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지도자들을 꾸짖음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 말이 거짓이 될 때
미가 3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예언자들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바로 그들을 향해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성전이 있는 산마저 숲으로 뒤덮일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까?
그 답은 이들이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말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있습니다.
이 장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도, 그분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정의를 알아야 할 사람들이 백성을 잡아먹다
미가는 먼저 지도자들을 부릅니다.
내가 말했다. 「부디 들어라,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집안의 통치자들아. 너희는 정의를 알아야 하지 않느냐?」미가 3:1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지도자들에게 정의의 개념을 처음부터 가르치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질책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정의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맡은 직무의 핵심이었습니다.
신명기 16장 18–20절은 재판관들과 관리들에게 공정하게 재판하고, 정의를 굽히거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장 16–17절에서는 재판할 때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작은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똑같이 들으라고 합니다.
지도자에게 권력이 주어지는 이유는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침해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미가가 발견한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는 자들아, 내 백성에게서 가죽을, 그들의 뼈에서 그들의 살을 벗겨 내는 자들아.」미가 3:2 · 본디새김
지도자들은 무엇을 보호해야 하고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판단 기준 자체가 뒤집혀 있습니다. 마땅히 보호해야 할 것을 해치고, 마땅히 막아야 할 것을 추구합니다.
「내 백성의 살을 먹었고, 그들에게서 가죽을 벗겼으며, 그들의 뼈를 부수고 솥 안에 있는 것처럼, 가마솥 속의 고기처럼 펼쳐 놓은 자들아.」미가 3:3 · 본디새김
이것을 지도자들이 실제로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으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백성을 착취하는 행위를 식인의 이미지로 묘사한 것입니다.
가축을 잡아먹는 사람에게 그 동물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대상입니다. 그 가죽과 살과 뼈는 사용할 수 있는 부분으로 나뉩니다. 동물의 생명보다는 그것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백성은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죽을 벗기고 살을 먹는 묘사는 착취의 철저함을 보여 줍니다. 단순히 조금씩 빼앗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남겨 두어야 할 것조차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자신의 권력 아래 놓인 사람들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백성을 해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호하도록 맡기신 사람들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비유는 에스겔 34장 2–4절에 나오는 목자들의 고발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 떼를 먹이는 대신 자신들만 먹이고, 약한 양을 돌보지 않으며, 힘으로 양 떼를 다스린다고 비난받습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펼쳐 놓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본래 펼치거나 벌려 놓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동사 자체를 반드시 고기를 토막 내는 행위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나온 가죽과 뼈의 묘사, 그리고 솥과 가마솥의 이미지가 결합되면서 백성이 음식 재료처럼 취급되는 광경이 완성됩니다.
부르짖을 때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4절에서는 이야기가 갑자기 미래로 이동합니다.
「그때 그들이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며, 그때 그들에게서 얼굴을 숨길 것이다. 그들이 악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미가 3:4 · 본디새김
앞에서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이제 그들 자신이 위기에 처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무슨 위기를 겪게 되는지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자신들의 힘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없게 되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기도의 형식보다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 문제가 됩니다.
미가가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의 기도를 결코 듣지 않으신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절의 대상은 앞에서 백성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다가, 이제 자기들에게 위기가 닥치자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관심과 호의, 관계적인 가까움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민수기 6장 24–26절의 제사장 축복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와 평안을 주시는 것이 축복으로 선포됩니다.
그러나 미가가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그 얼굴이 숨겨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언제나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삶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보호 장치가 아니십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말하는 입이 전쟁을 선포하다
5절에서 고발의 대상은 예언자들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가 예언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내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 이로 먹을 것을 씹을 때에는 『평화롭다.』 하고 외치지만, 자기들 입에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이를 치려고 거룩한 전쟁을 선포한다.」미가 3:5 · 본디새김
평화를 선언해야 할지 전쟁을 선포해야 할지는 공동체의 실제 형편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신의 입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평화의 기준이 하나님의 뜻에서 자신의 입으로 바뀌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현실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의 기대에 맞추어 현실을 왜곡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언자의 개인적인 탐욕만이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의 판단을 흐리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평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위험에 대비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이 없는데도 어떤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면, 그를 해치는 일을 거룩한 의무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평화와 전쟁을 결정할 때, 하나님의 이름은 그 사람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거룩한 전쟁을 선포한다」는 표현은 전쟁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거나 선포하면서 종교적 명분을 부여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전쟁을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싸움을 거룩한 일인 것처럼 내세우는 모습으로 읽힙니다.
말씀을 팔던 예언자들에게 찾아온 침묵
예언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통치자들에게 내려진 심판과 다릅니다.
앞에서 통치자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환상과 응답이 사라질 것이라는 선언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는 환상을 볼 수 없는 밤이 닥치고, 너희에게는 점을 칠 수 없는 어둠이 내릴 것이다. 예언자들 위로 해가 지고, 그들 위로 낮이 어두워질 것이다.」미가 3:6 · 본디새김
이 비유는 그들의 직무 자체를 겨냥합니다.
농부에게 땅이 없어지는 것처럼,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의 권위로 내세웠던 것이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환상을 보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고, 점을 치는 이들은 부끄러워하며, 그들 모두 콧수염을 가릴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기 때문이다.」미가 3:7 · 본디새김
콧수염을 가리는 행동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수치나 애도를 드러내는 몸짓과 연결됩니다. 레위기 13장 45절에서는 악성 피부병으로 부정하다고 판정된 사람이 윗입술을 가려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에스겔 24장 17절에서도 입술을 가리는 행위가 애도 관습과 관련되어 등장합니다.
미가 3장에서는 이 몸짓이 수치와 침묵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주장하며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입을 가립니다.
백성을 잘못 이끌던 두 집단이 각자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미가는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러나 나는 힘과 여호와야훼의 영과 정의와 용기로 가득 차 있다. 야곱에게 그의 반역을, 이스라엘에게 그의 죄를 알리기 위해서다.미가 3:8 · 본디새김
「그러나 나는」이라는 말은 앞에 나온 예언자들과 미가를 선명하게 대조합니다. 미가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놀라운 환상을 보거나 미래를 자세히 예측할 수 있다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백성의 반역과 죄를 알리는 일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미가에게 주어진 능력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말해야 할 상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들과 종교적 권위를 지닌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일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통치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백성을 착취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말씀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바로 그들의 잘못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은 언제나 더 큰 권력을 차지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로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목적과 내용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문장의 「힘」과 「여호와야훼의 영」은 문법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힘과 여호와야훼의 영과 정의와 용기를 함께 열거된 요소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정의를 알아야 할 사람들이 정의를 혐오하다
9절에서 미가는 다시 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부디 이것을 들어라, 야곱 집안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집안의 통치자들아. 너희는 정의를 혐오하고, 곧은 모든 것을 뒤틀어 놓는다.미가 3:9 · 본디새김
1절에서는 「너희는 정의를 알아야 하지 않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지도자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책임이 제시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그 책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정의를 실천하는 데 조금 서툰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의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곧은 것」(יָשָׁר)은 올바르고 바른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그것을 구부러뜨리고 뒤틀어 놓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규칙을 집행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판단의 기준을 지키고,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 사이에서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정의의 기준을 왜곡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억울한 사람이 올바른 판결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보호해야 할 제도가 오히려 자신을 해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시온을 피 흘림으로, 예루살렘을 불의로 세운다.미가 3:10 · 본디새김
겉으로 보면 도시를 발전시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건물을 세우고, 제도를 운영하고, 수도의 위상을 높이는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그들이 무엇을 세웠느냐보다 무엇으로 세웠느냐를 묻습니다.
여기서 「피 흘림」은 폭력과 살상, 생명을 해치는 불의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미가가 지목하는 것은 도시의 번영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질서에 피와 불의가 스며 있다는 사실입니다.
건물이 많아지고 권력이 강해진다고 해서, 그 도시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세워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도시가 더욱 번성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생명과 권리가 짓밟힐 수 있습니다.
백성을 먹어 치우는 듯 행동했던 지도자들이 이제는 시온을 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가는 그 도시의 성장과 번영을 백성의 고통과 분리해서 평가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특정한 건설 현장에서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의 「세우는 이」는 단수형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지도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특정한 통치자를 가리킨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뒤 문맥에서 지도자들 전체가 비판받고 있으므로, 공동체의 지도력이 도시를 어떤 방식으로 세우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심에 놓입니다.
정의도, 가르침도, 예언도 돈으로 거래되는 도시
11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세 지도 집단이 한자리에 등장합니다.
그 성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받고 재판하고, 그 성의 제사장들은 대가를 받고 가르치며, 그 성의 예언자들은 은을 받고 점을 친다. 그러면서 여호와야훼에게 기대어 말한다. 「여호와야훼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느냐? 재앙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미가 3:11 · 본디새김
물론 이 구절을 종교적 일을 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율법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자신들의 봉사를 통해 생활할 수 있도록 몫을 마련했습니다(민수기 18:20–24; 신명기 18:1–5).
문제는 대가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대가가 직무의 내용과 판단을 좌우한다는 데 있습니다.
재판관이 뇌물을 받으면 정의로운 판단이 훼손됩니다. 제사장이 가르침을 사적인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삼으면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배울 수 없게 됩니다. 예언자가 돈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돈을 낸 사람의 기대를 듣게 됩니다.
11절의 세 직무는 본래 서로 보완해야 할 기능이었습니다. 재판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율법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백성이 잘못된 길을 걸으면 예언자가 그 죄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세 집단이 모두 같은 이해관계에 묶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공동체 안에서 잘못을 바로잡을 통로가 사라집니다.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판결합니다. 제사장은 그들이 원하는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예언자는 그들의 안전을 선언합니다.
서로의 잘못을 견제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서로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가장 두려운 말 — 「여호와야훼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고, 따라서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자신들의 행동과 무관한 안전 보장으로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다윗의 도성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성전이 있다는 이유로 도시의 지도자들이 행하는 불의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신다는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는 혐오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근거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판단 아래 살아간다는 뜻이지, 그분의 판단에서 면제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전이 있는 산에 숲이 자라다
이제 미가는 마지막 선언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시온은 밭처럼 갈아엎어지고, 예루살렘은 폐허 더미가 되며, 성전이 있는 산은 숲으로 뒤덮인 언덕들이 될 것이다.미가 3:12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의 수도였고,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시편 132편 13–14절은 여호와야훼가 시온을 택하셨고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셨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도성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계시므로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지도자들 때문에 시온이 파괴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미가의 논리는 성전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참으로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전이 있는 도시라 하더라도 불의를 영원히 용납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그 도시를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요구와 책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에서 밭으로, 성전 산에서 숲으로
시온은 경작지가 됩니다.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됩니다. 성전 산은 숲이 자라는 언덕으로 바뀝니다.
이 세 표현은 모두 사람이 오랜 시간 세워 놓은 공간이 본래의 기능을 잃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10절에서는 사람들이 시온과 예루살렘을 세웁니다. 12절에서는 그 시온과 예루살렘이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피와 불의로 세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오래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이 백성을 영원히 버리셨다는 선언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미가 3장 자체는 최종적인 회복 여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직접 제시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도시도 불의에 대한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미가는 파괴의 원인을 모호하게 남겨 두지 않습니다.
도시를 다스리고, 가르치고, 예언하던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들이 정의를 혐오하고, 뇌물을 받으며, 거짓된 안전을 선언한 결과가 도시 전체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공동체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지의 운명과도 연결됩니다.
미가의 말은 후대에 어떻게 기억되었는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경고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죽어야 하는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다의 장로들이 과거 미가의 예언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미가가 히스기야 왕 시대에 시온이 밭처럼 갈아엎어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일을 인용합니다. 히스기야가 미가를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며 그분의 호의를 구했던 일을 함께 기억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가 선포하신 재앙을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사람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의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로도 이해되었습니다.
미가 3장은 지도자들의 회개나 심판의 철회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 장은 시온이 무너질 것이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반면 예레미야 26장은 그 선언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었으며,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숲으로 뒤덮인 언덕들」은 본문에 나오는 파괴의 결과를 가리키는 지형적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이방 신들을 위한 산당들이 들어설 것이라는 예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의 질문과 마지막 장면
처음의 질문과 마지막 장면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의를 알아야 할 사람들이 정의를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지켜야 할 도시도 무너지게 됩니다. 미가 3장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확신 있게 부르는가보다, 그 이름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장을 읽으며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미가가 고발하는 지도자들의 자리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만 세워 두는 일입니다. 우리는 쉽게 누군가의 권위가 잘못 사용되는 모습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작은 권한과 영향력을 사용할 때에도 같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미가는 성전의 산을 바라봅니다.
한때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로 여기던 그 산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는 사람들의 확신을 뒷받침해 주던 건물 대신, 숲으로 뒤덮인 언덕들이 남을 것이라는 말씀이 들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서 찾으셨던 정의는, 그들 가운데 없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