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0–24장 · 솔로몬의 짧은 격언

가난한 이의 편에 서시는 여호와야훼

잠언 19장에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가난합니다. 재산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들도 잃어 가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그를 미워하고, 친구들마저 멀어집니다. 그가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건네지만, 그 말이 어디에 이르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의 한가운데에서 뜻밖의 선언이 나옵니다. 「가난한 이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는 여호와야훼에게 빌려주고, 여호와야훼는 그가 베푼 것을 그에게 갚는다」(17절).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멀어집니다. 그에게 무언가를 주어도 돌려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일을 자신에게 빌려주는 일로 여기십니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난한 이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에게 베푼 일을 하나님 자신이 갚으실 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잠언 19장은 이렇게 인간이 평가하는 가치와 여호와야훼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를 여러 차례 대비합니다.

사람들은 재산이 많으면 친구가 많아지고, 가난하면 가까운 사람들마저 떠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절과 온전함을 재산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람은 서둘러 자기 길을 선택하고, 그 선택 때문에 일이 망가지면 여호와야훼에게 분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인간의 수많은 생각 가운데 결국 굳게 서는 것은 여호와야훼의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바로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훈계는 분노의 배출이 아니라 희망을 품은 행동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19장은 두 가지 질문을 계속 교차시킵니다. 사람은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여호와야훼 앞에서 실제로 좋은 삶은 무엇인가요?

이 장은 하나의 이야기가 순서대로 전개되는 본문은 아닙니다. 서로 독립적인 격언들이 모여 있고, 그사이에서 가난과 재산, 거짓 증언, 분노, 가정, 훈계와 하나님의 계획이 반복됩니다. 따라서 모든 구절을 하나의 엄격한 구조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연결은 분명합니다.

1–3절에서는 자신의 길을 판단하는 인간의 한계가 나타납니다. 4–9절은 재산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관계와 거짓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10–14절에서는 지위와 가정, 분노와 호의가 교차합니다. 15–19절은 게으름과 책임,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자비와 자녀의 훈계를 다룹니다. 20–24절에서는 인간의 생각과 여호와야훼의 계획이 대비되고, 마지막 25–29절은 사람이 훈계를 거부할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여줍니다.

지혜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찾아내는 능력만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귀한지 알아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읽는 시간 42분소단락 719장 본문 읽기 →

자기 길을 망가뜨리고 하나님께 성내는 사람

잠언 19:1–3 본문 →

가난하지만 온전한 사람이 더 낫습니다

온전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이가 입술이 비뚤어진 어리석은 이보다 낫다.잠언 19:1 · 본디새김

잠언 19장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대조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재산의 양이 아니라 삶의 온전함과 말의 정직함입니다.

‘온전하게(⁨תֹּ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흠이 없거나 온전한 상태를 가리키며, 지혜문학에서는 삶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이것은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속임수와 비뚤어진 방식으로 꾸리지 않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반대편에서는 입술의 비뚤어짐이 강조됩니다. 말은 사람의 실제 성품을 보여주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비뚤어져 있습니다.

이 장은 곧바로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 친구가 모이고,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친구들마저 멀어진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이후의 현실적인 관찰을 읽는 기준이 됩니다.

사람들이 재산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 재산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불리한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고, 바로 그 이유로 더 낫다고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가난 자체를 미덕으로 선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과 온전함이 함께 있을 때, 가난이 그 온전함의 가치를 감소시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욕망은 앞서가고, 발은 빗나갑니다

지식 없는 욕망도 좋지 않고, 발을 서두르는 이는 빗나간다.잠언 19:2 · 본디새김

본디새김에서 ‘욕망’으로 옮긴 히브리어 네페쉬(⁨נֶפֶשׁ⁩)는 문맥에 따라 목숨, 자신, 생명, 욕구 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욕망으로 읽으면 둘째 행의 서두르는 발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지만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발은 빨리 움직입니다.

이 구절의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이루려는 마음은 인간이 행동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동기입니다. 그러나 그 욕망에 지식이 없다면 잘못된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 수 있습니다.

둘째 행의 ‘빗나간다’는 표현에는 목표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의미가 있습니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과 바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다릅니다.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서둘러 달리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잠언이 여기서 대비하는 것은 느린 사람과 빠른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행동하는 사람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서둘러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욕망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욕망이 발보다 먼저 달려가지 못하도록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자기 잘못 때문에 길이 망가졌는데 왜 여호와야훼에게 화를 내는가

사람의 어리석음이 제 길을 망가뜨리고, 그의 마음은 여호와야훼에게 성을 낸다.잠언 19:3 · 본디새김

두 행을 연결하면 뜻밖의 역설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문제의 원인인데도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2절에서 지식 없이 서둘러 움직이는 발을 보았습니다. 3절에서는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길이 망가지고, 그 결과를 하나님에게 돌리는 사람을 봅니다. 히브리어에서 ‘망가뜨린다(⁨סָלַף⁩)’는 동사는 뒤틀거나 파괴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이 자기 행동으로 자신의 길을 손상시킨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문제의 책임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대신,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셨느냐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잠언 19:3은 모든 고난이 당사자의 어리석음 때문에 생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닌 고난을 겪는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욥기의 욥이 대표적입니다. 시편에도 부당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는 기도가 많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고통받는 사람에게 적용하여 ‘당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이 비판하는 대상은 모든 탄식이 아니라, 자기 어리석음이 길을 망가뜨렸는데도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태도입니다.

잠언은 자신의 책임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이 지혜의 일부임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태도는 창세기 3:12에서 아담이 자기 행동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장면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두 본문이 동일한 상황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자기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합니다.

돈이 있을 때 생긴 친구들은 어디로 가는가

잠언 19:4–9 본문 →

재산이 친구를 더해 준다는 불편한 현실

재산은 많은 벗을 더해 주지만, 가난한 이는 제 벗에게서 떨어져 나간다.잠언 19: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아름다운 우정의 이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관한 불편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친구의 수가 그 사람의 인품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산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찰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선물을 베풀거나 도움을 제공할 수 있고, 자신의 자원과 영향력을 나눌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면 자신이 무언가를 내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재산이 만들어 내는 관계는 반드시 깊은 사랑의 관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잠언이 여기서 재산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거나 가난한 사람의 친구가 모두 거짓되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이해관계가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형제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벗이 등장했습니다(잠언 18:24). 19장은 실제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관계가 재산의 유무에 따라 흔들리는지를 보여줍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 곁에 몰리는 사람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내뿜는 이는 빠져나가지 못한다.잠언 19:5 · 본디새김
많은 이가 너그러운 이의 호의를 구하고, 누구나 선물을 주는 사람의 벗이 된다.잠언 19:6 · 본디새김

5절에서 갑자기 거짓 증인에 관한 경고가 등장하고, 6절은 다시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 재산과 선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렇게 주제가 교차하는 방식은 잠언의 격언 모음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5절의 거짓 증언을 6절의 선물과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 관계로 연결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 구절들이 함께 놓이면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너그러운 이’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후하게 베푸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의 호의를 얻는 일은 실제로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찾습니다.

여기서 ‘선물을 주는 사람의 벗이 된다’는 표현은 우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가까이하는 것과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까이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잠언은 이 차이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재산과 선물에 따라 늘어나는 벗이라는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그 질문을 제기합니다.

형제들마저 떠난 가난한 사람

가난한 이의 형제들은 모두 그를 미워하고, 그의 벗들은 더더욱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는 말들을 뒤쫓고, 그 말들은 그에게 있다.잠언 19:7 · 본디새김

4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친구에게서 멀어졌습니다.

7절에서는 그 고립이 더 깊어집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혈연관계에 있는 가까운 가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관계에서도 거절당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잠언은 가난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고립을 강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행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첫 부분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의 히브리어는 읽기 전승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록된 본문을 따르면 그가 말들을 뒤쫓지만 그것들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낭독 전승을 따르면 그 말들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말들을 뒤쫓는다’는 행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따라가며 부탁하고 설득하려는 것인지, 어떤 말이나 약속을 붙들고 있는 것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행을 자신에게서 떠난 친구들을 끝없이 쫓아다니는 장면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앞부분에서 확인되는 사실만으로도 이 구절의 메시지는 충분히 무겁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인 자원을 잃을 뿐 아니라, 그 자원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관계들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 부족함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과 호의마저 부족해지는 상황에 놓입니다. 가난은 단순히 소득과 재산이 부족한 상태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아갈 기회가 줄어들고, 도움을 구할 때 응답을 받기 어려워지는 경험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기록된 자음 본문은 로, 곧 ‘아니다’라는 부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낭독 전승은 로, 곧 ‘그에게’라는 의미로 읽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뜻밖의 방법

슬기를 얻는 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분별을 지키는 이는 좋은 것을 찾는다.잠언 19:8 · 본디새김

가난한 사람의 고립을 이야기한 뒤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잠언이 말하는 자기 사랑은 자신의 욕망을 무조건 만족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슬기를 얻는 일입니다.

‘슬기를 얻는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마음을 얻는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 의지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본디새김은 그 의미를 살려 ‘슬기를 얻는다’고 번역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분별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유리한 것을 얻는 데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지키려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이유로 재산과 영향력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자신을 위하는 더 근본적인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끌 욕망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되풀이되는 거짓 증인의 경고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내뿜는 이는 망한다.잠언 19:9 · 본디새김

9절은 5절과 거의 같습니다. 첫 행은 완전히 같은 내용이고, 둘째 행의 결말만 달라집니다. 5절에서는 거짓말을 내뿜는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9절에서는 그 사람이 ‘망한다’고 합니다.

거짓 증인에 대한 경고가 재산과 친구의 문제를 다루는 격언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셈입니다. 두 구절의 반복이 의도적으로 이 단락을 감싸도록 배열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거짓 증인의 문제를 두 번 만나도록 하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거짓말이 일시적으로 누군가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더라도, 잠언은 그 거짓을 안전한 삶의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거짓 증언은 단순한 개인적인 거짓말보다 더 큰 문제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하면 다른 사람이 억울하게 처벌받거나 악한 사람이 책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16은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9:16–21도 거짓 증인을 조사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도록 규정합니다. 잠언은 이러한 율법의 가르침을 인간의 삶에 관한 지혜로 다시 표현합니다.

사람의 재산과 지위가 아무리 크더라도, 진실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얻은 유익은 참된 안전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차지한 자리와 그 자리에 걸맞은 삶

잠언 19:10–14 본문 →

어리석은 사람의 호사와 종의 권력

호사스러운 삶은 어리석은 이에게 어울리지 않고, 종이 고관들을 다스리는 것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잠언 19: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오늘날 독자에게 다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 어리석은 사람에게 호사스러운 삶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까요? 더구나 종이 고관들을 다스리는 것을 부적절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이 격언은 고대 사회의 신분과 권력 구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종은 일반적으로 고관보다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런 종이 고관들을 다스리는 것은 당시의 통상적인 질서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람이 차지한 자리와 그 자리에 요구되는 능력이나 자질 사이의 부조화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모든 종은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17:2에서는 슬기롭게 행동하는 종이 수치를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고, 형제들 사이에서 유산까지 나누어 갖는다고 했습니다. 같은 잠언 안에 사회적 신분보다 슬기가 더 중요하다는 평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 격언은 종이라는 신분 자체가 악하거나 열등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보다, 당시 사회가 예상하는 자리와 실제 권력의 역전을 부적절한 상황의 비유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비유 자체가 고대의 사회적 위계질서를 반영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을 현대적 평등 개념으로 바꾸어 읽어서 원래의 불편함을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 행의 의미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큰 재산과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분별이 없다면 그 좋은 조건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의 크기와 그것을 다룰 능력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앞의 8절에서 슬기를 얻는 일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던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좋은 것을 소유하는 능력보다, 무엇이 좋은지 판단하는 능력이 먼저 필요합니다.

잘못을 그냥 넘기는 것이 영예가 될 때

사람의 슬기는 그가 더디 성내게 하고, 잘못을 그냥 넘기는 것은 그의 영예다.잠언 19:11 · 본디새김

10절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자질을 다루었습니다. 11절에서는 그 자질 가운데 하나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분노를 늦추는 능력입니다.

여기서 ‘더디 성내게 한다’는 표현은 히브리어의 ‘코가 길다’는 관용적인 표현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어에서 코와 분노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까닭에, 분노를 늦추는 사람을 이런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4:6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된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성품과도 연결됩니다. 물론 잠언 19:11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노를 서둘러 쏟아 내지 않는 태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언어와 통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했는데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일이 왜 영예일까요?

보통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하거나 손해를 입었다고 느끼면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려 합니다.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잘못에 대해 반드시 싸우고 보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 잘못을 계속 들추어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잠언은 그런 절제를 영예라고 부릅니다.

이 구절은 잘못을 그냥 넘기는 일이 무기력하거나 비겁해서가 아니라, 슬기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잘못에 대응할 힘이 있는데도 반드시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때로는 더 큰 영예가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불의와 학대를 묵인하라는 명령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은 거짓 증인을 강하게 비판합니다(5, 9절). 또한 악한 증인이 공의를 비웃는다고 경고합니다(28절).

그러므로 개인적인 잘못을 너그럽게 넘기는 태도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악행을 방치하는 태도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고, 언제 그냥 넘기는 편이 더 나은지 분별해야 합니다.

사자의 으르렁거림과 풀 위의 이슬

왕의 분노는 젊은 사자의 으르렁거림 같고, 그의 호의는 풀 위의 이슬 같다.잠언 19:12 · 본디새김

12절은 권력을 가진 사람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젊은 사자는 강한 힘과 위협을 지닌 동물입니다. 그 울음소리는 실제 공격이 시작되기 전부터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왕의 분노도 그렇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분노와 달리, 왕의 분노는 실제 처벌과 손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슬은 건조한 환경에서 식물이 수분을 얻는 한 가지 통로입니다. 사자의 으르렁거림이 위협적인 소리라면, 이슬은 소리 없이 풀 위에 내려앉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는 공포를 불러오고, 다른 하나는 생기를 더합니다. 그러나 두 장면 모두 왕의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왕의 감정과 판단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격언은 왕의 분노를 언제나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분노가 강력하고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묘사합니다.

앞의 11절과 연결하면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왜 더욱 큰 절제가 필요한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분노를 늦추는 것이 일반 사람에게도 영예라면, 그 분노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왕에게는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과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아내

어리석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앙이고, 아내의 다툼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물이다.잠언 19:13 · 본디새김
집과 재산은 아버지들에게서 물려받는 유산이고,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잠언 19:14 · 본디새김

두 구절은 가정의 삶을 전혀 다른 두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집 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같은 곳에 계속 떨어지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한 방울의 물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끊임없이 떨어진다면 집에서 쉬는 일조차 불편해집니다. 이 비유는 반복되는 다툼이 가정의 평온함을 어떻게 해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모든 가정불화의 책임이 아내에게 있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은 고대의 남성 독자를 중심으로 가정의 여러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아들과 다투는 아내가 한 아버지이자 남편에게 어떤 고통이 되는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남편이 언제나 옳다거나, 아내가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의견의 차이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관계를 해치는 다툼입니다.

이것을 다음 14절과 함께 읽으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집과 재산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고 합니다. 이 비교는 집과 재산보다 아내라는 사람의 존재와 슬기가 더욱 근본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집은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재산도 유산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의 슬기까지 재산처럼 상속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슬기로운’은 분별과 통찰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내를 남편에게 편리하게 순종하는 사람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슬기라는 지혜의 자질로 평가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본문은 그런 아내가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즉, 슬기로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단순한 재산 이상의 선물입니다.

좋은 집을 소유하는 것과 그 집에서 좋은 삶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13절의 집에서는 어리석음과 다툼이 고통을 만듭니다. 14절의 집에서는 슬기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호의로 여겨집니다. 두 구절은 가정의 평안이 건물이나 재산에 의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손을 여호와야훼께서 붙드십니다

잠언 19:15–19 본문 →

게으름과 무책임은 삶을 무너뜨립니다

게으름은 깊은 잠을 불러오고, 나태한 이는 굶주린다.잠언 19:15 · 본디새김
명령을 지키는 이는 자기 목숨을 지키고, 제 행실을 하찮게 여기는 이는 죽는다.잠언 19:16 · 본디새김

깊은 잠은 일상적인 휴식과는 다릅니다. 여기서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계속 무기력하게 머무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잠언은 노동과 생계 사이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관찰합니다. 일해야 할 때 일하지 않는 태도가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가난한 사람이 모두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재산 때문에 사람들이 가난한 이를 멀리하는 현실을 보여주었고, 뒤에서는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게으름에 대한 비판을 가난한 사람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하는 것은 장 전체의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16절은 자기 삶을 다루는 태도를 더욱 넓게 바라봅니다. 여기서 ‘명령’은 잠언에서 이어져 온 지혜의 가르침과 규범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명령 하나를 지목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아무렇게나 다루지 않는 태도입니다.

사람의 삶은 무수한 행동들로 이루어집니다. 작은 선택이라도 그것을 계속 반복하면 삶의 방향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명령을 지킨다는 것은 그러한 행동을 바른 기준 아래 놓는 일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행실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습니다. 잠언은 그런 태도를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어리석음으로 봅니다. 자신의 행동을 무책임하게 다루는 삶이 지닌 심각한 위험을 강조하는 지혜의 경고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빌려준 적이 없는데 왜 여호와야훼의 채권자가 되는가

가난한 이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는 여호와야훼에게 빌려주고, 여호와야훼는 그가 베푼 것을 그에게 갚는다.잠언 19:17 · 본디새김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제공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관계에서 소외될 수 있습니다. 4절과 7절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그런데 17절은 그 가난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행동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여기서 ‘빌려준다’는 돈이나 물건을 빌려주는 행위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물건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여호와야훼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잠언은 그 행위의 상대방을 여호와야훼로 표현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갚을 능력이 없는 존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에게 베푼 일을 자신과 관련된 일로 받아들이십니다. 더 나아가 그 일을 갚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인가가 부족하여 인간에게 돈을 빌리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빌려주고 갚는다는 경제적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 호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꿉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가진 사람이고, 그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도움을 줄 수 있고, 그는 그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 관계 한가운데 여호와야훼를 등장시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갚을 능력이 없다고 해서 그 행위가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것을 기억하시고 갚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보상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혀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면 하나님이 반드시 더 많은 돈을 돌려주신다는 투자 공식이 아닙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갚으신다고 말하지만, 그 갚음의 구체적인 방법과 시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현세에서 금전적 수익이 발생한다거나 정해진 배율로 보상받는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이익 계산과 다른 방식으로 그 행위를 평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의 존엄성에 관한 강력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그가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어떻게 여기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지닙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0:18은 여호와야훼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46:7–9에서도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잠언 19:17은 이러한 구약의 신앙을 일상적인 경제생활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신명기 15:7–11은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완고하게 하거나 손을 닫지 말라고 명령하고, 그에게 넉넉히 손을 펴고 필요한 것을 빌려주라고 합니다. 신명기는 가난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를 돕지 않아도 되는 이유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손을 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25:31–46이 가난하고 굶주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대하는 행동을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잠언 19:17의 직접적인 인용은 아니지만, 취약한 사람에게 베푸는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주제적 연결을 보여줍니다. 또한 야고보서 2:1–9은 재산과 외적인 지위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잠언 19:4–7이 부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몰리고 가난한 사람에게서 사람들이 멀어지는 현실을 보여준다면, 야고보서는 그러한 차별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잠언 19장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신약의 결론을 먼저 가져올 필요는 없습니다.

희망이 있으므로 훈계하라는 말

희망이 있으니 네 아들을 훈계하여라. 그를 죽이는 데 마음을 두지 말아라.잠언 19:18 · 본디새김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 다음에 자녀의 훈계가 등장합니다. 겉으로는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구절 모두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책임 있게 대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자녀를 훈계해야 할 이유로 희망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훈계를 단순히 잘못에 대한 분노의 표현으로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자녀가 잘못했기 때문에 부모는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훈계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그 분노가 아닙니다.

자녀가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훈계는 자녀의 과거 잘못만을 바라보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 자녀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둘째 행은 더욱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자신의 마음이나 욕망을 그의 죽음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자녀를 죽이거나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을 뜻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우 훈계는 자녀를 파괴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하나는 훈계를 포기하여 결국 자녀가 파멸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우 첫째 행의 훈계를 강조하는 흐름과 직접 연결됩니다.

히브리어 표현만으로는 어느 쪽을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자녀의 생명을 향한 책임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자녀를 가르친다는 것은 부모의 화를 마음껏 표출하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일도 아닙니다.

훈계의 목적은 자녀를 꺾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자녀에 대한 폭력이나 학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잠언은 고대의 훈육 관습을 전제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희망과 생명의 목적을 무시한 채 해로운 처벌을 허락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구해 주는 것이 언제나 도움이 되는가

몹시 성내는 이는 벌금을 문다.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또 건져 주게 되기 때문이다.잠언 19:19 · 본디새김

몹시 성내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벌금을 물게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를 도와 그가 감당해야 할 결과에서 구해 줍니다. 잠언은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경고합니다. 다시 구해 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의 도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않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변 사람이 계속해서 그 결과를 대신 해결해 준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도움은 누군가가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좋은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게 만드는 방식으로 도움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돕는 지혜는 단순히 당장의 문제를 없애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앞으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길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이 구절을 위험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구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일과 반복되는 잘못의 책임을 대신 없애 주는 일은 구별됩니다.

18–19절을 함께 읽으면 잠언의 균형이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희망이 있으므로 자녀를 훈계하라고 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분노를 다스리지 않는 사람의 문제를 계속 대신 해결해 주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두 구절 모두 상대방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당장 불편함을 피하는 것보다, 앞으로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계획이 많지만

잠언 19:20–24 본문 →

마지막에 지혜로워지기 위해 지금 들어야 할 말

네가 마지막에 지혜로워지도록 조언을 듣고 훈계를 받아들여라.잠언 19:20 · 본디새김

20절은 지혜를 얻는 일에 시간의 깊이를 더합니다.

지혜는 지금 당장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언과 훈계를 받아들이면서 시간이 흐른 뒤에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봅니다.

조언은 아직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더 좋은 판단을 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훈계는 이미 잘못한 행동을 돌아보고 바로잡도록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현재 판단을 수정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앞의 2절과 뚜렷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2절의 사람은 지식 없이 서둘러 움직였습니다. 20절의 사람은 마지막에 지혜로워지도록 지금 듣고 배웁니다.

서두르는 사람은 현재의 욕망을 따라 즉시 움직이려 합니다. 반면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지금의 자기 판단이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을 택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의 자신이 항상 옳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자신이 더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수많은 생각과 여호와야훼의 하나의 계획

사람의 마음에는 생각이 많지만, 굳게 서는 것은 여호와야훼의 계획이다.잠언 19:2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잠언 19장 전체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심적인 말씀입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지, 어느 길을 택할지, 누구와 관계를 맺을지, 무엇을 얻을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계획의 수와 최종적으로 굳게 서는 것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3절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자기 길을 망가뜨리고, 그 사람이 여호와야훼에게 성을 낸다고 했습니다. 21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계획이 굳게 선다고 말합니다. 이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호와야훼의 계획이 굳게 선다는 사실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스리신다고 해서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계획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사람은 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잠언 16:9도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걸음을 굳게 세우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9장은 이 주제를 새로운 맥락에서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바로 앞에 조언을 듣고 훈계를 받아들이라는 권면이 있습니다. 즉, 여호와야훼의 계획이 굳게 선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사람은 배우고 계획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이 궁극적인 기준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의 조언과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인간의 ‘생각’은 히브리어 마하샤보트(⁨מַחֲשָׁבָה⁩)이며, 구상과 계획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야훼의 ‘계획’에 해당하는 아차트(⁨עֵצָה⁩)는 조언이나 뜻, 계획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여러 구상과 여호와야훼의 계획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잠언 19:3과 21절은 창세기 50:20의 요셉의 말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그에게 악을 행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선으로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의도와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이 악한 행동을 했다는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 19장도 인간의 계획이 하나님보다 클 수 없음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사람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행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결국 친절입니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그의 친절이고, 가난한 이가 거짓말하는 사람보다 낫다.잠언 19:22 · 본디새김

22절은 다시 가난과 인간의 가치라는 주제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첫째 행에는 번역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에게서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이 친절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람이 자기 안에 품는 바람이 인애와 친절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타아바트 아담 하스도의 연결 관계가 완전히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디새김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서 바라는 것은 친절이라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읽어도 핵심 낱말은 헤세드(⁨חֶסֶד⁩)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베푸는 인애와 신실한 사랑, 상대방을 향한 충실함을 나타냅니다.

첫째 행과 함께 읽으면 둘째 행의 비교 기준이 드러납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신실하고 친절한 사람인가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많은 재물을 제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친절하거나 신실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면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이 구절은 4–7절의 인간관계를 다시 평가하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재산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모이고 가난할수록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22절은 인간관계를 판단하는 더 깊은 기준을 제시합니다. 많이 베풀 수 있는 능력보다, 신실하게 대하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을 귀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줄 수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인가입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밤을 편안히 보내는 이유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은 생명으로 이끈다. 그런 이는 배부르게 밤을 보내며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잠언 19:23 · 본디새김

23절은 생명과 만족, 안전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배부르게’라는 표현은 단순히 많이 먹었다는 뜻만이 아니라 만족하거나 충족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밤을 지낸다는 모습과 연결하면 필요한 것을 얻고 평안하게 쉬는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앞의 4–7절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재산 때문에 흔들리던 장면과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재산이 많아도 사람은 불안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호의를 잃을까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삶은 만족과 안전의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다만 이 구절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질병이나 사고, 재난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극심한 고난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욥기 1:1, 1:13–22). 시편 34:19도 의로운 사람에게 많은 고난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잠언 19:23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삶이 지향하는 생명과 안전의 질서를 격언의 형태로 표현합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뜻과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악한 길을 피하고 자신의 행동을 살피게 합니다. 그 결과 생명을 해치는 길에서 벗어나 평안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감정을 품는 일이 아니라, 그분을 자신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손을 접시에 넣고도 먹지 않는 사람

게으른 이는 제 손을 접시에 묻어 두고, 그 손을 제 입에 다시 가져가지도 않는다.잠언 19:24 · 본디새김

먹을 음식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음식은 이미 손이 닿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게으름을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보여주는 풍자입니다. 해야 할 일의 대부분이 준비되어 있는데도 마지막 행동을 하지 않는 태도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합니다.

2절에서는 지식도 없이 발을 서두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4절에서는 음식이 손에 닿았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나치게 서두르고, 다른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잠언이 칭찬하는 것은 무조건 빨리 움직이거나, 무조건 천천히 움직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상황을 분별하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행동을 하는 태도입니다.

지혜는 움직여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아는 것이며, 해야 할 일을 실제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 이르는가

잠언 19:25–29 본문 →

같은 책망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작용합니다

네가 비웃는 이를 때리면 미숙한 이가 영리해지고, 분별 있는 이를 꾸짖으면 그가 지식을 깨닫는다.잠언 19:25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비웃는 사람, 미숙한 사람, 분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가르침이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웃는 사람은 가르침을 거부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아직 충분한 분별을 갖추지 못했지만 배울 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분별 있는 사람은 책망을 자신의 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차이 때문에 같은 사건도 서로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비웃는 사람에 대한 처벌은 그 자신보다 그것을 지켜보는 미숙한 사람에게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분별 있는 사람은 강한 처벌이 아니라 꾸지람만으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고대 사회에서 체벌을 훈계의 한 수단으로 전제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를 현대의 모든 상황에서 신체적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핵심은 폭력의 효과를 일반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계속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미 분별 있는 사람도 꾸지람을 듣고 새로운 지식을 얻습니다. 자기가 지혜롭다는 이유로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약탈하고 집에서 쫓아내는 아들

아버지를 약탈하고 어머니를 쫓아내는 아들은 수치와 모욕을 가져온다.잠언 19:26 · 본디새김

여기서 아들은 단순히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약탈한다’는 표현은 재산이나 삶의 터전을 빼앗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어머니를 쫓아낸다는 것은 부모가 자기 삶의 자리를 잃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족 간의 의견 차이가 아닙니다. 경제적인 착취와 관계의 파괴가 함께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부모를 약탈하고 쫓아내는 행동이 왜 잘못인지를 생각하면, 그 안에는 부모의 삶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구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2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 존중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의 재산과 생활,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행동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14절과 대비됩니다. 14절에서는 집과 재산이 아버지들에게서 물려받는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것을 약탈하고 어머니를 쫓아냅니다.

유산을 물려받는 것과 부모의 것을 약탈하는 것은 다릅니다.

재산을 얻는다는 결과가 같아 보여도, 그것을 얻는 방식이 그 행동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이는 1절의 온전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이 왜 더 낫다고 평가받는지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많이 얻는 것보다 어떻게 얻고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훈계를 듣지 않으면 지식에서 멀어집니다

내 아들아, 훈계 듣기를 그쳐 보아라. 지식의 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잠언 19:2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여러 사람의 행동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 아들아’라는 직접적인 호칭이 등장합니다. 잠언 1–9장에서 반복되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의 첫 부분은 ‘듣기를 그쳐라’라는 명령형입니다. 뒤에는 지식의 말에서 벗어난다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이를 본디새김처럼 반어적인 경고로 읽으면, 훈계를 듣지 않으면 지식에서 멀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 지식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잘못된 훈계를 듣지 말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무엇을 듣지 말아야 하는지가 달라집니다. 두 읽기 모두 문장의 연결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가능한 해석입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앞에서 조언을 듣고 훈계를 받아들이라는 권면이 반복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18, 20, 25절). 따라서 이 구절을 훈계와 지식을 거부하지 말라는 경고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읽을 경우, 지혜에서 멀어지는 일은 반드시 어떤 극적인 사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침을 더 이상 듣지 않는 작은 선택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거절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 판단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반복되면 결국 지식의 말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20절은 마지막에 지혜로워지도록 지금 조언과 훈계를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27절은 그 길을 거부하면 지식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사람은 계속 배우면서 지혜를 얻을 수도 있고, 배우기를 멈추면서 이미 알고 있던 지혜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공의를 비웃는 증인과 악을 삼키는 입

비열한 증인은 공의를 비웃고, 악한 이들의 입은 악행을 삼킨다.잠언 19:28 · 본디새김

5절과 9절에서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는 그 사람이 무엇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인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실을 잘못 기억하거나 착각해서 틀린 말을 하는 사람과 다릅니다. 공정한 판단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재판에서 증언은 다른 사람의 삶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열한 증인은 그 책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입은 음식을 먹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악행을 삼킵니다. 악이 그 사람에게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마치 음식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는 이미지입니다.

잠언 18:8에서는 험담이 게걸스레 삼키는 음식처럼 사람의 내면 깊이 내려갔습니다. 19:28에서는 악행 자체가 입으로 삼켜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두 구절 모두 사람이 무엇을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이는지에 주목합니다.

악한 사람이 악을 삼킨다는 표현은 그가 악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즐긴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거짓 증언과 악을 삼키는 행동은 서로 연결됩니다. 진실과 정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훼손하는 행동에도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지혜를 거부하는 삶은 단순히 옳은 것을 모르는 상태에 머물지 않고, 악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기다리는 형벌

비웃는 이들에게는 형벌이 마련되어 있고, 어리석은 이들의 등에는 매질이 마련되어 있다.잠언 19:29 · 본디새김

잠언 19장은 다소 엄중한 경고로 끝납니다.

형벌은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마련되어 있다’는 표현은 그런 행동이 마땅한 결과와 책임을 불러온다는 지혜의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25절에서는 비웃는 사람의 처벌을 보고 미숙한 사람이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을 단순히 처벌의 강조로만 이해하면 앞에서 길게 제시된 권면을 놓치게 됩니다. 잠언은 처음부터 사람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온전하게 살아가는 길, 욕망에 앞서 지식을 얻는 길,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분노를 늦추고, 훈계를 받아들이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29절의 형벌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운명 선언이 아닙니다. 그 가능성을 계속 거부하고 비웃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잠언은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사람에게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계속 거부하는 사람이 어디에 이를 수 있는지도 숨기지 않습니다.

잠언 19장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품

잠언 19:1–29 본문 →

잠언 19장은 인간의 삶에 관한 여러 격언을 제시하지만, 그 가운데 여호와야훼께서 어떤 분으로 나타나시는지를 따라가면 장 전체의 메시지가 더 선명해집니다.

인간의 욕망과 재산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계획이 굳게 서며, 그분은 신실함과 자비를 귀하게 여기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 호의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십니다. 잠언 19장은 한 사람의 가치를 그가 가진 재산이나 친구의 수가 아니라, 온전함과 신실함,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자기 욕망을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고, 여호와야훼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자신도 귀하게 여기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잠언 19장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온전하게 살아가지만 재산이 많지 않습니다. 4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친구에게서 멀어지고, 7절에서는 형제들마저 그를 미워하고 친구들이 떠납니다. 재산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의 호의도 줄어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17절에 이르면 누군가 그 가난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본문은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야훼께 빌려준 일이 됩니다.

사람들이 돌려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멀어지는 자리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사람에게 베푼 일을 자신이 갚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의 손에는 돌려줄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베푼 호의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이에게서 받을 것을 계산하지만, 여호와야훼는 그에게 베푼 것을 자신의 장부에 올리시는 분처럼 말씀하십니다.

잠언 19장은 우리의 시선을 바로 그 자리로 돌립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남아 가난한 이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 그리고 그 손길을 자신에게 베푼 일로 받아들이시는 여호와야훼께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