지 못하게 그를 붙들고 있었다.누가복음 4:4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오신 뒤 병든 사람들이 회복되고, 더러운 영에게 억눌리던 사람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 분이 떠나신다면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여기서 앞선 나사렛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요구대로 행동하지 않으시자 도시 밖으로 내쫓았고,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 곁에 붙잡아 두려 합니다. 하나는 적대적 거부이고 다른 하나는 더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어느 쪽도 예수님의 사명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복음으로 전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보내졌기 때문이다.」누가복음 4:43 · 본디새김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누가는 처음으로 예수님의 선포 내용을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밝힙니다.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을 고치신 그 모든 일이 무엇을 향하는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복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뒤에 들어가는 장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에서 그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더러운 영들이 물러가고, 병든 사람들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예상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선포되는 일은 그 나라가 어떤 성격의 통치인지를 보여 줍니다.
43절의 ‘전해야 한다’는 하고 싶다는 의사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필요성을 나타냅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의 정체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거룩한 분, 그리스도로 여러 번 불렸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실 때 쓰시는 말은 ‘보내졌다’입니다. 나사렛에서 읽으신 이사야의 말씀도 「나를 보내셨다」로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일과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해도, 예수님은 그곳에만 머무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도시가 자기만의 소유로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의 ‘유대’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그는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선포하고 있었다.누가복음 4:44 · 본디새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계셨고 다음 장의 무대도 갈릴리 호수인데, 마지막에는 ‘유대’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선포하고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그리스어 사본은 이곳을 ‘갈릴리’로 읽지만, 오래된 주요 사본들은 ‘유대’로 읽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누가가 ‘유대’를 유대 사람들이 사는 땅 전체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절이 예수님의 사역을 넓게 요약하며 갈릴리를 넘어선 활동까지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해석이 확실한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이신가
광야에서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배고픔을 해결하고, 세상의 권세를 얻고, 하나님의 보호를 증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고향에도 놀라운 일을 보여 주기를 기대했고, 가버나움에서는 귀신들이 정체를 외치고 무리가 예수님을 붙잡아 두려 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주어진 요구를 그대로 따르지 않으셨지만,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지 않으셨지만 병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셨고, 마귀가 제시한 세상의 권세를 얻지 않으셨지만 그 말씀 앞에서 더러운 영들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없으셔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권능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사용되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할 기회로 삼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 곧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누르는 힘에서 풀어 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을 따라 사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요구나 인간이 정해 놓은 소속과 경계가 아니라 그분 자신의 뜻에서 나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은혜의 선언에 놀랐지만, 그 은혜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경계를 넘어설 때 분노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의 독자에게도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라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4장의 중심에는 그 은혜를 실제로 가져오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계시고, 찾아온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게 붙듭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머물러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도시들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누가는 예수님께서 여러 회당에서 계속 선포하고 계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반김을 받는 해가 찾아왔다는 소식은 한 도시의 기쁜 소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지신 목적을 따라,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길을 이어가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