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낮아지신 그리스도
노예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
빌립보서 2장의 중심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신 분이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모든 이름보다 높은 이름을 받으신 분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마침내 모든 존재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높음을 움켜쥐는 방식으로 그 자리에 이르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예수님에 관한 신학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빌립보 교회 사람들에게 아주 현실적인 부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의 일도 살피는 것」(4절)이라는 평범해 보이는 권면 뒤에, 바울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셨던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셨다는 장엄한 이야기를 놓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찬가가 끝난 뒤의 전개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공동체를 향한 권면을 이어 간 뒤 자신의 여행 계획과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특별히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회복된 사람이고,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그를 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합니다.
어떻게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는 이야기에서, 병들었다가 돌아오는 한 사람을 환영하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의 높으심을 설명한 뒤, 그 높으신 분을 닮은 삶이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교회가 본받아야 할 이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이익을 판단하는 방식,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 그리고 누구를 존경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한마음을 품으라는 요청(2:1–5),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하나님의 높이심(2:6–11), 공동체의 삶이 되는 예수님의 이야기(2:12–18),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2:19–30)의 네 부분으로 움직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그러므로’라고 말하고, 12절에서 다시 ‘그러므로’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그러므로’는 앞서 요청한 복음에 걸맞은 공동체의 삶을 구체화하고, 두 번째 ‘그러므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사람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독자를 이끕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 놓이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빌립보 사람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바울은 왜 자기의 기쁨을 채워 달라고 하는가
바울은 네 번의 조건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격려가 있다면, 사랑의 위로가 있다면, 영의 나눔이 있다면, 깊은 속정과 자비가 있다면,빌립보서 2:1 · 본디새김
우리말로 ‘있다면’이라고 하면 실제로 있는지 의심하는 질문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공동체가 이미 경험하는 예수님 안의 격려, 사랑의 위로, 영의 나눔, 자비를 근거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런 은혜를 경험했다면, 그 은혜가 여러분 사이에서도 드러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하는 요청은 뜻밖에도 자기의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내 기쁨을 채워 주십시오. 곧 여러분은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한마음이 되어 한 가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2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무엇으로 완성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사람들이 같은 마음과 같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같은 마음은 같은 의견을 뜻하는가
‘같은 마음을 품고(φρονέω)’와 ‘한 가지를 생각하는’이라는 두 표현은 같은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실을 머리로 생각하는 일보다 넓게,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방향으로 마음을 두는가를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매사에 동일한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에 대해 같은 방향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향을 3–4절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3 · 본디새김
‘이기적인 야심’은 앞 장에서 바울을 괴롭히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전하던 사람들의 동기를 묘사할 때도 등장했던 말입니다(1:17). 바울은 복음의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도 경쟁심과 자기 과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하는 반대 방향은 단순히 야심을 줄이거나 겸손한 말투를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라는 명령도, 다른 사람이 실제로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의 중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낮추는 대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유익에 합당한 무게를 두라는 것입니다.
4절은 오해의 여지를 더 줄입니다.
저마다 자기 일만 살피지 않고 저마다 다른 사람의 일도 살피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4 · 본디새김
‘자기 일만’과 ‘다른 사람의 일도’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 바울은 자신의 필요를 전혀 돌보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관심사에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포함시키라고 합니다. 일방적인 자기희생보다 넓은 상호 돌봄의 원리로,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함께 살피는 공동체를 바울은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의 요청 안에 담긴 겸손
2–4절의 그리스어 본문에서 독립적인 명령법 동사는 2절의 ‘채워 주십시오(πληρόω)’ 하나입니다. 뒤따르는 표현들은 같은 마음과 사랑을 품는 목적을 밝히고, 분사구문으로 그 삶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도덕적 명령을 따로따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요청을 점점 구체적으로 풀어 가고 있습니다.
그의 기쁨을 완성하는 것은 공동체의 하나 됨이고, 그 하나 됨은 서로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살피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겉으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닙니다. 서로에게 무관심해도 표면적인 평화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그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서로의 유익을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바울은 곧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보기이신가, 우리가 속한 삶의 자리이신가
여러분 사이에서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바로 그 마음입니다.빌립보서 2: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여는 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흔히 예수님께서 겸손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본문의 흐름에 잘 맞는 읽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표현을 예수님께서 친히 품으셨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예수님을 본보기로 강조하고, 후자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예수님과 무관한 일반적인 겸손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먼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요청한 다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셨으며 무엇을 하셨는지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바울이 말하는 겸손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편지의 문체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적인 찬양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장엄한 리듬으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셨던 분이 노예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셨으나, 하나님과 같음을 움켜쥘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빌립보서 2:6 · 본디새김
6–11절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장에 반복과 대조가 있고,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하나님의 높이심이 뚜렷하게 대응합니다. 그 때문에 이 부분은 흔히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립니다.
그 첫 문장에는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과 같음’이라는 두 가지 표현이 놓입니다. 여기서 ‘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생김새만을 뜻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어떤 지위와 존재 방식에 계셨는가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같은 단어가 ‘노예의 모습’에 사용됩니다.
이 반복이 결정적입니다.
하나님과 노예라는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 바울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는지 보여 줍니다.
‘움켜쥘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무슨 뜻인가
6절의 하르파그모스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해석이 어려운 단어입니다. 주요 읽기는 이미 가지고 계신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놓지 않으려 하지 않으셨다는 해석, 하나님과 동등해지시는 것을 빼앗아 차지하려 하지 않으셨다는 해석,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기회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해석으로 나뉩니다. 이 차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이미 지니셨는가, 그 지위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의 문제를 가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셨다’고 말하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낮은 존재이셨다고 읽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움켜쥘 것’이라는 표현만으로 위의 해석 가운데 하나를 모든 논쟁의 여지 없이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강조점은 뒤에 나오는 행동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도리어 노예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아지시면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겉모양으로 보아 사람으로 드러나빌립보서 2: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높은 지위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자신을 위한 이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움직임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시는 선택입니다.
비움은 무엇을 버리는 것인가
7절의 ‘자기를 비우셨습니다’는 신학적으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표현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정확히 무엇을 비우셨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신성을 버리셨다고 하지 않고, 어떤 신적 속성을 일시적으로 내려놓으셨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자기를 비우셨다는 말에, 노예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아지셨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비움을 무엇인가를 제거하는 사건으로만 생각하기보다, 예수님께서 노예의 모습을 취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신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움은 자신에게서 무엇을 빼셨는가보다, 우리를 위해 어떤 자리를 취하셨는가를 통해 설명됩니다.
이것은 2–4절의 권면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의 일을 살피라고 한 이유는 자신을 낮추는 것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미덕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의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낮아지심의 끝은 십자가였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이가 되어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까지.빌립보서 2:8 · 본디새김
7절이 노예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신 일을 말한다면, 8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걸어가신 길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밝힙니다.
그 길의 끝은 죽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까지’라고 덧붙입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사회에서 극심한 수치와 공개적인 굴욕을 수반하는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같음이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시작하여, 사회적으로 극도의 수치를 동반하는 죽음의 자리까지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그리고 이것을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극적인 운명에 휘말려 죽으신 분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그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며, 동시에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을 위한 길을 걸으신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이미 존재하던 찬가를 인용했을 가능성이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지만, 이 구절들이 실제로 예배에서 불리던 독립적인 노래였는지, 바울 자신이 특별한 문체로 작성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고, 기존의 찬가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본문의 형성 과정을 확정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μορφή)’의 ‘모습’은 그리스어 모르페이며, 7절의 ‘자기를 비우셨다’는 표현에서 신학 용어 ‘케노시스’가 나왔습니다. ‘움켜쥘 것’의 해석은 예수님의 선재와 아담과의 비교를 포함해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창세기 3:5에서 뱀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세워 유혹하고, 인간은 금지된 열매를 취합니다. 빌립보서 2:6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같음을 움켜쥘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두 본문을 대비하면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망과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태도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며, 아담과 예수님을 연결하는 유형론적 읽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2:6이 창세기 3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며, 이 연결만으로 ‘하나님의 모습’이나 ‘움켜쥘 것’에 관한 모든 해석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낮아지신 분 앞에 모든 무릎이 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보다 높은 그 이름을 그분께 은혜로 주셨습니다.빌립보서 2:9 · 본디새김
9절에서 문장의 주어가 바뀝니다.
6–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행동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셨고, 자기를 비우셨으며, 노예의 모습을 취하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제 행동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연결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인과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예수님께서 낮아지심을 단지 높아지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의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음을 움켜쥘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것이 대조됩니다. 이 대조는 바울이 앞에서 경계했던 ‘허영’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 경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이름’은 무엇인가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11절의 고백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11 · 본디새김
‘주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주인이나 통치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지만,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야훼를 옮기는 데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이사야 45:23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모든 이름보다 높은 그 이름’을 ‘주님’이라는 칭호와 연결하는 해석에는 강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그 이름을 ‘예수’라는 이름 자체로 보거나,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최고의 지위와 권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그 이름의 결과가 예수님의 보편적인 주권에 대한 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의 여호와야훼 고백이 예수님께 적용됩니다
이사야 45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음을 선포하십니다. 우상을 의지하는 민족들에게 자신을 향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마침내 모든 무릎이 자신에게 꿇고 모든 혀가 자신에게 맹세할 것을 선언하십니다(사 45:22–23). 그 본문의 관심은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사야에서 여호와야훼를 향했던 무릎 꿇음과 고백의 언어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매우 높은 명예를 받으셨다는 말보다 훨씬 강합니다. 이사야에서 오직 여호와야훼께 속한다고 선포되었던 보편적인 주권이 이제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인용을 따로 밝히지 않지만, ‘모든 무릎’과 ‘모든 혀’라는 표현이 뚜렷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의도적인 성경 사용으로 볼 근거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고백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은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무릎은 구원을 뜻하는가
이는 예수의 이름 앞에 하늘에 있는 존재들과 땅에 있는 존재들과 땅 아래 있는 존재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빌립보서 2:10 · 본디새김
세 부류의 존재는 예수님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우주 전체로 확대합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모든 존재의 자발적인 예배를 뜻하는지, 예수님을 거부했던 존재들까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는 뜻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권을 벗어나는 영역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모든 존재가 무릎을 꿇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앞에서 노예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모든 권세 위에 높여진 예수님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지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기 과시와 지배의 방식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2:13–53:12에 등장하는 여호와야훼의 종과도 주제적 연결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종은 고난을 당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로 묘사되며, 결국 높임을 받습니다. 두 본문의 모든 세부 사항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과 높임의 관계에서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빌립보서 2장은 이사야 53장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죄를 어떻게 담당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구원론적 의미는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성경 전체의 증언을 통해 더 넓게 설명할 수 있지만, 빌립보서 2장 자체에서는 그 죽음이 공동체의 마음과 삶을 어떻게 새롭게 규정하는지가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므로 여러분도 이루어 가십시오
바울은 찬양을 마치자마자 공동체의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해 온 그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시오.빌립보서 2:12 · 본디새김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말은 구원받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라는 명령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곧이어 말하는 이유를 읽으면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의 원함과 일함을 모두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2:13 · 본디새김
12절에는 사람의 행동이, 13절에는 하나님의 행동이 나오지만 두 문장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이 인간의 행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이미 받은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가
‘이루어 가십시오’는 어떤 일을 실제적인 결과에 이르도록 수행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구원이 공동체의 삶에서 실제로 드러나고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요청합니다.
명령은 복수형으로, 공동체 전체를 향합니다. 앞에서는 서로의 유익을 생각하고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고, 이제는 예수님의 순종을 들려준 뒤 그들도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개인적인 영적 성장으로만 좁히면 앞뒤 문맥과 연결되는 공동체의 문제가 희미해집니다.
‘두려움과 떨림’도 구원을 잃을까 봐 불안에 사로잡히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진지함과 경외가 담긴 표현입니다. 자신들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책임 있게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행동뿐 아니라 원함에도 일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선한 일을 하도록 도우신다고만 말하지 않고, 그들의 ‘원함과 일함’을 모두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행동보다 앞선 의지의 차원까지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놓여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더 강한 의지를 발휘하라는 명령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활동과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관계하는가라는 질문의 철학적 구조를 바울은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분명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의 순종은 그들만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들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요청을 없애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2:8). 이제 빌립보 사람들은 순종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2:12). 그러나 그 순종은 예수님의 순종을 인간의 힘으로 재현해 보려는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원함과 일함을 일으키시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길이 공동체의 삶으로 이어지는 방식이 여기서 밝혀집니다.
광야의 원망 대신 세상에서 빛나는 삶
바울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해 말한 뒤 갑자기 아주 일상적인 문제를 꺼냅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빌립보서 2:14 · 본디새김
문맥을 따라 읽으면 이것은 결코 사소한 권면이 아닙니다. 한마음으로 살고 서로의 유익을 생각하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반드시 외부의 박해만이 아닙니다. 서로를 향한 불평과 다툼이 공동체 안에서 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독자를 구약성경으로 데려갑니다.
광야에서 실패한 하나님의 백성
그리하여 여러분이 나무랄 데 없고 순수하며,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티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 가운데, 세상에서 별처럼 빛납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고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헛되이 달리지 않았고 헛되이 수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날에 내 자랑이 될 것입니다.빌립보서 2:15–16 · 본디새김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라는 표현은 신명기 32:5와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모세의 노래인 신명기 32장은 여호와야훼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대조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은혜를 잊고 다른 신들을 좇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표현을 빌립보 사람들에게 적용하면서 변화를 줍니다. 그 세대 가운데서 티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불성실함으로 책망받지만, 빌립보서에서는 그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세상 가운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요청받습니다.
이 연결을 생각하면 14절의 투덜거림은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 불평은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의 모든 불만을 광야 이스라엘의 반역과 동일시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원망이라는 표현과 신명기의 언어가 이어지는 점은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빛나는 사람들은 무엇을 들고 있는가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세상에서 벗어나 별처럼 빛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빛난다고 말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와 떨어져 자기들만의 순수한 세계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대 가운데 살아가면서 다른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문맥에서 그 모습은 먼저 원망과 다툼이 없는 삶,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서로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말씀’을 들고 있습니다. ‘들고서’에 해당하는 에페콘테스(ἐπέχω)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다는 뜻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밀거나 제시한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첫 번째 읽기는 복음에 대한 충실함을, 두 번째 읽기는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언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공동체는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며 그 말씀에 합당한 삶을 통해 세상 가운데 그 말씀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두 가능성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빛은 자기들의 탁월함을 과시하는 빛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생명이 공동체의 삶에서 나타나는 빛입니다. 바울은 그 모습을 그리스도의 날에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가 기대하는 사역의 열매는 자신의 명성이나 업적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세상 가운데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별’에 해당하는 말은 정확히 별만을 가리키는 단어라기보다 하늘의 빛나는 물체를 나타내는 포스테레스, 광명체들입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역 창세기 1:14–16에서 하늘에 놓인 광명체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므로, 바울의 표현에는 창조의 빛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창세기를 직접 인용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왜 자신을 제물 위에 붓는 헌주에 비유하는가
그러나 내가 여러분의 믿음에서 비롯된 제사와 예배 위에 헌주로 부어진다 해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합니다.빌립보서 2:17 · 본디새김
‘헌주’는 제물과 관련하여 포도주 같은 액체를 붓는 제의 행위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제물과 함께 부어 드리는 제사가 등장합니다(민 28:7–8).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제사와 예배를 먼저 말하고, 자신은 그 위에 부어지는 헌주라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이 제사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믿음으로 드리는 삶이 먼저 놓이고, 바울은 그 믿음을 섬기는 일에 자기 생명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부어진다’는 표현은 죽음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상황에서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즐거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죽음이 빌립보 사람들의 믿음을 섬기는 일에 사용된다면 그 일 자체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17–18절에서는 ‘기뻐하다’와 ‘함께 기뻐하다’는 말이 서로 주고받듯 나타납니다. 바울이 기뻐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 그들도 기뻐하고 바울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의 믿음을 위해 수고하는 삶을 기쁨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편지를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이름을 꺼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앞선 신학적 설명의 부록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마음이 실제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디모데: 자기 일을 구하지 않는 사람
디모데의 이야기는 여행 계획처럼 시작됩니다. 바울은 「여러분의 사정을 알고 나도 마음이 놓이도록」(19절) 그를 빌립보에 보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바울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품고 진심으로 여러분의 사정에 마음을 쓸 사람을 나는 달리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2:20 · 본디새김
앞에서 바울이 요청한, 다른 사람의 일을 살피는 마음입니다. 디모데가 특별한 까닭은 그의 능력이나 지식이 아니라, 빌립보 사람들의 사정을 진심으로 걱정할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은 ‘같은’이라는 뜻의 말과 ‘마음·목숨’을 뜻하는 말이 결합한 표현으로, 바울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도, 마음이 잘 맞는 동역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디모데의 특징은 바울이 품고 있는 공동체를 향한 관심에 진실하게 참여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것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2:21 · 본디새김
이 말을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기 이익만 추구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앞에서 많은 신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고, 곧이어 에바브로디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여기서 ‘모두’는 디모데와 비교되는 바울 주변의 사람들, 특히 해당 임무에 적합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문제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앞 20절이 답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의 사정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구한다는 것은 실제 사람들의 필요를 자기 관심의 중심에 놓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2:4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살피라고 말했고, 이제는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노예로 일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디모데가 시련을 거쳐 인정받은 사람임을 압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 그는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 노예로 일했습니다.빌립보서 2:22 · 본디새김
‘노예로 일했습니다(δουλεύω)’는 예수님께서 취하신 ‘노예의 모습’의 노예와 같은 어근을 가진 동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노예로 일했습니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바울과 디모데는 자신들을 예수님의 노예라고 소개했습니다(1:1). 이제 디모데가 그 정체성에 따라 살아왔음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를 비유로 쓰면서도, 디모데가 바울 개인에게 복종했다고 하지 않고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 노예로 일했다고 말합니다. 디모데의 충성은 바울 개인을 넘어 예수님의 복음을 섬기는 일로 향합니다.
디모데가 앞으로 빌립보에 갈 사람이었다면, 에바브로디도는 이미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예상과 조금 다릅니다.
에바브로디도: 죽음 가까이 갔던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그런데 나는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내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이며, 여러분의 사절이자 내 필요를 돌보는 일꾼입니다.빌립보서 2:25 · 본디새김
겹쳐 놓은 표현들은 직함의 나열이 아니라 에바브로디도가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는 같은 믿음 안에 있는 형제이고, 복음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동역자이며, 어려움과 위험 속에서도 함께 서 있는 전우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사절이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바울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준 일꾼입니다.
빌립보서 4:18을 보면 그는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보낸 것을 전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공동체의 지원을 가지고 먼 길을 이동했고, 바울의 곁에서 필요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하게 병들었습니다.
병든 사람이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가
그가 여러분 모두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여러분이 들었기에 몹시 괴로워했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2:26 · 본디새김
바울은 그의 괴로움을 설명하면서 병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 가까이 이를 정도로 아팠지만, 자신의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있을 빌립보 사람들을 생각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자기 몸이 아픈 사람이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할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들이 자신을 걱정할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헌신을 더욱 실제적으로 만듭니다.
바울도 슬픔을 두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앓다가 죽음 가까이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만이 아니라 나도 불쌍히 여기셔서 내가 슬픔 위에 슬픔을 지니지 않게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27 · 본디새김
왜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까? 에바브로디도가 죽었다면 바울은 슬픔 위에 슬픔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1:23). 그런데 그 바울이 여기서는 동역자의 죽음을 생각하며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소망을 가진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슬픔을 인정하기 때문에,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을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로 받아들입니다. 바울은 그가 어떤 병을 앓았는지, 어떤 방법으로 회복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고난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사람이 아닙니다. 슬픔을 슬픔으로 알고, 자비를 자비로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돌아오는 사람을 왜 기쁨으로 맞아야 하는가
그래서 나는 더욱 서둘러 그를 보냅니다. 여러분이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고 나도 덜 근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28 · 본디새김
여기에는 세 사람 또는 세 집단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빌립보 사람들은 병든 에바브로디도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며, 바울은 그들이 다시 만나 기뻐하면 자신도 덜 근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기쁨은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그러니 주 안에서 가득한 기쁨으로 그를 맞아 주고, 그런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십시오.빌립보서 2:29 · 본디새김
왜 그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까? 그 이유가 마지막 절에 나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로, 여러분이 나를 돕는 데 다하지 못한 몫을 채우려고 목숨을 걸고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2:30 · 본디새김
‘여러분이 나를 돕는 데 다하지 못한 몫’은 빌립보 교회의 지원이 불충분하거나 그들의 마음이 부족했다는 비난이 아닙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을 돕기 원했지만 모두가 직접 그에게 갈 수는 없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들을 대신하여 바울에게 갔고, 공동체를 대표하여 그들의 사랑을 실제적인 섬김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일이란 많은 사람 앞에서 복음을 설교하거나 눈에 띄는 성취를 이루는 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고 그를 돌본 실제적인 섬김이 예수님의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절’에 사용된 단어는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빌립보 공동체가 보낸 대표자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적절하며, 이것만으로 에바브로디도가 열두 사도와 같은 직분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일꾼’에 사용된 레이투르고스는 공적인 봉사나 종교적인 섬김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실제적인 필요를 돌본 일을 가치 있는 섬김으로 설명합니다.
병들었다가 돌아오는 사람을 맞으며
바울이 귀하게 여기라고 하는 사람은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세상에서 큰 권세를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신 사건과 공동체가 에바브로디도를 존중하는 일은 동일한 사건이 아니지만, 두 이야기에는 공통된 가치의 방향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삶이 참으로 존중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적인 주권에 관한 고백이 병들었던 사람의 귀환을 환영하는 장면으로 내려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찬양을 반복하지 않고, 대신 구체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높으심을 작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걸으셨는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원함과 일함을 일으키십니다.
다만 자신을 낮춘다는 말을 모든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해로운 관계를 견디라는 명령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는 사랑의 행동이지, 누군가의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바울은 한 사람에게만 희생을 요청하지 않고 ‘서로’와 ‘저마다’를 이야기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섬겼고, 바울은 그의 회복과 마음을 돌보며 그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공동체는 섬기는 사람의 희생을 끝없이 요구하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그 사람도 사랑하고 돌보며 귀하게 여기는 곳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로 돌아갑니다.
그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회복된 모습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멀리 있는 바울도 그 소식을 생각하며 근심을 덜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았던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장면에는 화려한 권세도, 눈부신 승리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안녕을 기뻐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자리에서,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사람들 사이에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