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0–24장 · 솔로몬의 짧은 격언

듣고 의지하며 곁에 남는 삶

잠언 18장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떨어져 지내는 이는 제 욕망을 좇고, 온갖 건전한 판단에 맞서 들고일어난다」(1절).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형제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벗도 있다」(24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장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험담을 즐기는 사람, 재판에서 먼저 자기 입장을 설명하는 사람, 상처받아 마음의 문을 닫은 형제, 그리고 가까이 머무는 벗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듣고 판단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생각만 드러내려 하고, 어떤 사람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안전한 성벽으로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이라는 망대로 달려갑니다.

이 격언들을 따라 읽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무엇을 믿고 자기 삶을 지키려 하는가?

어떤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믿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조언을 거부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믿습니다. 그래서 높은 성벽 안에 있는 것처럼 자신을 안전하게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말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대답합니다.

하지만 잠언 18장은 이러한 확신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상대방의 추궁을 받으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튼튼하게 보이던 관계도 한 번의 심각한 갈등으로 빗장이 걸린 성채처럼 변할 수 있습니다. 많은 벗을 두고 있어도 진정으로 곁에 남아 줄 사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 장은 여러 독립적인 격언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나의 엄격한 이야기 구조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따라가면 뚜렷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자기 생각에 갇힌 사람과 지혜의 말이 대비됩니다. 이어서 사람을 해치는 말과 무책임한 행동이 등장합니다. 그다음에는 두 종류의 안전, 곧 여호와야훼의 망대와 부자의 성벽이 나란히 놓입니다. 이후 듣기와 판단, 갈등과 화해의 문제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말의 열매와 가까운 관계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들어야 할 말을 듣고, 의지해야 할 분을 의지하며, 지켜야 할 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읽는 시간 34분소단락 718장 본문 읽기 →

자기 마음만 드러내려는 사람은 무엇을 잃는가

잠언 18:1–4 본문 →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떨어져 지내는 이는 제 욕망을 좇고, 온갖 건전한 판단에 맞서 들고일어난다.잠언 18:1 · 본디새김

히브리어의 첫 표현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잠언이 문제 삼는 것은 그 사람이 왜 떨어져 지내는가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이유가 자신의 욕망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 거리는 단순한 생활방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건전한 판단’은 잠언에서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지혜나 판단력을 가리킵니다(잠언 2:7; 8:14). 따라서 이 사람은 아무런 의견이나 조언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유익한 판단에까지 맞서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사정이 있는 사람이나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 욕망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지혜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면서도 자신에게 동의하는 말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이 경고하는 고립은 단순히 물리적인 고립보다 더 깊은 문제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고칠 수 있는 모든 길을 스스로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해하려는 마음과 드러내려는 마음

어리석은 이는 분별을 기뻐하지 않고, 제 마음을 드러내는 것만 기뻐한다.잠언 18:2 · 본디새김

2절은 1절의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읽힙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기쁨이 대조됩니다. 하나는 무엇이 옳은지 이해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남에게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자기 생각을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목적이 단지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데만 있다면, 그 사람은 대화를 통해 무엇을 배우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근거가 제시되어도 다시 자기 입장만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이 부족한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알고 있는 것이 많아도 분별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이 많아도 배우는 것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를 가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를 단순히 지식의 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뻐하는가가 그 차이를 보여줍니다.

1절의 사람은 자기 욕망을 좇고, 2절의 사람은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기뻐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습니다.

악과 함께 들어오는 것들

악한 이가 오면 멸시도 오고, 불명예와 함께 모욕도 온다.잠언 18:3 · 본디새김

3절은 악한 사람이 혼자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악한 행동과 멸시, 수치와 모욕이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격언입니다.

악은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관계의 분위기를 바꾸고,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주거나 자신에게 수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앞의 두 구절에서는 다른 사람의 판단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만 드러내는 태도가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그런 자기중심적인 삶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자신의 욕망만 좇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이유를 점점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과 함께 멸시와 모욕이 관계 속으로 들어옵니다.

깊은 물과 흘러넘치는 시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깊은 물이고, 지혜의 샘은 흘러넘치는 시내다.잠언 18: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말 자체를 물에 비유합니다. 하나는 깊은 물이고, 다른 하나는 흘러넘치는 시내입니다.

깊은 물은 겉에서 그 속을 쉽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깊다는 것은 풍부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품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흘러넘치는 시내는 물이 계속 움직이며 흘러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두 행의 관계를 명확한 접속사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두 이미지가 모두 지혜로운 말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읽기입니다. 사람의 말은 깊이가 있고, 지혜의 샘은 끊임없이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사람의 말이 깊고 파악하기 어려운 물인 반면, 지혜의 샘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흘러가는 시내라는 대조로 읽는 것입니다. 어느 해석이 반드시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지혜로운 말은 단순히 입 밖으로 많이 쏟아지는 말과 다릅니다. 그 말에는 깊이나 지속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잠언 20:5에서도 사람 마음속의 계획이 깊은 물에 비유되고, 분별 있는 사람이 그것을 길어 올린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함께 생각하면, 지혜는 입에 떠오르는 말을 모두 쏟아 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것을 길어 올려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앞의 2절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것만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4절은 말이 단순한 자기표현보다 더 깊은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입은 자신의 욕망을 내보내는 통로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지혜를 흘려보내는 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은 어떻게 사람을 파괴하는가

잠언 18:5–9 본문 →

편파적인 재판도 말의 문제입니다

악한 이를 편들고 재판에서 의로운 이를 밀쳐 내는 것은 좋지 않다.잠언 18:5 · 본디새김

4절에서 지혜의 말을 이야기한 뒤, 5절은 법정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재판은 사람들이 말하는 곳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은 그 주장에 반박합니다. 증언이 제시되고, 판단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악한 사람을 편들고 의로운 사람을 밀쳐 낸다면, 말과 판단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됩니다. 잠언은 이 일을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짧고 절제된 표현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도덕적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악한 사람을 편드는 것은 그 사람이 책임을 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밀쳐 내는 것은 보호받아야 할 사람에게 부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적인 대화에서 상대를 오해하는 문제보다 더 넓은 영향을 미칩니다. 공동체가 누구를 믿고 누구를 보호할지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8장은 말의 지혜를 개인의 언어 습관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말을 올바르게 다룬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권리와 삶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입술은 자기 자신을 해칩니다

어리석은 이의 입술은 다툼에 끼어들고, 그의 입은 매질을 불러들인다.잠언 18:6 · 본디새김
어리석은 이의 입은 그에게 파멸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목숨을 옭아매는 덫이다.잠언 18:7 · 본디새김

두 구절은 어리석은 사람의 입이 가져오는 결과를 연속해서 보여줍니다. 7절에서는 그 결과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본문은 다른 사람이 그를 해치기 위해 파 놓은 덫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을 통해 스스로 위험한 상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은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그 말 때문에 다툼이 시작되고, 원한이 생기고, 심각한 결과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잠언은 그 과정을 매질과 파멸, 목숨을 옭아매는 덫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물론 이것이 폭력의 피해자가 언제나 자신의 말 때문에 폭력을 당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의 책임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본문은 어리석은 말이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강조하는 것이지, 모든 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격언에서 특별한 것은 입이 자신의 주인을 배반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주장하고 보호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별 없이 내뱉은 말이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자신을 위해 사용한 입술이 자신의 목숨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것입니다.

험담은 왜 맛있는 음식처럼 느껴지는가

헐뜯는 이의 말은 게걸스레 삼키는 음식 같고, 그 말은 뱃속 깊은 방들로 내려간다.잠언 18: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두 구절과 다른 방향에서 말의 위험을 보여줍니다. 6–7절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졌습니다. 8절에서는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왜 하필 음식일까요?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 몸속으로 내려갑니다. 어떤 음식은 맛이 좋아서 더 먹고 싶어집니다. 험담도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잘못이나 약점을 듣는 일은 듣는 사람에게 이상한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은 그 사람보다 낫다는 느낌을 얻을 수도 있고,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는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단순히 입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뱃속 깊은 방들로 내려갑니다. ‘뱃속 깊은 방들’은 배의 안쪽 방들, 곧 사람의 깊은 내면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몸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음식처럼, 험담도 듣는 사람의 내면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험담은 듣는 순간의 즐거움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오래 남아 누군가에 대한 판단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도 그 이야기를 떠올리게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이 그 모든 심리적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 뱃속 깊은 방들로 내려간다는 이미지는 들은 말이 사람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는다는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 구절은 험담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 험담을 즐겨 듣는 사람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말이 흥미롭고 듣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마음 깊이 들여놓아도 되는가?

잠언은 말의 위험이 혀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귀에서도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파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제 일을 소홀히 하는 이도 파괴하는 자의 형제다.잠언 18: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갑자기 노동의 문제로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앞의 격언들과 함께 읽으면 연결이 드러납니다. 앞에서는 어리석은 말과 험담이 사람을 해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를 ‘파괴하는 자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게으름 이상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파괴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직접 무너뜨립니다. 반면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필요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두 행동은 방식이 다르지만, 결과에서는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것을 방치하여 망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지 않아 문제가 더 커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이지, 모든 업무상 실수나 능력의 한계를 파괴 행위와 동일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잠언이 문제 삼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소홀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피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행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두 개의 높은 성벽: 어디에 안전이 있는가

잠언 18:10–12 본문 →

여호와야훼의 이름이라는 망대

여호와야훼의 이름은 튼튼한 망대다. 의로운 이는 그리로 달려가 높은 곳에 안전히 놓인다.잠언 18:10 · 본디새김

어떤 사람이 위험을 피해 달려갑니다. 그가 향하는 곳은 튼튼한 망대입니다.

망대는 높은 곳에서 주변을 살피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구조물입니다. 특히 성벽이나 요새와 연결된 망대는 위험이 닥쳤을 때 피할 수 있는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 망대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일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름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는지와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34:5–7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며 인애와 신실함이 풍성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면서도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특정한 발음을 주문처럼 반복하면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름으로 자신을 알려 주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해야 할 위험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위험 앞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크고 신뢰할 수 있는 분께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위험이 사라진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험 앞에서 무엇을 최종적으로 의지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 모습은 장의 첫 구절과 대조됩니다. 1절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기 욕망을 따랐습니다. 10절의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 머물지 않고 여호와야훼께 달려갑니다.

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갇히고, 다른 사람은 자신보다 큰 보호를 구합니다.

부자의 재산이라는 성읍

부자의 재산은 그의 튼튼한 성읍이고, 그의 상상 속에서는 높은 성벽 같다.잠언 18:11 · 본디새김

10절과 11절은 거의 같은 그림을 사용합니다. 두 구절 모두 높은 곳에 있는 안전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안전의 근거가 다릅니다. 10절에서 의로운 사람의 피난처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입니다. 11절에서 부자의 피난처는 자신의 재산입니다.

특히 둘째 행 「그의 상상 속에서는 높은 성벽 같다」가 중요합니다. 잠언은 재산이 실제로 아무런 보호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생활을 안정시키고 위험에 대비하는 데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주는 안전과 그 사람이 상상하는 절대적인 안전은 다릅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튼튼한 성읍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벽이 모든 위험을 막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의 상상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안전을 원하지만, 한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는 분에게 달려가고, 다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절대적인 보호로 여길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가난해야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초점은 재산의 소유 여부보다 자신이 무엇을 궁극적인 안전으로 여기는가에 있습니다.

높아지는 마음과 낮아지는 마음

파멸에 앞서 사람의 마음은 높아지고, 영예에 앞서 겸손이 있다.잠언 18:12 · 본디새김

앞의 두 구절에는 높은 망대와 높은 성벽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사람의 마음이 높아집니다. 공간적인 높이의 이미지가 마음의 태도로 옮겨 온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자기 마음을 높이는 사람이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그 사람을 높이는가, 무엇을 의지하여 높아지려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호와야훼께 피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높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판단을 과신합니다. 그 결과가 파멸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예에 앞서는 것은 겸손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겸손한 척하면 반드시 사회적 성공을 얻는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잠언은 참된 영예에 어울리는 마음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다른 사람의 판단을 들으며,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다음 구절은 바로 그 겸손이 일상적인 대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주제는 시편에 자주 등장합니다. 시편 20:7–8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병거와 말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61:3–4에서는 하나님을 원수 앞에서 피할 수 있는 튼튼한 망대로 묘사합니다. 이 본문들은 잠언 18:10의 망대가 단순한 장식적 비유가 아니라, 위험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구약의 중요한 신앙 고백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인간의 판단과 책임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잠언 18장은 오히려 듣기와 판단, 공정한 재판과 성실한 노동을 강조합니다.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사람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재판

잠언 18:13–19 본문 →

가장 빠른 대답이 가장 지혜로운 대답은 아닙니다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것, 그것은 그에게 어리석음이며 수치다.잠언 18: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단순히 상대방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예절 교육보다 깊은 문제를 다룹니다.

왜 사람은 듣기도 전에 대답할까요? 이미 상대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이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상대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빨리 전달하는 데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은 1–2절의 인물과 연결됩니다. 자기 욕망을 따르기 위해 다른 판단을 거부하는 사람, 분별보다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일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 태도가 어리석음과 수치를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 이미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상대방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답한다면 자신의 판단은 충분한 근거 없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대답은 빠르게 나오는 대답이 아니라, 제대로 들은 뒤에 나오는 대답입니다.

몸의 병보다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

사람의 마음은 제 병을 견뎌 내지만, 꺾인 마음은 누가 감당하겠는가?잠언 18:14 · 본디새김

13절에서는 듣는 태도를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의 마음 또는 기운이 병을 견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자체가 꺾였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견디겠느냐고 묻습니다.

본문은 사람이 병을 견뎌 내는 데 내적인 힘이 중요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힘 자체가 무너진다면 상황은 훨씬 어려워집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꺾인 사람이 몸의 병을 이겨 낼 수 없다거나,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반드시 건강을 회복한다는 의학적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은 사람이 겪는 고통의 깊이를 보여주는 시적인 대조를 사용합니다.

특히 둘째 행은 질문으로 끝납니다. 이 질문은 쉽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에게 무조건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것도 충분한 대답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미 자신을 지탱하던 내적인 힘이 약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단지 정보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상태도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어눌하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들린다고 해서 그가 겪고 있는 고통까지 가볍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귀는 계속 찾습니다

분별 있는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이들의 귀는 지식을 구한다.잠언 18:15 · 본디새김

13절에서는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사람을 비판했습니다. 15절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의 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특별한 이유는 이미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배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본문은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지식을 계속 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현재 판단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과 새로운 사실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기서 마음과 귀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마음은 지식을 얻고, 귀는 지식을 구합니다. 이는 배우는 일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2절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분별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15절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찾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새로운 지식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습니다.

선물이 높은 사람 앞으로 길을 열어 줄 때

사람이 주는 선물은 그에게 길을 열어 주고, 그를 높은 이들 앞으로 이끈다.잠언 18:16 · 본디새김

16절에는 현실적인 사회관계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선물은 호의를 표현하거나 관계를 형성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선물’이 반드시 뇌물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은 선물이 사회적 관계에서 실제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관찰합니다. 그렇다고 선물을 통해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모든 행동이 의롭다고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앞의 17:23에서는 뇌물이 재판을 왜곡하는 수단으로 비판받았습니다. 선물이 정당한 호의의 표현인지, 부당한 판단을 사려는 뇌물인지는 그 목적과 상황에 따라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언이 보여주는 현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순수한 논리와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물과 호의, 사회적 지위와 접근 기회도 관계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높은 사람 앞에서조차 판단을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처음 들은 이야기는 언제나 그럴듯합니다

송사에서 먼저 말하는 이는 옳아 보이지만, 그 상대가 와서 그를 추궁한다.잠언 18:17 · 본디새김

어떤 사람이 재판에서 먼저 자기 입장을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은 그럴듯합니다. 그는 자신이 왜 옳은지 근거를 제시하고, 상대방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의 주장이 실제로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옳아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추궁한다’는 자세히 살피고 조사하는 행위와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둘째 사람은 단순히 반대 의견을 덧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먼저 제시된 주장을 검토하고 질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처음에 그럴듯하게 들렸던 설명의 문제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반드시 처음 말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는 뜻도 아니고, 나중에 말한 사람이 언제나 옳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쪽의 주장만 듣고 내린 판단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은 앞의 13절과 깊이 연결됩니다. 13절에서는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는 한 사람의 말만 듣고 그것이 옳다고 판단하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먼저 전달된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사실과, 그 설명이 실제로 옳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제비뽑기가 다툼을 끝낼 때

제비뽑기는 다툼을 그치게 하고, 힘센 이들 사이의 시비를 가른다.잠언 18:18 · 본디새김

17절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충분히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18절에서는 제비뽑기가 등장합니다.

왜 제비가 다툼을 멈출 수 있을까요? 어떤 분쟁에서는 양쪽이 자기 주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힘센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판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양쪽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제비뽑기 절차는 분쟁을 끝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땅의 분배와 같은 일에 제비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여호수아 18:10). 잠언 16:33은 제비의 모든 판정이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관심은 조금 다릅니다. 잠언 18:18은 제비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다만 이를 모든 분쟁을 제비뽑기로 해결하라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17절은 서로의 주장을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뇌물이나 거짓 증언이 개입된 재판을 제비뽑기로 대체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구절은 특정한 상황에서 당사자들이 받아들이는 판정 절차가 힘의 대결을 멈추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번 상처받은 형제의 마음

잘못을 당한 형제의 마음을 얻기는 튼튼한 성읍을 점령하기보다 어렵고, 다툼은 성채의 빗장 같다.잠언 18:19 · 본디새김

18절은 다툼을 끝내는 수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갈등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잘못을 당한 형제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원래 가까운 관계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잘못 때문에 관계가 손상되었습니다. 잠언은 그의 마음을 얻는 일을 튼튼한 성읍을 점령하는 일에 비교합니다.

둘째 행은 다툼을 성채의 빗장에 비유합니다. 빗장은 성문을 닫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관계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자신의 마음에 빗장을 걸 수 있습니다.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쉽게 나누던 이야기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단순히 한마디 사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상처받은 사람이 마음을 닫았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툼이 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는지 경고합니다. 그 사람의 신뢰를 다시 얻는 일이 성채의 빗장을 여는 것처럼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툼이 시작되기 전에 멈추어야 하는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명령이나 힘으로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앞의 18절에서 제비는 분쟁의 판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절은 판정이 내려졌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까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분쟁을 법적으로 끝내는 것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는 야고보서 1:19가 듣기는 빠르게 하고 말하기는 더디게 하라고 권합니다. 이는 잠언 18:13과 15절의 듣는 태도에 관한 가르침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14절에서 마음으로 옮긴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숨, 영, 기운 등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사람의 내적인 기운과 정신적인 힘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절과 관련하여, 신명기 1:16–17에서도 재판관들은 형제들 사이의 송사를 잘 듣고 공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신명기 19:15–19에서는 증언을 확인하고 거짓 증언의 문제를 조사하도록 명령합니다. 잠언 18:17은 이러한 정의의 원리가 왜 필요한지를 인간의 실제 판단 과정에서 보여줍니다. 사람은 처음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쉽게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절의 히브리어 첫 행에는 ‘마음을 얻기 어렵다’는 뜻의 동사가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잘못을 당한 형제’와 ‘튼튼한 성읍’이 비교되고, 구체적인 비교 관계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이어지는 성채의 빗장 이미지를 고려하여 그 마음을 얻기 어렵다는 뜻으로 풀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입의 열매를 먹습니다

잠언 18:20–21 본문 →

입에서 나온 것이 다시 배를 채웁니다

사람의 입이 맺은 열매로 그의 배가 부르고, 그는 자기 입술의 소출로 배부르다.잠언 18:2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잠언 18장에서 반복되어 온 입과 배의 이미지를 다시 가져옵니다. 8절에서는 험담이 음식처럼 사람의 뱃속 깊은 방들로 내려갔습니다. 20절에서는 사람이 자기 입에서 나온 열매로 배부르게 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내보낸 말 역시 어떤 결과를 맺고, 그 결과가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20절은 이것을 농사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입은 열매를 맺고, 입술은 소출을 냅니다. 열매와 소출은 뿌리고 가꾼 일의 결과입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순간 사라지는 소리처럼 보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좋은 말은 신뢰를 쌓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거짓말과 험담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말한 사람에게도 피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말을 잘하면 경제적으로 성공한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말은 사람의 삶에 결과를 남기며, 그 결과는 말한 사람 자신에게도 돌아올 수 있다는 지혜의 관찰입니다.

죽음과 삶이 혀의 힘에 달려 있다는 뜻

죽음과 삶은 혀의 힘에 달려 있고, 혀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 18:2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잠언 18장의 말에 관한 가르침을 가장 강렬한 표현으로 압축합니다.

여기서 ‘힘에 달려 있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혀의 ‘손 안에 있다’는 이미지입니다. 손은 무엇을 붙들고 움직이며 힘을 행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잠언은 혀에도 그와 같은 영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사람이 말한 내용이 언제나 현실을 직접 창조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말을 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나고, 나쁜 말을 하면 그 말대로 재앙이 발생한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말이 인간의 삶에 미칠 수 있는 막대한 영향을 강조합니다.

재판에서 한 사람의 증언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억울하게 처벌받게 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은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고, 진실을 밝히는 말은 억울한 사람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깊이 상처 입은 사람에게 건네는 말은 회복을 도울 수도 있고,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잠언 18장의 앞부분에서 이미 이런 사례들을 보았습니다. 어리석은 입술은 자기 목숨을 옭아매는 덫이 되었고, 험담은 다른 사람의 내면 깊이 들어갔습니다. 재판에서 먼저 나온 말은 옳아 보였지만, 다른 사람의 추궁을 통해 다시 검토되어야 했습니다.

그 모든 장면이 21절에 모입니다.

둘째 행 「혀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 열매를 먹는다」는 단순히 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좋은 열매가 돌아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을 즐겨 사용하고 그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용한 말의 결과를 경험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생명의 열매일 수도 있고 파괴적인 열매일 수도 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말하는 사람의 책임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자신의 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의 힘을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신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말의 힘에 관한 가르침은 잠언의 다른 구절들과도 연결됩니다. 잠언 12:18은 함부로 내뱉는 말이 칼로 찌르는 것과 같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치유한다고 말합니다. 잠언 15:4에서는 치유하는 혀를 생명의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잠언 18:21은 이 주제를 한층 강하게 표현하여 죽음과 삶이 혀의 힘에 달려 있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야고보서 3:5–10은 혀가 작은 지체이지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잠언 18장의 가르침이 신약에서 직접 인용된 것은 아니지만, 말의 책임과 지혜로운 관계라는 주제가 계속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좋은 관계는 어디에서 오는가

잠언 18:22–24 본문 →

아내를 찾은 사람은 좋은 것을 찾았습니다

아내를 찾은 이는 좋은 것을 찾았고, 여호와야훼에게서 호의를 얻었다.잠언 18:22 · 본디새김

말의 위험과 열매를 이야기한 뒤에 아내를 찾은 사람의 기쁨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 부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의미 있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결혼은 단순한 재산의 취득이나 사회적 지위의 상승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갈 사람을 만나는 일이 삶의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고대의 남성 독자를 중심으로 아내를 얻는 일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만 평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모든 결혼이 자동으로 행복하다거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지 못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잠언은 결혼이라는 관계가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선물을 여호와야훼의 호의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배우자를 만나는 일을 자신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좋은 관계를 누리는 삶에도 하나님의 호의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10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의로운 사람의 피난처였습니다. 22절에서는 배우자를 만나는 좋은 일이 여호와야훼의 호의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위험에서 보호받는 일뿐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좋은 관계 속에서도 경험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애원과 부자의 거친 대답

가난한 이는 애원하며 말하고, 부자는 거칠게 대답한다.잠언 18:23 · 본디새김

23절은 사람들 사이의 힘의 차이가 말하는 방식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잠언은 모든 가난한 사람이 언제나 공손하고, 모든 부자가 언제나 거칠다는 보편적인 성격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 지위의 차이가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현실을 관찰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부탁해야 할 처지에 놓일 수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거나 기회를 얻기 위해 상대방에게 간청할 수 있습니다. 반면 부자는 자신이 가진 자원과 지위 때문에 상대방에게 더 강한 태도를 보일 여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말투가 다른 것은 단순히 개인적 성격의 차이 때문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사회적 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그 차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부자의 거친 대답을 옳다고 승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의 5절은 불공정한 판단을 비판했고, 13절은 상대의 말을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문맥에서 보면 부자의 거친 말이 단순히 경제적 지위 때문에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지위는 그가 얼마나 쉽게 말할 수 있는지를 바꿀 수 있지만, 그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존중해야 하는지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형제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벗

벗들을 둔 사람은 파멸에 이르지만, 형제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벗도 있다.잠언 18:24 · 본디새김

잠언 18장은 이 구절로 끝납니다.

첫 행은 해석이 어려운 구절입니다. 히브리어 레히트로에아(⁨רָעַע⁩)는 파멸이나 손상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지만, 사귐이나 친교와 관련된 말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따라서 벗들이 많아서 오히려 파멸한다는 뜻으로도, 다른 사람과 친교를 맺는 행동에 관한 진술로도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파멸에 이른다는 읽기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파멸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통해 발생하는지까지 본문에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둘째 행의 의미는 더욱 분명합니다. 여기서 ‘붙어 있다’는 표현은 단순히 가까이에 있다는 뜻을 넘어 단단히 달라붙거나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잠언 18:24의 친구는 단순히 자주 만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쉽게 떠나지 않고 가까이 머무는 사람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형제는 중요한 혈연관계였습니다. 형제 사이에는 함께 살아온 역사와 가족적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벗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혈연관계의 가치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가까움이 혈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형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멀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도 형제보다 더 가까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19절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잘못을 당한 형제의 마음은 튼튼한 성읍처럼 굳게 닫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에서는 형제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벗이 등장합니다. 한쪽에서는 가까웠던 관계가 상처로 인해 멀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혈연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만으로 관계가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를 유지하는 신실함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관계의 가치는 단순히 몇 명을 알고 있는가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에도 누가 곁에 머무는가가 중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과 관련하여,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알맞은 돕는 이를 마련하십니다. 잠언 18:22는 창세기 2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함께 살아갈 상대가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주제를 공유합니다. 24절의 ‘붙어 있다’와 같은 어근은 창세기 2:24에서 남자가 아내와 결합하는 일을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룻기 1:14에서는 룻이 나오미에게 붙어 있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또한 가까운 친구에 관한 가르침은 사무엘상 18–20장의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고, 다윗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가 아니라, 위험과 이해관계의 갈등 속에서도 신실함을 보여주는 관계였습니다. 잠언 18:24가 직접 그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형제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벗이라는 이상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구약의 사례입니다.

잠언 18장이 보여주는 지혜의 깊이

잠언 18:1–24 본문 →

이 장은 많은 주제를 다루지만, 그것들이 서로 무관하게 흩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들과 얼마나 많이 함께 있는가가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관계를 맺고, 무엇을 듣고 말하며, 누구를 신뢰하는가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할 피난처이시며,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언어, 관계를 절대화하지 않고 지혜롭게 다루도록 부름받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단순히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알고, 다른 사람의 말과 새로운 근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잠언 18장의 처음에는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좇았고, 다른 사람의 건전한 판단에 맞서 들고일어났습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의 말은 자신을 바로잡아 줄 기회라기보다 자신의 뜻을 방해하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누군가의 곁에 붙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지혜로운 말을 잘하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특별한 문제를 해결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형제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벗이라고 말합니다.

잠언은 그 벗을 거대한 성읍이나 높은 망대에 비유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가 가까이 붙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힘보다, 어려운 때에도 자기 곁을 떠나지 않는 한 사람이 더 귀할 수 있습니다.

잠언 18장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면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