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심판
하나님이 내려오실 때, 예언자는 웁니다
미가서는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처소에서 나와 땅의 높은 곳들을 밟으시자 산들이 녹아내리고 골짜기들이 갈라집니다. 인간이 견고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그분 앞에서 무너지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뜻밖의 장면은 무너지는 산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던 예언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거나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대신, 그들에게 닥칠 고통을 자기 몸으로 표현합니다.
미가 1장의 중심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기 위해 내려오시고, 예언자는 그 심판을 받을 백성 때문에 낮아져 애곡합니다. 이 두 움직임 사이에서 미가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예언자의 슬픔을 함께 보여 줍니다.
모든 땅을 증인으로 부르는 하나님
미가는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밝힙니다.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였습니다. 이 기간은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남유다 역시 심각한 위협을 받던 시대를 포함합니다. 열왕기하 17장 6절은 사마리아의 함락을, 18장 13–17절은 히스기야 시대 유다 성읍들에 대한 아시리아의 공격을 기록합니다.
미가는 모레셋 출신입니다. 모레셋은 유다의 서쪽 저지대에 속한 성읍으로, 왕궁이 있던 예루살렘과는 다른 지역에 자리했습니다.
그가 본 말씀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두 도시는 각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수도였습니다. 정치적 중심지인 동시에 나라의 종교적 방향을 결정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선포가 시작되자 청중의 범위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백성들아, 모두 들어라. 땅과 그 안을 채운 모든 것아, 귀를 기울여라. 주 여호와야훼가 너희를 거슬러 증인이 되기를, 자기의 거룩한 성전에서 주가 증인이 되기를.미가 1:2 · 본디새김
두 수도에 관한 말씀을 전하면서 온 땅을 부릅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문제가 그 도시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장면에는 법정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모든 민족과 온 땅이 말씀을 듣도록 소환되고, 여호와야훼 자신이 그들을 거슬러 증인이 되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행한 일을 알고 계시며, 그 죄를 직접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이스라엘의 언약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절에서도 하늘과 땅은 말씀을 들으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그들만의 사적인 약속이 아니라, 하늘과 땅 앞에서 책임을 지는 관계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들의 행위를 승인하는 표시가 아닙니다. 그 임재는 오히려 그들의 삶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언약의 약속을,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언제나 보호받을 권리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책의 표제는 미가의 활동이 여러 왕의 시대에 걸쳤음을 알려 줄 뿐, 각 신탁이 정확히 언제 선포되었는지까지 밝혀 주지는 않습니다. 2절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가 「자기의 거룩한 성전에서」 증인이 되신다고 합니다. 이 성전이 하늘의 거처를 가리키는지, 예루살렘 성전을 염두에 둔 표현인지는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하나님이 자기 처소로부터 나오신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미가 6장 1–2절에서도 하나님은 산들과 땅의 오래된 기초들을 자신의 백성을 향한 송사의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자연 세계를 소환하여 인간의 언약적 책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두 장면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높은 곳을 밟으시는 하나님
3절과 4절에서 미가는 거대한 광경을 펼쳐 보입니다.
보아라. 여호와야훼가 자기 처소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려와 땅의 높은 곳들을 밟을 것이다.미가 1:3 · 본디새김
하나님이 내려오시자 산들이 녹아내리고 골짜기들이 갈라집니다. 산은 불 앞의 밀랍처럼 녹고, 골짜기는 비탈을 따라 쏟아지는 물처럼 무너집니다.
산과 골짜기는 인간의 힘으로 쉽게 바꿀 수 없는 지형입니다. 높은 산은 견고하고 골짜기는 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등장하시자 그 구분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이 광경이 전달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힘이 크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질서조차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5절에 이르면 앞선 자연 묘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이 모든 것은 야곱의 반역 때문이며 이스라엘 집안의 죄들 때문이다. 야곱의 반역은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들은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미가 1:5 · 본디새김
3절에서 여호와야훼가 밟으시는 것은 땅의 높은 곳들입니다. 그런데 5절에 와서는 유다의 산당들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산들을 밟으신다는 장엄한 광경이 단순한 자연의 격변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여겼던 예배 장소를 향한 심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한다고 생각했던 높은 곳조차, 그분께 반역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4절에 따르면 오므리가 그곳에 성을 세웠고, 그의 아들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웠습니다(열왕기상 16:32). 정치적 중심지가 우상숭배의 중심지로도 기능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와 다른 기대를 품게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에는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었고 다윗 왕조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그 예루살렘을 유다의 산당들과 연결합니다. 실제로 아하스 시대에는 다른 신들을 위한 제사가 행해졌고, 성전 예배도 변질되었습니다(열왕기하 16:3–16).
여기에는 지도력에 대한 엄중한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중심부의 죄는 중심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이 추구하는 가치, 그들이 정당화하는 예배, 그들이 허용하는 행위는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미가서 3장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지도자들은 정의를 미워하고, 백성에게서 이익을 취하며,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확신까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미가 3:9–11).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미가는 하나님이 실제로 어느 산을 밟으셨다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심판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자연 세계의 변화로 묘사합니다. 비슷한 모습은 시편 97편 5절에서도 나타납니다. 산들이 주 앞에서 밀랍처럼 녹는다는 표현입니다. 「땅의 높은 곳들」과 「유다의 산당들」은 히브리어에서 모두 바모트(בָּמָה)라는 낱말로 연결됩니다. 이 낱말은 본래 높은 곳을 가리키지만, 종교적 문맥에서는 예배가 이루어지는 산당을 뜻할 수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무엇이 드러나는가
5절에서 사마리아가 지목되자 6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그 도시의 운명을 선언하십니다.
「내가 사마리아를 들판의 폐허 더미로, 포도원을 심는 곳으로 만들겠다. 그 성의 돌들을 골짜기로 쏟아 버리고 그 기초들을 드러내겠다.」미가 1:6 · 본디새김
사마리아는 언덕 위에 건설된 수도였습니다. 성벽과 건물들은 그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도시를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돌들을 골짜기로 쏟아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포도원은 성경에서 흔히 풍요와 평안을 연상시키지만, 여기서는 회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도시가 너무 철저히 파괴되어 더 이상 도시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도시를 이루던 돌들이 치워지고, 그 땅이 다시 경작지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더 깊은 토대가 드러납니다.
「그 성의 새긴 신상들은 모두 부서지고 그 성의 화대는 모두 불에 타 버릴 것이다. 그 성의 우상들을 모두 내가 황폐하게 만들겠다. 그 성이 창녀의 화대에서 그것들을 모았으니, 그것들은 창녀의 화대로 돌아갈 것이다.」미가 1:7 · 본디새김
성경의 예언서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의지하는 일을 종종 음행에 비유합니다. 호세아 2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준 존재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는 모습이 묘사됩니다(호세아 2:5–8).
미가의 표현도 그 전통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다른 신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부와 풍요를 얻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 부로 우상을 만들고 꾸미며, 다시 그 우상에게서 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실제 매춘 행위나 특정한 종교 의식이 얼마나 관련되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사마리아의 우상숭배를 불성실한 관계에 빗대어 고발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상과 그 우상에 바쳐진 재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묘사됩니다. 화대에서 모였고, 화대로 돌아갑니다. 사마리아가 신성하게 여기던 재물과 신상들은 전쟁과 파괴 앞에서 그 성을 지키지 못합니다.
성벽이 무너질 때는 도시의 기초가 드러납니다. 우상이 무너질 때는 그 도시가 무엇을 의지해 왔는지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미가 3장 12절은 시온이 밭처럼 갈아엎어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1장에서 사마리아에 선포된 파괴의 이미지가 예루살렘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예레미야 26장 18–19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대 유다의 장로들은 히스기야 시대 미가가 예루살렘의 파괴를 선포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히스기야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고 그분의 호의를 구했던 사실도 함께 언급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판의 경고가 반드시 파멸을 향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선언으로만 이해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지도 중요했습니다. 다만 미가 1장은 아직 그 반응이나 회복의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심판을 선포하는 사람이 왜 울고 있는가
여기서 미가 1장은 갑작스러운 전환을 맞습니다.
지금까지는 여호와야훼의 등장과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나」가 전면에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나는 애곡하며 울부짖겠다. 맨발에 벌거벗은 채 걸어가겠다. 자칼들처럼 애곡하고 타조들처럼 애도하겠다.미가 1:8 · 본디새김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당할 일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자기 몸으로 표현합니다. 예언자의 울음은 정돈된 애도의 말이 아니라, 거칠고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왜 울어야 합니까?
그 성의 상처들은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다까지 이르렀고, 내 백성의 성문까지, 예루살렘까지 닿았으니 말이다.미가 1:9 · 본디새김
사마리아의 비극은 북이스라엘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다 역시 그 위협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내 백성의 성문」에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추상적인 수도가 아닙니다. 그곳은 예언자의 백성이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성문은 성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이며, 도시 생활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재앙은 이제 그 경계까지 도달했습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과 그 심판이 가져올 고통을 슬퍼해야 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을 부정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판단이 얼마나 심각한 일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웁니다.
이 장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고통을 슬퍼하신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예언자의 애곡을 그대로 하나님의 감정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가 심판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나」가 누구인지는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앞 절에서는 하나님이 일인칭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문법만으로는 화자가 바뀌었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맨발과 벌거벗은 모습으로 애곡하며 돌아다니겠다는 내용은 예언자가 슬픔을 몸으로 표현하는 장면으로 읽기에 자연스럽습니다. 이사야 20장 2–4절에도 예언자가 옷과 신발을 벗은 모습으로 임박한 치욕을 드러내는 상징적 행동이 나타납니다. 본문이 완전한 나체를 뜻하는지, 겉옷을 벗은 상태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수치와 상실을 몸으로 드러낸다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자칼과 타조는 광야와 황폐한 장소를 연상시키는 동물들입니다. 9절의 히브리어에는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상처들」(מַכָּה)은 복수이지만, 뒤이어 「이르렀고」(בּוֹא)와 「닿았으니」(נָגַע)에 해당하는 동사는 각각 여성 단수와 남성 단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의 상처가 퍼져 왔다고 읽을 수도 있고, 그 상처를 일으킨 재앙이나 침략 세력이 유다까지 이르렀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고향의 이름마다 슬픔이 새겨지다
10절부터는 독자가 낯선 지명들을 연이어 만나게 됩니다.
가드, 베들레아브라, 사빌, 사아난, 벳에셀, 마롯. 성읍들의 이름이 이어지면서 애곡은 구체적인 마을들을 향한 호소가 됩니다. 미가는 성읍 이름과 그곳에서 일어날 일을 서로 맞물리게 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지명들은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각 마을의 운명을 들려주는 짧은 애가가 됩니다.
가드와 베들레아브라 — 알리지 말아야 할 슬픔, 감출 수 없는 슬픔 (1:10)
너희는 가드에서 알리지 마라. 결코 울지 마라. 베들레아브라에서 너는 먼지 속에 뒹굴어라.미가 1:10 · 본디새김
「가드에서 알리지 마라」는 사무엘하 1장 20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던 다윗은 그 소식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를 적들이 기뻐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미가는 그 애가의 표현을 다시 사용합니다.
「결코 울지 마라」는 명령은 앞에서 자신이 울겠다고 선언한 예언자의 말과 얼핏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가드가 블레셋의 성읍이었다는 점과 다윗의 애가를 고려하면, 이를 슬픔 자체의 금지라기보다 적들 앞에 패배를 드러내지 말라는 호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드에서는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베들레아브라에서는 온몸으로 슬픔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감추고 싶은 재앙이지만, 정작 그 재앙을 겪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사빌과 사아난 — 아름다움과 움직임을 빼앗기다 (1:11)
사빌에 사는 이여,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채 지나가라. 사아난에 사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 벳에셀의 애곡이 너희에게서 그곳의 설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미가 1:11 · 본디새김
사빌이라는 이름은 아름답거나 보기 좋은 상태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표현들과 연결되는 소리를 지닙니다. 그런데 그곳 주민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벌거벗음과 수치입니다.
사아난에서는 또 다른 반전이 나타납니다. 그 이름은 「나오다」(יָצָא)라는 동사와 소리상 연결됩니다. 그러나 사아난에 사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나오지 못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포위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고 읽을 수도 있고, 위험 앞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기대와 실제 상황이 어긋납니다. 나와야 할 사람들이 나오지 못합니다.
벳에셀과 마롯 — 의지할 곳과 좋은 소식을 잃다 (1:11–12)
벳에셀에 관한 문장은 이 연속된 지명들 가운데서도 특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벳에셀이라는 이름은 가까움이나 곁에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문장에서는 누군가의 「설 자리」가 사라집니다. 가까이 있어 도움을 줄 것 같았던 마을에서조차 애곡이 들립니다. 서로 의지해야 할 성읍들이 모두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마롯에 사는 이가 좋은 일을 바라며 몸부림쳤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에게서 재앙이 예루살렘의 성문으로 내려왔으니 말이다.미가 1:12 · 본디새김
마롯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쓰라림을 뜻하는 말과 연결되는 소리를 지닙니다. 그런데 그 주민이 바라는 것은 쓰라림과 반대되는 「좋은 일」입니다.
3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처소에서 「내려와」 땅의 높은 곳들을 밟으셨습니다. 12절에서는 재앙이 여호와야훼에게서 예루살렘의 성문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산들을 녹이던 심판이 사람들의 집과 성문에까지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성읍들은 대체로 유다의 서쪽 저지대와 관련되지만, 모든 성읍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순서를 침략군의 실제 이동 경로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베들레아브라라는 이름에는 먼지 또는 흙과 닮은 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가진 곳에서 사람들이 먼지 속을 구르게 됩니다. 벳에셀의 「설 자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엠다토(עֶמְדָּה)는 서 있는 자리나 지탱하는 위치를 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그 자리를 빼앗는지, 그 자리가 누구에게 속하는지는 문장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벳에셀 자체가 버틸 자리를 잃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성읍들이 벳에셀로부터 기대하던 도움이나 의지할 곳을 잃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쪽을 확정하지 않더라도, 주변 문맥이 보여 주는 비극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롯의 「좋은 일을 바라며 몸부림쳤다」는 말은 좋은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미 잃어버린 좋은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경우든 기대와 현실을 대조합니다.
말과 병거가 지키지 못하는 도시들
앞선 성읍들에서는 수치와 두려움, 도움을 잃는 일이 강조되었습니다. 13절에서는 병거가 등장합니다.
라기스에 사는 이여, 병거를 준마들에 매어라. 그 성은 딸 시온에게 죄의 시작이었다. 네 안에서 이스라엘의 반역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미가 1:13 · 본디새김
라기스는 유다의 중요한 요새 성읍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에는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라기스에 머물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병거를 준비하라는 명령은 승리를 확신하는 출정 명령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주변 도시들이 수치를 당하고 위협받는 흐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달아나거나 침략에 대비하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군사력이 강하다고 여겨졌던 도시조차 자신의 운명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반역들」은 앞서 사마리아에서 지적했던 죄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라기스가 북이스라엘에서 나타난 반역을 유다에 전파하거나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우상이나 제도가 정확히 라기스를 통해 처음 도입되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병거를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라기스의 죄를 모두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나라의 안전을 지키도록 기대받던 곳이 오히려 나라의 반역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5절에서 수도들이 지목되었던 상황과도 통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모레셋가드에 작별 선물들을 줄 것이다. 악십의 집들은 이스라엘 왕들에게 속임수가 될 것이다.미가 1:14 · 본디새김
미가는 모레셋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 고향과 관련된 성읍이 잃어버릴 대상이 되는 광경을 말합니다. 그는 먼 도시들의 파멸을 관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선포하는 재앙은 그 자신과 연결된 삶의 터전까지 향합니다.
악십은 이스라엘 왕들에게 속임수가 될 것입니다. 왕들이 그 성읍을 의지하거나 도움을 기대하더라도, 기대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레사에 사는 이여, 내가 다시 너에게 정복자를 데려오겠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다.」미가 1:15 · 본디새김
다음에 나오는 아둘람은 다윗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사무엘상 22장 1절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로 도망했습니다.
미가 1장에서도 아둘람은 피신처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뜻밖에도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한때 나라의 자랑이던 것들이 이제 피난처로 밀려납니다.
조금 더 깊이
라기스라는 이름은 병거를 끄는 빠른 말과 관련된 히브리어 표현과 소리상 맞물립니다. 「작별 선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실루힘(שִׁלּוּחַ)은 떠나보내면서 주는 선물을 뜻할 수 있습니다. 혼인과 관련된 예물처럼 이해할 여지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성읍과의 이별을 떠올리게 합니다. 선물을 주는 「너」가 라기스인지, 시온인지, 다른 성읍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레셋가드를 잃고 떠나보내야 하는 정황은 문맥과 어울립니다. 악십의 이름에서도 말놀이가 나타납니다. 히브리어 악지브(אַכְזִיב)는 뒤따르는 악자브(אַכְזָב), 속임수와 비슷한 소리를 냅니다. 마레사라는 이름은 소유하다, 차지하다는 뜻과 관련된 야라시에서 나온 말들과 소리상 맞물립니다. 「정복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요레시도 차지하는 사람, 소유권을 넘겨받는 사람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표현은 나라의 존귀한 인물들, 곧 지도자들이나 귀족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영광 자체가 아둘람까지 물러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은 서로 다른 강조점을 지니지만, 모두 영광과 도피 사이의 역설을 보여 줍니다.
자식들을 떠나보낸 도시
마지막 절에서 성읍들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미가는 한 어머니처럼 묘사되는 상대를 향해 말합니다.
네가 기뻐하는 자식들 때문에 머리를 밀고 머리털을 잘라라. 독수리처럼 네 머리털을 민 자리를 넓혀라. 그들이 네게서 떠나 유배되었기 때문이다.미가 1:16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도시의 성벽과 신상과 병거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식들이 떠납니다.
고대 세계에서 유배는 단지 주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친족의 관계가 끊어지고,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잃으며, 익숙한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일이었습니다. 떠나는 사람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를 떠나보내는 사람들도 상실을 겪습니다.
미가는 이 모든 결과를 「네가 기뻐하는 자식들」이라는 표현으로 압축합니다. 자식들은 단순한 인구도 아니고, 나라의 노동력이나 군사력만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사랑하고 기뻐하던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절의 명령은 여성 단수형입니다. 앞선 성읍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예루살렘이나 유다를 어머니처럼 의인화한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대상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머리털을 미는 행위는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문화에서 슬픔과 상실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15장 2절에서도 모압의 재앙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머리와 수염을 깎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히브리어 네셰르(נֶשֶׁר)는 독수리 또는 독수리류의 큰 맹금류를 가리키며, 이 문맥에서는 머리 부분이 드러난 새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머리를 넓게 밀라는 명령은 슬픔을 가능한 한 크게 드러내라는 과장된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애곡
이 장에서 예언자는 심판받을 사람들을 보며 웁니다. 그는 자신이 옳은 편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잃어버릴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입증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임을 보여 줍니다.
성벽은 무너지고, 병거는 떠날 준비를 합니다.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고, 남겨진 이들은 먼지 속에서 웁니다.
그리고 한 어머니에게 머리를 밀라는 말이 들립니다. 기뻐하던 자식들이 유배되어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의 머리에는 더 이상 화려한 장식이 없습니다. 자식들이 떠난 자리만큼 머리털을 밀어 버린 모습이 남습니다.
산들이 녹아내릴 때 시작된 말씀은, 자식들을 잃은 어머니의 애곡 속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