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8–9장 · 함께 들은 율법

성벽 안에 세워진 초막

느헤미야 8장은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완성되었습니다. 적들의 위협과 방해를 견뎌 내고, 무너진 성읍의 경계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새로운 건축 사업도, 군사 조직의 정비도 아닙니다. 그들은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성벽은 그들이 어디에서 살아갈지를 정해 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어떤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읽는 시간 13분소단락 78장 본문 읽기 →

백성이 먼저 율법책을 요청하다

느헤미야 8:1–3 본문 →

온 백성이 한 사람처럼 물 문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서기관 에스라에게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라고 말했다.느헤미야 8:1 · 본디새김

그들은 율법을 단순히 지도자들이 지켜야 하는 규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들어야 할 말씀으로 요청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가져오라고 한 책은 단순히 모세가 쓴 책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모세의 율법책」입니다. 말씀의 전달자는 모세이지만, 그 말씀의 권위는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온다는 인식이 나타납니다.

백성은 성전 내부가 아니라 물 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성전이 제사와 관련된 특별한 공간이었다면, 광장은 남녀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설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이었습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는 남자와 여자,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을 가져왔다.느헤미야 8:2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족과 가문의 공식적인 대표는 흔히 남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집회에서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직접 듣는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을 직접 들어야 할 백성에 속합니다.

이 장면은 신명기 31:10–1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초막절에 율법을 온 이스라엘 앞에서 낭독하라고 명령하면서,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그들 가운데 머무는 이방인까지 모이게 하라고 합니다. 목적은 모두가 듣고 배우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느헤미야 8장의 집회가 신명기에서 명령한 칠 년 주기의 행사와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백성은 동틀 때부터 한낮까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지만, 이야기는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온 백성은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기록합니다.

건축 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백성은 이제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의 회중이 됩니다. 느헤미야 6장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은 일이 성벽 건축이었다면, 8장에서는 함께 듣는 말씀이 그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말씀을 듣는 일과 이해하는 일

느헤미야 8:4–8 본문 →

에스라는 특별히 제작된 나무 단 위에 섭니다. 양옆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서 있습니다. 그가 책을 펼치자 백성은 모두 일어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자 백성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 이어서 몸을 굽히고 얼굴을 땅에 대어 여호와야훼에게 절합니다. 에스라는 말씀을 펼쳐 읽지만, 백성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책을 또렷하게 읽고 뜻을 풀어 주었다. 백성은 낭독된 내용을 이해했다.느헤미야 8:8 · 본디새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이 끝나지 않습니다. 백성이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이 반드시 뒤따릅니다.

이 장은 「이해하다」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2절에서 회중의 범위를 정할 때, 3절에서 듣는 사람들을 다시 언급할 때, 7–8절에서 레위 사람들의 역할을 설명할 때, 그리고 12절에서 백성의 기쁨을 설명할 때 이 주제가 거듭 등장합니다. 이는 율법이 단순히 보관하거나 낭송해야 하는 신성한 문서가 아니라, 백성이 알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제 그 말씀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일으킵니다.

백성이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메포라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문맥에서는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거나 구별하여 전달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나타냅니다. 포로기 이후 공동체에서 아람어가 사용되었다는 배경을 고려하면, 히브리어로 된 율법을 아람어로 옮겨 전달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표현을 낭독의 구분과 내용 해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만을 확정할 만큼 본문이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왜 울고 있는 백성에게 기뻐하라고 하는가

느헤미야 8:9–12 본문 →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서기관인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거룩하게 구별된 날입니다. 슬퍼하지 말고 울지 마십시오.」 온 백성이 율법의 말을 들으며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느헤미야 8:9 · 본디새김

그날은 일곱째 달 초하루였습니다. 레위기 23:23–25에 따르면 이 날은 나팔 소리로 기념하며 거룩한 모임을 갖도록 구별된 날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이날에 합당한 응답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실제로 느헤미야 9:1을 보면, 같은 달 스물나흗날에 백성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자기들의 죄와 조상들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슬픔과 회개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응답에는 알맞은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단 것을 마십시오. 준비된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보내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께 거룩하게 구별된 날입니다.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여호와야훼의 기쁨이 여러분의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느헤미야 8:10 · 본디새김

거룩한 날의 기쁨은 자기 집의 풍성한 식탁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까지 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16:13–15에서 초막절을 지킬 때 아들과 딸, 종, 레위 사람, 이방인, 고아와 과부가 함께 기뻐하도록 명령한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절기는 공동체 안의 어려운 사람들을 잊어도 되는 날이 아니라, 그들도 함께 기뻐하도록 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견고한 성벽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성벽을 세운 것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도자들은 백성이 의지할 수 있는 더 깊은 보호의 근거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벽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와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기쁨도 그들의 피난처가 됩니다.

온 백성은 가서 먹고 마시고 음식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했다. 자기들에게 알려 준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느헤미야 8:12 · 본디새김

이해는 처음에는 눈물을 낳았고, 이어서는 기쁨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두 감정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백성이 말씀의 의미를 더욱 온전히 알아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자신의 잘못 앞에 세우지만, 잘못을 깨닫는 자리에서만 머물게 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이 왜 울었는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삶과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 있었던 거리를 깨달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던 역사를 떠올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유일한 원인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기쁨」은 히브리어로 헤드와트 여호와야훼입니다. 이 표현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기쁨, 여호와야훼를 향한 기쁨, 혹은 여호와야훼 자신의 기쁨이라는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문법만으로 그 관계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의 문맥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여호와야훼의 기쁨이 백성의 힘이라는 의미와, 그 기쁨이 그들을 지키는 견고한 피난처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다음 날, 말씀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하다

느헤미야 8:13–15 본문 →

그러나 다음 날 또 다른 모임이 열립니다.

둘째 날에는 온 백성의 가문 우두머리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을 살펴 깨닫고자 서기관 에스라에게 모였다.느헤미야 8:13 · 본디새김

첫날의 낭독은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게 했습니다. 둘째 날의 연구는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지 발견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초막절에 관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가 모세를 통해 명령한 율법에 이스라엘 자손이 일곱째 달의 절기 동안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고 기록된 것을 발견했다.느헤미야 8:14 · 본디새김

초막절은 레위기 23:33–43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부터 이레 동안 지키며, 여덟째 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갖습니다.

이 절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수확의 기쁨입니다. 레위기 23:39과 신명기 16:13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절기를 지키도록 합니다.

다른 하나는 출애굽의 기억입니다. 레위기 23:42–43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서 지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 초막에서 지내게 하셨다는 사실을 후손들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백성은 땅에서 거둔 풍성한 소산을 기뻐하면서, 바로 그 땅을 갖지 못했던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풍성함을 즐기되, 자신들의 삶이 처음부터 풍성하고 안정적이었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안정을 누리되, 그 안정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잊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 포로 생활을 경험했고, 이제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서로 다른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자기 힘만으로 현재의 거처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들이 율법에서 발견한 초막절 명령은 오래된 종교 풍습을 되살리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역사를 거쳐 지금 이곳에 있는지 다시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돌성벽 안에 나뭇가지 초막을 세우다

느헤미야 8:16–17 본문 →

마침내 백성이 행동에 나섭니다.

백성은 나가서 가지들을 가져와 자기들을 위해 초막을 만들었다. 저마다 자기 지붕 위와 집 뜰에 만들었고, 하나님의 집 뜰들과 물 문 광장과 에브라임 문 광장에도 만들었다.느헤미야 8:16 · 본디새김

처음에는 백성이 물 문 앞 광장 한곳에 모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집의 지붕과 뜰, 하나님의 집 뜰, 여러 광장에 초막이 세워집니다.

말씀을 듣던 장소에서 시작된 일이 생활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백성은 올리브나무와 도금양나무, 대추야자나무 등 여러 나무의 잎 달린 가지를 가져왔습니다. 초막은 돌이나 잘 다듬은 목재로 지은 견고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머물기 위해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거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절기를 지키기 위해 그 성벽 안에 임시 거처를 짓습니다.

성벽이 현재의 안전을 위한 건축물이라면, 초막은 그 안전의 근원을 잊지 않게 하는 기억의 공간이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온 회중이 초막을 만들고 그 초막에서 지냈다. 눈의 아들 예수아 시대부터 그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렇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쁨이 매우 컸다.느헤미야 8:17 · 본디새김

첫날에는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습니다(12절). 이번에는 그 말씀을 따라 초막을 만들고 절기를 지키는 가운데 기쁨이 매우 컸습니다(17절).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눈의 아들 예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인물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여호수아 시대 이후 누구도 초막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는 뜻으로 읽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에스라 3:4에는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이미 초막절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8:65과 역대하 7:8–10에도 솔로몬 시대의 절기 행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한 적이 없었다」는 말의 강조점은 절기의 존재 자체보다 이번 절기를 지킨 방식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요소가 이전 시대와 달랐는지를 본문은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습니다. 온 회중의 참여, 실제 초막 거주, 말씀의 지속적인 낭독, 특별히 큰 기쁨 등이 함께 강조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역사의 출발점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그 땅에서 다시 공동체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시대와의 비교는 단순히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를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스라엘이 처음 땅에 정착했던 역사에 비추어 보게 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여호수아 시대의 정복이나 정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것은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사는 백성으로서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일입니다.

절기는 끝나지만 말씀은 계속 읽힌다

느헤미야 8:18 본문 →

에스라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었다. 그들은 이레 동안 절기를 지켰고, 여덟째 날에는 규정대로 집회를 열었다.느헤미야 8:18 · 본디새김

이것은 초막절이 단순히 과거의 생활을 재현하는 행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의 삶을 해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여덟째 날에 규정대로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레위기 23:36에 기록된 절기의 마지막 모임과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백성이 율법책을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율법에 기록된 규정대로 절기를 마칩니다.

말씀에 대한 그들의 응답은 하나의 감정이나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제 행동과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성벽 안에 남은 마지막 장면

느헤미야 8:1–18 본문 →

그들의 기쁨은 단지 성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떤 백성으로 부르셨는지 다시 알아 가는 데서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새롭게 완성된 성벽이 서 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가져와 만든 초막들이 놓여 있습니다. 집의 지붕 위에도, 뜰에도, 성전의 뜰과 광장에도 초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견고한 성벽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성벽 안에서 나뭇가지로 만든 거처에 머물렀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온 백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이 땅에 돌아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세운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그 성벽 안에서 살아갈 삶의 의미를 새롭게 했습니다.

느헤미야 8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견고한 돌성벽 안에 세워진 나뭇가지 초막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크게 기뻐하는 백성의 모습으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