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심판
빼앗는 사람들,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
미가 2장은 한밤중의 침실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잠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쉬고 있지 않습니다. 다음 날 누구의 밭을 차지할지, 어떤 집을 빼앗을지 궁리하고 있습니다. 아침이 밝으면 계획은 곧 실행됩니다.
그러나 이 장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밭을 빼앗고 사람들을 집에서 내쫓는 이야기 뒤에, 하나님이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고 앞장서서 길을 여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미가 2장은 누가 땅을 소유하느냐는 문제를 넘어, 누가 다른 사람의 삶을 좌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사람 위에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줍니다.
밤에 계획하고 아침에 빼앗는 사람들
아, 자기 잠자리에서 불의를 꾸미고 악을 행하는 자들. 아침 빛이 비치면 그들은 그것을 실행한다. 그들의 손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미가 2:1 · 본디새김
1절은 악행 자체보다 그것이 시작되는 순간을 먼저 보여 줍니다.
잠자리는 보통 하루의 일을 마치고 쉬는 곳입니다. 그러나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밤은 다음 날의 악행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들은 충동적으로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차분히 계획하고, 기회를 계산하고, 실행할 방법을 마련합니다.
미가는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악을 행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을 실행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경제력일 수도 있고, 정치적 영향력이나 법적 절차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움직일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 따르면 그 힘은 다른 사람의 밭과 집을 빼앗을 만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실행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그 일을 실행해도 된다는 정당성을 제공합니까?
미가가 고발하는 사람들은 그 둘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해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밭들을 탐내어 강탈하고 집들을 빼앗아 간다. 사내와 그의 집을, 사람과 그의 상속지를 짓밟는다.미가 2:2 · 본디새김
마음속의 욕망과 실제 행위가 연결되는 이 흐름은 열왕기상 21장의 나봇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원했지만 나봇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넘겨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이세벨이 거짓 증언을 이용하여 나봇을 죽게 했고, 아합은 그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미가는 나봇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남의 땅을 탐내는 권력자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그 땅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에서 땅은 단순한 거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 각 지파와 가문은 제비를 통해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여호수아 13–21장). 그 땅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가족의 생계와 소속을 나타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서는 땅을 영구히 팔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 자신이 땅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소유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 속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상속지를 빼앗는 행위는 단순한 재산 범죄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신 삶의 자리를 힘으로 빼앗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재산을 잃었다는 사실만 보지 않습니다. 그 재산에 연결된 사람과 가족의 삶이 짓밟히는 것을 봅니다.
밭은 먹고사는 토대이며, 집은 가족이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상속지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삶의 기반입니다. 그것을 빼앗는 것은 현재의 생활뿐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까지 빼앗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기업을 서로 지켜 주어야 할 공동체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계획하고 계십니다
2절까지는 악을 계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3절에서는 시선이 하나님에게로 옮겨 갑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이 집안을 거슬러 재앙을 꾸미고 있다. 너희는 거기서 너희 목을 빼내지 못할 것이며, 거만하게 걸어 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미가 2:3 · 본디새김
1절에서 사람들이 불의를 「꾸미고」, 3절에서는 하나님이 재앙을 「꾸미고」 계십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악한 의도를 품고, 하나님은 그 악에 대응하여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같은 동사의 반복은 하나님이 악한 사람들의 행동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부각합니다.
이들은 밤에 계획한 일을 아침이면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기 계획을 방해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계산에 넣지 않았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상대로 계획을 세웠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상대로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으면서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던 자들이 이제는 자기 목조차 자유롭게 빼낼 수 없는 처지에 놓입니다. 「목을 빼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벗어날 수 없는 압박이나 멍에를 연상시킵니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의 삶을 마음대로 좌우했지만, 이제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미가가 보여 주는 심판의 역전입니다.
빼앗던 사람들이 빼앗겼다고 웁니다
「그날 누군가 너희를 두고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애가를 부르며 울고 또 울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약탈당했다. 그가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린다. 어찌 내게서 그것을 빼앗는가? 등 돌린 자에게 우리 밭들을 나누어 준다.』」미가 2:4 · 본디새김
그들은 다른 사람의 밭을 빼앗을 때 그 사람의 억울함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몫을 잃게 되자 그것이 얼마나 부당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외칩니다.
4절에는 「내 백성의 몫」이라는 말도 등장합니다. 여기서 몫은 단순한 부동산이나 경제적 자산보다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허락하신 기업과 관련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 몫을 서로 빼앗았습니다. 이제는 공동체 전체가 그 몫을 잃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측량줄을 던져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의 회중 안에서 제비에 따라 측량줄을 던져 줄 이가 네게는 없을 것이다.」미가 2:5 · 본디새김
여호수아 시대에 땅은 제비를 통해 지파들에게 배분되었습니다. 측량줄은 땅의 경계를 정하고 각자의 몫을 구분하는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민수기 26장 52–56절과 여호수아의 땅 분배 기록이 그 배경을 보여 줍니다.
남의 기업을 침해하던 자들이 이제는 여호와야훼의 회중 안에서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땅을 나누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몫을 누리는 것은 단지 힘이나 계약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관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구절이 각 개인에 대한 영구적인 구원 배제를 뜻한다고까지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땅의 분배와 공동체 안에서의 기업 상실입니다.
남의 자리를 빼앗아 자기 삶을 넓히려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물론 이 애가를 부르는 인물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공동체의 탄식일 수도 있고, 재산을 빼앗던 지배층의 상실을 풍자하는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등 돌린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4절의 흐름에서, 남의 땅을 빼앗던 이들이 자기 땅을 잃는다는 반전은 뚜렷합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은 예언하지 말라는 사람들
지금까지 미가는 탐욕과 그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갑자기 예언 자체를 둘러싼 다툼이 시작됩니다.
「예언하지 마라.」 하고 그들이 예언한다. 그들은 이런 일들에 관해서는 예언하지 않는다. 수치들은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미가 2:6 · 본디새김
미가는 이 반복을 통해 말씀을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언 자체를 모두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불편한 예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강탈을 꾸짖는 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경고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은 그만 전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반응은 아모스 7장 10–13절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다른 곳으로 가서 예언하고, 벧엘에서는 더 이상 예언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권력과 결합한 종교적 질서가 자신을 비판하는 말씀을 배척하는 모습입니다.
야곱의 집안아, 이런 말이 나오느냐? 「여호와야훼의 마음이 조급해졌느냐? 이것들이 그의 행위냐?」 내 말들은 바르게 걷는 이에게 유익을 주지 않느냐?미가 2:7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과 미가의 심판 선언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도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화내기를 더디 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참된 지식도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말하면서 정작 이웃의 재산을 빼앗는 자신의 행동은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자기반성을 막는 구실로 변합니다. 바르게 걷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위협하는 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의를 유지하려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가 언제나 말씀의 가혹함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자신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을 정확히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은 히브리어 원문의 구조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특히 누가 말하고 있는지, 어디까지가 상대방의 발언인지를 분명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7절에서도 말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여호와야훼의 마음이 조급해졌느냐?」라는 물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항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이 내 백성의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말씀에 반발하는 이유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요사이 내 백성이 원수로 일어선다. 너희는 안심하고 지나가는 이들, 곧 전쟁에서 돌아오는 이들의 옷 위의 망토를 벗겨 낸다.」미가 2:8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백성이 원수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문맥상 그들이 해치는 대상은 자신들과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옷은 단순한 재산이 아닙니다. 사람이 몸을 가리고 추위와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건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6–27절에서는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그 옷이 가난한 사람이 몸을 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가가 고발하는 사람들은 그런 최소한의 보호마저 빼앗습니다.
탐욕은 남는 것을 차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까지 침범합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에게서 빼앗긴 것
「너희는 내 백성의 여자들을 저마다 기쁨을 누리는 집에서 몰아낸다. 그 여자들의 어린아이들에게서 내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다.」미가 2:9 · 본디새김
집은 여기서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던 곳입니다. 자신의 일상과 기억, 가족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던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여인들이 쫓겨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의 삶에서 무언가를 빼앗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빼앗는 것이 자신과 무관한 대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어린아이들에게서 빼앗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신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그 상실은 「영원히」라는 말로 강조됩니다. 어른이 빼앗긴 재산은 현재의 문제지만, 아이에게서 빼앗긴 미래는 훨씬 긴 시간에 영향을 미칩니다. 집을 잃은 아이는 성장할 기반과 물려받을 기업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세대에 허락하신 기업을 탐욕으로 빼앗는 일은, 아직 그 기업을 누려 보지도 못한 다음 세대의 삶까지 침해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히브리어는 세부적으로 여러 해석을 허용합니다. 옷과 망토의 관계도 그렇고, 「전쟁에서 돌아오는 이들」이라는 표현도 전쟁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로 볼 수 있는 한편,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평화로운 사람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해석 모두 이들이 공격받을 것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과 어울립니다. 9절의 「내 영광」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허락하신 기업과 축복, 그분의 백성으로서 누려야 할 존귀함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한다는 의미를 더 직접적으로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하나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남을 쫓아내던 사람들이 떠나야 할 때
9절에서 여자들을 집에서 몰아내던 사람들에게 이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집니다.
「일어나 가라. 이곳은 쉴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러움 때문에 이곳이 파멸을, 혹독한 파멸을 일으킬 것이다.」미가 2:10 · 본디새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가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은 단순히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서 안정과 쉼을 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신명기 12장 9–10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아직 하나님이 주실 안식과 기업에 이르지 못했지만, 장차 요단강을 건너 땅을 차지하고 원수들에게서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미가 시대에는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안식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전쟁 때문에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의가 그곳을 쉴 수 없는 장소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8장 24–28절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땅이 더럽혀지면 그 주민을 토해 내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미가도 비슷한 생각을 전개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무조건 그들을 보호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의 자리지만, 그 안식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면서 자신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예언자
그런데 이토록 심각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찾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바람과 거짓을 따라다니며 「내가 너에게 포도주와 독주에 관해 예언하겠다.」 하고 거짓말한다면, 그가 이 백성의 예언자가 될 것이다.미가 2:11 · 본디새김
사람들은 불의를 꾸짖는 예언자에게는 예언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포도주와 독주에 관한 말을 전하는 사람은 기꺼이 예언자로 받아들입니다. 「바람과 거짓」이라는 표현은 실체 없는 말과 속임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짓 예언자가 환영받는 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말하는 사람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을 원하는 청중에게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6–17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나타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말하고, 자기 마음의 완고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결국 거짓 예언의 문제는 현실을 감추는 데 있습니다.
집을 잃은 사람들과 미래를 잃은 아이들이 있는데도,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예언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지워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명령이 향하는 대상은 문맥상 불의를 행하던 백성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포함해 공동체 전체에 닥칠 추방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이 절의 히브리어는 「더러움」과 「파멸을 일으킬 것」의 문법적 관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더러움 자체가 파멸을 가져온다고 볼 수도 있고, 더럽혀진 땅이 파멸을 일으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11절의 포도주와 독주가 여기서 정확히 어떤 메시지를 가리키는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술과 풍요를 약속하는 말일 수도 있고, 백성의 쾌락과 욕망을 만족시키는 예언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겠다는 뜻밖의 약속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심판의 선언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야곱아, 내가 너희 모두를 반드시 모으겠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반드시 모아들이겠다. 내가 그 무리를 양 우리 안의 양 떼처럼, 제 목초지 한가운데 있는 떼처럼 한데 두겠다. 그 무리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워질 것이다.」미가 2:12 · 본디새김
누구의 말입니까?
12–13절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회복의 약속인지, 아니면 앞에서 언급된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이어서 보여 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읽기가 가능합니다. 여기서는 회복의 약속이라는 읽기를 따라 본문의 움직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두를 모으지만, 남은 자들을 모읍니다
하나님은 「너희 모두」를 모으시겠다고 하시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을 통해 많은 것을 잃은 뒤에도 하나님이 보존하시고 다시 모으실 백성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남은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너희 모두」라는 표현은 흩어진 백성을 빠짐없이 모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모으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공동체를 보존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흩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모으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양 떼가 된 이스라엘
하나님은 다시 모으실 백성을 양 떼에 비유하십니다.
양들은 자기 힘으로 안전한 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돌보고 인도하는 곳에서 함께 지냅니다.
마지막에 그 무리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있는 활기와 분주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잃어버렸던 공동체가 다시 사람들로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을 서로의 자리에서 밀어냈지만, 하나님의 회복은 그들을 다시 함께 살아가는 무리로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거짓 예언의 연속으로 보는 해석은 바로 앞의 11절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에게 풍요와 안전을 약속하는 거짓 예언자가 등장했으므로, 12–13절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구원의 약속을 풍자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반면 회복의 약속으로 읽는 해석은 12절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13절의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맨 앞에 있을 것」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실제로 미가 4장 6–7절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절뚝거리는 이들과 쫓겨난 이들을 모으시고, 남은 자들을 회복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12–13절을 참된 회복의 약속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본문이 별도의 도입 없이 전환되기 때문에, 거짓 예언의 연속이라는 해석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12절의 「양 우리 안의 양 떼」라는 표현에는 원문상 작은 해석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보츠라를 지명 보스라로 읽으면 그곳의 양 떼를 가리키고, 양 우리나 울타리와 관련된 표현으로 읽으면 한데 모인 양들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본디새김은 뒤쪽으로 읽어 「양 우리 안의 양 떼처럼」이라고 옮겼습니다.
닫힌 문 앞에서 길을 여시는 분
미가 2장의 마지막 절은 양 떼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돌파하는 이가 그들 앞에 올라갈 것이다. 그들은 돌파하여 문을 통과하고 그 문으로 나갈 것이다. 그들의 왕이 그들 앞에 나아갈 것이며,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맨 앞에 있을 것이다.미가 2:13 · 본디새김
누가 앞장섭니까?
여기서 돌파하는 이와 왕이 같은 존재인지, 왕과 여호와야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돌파하는 이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 볼 수도 있고, 여호와야훼 자신이 백성을 이끄시는 모습을 다른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왕을 장차 등장할 다윗 계열의 통치자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누가 앞에 서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의 기억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 앞에 나아가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비추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힘으로 이집트의 속박을 깨뜨리고 길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앞장서 인도하셨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들이 나아갈 길의 맨 앞에 계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양 우리와 돌파의 역설
12절에서는 양들이 한데 모여 우리 안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그들이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갑니다.
양들을 모으는 것은 그들을 영원히 좁은 공간에 가두려는 행동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으기도 하고, 새로운 목초지로 인도하기 위해 밖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미가가 그리는 회복도 정지된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으실 뿐 아니라, 그들이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넓히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공간을 침범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백성이 나아갈 길은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앞에 서신 하나님이 길을 여십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문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적의 성문인지, 갇힌 상태를 상징하는 출구인지, 다른 장벽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에서 완료형 동사들을 사용하여 그 움직임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미래의 구원을 과거형에 가까운 서술로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왕을 장차 등장할 다윗 계열의 통치자로 이해하는 읽기는 미가 5장 2–4절에서는 베들레헴에서 나올 통치자가 백성을 돌보는 목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가 2장 13절만으로 돌파하는 이의 정체를 특정 인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 다른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까
사람들의 불의가 공동체를 파괴했기 때문에 심판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은 사람들의 탐욕을 그대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빼앗는 자의 힘을 무너뜨리시고,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으시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그분은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모인 사람들 앞에는 닫힌 문이 있고, 그 문을 향해 돌파하는 이가 나아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쫓겨나며 흩어지는 무리가 아닙니다. 앞에 있는 길을 따라 함께 나아갑니다.
그들의 맨 앞에는 여호와야훼가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