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심판
하나님이 내려오실 때, 예언자는 웁니다
미가서는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계신 곳에서 나와 땅의 높은 곳들을 밟으시자 산들이 녹아내리고 골짜기들이 갈라집니다. 사람이 튼튼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그분 앞에서 무너지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뜻밖의 장면은 무너지는 산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던 예언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미가 1장의 중심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기 위해 내려오시고, 예언자는 그 심판을 받을 백성 때문에 낮아져 슬피 웁니다.
모든 땅을 증인으로 부르는 하나님
미가는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밝힙니다.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였습니다. 이 기간은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남유다 역시 심각한 위협을 받던 시대를 포함합니다. 열왕기하 17장 6절은 사마리아가 함락된 일을, 18장 13–17절은 히스기야 시대 유다 성읍들에 대한 아시리아의 공격을 기록합니다.
미가는 모레셋 출신입니다. 모레셋은 유다의 서쪽 낮은 지대에 속한 성읍으로, 왕궁이 있던 예루살렘과는 다른 지역에 자리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출신지가 단순한 소개처럼 보이지만, 14절에서 모레셋가드가 등장하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미가는 자신이 속한 지역에 닥칠 재앙까지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본 말씀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두 도시는 각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수도였습니다. 정치적 중심지인 동시에 나라의 종교적 방향을 결정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선포가 시작되자 말씀을 듣도록 부르는 대상이 갑자기 넓어집니다.
미가가 외쳤습니다. 「모든 민족들아, 들어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 여호와야훼께서 너희를 고발하는 증인이 되시기를 바란다. 주께서 거룩한 성전에서 증언하시기를 바란다.」미가 1:2 · 두루새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문제가 그 도시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장면에는 법정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행한 일을 알고 계시며, 그 죄를 직접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이스라엘의 언약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절에서도 하늘과 땅은 말씀을 들으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그들만의 사적인 약속이 아니라, 하늘과 땅 앞에서 책임을 지는 관계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시는 표시가 아닙니다. 그 사실은 오히려 그들의 삶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책의 첫머리는 미가의 활동이 여러 왕의 시대에 걸쳤음을 알려 줄 뿐, 각 예언이 정확히 언제 선포되었는지까지 밝혀 주지는 않습니다. 2절 마지막에는 주께서 「거룩한 성전에서 증언하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 성전이 하늘의 거처를 가리키는지,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한 표현인지는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나오신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연결은 미가 6장 1–2절입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산들과 땅의 오래된 기초들을 자신의 백성을 향한 고발의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1장에서 산들은 하나님 앞에서 녹아내립니다. 6장에서는 산들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다툼을 듣도록 요청받습니다. 자연 세계를 불러 사람에게 언약을 지킬 책임이 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두 장면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높은 곳을 밟으시는 하나님
3절과 4절에서 미가는 거대한 광경을 펼쳐 보입니다.
「보아라. 여호와야훼께서 계신 곳에서 나오신다. 내려오셔서 땅의 높은 곳들을 밟으실 것이다.」미가 1:3 · 두루새김
하나님이 내려오시자 산들이 녹아내리고 골짜기들이 갈라집니다. 산은 불 앞의 밀랍처럼 녹고, 골짜기는 비탈을 따라 쏟아지는 물처럼 무너집니다.
산과 골짜기는 사람의 힘으로 쉽게 바꿀 수 없는 지형입니다. 높은 산은 튼튼하고 골짜기는 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등장하시자 그 구분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런데 5절에 이르면 앞선 자연 묘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이 모든 일은 야곱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거역한 죄의 중심이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바로 예루살렘이 아니냐?」미가 1:5 · 두루새김
하나님이 산들을 밟으신다는 장엄한 광경이 단순한 자연의 큰 변화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여겼던 예배 장소를 향한 심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한다고 생각했던 높은 곳조차, 그분을 거역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4절에 따르면 오므리가 그곳에 성을 세웠고, 그의 아들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웠습니다(열왕기상 16:32). 정치적 중심지가 우상숭배의 중심지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와 다른 기대를 품게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에는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었고 다윗 왕조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그 예루살렘을 유다의 산당과 연결합니다. 실제로 아하스 시대에는 다른 신들을 위한 제사가 행해졌고, 성전 예배도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났습니다(열왕기하 16:3–16).
여기에는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한 엄중한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중심부의 죄는 중심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그들이 옳다고 내세우는 예배, 그들이 허용하는 행동은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어지는 미가 3장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지도자들은 정의를 미워하고, 백성에게서 이익을 얻으며,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확신까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미가 3:9–11).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미가는 하나님이 실제로 어느 산을 밟으셨다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심판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자연 세계의 변화로 묘사합니다. 비슷한 모습은 시편 97편 5절에서도 나타납니다. 산들이 주 앞에서 밀랍처럼 녹는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표현은 「땅의 높은 곳들」과 「유다의 산당」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두 표현은 모두 바모트(בָּמָה)라는 낱말로 연결됩니다. 이 낱말은 본래 높은 곳을 가리키지만,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예배가 이루어지는 산당을 뜻할 수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무엇이 드러나는가
5절에서 사마리아가 지목되자 6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그 도시의 운명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마리아를 들판의 돌무더기로, 포도나무를 심는 곳으로 만들겠다. 그 성의 돌들을 골짜기로 쏟아 버리고, 건물 밑의 기초까지 드러내겠다.」미가 1:6 · 두루새김
사마리아는 언덕 위에 세워진 수도였습니다. 성벽과 건물들은 그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도시를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돌들을 골짜기로 쏟아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포도나무를 심는 곳은 성경에서 흔히 풍요와 평안을 떠올리게 하지만, 여기서는 회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도시가 너무 철저히 파괴되어 더 이상 도시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마리아의 건물들을 부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던 토대를 무너뜨리십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더 깊은 토대가 드러납니다.
「그 성의 깎아 만든 신상들은 모두 부서지고, 몸을 팔아 받은 돈은 모두 불에 탈 것이다. 내가 그 성의 우상들을 모두 부수어 버리겠다. 그 성이 창녀가 몸을 팔아 받은 돈으로 그것들을 모았으니, 그것들은 다시 창녀가 몸을 팔아 받는 돈이 될 것이다.」미가 1:7 · 두루새김
성경의 예언서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의지하는 일을 종종 부정한 성관계에 비유합니다. 호세아 2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준 존재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는 모습이 묘사됩니다(호세아 2:5–8).
미가의 표현도 그 전통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다른 신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부와 풍요를 얻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 부로 우상을 만들고 꾸미며, 다시 그 우상에게서 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실제로 몸을 파는 행위나 특정한 종교 의식이 얼마나 관련되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사마리아의 우상숭배를 불성실한 관계에 빗대어 고발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상과 그 우상에 바쳐진 재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묘사됩니다. 몸을 팔아 받은 돈으로 모였고, 다시 몸을 팔아 받는 돈이 됩니다. 사마리아가 거룩하게 여기던 재물과 신상들은 전쟁과 파괴 앞에서 그 성을 지키지 못합니다.
성벽이 무너질 때는 도시의 기초가 드러납니다. 우상이 무너질 때는 그 도시가 무엇을 의지해 왔는지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미가 3장 12절은 시온이 밭처럼 갈아엎어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1장에서 사마리아에 선포된 파괴의 모습이 예루살렘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예레미야 26장 18–19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대 유다의 장로들은 히스기야 시대 미가가 예루살렘의 파괴를 선포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히스기야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고 그분의 호의를 구했던 사실도 함께 언급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판의 경고가 반드시 파멸을 향해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선언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중요했습니다. 다만 미가 1장은 아직 그 반응이나 회복의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심판을 선포하는 사람이 왜 울고 있는가
여기서 미가 1장은 갑작스러운 전환을 맞습니다.
지금까지는 여호와야훼의 등장과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나는」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앞에 나섭니다.
미가가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슬피 울며 울부짖겠다. 맨발에 벌거벗은 채 걸어 다니겠다. 자칼처럼 울부짖고 타조처럼 슬피 울겠다.」미가 1:8 · 두루새김
맨발과 벌거벗음은 평소 사회에서 지키던 품위와 보호를 내려놓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당할 일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자기 몸으로 표현합니다.
자칼과 타조도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들은 광야와 황폐한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동물들입니다. 예언자의 울음은 차분하게 슬픔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거칠고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왜 울어야 합니까?
「사마리아의 상처는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상처가 유다까지 번져, 내 백성이 사는 성의 문까지, 예루살렘까지 이르렀다.」미가 1:9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더 이상 막연한 수도가 아닙니다. 그곳은 예언자의 백성이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성문은 성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이며, 도시 생활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재앙은 이제 그 경계까지 도달했습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과 그 심판이 가져올 고통을 슬퍼해야 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을 부정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판단이 얼마나 심각한 일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웁니다.
이 장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고통을 슬퍼하신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예언자의 울음을 그대로 하나님의 감정과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가 심판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미가가 말했습니다」라고 하여 말하는 사람을 미가로 밝힙니다. 원문에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앞 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셨기 때문에, 문법만으로는 말하는 사람이 바뀌었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맨발과 벌거벗은 모습으로 슬피 울며 돌아다니겠다는 내용은 예언자가 슬픔을 몸으로 표현하는 장면으로 읽기에 자연스럽습니다. 이사야 20장 2–4절에도 예언자가 옷과 신발을 벗은 모습으로 곧 닥칠 수치를 드러내는 상징적 행동이 나타납니다. 본문이 완전히 옷을 벗은 모습을 뜻하는지, 겉옷을 벗은 상태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수치와 상실을 몸으로 드러낸다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9절의 히브리어에는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원문에서 상처를 가리키는 말은 복수이지만, 이어서 도달했다는 뜻을 나타내는 두 동사는 각각 여성 단수와 남성 단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의 상처가 퍼져 왔다고 읽을 수도 있고, 그 상처를 일으킨 재앙이나 침략 세력이 유다까지 이르렀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고향의 이름마다 슬픔이 새겨지다
10절부터는 독자가 낯선 지명들을 연이어 만나게 됩니다.
가드, 베들레아브라, 사빌, 사아난, 벳에셀, 마롯. 성읍들의 이름이 이어지면서 울음은 구체적인 마을들을 향한 호소가 됩니다.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한 것은 지리적 경로보다 이름의 소리입니다. 미가는 성읍 이름과 그곳에서 일어날 일을 서로 맞물리게 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지명들은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각 마을의 운명을 들려주는 짧은 슬픔의 노래가 됩니다.
가드와 베들레아브라 — 알리지 말아야 할 슬픔, 감출 수 없는 슬픔 (1:10)
「가드에 이 소식을 알리지 마라. 절대로 울지 마라. 베들레아브라 주민들아, 먼지 속에서 뒹굴어라.」미가 1:10 · 두루새김
「가드에 이 소식을 알리지 마라」는 사무엘하 1장 20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던 다윗은 그 소식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를 적들이 기뻐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미가는 그 슬픔의 노래에 담긴 표현을 다시 사용합니다.
「절대로 울지 마라」는 명령은 앞에서 자신이 울겠다고 선언한 예언자의 말과 얼핏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가드가 블레셋의 성읍이었다는 점과 다윗의 슬픔의 노래를 고려하면, 이를 슬픔 자체의 금지라기보다 적들 앞에 패배를 드러내지 말라는 호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들레아브라라는 이름에는 히브리어 아파르(עָפָר), 먼지 또는 흙과 닮은 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가진 곳에서 사람들이 먼지 속을 구르게 됩니다.
가드에는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베들레아브라에서는 온몸으로 슬픔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감추고 싶은 재앙이지만, 정작 그 재앙을 겪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사빌과 사아난 — 아름다움과 움직임을 빼앗기다 (1:11)
「사빌 주민들아,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채 지나가라. 사아난 주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벳에셀이 슬피 울고 있으니, 너희는 그곳의 도움을 받아 버틸 수 없을 것이다.」미가 1:11 · 두루새김
사빌이라는 이름은 아름답거나 보기 좋은 상태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표현들과 연결되는 소리를 지닙니다. 그런데 그곳 주민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벌거벗음과 수치입니다.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모습이 정반대로 바뀝니다.
사아난에서는 또 다른 반전이 나타납니다. 그 이름은 원문에서 나오다는 뜻의 동사와 소리상 연결됩니다. 그러나 두루새김 본문에서 사아난 주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나오지 못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포위되어 움직일 수 없다고 읽을 수도 있고, 위험 앞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짧은 문장들에서 미가는 무너진 삶을 묘사하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긴 설명 대신 익숙한 이름에 반대되는 현실을 붙여 놓습니다. 주민들이 자신이 살던 곳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제는 상실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벳에셀과 마롯 — 의지할 곳과 좋은 소식을 잃다 (1:11–12)
벳에셀이라는 이름은 가까움이나 곁에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문장에서는 「그곳의 도움을 받아 버틸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가까이 있어 도움을 줄 것 같았던 마을에서조차 슬픈 울음이 들립니다. 서로 의지해야 할 성읍들이 모두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마롯 주민들은 좋은 일이 오기를 바라며 괴로워한다.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 재앙이 예루살렘 성문까지 닥쳤기 때문이다.」미가 1:12 · 두루새김
마롯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쓰라림을 뜻하는 말과 연결되는 소리를 지닙니다. 그런데 그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쓰라림과 반대되는 「좋은 일」입니다.
3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내려오셔서」 땅의 높은 곳들을 밟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12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 재앙」이 예루살렘 성문까지 닥쳤다고 합니다.
산들을 녹이던 심판이 사람들의 집과 성문에까지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성읍들은 대체로 유다의 서쪽 낮은 지대와 관련되지만, 모든 성읍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순서를 침략군이 실제로 이동한 길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벳에셀에 관한 문장은 이 연속된 지명들 가운데서도 특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벳에셀 자체가 버틸 자리를 잃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성읍들이 벳에셀로부터 기대하던 도움이나 의지할 곳을 잃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쪽만을 확정하지 않더라도, 주변 문맥이 보여 주는 비극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절 원문은 좋은 소식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미 잃어버린 좋은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말과 병거가 지키지 못하는 도시들
앞선 성읍들에서는 수치와 두려움, 도움을 잃는 일이 강조되었습니다. 13절에서는 전쟁 수레가 등장합니다.
「라기스 주민들아, 빠른 말에 전쟁 수레를 매어라. 딸 시온의 죄는 라기스에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가 바로 네 안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미가 1:13 · 두루새김
라기스는 유다의 중요한 요새 성읍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에는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라기스에 머물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 수레를 준비하라는 명령은 승리를 확신하며 전쟁에 나서라는 명령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주변 도시들이 수치를 당하고 위협받는 흐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달아나거나 침략에 대비하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군사력이 강하다고 여겨졌던 도시조차 자신의 운명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는 앞서 사마리아에서 지적했던 죄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라기스가 북이스라엘에서 나타난 거역을 유다에 퍼뜨리거나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우상이나 제도가 정확히 라기스를 통해 처음 들어왔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전쟁 수레를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라기스의 죄를 모두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나라의 안전을 지키도록 기대받던 곳이 오히려 나라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5절에서 수도들이 지목되었던 상황과도 통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모레셋가드에 작별 선물을 주게 될 것이다. 악십의 집들은 이스라엘 왕들의 기대를 저버릴 것이다.」미가 1:14 · 두루새김
미가는 모레셋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 고향과 관련된 성읍이 잃어버릴 대상이 되는 광경을 말합니다.
그는 먼 도시들의 파멸을 관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선포하는 재앙은 그 자신과 연결된 삶의 터전까지 향합니다.
악십의 이름에서도 말놀이가 나타납니다. 두루새김은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의 「기대를 저버릴 것이다」라고 옮겼습니다. 왕들이 그 성읍을 의지하거나 도움을 기대하더라도,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레사 주민들아, 내가 다시 너희에게 정복자를 데려오겠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이들이 아둘람까지 가게 될 것이다.」미가 1:15 · 두루새김
마레사라는 이름을 가진 곳에 그곳을 차지할 사람이 찾아옵니다. 마치 그곳의 이름 자체가 이제 다른 소유자의 등장과 연결되는 셈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아둘람은 다윗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사무엘상 22장 1절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로 도망했습니다. 미가 1장에서도 아둘람은 피신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뜻밖에도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이들」입니다.
한때 나라의 자랑이던 것들이 이제 피난처로 밀려납니다.
조금 더 깊이
라기스라는 이름은 전쟁 수레를 끄는 빠른 말과 관련된 히브리어 표현과 소리상 맞물립니다. 지명과 전쟁 수레의 모습이 결합되어 긴박한 장면을 만듭니다. 「작별 선물」은 혼인과 관련된 예물처럼 이해할 여지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성읍과의 이별을 떠올리게 합니다. 선물을 주는 「너」가 라기스인지, 시온인지, 다른 성읍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레셋가드를 잃고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은 문맥과 어울립니다. 두루새김은 원문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가리키는 표현을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이들」로 옮겼습니다. 나라의 귀한 인물들, 곧 지도자들이나 귀족들을 가리킨다고 읽은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원문은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영광 자체가 아둘람까지 물러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은 서로 다른 점에 무게를 두지만, 모두 영광과 도피 사이의 뜻밖의 대조를 보여 줍니다.
자식들을 떠나보낸 도시
마지막 절에서 성읍들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미가는 한 어머니처럼 묘사되는 상대를 향해 말합니다.
「네가 아끼는 자녀들을 생각하며 머리털을 자르고 밀어라. 독수리처럼 머리를 훤히 밀어라. 네 자녀들이 네 곁을 떠나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이다.」미가 1:16 · 두루새김
고대 세계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은 단지 주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친족의 관계가 끊어지고,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잃으며, 익숙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떠나는 사람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를 떠나보내는 사람들도 상실을 겪습니다.
미가는 이 모든 결과를 「네가 아끼는 자녀들」이라는 표현에 담습니다. 자녀들은 단순한 인구도 아니고, 나라의 노동력이나 군사력만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절의 명령은 원문에서 여성 단수형입니다. 앞선 성읍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예루살렘이나 유다를 어머니처럼 표현한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대상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머리털을 미는 행위는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문화에서 슬픔과 상실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15장 2절에서도 모압의 재앙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머리와 수염을 깎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머리를 넓게 밀라는 명령은 슬픔을 가능한 한 크게 드러내라는 과장된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애곡
이 장에서 예언자는 심판받을 사람들을 보며 웁니다. 그는 자신이 옳은 편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잃어버릴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입증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임을 보여 줍니다.
미가서는 산들이 녹아내리는 장엄한 광경으로 시작했지만, 첫 장의 마지막에서는 훨씬 작은 장면을 남깁니다.
성벽은 무너지고, 전쟁 수레는 떠날 준비를 합니다.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고, 남겨진 이들은 먼지 속에서 웁니다.
그리고 한 어머니에게 머리를 밀라는 말이 들립니다. 아끼던 자녀들이 포로로 끌려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의 머리에는 더 이상 화려한 장식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떠난 자리만큼 머리털을 밀어 버린 모습이 남습니다.
산들이 녹아내릴 때 시작된 말씀은, 자녀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픈 울음 속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