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0–24장 · 솔로몬의 짧은 격언

사람의 속을 비추는 여호와야훼의 등불

잠언 20장에는 두 개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왕이 재판의 왕좌에 앉아 사람들을 살피는 장면입니다. 「재판의 왕좌에 앉은 왕은 제 눈으로 모든 악을 키질한다」(8절). 왕은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 악을 가려내려 합니다. 마치 농부가 곡식과 쭉정이를 구별하듯 사람들의 잘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사람의 숨결은 여호와야훼의 등불이다. 그 등불은 배 속의 모든 방을 뒤진다」(27절). 왕은 눈으로 악을 가려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등불은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살핍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잠언 20장의 핵심적인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왕은 재판해야 하고, 상인은 저울을 사용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의 행동을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과 어울릴지, 누구의 말을 믿을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친절을 자랑할 수 있지만 실제로 믿음직한 사람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구매자는 물건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거래가 끝나면 자신이 좋은 물건을 싸게 샀다고 자랑합니다. 거짓으로 얻은 빵은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입안의 자갈이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실제 마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잠언 20장은 단순히 ‘착하게 행동하라’는 교훈보다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그 판단이 올바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잠언은 그 답을 인간의 능력에서만 찾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귀와 눈을 만드셨고,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시며, 인간의 걸음을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등불은 사람이 쉽게 들여다볼 수 없는 내면의 깊은 곳까지 비춥니다.

이 장은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격언의 모음입니다. 따라서 모든 구절을 엄격한 단계적 논증으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미지들에는 분명한 연결이 있습니다. 눈과 귀, 말과 입, 저울과 키질, 마음속의 깊은 물과 배 속의 방들, 인간의 계획과 여호와야훼의 뜻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특히 10절과 23절에서는 속이는 저울에 관한 경고가 반복되고, 8절과 26절에서는 왕의 키질이 반복됩니다. 처음에 등장한 인간의 판단 문제가 후반부에서 다시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의 판단도 검토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려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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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가

잠언 20:1–7 본문 →

포도주가 사람을 비웃는다는 말

포도주는 비웃고 독주는 소란을 피운다. 그것 때문에 빗나가는 이는 누구도 지혜롭지 않다.잠언 20:1 · 본디새김

잠언 20장은 술이 사람처럼 행동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실제로 포도주가 말을 하거나 사람을 조롱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술에 취한 사람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행동을 술 자체의 행동처럼 표현하는 의인화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술의 종류보다 술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웃거나 소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행은 특히 ‘그것 때문에 빗나가는 이’를 지혜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술을 마시는 모든 행위를 일률적으로 비난하는 말과 구별됩니다. 본문이 직접 경고하는 대상은 술의 영향으로 길을 벗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20:1의 관심은 술이라는 물질 자체에 관한 포괄적인 금지 규정이라기보다, 사람이 자신의 분별을 잃고 조롱과 소란에 휘말리는 위험에 있습니다.

앞으로 잠언은 잘못된 판단과 거짓된 말, 경솔한 약속을 계속 다룰 것입니다. 술에 취해 빗나가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됩니다.

왕의 분노와 다툼에서 물러나는 영예

왕이 일으키는 두려움은 젊은 사자의 으르렁거림 같고, 그를 성나게 하는 이는 제 목숨을 해친다.잠언 20:2 · 본디새김
다툼에서 물러나는 것은 사람의 영예지만,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다툼에 뛰어든다.잠언 20:3 · 본디새김

젊은 사자의 으르렁거림은 왕이 가진 권력의 위험성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왕을 성나게 하는 일은 단순한 감정적 충돌에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왕에게는 처벌과 권력 행사의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왕의 모든 분노가 정당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권력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경고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다툼에 관한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다툼에서 물러나면 패배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때, 물러서는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다른 평가를 내립니다.

끝까지 싸우는 것이 반드시 용기는 아닙니다. 때로는 더 큰 싸움을 막기 위해 물러서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는 모든 갈등에서 무조건 물러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뒤의 8절과 26절은 왕이 악을 분별하고 처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의한 일을 바로잡아야 하는 상황과, 자존심 때문에 불필요한 싸움을 확대하는 상황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싸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밭을 갈아야 할 때 갈지 않는 사람

게으른 이는 가을에 밭을 갈지 않고, 거둘 때에 구하지만 아무것도 없다.잠언 20:4 · 본디새김

3절에서는 다툼에 뛰어들지 말아야 할 때를 보았습니다. 4절에서는 반대로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밭을 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 때나 밭을 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밭을 갈아야 할 시기에 갈지 않습니다.

농사에는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수확할 때가 되어서야 씨를 뿌리고 밭을 갈 수는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면 나중에 그것을 만회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수확할 때 무언가를 구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앞선 계절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절을 함께 읽으면 지혜로운 삶의 한 가지 특징이 드러납니다. 술에 취해 빗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불필요한 다툼에 뛰어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을 해야 할 때는 미루지 않아야 합니다.

지혜는 단순히 행동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때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깊은 물을 길어 올리는 사람

사람 마음속의 계획은 깊은 물이고, 분별 있는 이는 그것을 길어 올린다.잠언 20:5 · 본디새김

여기서 잠언은 갑자기 우물과 같은 깊은 물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깊은 곳에 있는 물은 눈에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것을 사용하려면 길어 올려야 합니다. 잠언은 분별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분별 있는 사람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맞힌다는 뜻이 아닙니다.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길어 올리려면 적절한 접근과 수고가 필요하듯,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계획을 이해하는 데에도 분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는 두 방향의 적용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상대가 겉으로 드러낸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신중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 안에 있는 깊은 계획과 지혜를 발견하고 이끌어 내는 능력입니다. 본문의 ‘사람 마음속의 계획’이 반드시 악한 계획이나 감추어진 음모를 뜻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만을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다루는 데 분별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친절을 자랑하는 사람과 믿음직한 사람

많은 사람이 저마다 제 친절을 내세우지만, 믿음직한 사람은 누가 찾겠는가?잠언 20:6 · 본디새김
의로운 이는 온전하게 걸어간다. 그의 뒤를 잇는 자녀들은 복되다.잠언 20:7 · 본디새김

6절은 말과 실제 성품 사이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친절’은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뿐 아니라 관계에서 보여주는 인애와 신실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 많은 것을 해 주었다고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절을 말하는 것과 실제로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직함은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설명하는 말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드러나는 행동으로 확인됩니다.

그래서 7절에서는 온전하게 걸어가는 의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온전함을 자랑한다고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저 온전하게 걸어갑니다.

여기서 ‘걸어간다’는 말은 지속적인 삶의 방식에 관한 표현입니다. 하루 동안 좋은 행동을 하는 것과 여러 날에 걸쳐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은 다릅니다.

자녀들이 복되다는 둘째 행은 그런 삶이 다음 세대에게도 유익을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의로운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녀가 자동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잠언은 부모의 온전함이 자녀 세대에 미칠 수 있는 좋은 영향을 격언으로 표현합니다.

6절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애를 말합니다.

7절의 사람은 온전하게 살아갑니다.

인애는 말로 주장할 수 있지만, 신실함은 살아온 길에서 확인됩니다.

조금 더 깊이

‘독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셰카르는 포도주와 구별되는 취하게 하는 음료를 가리킵니다. 오늘날의 증류주를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잠언 23:29–35에서는 술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사람이 겪는 혼란과 상처가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반면 신명기 14:26에서는 절기의 기쁨과 관련하여 포도주와 독주가 언급됩니다. 4절의 히브리어 호레프는 비가 내리고 추워지는 계절과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의 농경 환경에서는 가을에 시작되는 비가 땅을 부드럽게 하여 밭갈이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본문의 표현은 그 계절에 밭을 갈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추위 때문에 밭갈이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밭을 갈아야 할 때라는 시간적 의미를 살렸습니다.

왕의 눈과 여호와야훼의 저울

잠언 20:8–12 본문 →

왕은 악을 키질합니다

재판의 왕좌에 앉은 왕은 제 눈으로 모든 악을 키질한다.잠언 20:8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농사와 재판이라는 두 세계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곡식을 키질하면 알곡과 쭉정이가 분리됩니다. 가벼운 겨나 껍질은 바람에 날아가고, 상대적으로 무거운 낟알은 남게 됩니다. 잠언은 왕이 악을 가려내는 일을 그와 같은 농사 작업에 비유합니다. 왕이 ‘제 눈으로’ 키질한다는 것은 왕이 재판을 위해 직접 살피고 분별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모든 왕이 사람의 악을 완전하게 알아볼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왕은 인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혜로운 왕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공정한 판단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왕에게는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가려낼 책임이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판단하고 정의를 세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의 눈으로 악을 가려내는 장면 바로 뒤에 뜻밖의 질문이 등장합니다.

누가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가 「나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했다. 나는 내 죄에서 깨끗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잠언 20:9 · 본디새김

8절에서는 왕이 다른 사람의 악을 가려내려 했습니다. 9절에서는 사람 자신의 마음이 문제로 등장합니다.

이 질문은 수사적인 질문입니다. 자기 마음을 완전히 깨끗하게 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악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죄와 잘못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9절이 있다고 해서 재판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8절은 왕에게 악을 분별할 책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9절은 그 판단을 수행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도덕적 완전함을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해야 하는 사람도 자기 마음의 잘못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잠언이 말하는 공정함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자신은 완전히 깨끗하고 다른 사람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판단은 쉽게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왕의 눈은 악을 키질해야 하지만, 왕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는 존재입니다.

다른 추와 다른 에파

무게가 다른 추와 추, 용량이 다른 에파와 에파, 그 둘 다 여호와야훼가 역겨워하는 것이다.잠언 20:10 · 본디새김

9절에서는 마음을 깨끗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무엇이 더러운 행동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줍니다.

‘추와 추’, ‘에파와 에파’라는 반복은 단순히 여러 측정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거래에 서로 다른 기준을 사용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살 때는 자신에게 유리한 추를 사용하고, 팔 때는 다른 추를 사용하는 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계산 실수가 아닙니다. 기준을 고의로 바꾸어 상대방을 속이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이 일을 여호와야훼께서 역겨워하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의 관심은 성소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사용하는 저울과 추, 곡식을 재는 용기에도 미칩니다.

특히 두 종류의 추는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불리할 때는 느슨한 기준을 적용하는 태도입니다. 잠언은 그런 불공정함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선언합니다.

아이도 행동으로 알려집니다

아이도 제 행동으로 알려지니, 그가 하는 일이 깨끗한지 또 올바른지가 드러난다.잠언 20:11 · 본디새김

11절에서는 왕과 상인에 이어 아이가 등장합니다.

잠언은 아이가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보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앞의 6절과 연결됩니다. 자신의 친절을 자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믿음직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의 행동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사람도 자신의 행동을 통해 성품과 태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아이의 한두 가지 행동만으로 그 아이의 성품과 미래를 확정적으로 판단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아이도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본문은 행동이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 어린 사람에게 영구적인 평가를 내려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보고 듣는 능력은 누가 주셨는가

듣는 귀와 보는 눈, 여호와야훼가 그 둘 다 만들었다.잠언 20: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아주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앞의 격언들과 함께 읽으면 중요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왕은 눈으로 악을 키질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평가합니다. 상인은 저울을 살피고 거래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판단에는 보고 듣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 능력 자체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감각과 판단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었다고 해서 그 말의 의미와 진실을 항상 정확히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눈과 귀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판단 능력을 겸손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구절은 눈과 귀가 단순히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관이 아니라, 지혜를 위해 사용해야 할 선물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볼지, 무엇을 들을지, 그 정보를 어떻게 판단할지 책임 있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제 잠언은 그런 눈과 귀가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에파는 곡식 등의 부피를 재는 단위입니다. 고대의 시장에서 곡식을 거래할 때 무게나 부피를 속이면 겉으로 드러나는 거래 금액은 같아도 실제로 주고받는 양이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19:35–36과 신명기 25:13–16은 공정한 측량과 정확한 추를 사용하도록 명령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경제생활이 하나님의 정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잠언 20:10과 23절은 이 율법의 가르침을 일상의 지혜로 되풀이합니다. 11절의 히브리어 이트나케르는 ‘알아볼 수 있게 되다’라는 뜻과 자신을 낯설게 하거나 다르게 보이게 한다는 의미 사이에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아이의 행동을 통해 그의 됨됨이가 드러난다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시장에서 들리는 말과 입안의 자갈

잠언 20:13–18 본문 →

눈을 뜨고 빵으로 배를 채워라

가난해지지 않도록 잠을 사랑하지 말아라. 네 눈을 뜨고 빵으로 배를 채워라.잠언 20: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보는 눈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13절에서는 그 눈을 뜨라고 명령합니다. 눈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 눈을 사용하여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게으른 사람은 잠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잠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해야 할 일을 외면하면서 잠에 머무는 태도입니다.

‘눈을 뜨고 빵으로 배를 채워라’라는 말씀은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깨어 행동하라는 권면입니다. 잠언은 인간의 노동과 생계 사이의 관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난의 모든 원인을 게으름으로 설명하는 공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는 속이는 상인과 거짓된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도 등장합니다. 가난은 개인의 게으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공정한 행동 때문에 발생하거나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13절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라는 가르침이지,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닙니다.

물건을 깎아 달라던 사람이 떠나면서 자랑합니다

사는 이는 「나빠요, 나빠요.」라고 말하지만, 떠나가고 나면 그제야 자랑한다.잠언 20:1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잠언 20장에서 특히 살아 있는 일상의 장면입니다.

「나빠요, 나빠요.」라고 말하는 이유는 가격을 낮추려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자랑하는지는 본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물건이 나쁘다고 말하던 태도와 거래 후 자랑하는 태도가 대조되므로, 좋은 조건으로 물건을 얻었다고 자랑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잠언은 구매자의 말과 실제 평가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반드시 모든 가격 협상을 거짓말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고 가격을 협상하는 일은 거래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자기 이익 때문에 실제 생각과 다른 평가를 내놓을 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장에서 반복되는 질문이 다시 등장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6절에서는 자신의 친절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14절에서는 물건이 나쁘다고 말하면서 거래가 끝난 뒤에는 자랑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말은 언제나 그 사람의 실제 마음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판단에는 말의 내용뿐 아니라 상황과 행동을 함께 살피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금보다 귀한 입술

금도 있고 산호도 많지만, 지식을 담은 입술은 귀한 물건이다.잠언 20:15 · 본디새김

시장의 거래 장면 다음에는 금과 산호가 등장합니다.

금은 값진 재산의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식을 담은 입술입니다.

입술은 금처럼 창고에 보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을 담은 말은 사람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금은 거래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이 없다면 그 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앞의 14절에서는 물건의 가치를 둘러싼 말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15절에서는 말을 통해 전달되는 지식 자체가 귀한 물건으로 평가됩니다.

같은 입술이지만 그 가치가 다릅니다.

한쪽에서는 가격을 낮추기 위한 말이 나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다른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지식이 나옵니다.

잠언은 말의 가치를 말재주나 설득력의 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지식에서 찾습니다.

다른 사람의 보증을 선 사람의 옷

그가 낯선 이의 보증을 섰으니 그의 옷을 가져가라. 낯선 여자를 위해 그를 담보로 잡아라.잠언 20:16 · 본디새김

16절은 채무와 보증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필요한 재산이었습니다. 특히 겉옷은 추위를 피하거나 잠잘 때 몸을 덮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2:26–27과 신명기 24:10–13은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때 그것을 돌려주어야 하는 상황을 규정합니다. 따라서 잠언 20:16을 모든 채권자가 담보로 받은 옷을 어떤 상황에서도 빼앗아도 된다는 무제한의 권리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관심은 보증이라는 행동이 얼마나 큰 책임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낯선 이’는 보증을 선 사람과 가까운 관계가 아닌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핵심은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보증을 서면 자신도 심각한 경제적 위험에 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선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과 무분별하게 책임을 떠맡는 행동을 구별하도록 가르칩니다. 도움의 마음이 있더라도 그 약속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처음에는 달고 나중에는 자갈이 되는 빵

거짓으로 얻은 빵은 사람에게 달지만, 뒤에는 그의 입이 자갈로 가득 찬다.잠언 20:17 · 본디새김

자갈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씹으면 고통스럽고 입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거짓으로 얻은 이익이 처음에는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나중에는 고통스러운 결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의 특징은 같은 입 안에서 맛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달콤한 빵이 들어갑니다.

나중에는 자갈이 가득 찹니다.

이것은 거짓된 방법으로 얻은 이익의 본래 성격이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결과가 좋으면 그 방법도 괜찮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첫맛만으로 전체 결과를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선택이 처음에 달콤하다는 사실은 그 선택의 끝까지 좋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눈앞의 맛뿐 아니라 그 뒤에 무엇이 오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전쟁조차 혼자 결정하지 않습니다

계획은 조언으로 굳게 선다. 계책을 써서 전쟁을 하여라.잠언 20:18 · 본디새김

18절에서는 개인적인 거래에서 전쟁이라는 큰 문제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계획은 조언으로 굳게 선다」는 말은 자신의 판단만으로 계획을 밀어붙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특히 둘째 행에서 전쟁을 언급하는 이유는 전쟁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공동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은 자기 감정이나 충동만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충분한 조언과 계책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전쟁 자체를 무조건 권장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전쟁과 같은 중대한 일을 하게 된다면 충분한 판단과 준비 없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구절은 4절의 농사와도 연결됩니다. 농부는 밭을 갈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왕은 전쟁을 결정하기 전에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일의 규모는 다르지만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행동에 앞서 상황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에서 ‘산호’로 옮긴 히브리어 페니님은 정확히 어떤 보석이나 귀한 물질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금과 나란히 놓여 귀한 재물을 나타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16절 둘째 행의 ‘낯선 여자’는 히브리어 읽기 전승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낭독 전승을 따라 여성 단수로 옮겼습니다. 다른 기록 형태에서는 낯선 이들을 뜻하는 남성 복수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그 여자가 외국인인지, 어떤 성적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까지 정할 수 없습니다. 18절의 ‘계책’은 히브리어 타흐불로트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잠언 1:5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이 얻어야 할 지도와 전략적인 분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함부로 말하고 서둘러 얻는 사람들

잠언 20:19–25 본문 →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이는 비밀을 드러내니, 입술을 함부로 여는 이와 어울리지 말아라.잠언 20: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지혜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선택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들은 이야기는 그 사람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퍼질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비밀을 함부로 다루는 태도입니다. 잠언이 경고하는 것은 자기 말의 책임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앞의 6절에서는 믿음직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19절에서는 왜 그런 믿음직함이 중요한지 한 가지 이유를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맡았을 때 그것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는 말로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선언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맡긴 것을 실제로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형성됩니다.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의 등불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주하는 이의 등불은 짙은 어둠 속에서 꺼진다.잠언 20:20 · 본디새김

20절에서는 등불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등불은 꺼집니다.

구약에서 등불은 삶과 지속성, 집안의 존속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잠언 20:20에서도 등불이 꺼진다는 표현은 생명과 삶의 지속성이 위태로워지는 강한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등불마저 꺼지면 어둠은 더욱 깊어집니다.

본문은 부모를 저주하는 행위를 단순한 말실수로 다루지 않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모욕하는 심각한 행동으로 평가합니다. 출애굽기 20:12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합니다. 잠언은 그 가르침을 삶과 등불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부모의 모든 말과 행동을 무조건 옳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과 부모가 행한 잘못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본문이 직접 다루는 것은 부모를 저주하는 행위의 심각성입니다.

27절에서는 다른 등불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숨결이며, 여호와야훼의 등불이라고 불립니다. 20절의 등불은 꺼질 수 있는 인간 삶의 위태로움을 보여줍니다. 27절의 등불은 인간의 깊은 내면을 살피는 여호와야훼의 도구로 등장합니다.

서둘러 얻은 유산

처음에 서둘러 얻은 유산은 그 끝이 복을 받지 못한다.잠언 20:21 · 본디새김

21절은 앞의 17절과 비슷한 구조를 지닙니다. 처음과 끝을 비교합니다. 17절에서는 거짓으로 얻은 빵이 처음에는 달지만 나중에는 자갈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산 자체가 아닙니다. 유산을 얻는 방식입니다.

히브리어 기록 본문과 낭독 전승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낭독 전승을 따르면 ‘서둘러 얻은 유산’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기록 본문을 따르면 욕심을 내어 거머쥔 유산이라는 방향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두름에, 다른 하나는 탐욕스러운 취득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유산을 얻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공통적입니다.

이 구절은 유산을 빨리 상속받는 모든 경우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정당한 과정과 책임을 무시하면서 재산을 서둘러 차지하려는 태도입니다.

잠언은 결과를 평가할 때 시작만 보지 말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탐욕과 무책임으로 이루어졌다면 끝에는 복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여호와야훼께 맡기는 이유

「악을 갚아 주겠다.」라고 말하지 말아라. 여호와야훼를 기다려라. 그가 너를 구해 줄 것이다.잠언 20:22 · 본디새김

22절은 매우 직접적인 명령입니다.

누군가 악을 당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악에 대해 직접 보복하려 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가 자기 손으로 악을 갚으려는 태도를 멈추라고 권합니다.

왜 그럴까요? 복수는 자신이 당한 악을 바로잡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신의 분노가 판단을 지배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방이 행한 악과 자신이 가하려는 보복이 얼마나 비례하는지 올바르게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잠언은 이 문제를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라는 명령과 연결합니다. 이는 악이 아무런 책임 없이 지나가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장에서 왕은 악을 키질하고, 악한 사람들을 가려내는 역할을 맡습니다(8, 26절).

따라서 개인적인 복수를 금하는 것과 공동체가 정의로운 판단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개인은 자기 분노를 최종적인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 정의를 맡은 사람은 악을 분별하고 올바르게 처리해야 합니다.

복수를 포기한다는 것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일이 아닙니다. 악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과 보응을 자신의 분노에 맡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피해자가 위험한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야 한다거나 정당한 보호와 법적 구제를 요청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사적인 보복을 금하면서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등장하는 속이는 저울

여호와야훼가 역겨워하는 것은 무게가 다른 추와 추이고, 속이는 저울은 좋지 않다.잠언 20:23 · 본디새김

10절에서 이미 두 종류의 추와 에파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 같은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에파 대신 속이는 저울이 명시됩니다.

22절은 복수를 금하고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23절은 여호와야훼께서 속이는 저울을 역겨워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공정함에 무관심하시기 때문에 복수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악과 불의를 미워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고 그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이 하나의 의도된 논증으로 배열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각각 독립적인 격언이면서도 함께 읽을 때 이러한 신학적 연결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정함은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바꾸어도 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자신의 길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사람의 발걸음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오니, 사람이 제 길을 어떻게 깨닫겠는가?잠언 20:24 · 본디새김

24절은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넓힙니다.

사람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 발걸음이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잠언은 앞에서 계획을 세우고 조언을 구하며 판단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삶의 모든 방향과 결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선택한 일이 먼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예상과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나중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본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이지만, 모든 사건의 숨겨진 목적을 인간이 반드시 나중에 알게 된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은 인간의 이해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앞의 21–23절과 연결하면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재산을 얻으려고 서두를 수 있습니다. 악을 당했을 때 보복하려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저울의 기준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이 자신의 뜻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발걸음은 여호와야훼의 다스리심 아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인간의 걸음을 다스리신다고 해서 사람이 거짓말하거나 속이는 행동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계획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그 계획이 최종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솔하게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

경솔하게 「거룩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서원한 뒤에야 따져 보는 것은 사람에게 덫이다.잠언 20:25 · 본디새김

25절은 인간의 말과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다룹니다.

여기서 ‘거룩한 것이다’라는 말은 어떤 물건이나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구별하는 선언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서원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약속하는 중요한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잠언 20:25에서는 그 책임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먼저 서원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경솔하게 말합니다. 그다음에야 자신의 약속을 검토합니다.

이 순서가 문제입니다.

중요한 약속을 할 때는 그 약속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말이 앞서 나가고 판단이 뒤따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열심도 분별 없이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치겠다는 열정이 있다고 해서 그 약속이 자동으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이라고 해서 신중함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이기 때문에 더 신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의 24절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 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충분히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서 큰 약속을 한다면, 나중에 그 약속 때문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말할 때도 가볍게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등불과 관련해, 열왕기상 11:36에서는 다윗을 위한 등불이 계속 있도록 하겠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22절은 잠언 24:29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자신이 받은 대로 상대에게 갚겠다고 말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또한 신명기 32:35에서는 보응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선언됩니다. 22절과 24절은 시편 37:5–9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길을 여호와야훼께 맡기고, 악한 사람 때문에 분노하여 스스로 악을 행하지 말며,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인간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약에서 야고보서 1:19–20은 듣기를 빠르게 하고 말하기와 분노는 더디 하라고 권합니다. 이는 잠언 20장의 신중한 말과 분노의 절제에 관한 가르침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25절의 서원에 관해서는, 민수기 30:2가 서원한 사람이 자신의 말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고, 신명기 23:21–23도 하나님께 서원한 일을 지키는 책임을 강조합니다. 전도서 5:2–6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서원을 했다면 지키라고 권합니다. 잠언 20:25는 같은 문제를 덫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다시 왕의 왕좌로, 그리고 인간의 가장 깊은 곳으로

잠언 20:26–30 본문 →

키질하는 왕과 곡식을 밟는 바퀴

지혜로운 왕은 악한 이들을 키질하고, 그들 위로 바퀴를 돌린다.잠언 20:26 · 본디새김

26절에서는 8절의 왕이 다시 등장합니다.

8절에서는 악을 가려내는 판단이 강조됩니다. 26절에서는 악한 사람들을 가려내고 실제로 처리하는 행동이 강조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바퀴는 농사에서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는 도구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잠언 20:26에서는 이런 농사 이미지를 왕의 심판에 적용합니다. 왕은 단지 악을 알아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악을 공동체에서 가려내고 다루어야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을 실제로 사람을 바퀴로 짓밟아 처형하라는 명령으로 읽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농사 도구를 사용한 비유를 통해 지혜로운 왕의 엄중한 판단과 악에 대한 조치를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처벌의 엄격함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지울 수도 없습니다.

왕의 역할은 가벼운 충고에 머물지 않습니다. 악한 행동에 실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런 권한이 자의적인 폭력을 허락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 20장은 이미 속이는 저울을 두 번 비판했습니다. 판단의 기준은 공정해야 합니다. 왕이 악을 가려내는 일 역시 자기 분노가 아니라 정의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의 숨결이 여호와야훼의 등불이라는 놀라운 표현

사람의 숨결은 여호와야훼의 등불이다. 그 등불은 배 속의 모든 방을 뒤진다.잠언 20:27 · 본디새김

잠언 20:27은 인간의 숨결이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정의하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 숨결을 여호와야훼의 등불이라고 부릅니다.

등불은 어두운 곳을 밝히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그 등불은 어디를 비출까요? ‘배 속의 모든 방’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배의 안쪽 방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을 묘사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조차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생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잠언은 그 깊은 곳을 등불이 비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서 중요한 해석상의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의 숨결 자체가 자기 내면을 살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숨결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을 살피신다는 뜻일까요? 두 방향 모두 본문의 이미지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에게는 자기 행동과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숨결이 여호와야훼의 등불이라는 표현은 인간 안에 있는 자기 성찰의 능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둘째로, 등불이 ‘여호와야훼의’ 것이라는 사실은 그 살피심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인간을 만드신 분이며, 인간의 가장 깊은 곳도 그분의 살피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인간의 숨결을 양심이라는 독립적인 기관으로 확정하거나,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특정한 영혼 이론으로 완성해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정의보다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5절과 연결하면 아름다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5절에서는 사람 마음속의 계획이 깊은 물과 같고, 분별 있는 사람이 그것을 길어 올립니다. 27절에서는 사람의 숨결이 여호와야훼의 등불로 묘사되고, 그 등불이 배 속의 모든 방을 뒤집니다. 둘 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분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9절에서 이미 누구도 자기 마음을 완전히 깨끗하게 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12절에서는 보고 듣는 능력 자체가 여호와야훼께서 만드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사람이 자기 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거쳐 27절에 이르면, 인간의 내면은 자기 자신에게도 완전히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속의 깊은 물을 길어 올리려 하지만, 그 마음의 모든 방을 비추는 등불은 여호와야훼께 속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 성찰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을 살피는 일이 왜 겸손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자신의 동기를 정직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시 살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왕좌를 붙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애와 신실함이 왕을 지키고, 그는 인애로 제 왕좌를 받친다.잠언 20:28 · 본디새김

26절에서는 왕이 악한 사람들을 키질했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는 왕 자신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것은 군대나 재산, 성벽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왕권의 본질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꿉니다.

왕은 다른 사람을 처벌할 권한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을 가려내고 공동체의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은 무엇으로 안정되는 것일까요? 잠언은 인애와 신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은 관계 안에서 약속을 지키는 충실함과 변함없는 신의를 나타냅니다.

왕은 악을 엄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왕좌가 오래 유지되는 데 필요한 것은 엄격한 처벌만이 아닙니다. 백성을 향한 인애와 신실함도 필요합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그들의 삶을 보호하고, 약속을 지키며, 공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6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친절을 내세우지만 믿음직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28절에서는 왕에게 인애와 신실함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왕이 자신을 인애로운 통치자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신실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왕좌를 지키는 것은 왕의 힘만이 아니라,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젊은이의 힘과 노인의 흰머리

젊은이들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힘이고, 노인들의 영예는 흰머리다.잠언 20:29 · 본디새김

29절은 인간의 삶을 세대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여기서 잠언은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을 서로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각각의 시기에 나타나는 좋은 점을 보여줍니다. 젊은이의 힘은 실제로 노동하고 행동하며 어려움을 감당하는 데 유익할 수 있습니다. 노인의 흰머리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흔적입니다. 잠언은 그것을 영예의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사실만으로 지혜가 자동으로 보장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젊다는 이유로 지혜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11절에서는 아이도 자기 행동으로 알려진다고 했습니다.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지혜가 특정한 나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삶은 한 시기의 능력만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잠언 20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 돌아갑니다.

매질이 배 속의 방들을 닦아 낸다는 말

상처를 내는 매질은 악을 닦아 내는 수단이고, 타격은 배 속의 방들을 닦아 낸다.잠언 20:30 · 본디새김

잠언 20장의 마지막 구절은 오늘날 독자에게 가장 어렵게 다가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닦아 낸다’는 표현은 문지르거나 닦아 깨끗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상처와 매질을 정화의 이미지와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고대 사회에서 신체적 처벌이 훈계와 교정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배경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신체적 매질을 실제로 언급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단순히 마음의 아픔이나 인생의 어려움에 관한 비유로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절을 신체적 폭력이 언제나 사람을 개선한다는 보편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매질이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에 관한 경험적 연구나 상세한 조건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또한 누구에게 어떤 강도로 매질을 해도 되는지 규정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신체적 처벌이 오히려 사람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기거나 폭력과 두려움을 강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격언 하나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현대의 아동 학대나 가혹한 체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둘째 행의 ‘배 속의 방들’이라는 표현은 27절과 이어집니다. 27절에서는 등불이 그곳을 살핍니다. 30절에서는 징계가 그곳을 닦아 낸다고 말합니다. 이 연결은 잠언 20장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큼 내면의 변화에도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두 구절의 관계를 너무 단순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27절의 등불은 내면을 살피는 이미지입니다. 30절의 매질은 강한 징계가 악을 제거한다는 고대 지혜의 관찰입니다. 본문은 이 두 행위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구절이 지닌 문학적 효과는 분명합니다. 잠언 20장은 사람의 행동과 말을 살피는 데서 시작했지만, 결국 사람의 깊은 내면에까지 관심을 기울입니다. 문제는 겉으로 잘못된 행동을 멈추는 데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을 일으킨 마음의 깊은 곳까지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친절을 자랑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믿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건이 나쁘다고 말하는 구매자도 속으로는 좋은 거래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고 서원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자신이 무엇을 약속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을 올바르게 세우려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말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말과 행동이 나오는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바퀴와 관련해, 고대에는 수확한 곡식을 타작마당에 펼쳐 놓고 타작 도구를 사용하여 낟알을 줄기와 껍질에서 분리했습니다. 이사야 28:27–28에도 곡식의 종류에 따라 다른 타작 도구를 사용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27절의 ‘숨결’은 히브리어 니쉬마트입니다. 이 낱말은 숨과 생명의 호흡을 가리키며,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결’과도 연결됩니다. 사무엘상 16:7에서 여호와야훼는 사람이 겉모습을 보지만 자신은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잠언 20:9와 27절의 주제와 깊이 통합니다. 시편 139:23–24에서도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28절의 ‘인애와 신실함’은 히브리어 헤세드 베에메트입니다. 출애굽기 34:6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인애와 신실함이 풍성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잠언 20:28에서는 바로 그 성품이 왕을 지키는 원리로 등장합니다.

배 속의 방들을 비추는 등불

잠언 20:1–30 본문 →

잠언 20장은 인간의 능력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합니다. 계획할 수 있지만 자기 길의 모든 결과를 알 수는 없습니다. 자기 마음을 살필 수 있지만 자신이 죄에서 완전히 깨끗해졌다고 선언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 속에서 잠언은 여호와야훼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분은 보고 듣는 능력을 만드셨습니다.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십니다.

인간의 발걸음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깊은 내면까지 비추시는 분입니다.

판단할 힘이 있다는 사실과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끝없이 의심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완전히 깨끗하다고 선언할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한다면, 그 판단에는 겸손과 공정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자신의 눈과 귀를 사용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그 눈과 귀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며 사용하는 삶입니다.

잠언 20장의 끝부분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왕은 악한 사람들을 키질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행동을 살피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하려 합니다.

그런데 왕의 눈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완전히 볼 수는 없습니다.

그다음 구절에서 등불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숨결이며, 여호와야훼의 등불이라고 불립니다. 그 등불은 배 속의 모든 방을 뒤집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말하지 않은 생각이 있습니다. 남에게 드러내지 않은 욕망이 있고, 스스로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스스로 완전히 깨끗하다고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잠언 20장은 바로 그 깊은 곳을 비추는 등불을 보여줍니다. 그 등불 앞에서는 왕의 권력도, 상인의 재산도, 사람의 말솜씨도 자기 마음의 온전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처럼 보이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잠언 20장의 마지막 구절은 그 내면을 닦아 내는 징계의 어려운 이미지로 끝나지만, 그 앞의 등불은 이 장 전체를 다시 읽게 합니다.

왕은 눈으로 악을 가려내고, 상인은 추로 무게를 재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등불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인간의 가장 깊은 방까지 비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